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14권, 경종 4년 1724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22.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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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을사

원접사(遠接使) 김일경(金一鏡)이, ‘반조(頒詔)하러 나오는 칙사(勅使)가 지난달 26일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는데, 그의 부사(副使)는 병에 걸려서 심양(瀋陽)에 머무르고 있다.’고 치계(馳啓)하였다.

 

2월 2일 병오

정언(正言) 유엄(柳儼)이 상소하여 ‘권두경(權斗經)이 올린 상소에서의 질병을 바로 가리켜 섬미(譫謎)라고 한 것은 그 불경(不敬)함이 거의 이시필(李時弼)과 같다.’고 지척(指斥)하니, 지평(持平) 윤용(尹容)이 말하기를,
"권두경이 올린 상소는 그 사용한 말이 참으로 망령되어 사람의 눈에 거슬리기는 하나, 이는 무심코 쓴 것이 착오를 범한 것이지 부도(不道)한 속셈에서 나온 것이 아닌 듯한데, 어찌 기어코 상궁(上躬)에 저촉된 말로 고집하여 죄를 이루어 사람을 망측한 곳으로 몰아넣어야 되겠습니까? 이와 같은 언론은 오류(誤謬)를 면할 수 없습니다."
하고, 유엄을 체직시킬 것을 아뢰어 청하였다. 또 논하기를,
"조석명(趙錫命)·이현장(李顯章)이 새로 전랑(銓郞)015)  의 의망(擬望)에 통과된 것은 모두가 뜻밖이어서 물정(物情)이 불평을 합니다. 청컨대 이조(吏曹)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조상경(趙尙慶)이다.】 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다섯 가지 일을 새로 논계(論啓)하였는데, 그 첫 번째에는 논하기를,
"여러 도(道)의 장문(狀聞)과 시종신(侍從臣)의 연주(筵奏)로 민사(民事)에 관계되는 것을 비변사에 내려보냈는데도 즉시 복주(覆奏)하지 않습니다. 청컨대 비변사 당상을 추고(推考)하소서."
하고, 그 두 번째에는 논하기를,
"지난해는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로 인하여 농사가 큰 흉년이었는데도, 유사(有司)가 경비를 아끼고 급재(給災)를 많이 주지 않아서 소민(小民)의 원망 소리가 소란스럽습니다. 이제 전정(田政)이 이미 마감되어 다시 실태를 조사하기도 어려우니, 청컨대 재해(災害)가 가장 심한 고을은 봄에 바칠 대동미(大同米)를 두 말[斗]씩 감해 주고, 그 다음 고을은 한 말씩을 감하여 주게 하소서."
하고, 그 세 번째에는 논하기를,
"호서(湖西) 지방은 수재(水災)가 더욱 심하였는데, 유사(有司)가 재결(災結)이 너무 많다 하여 방금 재차 조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전안(田案)이 이미 마감되고 봄갈이가 벌써 박두하였는데, 진실로 실지의 결수(結數)를 더 찾아 내려고 든다면 이는 백지에서 다시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어찌 성명(聖明)이 위에 계신데 이처럼 백성을 속이는 일을 하겠습니까? 청컨대 호서 지방의 재결을 다시 조사하라는 명을 속히 정지하소서."
하고, 그 네 번째에는 논하기를,
"호남(湖南)의 여러 고을에 진휼(賑恤)을 실시하던 날, 영문(營門)의 전곡(錢穀)을 꾸어다가 반이 넘게 가져다 쓰고 그 나머지 수량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그 이식(利殖)을 갑절로 받아들여 상환할 본수(本數)를 채운지라, 백성들이 다 흩어져 떠나버리고 남아 있는 자가 거의 없어서 형편상 이웃이나 친척에게 받아내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조세(租稅)나 조적(糶糴)016)  과는 차이가 있는 만큼 변통의 도리가 없을 수 없다고 하니, 청컨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햇수가 오래 되어 바치기 어려운 자를 조사해 밝혀서 감하여 주도록 하고, 다른 도, 다른 고을에도 이러한 폐단이 있으면 또한 일체 감하여 주소서."
하고, 그 다섯째에는 논하기를,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 등이 살던 집을, 청컨대 유사로 하여금 속히 철거하고 그 자리에 웅덩이를 파게 하여 신명(神明)과 사람들의 울분을 시원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비변사 당상의 추고와 대동미의 감면과 호남 진휼곡(賑恤穀)의 탕감 등의 청만 따랐다.

 

2월 4일 무신

사간원에서 논하기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이태망(李台望)은 늙고 혼미한데다가 오로지 탐욕만 일삼아 왔으며, 또 촉석루(矗石樓) 세우는 것을 빙자하여 사대부 집 묘역의 나무까지 베어 오고 각 고을의 중들을 불러다 부리므로, 소란스런 백성들의 원망의 소리가 마치 난리를 만난 것같다 합니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연(金演)은 본시 재국(才局)이 모자라서 전에 이 직임을 맡았을 때 이미 물정(物情)의 불만을 산 것이 많았는데, 재차 임명됨에 미쳐서는 또 다사(多事)한 때를 만나 요구하고 수응할 것이 너무 많으니, 인품과 기량이 걸맞지 않습니다. 청컨대 이태망은 파직하고, 김연은 체직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2월 5일 기유

