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14권, 경종 4년 1724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2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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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병자

심준(沈埈)을 집의(執義)로, 조상경(趙尙慶)을 정언(正言)으로, 강필경(姜必慶)을 교리(校理)로, 서명연(徐命淵)을 승지(承旨)로, 이진유(李眞儒)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정사효(鄭思孝)가, 원주 목사(原州牧使) 최창민(崔昌敏)이 치적(治績)과 진정(賑政)이 한 도내에서 제일이라고 장포(狀褒)하매, 이조(吏曹)에서 이를 복계(覆啓)하여 가자(加資)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1월 2일 정축

유성(流星)이 필성(畢星) 밑에서 나왔고, 또 북두(北斗) 밑에서 나왔다.

 

도승지(都承旨) 이정신(李正臣)이 입대(人對)를 청하여 대신을 돈독히 면려할 것과 윤각(尹慤)·유성추(柳星樞) 등을 안국(按鞫)001)  할 것을 아뢰어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에 앞서 좌의정 최석항(崔錫恒)·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윤각·유성추의 옥사(獄事)는 증인이 이미 죽어서 끝까지 사핵(査覈)할 길이 없으므로, 죽을 때까지 형신(刑訊)을 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며 사형을 감하여 섬으로 유배(流配)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대간(臺諫)이 간쟁(諫爭)하므로 임금이 다시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신이 인혐(引嫌)하며 선뜻 안옥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승지 등의 이러한 청이 있게 된 것이다.

 

1월 3일 무인

하교(下敎)하기를,
"8도(八道)의 감사(監司)와 양도(兩都)002)  의 유수(留守)에게 효유(曉諭)하여, 관할 내의 농상(農桑)을 잘 가르쳐 권장하고, 백성들이 동요될 만한 모든 일을 일체 제거토록 하라."
하였으니, 이는 승지 여필용(呂必容)의 청을 따른 것이다.

 

신광하(申光夏)를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김동필(金東弼)을 승지로 삼았다.

 

1월 4일 기묘

삼사(三司)에서 입대(入對)를 청하여 김성(金姓) 궁인(宮人)에 관한 일을 거듭 논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사간(司諫) 유수(柳綏)가 이시필(李時弼)에 대한 감사 정배(減死定配)의 명을 환수하고 형률대로 처단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유수가 논하기를,
"조녀(趙女) 정임(貞任)003)  이 시아버지 집에 매흉(埋凶)한 일은 강상(綱常)에 관계됩니다. 그의 종 가운데 정상을 아는 자를 처음에 사헌부에서 잡아다 가두었다가 다시 형조로 이송하였는데, 예사의 형문(刑問)으로서는 결단코 자복을 받아낼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를 포도청(捕盜廳)으로 이송하여 끝까지 사핵(査覈)하도록 하소서. 조정임을 배소(配所)로 발송할 때 형조에서 경기 감영(京畿監營)에 교부하였는데, 〈경기 감영에서〉 열흘이나 지체하다가 비로소 발송하였는가 하면, 노량진(露梁津)에 이르러서 병을 핑계로 발악(發惡)을 한 뒤에 이제 비로소 장문(狀聞)을 하였으니, 일을 지연시킴이 너무 심합니다. 청컨대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세최(李世最)를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1월 5일 경진

좌의정(左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차자(箚子)를 올려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또 말하기를,
"이시필(李時弼)이 죄를 받게 된 일은 비록 흉패(凶悖)하기는 하나, 그 정상은 의심스런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 성상께서 특별히 명하시어 사형을 감해 주신지라, 하늘과 땅이 만물을 생장(生長)하게 하는 인(仁)을 누가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대계(臺啓)로 인하여 안법(按法)하자는 청을 다시 윤허하셨으니, 법을 고집하는 자의 논리는 당연히 그래야 하나, 원래의 정상대로 죄를 정하는 것은 국가의 아름다운 법령이요, 어짊을 미루어 살리기를 좋아하는 것은 성주(聖主)의 대덕(大德)입니다. 더구나 삼양(三陽)004)  이 교태(交泰)하여 만물이 소생하매, 곤충·초목 같은 미세한 것들까지도 다 같이 흔연(欣然)히 생동할 뜻을 가지고 있는데, 만일 행여 한 지아비라도 원한을 품고 죽는 자가 있다면, 천시(天時)를 받들어 순종하는 도리에 흠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이에 유의하여 재결해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시필은 이전대로 유배지로 발송하라고 명하였다. 승정원에서 이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1월 6일 신사

