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14권, 경종 4년 1724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22.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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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 을사

이중관(李重觀)을 지평(持平)으로, 이종백(李宗白)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4월 3일 병오

유봉휘(柳鳳輝)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박필기(朴弼夔)를 교리(校理)로, 박문수(朴文秀)를 설서(說書)로, 여필용(呂必容)·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윤회(尹會)이다.】 에서 논계하기를,
"안산 군수(安山郡守) 최우태(崔宇泰)는 비루 패려(悖戾)하고 무식하여 오로지 탐욕만을 일삼아서, 온 경내가 시끄러운 것이 마치 백성들이 물불 속에 들어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이중관(李重觀)이다.】 에서 논계하기를,
"전 관찰사 유명홍(兪命弘)은 용렬하고 어리석고 탐욕스럽고 비루합니다. 전에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당시 간특한 편비(褊裨)와 교활한 영리(營吏)가 중간에서 종용(慫慂)하여 뇌물을 버젓이 받아들였는가 하면, 그가 탄핵을 받고 체직될 적에는 각 고을에 있는 감영(監營)의 곡물을 중기(重記)087)  에 수정(修正)할 즈음에 몰래 스스로 그 수효를 줄여 기재하고는 각 고을에 관문(關文)을 띄워 장부 속의 것을 변환(變幻)하게 하였는데, 그 많은 수효가 끝내 간 곳이 없었으니, 편비 곽가[郭姓]와 영리(營吏) 조가(趙哥)가 곧 그 일을 시종 주장한 자입니다. 청컨대 본감영으로 하여금 사실을 사핵한 뒤에 유명홍(兪命弘)의 탐욕스럽고 비루하고 불법을 저지른 죄를 율(律)에 의하여 법을 바로잡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청하기를,
"홍철인(洪哲人)·홍의인(洪義人)의 요악하고 사특한 행위는 이미 매화점(梅花點)의 공초(供招)에 들어 있습니다. 그의 아비 홍언도(洪彦度)는 흉측하고 패악한 사람으로서 모를 리가 만무한데, 홍철인이 갑자기 덮쳐 잡기에 당하여 금랑(禁郞)이 문에 들이닥치자 그 형의 귀양지에 내려갔다는 것으로 거짓말을 하였다가 이튿날 홍언도가 수금(囚禁)된 뒤에서야 비로소 자수케 하였으니, 그 왕명을 무시하고 적자(賊子)를 숨긴 죄상을 오늘날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이를 갈고 있습니다. 좋은 곳에 그대로 안치해 둔다면 형정(刑政)의 실추가 막심합니다. 청컨대 홍언도를 외딴 섬으로 안치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4월 4일 정미

전라도 전주(全州)에 서리가 내렸다.

 

