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12권, 숙종 7년 1681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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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6일 을미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사명(李師命)이 소(疏)를 올려 호포(戶布)의 편의(便宜)와 양서(兩西)034)  에 먼저 시험할 것을 극력 논하고, 군자 별창(軍資別倉)을 설치하여 산해(山海)와 주선(舟船)의 이익을 관리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후한 비답을 내리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변통(變通)하게 하도록 허락하셨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이사명(李師命)은 글을 잘 짓는 재주도 있으며, 모양도 단정하고 말도 잘하지만 내심은 실제로 바르지 않았다. 기미년035)  과 경신년036)   사이에 김석주(金錫胄)가 허적(許積) 등을 주벌(誅罰)하려고 비밀리 모의하였다. 이사명의 어머니는 김석주의 처(妻)와 자매(姉妹) 사이였으며, 이사명은 또 김석주 누님의 사위였다. 이 때문에 이사명이 그 모의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인해서 환관(宦官) 김현(金鉉) 등과 교통(交通)하였다. 그가 과거에 급제할 적에 김석주가 시험을 관장하였으므로 이사명이 미리 시험 제목을 알았으며, 허견(許堅) 등의 옥사(獄事)가 이루어짐에 이르러서는 이사명이 당연히 훈신(勳臣)으로 기록되어야 하는데도, 당시 이사명이 직부(直赴)하여 전시(殿試)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이력(履歷)이 없으면서 자계(資階)를 뛰어넘은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 마침내 훈신으로 기록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당로(當路)037)  가 임금에게 아뢰어 정시(庭試)를 베풀도록 해서 이사명이 장원을 차지하였다. 그 때 마침 옥당(玉堂)에서 바야흐로 〈훈신을〉 새로 기록하는 것을 의논하므로 또 참여시켜 주도록 요구하였으나, 의논하는 사람들이 허락하지 아니하자, 이에 중비(中批)038)  로 특별히 이사명을 임명하여 수찬(修撰)으로 삼았다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보사훈(保社勳) 2등(等)으로 추가하여 기록하였다. 날마다 달마다 뛰어넘어 발탁되어서 아경(亞卿)과 봉군(封君)되는 데 이르렀으므로, 이사명이 스스로 재능이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다고 여겼으며, 장상(將相)의 지위는 아침이나 저녁이면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문득 정사에 관계하고 싶어서 이에 소를 올려 호포(戶布)를 〈시행하도록〉 청하고 그의 문장과 달변을 펴서 임금의 뜻을 기울이려고 하였지만, 소(疏) 가운데 구상하여 배열한 내용들이 서로 어긋나거나 배치되는 것이 많이 있었다. 대체로 호포법(戶布法)은 물고(物故)한 자와 아약(兒弱)에게 포(布)를 징수하는 억울함을 없애려고 한 것이었으므로 본래는 자연히 아름다운 의도였다. 그래서 이보다 앞서 식견이 있는 자들이 그 의논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러나 새로운 법을 마련하여 시행하는데는 그 시기를 적당하게 잡는 것이 요긴하다. 지금 뭇 백성들이 곤궁하여 수심에 잠기고 진실된 은혜도 신임하지 않는 터에 이사명이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계교를 시행하도록 하여 조정의 권력을 잡으려고 하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575면
【분류】역사-편사(編史)


[註 034] 양서(兩西) : 황해도와 평안도.[註 035] 기미년 : 1679 숙종 5년.[註 036] 경신년 : 1680 숙종 6년.[註 037] 당로(當路) : 요직 또는 그 사람.[註 038] 중비(中批) : 전형 없이 임금의 특지로 관원을 임명하는 일.
사신(史臣)은 논한다. "이사명(李師命)은 글을 잘 짓는 재주도 있으며, 모양도 단정하고 말도 잘하지만 내심은 실제로 바르지 않았다. 기미년035)  과 경신년036)   사이에 김석주(金錫胄)가 허적(許積) 등을 주벌(誅罰)하려고 비밀리 모의하였다. 이사명의 어머니는 김석주의 처(妻)와 자매(姉妹) 사이였으며, 이사명은 또 김석주 누님의 사위였다. 이 때문에 이사명이 그 모의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인해서 환관(宦官) 김현(金鉉) 등과 교통(交通)하였다. 그가 과거에 급제할 적에 김석주가 시험을 관장하였으므로 이사명이 미리 시험 제목을 알았으며, 허견(許堅) 등의 옥사(獄事)가 이루어짐에 이르러서는 이사명이 당연히 훈신(勳臣)으로 기록되어야 하는데도, 당시 이사명이 직부(直赴)하여 전시(殿試)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이력(履歷)이 없으면서 자계(資階)를 뛰어넘은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 마침내 훈신으로 기록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당로(當路)037)  가 임금에게 아뢰어 정시(庭試)를 베풀도록 해서 이사명이 장원을 차지하였다. 그 때 마침 옥당(玉堂)에서 바야흐로 〈훈신을〉 새로 기록하는 것을 의논하므로 또 참여시켜 주도록 요구하였으나, 의논하는 사람들이 허락하지 아니하자, 이에 중비(中批)038)  로 특별히 이사명을 임명하여 수찬(修撰)으로 삼았다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보사훈(保社勳) 2등(等)으로 추가하여 기록하였다. 날마다 달마다 뛰어넘어 발탁되어서 아경(亞卿)과 봉군(封君)되는 데 이르렀으므로, 이사명이 스스로 재능이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다고 여겼으며, 장상(將相)의 지위는 아침이나 저녁이면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문득 정사에 관계하고 싶어서 이에 소를 올려 호포(戶布)를 〈시행하도록〉 청하고 그의 문장과 달변을 펴서 임금의 뜻을 기울이려고 하였지만, 소(疏) 가운데 구상하여 배열한 내용들이 서로 어긋나거나 배치되는 것이 많이 있었다. 대체로 호포법(戶布法)은 물고(物故)한 자와 아약(兒弱)에게 포(布)를 징수하는 억울함을 없애려고 한 것이었으므로 본래는 자연히 아름다운 의도였다. 그래서 이보다 앞서 식견이 있는 자들이 그 의논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러나 새로운 법을 마련하여 시행하는데는 그 시기를 적당하게 잡는 것이 요긴하다. 지금 뭇 백성들이 곤궁하여 수심에 잠기고 진실된 은혜도 신임하지 않는 터에 이사명이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계교를 시행하도록 하여 조정의 권력을 잡으려고 하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월 19일 무술

