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12권, 숙종 7년 1681년 8월

싸라리리 2025. 10. 23.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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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신사

임금이 특별 유지(諭旨)를 내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 및 전(前) 집의(執義)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이상(李翔)을 특별히 불렀으나, 모두 병이 들었다는 것으로 사양하고 나아오지 않았다. 【비망(備忘)은 위에 보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임금이 여러 유신(儒臣)을 후하게 예우(禮遇)함이 지극하다. 지금 연석에 불러 들이는 특별 유지를 읽어보니, 그 내용이 간절하고 측연하며 매우 정성스러워 함께 〈국사를〉 다스리도록 도움을 구한 풍성한 뜻이 가득하였다. 그 장려하는 내용 또한 도덕(道德)이 융성한 인사가 아니면 감히 감당하지 못할 바가 있었으니, 아! 이보다 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은혜는 비록 융성하다고 하더라도 불러들이도록 유시하는 명령이 언제나 여러 신하들의 진달과 주청을 인하여 나오니, 한갓 한 때의 허례(虛禮)와 미규(美規)가 되는 데 그칠 뿐이다. 두어 신하의 현명함에 대해서도 깊이 알고 돈독하게 좋아함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기를 옛날의 훌륭한 제왕이 자나깨나 〈현명한 사람을 구하려고〉 걱정하느라 편안한 자리가 없었던 것과 같은 것은 기필하지 못하였으니, 두어 신하가 경솔하게 진출하여 명령을 성취 시키기 어려운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아! 이때에 주상(主上)께서 이미 혁연(赫然)하게 다시 새롭게 하여 사류(士流)를 등용 진출시키면서, 성자(聖資)가 영명하고 지혜로와 점차로 국사(國事)를 익히며, 날마다 청단(聽斷)하기를 부지런히 하여 큰 일 하기를 즐겨하시니, 이는 바로 잘 다스릴 만한 기회인 것이다. 그런데 다스리는 도리를 확고하게 세우는 근본과 요점을 알지 못하고, 대신(大臣) 또한 잘 조화시켜 보필하는 도리를 잘못하고 그전 사람들의 잘못된 자취를 따라 시사(時事)가 날로 글러지게 하였으므로, 식견이 있는 사람은 진실로 벌써 가만히 그것을 개탄하였다. 만약 여러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조정에 모여서 나아가 마음을 합하여 함께 구제하게 한다면, 비록 지금의 세상 도덕을 만회(挽回)시킬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도모하여 다스리는 데는 틀림없이 얼마만큼은 구제하여 국가의 명맥을 부지하고 늘일 수 있을 터인데 저들이 시세(時世)가 다스리기 어렵다고 헤아리면서 나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송시열(宋時烈)은 세 조정을 섬긴 덕망이 있는 자이며 한 시대 유학자의 우두머리로 세상에서 존경하고 신임하는 바이지만, 정신[神明]이 이미 쇠약하여 큰 일을 하기는 어려우며, 또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부족하고 좋아하는 바에 치우쳤다. 그가 지난해 겨울 조정에 나왔을 적에 임금에게 사람을 천거하였는데, 모두 사람들의 뜻에 차지 않았다. 박세채(朴世采)는 식견이 정교하고 깊이가 있으며 학문은 미묘하고 치밀하다. 윤증(尹拯)은 탐색(探索)하는 공부는 비록 조금 부족하다 하더라도 지조와 행실이 돈독(敦篤)하며 〈지혜를〉 감춰 둔 것이 매우 깊다. 이들은 모두 순박하고 아담한 허물이 적은 유학자들이지만 세상을 경륜할 역량(力量)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이상(李翔)은 항상 주장하는 의논이 준절하고 격렬하지만 학술(學術)이 본래부터 천박(淺薄)하고 시골에 살 때에 또 재물을 증식했다는 비난이 있었는데도, 조정에서 언제나 섞여서 천거하고 예우를 더하도록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비록 나아오게 하여 기용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잘 도울 수가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74면
【분류】역사-편사(編史)
사신(史臣)은 논한다. "임금이 여러 유신(儒臣)을 후하게 예우(禮遇)함이 지극하다. 지금 연석에 불러 들이는 특별 유지를 읽어보니, 그 내용이 간절하고 측연하며 매우 정성스러워 함께 〈국사를〉 다스리도록 도움을 구한 풍성한 뜻이 가득하였다. 그 장려하는 내용 또한 도덕(道德)이 융성한 인사가 아니면 감히 감당하지 못할 바가 있었으니, 아! 이보다 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은혜는 비록 융성하다고 하더라도 불러들이도록 유시하는 명령이 언제나 여러 신하들의 진달과 주청을 인하여 나오니, 한갓 한 때의 허례(虛禮)와 미규(美規)가 되는 데 그칠 뿐이다. 두어 신하의 현명함에 대해서도 깊이 알고 돈독하게 좋아함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기를 옛날의 훌륭한 제왕이 자나깨나 〈현명한 사람을 구하려고〉 걱정하느라 편안한 자리가 없었던 것과 같은 것은 기필하지 못하였으니, 두어 신하가 경솔하게 진출하여 명령을 성취 시키기 어려운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아! 이때에 주상(主上)께서 이미 혁연(赫然)하게 다시 새롭게 하여 사류(士流)를 등용 진출시키면서, 성자(聖資)가 영명하고 지혜로와 점차로 국사(國事)를 익히며, 날마다 청단(聽斷)하기를 부지런히 하여 큰 일 하기를 즐겨하시니, 이는 바로 잘 다스릴 만한 기회인 것이다. 그런데 다스리는 도리를 확고하게 세우는 근본과 요점을 알지 못하고, 대신(大臣) 또한 잘 조화시켜 보필하는 도리를 잘못하고 그전 사람들의 잘못된 자취를 따라 시사(時事)가 날로 글러지게 하였으므로, 식견이 있는 사람은 진실로 벌써 가만히 그것을 개탄하였다. 만약 여러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조정에 모여서 나아가 마음을 합하여 함께 구제하게 한다면, 비록 지금의 세상 도덕을 만회(挽回)시킬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도모하여 다스리는 데는 틀림없이 얼마만큼은 구제하여 국가의 명맥을 부지하고 늘일 수 있을 터인데 저들이 시세(時世)가 다스리기 어렵다고 헤아리면서 나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송시열(宋時烈)은 세 조정을 섬긴 덕망이 있는 자이며 한 시대 유학자의 우두머리로 세상에서 존경하고 신임하는 바이지만, 정신[神明]이 이미 쇠약하여 큰 일을 하기는 어려우며, 또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부족하고 좋아하는 바에 치우쳤다. 그가 지난해 겨울 조정에 나왔을 적에 임금에게 사람을 천거하였는데, 모두 사람들의 뜻에 차지 않았다. 박세채(朴世采)는 식견이 정교하고 깊이가 있으며 학문은 미묘하고 치밀하다. 윤증(尹拯)은 탐색(探索)하는 공부는 비록 조금 부족하다 하더라도 지조와 행실이 돈독(敦篤)하며 〈지혜를〉 감춰 둔 것이 매우 깊다. 이들은 모두 순박하고 아담한 허물이 적은 유학자들이지만 세상을 경륜할 역량(力量)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이상(李翔)은 항상 주장하는 의논이 준절하고 격렬하지만 학술(學術)이 본래부터 천박(淺薄)하고 시골에 살 때에 또 재물을 증식했다는 비난이 있었는데도, 조정에서 언제나 섞여서 천거하고 예우를 더하도록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비록 나아오게 하여 기용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잘 도울 수가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74면