4월 5일 무신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재신(宰臣)이 입대(入對)하였다.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청하기를,
"이조에 신칙하여 경외(京外)의 관원을 신중히 선발하도록 하고, 형조와 한성부(漢城府)의 당상(堂上)에게 신칙하여 낭리(郞吏)를 엄히 단속하여 사사로운 정을 따라 농간질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관찰사는 수령(守令)을 잘 통솔하여 상세히 백성 돌보기를 자기 일 보듯이 하도록 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고(故) 명현(名賢) 이몽규(李夢奎)는 인종(仁宗)께서 승하하신 뒤로 시(詩)를 지어 스스로 폐처(廢處)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행장(行狀)을 지어 그 의리를 칭송하였고,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은 《명신록(名臣錄)》을 지었는데, 유생으로서 거기에 입전(立傳)된 이는 이몽규 한 사람 뿐입니다. 마땅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재신(宰臣) 반열(班列)의 청직(淸職)을 추증하도록 하소서."
하고, 호조 판서 조태억(趙泰億)은 말하기를,
"단종(端宗)계유년088)  에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조극관(趙克寬)이 모두 죽은 것은 그 충렬(忠烈)이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또 조극관의 아들 조정서(趙廷瑞)는 귀양가서 죽고 아우 조수량(趙遂良)도 사사(賜死)되었으니, 삼신(三臣) 중에서도 조극관의 집이 가장 참혹한 화를 입었습니다. 조극관 부자는 후사가 없고 유독 조수량만 후손이 있으니, 황보인·김종서의 자손과 일체로 녹용(錄用)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형조 판서 김일경(金一鏡)은 말하기를,
"청(淸)나라 사람 상명(常明)은 우리 나라 사람의 후손으로서 황제(皇帝)의 총신(寵臣)이 되어 모든 일에 우리 나라를 위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칙사는 구렁텅이같은 욕심꾸러기인데, 호조(戶曹)에서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데도 감히 함부로 독기를 부리지 못한 것은 역시 상명이 신칙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명의 족속이 의주(義州)에 있다 하니, 마땅히 수록(收錄)을 더하여 상명의 조상 분묘(墳墓)를 수치(修治)케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이조 참판 이진유(李眞儒)가 말하기를,
"홍우전(洪禹傳)은 정주(定州)로 귀양갔는데, 80이 넘은 어미가 시방 전주(全州)에 있어서 서로의 거리가 천여 리나 됩니다. 마땅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더하여 조금 가까운 남쪽 지방으로 옮겨 주어서 모자가 서로 의지하도록 하소서."
하고,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귀양가 있는 윤홍(尹泓)은 그의 선조 윤섬(尹暹)이 임진 왜란(壬辰倭亂) 때 순절(殉節)하였고, 그의 할아버지 윤집(尹集)은 곧 삼학사(三學士)089)   중의 한 사람이며, 양할아버지 윤조(尹肇)는 병자 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하였기에, 효종(孝宗)께서는 전교하시기를, ‘한 집안에 삼절(三節)이 났다. 이는 참으로 십세(十世)를 용서할 만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윤홍의 나이 또한 70세이니, 석방을 윤허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이진유가 또 청하기를,
"윤증(尹拯)의 홍양(洪陽) 용계 서원(龍溪書院)에 은액(恩額)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사간(司諫) 윤회(尹會)가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서 논하기를,
"한성부 참군(漢城府 參軍) 유광기(兪廣基)는 집적(集賊)090)  에게 아첨하여 붙어서 사적(仕籍)에 외람되게 통과되었고, 작년 회맹(會盟)·진하(陳賀)의 반열에 모두 진참(進參)하지 않고는 스스로 중도를 지켰다고 자랑하고 으시대면서, 마치 절의나 세운 것처럼 하는가 하면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서슴없이 공공연하게 내뱉고 있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지평(持平) 이중관(李重觀)이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자, 임금이 이시필(李時弼)을 율대로 그 죄를 바로잡자는 청을 따르니, 이광좌(李光佐)가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이시필이 당초에 성후(聖候)로 해서 의관(醫官)과 상의하고 이런 말을 한 것은 이는 좋은 뜻에서 한 말입니다. 이미 좋은 뜻을 가졌는데 곧바로 나쁜 말을 한다는 것은 이럴 이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시필이 귀가 먹었기 때문에 다른 의관(醫官)의 답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서 도리어 답을 하지 않는 것을 의심하여 심지어 ‘소 궁둥이에 풀을 먹이라.’는 말까지 하였던 것인데, 여러 의관들이 이를 이해하여 주지 않음으로 해서 국문을 받게 되었고, 다만 그가 자백을 하였기 때문에 대신(臺臣)이 이러한 쟁집(爭執)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시필이 형을 받고 지만(遲晩)함을 말한 뒤에도 오히려 애매하다고 하기에 신이, ‘애매하다면 어째서 지만하다고 하였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주상을 향하여 어찌 감히 부도(不道)한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무거운 형벌을 견딜 수 없어서 부득이 지만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과연 입대(入對)를 청하여 진달(陳達)하였던 것이고, 최석항(崔錫恒)도 또 차자를 올려 살려 주자는 의논에 붙였던 것입니다. 이제 또 대간(臺諫)의 아룀을 윤허하여 따르시는지라, 신이 이시필의 자백이 사실이 아님을 이미 알고서도 속에 있는 뜻을 제대로 다 토로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왕을 섬기는 의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신의 말을 가지고 연신(筵臣)에게 하문하여 보소서."
하니, 김일경(金一鏡)은 그를 주살해야 옳다고 극력 주장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이중관이 또 논하기를,
"신계 현령(新溪縣令) 이형수(李衡秀)는 추잡하고 비루하여 염치를 모르고 아부만 하여 분수에 넘치는 벼슬을 하였거니와, 작년 녹훈(錄勳) 때는 그의 아우 이행수(李行秀)에게 훈신(勳臣)의 교서를 쓰도록 시켜서 자기를 구차스럽게 원종훈(原從勳)에 참여시켜 그 아비를 찬성(贊成)에 추증(追贈)토록 한지라 그 비루한 작태를 입을 가진 사람이면 모두 침을 뱉았는데, 본직을 제수받고도 탐학(貪虐)을 일삼고 있습니다. 청컨대 사판에서 삭제하게 하소서. 김만영(金萬英)은 돈을 주조(鑄造)한 도적 안귀서(安龜瑞)의 생질로서 이미 대간의 계청으로 인해 좌우 포도청으로 하여금 끝까지 신문하게 하였는데, 한결같이 임의로 미루어 이제 와서 해를 넘기고서야 한 장의 초기(草記)만으로 석방을 청하니, 참으로 너무 놀랍습니다. 안귀서가 김만영의 집에 살면서 동철(銅鐵) 등의 물건들을 전부 김만영에게 맡겨 놓고 날마다 정우관(鄭宇寬)·조송(趙松) 등과 더불어 모의를 하였습니다. 이제 안귀서가 죽은 뒤에 마땅히 심문받을 자는 김만영뿐입니다. 사간원에서 논계(論啓)를 발의한 뒤에 김만영이 지레 자살(自殺)을 기도하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도 같이 모의한 사실이 있음을 알 만합니다. 청컨대 좌우 포도청으로 하여금 날마다 개좌(開坐)091)  하여 김만영을 끝까지 심문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진수(李眞洙)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4월 6일 기유

경상도 영양현(英陽縣)에 우박이 크게 내렸다.

 

4월 7일 경술

이세최(李世最)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헌장(李獻章)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4월 8일 신해

이진망(李眞望)을 승지(承旨)로, 조익명(趙翼命)을 헌납(獻納)으로, 이경열(李景說)을 장령(掌令)으로, 이세덕(李世德)을 응교(應敎)로, 서명균(徐命均)을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삼았다.