사헌부(司憲府)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이시필을 유배지로 발송하라는 명을 환수하시고 다시 국청(鞫廳)에 명하여 율(律)에 의하여 처단토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1월 7일 임오

송진명(宋眞明)을 수찬(修撰)으로, 여선장(呂善長)을 교리(校理)로, 조태억(趙泰億)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삼았다.

 

1월 8일 계미

홍중우(洪重禹)를 승지(承旨)로, 조익명(趙翼命)을 헌납(獻納)으로, 윤대영(尹大英)을 장령(掌令)으로, 유엄(柳儼)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한 해 동안에 칙행(勅行)을 다섯 번이나 겪고 사사(謝使)를 네 번이나 보내었는데, 이제 또 칙사(勅使)가 나온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그에 따른 비용을 계산할 때 응당 3만 냥의 돈을 써야 하고, 어공(御供)·제향(祭享) 등에 따른 공물(貢物) 등에 내려 줄 수량도 또한 만여 냥은 넘어야 하니, 비록 본조(本曹)의 비축(備蓄)을 다 기울인다 해도 경비를 충당하기에 부족합니다. 청컨대 금위영(禁衞營)·어영청(御營廳)의 돈 2만 냥과 목면(木綿) 1백 동(同)005)  을 꾸어 쓰도록 하는 일을 비변사(備邊司)에 내리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군문(軍門)에서 비록 남은 비축이 있다 하더라도 위급한 상황에 쓸 것이므로 이를 옮겨서는 아니됩니다. 더구나 지난해 칙사가 올 때 본조에서 꾸어 간 것이 이미 3만 냥이나 되는 데도 여태 갚지 않고 있는데, 이제 또 대용(貸用)을 허용하는 것은 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칙사가 오는데 쓸 것이 매우 급하다 하니, 상례로 논할 수는 없겠습니다. 양영(兩營)의 돈 1천 냥씩과 면포(綿布) 25동씩을 청컨대 꾸어 주어서 변통하여 보충해 쓰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월 9일 갑신

권첨(權詹)을 승지(承旨)로, 이징휴(李徵休)를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정도원(鄭道元)을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로 삼았다.

 

1월 10일 을유

멀리 벽동군(碧潼郡)에 귀양가 있는 조정만(趙正萬)을 영변부(寧邊府)로 양이(量移)006)  하였다. 조정만은 소시적에 과거장(科擧場)에서 이름이 나 진사시(進士試)에 장원을 하였으나, 사람됨이 비굴하여 권문 귀족에게 빌붙어 누차 큰 고을을 맡았는데, 탐욕이 지나쳐서 만족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멀리 귀양을 가게 된 것은 무슨 뚜렷한 죄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대비(大妃)의 외친(外親)으로 본래부터 사랑을 받아온데다가 또 일찍이 김창집(金昌集)을 아첨하여 섬겼기 때문에, 당시의 의논이 의심하고 꺼린 나머지 죄를 준 것이다.