밤에 달무리가 졌는데 무지개와 같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조상경(趙尙慶)이다.】 에서 아뢰기를,
"윤증(尹拯)의 도학(道學)은 오늘날 유학(儒學)의 종사(宗師)가 되는지라, 그의 장구(杖屨)가 거쳐간 곳마다 앞다투어 서원(書院)을 세워 제향(祭享)을 받드는 것은 학문을 숭상하는 교화에 보탬을 준 것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중첩된 설립을 금지하라고 함으로 해서 이미 설립된 서원을 훼철하자고 의청(議請)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경상(景像)의 참담함과 거조(擧措)의 그릇됨이 어떠하겠습니까? 이황(李滉)의 서원은 많게는 10여 곳에 이르고, 다른 선현(先賢)의 서원도 중첩으로 설립된 곳이 매우 많은데, 이제 과연 모두 서원을 헐어 제향(祭享)을 철폐해 버리고 한 곳씩만 둔다는 것입니까? 주희(朱熹)017)  의 자취는 우리 해동(海東)에 미친 적이 없는데도, 서원이 두어 곳이나 됩니다. 더구나 이 한 강토 안에서 친히 그 덕화(德化)를 입은 자로서야 어떻게 그 덕을 사모하는 정성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사기(士氣)의 저상(沮喪)과 유화(儒化)의 붕괴(崩壞)가 반드시 오늘날 이러한 처사로 말미암아 벌어지지 않을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윤증의 서원은 이미 건립된 것까지 훼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서원의 폐단이 오늘날에 와서 극도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참으로 중첩된 설립을 금지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당시 사람들이 존상(尊尙)하는 이의 서원부터 먼저 훼철(毁撒)하고 나서야 법령이 시행되고 인심이 복종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진수(李眞洙)와 이진유(李眞儒)가 탑전(榻前)에서 건청(建請)하게 된 배경이다. 대저 두 사람은 평일에 윤증을 그렇게도 사모하던 처지로서, 어찌 그의 도학이 서원에 제향하기에 부족하다는 뜻에서 이렇게 말하였겠는가? 조상경(趙尙慶)이 서원을 중첩해 봉향(奉享)하는 것으로써 윤증을 높이고자 하는 생각만 해도 벌써 잘못인데, 심지어 주자나 이황에 비기려고까지 하였으니, 또한 지나친 생각이라 하겠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윤용(尹容)이다.】 에서 논하기를,
"부제학(副提學) 이사상(李師尙)은 평생의 행실이 ‘탐비(貪鄙)’ 두 글자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영남 감영(監營)에서 돌아올 적에는 막비(幕裨)들이 장물(贓物)을 교부하라는 독촉을 받은 바 있고, 호남 관찰사로 부임도 하기 전에 저리(邸吏)가 먼저 요첩(妖妾)의 요구에 곤욕을 치른 바 있습니다. 이처럼 뇌물을 좋아하다 보니 부끄러움을 모르는 모리배(謀利輩)의 이름이 추천장에 오르고, 이욕(利慾)에 마음을 쏟다 보니 시정(市井)의 거간꾼들이 어깨를 비비며 문정(門庭)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김동필(金東弼)·이진수(李眞洙)의 일을 소론(疏論)한 것도 더러는 모함하는 데 가깝고 더러는 날조하는 데 가까워서 그 마음씀이 아름답지 못하고 글을 쓰는데도 편벽되었습니다. 청컨대 관작을 삭탈하소서."
하였다. 김일경(金一鏡)이 폭위(暴威)를 떨친 이래로 사류(士類) 가운데 조금이나마 자기 절조(節操)를 지키고자 하는 자는 다 김일경과 손을 떼려고 하였다. 완론(緩論)과 준론(峻論)이 이미 임인년018)   봄에 갈래가 졌거니와, 계묘년019)  에 반교문(頒敎文)에 나옴에 미쳐서는 김일경의 반역의 심장(心腸)이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나 유봉휘(柳鳳輝)·이진유(李眞儒)·이명언(李明彦)의 무리가 신축년020)   역적 토벌에 김일경이 공을 세웠다며 두둔을 하고 나오므로 이광좌(李光佐) 등 여러 사람들이 비록 김일경과 사이가 벌어지기는 하였어도 그나마 유봉휘의 무리들 때문에 드러내 놓고 그의 잘못을 말하며 거절하지 않았으며, 나이 젊은 사류(士類) 중에 비록 김일경의 죄상을 성토(聲討)하려는 자가 있어도 형세가 고단(孤單)하여 또한 감히 발설을 못하였다. 그러다가 김동필(金東弼)이 한 번 소를 올려 선수를 치자 이진유·이명언의 무리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서 김동필을 배척하여 그를 지방 고을로 전보시키기까지 하니, 이로부터 김일경의 세력은 더욱더 확장되어 누구도 감히 힐문(詰問)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광좌(李光佐)는 조야(朝野)의 무거운 신망을 받고 조태구(趙泰耉)가 죽고부터 국정의 권력을 잡아 은연중에 사림(士林)의 종주(宗主)가 되었으므로, 김일경의 무리들이 그를 깊이 시기하였다. 이에 이르러 이사상(李師尙)이 김일경의 혈당(血黨)으로서 부제학이 되자 상소하여 이광좌를 배척하고 이정제(李廷濟)·서명균(徐命均) 등을 높이 등용하며, 또 조녀(趙女)의 옥사(獄事)를 빙자하여 김동필을 질문(質問)할 것을 청하여 괴롭히는 한편, 이진수가 조참(朝參)에서 관대히 처리하자고 아뢴 말을 역적을 두둔하는 처사라고 배척하여 한 무리의 선류(善類)를 배제하고자 하므로, 윤용이 그를 미워한 나머지 이렇게 아뢴 것이다.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이 졸(卒)하였는데, 임금이 하교하기를,
"관(官)에서 초종(初終) 장례(葬禮)를 치루게 도와주고 녹봉은 3년을 한정하여 그대로 주어서 선조(先朝)의 뜻을 표시하라."
하였다. 혼은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손자이다. 숙종 기미년021)  에 흉인(凶人)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자가 있다고 무고하여 그의 아우 이황(李煌)과 함께 옥에 갇혔었는데, 숙종이 그의 억울함을 알고 사형에서 관대하게 용서하여 제주도에 귀양보냈다가 곧바로 풀어주고 총애하기를 옛과 같이 하였다. 그러므로 혼도 근신하고 자중하였는데, 만년에는 돌보아 대우함이 더 한층 융숭하여 여러 왕족 가운데 감히 바라볼 자가 없었다. 이에 이르러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이러한 하교가 있었다.