【분류】역사-편사(編史)
사신(史臣)은 논한다. "임금이 여러 유신(儒臣)을 후하게 예우(禮遇)함이 지극하다. 지금 연석에 불러 들이는 특별 유지를 읽어보니, 그 내용이 간절하고 측연하며 매우 정성스러워 함께 〈국사를〉 다스리도록 도움을 구한 풍성한 뜻이 가득하였다. 그 장려하는 내용 또한 도덕(道德)이 융성한 인사가 아니면 감히 감당하지 못할 바가 있었으니, 아! 이보다 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은혜는 비록 융성하다고 하더라도 불러들이도록 유시하는 명령이 언제나 여러 신하들의 진달과 주청을 인하여 나오니, 한갓 한 때의 허례(虛禮)와 미규(美規)가 되는 데 그칠 뿐이다. 두어 신하의 현명함에 대해서도 깊이 알고 돈독하게 좋아함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기를 옛날의 훌륭한 제왕이 자나깨나 〈현명한 사람을 구하려고〉 걱정하느라 편안한 자리가 없었던 것과 같은 것은 기필하지 못하였으니, 두어 신하가 경솔하게 진출하여 명령을 성취 시키기 어려운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아! 이때에 주상(主上)께서 이미 혁연(赫然)하게 다시 새롭게 하여 사류(士流)를 등용 진출시키면서, 성자(聖資)가 영명하고 지혜로와 점차로 국사(國事)를 익히며, 날마다 청단(聽斷)하기를 부지런히 하여 큰 일 하기를 즐겨하시니, 이는 바로 잘 다스릴 만한 기회인 것이다. 그런데 다스리는 도리를 확고하게 세우는 근본과 요점을 알지 못하고, 대신(大臣) 또한 잘 조화시켜 보필하는 도리를 잘못하고 그전 사람들의 잘못된 자취를 따라 시사(時事)가 날로 글러지게 하였으므로, 식견이 있는 사람은 진실로 벌써 가만히 그것을 개탄하였다. 만약 여러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조정에 모여서 나아가 마음을 합하여 함께 구제하게 한다면, 비록 지금의 세상 도덕을 만회(挽回)시킬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도모하여 다스리는 데는 틀림없이 얼마만큼은 구제하여 국가의 명맥을 부지하고 늘일 수 있을 터인데 저들이 시세(時世)가 다스리기 어렵다고 헤아리면서 나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송시열(宋時烈)은 세 조정을 섬긴 덕망이 있는 자이며 한 시대 유학자의 우두머리로 세상에서 존경하고 신임하는 바이지만, 정신[神明]이 이미 쇠약하여 큰 일을 하기는 어려우며, 또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부족하고 좋아하는 바에 치우쳤다. 그가 지난해 겨울 조정에 나왔을 적에 임금에게 사람을 천거하였는데, 모두 사람들의 뜻에 차지 않았다. 박세채(朴世采)는 식견이 정교하고 깊이가 있으며 학문은 미묘하고 치밀하다. 윤증(尹拯)은 탐색(探索)하는 공부는 비록 조금 부족하다 하더라도 지조와 행실이 돈독(敦篤)하며 〈지혜를〉 감춰 둔 것이 매우 깊다. 이들은 모두 순박하고 아담한 허물이 적은 유학자들이지만 세상을 경륜할 역량(力量)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이상(李翔)은 항상 주장하는 의논이 준절하고 격렬하지만 학술(學術)이 본래부터 천박(淺薄)하고 시골에 살 때에 또 재물을 증식했다는 비난이 있었는데도, 조정에서 언제나 섞여서 천거하고 예우를 더하도록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비록 나아오게 하여 기용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잘 도울 수가 있겠는가?"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민유중(閔維重)이 겸임했던 여러 직임을 사임(辭任)한 데 대하여 허락하도록 청하였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애당초 본병(本兵)031)  을 체임(遞任)하게 한 것은 진실로 국구(國舅)가 정사(政事)에 참여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까닭에서인데, 지금 겸임하는 것 또한 본병에 밑돌지 않으니, 국구라고 하여 본병을 체임시킨 의도가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민유중은 진실로 사류(士流)이니 지금의 폐단은 참으로 염려할 것이 아니겠지만, 나중에 국구가 된 사람이 모두 민유중과 같다고는 기필하지 못할 것이고, 이 전례를 그대로 답습하여 영원토록 구실(口實)을 삼게 되면 왕비의 친척이 정사에 참여하게 되어 그 근심스러움이 장차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며, 틀림없이 어지럽게 멸망하는 디딤돌이 되지 않는다고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준엄한 비답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비답 내용은 위에 보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민유중(閔維重)이 그대로 기밀(機密)의 정무(政務)를 겸임하는 것은 진실로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는 것인 만큼, 연신(筵臣)들이 단지 도리에 의거하여 그것을 논하는 것이 가한데도, ‘사류(士流)이니 당장에는 진실로 염려할 것이 아니다.’는 등의 말과 같은 것은 말이 많고 굽혀서 따르는 의도가 너무나 많으니, 이와 같이 하면서 임금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들 그것이 얻어지겠는가? 대체로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이 비록 공변된 의논에 핍박되어 이렇게 차자(箚子)를 올려 논하지만 실현성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민유중이 비록 사류(士流)라고 일컬어지기는 하지만, 그가 평상시 자신을 단속하고 제재하는 데 있어서 본래 결단성 있게 엄격하게 하지 못하다가, 국구(國舅)가 되어서는 재해와 흉년이 매우 심한 때를 당하였는데도, 조정의 명령으로 내려 준 금(金)을 극력 사양하지 않고 집[第宅]을 성대하게 수리하였으며, 얼마 있다가 상신(相臣)이 주청한 것을 인하여 또 진휼청(賑恤廳) 당상(堂上)의 임무를 검찰(檢察)하게 하였으므로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그르게 여겼다. 아! 여러 대신(大臣)들이 언제나 민유중을 그대로 기밀의 업무를 검찰하도록 주청한 것이 비록 더러는 한 때의 인재를 아끼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만약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하고 척리(戚里)에게 아부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장차 어떻게 자신이 해명하겠는가? 애석하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574면
【분류】역사-편사(編史)