 

4월 10일 계축

대신(大臣)과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이 입시(入侍)하였다.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연해(沿海)의 어세(漁稅)의 번종(煩種)한 폐단을 논하기를,
"청컨대 이제부터는 과조(科條)를 엄격히 세워서 한 착어소(捉魚所)에서 수세(收稅)하는 수량과 각 궁방(宮房)·아문(衙門)·영문(營門)·본읍(本邑)에서 거두는 것을 통산(通算)하여 전에 비해 절반을 감해 주고, 각처에서 뇌물로 받아들이는 수세는 어느 아문을 막론하고 본어선이 등록되어 있는 아문에서 한 번 세금을 받고 첩문(帖文)을 발급한 뒤에는 비록 천 리를 다니더라도 다시 징수하지 말게 하고, 염분(鹽盆)과 어전(漁箭)은 다만 등록되어 있는 곳과 본읍(本邑)에서만 징수하도록 확실한 법전을 정한 다음, 관리로서 이를 범하는 자는 모두 파직하고, 차인(差人)으로서 거듭 징수하는 자는 뱃사람이 지방 관아에 고발하여 잡아 가두고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형추 정배(刑推定配)하도록 하며, 뱃사람이 고발하였는데도 지방관이 법을 시행하지 않는 자도 또한 파직하게 하소서. 의정부(議政府)·충훈부(忠勳府)·기로소(耆老所)에서 각기 경강(京江)에 차인(差人)을 보내어, 본사(本司)에서 절수(折受)한 곳이라고 핑계하고 수세(收稅)에 누락된 배들에게 청어(靑魚)·석어(石魚)·잡어(雜魚)의 세 가지 세금을 1년에 9냥씩 징수하고 있으니, 일이 극히 무리합니다. 이제부터는 기로소에서 해벌(海筏)에 수세(收稅)하던 것을 혁파하고, 차인 등의 영남(嶺南) 해변에서 폐단을 일으키는 자도 모두 형추(刑推)하여 귀양을 보내게 하소서. 그리고 호남(湖南)의 진소세(眞蘇稅)와 통영(統營)의 무낙인세(無烙印稅)도 모두 당장 정파(停罷)토록 하소서."
하고, 동의금(同義禁) 이진유(李眞儒)가 말하기를,
"유명홍(兪命弘)이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있을 때에 곽성(郭姓)의 편비(褊裨)와 영리(營吏)를 나핵(拿覈)하자고 대간이 계청(啓請)하기는 하였으나, 편비로서 주장(主將)을 증언하고 하리(下吏)로서 관장(官長)을 증언한다는 것은 일의 체모로 보아 미안합니다. 청컨대 속히 도로 정지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교리(校理) 박필기(朴弼夔)는 말하기를,
"일전에 중신(重臣)이 상명(常明)의 조상 분묘를 수치(修治)하고 그의 족당(族黨)을 녹용(錄用)하자는 뜻을 진달(陳達)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우리 나라가 국력이 미약하여 비록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였으나 이번에 상명의 도움은 그래도 다행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조(擧措)는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듣는 이에게 크게 거슬리게 됩니다. 청컨대 그 일은 지워버리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4월 11일 갑인

평안도 맹산(孟山)·위원(渭源) 등의 고을에 눈이 내려 종일토록 녹았고, 이산(理山)·희천(熙川)·강동(江東)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새알 만해서 농사에 피해를 주었으며, 함경도 갑산(甲山)·삼수(三水)·길주(吉州)·경흥(慶興) 등의 고을에는 눈비가 내려서 보리가 손상되었고, 강원도 강릉(江陵)에는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종발 만하여 농사에 피해를 주었다.

 

4월 12일 을묘

밤에 달이 태미성(太微星) 동원(東垣)으로 들어갔다.

 

지평(持平) 이중관(李重觀)이 이형수(李衡秀)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자고 논계(論啓)하자, 사간(司諫) 윤회(尹會)가 상소하여 이형수를 신구(伸救)하면서 경신년092)   녹훈(錄勳) 때 사대부(士大夫)가 공신 교서(敎書)를 쓴 일을 끌어대며, 이형수의 아우 이행수(李行秀)가 목호룡(睦虎龍)의 교서(敎書)를 쓴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하자, 이중관이 인피(引避)하며 말하기를,
"경신년의 녹훈(錄勳)은 국구(國舅)의 친척이 모두 원훈(元勳)에 참여하였는지라, 교명(敎命)을 쓰는 데도 반드시 당대의 명류(名流)를 구해 써서 영구히 보배롭게 간직하려는 것은 본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녹훈 때 공신이 이름을 제시하여 이행수에게 쓰기를 구하였다면 그만이겠지만, 그의 형이 낭청(郞廳)으로 있으면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는 나이 젊은 제 아우로 하여금 구차하게 채워서 벼슬길의 디딤돌을 삼는 데 충당하였으니, 비루한 그 태도는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것인데, 간신(諫臣)의 이른바, ‘무엇이 천하며, 무엇이 부끄러울 것이 있느냐?’는 말은 신으로서는 실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신이 그날 대청(臺廳)에 나갔을 적에 간원(諫院)의 신하도 한 청(廳)에 같이 앉아 있었는데, 신의 소매 속에 들어 있는 초고(草稿)를 구하여 보고 말하기를, ‘이형수는 나의 인척(姻戚)이자 같은 마을 사람이므로 정의가 매우 두터우나, 당초 이 임무를 구하여 뽑은 데 대해서는 나도 옳지 못한 것으로 알았오.’ 하였었는데, 이제 그의 상소 속의 말이 그때의 수작과는 크게 서로 차이가 있으니, 이를 공변된 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윤회(尹會)도 피혐(避嫌)하면서 이중관과는 수작한 말이 없었다고 하자, 사간 이진순(李眞淳)이 아뢰기를,
"대청(臺廳)에서의 수작을 서로 틀리게 주장하는 것은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너무도 미안한 데 관계가 됩니다. 윤회와 이중관을 모두 체직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형수는 유봉휘(柳鳳輝)에게 아부하여 부형(父兄)같이 섬겼기 때문에 당시의 무리들이 모두 비호해 주었다. 이를테면 윤회와 이중관의 수작한 말이 아무리 서로 어긋난다 해도 요컨대 두 사람의 말이 반드시 허실(虛實)이 있을 것인데도 이진순이 이를 판별(判別)하려고 하지 않고 모두 체직할 것을 청하니, 식자는 그를 그르다고 하였다. 그리고 윤회는 목호룡(睦虎龍)을 경신년의 원훈(元勳)에 견주어 같이 하려고까지 하였으니, 더더욱 사람의 양심이 없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

