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병자
왕대비가 병이 나서 약방(藥房)에서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 김후연(金後衍)을, 여러 의녀(醫女)가 입진(入診)할 때에 같이 입시(入侍)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김후연은 대비의 아우이다.
3월 3일 정축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논하기를,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061) 의 봉사(奉祀)를 조정에서 종손을 골라서 옮겨 정한 뒤에, 제기(祭器)와 전민(田民), 사패 문서(賜牌文書)를 하나도 건네준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이명회(李明會)의 아들을 잡아다 가두고 종중 과죄(從重科罪)하여 낱낱이 넘겨주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태억(趙泰億)·김일경(金一鏡)을 좌우 빈객(左右賓客)으로, 여선장(呂善長)을 교리(校理)로, 김유(金濰)를 장령(掌令)으로, 권첨(權詹)을 전라 감사로, 이사성(李思晟)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3월 4일 무인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유수(柳綏)·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이보욱(李普昱)이다.】 에서 논계(論啓)하기를,
"강동 현감(江東縣監) 조창래(趙昌來)는 첨정(簽丁)을 할 적에 은밀히 유리(由吏)062) 를 시켜 안에서 뇌물을 받고 몰래 탈면(頉免)063) 해 주었으며, 관둔전(官屯田) 곡식을 타작할 적에 관아의 종을 내보내어 민간에 폐단을 일으켰으며, 지난 가을 전정(田政) 때는 친근한 감색(監色)에게 오로지 위임하여 재결(災結)과 실결(實結)도 구분하지 않고 전미(田米) 4백여 석(石)을 강제로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방매하여 사탁(私槖)을 채웠습니다. 홍산 현감(鴻山縣監) 이경석(李慶錫)은 경박하게 반복하고 간사하고 탐욕하여 작년에 자목직(字牧職)에 제수될 적에 물의(物議)가 시끄러웠는데도 거짓 못들은듯이 시치미를 떼고 몰염치하게 부임하더니, 부임한 뒤에는 살옥(殺獄)을 조종(操縱)하여 공공연히 뇌물을 받아들여 인근해 있는 그의 집으로 짐바리가 줄을 이었습니다. 청컨대 조창래와 이경석을 파직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5일 기묘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김유(金濰)이다.】 에서 논계하기를,
"경성(京城) 각사(各司)에서의 절수(折受)064) 는 선조(先朝)의 금령(禁令)이 분명히 있는데도 내자시(內資寺)에서 어공(御供)이 구차스럽고 간략하다는 핑계로 절수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청하여 5도(道) 12읍(邑) 40곳에 많은 양에 이르렀는가 하면, 차인(差人)들이 답험(踏驗)을 핑계로 침범하여 소요를 일으킴이 끝이 없습니다. 청컨대 내자시의 절수를 파하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차인을 적발하여 폐단을 끼친 자는 죄를 처결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장령 이이제(李以濟)가 예조 판서 심단(沈檀)을 소론(疏論)하면서 말을 얼버무리고, 가진 뜻이 아름답지 않으며 현혹 변환하여 인피(引避)하면서 반드시 남을 모함하려고 하였으니, 청컨대 이이제를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이이제에 대한 일만 따랐다. 김유가 또 논하기를,
"장헌(掌憲)은 곧 청조(淸朝)의 이목(耳目)을 붙이는 자리입니다. 어떻게 한미한 여위량(呂渭良)이나 용렬한 김성발(金聲發) 같은 자로 구차하게 통의(通擬)065) 의 수만 채울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전조(銓曹)로 하여금 다시는 의망(擬望)066) 에 거론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3월 7일 신사
사헌부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다만 내자시의 절수를 파하는 것과 여위량 등을 대망(臺望)에 통의하지 말라는 청만을 따랐다.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약방(藥房)의 입진(入診)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바야흐로 육경(六卿)067) 에 사람이 모자랍니다. 아경(亞卿)068) 가운데 기절(氣節)을 세우고 인망이 드러난 사람이 있으니, 그 중 이진검(李眞儉)·김시환(金始煥)이 서차(序次)가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청컨대 품계(品階)를 올려서 수용(需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이광좌가 비록 백관을 진퇴(進退)시키는 직임에 있기는 하지만 두 달이 채 못되어 네 사람이나 승진시켜 정경(正卿)069) 에 임명한지라, 사론(士論)이 그의 전제(專制)를 비난하였다고 한다."