 

국청(鞫廳)에서 연일 윤각(尹慤)·유성추(柳星樞)를 형신(刑訊)하였는데, 윤각은 15차에서 그만 죽고, 유성추는 9차에 이르러 병이 위중하므로 형신(刑訊)을 정지하였다. 당초 윤각은 장수 집안의 아들로서 외방의 곤수(閫帥)직을 두루 거쳐 재망(才望)이 있었고, 유성추는 관직 생활이 청렴·검약하여 사욕을 취하지 않았는데, 윤각이 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과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끌려들었고, 유성추 역시 이건명에게 붙었다가 김창집이 죽자 이로써 화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은(銀)을 내어 모역(謀逆)하였다는 일은 증인이 이미 죽어서 무엇에 의거하여 증언을 들을 수가 없고 보면, 대신이 처음에 참작해 처리할 것을 청한 것이 옥사(獄事)를 신중히 하는 도리에 해로울 것이 없었는데, 대간(臺諫)의 논쟁으로 왕명이 번복되어 대신이 다시 국문(鞫問)을 담당하여 곤장 밑에서 죽은 뒤에야 그만두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대신이 자기의 소신을 굳게 지키지 못한 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1월 11일 병술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서 백관의 조참(朝參)007)  을 받았는데,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청하기를,
"전조(銓曹)를 신칙하여 오랫동안 정체된 영남(嶺南)의 인재를 발탁하고, 서북의 문관(文官)·무사(武士) 중에 재질과 문지(門地)가 있는 자는 모두 청환(淸宦)의 길을 터 주어 등용하게 하소서. 대사성 이진유(李眞儒)는 직무(職務)에 심력을 다하여, 선비들이 유풍(儒風)에 쏠려 정돈되는 효과가 제법 드러나고 있습니다. 청컨대 선조(先朝)의 사례에 따라 비록 다른 관직으로 옮기더라도 늘 본직(本職)에다가 대사성을 겸임케 하여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책임을 이루도록 하소서. 승문원(承文院)은 참하관(參下官)이 적체되어 있습니다. 임인년008)   과방(科榜) 이전에 출신(出身)009)  한 승문원 관원을 모두 서반(西班)으로 보내어 6품으로 올려 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수령(守令)은 백성을 친근히 하는 관원이므로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좌의정 최석항(崔錫恒)이 말하기를,
"이는 백성을 안정하게 하고 나라를 굳건히 하는 논의입니다. 요즘에 문관을 수령으로 내보내어 외방의 민사(民事)를 익혀 알도록 하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나, 채 한 해도 못 되어 문득 곧장 내직(內職)으로 옮겨서 오래도록 맡겨서 책임을 이루려는 뜻이 없고 영송(迎送)하는 데 따른 폐단만 끼칠 뿐입니다. 마땅히 이제부터는 법식을 정하여 2주년 안에는 이동(移動)을 허락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연(金演)이 말하기를,
"경비는 고갈(枯竭)되고 저축은 탕진(蕩盡)되었으니, 참으로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청컨대 돈을 주조(鑄造)하는 것이 마땅한가 않은가를 대신에게 물어 보소서."
하자, 최석항·이광좌가 다 같이 말하기를,
"신들도 일찍이 이 일을 안된다고 하였으나, 이제는 호조(戶曹)의 저축이 고갈되어 당장 이어 가기가 어려우니, 앞으로 일체 막을 수만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좌참찬(左參贊)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선조(宣祖)의 왕손 회원군(檜原君) 이윤(李倫)이 나이 이제 89세이니, 마땅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별도로 시행하여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부사과(副司果) 이진수(李眞洙)가 반열에 나아가 아뢰기를,
"대신(大臣)은 인주(人主)의 수족(手足)이고 대간(臺諫)은 인주의 이목(耳目)인데, 만약 서로 저항만을 한다면 이는 아름다운 현상이 못됩니다. 그런데 국옥(鞫獄)이 있은 이후로 대신과 대간이 마치 대립해 겨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마땅히 서로가 정신을 모아서 서로 과격한 일이 없도록 하고, 전하께서도 그 양단(兩端)을 잡아서 대간의 말이 옳으면 대신을 개유(開諭)하여 대간의 말을 따르도록 하고, 대신의 말이 옳으면 대간을 개유하여 대신의 말을 따르도록 한다면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 근래에 더러는 아침에 대신의 말을 듣고 따랐다가도 저녁에는 대간의 말을 듣고 고치는 등 한 가지의 일을 놓고 따랐다 거절하였다 하는 일이 두세 번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바로 뭇 신하들이 정당한 표준이 없어서 의논만 분분하여 갈수록 서로 격화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이진수가 또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한 번 늦추고 한 번 당김이 각기 그 마땅함이 있어야 합니다. 형살(刑殺)이 있은 뒤에는 반드시 관인(寬仁)으로써 구제하여야 하고, 눈과 서리가 내린 뒤에는 반드시 따스한 봄날이 이어지듯이, 이제 국옥(鞫獄)을 거의 다 결말을 지었으니 마땅히 하늘을 본받는 정사를 펴야 합니다. 