 

전라도 용안(龍安)·함열(咸悅)에 우박이 내려서 보리가 손상되었다.

 

4월 13일 병진

이인복(李仁復)을 승지(承旨)로, 윤순(尹淳)을 사간(司諫)으로, 김시형(金始炯)을 지평(持平)으로, 김유(金濰)를 정언(正言)으로, 조최수(趙最壽)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평안도 중화부(中和府)에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려서 나무가 뽑히고 집이 쓰러졌으며, 소 허리가 부러지고 사람이 팔다리를 다치기도 하였다.

 

4월 14일 정사

밤에 토성(土星)이 건성(建星)을 범하였다.

 

4월 15일 무오

왕대비의 병이 나아서 예조에서 고묘(告廟)·반사(頒赦)·진하(陳賀)를 거행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재신(宰臣)이 입대(入對)하였다. 병조 판서 이조(李肇)가 말하기를,
"기병(騎兵)·보병(步兵)의 군포(軍布)를 경자년093)   이후 아직까지 바치지 않고 있는 것은 필시 색리(色吏)·두목(頭目)·등패(等牌)094)   등이 중간에 덮어 두었던 소치일 것이므로, 신이 일찍이 모두 조사하여 다 독촉해 받을 것을 청하여 과연 몇몇 고을은 수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농사철이 되었다며 수령들간에는 그 수납을 정지하고자 하는데, 지금 만약 이를 허락한다면 마침내는 포흠(逋欠)이 쌓이게 될 것이니, 독촉하여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치국(治國)의 대도(大道) 세 조항을 논하였는데, ‘백성을 부리되 시기에 맞추어 하라.’는 말이 그 한 조항에 들어 있으니,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마땅히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합니다. 이제 경자년095)  ·신축년096)  을 지난 지가 4, 5년이나 되었는데, 이 농사철을 당하여 4, 5년의 포흠(逋欠)을 바치라고 독촉한다면 백성이 장차 어떻게 견디어 내겠습니까? 9, 10월까지는 기다려야 비로소 징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색리(色吏)가 훔쳐 먹은 자는 농사철을 불구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조(李肇)가 말하기를,
"세제(世弟)께서 날마다 서연(書筵)을 여는데도 익위사(翊衞司) 관원 민윤창(閔允昌)·박추(朴樞) 같은 자는 모두 밖에 나가 있어 아직 들어오지 않았고, 윤동원(尹東源)은 말미를 받아 고향으로 가서 이미 시한이 지났습니다. 청컨대 속히 소임을 살피도록 독촉하게 하소서."
하고, 대제학 조태억(趙泰億)이 청하기를,
"조종(祖宗)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나이 젊은 문관 중에서 문장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지평 김시형(金始炯)이 논계(論啓)하기를,
"문(文)·무(武)·음(蔭)의 벼슬길이 분간이 없어서 사적(仕籍)에 오른 지 10년이 채 못되어 출륙(出六)097)  을 의비(衣緋)098)  하게 하고 두어 달이 못되어 품계를 올리는가 하면, 무신(武臣)이 곧장 병사(兵使)에 제배되고, 대관(臺官)이 곧장 아장(亞長)에 제배되고, 음관(蔭官)이 곧장 군수로 뛰어 올라도 전혀 괴이쩍어하지 않으며, 근래 승문원(承文院) 관원 30여 명을 변통하여 승륙(陞六)099)  하게 한 일은 더욱 조급하게 승진하는 풍습만 열어 놓았습니다. 청컨대 묘당(廟堂)과 전조(銓曹)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서차(序次)와 격례(格例)를 건너뛰어 승진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관방(官方)100)  을 중히 여기에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또 논하기를,
"제택(第宅)이 법제를 넘는 것을 일찍이 선조(先朝)에서도 칙려(飭勵)한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세의 풍속이 사치만 좋아하고 경계하는 마음이 점차 느슨해져서 토목(土木) 일에 정교함을 다하는데, 이는 여항(閭巷)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옛 금령을 거듭 밝혀서 법제를 넘지 못하도록 하소서. 북평사(北評事)는 유달리 싫어하고 회피하여 왔는데, 이미 곧장 돌아오는 길을 열어놓고 또 자주 체직되는 관직으로 삼아서, 한결같이 명관(名官)이 스스로 편리하게 하는 데에만 맡겨 두었으니, 유달리 사람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임기가 차기 전에는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도록 법식을 정하여 시행토록 하소서. 황해 도사(黃海都事) 김명형(金命衡)은 이력도 이미 모자라는데다 또 성적(聲績)이 없고, 곽산 군수(郭山郡守) 윤이신(尹以莘)은 늙고 혼미하여 관사(官事)가 제대로 닦아지지 않습니다. 청컨대 김명형은 체직하고 윤이신은 파직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충청도 연기현(燕岐縣)에 흙비가 내렸다.