[註 031] 본병(本兵) : 병조 판서(兵曹判書).
사신(史臣)은 논한다. "민유중(閔維重)이 그대로 기밀(機密)의 정무(政務)를 겸임하는 것은 진실로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는 것인 만큼, 연신(筵臣)들이 단지 도리에 의거하여 그것을 논하는 것이 가한데도, ‘사류(士流)이니 당장에는 진실로 염려할 것이 아니다.’는 등의 말과 같은 것은 말이 많고 굽혀서 따르는 의도가 너무나 많으니, 이와 같이 하면서 임금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들 그것이 얻어지겠는가? 대체로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이 비록 공변된 의논에 핍박되어 이렇게 차자(箚子)를 올려 논하지만 실현성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민유중이 비록 사류(士流)라고 일컬어지기는 하지만, 그가 평상시 자신을 단속하고 제재하는 데 있어서 본래 결단성 있게 엄격하게 하지 못하다가, 국구(國舅)가 되어서는 재해와 흉년이 매우 심한 때를 당하였는데도, 조정의 명령으로 내려 준 금(金)을 극력 사양하지 않고 집[第宅]을 성대하게 수리하였으며, 얼마 있다가 상신(相臣)이 주청한 것을 인하여 또 진휼청(賑恤廳) 당상(堂上)의 임무를 검찰(檢察)하게 하였으므로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그르게 여겼다. 아! 여러 대신(大臣)들이 언제나 민유중을 그대로 기밀의 업무를 검찰하도록 주청한 것이 비록 더러는 한 때의 인재를 아끼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만약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하고 척리(戚里)에게 아부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장차 어떻게 자신이 해명하겠는가? 애석하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574면
【분류】역사-편사(編史)


