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12권, 숙종 7년 1681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23.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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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1일 임신

고(故) 집의(執義) 윤선거(尹宣擧)의 처(妻) 이씨(李氏)를 정려(旌閭)하도록 명하였다. 주강(晝講) 때에 지사(知事) 이민서(李敏叙)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병자년025)  ·정축년026)   호란(胡亂) 뒤에 절의(節義)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이들은 거의 모두 정문(旌門)을 세워 주고 포상(褒賞)하였는데, 유독 윤선거의 처 이씨에게만 그것이 빠졌습니다. 대체로 이씨가 적(賊)의 칼날이 급박하게 닥치려는 때를 당하여 자신이 더렵혀지고 욕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먼저 스스로 결단하여 조용히 죽음을 택하였으니, 의열(義烈)이 더욱 뛰어납니다. 그런데 윤선거는 그와 약속를 하였지만 함께 죽을 수 없었으므로 몹시 한스럽게 여기며, 일생(一生)을 죄인으로 자처(自處)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 올려서 청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집안에서도 여지껏 감히 진달하여 알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의열(義烈)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것은 온 세상이 알고 있는 바이니, 작설(綽楔)027)  하는 전례(典禮)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정려(旌閭)하도록 하였다. 이씨(李氏)는 바로 징사(徵士)028) 윤증(尹拯)의 어머니이다. 이씨(李氏)가 절의(節義)에 죽은 것이 애당초 어찌 윤선거(尹宣擧)와의 약속에 관계되었겠으며, 윤선거가 일생 동안 폐인(廢人)으로 자처(自處)한 것이 어찌 전적으로 이씨를 위하여 몹시 한스러워 하는 데서 말미암았을 뿐이겠는가? 처음 사초(史草)를 정리한 자가 인용한 북지(北地)029)  의 왕사(王事)030)  는 송시열(宋時烈)의 만년(晩年)에 화를 내고 원망하는 말씨[口氣]를 본받아 서술하여 은연(隱然)히 두 사람을 어두운 데 처하게 하였으나, 공변된 의논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몰랐으로 식자(識者)들이 그것을 그르게 여겼다.

 

7월 미상 갑오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 차자(箚子)를 올려 겸임하고 있는 경연(經筵)·비국(備局)·선혜청(宣惠廳)·괴원(槐院)024)   등의 직임을 사임(辭任)하자, 임금이 후하게 비답(批答)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는데, 민유중이 국구(國舅)로서 인혐(引嫌)하였기 때문이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국가의 제도는 준행하지 않을 수 없으며, 폐단의 조짐은 미리 막지 않을 수 없으며, 공변된 의논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민유중(閔維重)이 비록 당시의 인망(人望)을 얻고 재능이 있는 신하라고 일컫기는 하지만, 어찌 국사(國事)를 도모하는 지위에 있지 않는다고 국가가 다스려지지 않겠는가? 임금이 사양하여 피하려는 그의 주청을 윤허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당시의 대신들도 함께 책임이 있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74면
【분류】역사-편사(編史)


[註 024] 괴원(槐院) : 승문원(承文院)의 별칭.
사신(史臣)은 논한다. "국가의 제도는 준행하지 않을 수 없으며, 폐단의 조짐은 미리 막지 않을 수 없으며, 공변된 의논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민유중(閔維重)이 비록 당시의 인망(人望)을 얻고 재능이 있는 신하라고 일컫기는 하지만, 어찌 국사(國事)를 도모하는 지위에 있지 않는다고 국가가 다스려지지 않겠는가? 임금이 사양하여 피하려는 그의 주청을 윤허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당시의 대신들도 함께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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