 

4월 17일 경신

임금이 도로 대조전(大造殿)으로 들어갔다.

 

4월 19일 임술

이세근(李世瑾)을 승지(承旨)로, 김시혁(金始㷜)을 집의(執義)로, 구명규(具命奎)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전라도와 경상도에 우박이 내려서 농작물이 손상되었다.

 

4월 20일 계해

대사헌(大司憲) 이세최(李世最)·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교리(校理) 박필기(朴弼夔)·수찬(修撰) 임광(任珖) 등이 입대(入對)를 청하여 김성(金姓) 궁인(宮人)이 약물을 썼는지를 조사해 내어 유사(攸司)에 분부하여 법으로 바로 잡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각기 수백 마디의 말로 극력 논쟁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전라도 만경(萬頃)·옥과(玉果)·장흥(長興)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복숭아 만하고 작은 것은 새알 만하여 보리가 손상되었다.

 

4월 21일 갑자

삼사(三司)에서 다시 입대(入對)를 청하여 김성 궁인의 일을 논쟁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교리 박필기(朴弼夔)가 말하기를,
"자후(慈候)가 편찮으시다가 바로 회복되었으니, 이는 크나큰 경사입니다. 백관의 하례(賀禮)를 주상께서 마땅히 친히 임하여 받으셔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권정례(權停例)101)  를 쓰라고 명하였다.

 

4월 22일 을축

왕대비의 질병이 나았다 하여 반사(頒赦)하고, 또 백관이 진하(陳賀)하였다.

 

박사제(朴師悌)를 정언(正言)으로, 박장윤(朴長潤)을 지평(持平)으로, 유필원(柳弼垣)을 응교(應敎)로 삼았다.

 

4월 23일 병인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박사제(朴師悌)이다.】 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능주 목사(綾州牧使) 김종연(金宗衍)은 술을 너무 좋아하는데다 또 질병이 많고, 시직(侍直) 조태만(趙泰萬)은 언론이 괴벽하고 거조가 창피합니다. 청컨대 김종연은 파직하고 조태만은 체직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4월 24일 정묘

전 이조 판서 권상유(權尙游)가 졸(卒)하였다. 권상유는 권상하(權尙夏)의 아우인데, 별다른 재능은 없었으나 다만 타고난 바탕이 침중(沈重)하고 관직에 있을 때에 염근(廉謹)하였으며, 호조 판서로 있을 적에는 법을 지키며 재정을 절검하였고, 신축년102)   간에도 근신하고 경계하면서 스스로 절조를 지켜서 몸과 명예에 하자가 없더니, 이에 이르러 집에서 졸하였다.

 

