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4일 임자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대의(大義)를 논하고, 또한 윤선거(尹宣擧)를 배척하는 소장(疏章)을 진달하였으며, 이어서 윤증(尹拯)에 대한 대우를 그전처럼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너그러운 비답(批答)을 내렸다. 【원래의 소장과 비답한 분부는 앞에 보인다.】 예론(禮論)이 있기 이전에 송시열이 사문 난적(斯文亂賊) 윤휴(尹鑴)를 대우하였을 때 어떻게 했었는가? 진선(進善)에 의망(擬望)했을 적에는 당시의 공의(公議)에 몰려서라고 핑계하여 이미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했고, 《중용(中庸)》의 주석을 고친 잘못을 책망할 때에 이르러서는 대략 관대한 말만 하고 지나가 한때 끝내 버리고 마는 것에 지나지 않았었다. 언제 일찍이 홍수(洪水)나 맹수(猛獸)의 해독과 같이 바로 조처하기를 오늘날처럼 한없이 떠벌리어 무겁게 성토(聲討)하고 엄하게 따지듯이 했었던가? 예송(禮訟)이 있게 되면서부터 윤휴를 소소배(宵小輩)로 단정하기 시작하였고 경신년001) 에 이르러서는 이에 윤휴를 흉역(凶逆)으로 여기다가, 지금에 와서는 자기 자신이 평소에 비웃으며 배척하고 책망하던 말들을 윤색(潤色)하여, 참으로 사설(邪說)을 맹렬하게 다스리듯이 하게 되었다. 이는 반드시 이를 가지고 윤선거(尹宣擧)를 꽉 쥐고서 팔급(八級) 이외에 극선(極選)에 발탁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었으나 무겁게 성토하고 엄하게 따졌던 것과는 서로 반대되어 사람들의 입을 막아낼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이리저리 미루고 핑계하기를 이에 이처럼 한 것이니 이러고도 천년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게 되겠는가? 대개 윤선거는 윤휴에게 대해서 이미 일찍부터 잘못하여 여택(麗澤)의 사귐002) 을 가졌으나, 학문을 논함을 당해서는 경솔[輕脫]하다고 기통했었고, 예(禮)를 의논할 적에 미쳐서는 오도[註誤]한다고 배척했었으며, 마침내는 어리석다고 하고 음침하다고 하여 용서하는 바가 없이 했었다. 또한 생존해 있으면서 갑인년003) 이후의 일을 보지 못하였기에, 대고(大故)가 없으면 절교(絶交)하지 않는 의리로 대했었으니, 또한 좋게 여기고 나쁘게 여기기를 절도에 넘음이 없게 하였음을 볼 수 있는 일이다. 설사 악한 일을 미워함을 길게 한 것을 가지고 갖추 하지 못했음을 책망하여 깎아내려 논한다 하더라도 또한 단지 밝게 내다봄이 부족했었다고만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송시열이 서로 돕기에만 힘쓰고서 분을 내어 미워하고 격렬하게 틀어져 버리기를 자기가 하듯이 못했다고 여겨, ‘부호(扶護)’ 했다는 두 글자를 윤휴가 반역(叛逆)으로 죽은 뒤에야 생각해내어, 억누르고 몰아세워 욕보이는 제목(題目)으로 삼았으니, 그의 마음속으로 기틀을 마련한 때를 이미 사람들이 환히 알고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아! 애석한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20책 1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117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사상-유학(儒學)
[註 001] 경신년 : 1680 숙종 6년.[註 002] 여택(麗澤)의 사귐 : 나란히 있는 두 못의 물이 물기[水分]를 유지하는 데 서로 도움이 되듯이, 학문을 강구하고 덕을 닦아가기에 서로가 도움을 주는 것.[註 003]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
예론(禮論)이 있기 이전에 송시열이 사문 난적(斯文亂賊) 윤휴(尹鑴)를 대우하였을 때 어떻게 했었는가? 진선(進善)에 의망(擬望)했을 적에는 당시의 공의(公議)에 몰려서라고 핑계하여 이미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했고, 《중용(中庸)》의 주석을 고친 잘못을 책망할 때에 이르러서는 대략 관대한 말만 하고 지나가 한때 끝내 버리고 마는 것에 지나지 않았었다. 언제 일찍이 홍수(洪水)나 맹수(猛獸)의 해독과 같이 바로 조처하기를 오늘날처럼 한없이 떠벌리어 무겁게 성토(聲討)하고 엄하게 따지듯이 했었던가? 예송(禮訟)이 있게 되면서부터 윤휴를 소소배(宵小輩)로 단정하기 시작하였고 경신년001) 에 이르러서는 이에 윤휴를 흉역(凶逆)으로 여기다가, 지금에 와서는 자기 자신이 평소에 비웃으며 배척하고 책망하던 말들을 윤색(潤色)하여, 참으로 사설(邪說)을 맹렬하게 다스리듯이 하게 되었다. 이는 반드시 이를 가지고 윤선거(尹宣擧)를 꽉 쥐고서 팔급(八級) 이외에 극선(極選)에 발탁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었으나 무겁게 성토하고 엄하게 따졌던 것과는 서로 반대되어 사람들의 입을 막아낼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이리저리 미루고 핑계하기를 이에 이처럼 한 것이니 이러고도 천년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게 되겠는가? 대개 윤선거는 윤휴에게 대해서 이미 일찍부터 잘못하여 여택(麗澤)의 사귐002) 을 가졌으나, 학문을 논함을 당해서는 경솔[輕脫]하다고 기통했었고, 예(禮)를 의논할 적에 미쳐서는 오도[註誤]한다고 배척했었으며, 마침내는 어리석다고 하고 음침하다고 하여 용서하는 바가 없이 했었다. 또한 생존해 있으면서 갑인년003) 이후의 일을 보지 못하였기에, 대고(大故)가 없으면 절교(絶交)하지 않는 의리로 대했었으니, 또한 좋게 여기고 나쁘게 여기기를 절도에 넘음이 없게 하였음을 볼 수 있는 일이다. 설사 악한 일을 미워함을 길게 한 것을 가지고 갖추 하지 못했음을 책망하여 깎아내려 논한다 하더라도 또한 단지 밝게 내다봄이 부족했었다고만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송시열이 서로 돕기에만 힘쓰고서 분을 내어 미워하고 격렬하게 틀어져 버리기를 자기가 하듯이 못했다고 여겨, ‘부호(扶護)’ 했다는 두 글자를 윤휴가 반역(叛逆)으로 죽은 뒤에야 생각해내어, 억누르고 몰아세워 욕보이는 제목(題目)으로 삼았으니, 그의 마음속으로 기틀을 마련한 때를 이미 사람들이 환히 알고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아!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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