【태백산사고본】 7책 14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14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註 067] 육경(六卿) : 육조 판서(六曹判書).[註 068] 아경(亞卿) : 참판(參判)과 좌우윤(左右尹).[註 069] 정경(正卿) : 판서.
사신은 논한다. "이광좌가 비록 백관을 진퇴(進退)시키는 직임에 있기는 하지만 두 달이 채 못되어 네 사람이나 승진시켜 정경(正卿)069) 에 임명한지라, 사론(士論)이 그의 전제(專制)를 비난하였다고 한다."
조지빈(趙趾彬)을 지평(持平)으로, 이성신(李聖臣)을 정언(正言)으로, 김연(金演)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기복(李基福)을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정수송(鄭壽松)을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이익한(李翊漢)·이정제(李廷濟)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3월 8일 임오
유명응(兪命凝)·김시경(金始慶)을 승지로, 박태항(朴泰恒)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3월 9일 계미
윤오상(尹五商)을 통제사(統制使)로, 윤회(尹會)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3월 10일 갑신
대비의 환후가 오래도록 낫지 않고 임금이 또 편찮아서 약방과 조정이 연일 문안을 하였다.
3월 11일 을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이성신(李聖臣)이다.】 에서 논계(論啓)하기를,
"양역(良役)에 따른 폐단은 실로 생민의 보존을 어렵게 하는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관청을 설치하고 관원을 두는 것은 폐단을 개혁하고 부역[役]을 균등하게 하자는 것인데, 건의한 지 해가 지났는데도 여태 변통의 조치가 없고 일을 시작한 지 여러 달이 되었는데도 한갓 유유 범범한 시일만 보내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에 신칙하여 조속히 양역을 완전이 변통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논하기를,
"지돈녕(知敦寧) 홍치중(洪致中)은 마음가짐이 간사하여 거의 빙하(冰河)에 사는 여우와 같고 흐릿한 지론은 대체로 머리를 내밀고 눈치보는 쥐와 같습니다. 지난날 흉당(凶黨)의 알뜰한 보호를 받아서 팔좌(八座)070) 를 부당하게 점유하였으며, 국사가 위태로와짐에 미쳐서는 일찍이 한 마디 말도 없었는가 하면, 신화(新化) 초기에 유독 죄적(罪籍)에서 빠졌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다시 거두어 서용(敍用)되어 제목(除目)071) 이 내려지자 물의(物議)가 시끄러웠으니, 이처럼 간사한 무리는 시대가 바뀌고 일이 지났다고 해서 용서해 줄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케 하소서. 그리고 이사상(李師尙)은 그 사람됨이 멍청하고 식견이 전혀 없어서, 집에서는 일컬을 만한 행검(行檢)이 없고 처신 또한 거칠고 패려하다는 비난이 많습니다. 윤용(尹容)이 그를 논계(論啓)한 것은 특히 미세한 일일 뿐인데도, 박태항(朴泰恒)은 오로지 붕당만을 일삼아서 온갖 말을 늘어 놓으며 그를 구원하느라 심지어 ‘충정(忠正)한 지절(志節)이 있다.’는 등의 말로 한껏 포장(褒奬) 추허(推許)하고 또 그의 상소(上疏)에서, ‘첫 번째 아룀이나 두 번째 아룀이 모두가 동배 중의 사람이었다.’ 하였습니다. 윤용의 구차하게 남과 행동을 같이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의사에 따라 논열(論列)하는 것은 또한 숭상할 만한 일인데도, 박태항은 도리어 이것을 병통으로 여기며 이에 붕당을 비호하는 풍습을 오늘날의 대각(臺閣)에 바라고 있으니, 옛사람의 이른바, ‘한 마디의 말이 나라를 잃게 한다.’라는 말에 불행스럽게도 가깝습니다. 그런데 생각밖에 남의 나라를 해치는 논의가 갑자기 노성(老成)한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왔으니, 청컨대 박태항을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3월 12일 병술