임금이 즉위한 이래 뭇 신하의 논사 장주(論事章奏)를 번번이 궁중에 머물러 두고 회답하지 않은 채 일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승정원으로 내려보냈다. 그때는 추보(追報)에 대한 논의, 사문(斯文)에 관한 송사, 토역(討逆)에 대한 논의 등으로 해서 진신(縉紳)·장보(章甫)들이 번갈아가며 소장을 올렸는데, 당시 의논들은 임금이 일체 회답을 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진정시키는 길이라고도 하였다. 이때 와서 또 좌부승지 홍중우(洪重禹), 우승지 권이진(權以鎭), 이조 참판 김일경(金一鏡), 경상도 진사(進士) 이덕표(李德標) 등 3천 6백 11명, 경기 등 5도의 유생 정하복(鄭夏復) 등 3백 30명, 윤현(尹俔) 등 8백 50명, 서울에 거주하는 생원(生員) 이기중(李箕重) 등 1백 5명, 충청도 유학(幼學) 이몽인(李夢寅) 등 6백 5명, 경기 유학 권서봉(權瑞鳳) 등 1백 52명, 공산(公山) 유학 우귀서(禹龜瑞), 연산(連山) 유학 김태원(金泰源) 등과 충청도 유학 송흡(洪潝) 등 2백 16명, 정언 성덕윤(成德潤), 사과(司果) 김중희(金重熙), 사용(司勇) 채지홍(蔡之洪), 지돈녕 홍치중(洪致中),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 예조 참판 김일경(金一鏡), 형조 판서 김일경, 부제학 이사상(李師尙), 대사간 김동필(金東弼), 호조 참의 김동필, 양주(楊州) 유학 조종세(趙宗世), 전 부사(府使) 어유봉(魚有鳳) 등과, 헌납 권익관(權益寬), 정언 이광세(李匡世), 수찬 송진명(宋眞明), 호조 참의 권중경(權重經), 형조 판서 조태억(趙泰億), 급제(及第), 박필정(朴弼正) 등과, 교리 이승원(李承源), 창은정(昌恩正) 이권(李權) 등과, 호조 참판 이진검(李眞儉), 충청 감사 윤혜교(尹惠敎), 이조 판서 이광좌(李光佐), 좌참찬 강현(姜鋧), 교리 이현장(李顯章), 수찬 이현장, 응교 윤순(尹淳), 진주(晉州) 유학 강봉의(姜鳳儀), 교리 오명신(吳命新)·윤유(尹游), 수찬 여선장(呂善長) 등과, 보덕(輔德) 이진순(李眞淳), 경기 유학 김행진(金行進) 등 62명과, 겸사서(兼司書) 윤성시(尹聖時), 부응교 권익관(權益寬), 부제학 이진유(李眞儒), 사간 유필원(柳弼垣), 지평 신치운(申致雲) 등과, 이조 참의 이진망(李眞望), 부교리 윤성시(尹聖時), 수찬 이현장(李顯章), 지평 이보욱(李普昱), 사간 이제(李濟), 대사헌 박태항(朴泰恒), 대사간 이정제(李廷濟), 부수찬 이현장, 장령 송택상(宋宅相), 사서(司書) 김상성(金尙星), 승지 이의만(李宜晩), 헌납 송진명(宋眞明), 정언 유엄(柳儼), 정언 윤서교(尹恕敎), 지평 이춘제(李春躋), 부제학 이사상(李師尙), 헌납 심준(沈埈), 검열(檢閱) 조명교(曹命敎), 사간 윤회(尹會), 창산군(昌山君) 이상(李相) 등의 소(疏) 70본(本)을 승정원에 내려보냈다. 김일경(金一鏡)의 최초의 상소(上疏)에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은 사신을 보내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야 한다는 일을 논하고 말하기를,
"역적이란 것은 천하의 극악(極惡)이자 인류의 궁흉(窮凶)인데, 그가 흉계를 행하고 악독을 부리는 데는 모략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야반(夜半)에 칼을 품은 일은 마치 노(魯)나라의 종무(鍾巫)103)  와 같았고, 음식물에 독약을 넣은 일은 마치 한(漢)나라의 양기(梁冀)·염현(閻顯)104)  과 같았으며, 국상(國喪)을 틈타서 왕명을 사칭한 일은 마치 진(秦)나라의 이사(李斯)·조고(趙高)105)  와 같았으니, 그의 은밀한 모략과 흉악한 정상으로 볼 때 참으로 일분의 인정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천 년을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다 같이 그의 시든 넋을 뭉게고 썩은 해골을 베고자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사·조고가 양기·염현만큼 악독하지 않았고 양기·염현이 종무만큼 범죄가 크지 않았으니, 만고의 역적들을 통합하여 거슬러 올라가 헤아려 보아도 오늘날의 역적 무리처럼 지극히 흉악한 자는 없었습니다. 오늘날 국가에 법이 없다면 모르거니와, 만약 법이 있다면 이이명·김창집이 어찌 감히 하루라도 그 머리를 이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숨을 쉴 수 있겠습니까? 뭇사람의 증거가 모두 성립되고 그 죄상이 분명히 드러나서 이미 다시 더 신문할 단서가 없는데 사핵할 만한 정상이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속히 금오랑(金吾郞)106)  을 파견하여 가다가 그 자리에서 즉시 두 역적을 베도록 하는 것이 법리(法理)로 헤아려 볼 때 진실로 타당할 듯합니다. 오늘날 국가가 혁신하여 인심이 불안해 하고 있는데, 역망(逆望)107)  이 아닌 외에 또 다시 극렬한 역적이 지극히 가까운 곳에 몰래 잠복하고 있다가 역괴(逆魁)가 서울에 도착하면 또다시 흉역의 불꽃이 갑자기 치솟아 헤아릴 수 없는 그 음모가 겉잡을 수 없게 일어나지 않을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다. 대개 김일경이 세제(世弟)가 영명(英明)한 것을 꺼린 나머지 역옥(逆獄) 일을 가지고 무고해 핍박하여 위협으로 충동질하려는 것이 곧 그 본래의 계획이었는데, 삼수(三手)108)  의 계획이 이이명·김창집의 자제(子弟) 내지 문객(門客) 가운데서 나왔고 보면, 이이명·김창집으로서는 어쩌면 그 일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이제 와서 이이명·김창집의 죄를 논하면서 갑자기 노(魯)나라 환공(桓公) 때의 종무(鍾巫) 사건을 장주(章奏)에 끌어대면서 공공연히 무함을 하였으니, 그 흉역(凶逆)의 심장이 이에서 이미 다 드러난지라, 교문(敎文) 속에 ‘사람을 죽여 흥건하게 흐르는 피를 밟는다.’라는 등의 말을 가디리지 않고도 온 조정이 소리없이 상심하고 탄식하면서도 능히 드러내놓고 배척하지 못하다가 그의 성토(聲討)가 갑진년109)   이후에 와서야 비로소 있었으니, 아! 너무 늦었도다.