더구나 천시(天時)가 바야흐로 정월(正月)로 새 봄에 속한 만큼, 인사(人事) 역시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펴야 합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관대하고 인자한 덕을 힘써 베풀어서 백성을 휴양(休養)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그리고 근래 탄핵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도 관대한 뜻을 점차 보이도록 하소서. 대개는 이들이 흉당(凶黨)의 문에 드나들다가 더러는 흉당과 혼인을 함으로 해서 논박을 받은 자가 매우 많은데, 역절(逆節)이 발로되기 전에야 그가 역적임을 어떻게 알고 그들을 거절하겠습니까? 무변(武弁)이 당시의 재상집에 드나드는 것은 곧 예사로운 일인데, 간혹 그 종적이 의심스러운 데가 보인다하여 동료들이 서로 헐뜯음으로 해서 이에 ‘아무개 적(賊)과 친밀하여 종적(蹤跡)이 은밀스러웠다.’ 하며, 일필(一筆)로 결단하여 헤아릴 수 없는 곳으로 몰아넣으니, 어찌 너무나도 억울하고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성명(姓名)이 국초(鞫招)에 나오지 않아 죄상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자는 비록 일찍이 무거운 탄핵을 받은 적이 있다 하더라도 일체 구속하지 말고 이전대로 거두어 써야 타당하다고 보며, 또한 대각(臺閣)의 신하로 하여금 밝히기 어려운 일은 가벼이 논하지 말게 하여 조정의 충후(忠厚)한 뜻을 본받게 하도록 하소서.
외방(外方)의 유생(儒生)에 있어서는 비록 평상시에도 논의(論議)의 파문에 따라 해괴한 거조가 없지 않은데, 삼수(三手)010)  의 음모(陰謀)를 어떻게 사람마다 다 알 수 있기에 근일 향교와 서원에서 시기를 타고 죄를 성토하며 죄벌(罪罰)과 삭적(削籍)이 분분하여 사습(士習)이 평온하지 못하고 인심이 진정되지 않는 것은 유달리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진실로 의당 각도의 관찰사에게 분부하여 유생들을 타일러서 안정에 힘쓰고 분요(紛擾)함이 없게 하도록 해야 됩니다.
서원(書院)의 폐단은 의논하는 자들이 말해 온 지가 오래나, 근래에 와서 여러 고을에 서원을 세우지 않는 곳이 없고 서원치고 사액(賜額)을 걸지 않은 곳이 없는데, 이미 향민(鄕民)의 병정 편입을 모면하는 곳이 되었는가 하면, 또 수령이 수레를 보내어 물자를 보조하여야 하는 폐단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무식한 선비들이 여기에 의부(依附)함을 빙자하여 서로 수탈을 일삼아 하나의 싸움터가 되고 있는지라, 지식이 있는 자는 그윽이 개탄하고 있습니다. 비록 경화(更化) 이후의 일로 말하더라도 이를테면 선정신(先正臣) 윤증(尹拯)의 도덕과 학문은 조정에서 높이 보답하는 도리에 있어, 한 곳이라도 서원을 건립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또한 여러 곳에 중첩해 세워서 폐단을 끼쳐서도 아니됩니다. 더구나 도학이 윤증에게 미치지 못하고, 또 드러낼 만한 절의(節議)도 없는 자라면 비록 조정에서의 사업과 가정에서의 학행(學行)이 있다 한들, 어떻게 쉽사리 사액을 내려 사전(祀典)의 소중함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해마다 연거푸 흉년이 들어서 마을마다 시름과 고통속에 있는데도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곤란을 구제하고 백성들의 힘을 펴 줄 만한 한 가지의 사안, 한 가지의 계책도 아직 세우지 못한 채, 서원이란 아무 보탬도 없는 일일 뿐 막기 어려운 폐단만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는 요청만 해오면 문득 허락해 주곤 하니, 신은 적이 개연(慨然)해 하는 바입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서는 유종(儒宗)이나 사절자(死節者)가 아니면 비록 이미 사액한 서원일지라도 그것을 일체 환수하고, 아직 사액하지 않은 서원은 이를 방지하며, 비록 윤증 같은 이의 서원일지라도 한 곳만 사액하고 그 외에는 역시 중첩된 설립은 금지함이 옳습니다."
하였다. 대사성(大司成) 이진유(李眞儒)가 이어 말하기를,
"윤증의 서원을 충주(忠州)·여산(礪山)·성주(星州)·밀양(密陽) 등지에 중첩하여 설립하였으니, 국가의 법령이 아주 준엄하거늘 선비들이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3도의 관찰사에게 분부하여 철훼(撤毁)한 뒤에 장문(狀聞)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진유·박필몽(朴弼夢) 등이 조정의 의논을 주도하면서 옥사(獄事)를 다스리고 사람을 논박함에 있어 참혹하고 각박한 쪽으로 주력하였으나, 유독 이진수(李眞洙) 만은 이를 걱정하여 너그럽고 공평한 논의를 펴므로, 식자(識者)가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윤취상(尹就商)을 체직(遞職)시키고 어영 대장(御營大將) 김중기(金重器)를 대신 임명하라고 명하였다. 윤취상은 음흉하고 사나우며 시기하는 마음이 많아서, 신임 사화(辛壬士禍)를 당했을 무렵에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등과 서로 결탁하여 당(黨)을 짓고 형찰(詗察)을 주관하여 많은 불평분자를 제거하였는지라, 시론(時論)이 비록 중히 여기기는 하였으나 식자는 간혹 그가 김일경·박필몽과 꾀를 모아 동궁(東宮)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였다. 정언(正言) 이광세(李匡世)가 윤취상의 조카 윤각(尹慤)이 한창 역옥(逆獄)에 연루되어 국문을 받고 있는 것을 구실로 삼아 윤취상은 장수의 직임에 둘 수 없다고 논핵(論劾)한 바 있는데, 이에 이르러 대신이 윤취상을 위하여 임금 앞에서 신리(伸理)011)  를 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거둥이 임박하였기 때문에 아뢰어 체직하였던 것이다.