 

2월 6일 경술

좌의정 최석항(崔錫恒)·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이사상(李師尙)의 소척(疏斥)을 받았다는 이유로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임금이 따뜻한 말로 타이르며 위로하였다. 또 도승지 이만선(李萬選)이 객사(客使)가 장차 북경(北京)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대신들이 다 인입(引入)022)  하였다 출사(出仕)하도록 면려할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기를,
"정언(正言) 조상경(趙尙慶)이 의논드린 바 대동미(大同米)를 반으로 감해 주자는 일은 그 혜택이 도리어 전지의 결수(結數)가 많은 부유한 백성에게만 미치고, 전지의 결수가 적은 궁핍한 백성에게는 감면해 주는 것이 한두 되[升]의 쌀에 지나지 않는지라 혜택도 못 되면서 한갓 실결(實結)만 축나게 됩니다. 청컨대 시행치 말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8일 임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이이제(李以濟)이다.】 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논계하기를,
"김제(金堤)와 만경(萬頃)에 정배(定配)한 죄인 김시철(金時喆)·김시눌(金時訥) 등이 가고 머무르는 것을 임의로 하여 사사로이 오가는데도, 수령(守令)으로 있는 자가 제대로 금단(禁斷)을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김제 군수 이존도(李存道)와 만경 현감 김익겸(金益謙)을 모두 파직하고, 김시철과 김시눌은 외딴 섬으로 유배하소서."
하고,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의 논계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안악 군수(安岳郡守) 황명석(黃命錫)은 본시 재능이 모자라는데다 나이도 노쇠(老衰)하고, 경산 현감(慶山縣監) 이정량(李廷亮)은 토색질만을 일삼아서 징렴(徵斂)이 끝이 없다고 합니다. 청컨대 모두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유만중(柳萬重)을 승지(承旨)로, 조익명(趙翼命)을 부교리(副校理)로, 윤성시(尹聖時)를 집의(執義)로, 유봉휘(柳鳳輝)를 판의금부사(判義柰府事)로, 권이진(權以鎭)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삼았다.

 

2월 9일 계축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입대(入對)를 청하여 말하기를,
"정경(正卿)023)  이 될 만한 인재가 부족하여 김일경(金一鏡)이 두어 달 동안 원접사(遠接使)로 재차 의주(義州)에 가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칙사(勅使)가 돌아갈 적에는 이조 참판 심수현(沈壽賢)을 직질(職秩)을 올려서 반송사(伴送使)로 차출하여 보내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돈을 주조(鑄造)하는 일을 신은 본시 시행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는데도 지난번에 호조(戶曹)에서 건청(建請)하였고 형세가 만부득이하기 때문에 허락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듣건대 동철(銅鐵)이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적어서 모두 사들여야 된다고 합니다. 이 계획이 본시 구급(救急)의 목적에서 나온 것인데, 먼저 허다한 물력을 사들임으로 해서 무역이 확장된다면 눈앞의 지탱하여 조절해 가는 데 반드시 큰 피해가 있을 것입니다. 돈 주조하는 일을 파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장령(掌令) 이이제(李以濟)가 같이 입대하여 논계(論啓)하기를,
"충청 병사(忠淸兵使) 구봉창(具鳳昌)은 이적(頤賊)024)  의 밀비(密裨)로서 개기(改紀) 이후 당세에 벼슬길이 막히자 어두운 밤에 출몰(出沒)하며 그 종적이 수상하였는데, 본직을 제수받게 되자 물정(物情)이 모두 놀라와합니다. 청컨대 파직케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연(金演)이 대간(臺諫)의 논박을 받고 출사(出仕)하지 않으므로 대신(大臣)이 체직시키자고 계청하니, 조태억(趙泰億)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유봉휘(柳鳳輝)가 상소하기를,
"전랑(銓郞)에 새로 통망(通望)된 두 사람025)  은 처지나 명예나 여론이 반드시 남에게 뒤떨어질 것이라곤 보지 않습니다. 이사상(李師尙)은 구차스런 지론(持論)을 펴고자 하지 않아서 더러는 과격하게 구는 것이 병통인데, 문인(文人)이란 본래 소활(疎濶)하여 스스로 검속(檢束)하는 면이 조금 모자랍니다. 그러나 ‘탐비(貪鄙)’ 두 글자에 이르러서는 너무도 거리가 멉니다. 헌신(憲臣)이 어떻게 그의 평생을 이처럼 용이하게 잘라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 주의(注擬)가 다 신의 손에서 나왔으니, 어떻게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을 체직하여 대간의 의논을 소중히 하소서."
하니, 임금이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2월 11일 을묘