당시 김일경의 죄를 논한 자는 단지 김동필(金東弼) 한 사람뿐이었는데, 김동필의 상소 역시 그의 추악하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과 공을 믿고 일을 잘 만들며, 논의를 주장하여 사류(士流)를 배척한 일, 수어사(守禦使)로 있을 적에 탐욕을 부린 일 따위를 지척하는데 불과하였을 뿐이고, 교문에 대해서는 다만 문형(文衡)의 선발에는 합당하지 않다는 말로만 논하기를, ‘왕언(王言)을 대신 지음에 있어 말의 조리를 이루지 못하였으며, 군더더기 말을 넣었는가 하면 인용이 잘못되어 사령(辭令) 문자에 익숙하지 못함을 이를 미루어 보아도 알 만합니다.’ 하는 정도였을 뿐, 그의 흉악한 반역의 마음에 대해서는 감히 바로 지적하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이진유(李眞儒)는 오히려 그 소를 돌려주고 외읍(外邑)으로 전보시키자고 청하였고, 최석항(崔錫恒)의 연백(筵白)으로 도로 정침된 뒤에도 이명언(李明彦)이 기어코 외읍으로 전보시키려고 이조(李肇)와 서로 다투어 논란하였으니, 당시 김일경의 그 위세를 부리며 난폭하게 구는 것이 대개 이에 이르렀던 것이다. 조종세(趙宗世)·강봉의(姜鳳儀)·이덕표(李德標)·이몽인(李夢寅)의 소는 모두 신사년110)  의 역옥(逆獄)을 뒤엎고 장 희빈(張禧嬪)을 추숭(追崇)하자고 청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이덕표의 소가 더욱더 흉악하고 사특하였으니, 그 소에 이르기를,
"허벽(許璧)의 소에는, ‘요무(妖巫) 적비(賊婢)의 말이 갑자기 당시의 단안(斷案)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하였고, 이덕배(李德培)의 소에는, ‘전하의 사친(私親)이 전하를 아드님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지없는 무함(誣陷)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 두 사람이 한 말은 다 증거가 있습니다. 이러고 보면 이 옥사를, 하루를 씻어 펴지 않으면 하루 더 어머니가 없는 나라가 되고, 한 달을 씻지 못하면 한 달 동안 어머니가 없는 나라가 되며, 한 해를 씻지 못하면 한 해 동안 어머니가 없는 나라가 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예로부터 간흉(奸凶)이 화를 국가에 전가하려는 자는 반드시 무술(巫術)의 밝히기 어려운 일로 속여 왔습니다. 한(漢)나라 적신(賊臣) 강충(江充)이 소문(蘇文)과 함께 황후(皇后)의 태자(太子)의 폐위를 모획할 적에 은밀히 호무(胡巫)를 시켜 목인(木人)을 만들어 땅에 묻은 변괴를 조성하였으니111)  , 신사년112)  의 옥사는 실로 전하의 위해(危害)를 꾀한 데서 나온 것이니, 그 사이에 어찌 강충·소문과 같은 무리가 없었겠습니까?"
하였고, 유서봉(柳瑞鳳)은 임금이 사묘(私廟)에 거둥하여 전알(展謁)할 것을 소청(疏請)하여 임창(任敞)을 죽이고, 서명균(徐命均)·홍치중(洪致中)·심공(沈珙)·송인명(宋寅明) 등을 죄주었고, 이기중(李箕重)은 사친(私親)을 추존하자고 한 조신(朝臣)들의 논의를 소척(疏斥)하였고, 윤현(尹俔)의 소는 송시열(宋時烈)을 변무(辨誣)하기 위하여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을 배척하였고, 정하복(鄭夏復)의 소는 윤선거·윤증을 위하여 윤현의 소가 거짓임을 밝히고 송시열을 배척하였고, 홍우저(洪禹著)의 소는 권상하(權尙夏)를 위하여 신치운(申致雲)의 거짓을 변명하였고, 어유봉(魚有鳳)은 그의 스승 김창협(金昌協)의 서원을 훼철하지 말라고 소청하였고, 어유귀(魚有龜)는 상소하기를,
"송시열의 도덕과 학문은 백세(百世)의 종사(宗師)가 될 만하여 선왕께서 존경하고 사모하기를 시종 변하지 않았습니다. 윤선거·윤증의 죄를 통찰하시고 분명한 판단을 가하시어 처분이 준엄하셨고, 전하께서 대리 청정하시던 초기에 선왕께서 특별히 비교(批敎)를 내려 전수(傳授)하신 그 말씀이 정녕하고도 간절하셨으며, 또한 어제(御製) 중에서 별도로 써 보이신 그 분명한 성훈(聖訓)은 이 세상 무궁히 전수할 만합니다. 이제 유생들이 상소하여 송시열을 소척함으로 인하여 갑자기 품처(稟處)하라는 명을 내리시니, 당론에 고착되어 있는 해조(該曹)와 묘당(廟堂)이 혹은 현란(眩亂)한 폐단이 있게 한다면, 이는 세도(世道)를 무너뜨리고 성덕(聖德)에 누(累)를 끼침이 클 것입니다. 청컨대 그 명을 속히 정침하시고 한결같이 선왕의 뜻을 따르소서."
하였고, 이광세(李匡世)는 소론(疏論)하기를,
"심단(沈檀)이 판의금(判義柰)이 되어 임창의 옥안(獄案)을 다스리면서 결안(結案)이 나오기도 전에 정형(正刑)을 하자고 청하였습니다. 심단의 관직을 파하여 옥관(獄官)으로서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자의 경계로 삼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윤취상(尹就尙)은 윤각(尹慤)의 아주 가까운 친척으로서, 자신이 중권(重權)을 맡고 있으면서도 여느 사람이나 다름없이 버젓이 길거리를 활보하면서 조금도 혐의스러워하는 데가 없었습니다. 청컨대 파직토록 하소서."
하였다. 그 밖의 장소(章疏)들은 더러는 은총을 구하고, 더러는 사직을 하고, 또 더러는 시비를 따지는 등, 모두가 잗달은 것이어서 기록할 만한 것이 없었다.