김만중(金萬重)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김만중은 바로 김만기(金萬基)의 동생이다. 젊어서는 문장(文章)과 풍아(風雅)로 칭찬을 받았으며, 사리(事理)를 논하는 것이 지극하여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 쪼개어 분석하였으므로 친구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가까운 척리(戚里)의 지위에 있으면서부터 하는 일이 방자[縱恣]하고 논의(論議)도 치우치고 그릇되어 점차로 훌륭한 부류들과 어긋났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575면
【분류】역사-편사(編史)
사신(史臣)은 논한다. "김만중은 바로 김만기(金萬基)의 동생이다. 젊어서는 문장(文章)과 풍아(風雅)로 칭찬을 받았으며, 사리(事理)를 논하는 것이 지극하여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 쪼개어 분석하였으므로 친구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가까운 척리(戚里)의 지위에 있으면서부터 하는 일이 방자[縱恣]하고 논의(論議)도 치우치고 그릇되어 점차로 훌륭한 부류들과 어긋났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12월 22일 신축

대사헌(大司憲) 김만중(金萬重)이 소(疏)를 올려 한범제(韓範齊)와 박치도(朴致道)를 구원하기를 매우 힘써서 하자,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리고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대략은 위에 보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박치도(朴致道)는 호남(湖南) 사람으로 경솔하고 진실성이 적으면서도 글을 잘 쓰는 재주는 있었다. 일찍이 김씨(金氏)의 자제(子弟)를 위하여 과거장[塲屋]에 함께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가 청선(淸選)039)  에 오르자, 세상에서는 김씨의 힘이라고 여겼었다. 그러다가 윤반(尹攀)이 소(疏)를 올려 박치도를 논하면서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 아부한다는 말에 이르자, 김만중(金萬重)이 그것을 듣기 싫어하여 바로 소를 올려 극력 변명하였던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75면
【분류】역사-편사(編史)


[註 039] 청선(淸選) : 청환(淸宦).
사신(史臣)은 논한다. "박치도(朴致道)는 호남(湖南) 사람으로 경솔하고 진실성이 적으면서도 글을 잘 쓰는 재주는 있었다. 일찍이 김씨(金氏)의 자제(子弟)를 위하여 과거장[塲屋]에 함께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가 청선(淸選)039)  에 오르자, 세상에서는 김씨의 힘이라고 여겼었다. 그러다가 윤반(尹攀)이 소(疏)를 올려 박치도를 논하면서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 아부한다는 말에 이르자, 김만중(金萬重)이 그것을 듣기 싫어하여 바로 소를 올려 극력 변명하였던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75면
【분류】역사-편사(編史)


[註 039] 청선(淸選) : 청환(淸宦).
사신(史臣)은 논한다. "박치도(朴致道)는 호남(湖南) 사람으로 경솔하고 진실성이 적으면서도 글을 잘 쓰는 재주는 있었다. 일찍이 김씨(金氏)의 자제(子弟)를 위하여 과거장[塲屋]에 함께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가 청선(淸選)039)  에 오르자, 세상에서는 김씨의 힘이라고 여겼었다. 그러다가 윤반(尹攀)이 소(疏)를 올려 박치도를 논하면서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 아부한다는 말에 이르자, 김만중(金萬重)이 그것을 듣기 싫어하여 바로 소를 올려 극력 변명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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