 

1월 12일 정해

밤에 달무리가 졌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유엄(柳儼)이다.】 에서 아뢰기를,
"포도청에서 위비(僞批)를 전파(傳播)한 사람 조태려(趙泰呂)를 벌써 체포하였는데도, 당사자(當事者)가 고의로 회피하여 형조에 이송하였으니, 청컨대 포도 대장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이어 본청으로 하여금 조태려를 엄중히 사핵(査覈)하여 실정을 얻어 내도록 하소서. 연산 현감(連山縣監) 박태석(朴泰錫)과 영춘 현감(永春縣監) 이만식(李萬植)은 용렬하고 어리석으며 비루하고 패악한데도 권문(權門)에 빌붙어서 함부로 고을을 맡은지라, 사람들이 다 비웃고 손가락질을 하니, 청컨대 모두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조진희(趙鎭禧)이다.】 에서 논하기를,
"지난해 유부기(兪阜基)가 배천(白川) 통인(通引) 조중로(趙重老)를 장살(杖殺)하였는데, 유부기의 장인(丈人) 윤득인(尹得仁)이 그 당시 마침 본고을 원으로 있으면서 조중로의 아버지를 위협하여 사문(査問)할 적에 고한(辜限)012)  이 끝난 뒤에 죽은 것으로 거짓 고백하도록 하는가 하면, 형조에서 재차 안핵(按覈)하던 날에는 유부기가 또 온갖 공갈을 다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길을 막았습니다. 지난 선조(先朝) 때는 어느 찰방(察訪)의 아들이 역비(驛婢)에게 태형(笞刑)을 가하여 죽였다고 하여 마침내 그 댓가로 죽임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오늘날 유부기는 권세를 끼고 얼버무렸기 때문에 끝내 옥사(獄事)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다만 죽은 자만 원한을 품을 뿐 아니라 금석(金石) 같은 법전이 이로부터 폐지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별도로 어사를 보내어 안핵하여 처단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삼(李森)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이봉상(李鳳祥)을 총융사(摠戎使)로, 오명준(吳命峻)을 판윤(判尹)으로, 윤순(尹淳)을 집의(執義)로, 신후삼(愼後三)·정계장(鄭啓章)을 장령(掌令)으로, 여필용(呂必容)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월 13일 무자