청사(淸使)        일등백(一等伯)        흠배(欽拜)가 서울에 들어왔는데, 임금과 세제(世弟)가 서교(西郊)에 나가서 칙사(勅使)를 영접한 다음, 돈의문(敦義門)을 통하여 먼저 환궁하였다가 칙사가 인정전(仁政殿)에 이르자 임금이 의식에 따라 조칙을 받았다. 백관이 궁정에 차례대로 늘어서고 독칙관(讀勅官)이 조칙을 선포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詔)하노라. 《효경(孝經)》에 이르기를, ‘효도는 아버지를 존엄히 받드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아버지를 존엄히 받듦은 하늘에 배합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라고 하였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오직 성인이어야 상제(上帝)에게 제사할 수 있고, 효자라야 어버이에게 제사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성조(聖祖) 인황제(仁皇帝)는 동(動)은 건건(乾健)에 부합되고 정(靜)은 곤원(坤元)에 배합된다. 광대(廣大)하고 고명(高明)하시어 무사(無私)함을 신봉하여 교화(敎化)를 이룩하였고, 함홍(涵弘)하고 청목(淸穆)하시어 지교(至敎)026)                  를 폄에 있어 시운(時運)을 타셨도다. 황극(皇極)027)                  을 세워 모유(謨猷)를 펼치시매 강유(剛柔)를 아울러 이루었고, 건원(乾元)을 본받아 제도를 세우시매 인의(仁義)를 겸하여 베푸셨도다. 예악(禮樂)과 병농(兵農)은 춘하 추동(春夏秋冬)의 사계절을 본받음이요, 형위(刑威)와 권상(勸賞)은 풍우 뇌정(風雨雷霆)의 육기(六氣)를 대행함이로다. 집집마다 삼광(三光)028)                  을 비쳐 주고 팔극(八極)029)                  을 모두 봉해 주었으며, 동서 남북에 골고루 은택과 교화가 미치게 하였다. 삼황(三皇) 오제(五帝) 이래 이른바 ‘지나친 것을 억제하고 모자란 것을 보충해서 천지의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돕는다.’는 것과, ‘천지의 조화를 범위(範圍)하여 넘어서지 않으며, 만물을 곡성(曲成)하여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오직 우리 성조(聖祖)께서 이를 능히 다 하셨으니, 진실로 남교(南郊)030)                  에 배향(配享)하고 북치(北畤)031)                  에 봉향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리하여 위로 전전(前典)을 상고하고 아래로 여정(輿情)을 위로하는 바이다. 천지(天地)와 종묘(宗廟)·사직(社稷)에 밝게 고유(告由)하기 위하여 제왕(諸王)·패륵(貝勒)032)                  과 문무 군신(文武群臣)을 거느리고서 옹정(雍正) 원년(元年)033)                   11월 25일 동지(冬至)에 삼가 상제(上帝)에게 공경히 제사할 때에 성조 인황제(聖祖仁皇帝)를 배향(配享)하였고, 옹정 2년 1월 초6일 상신(上辛)에 상제에게 기곡제(祈穀祭)를 올렸으며, 5월 1일 하지(夏至)에 공경히 천황(天皇)과 지기(地祗)에게 다 같이 성조를 받들어 배향하였다. 사의(事宜)에 맞는 일은 다음에 개열(開列)하리라. 아! 규범을 물려 주시고 도움을 열어 주셨으니, 천지와 같이 높고 넓은 자애를 어찌 감히 잊으랴? 상제를 대하고 종묘에 달려가매 음양(陰陽)의 어우러진 덕(德)을 엄연히 보겠도다. 청문(靑門)034)                  에 횃불이 타오르매 한 사람이 어버이에게 보답하는 마음이 경건해지고, 감악(紺幄)에서 신명이 흠향하시매 만국(萬國)이 어버이를 높이려는 소원이 이루어졌도다. 이를 온 천하에 포고하여 다 함께 듣고 알도록 하노라."
하였다. 조칙의 선포를 마치자, 임금이 절하고 궁전에 올라가서 칙사를 접견하고 위로한 다음 차(茶)를 올리고 파하였는데, 칙사는 관소(館所)로 나갔다.

 

2월 12일 병진

평안도(平安道) 덕천군(德川郡) 요원강(遼原江)이 물줄기가 끊어지기를 묘시(卯時)에서 사시(巳時)까지 하였다.

 

청인(淸人)의 조칙으로 국내에 사면령(赦免令)을 내리고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는데,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성대한 의식을 곧 거행하고 나니 바야흐로 천하가 온통 기쁨속에 싸여 있고, 온화한 조서가 거듭 내려지매 이에 사신이 멀리서 왔음을 보겠도다. 대호(大號)를 선양하여 다방(多方)에 널리 고하노라. 선황(先皇)의 성신(聖神)하심을 생각해 보건대 진실로 전대의 궤철(軌轍)을 멀리 앞지르셨도다. 가장 장구한 보위(寶位)에 임어한 것은 예전에 없었던 바이며, 창업(創業)과 수성(守城)의 공덕이 겸하여 융성함을 이제 비로소 보겠도다. 융숭한 보본(報本)은 성대한 제향에서 이미 다하였고, 남다른 예수(禮數)는 극존(極尊)에 배향함이 합당하도다. 하늘처럼 고명(高明)하시기에 동짓날 남교(南郊)에서 천제(天帝)에 배향하였고, 땅처럼 박후(博厚)하기에 원정(元正)035)  에 북치(北畤)에서 흑제(黑帝)에게 배향하는 의식을 받들었으니, 은(殷)나라 종묘에서 예(禮)로 올려서 배향하는 글을 따랐으며, 주(周)나라가 제단을 모아 경건히 제사한 제도를 본받은 것이다. 이에 조종(祖宗)의 성대한 법전을 들어, 원근(遠近)에 깊은 은택을 추대(推戴)하는 것이다. 수고롭게 말을 태워 사신을 성대하게 보내온 것은 나라 안과 같이 보았기 때문이고, 아름다운 보물을 많이 내려 주신 것은 외방(外邦)과 간격이 없게 여기기 때문이다. 생각하건대 소방(小邦)은 받은 은혜가 가장 많았기에 오늘날 성조(聖祖)에 대한 축하가 더욱 간절한 바이다. 천지의 조화가 널리 운행되매 만물이 저마다 밝게 소생하고, 뇌우(雷雨)의 은택이 널리 전하매 모든 하자가 깨끗이 지워졌도다. 본월 12일 이른아침 이전까지의 잡범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며 면제해 주고, 관직에 있는 자는 한 자급(資級)을 올려 준다. 아! 덕(德)이란 효도를 다한 데서 더욱 빛나는지라 정과 예를 갖추어 닦았고, 예(禮)란 어버이를 높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지라 신명과 사람이 서로 기뻐하도다. 그러기에 이에 교시(敎示)를 하노니, 아마 다 잘 알리라 믿는다."
하였다.