[註 031] 본병(本兵) : 병조 판서(兵曹判書).
사신(史臣)은 논한다. "민유중(閔維重)이 그대로 기밀(機密)의 정무(政務)를 겸임하는 것은 진실로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는 것인 만큼, 연신(筵臣)들이 단지 도리에 의거하여 그것을 논하는 것이 가한데도, ‘사류(士流)이니 당장에는 진실로 염려할 것이 아니다.’는 등의 말과 같은 것은 말이 많고 굽혀서 따르는 의도가 너무나 많으니, 이와 같이 하면서 임금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들 그것이 얻어지겠는가? 대체로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이 비록 공변된 의논에 핍박되어 이렇게 차자(箚子)를 올려 논하지만 실현성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민유중이 비록 사류(士流)라고 일컬어지기는 하지만, 그가 평상시 자신을 단속하고 제재하는 데 있어서 본래 결단성 있게 엄격하게 하지 못하다가, 국구(國舅)가 되어서는 재해와 흉년이 매우 심한 때를 당하였는데도, 조정의 명령으로 내려 준 금(金)을 극력 사양하지 않고 집[第宅]을 성대하게 수리하였으며, 얼마 있다가 상신(相臣)이 주청한 것을 인하여 또 진휼청(賑恤廳) 당상(堂上)의 임무를 검찰(檢察)하게 하였으므로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그르게 여겼다. 아! 여러 대신(大臣)들이 언제나 민유중을 그대로 기밀의 업무를 검찰하도록 주청한 것이 비록 더러는 한 때의 인재를 아끼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만약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하고 척리(戚里)에게 아부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장차 어떻게 자신이 해명하겠는가? 애석하다."

 

8월 14일 갑오

이사명(李師命)을 비변사 제조(備邊司提調)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이사명이 과거에 급제한 지 겨우 한 해가 지났을 때 공훈[勳庸]을 끼고 재상(宰相)의 직질(職秩)에 발탁되었으며, 조정에서는 일찍이 그의 재능을 낱낱이 시험하여 보지도 않고 갑자기 묘당(廟堂)의 기밀스럽고 긴요한 중임을 맡게 하였다. 그 뒤에 대신들이 여러번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에 주의(注擬)하자, 당시의 의논이 매우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75면
【분류】역사-편사(編史)
사신(史臣)은 논한다. "이사명이 과거에 급제한 지 겨우 한 해가 지났을 때 공훈[勳庸]을 끼고 재상(宰相)의 직질(職秩)에 발탁되었으며, 조정에서는 일찍이 그의 재능을 낱낱이 시험하여 보지도 않고 갑자기 묘당(廟堂)의 기밀스럽고 긴요한 중임을 맡게 하였다. 그 뒤에 대신들이 여러번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에 주의(注擬)하자, 당시의 의논이 매우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8월 19일 기해

장리(贓吏)의 천주(薦主)를 파면시켰다. 전(前) 판윤(判尹) 이관징(李觀徵)이 남몽뢰(南夢賚)를 잘못 추천(推薦)하여 좌장(坐贓)으로 형벌을 받았는데, 이조(吏曹)에서 정사년032)  의 수교(受敎)에 의거하여 그를 파면(罷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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