 

삼사(三司)에서 입대(入對)를 청하여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다시 논쟁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정언 구명규(具命奎)·박사제(朴師悌)가 논하기를,
"교리 여선장(呂善長)·수찬 이진수(李眞洙)는 지난 겨울 복합(伏閤) 때 사피(辭避)하는 사연 중에 ‘그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떠나가야 한다.’는 등의 말로 다시 나올 수 없다는 단서로 삼더니, 이번에 역비(逆婢)를 사출(査出)할 것을 청하는 아룀에도 진참(進參)할 생각이 없습니다. 규경(規警)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으니, 청컨대 모두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처음에 김성(金姓) 궁인(宮人)이 독약을 탔다는 말이 김성절(金盛節)의 초사(招辭)에서 발설되어, 국청(鞫廳) 및 전후 대간(臺諫)의 논계에서 그를 조사해 내어 죄를 다스리자고 여러 번 청하였는데, 임금이 그때마다 윤허를 하지 않고 심지어 ‘원래 그런 일이 없었다.’고 전교하기까지 하였는데, 외정(外庭)에서는 오히려 더 강력하게 계청을 하였다. 한편 숙명 공주(淑明公主)의 아들 첨지(僉知) 심정보(沈廷輔)의 아내 이씨(李氏)는 곧 이진유(李眞儒)의 고모인데, 언젠가 대내(大內)로 뵈러 갔더니, 왕대비(王大妃)가 이씨에게 말하기를,
"김성 궁인이 참으로 의심스러운 데가 있다면 주상께서 어찌 윤허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분명히 조사해 내고 싶지 않으랴마는 궁중에 실지로 그러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외정(外庭)에서 고집해 마지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왕대비의 뜻은 이를 이진유 등에게 들려 주려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이진유는 다시 이 논의를 주장하지 않았는데, 신치운(申致雲)·구명규(具命奎) 등은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무리의 비유를 맞추느라 전후의 일을 더욱 확대하여 복합 청대(伏閤請對)하면서 모든 관료들을 다 몰아다가 각기 소를 올려 논쟁하도록 하였고, 권두경(權斗經)은 대신(大臣)들이 정청(庭請)을 선뜻 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이광좌(李光佐)를 몰아내려고 꾀하였고, 윤서교(尹恕敎)는 상소에서 ‘이 역적이 선조(先朝) 때부터 공봉(供奉)해 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에 전하께서 사랑하는 것이라면 역시 사랑하였는지라, 전하의 효심(孝心)에 차마 못할 바가 있어서 이처럼 멈칫거리고 있는 것이라.’고까지 하였는가 하면, 또 효종 때 조 서인(趙庶人)을 목벤 고사를 끌어대었으니, 그 의도는 선조의 후궁 영빈 김씨(寧嬪 金氏)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을사년113)  에 번국(飜局)될 즈음에 윤봉조(尹鳳朝)·방만규(方萬規)의 무리들이 드디어 이것을 구실로 화를 전가시킬 계획을 세우고 감히 말해서 안 될 처지까지도 함부로 마음대로 무고하며 오욕하였으니 이들의 죄는 본시 위로 하늘 끝까지 닿았거니와, 역시 신치운·구명규·윤서교 등이 남의 화를 즐거워하고 일꾸미기를 좋아하는 거조를 스스로 불러온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월 25일 무진

양사(兩司)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4월 26일 기사

삼사(三司)에서 다시 입대(入對)를 청하여 김성 궁인의 일을 논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4월 27일 경오

밤에 유성(流星)이 우성(牛星) 밑에서 나왔다.

 

양사(兩司)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봉년(李鳳年)을 승지(承旨)로, 임광(任珖)을 교리(校理)로, 조최수(趙最壽)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4월 28일 신미

햇무리하였다.

 

평안도 강계(江界)·위원(渭原)과 함경도 함흥(咸興)에 큰 눈이 내렸다.

 

4월 29일 임신

삼사(三司)에서 다시 입대를 청하여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논쟁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조(李肇)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유봉휘(柳鳳輝)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이광보(李匡輔)를 수찬(修撰)으로, 오수원(吳遂元)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저(李著)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4월 30일 계유

양사(兩司)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박장윤(朴長潤)이다.】 에서 아뢰기를,
"선왕(先王)의 지문(誌文)을 흉역(凶逆)이 지은 것으로 유궁(幽宮) 곁에 묻을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속히 명하시어 흉적 이이명(李頤命)이 지은 지문을 삭제해 버리고, 다시 진신(搢紳) 중에서 문학에 능한 사람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에서 대신에게 문의할 것을 청하니,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선조(先朝) 경오년114)  간에 선릉(先陵)의 지문을 고쳐 지을 것을 청하는 자가 있어서 선왕께서 여러 신하에게 하순(下詢)하신 바, 어떤이가 찬궁(欑宮)115)  의 옆을 뚫는다는 것은 안 될 일이라고 하매, 선왕께서 드디어 ‘바로 나의 뜻과 합치한다.’는 전교가 있었고, 다만 지문을 고쳐 짓는 것만 사관(史官)에게 분부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선조에서 이미 시행하신 선례를 따라 고쳐 짓기만 하여 사관에게 분부하여 후세에 분명이 전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사체(事體)가 중대하다며 고쳐 짓지 말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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