 

오명준(吳命峻)을 참찬(參贊)으로, 이인징(李麟徵)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진유(李眞儒)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조빈(趙儐)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이여적(李汝迪)을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채성윤(蔡成胤)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2월 13일 정사

임금이 태평관(太平館)에 거둥하여 청나라 사신에게 향연을 베풀어 주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고, 이존도(李存道) 등을 파직하는 일과 김시철(金時喆) 형제를 섬으로 유배(流配)하자는 청만을 윤허하였다.

 

2월 14일 무오

심준(沈埈)을 헌납(獻納)으로, 심수현(沈壽賢)을 판윤(判尹)으로, 최진한(崔鎭漢)을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삼았다.

 

2월 15일 기미

밤에 달이 태미성(太微星)의 서원(西垣)으로 들어갔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고 황명석(黃命錫)·이정량(李廷亮)을 파직하자는 청만을 윤허하였다.

 

2월 16일 경신

청나라 사신이 본국으로 떠났다.

 

2월 18일 임술

사간원에서 경사(京司)가 관문(關文)을 외방 고을에 발송하여 물품을 청구하는 폐단을 금지시킬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승원(李承源)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현장(李顯章)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민제장(閔濟章)을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삼았다.

 

2월 20일 갑자

토성(土星)이 미성(迷星)을 범하였다.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심준(沈埈)이다.】 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고, 삼흉(三凶)036)  의 집을 훼철하고 웅덩이를 파는 일과 윤증(尹拯)의 서원을 훼철하라는 명을 환수하는 것만 따랐다. 또 오부(五部)037)   방민(坊民)의 부역은 사대부(士大夫)·상한(常漢)을 막론하고 일체 돌려가며 시켜서 편중되는 폐단이 없도록 할 것을 청하니, 역시 그대로 따랐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호남(湖南) 각 고을에서 꾸어다 쓴 경아문(京衙門)의 전곡(錢穀)을 사간원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도신(道臣)을 시켜서 조사해 내어 탕감해 주라는 명이 있었는데, 십수 년 이래 외방(外方)에서 경사(京司)로부터 꾸어 간 것이 오로지 진휼(賑恤)에 보충한다는 명분을 구실로 사사로운 영리(營利)를 취하려는 데서 나왔기 때문에 경사의 요급(料給)을 외방에 파는 것은 공가(公家)의 재산을 축내어 사인(私人)의 전대만 불려 준 결과를 면치 못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하나의 큰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그러나 수령(守令)이 꾸어간 돈과 곡식의 절반은 제가 먼저 갖다 쓰고 나머지 절반만을 감색(監色)038)  에게 건네주고는 본래의 수치를 세우도록 하면, 감색도 또 이리저리 훔쳐 먹고 나서 이식에 또 이익을 붙이는지라, 그 이식은 벌써 갑절로 늘어나서 끝내 갚기 어렵게 됩니다. 가을이 오면 입고(入庫)한 양으로 보고하고 봄에 가서는 또다시 진휼곡(賑恤穀)으로 머물러 둘 것을 청하여, 수년을 이렇게 되풀이하다가 모두 포흠(逋欠)으로 돌리고 맙니다. 오늘날 이것을 일례로 탕감해 주게되면 국가의 손실도 적지 않거니와, 더구나 이 포흠이 참으로 곤궁한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국가는 백성에게 손실을 보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뜻에서 그다지 나쁜 일이 아니지만, 이것은 이미 감색의 무리들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것이거나 아니면 감색의 자손들이 지연시키고 바치지 않는 것이므로, 그 사세가 매우 괘씸하고 정상으로서도 불쌍한 것이 없습니다. 한갓 공가(公家)의 재물을 관리의 손에 의해 축을 냈는데 그 탕척의 혜택은 도리어 베풀지 않아야 할 곳으로 돌아가게 되고 맙니다. 청컨대 사간원 계사(啓辭)에서 논한 일은 시행하지 말고, 그 중에서 감색이 약한 백성을 속여서 갑절의 이식을 약속한 자와 중간에 받아 먹고서 바치기 어렵다고 핑계하는 자를 도신으로 하여금 적발해서 계문(啓聞)토록 하여 법에 의해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익한(李翊漢)을 승지(承旨)로, 이정필(李廷弼)을 지평(持平)으로, 이광덕(李匡德)을 정언(正言)으로, 이승원(李承源)을 수찬(修撰)으로, 홍치중(洪致中)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삼았다.