임금과 세제(世弟)가 태묘(太廟)에 알현하였다.

 

임금이 창경궁(昌慶宮) 통명전(通明殿)으로 이어(移御)하였다.

 

1월 14일 기축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논하기를,
"유성추(柳星樞)의 범죄는 윤각(尹慤)과 다름이 없는데도 윤각은 형장을 맞아 죽고 유성추는 참작해서 처리하였으니, 죄는 같은데도 형벌이 달라서 용법(用法)이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그대로 국문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포도 대장 및 박태석(朴泰錫)·이만식(李萬植)에 대한 아룀만 윤허하였다.

 

1월 15일 경인

달이 헌원(軒轅)의 제2성(第三星)을 범하였다.

 

대신(大臣) 및 의금부(義禁府)의 당상(堂上)이 모두 유성추(柳星樞)를 참작하여 처리한 일로 간관(諫官)의 지척(指斥)을 받았다 하여 소(疏)를 올려 사직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광보(李匡輔)·윤용(尹容)을 지평(持平)으로, 조석명(趙錫命)을 수찬(修撰)으로, 이현장(李顯章)을 부교리(副校理)로, 윤성시(尹聖時)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만선(李萬選)을 승지(承旨)로, 이수량(李遂良)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

 

1월 16일 신묘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정계장(鄭啓章)이다.】 에서 논하기를,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이재항(李載恒)은 이홍술(李弘述)의 지친(至親)으로서 이이명(李頤命)의 친밀한 비장(裨將) 노릇을 하여 그 행적이 비밀스러워서 온 세상이 지목하고 있는데도, 갑자기 곤임(閫任)013)  에 발탁되어 물정(物情)을 크게 거슬리고 있으며, 관직에 임하여 탐욕스럽고 비루한 짓은 단지 그의 여사(餘事)입니다. 청컨대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19일 갑오

황해도 서흥현(瑞興縣)에 지진하였다.

 

1월 20일 을미

신치운(申致雲)을 지평(持平)으로, 조석명(趙錫命)을 헌납(獻納)으로, 조익명(趙翼命)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사성(李思晟)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1월 21일 병신