사간원(司諫院)에서 논계(論啓)하기를,
"진사(進士) 한근(韓瑾)은 본시 무뢰한 무리로서 불의(不義)의 일을 많이 저질렀으며, 대낮에는 문정(門庭) 안에서 도판(屠販)을 하고 어두운 밤에는 권세가의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쫓아다니는가 하면, 전지(田地)의 조세를 받아들이는 일로써 정릉(靖陵)072) 의 군사 이영달(李永達)을 침학(侵虐)하여 이영달이 스스로 몸을 물에 던져 죽자, 한근은 옥사(獄事)가 이루어질 것이 두려워서 재물을 내어다 뇌물을 써서 요행히 모면하기를 바랐습니다. 청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잡아다 가두고 엄히 사핵(査覈)하여 그 죄를 바로잡도록 하소서. 고령 현감(高靈縣監) 이덕순(李德淳)은 추잡하고 패려한 행위가 성격을 이루어 사대부의 모양이 전혀 없으며 평소에 영위하는 일도 재물과 금전을 벗어난 것이 없어 비루하고 번쇄(煩瑣)한다는 비난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13일 정해
이진순(李眞淳)을 집의(執義)로, 오명신(吳命新)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3월 15일 기축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입대(入對)하여 말하기를,
"근년 이래 몇몇 조칙(詔勅)에 비록 사령(赦令)이 없더라도 반사(頒赦)의 명을 연이어 내렸습니다. 한(漢)나라 신하 오한(吳漢)073) 의 말에, ‘사면(赦免)이란 소인의 요행수만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적중한 논리입니다. 이 뒤로는 한결같이 조칙에 사령하라는 지시가 있는가 없는가를 보아서 그대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간(司諫) 윤회(尹會)가 계청(啓請)하기를,
"배표(拜表)074) 때 종친, 문무 백관 당상 이상으로서 까닭없이 참석하지 않은 인원은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16일 경인
홍중우(洪重禹)를 승지(承旨)로, 이정걸(李廷傑)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논계(論啓)하기를,
"충청 수사(忠淸水使) 홍시구(洪時九)는 정령(政令)이 지나치게 포학하고 형장(刑杖)이 너무 혹독하여 도신(道臣)이 순시차 본영에 이르러서 금송(禁松)을 함부로 베어낸 일을 들어 장계(狀啓)로 논죄(論罪)를 청하자, 이에 감히 도신이 적간(嫡奸)할 적의 일을 열거하면서 심지어는 편비(褊裨)의 무리가 이를 조종하였다고까지 하였으며, 또 용호문(龍虎門)에서 서로 다툰 일을 가지고 분노에 편승하여 노여움을 옮겨 풀려고 한다는 것으로 비변사에 논보(論報)하여 마치 승부를 겨루듯이 하였습니다. 체통을 무너뜨린 잘못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곤수(閫帥)는 그 소임이 가볍지 않은지라 비록 중대한 죄를 범한 자라도 도신이 파직하자는 장계를 올릴 수 없는 것이고, 으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토록 청하는 것은 사체(事體)를 존중히 여기는 까닭입니다. 관찰사 권익관(權益寬)이 홍시구가 금송을 함부로 벤 일을 가지고 장계로 논죄를 청한 것은 참으로 사체를 얻었다 하겠으나, 그 용호문에서 서로 다툰 일 같은 것은 꼭 타당하지도 않은데 이것을 가지고 또 파출(罷黜)을 청한 일은 체면을 그르침이 있습니다. 청컨대 홍시구(洪時九)를 나문(拿問)하고, 권익관을 추고(推考)케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해주(海州)·서흥(瑞興)·장연(長淵)·문화(文化) 등지에 사흘 동안 눈비가 내렸다.
3월 17일 신묘
눈이 내렸다. 충청도·전라도에도 눈이 내렸으며, 청주(淸州)에서는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눈이 셋이고, 입이 둘, 코가 둘, 혀가 둘, 턱이 둘이었다.