 

2월 21일 을축

처음에 윤용(尹容)이 이사상(李師尙)을 탄핵하자, 김일경(金一鏡)의 무리가 크게 놀라서 이제(李濟)와 이보욱(李普昱) 등이 서로 잇따라 소를 올려 윤용을 비난하였다. 이에 대사헌 박태항(朴泰恒)이 상소하기를,
"이사상은 조정에 있으면서 언행(言行)이 나름대로 본말(本末)이 있고, 소당(疎讜)한 절조와 충정(忠正)한 언론이 지난날 흉당(凶黨)의 가장 꺼리는 바가 되어 온갖 풍상(風霜)에 시달려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굽히지 않았으며, 망적(望賊)이 기회를 엿보고 신임(申銋)이 상소하여 합세하였을 때를 당하여 맨 먼저 그들의 간계(奸計)의 싹을 꺾어버리고 섬으로 귀양보냈으니, 그 당시 이사상이 아니었다면 국가는 자못 위태로왔을 것입니다. 그의 강개한 충절과 준엄한 언론은 청류(淸流)들이 크게 의지하는 바가 되어 왔고, 충심으로 바른 말하는 성격이 늙어서도 감쇠(減衰)되지 않아서 그 과감하게 말하는 기풍이 일을 당했을 때마다 나타나곤 해서 동배(同輩)들이 이사상을 위하여 이미 오래 전부터 걱정해 왔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배척하는 논의가 오늘날에 다시 일어나서 임금의 주벌(誅伐)이 막 끝나자마자 또 몸을 던져 역적을 토벌한 사람이 먼저 봉적(鋒鏑)을 받아서 선류(善類)의 사기는 꺾이고 흉역(凶逆)들의 불씨를 더하고 있습니다. 세도와 인심이 하나같이 이에 이르렀는데도 전하께서는 조금도 이를 난중(難重)히 여기지 않으시고 그 아룀에 즉시 윤허하시니, 특히 이는 충정(忠貞)을 권장하고 경악(經幄)039)  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적이 헌신(憲臣)이 하는 짓을 보건대, 첫 번째 아뢰고 두 번째 아뢴 것이 모두가 동배(同輩) 중의 사람인데도 모두 샅샅이 하자를 찾는 데 극도로 마음을 쓰더니, 전랑(銓郞)의 의망을 논핵(論劾)한 데 이르러서는 더더욱 공평한 마음에서 나온 의논이 아닙니다. 사대부의 마음씀이 이러하여서는 안됩니다. 바라건대 특별히 그의 관직을 파하여 불안을 조성하는 풍습을 진정시키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이정필(李廷弼)이 지평(持平)이 되니, 김일경(金一鏡)이 다시 이정필을 사주(使嗾)하고 윤용(尹容)을 탄핵(彈劾)하므로 파직(罷職)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또 논하기를,
"고(故) 수사(水使) 박창윤(朴昌潤)은 황해 수사(黃海水使)가 되었을 때에 4백 석(石)의 조세를 배편으로 운반해 왔다는 설이 국안(鞫案)에 분명히 실려 있고, 그의 아들 박태등(朴泰登)은 집(集) 건(健)040)  과 결탁하여 은자(銀子) 7백 냥을 대출했다는 설이 또 예조(禮曹) 문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박창윤은 이미 죽었으나 박태등을 연곡(輦轂)041)   아래에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당초에 박태항이 사람을 대할 적마다 윤용을 칭찬하기를, ‘이 사람은 간관(諫官)의 풍채가 크게 있으니, 국가에서 장자(長者)042)  의 집 자제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고 하였는데, 이윽고 경박한 연소자(年少者)들의 꾀임을 받고 갑자기 상소하여 윤용을 배척하자, 사람들이 다 그의 노망함을 비웃었다. 이정필(李廷弼)과 같이 패망(悖妄)한 데로 나가 김일경의 문에서 풍성(風聲)을 따라 붙좇아다닌 자야 더욱이 무엇을 나무랄 것이 있겠는가?

 

2월 22일 병인

사헌부 【이정필(李廷弼)이다.】 에서 논하기를,
"정주목(定州牧)에 정배(定配)된 죄인 홍성주(洪聖疇)는 홍순택(洪舜澤)이 몰래 독약을 사들인 것이 혹시 누설되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홍순택과 함께 은밀히 수작하며 걱정하고 두려워한 사실이 업봉(業奉)043)  으로부터 고발당하여 그 죄상과 정절(情節)이 국안(鞫案)에 분명히 실려 있으니, 목숨을 보존하고 있는 것도 그에게는 크게 다행한 일이거늘, 반사(頒赦)한 뒤에 도신(道臣)은 품질(稟秩)하는데 넣어주고 의금부는 간곡히 복계(覆啓)하여 가까운 곳으로 양이(量移)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놀라와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평안도 관찰사와 의금부 당상을 추고(推考)하고, 홍성주는 먼 외딴 섬으로 귀양지를 옮기소서."
하고, 사간원에 논하기를,
"서산 군수(瑞山郡守) 박종영(朴宗榮)은 이홍술(李弘述)이 육현(陸玄)을 적살(賊殺)할 적에 종사관(從事官)으로서 그의 지휘를 받아 성안(成案)에 서명(署名)을 하였으니, 아무리 위협을 받고 따른 것이라 해도 죄는 다를 것이 없는데도 마침 소결(疏決)할 때를 당하여 갑자기 석방을 받았으니, 이번에 제목(除目)이 내려지자 물정이 놀라와하고 있습니다. 황해 수사(黃海水使) 남익화(南益華)는 지난날 산협 고을을 맡고 있으면서 해괴한 일을 하도 많이 연출하여 대간(臺諫)의 논계로 파직되기까지 하였는데, 뜻하지 않게도 다시 본 곤수(閫帥)에 발탁되어 물정이 모두 놀라와 하는데도 거짓 못 들은 척하며 태연히 부임하였습니다. 청컨대 박종영은 사판(仕版)044)  에서 삭제하고, 남익화는 개차(改差)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2월 23일 정묘

청나라 사신의 패문(牌文)045)  이 또 도착하였으므로, 반송사(伴送使) 심수현(沈壽賢)에게 명하여 의주(義州)에 그대로 머물다가 영접하라고 하였다.