김상규(金尙奎)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1월 22일 정유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윤용(尹容)이다.】 에서 논계하기를,
"전(前) 평안 병사(平安兵使) 김수(金洙)가 시방 잡혀옴으로 해서 북병사(北兵使) 이수량(李遂良)을 대신 임명하고, 북병사는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사성(李思晟)을 대신 임명하고, 회령 부사는 황해 병사(黃海兵使) 조세망(趙世望)을 대신 임명케 하였습니다. 이러자면 형세상 조세망이 병부(兵符)를 반납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하는데, 차례차례 교대를 하려면 서울에서 회령(會寧)까지는 2천 리가 넘고 회령에서 북병영(北兵營)까지도 많은 날짜가 걸리며, 북병영에서 평안 병영(平安兵營)까지가 또 2천여 리나 됩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이수량의 도임(到任)은 어느 달 어느 날짜에 이루어질지 모릅니다. 이는 서곤(西閫)이 오랜 동안 비게 될 것을 특별히 염려하신 그 본의가 아닙니다. 이사성·이수량·조세망 등을 차례차례 그대로 유임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23일 무술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윤용(尹容)이다.】 에서 논하기를,
"헌릉 참봉(獻陵參奉) 이덕수(李德秀)는 하는 일이 비루하고 잗단 사례가 많으며, 형벌이 엄격하고 가혹함을 숭상하여 원망을 초래하고 소문을 놀라게 합니다. 청컨대 태거(汰去)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24일 기해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윤용(尹容)이다.】 에서 논하기를,
"경상도 관찰사 이세근(李世瑾)은 의상을 장식함이 거의 부녀자의 모양새와 같고 외모를 꾸미는 것이 전연 사대부(士大夫)의 풍미(風味)가 없는데다 성격이 본시 까다롭고 세밀하여 지나치게 살피는 것을 현명한 것으로 여기고, 처사가 대개 각박하게 사핵(査覈)하는 일이 많으며 혹독한 것을 위엄으로 여깁니다. 청컨대 파직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25일 경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윤용(尹容)이다.】 에서 논하기를,
"경릉 참봉(敬陵參奉) 송수일(宋秀一)은 용렬하고 어리석어서 하자와 비방이 많고, 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 이하범(李夏範)은 그 처신과 사람됨이 사대부의 풍습이나 관원의 모양이 없습니다. 청컨대 모두 태거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의금부에서 위비 옥사(僞批獄事)에 연루된 사람 전(前) 현감(縣監) 이경(李坰)을 국청(鞫廳)으로 이송할 것을 청하니, 대신(大臣)이 아뢰기를,
"이러한 일로 국청을 설치한 전례가 없습니다. 청컨대 다시 본부로 하여금 사핵(査覈)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允許)하였다.

 

1월 27일 임인

햇무리하였다.

 

송진명(宋眞明)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조익명(趙翼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김동필(金東弼)을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이정신(李正臣)을 강원 감사로, 구봉창(具鳳昌)을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구후익(具後翼)을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한범석(韓範錫)을 좌수사(左水使)로, 남익화(南益華)를 황해 수사(黃海水使)로 삼았다.

 

1월 28일 계묘

윤성시(尹聖時)를 응교(應敎)로, 조태억(趙泰億)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황이장(黃爾章)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이제(李以濟)를 장령(掌令)으로, 이정제(李廷濟)를 전라 감사로 삼았다.

 

전(前) 찬선(贊善) 이희조(李喜朝)가 귀양길에서 졸(卒)하였다. 이희조는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의 아들인데, 소시적에 과거 공부를 폐지하고 거유(巨儒)의 문하에 드나들어서 당시에 이름이 있었고, 만년에는 조정에서 유현(儒賢)으로 대우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실용(實用)의 학문은 없고 다만 글씨와 편지에 능숙하고 민첩하여 잠깐 사이에 수천 글자의 글을 초(草)해 내어도, 그 사연이 곡진할 따름이다. 송시열(宋時烈)이 윤증(尹拯)과 사이가 나빠지자 이희조는 일생 동안 혈성(血誠)을 기울여 송시열을 보호하므로, 윤증의 일당이 몹시 미워하였는데, 나중에는 신구(申球)를 사주하여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을 소론(疏論)토록 하여 그 판각(板刻)을 헐게 한 뒤에 그만두었다. 드디어 당쟁의 화가 하늘에 치닿게 되자, 식자(識者)들이 더욱 이로써 이희조를 죄인시하였다. 임인년014)  에 남쪽 변방으로 유배된 것을 이때 와서 이진유(李眞儒)가 다시 서쪽 변방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는데, 이희조가 이미 늙고 병이 들어서 유배지에 채 이르기도 전에 중도에서 죽었다. 이진유의 소행도 너무 심함이 이와 같은지라, 사람들이 눈을 흘기지 않음이 없었다.

 

1월 29일 갑진

수찬(修撰) 권두경(權斗經)이,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역적 토벌을 늦춘다 하여 소(疏)를 올려 극력 지척하니, 그 소를 궁중에 머물러 두고 비답하지 않자, 이광좌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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