청(淸)나라 사신이 황후를 책립(冊立)하였다 하여 반조(頒詔)하러 서울에 들어왔는데, 임금이 병을 앓고 있어서 세제(世弟)가 임금을 대신하여 교외(郊外)에 나아가 맞아들였다. 사신이 대궐 안으로 들어오자 임금이 비로소 인정전(仁政殿)에서 조칙(詔勅)을 맞이하였는데, 조칙에 이르기를,
"짐(朕)은 생각하기를 하늘이 베풀고 땅이 성취시키매 비로소 그 조화를 사철에 펼치고, 해가 밝고 달이 짝을 지어 함께 만방(萬方)을 비치는 것이다. 때문에 왕이 나라를 세우면 반드시 궁정(宮庭)의 위치를 바로잡고, 성인(聖人)이 법을 마련함에 있어 맨 먼저 책명(冊命)의 글을 융숭하게 하는 것은, 이는 순리로 인륜을 펴서 내치(內治)를 돈독하게 돕도록 하는 것이다. 짐이 넓은 기반을 뒤이어 공경히 큰 사업을 받은 것은, 전에 효공 인황후(孝恭仁皇后)의 유음(諭音)을 받들어서이다. 적비(嫡妃) 나랍씨(那拉氏)는 고문(高門)에 수재(秀才)로 탄생하여 화주(華冑)075) 의 정숙(貞淑)함을 부여 받았도다. 착하고 공손함은 법도에 맞고, 아름다운 범절은 성품을 이루었도다. 효도와 공경은 아침저녁으로 안색을 살펴 뜻을 받드는 데 다하였고, 유순함과 아름다움은 궁안에서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몸을 엄숙히 하는 데서 드러났도다. 아름다운 덕을 능히 보전하였으니, 빛나는 존호(尊號)가 진실로 부합되므로 의당 황후로 책립하여야 하나, 마침 자위(慈闈)를 잃은 까닭에 전례(典禮)를 오랫동안 지연해 왔는데, 종사(宗事)가 이에 준엄하여 이름을 바로잡는 일이 시급한지라, 이에 삼가 유훈(遺訓)을 따르고 곧 옛날의 의전(儀典)을 상고하여 천지(天地)와 묘사(廟祠)에 삼가 고유(告由)하고, 옹정(雍正) 원년(元年) 12월에 나랍씨를 책립하여 왕후로 삼아서 헌원성(軒轅星)076) 의 빛를 이어받게 하고, 장추궁(長秋宮)077) 의 이름을 바로잡았노라. 큰 예절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길이 베푼 덕을 응당 넓혀 나가야 하겠기에 사의(事宜)에 맞는 일을 후미에 아울러 나열하노라."
하였다. 선조(宣詔)078) 를 마치고 나서 임금이 칙사를 접견하여 차(茶)를 올린 다음, 위로를 하고 파하였다. 칙사는 관소(館所)로 나갔다.
3월 18일 임진
우박이 내렸다. 양사(兩司)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다만 홍시구(洪時九)의 나문(拿問)과 한근(韓瑾)의 수핵(囚覈)과 배표(拜表) 때 불참한 관원의 추고(推考)에 대한 청만을 따랐다.
3월 19일 계사
조익명(趙翼命)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김시혁(金始㷜)을 교리(校理)로, 이진유(李眞儒)를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이진급(李眞伋)을 부교리(副校理)로, 윤용(尹容)을 부수찬(副修撰)으로, 박필기(朴弼夔)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이때 도당(都堂)079) 에서 신록(新錄)080) 을 막 마감하였는데, 이조 판서 유봉휘(柳鳳輝)가 이사상(李師尙)의 아들 이헌장(李獻章)을 선발(選拔)하려 하였으나 공론(公論)이 허락하지 않아서 신록에 참여시키지 못하자 유봉휘가 크게 분개해 있었다. 대제학 조태억(趙泰億)이 김홍석(金弘錫)을 두고 그의 처지가 한미한데다가 또 언젠가 그의 종형(從兄) 조태구(趙泰耉)를 헐뜯었다 하여 그를 저지하려 드는 것을 유봉휘가 극력 추천하여 신록에 넣었다. 그러자 두 사람이 도당(都堂)의 좌석에서 언사(言辭)가 매우 흥분되어 서로 양보하지 않았는데, 식자(識者)는 다 유봉휘가 사정에 치우쳐 당(黨)을 두둔함을 비난하였다.
3월 20일 갑오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억(趙泰億)이 입대(入對)하여 말하기를,
"전조(田租)의 세입(稅入)이 부족하여 호조의 경비를 이어댈 도리가 없습니다. 청컨대 경리청(經理廳)에서 비변사(備邊司)에 갚을 쌀 5천 7백여 석(石)이 전라도에 산재하여 있습니다. 운반하여다 보태어 쓰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21일 을미
임금의 병이 나아서 왕세제(王世弟)가 관소(館所)에 나가 칙사를 연향(宴享)하였다.