 

2월 24일 무진

의정부 좌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졸(卒)하였다. 최석항은 고(故) 상신(相臣) 최석정(崔錫鼎)의 아우인데, 외모는 왜소하였으나 강한 정신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관찰사로 나갔을 적에는 재국(才局)이 있다는 이름을 날렸고, 평생의 처사에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항상 후진(後進)에게 경계하기를, ‘잗단 일을 가지고 남과 서로 따지지 말라. 그러다가는 걸핏하면 실패하고 나랏 일을 성취하지 못한다.’ 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승으로 들어가 임인년046)                  ·계묘년047)                  의 큰 옥사를 당하여서는 뜻을 아예 평반(平反)048)                  에 두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필경 대각(臺閣)의 어긋나고 과격한 논의에 끌려서 모든 일을 스스로 주장하지 못한지라, 식자(識者)는 그의 역량이 적었던 것을 결함으로 여겼다. 부음을 알리자 임금이 하교하여 애도의 뜻을 전하였고, 세제(世弟)도 거애(擧哀)의 의식을 거행하였으니, 예문(禮文)을 따른 것이다.

 

2월 26일 경오

이날은 춘분(春分)이다. 구제(舊制)에 춘분 뒤에는 부임하는 수령(守令)이 솔권(率眷)049)  을 못하도록 금지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하루 전에 모든 수령이 다 사조(辭朝)하곤 하였으나, 마침 조시(朝市)050)  를 정지하였기 때문에 사조 단자(辭朝單子)를 올릴 수가 없었다. 이에 승정원에서는 솔권하러 왔던 고을의 인부(人夫)와 말이 빈걸음으로 돌아가는 폐단이 있다 하여 사조만은 특별히 허락할 것을 계청(啓請)하자, 사헌부에서는 아뢰기를,
"각 고을의 인부와 말이 올라온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춘분이 비록 지났더라도 솔권만을 특별히 허락하는 것은 선조(先朝) 을묘년051)  에 변통한 규례가 있는지라, 이는 법전의 본뜻에 크게 위배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시를 정지한 때에는 크고 작은 공사(公事)를 모두 출납하지 못하는 것이고 보면, 하직 단자만을 특별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구차스럽고 간략함을 면치 못합니다. 더구나 수령·방백이 하직하는 날에 입대(入對)의 기회를 주어 면유(面諭)하는 것이 예로부터 내려온 고사인데, 조시를 정지하면 인접(引接)할 수 없다는 것이 어찌 결함스런 법전이 아니겠습니까? 수령(守令)들에게 내린 오늘 하직하라는 명을 정지하고 을묘년의 선례에 의거하여 춘분 뒤에도 가족을 거느리고 떠나도록 하소서."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조시를 정한 날에 사조를 특별히 허락하는 것과 춘분 뒤에 솔권을 특별히 허락하는 것은 다 같이 파격(破格)하여 변통하는 것이니, 무슨 경중의 구별이 있겠는가? 더구나 임금이 즉위한 이후로 일체 침묵을 지켜 왔고 방백과 수령도 원래 임금을 알현하거나 임금이 그들에게 권면해 타이른 일이 없었은즉, 어찌 조시를 정지하였다 하여 인접하는 일을 폐하겠는가? 대간의 논집(論執)이 너무도 착락(着落)052)  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저마다 비웃었다.

 

영의정        최규서(崔奎瑞)가 상소하여 사면(辭免)하기를,
"예전에 명유(明儒) 설선(薛瑄)053)                  은 조·석(曹石)054)                  의 세력이 치성(熾盛)함을 보고 병을 핑계로 사퇴하여 집으로 돌아갔는데, 설선이 물러나자 석형은 과연 역모를 조작하였고, 조길상은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여 임금의 위태롭기가 한 터럭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설선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8년 동안을 임하(林下)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마쳤습니다. 신같이 보잘것없는 자가 비록 감히 옛사람에 비길 수는 없으나, 만난 그 시기가 마침 서로 부합하기에 망령되이 진퇴(進退)와 어묵(語默)에 일정한 도리는 있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신이 신사년055)                  ·정유년056)                  에도 한 마디의 말씀으로도 성궁(聖躬)을 보필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신축년057)                   겨울에 와서는 화기(禍機)가 이미 한 번 호흡(呼吸)하는 순간으로 임박하였는지라, 고(故) 상신(相臣) 조태구(趙泰耉)가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편이라 마음을 졸이고 힘을 다하면서 글을 보내어 신을 꾸짖고는 신에게 국가의 급난(急難)에 달려올 것을 권유하였는데, 통절(痛切)한 그 말씀이 신명(神明)에게 물어 보아도 떳떳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편지를 들고 울다가 드디어 밤을 지샜는데, 마침내 진퇴(進退)의 명분으로써 해명을 하고 몸을 전려(田廬)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신이 이미 물러나기로 스스로 작정한 것을 죽은 친구에게 말하고 군부(君父)의 위급한 일에 달려가지 않았는데, 그 친구가 죽은 뒤에 이제 다시 그 대임(代任)으로 나가서 안락한 영화를 앉아서 누린다면, 이는 신의 이마에 부끄러운 땀이 날 뿐만 아니라 저승에 있는 친구의 영혼도 그윽한 속에서 반드시 신에게 침을 뱉을 것입니다. 신이 암매(黯昧)함으로 해서 서울을 떠나 선조(先朝)를 저버렸고, 또 나라가 어려운 형편에도 달려나가지 않아서 전하를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신이 스스로 사람 축에 끼어 있는 것은 자폐(自廢)한 한 절조(節操)가 있기 때문인데, 이제 조정에서 이에 신의 자폐의 뜻마저 함께 앗아가려고 든다면 신은 앞으로 무엇을 붙잡고 하늘과 땅 사이에 자립(自立)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신의 실날 같은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속히 처분을 내려 주소서."
하니, 임금이 위로하여 타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7일 신미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박천군(博川郡) 좌수(座首) 한이림(韓以臨)의 아들 한필후(韓必垕)가 상놈 명세운(明世雲)을 때려 죽인 것을 그의 아내가 소장을 띄워 관가에 고발하였는데, 한필후는 이미 도망쳤고, 한이림만 잡아다 가두고 복검(覆檢)058)  하여 옥안(獄案)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한이림은 본고을 원이 사랑하는 기생에게 뇌물을 써서 드디어 석방되고, 마침내 죄없이 피살당한 자로 하여금 깊은 원한을 품은 채 신원(伸寃)할 길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청컨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별도로 장리(將吏)를 보내어 한필후를 기찰(譏察) 체포하여 끝까지 사핵하여 법을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고, 다만 남익화(南益華)를 개차(改差)하라는 청만을 윤허하였다.