3월 22일 병신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도제조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녹훈 도감(錄勳都監)의 상전(賞典)을 여태 시행하지 않은 것은 종래의 전례가 아닙니다. 청컨대 서계(書啓)해 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시환(金時煥)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조지빈(趙趾彬)을 부교리(副校理)로, 이명언(李明彦)을 부제학(副提學)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경기 여주(驪州) 읍내에 불이 나서 70여 채의 집이 연달아 타버리고 사인(士人) 원명항(元命恒)의 아내 신씨(辛氏) 등 네 사람이 불에 타 죽어서,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3월 23일 정유
충청도 옥천군(沃川郡)에 불이 나서 군량미 1천 2백 석과 공해(公廨) 84칸, 그리고 인가(人家) 3백 50호가 타버리고 사람 3명이 죽었다.
3월 25일 기해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이단장(李端章)이다.】 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이조 판서 유봉휘(柳鳳輝)는 이조와 호조의 장관(長官) 자리는 제수만 하면 그 즉시 나오면서도 예조와 한성부의 직임은 까닭없이 굳이 사양하였습니다. 선조(先朝)의 의시(議諡)와 대빈(大嬪)의 존숭(尊崇)은 그 경중이 저절로 구별됨에도 더러는 나오고 더러는 나오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의리입니까? 지난번 옥후(玉候)가 불편하실 적이나 이번 자성(慈聖)이 편찮으실 적에도 앞뒤의 문안 반열에 일체 나와서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유봉휘의 다리 병이 아무리 고질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미 능히 궁중을 출입하고 정석(政席)에서 배궤(拜跪)도 하였고 보면, 문안의 반열에는 어째서 한 번도 병을 무릅쓰고 참석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사람들이 다 비웃으며 손가락질을 하고 공론이 또 갈수록 격렬합니다. 청컨대 파직케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부교리 조지빈(趙趾彬)·수찬 임광(任珖)이 상차(上箚)하기를,
"신 등이 삼가 이단장(李端章)이 유봉휘를 파직하라고 청한 계사(啓辭)를 보고 놀라움과 탄식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유봉휘는 조정에 나가 임금을 섬기는데도 나름대로의 본말(本末)이 있었으며, 신축년081) 의 한 가지 일만 해도 그 몸을 잊고 나라에 바치는 충성이 더욱 뚜렷이 드러났는데, 오늘날 출처(出處) 한 가지 절차를 가지고 일필(一筆)로 잘라 결단하는가 하면, 그가 늘어놓은 말들이 허망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무릇 시호를 짓는 모임에는 대신(大臣)·육경(六卿)·의정부(議政府)·관각(館閣)·삼사(三司)의 장관 외의 기타 경재(卿宰)들은 나와 참여한 예가 없으므로, 산반(散班)082) 에 있는 유봉휘로서 그 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사세가 본시 그러했으며, 대빈(大嬪)의 존숭(尊崇)은 본래 회의하는 일이 없으므로 나오고 나오지 않은 데 대해서는 논할 바가 아닙니다. 개기(改紀)에 맨 먼저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발탁되었다가 금방 다른 관직으로 옮겼고, 예조에 제수되어서는 여러 달 행공(行公)하였으므로 까닭없이 굳이 사양하였다고 한 말은 모두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문안 반열에 불참한 일에 있어서도 그것이 어찌 임금을 사랑하는 성의가 남에게 뒤져서 그랬겠습니까? 대개 이는 그의 다리 병이 깊은 고질로 참으로 억지로 나오기가 어려운 데가 있었습니다. 유봉휘가 일찍이 나라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을 스스로 마음에 맹세하고 모든 직무에 성의를 다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유독 조회와 진대(晉對)에는 병으로 해서 잘 들어오지 못하므로, 사람을 대할 적마다 스스로 슬퍼하였습니다. 이것을 고집하여 죄를 삼는다는 것은 보통 인정으로서는 미칠 바가 아닙니다. 이처럼 온당치 않은 논의에는 징계의 조치가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단장을 파직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수찬 윤용(尹容)이 또 소를 올려, 유봉휘를 대단히 칭찬하고 이단장을 극력 나무라며 삭출(削黜)을 더 할 것을 청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유봉휘는 평생 편당이 지나쳐서 심지(心志)가 고질화되었다. 신축년083) 세제를 세울 때를 당하여 한갓 당시 용사자(用事者)의 거조에 분개한 나머지 세제를 세우게 된 명분과 의리도 생각지 않고, 이에 감히 세제를 이미 세운 뒤에도 상소하여 경망한 반론을 폈으니, 그야말로 사슴만 쫓고 태산(泰山)은 보지 못했다고 이를 만하다. 당시에 만약 두 성상(聖上)께서 사랑과 용서로 곡진히 보호해 주지 않았던들 유봉휘는 필시 이미 가루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번국(翻局)084) 된 이후에 와서 만약 지난날의 죄과를 깊이 인책하여 권요(權要)의 자리를 강력히 사양하고 향곡으로 물러나서 폐인(廢人)으로 자처하면서 무릇 동궁(東宮)의 보호에 관계되는 일에나 모든 심력을 다하였더라면, 유봉휘의 심사는 오늘날이나 후세에 다 저절로 밝혀져서 군자(君子)의 깊은 주책(誅責)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절의가 많다는 것으로 공명(功名)을 자처하면서 두려워하고 염피(斂避)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이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는 빈축을 사 가며 저는 다리를 끌고 나오는가 하면, 지론(持論)과 용인(用人)에 있어서는 일체 사정에 치우쳐서 김일경(金一鏡)·이사상(李師尙) 따위의 흉하고 추한 인물들을 종주(宗主)로 여기고, 이명언(李明彦)·이진유(李眞儒) 따위의 괴격(乖激)한 무리들을 표적(標的)으로 삼아서 선류(善類)가 오열케 하고 청의(淸議)가 좌절되게 하여 점차 의리가 흐려지고 막혀서 헤아릴 수 없는 변란이 일어나도록 하였으니, 아! 어찌 한탄을 금할 수 있겠는가? 당시 이광좌(李光佐)를 위시한 여러 사람이 비록 김일경에게서는 떨어져 나오려 하면서도 유봉휘에게는 감히 비난의 말을 발설하는 자가 없었는데, 유독 이단장(李端章)이 향곡의 외로운 처지로 능히 스스로 물러날 각오를 하고 뭇사람의 노여움을 범하여 가면서 탄핵을 가하였다. 비록 그의 논의가 더러는 실상과 다른 데도 많았으나 식자층에서는 오히려 취하는 자가 있었는데, 을사년085) 이후로 이단장도 당시 집권자들에게 아부하여 분간 없이 어울리므로, 공론이 비로소 비루하다고 침을 뱉았다 한다.
칙사(勅使)가 돌아가므로 세제가 서교(西郊)까지 가서 전송하였다.
3월 27일 신축
유성(流星)이 심성(心星) 위에서 나왔다.
임금이 비변사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하였는데,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경외(京外)의 옥송(獄訟)을 신칙하여 혹시라도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청하고, 또 이단장(李端章)이 유봉휘(柳鳳輝)를 무함하고 헐뜯었는데, 마땅히 유봉휘를 용서하여 기어코 출사(出仕)하도록 면려해야 한다고 말하니,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조 참판 이진유(李眞儒)가 말하기를,
"성주(星州)·밀양(密陽)·충주(忠州)·여산(礪山) 등의 고을에서 금지령을 무릅쓰고 윤증(尹拯)의 서원을 세우자고 발의(發議)하여, 성주에서는 마치 조정 명령에 승부라도 걸듯이 서둘러 영건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도신(道臣)을 추고(推考)하고 지방관은 파직하며, 외방(外方) 서원에 획급(劃給)한 전결(田結)를 모두 환수하고 서원에서 점유하고 있는 양정(良丁)086) 은 모두 본고을에 귀속(歸屬)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진유가 또 송시열(宋時烈)·허목(許穆)의 서원이 중첩해 설립된 곳은 모두 철훼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광좌가 사액(賜額)만 환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므로, 임금이 이광좌의 말을 따랐다. 교리(校理) 조지빈(趙趾彬)이 임금이 경연(經筵)에 자주 나갈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유정(柳綎)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3월 28일 임인
사은사 겸 동지사(謝恩使 兼冬至使)로 갔던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 등이 북경에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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