 

왕세제(王世弟)가 최석항(崔錫恒)의 초상에 조문을 가려 하므로, 예조에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주(儀註) 소주(小註)에, ‘영위(靈位)에 먼저 절을 하고 이내 나아가 곡(哭)을 한다.’는 의절만 있을 뿐, 재배(再拜)나 단배(單拜)의 구별이 없다 하여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동궁(東宮)께서 평일에 사부(師傅)와 서로 볼 적에 재배의 예(禮)를 행하였으므로, 마땅히 생전과 사후의 간격을 두지 말아야 하며 반드시 재배를 한 뒤에야 비로소 예배(禮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재배로 마련함이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에 세제가 최석항의 상차(喪次)에 이르러 의식대로 조문을 하고, 그의 아들 최창억(崔昌億)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타이른 뒤에 돌아왔다.

 

2월 28일 임신

사간원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고 다만 박종영(朴宗榮)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자는 청만을 윤허하였다.

 

2월 29일 계유

김시환(金始煥)을 도승지(都承旨)로, 유수(柳綏)를 집의(執義)로, 조석명(趙錫命)을 부교리(副校理)로, 임광(任珖)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2월 30일 갑술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정제(李廷濟)는 이사상(李師尙)의 소척(疏斥)을 받았으므로 정세로 보아 부임하기 어렵습니다. 체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충청도 관찰사 권익관(權益寬)이 한(漢)나라 신하의 교제(矯制)의 고사(故事)059)  에 의하여 그 재곡(財穀)의 긴헐(緊歇)을 헤아려 한편으로 가져다 쓰면서 한편으로 치계(馳啓)하여 이미 그 윤허를 받았는데 한나라 신하의 일은 대개 기민(飢民)이 곧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수천 리 밖에서 왕복(往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위급한 기민을 먼저 구호(救護)한 것이었으나, 지금 호서(湖西)는 서울에서 거리가 수일(數日) 길밖에 안 되므로 마땅히 전기(前期)하여 계품(啓稟)하고 조정의 명령을 기다렸어야 했을 것입니다. 조정 명령을 핑계대는 일을 번신(藩臣)이 어찌 감히 청할 바이겠습니까? 유음(兪音)을 환수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 유수(柳綏)이다.】 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니, 임금이 평안 감사 오명항(吳命恒) 및 의금부 당상(堂上)을 추고하자는 청만을 따랐다. 유수가 또 논하기를,
"장령 신후삼(愼後三)은 흥덕(興德)에 살고 있었는데, 그를 추종하는 석삼(錫三)이 무력을 자행하는 토호(土豪)로서 어사(御史)에게 죄를 입은 일이 있었습니다. 신후삼이 장령이 된 뒤에 보복을 할 계획으로, 관리와 사령(使令)으로서 어사의 명령을 받든 자를 잡아다 이웃 고을에 옮겨 가두고서 누차에 걸쳐 엄한 형벌을 행하였는가 하면, 소명(召命)을 받고 올라올 적에 양호(兩湖) 일대에서 전에 눈에 거슬렸던 사람이 있으면 도처에 잡아가두는 등, 권세를 누려 감정을 풀었습니다.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헌납(獻納) 심준(沈埈)이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고, 김일경(金一鏡)도 또한 말하기를,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등의 집을 헐고 못을 파는 일은 법전에 있어 응당 시행해야 될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심준이 또 논하기를,
"부교리 조익명(趙翼命)이 북병사(北兵使) 이수량(李遂亮)이 호마(胡馬)를 사들였다고 소론(疏論)한 일은, 특히 비답이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논죄의 조치가 없었는데, 이는 장오(贓汚)에 관계되므로 죄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수량을 나문(拿問)하소서."
하니, 또한 그대로 따랐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박필몽(朴弼夢)의 장계(狀啓)에 말하기를,
"본부의 관무재(觀武才)060)  를 폐지한 지가 여러 해입니다. 청컨대 규례를 참조하여 시행케 하소서."
하였으므로, 비변사에서 그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이진검(李眞儉)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박사제(朴師悌)를 정언(正言)으로, 윤순(尹淳)을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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