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일 무자
인견(引見)할 때에 승지(承旨) 신계화(申啓華)가 그전의 예대로 활인서(活人署) 근처의 무녀(巫女)들을 몰아내어 도성(都城) 안에는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했다.
사신은 말한다. "무녀(巫女)들을 몰아내라는 명령이 정당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요사이 남녀 무당들이 권세있는 사대부(士大夫)의 집에 드나들며 복심(腹心) 노릇 하기를 마치 노비(奴婢)처럼 했었는데, 명령을 내린 지 며칠이 되지 않아, 이숙(李䎘)이 진달하는 말에 따라 정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20책 1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117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사학(史學) / 사법-치안(治安)
사신은 말한다. "무녀(巫女)들을 몰아내라는 명령이 정당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요사이 남녀 무당들이 권세있는 사대부(士大夫)의 집에 드나들며 복심(腹心) 노릇 하기를 마치 노비(奴婢)처럼 했었는데, 명령을 내린 지 며칠이 되지 않아, 이숙(李䎘)이 진달하는 말에 따라 정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3월 19일 정유
전(前) 현감(縣監) 나양좌(羅良佐) 등이 소장(疏章)을 올려 그의 스승 윤선거(尹宣擧)가 모함받은 상황을 호소하니,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몹시 책망하였으며, 소두(疏頭)는 귀양보내고 그 다음 사람들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 하였다. 【상소의 개략과 비답(批答)한 말은 앞에 보인다.】 나양좌의 상소는 대략 이러하였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불인(不仁)한 자를 너무 심하게 미워함은 난동(亂動)인 것이다.’ 했습니다. 대개 불인한 자를 미워함은 마땅히 잘못이 없을 것 같지만, 공자가 그렇게 말을 한 것은 충격을 주어 난동하게 하는 것도 똑같이 책임이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군자(君子)가 화평한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게 됨은 반드시 그러한 도리가 있는 법이어서, 원망을 맺고 노여움을 가지고서 격돌(激突)하여 파멸시키는 화(禍)를 만드는 것에 있어서는 또한 공자가 경계했던 일입니다. 그렇다면 윤선거가 성심으로 세상을 근심했던 말들은 그 당시에는 비록 서로 맞지 않았었더라도 오늘날에는 마땅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인 듯합니다. 대개 윤선거의 끊는 방법은 본래 송시열이 끊는 것과는 같지 않았었으니, 비록 이미 윤휴(尹鑴)와 끊었었더라도 오히려 송시열과 맞게 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진실로 끊었거나 안끊었거나를 가릴 것이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데도 누구를 두려워하고 누구에게 몰리어 겉으로는 끊었다고 하면서 실지로는 끊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송시열을 두려워하고 몰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또한 무엇하러 여러 차례 송시열에게 너무 심하게 하지 말라고 권하다가 도리어 송시열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겠습니까? 만일 필시 피아(彼我)의 한계를 내세우고 다르다는 의논으로 구분함으로써 구차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혐의를 면하려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편문 자영(便文自營)004) 하는 계책일 것입니다. 윤선거는 마음가짐이 공평하고 관대했기에 반드시 이런 일은 없었을 것으로 압니다.
윤선거가 기유년005) 에 송시열에게 답하려고 했던 서함(書緘)에 대략 이르기를, ‘지난날에 시남(市南)이 【유계(兪棨)의 호(號)이다.】 매번 집사(執事)에게 말하기를, 「친구(親舊)들에게 독후(篤厚)하기 때문에 감정이 앞서는 폐단이 있게 되고, 악(惡)을 미워하기를 너무 강하게 하기 때문에 아량이 좁게 되는 병폐가 있게 됩니다. 좋게 여기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나쁜 점을 알아보지도 않고서는 또한 자신을 끌고 그를 따르게 됨을 면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좋은 점을 알아보지도 않고서는 또한 지나치게 살피며 의심함을 면하지 못하게 됩니다. 가슬 추연(加膝墜淵)006) 하여, 주었다 빼앗으며 낮추었다 높였다 하기를 일체 자신의 뜻대로 해버리고, 총명(聰明)이 가리워져 좋아하고 싫어함이 전도되고 있는데도 더러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정(物情)이 만족하지 않게 여김이 진실로 이런 점들에 있으니, 이는 마땅히 버려야 할 사의(私意)입니다.」 했었습니다. 석호(石湖)007) 형(兄)이 일찍이 말하기를, 「유자(儒者)들이 세상에 나갈 적에는 마땅히 먼저 왕형공(王荊公)008) 의 일을 참전 의형(參前倚衡)009) 하듯이 해야 할 것입니다. 유자들은 반드시 자기의 뜻을 실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뜻과 같은 사람은 현명하게 여기나 자기 뜻과 다른 사람은 틀린 것으로 여겨버림을 면하지 못하고, 행동할 적마다 옛글을 인용하기 때문에 승순(承順)하는 사람 보고는 자신을 알아준다 하게 되고 의심하고 비난하는 사람 보고는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여기게 됨을 면하지 못합니다. 의리에 맞는 것인지 기필할 수 없는 자신의 뜻이나 오늘날에 합당한 것인지 기필할 수 없는 옛적의 것에 있어서도 미처 반성해 볼 틈이 없게 되기 때문에, 으쓱거리는 언성(言聲)과 안색(顔色)이 사람들을 거절해 버리게 되고 대놓고 아첨하며 부회(附會)하는 풍습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됨을 면하지 못합니다.」 했었습니다. 집사(執事)께서 묻기 좋아하여 부지런히 물으시지만, 사람들이 더러는 받아들이기를 넓게 하지 못하는 것이 병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은, 주장하기를 과당하게 하는 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비인 사람이 누가 편당하는 것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대학(大學)》에서 말한 정심(正心)하는 공부가 극진하지 못한 데가 있게 되면, 지나치게 되거나 미치지 못하게 되거나 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편당하는 의논을 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의 예송(禮訟)에 관한 의논도 당초에는 옳으냐 그르냐를 다투게 되다가 반전(反轉)하여 사정(邪正)을 가리게 되었으므로 방관(傍觀)하는 사람들이 더러 공격을 너무 심하게 한다고 말하면 그들도 일체 수사 지율(收司之律)로 논죄(論罪)하여 사론(士論)으로 정해버린 지 이제 10년이 되었습니다. 조·홍(趙洪)010) 등 여러 사람은 처벌이 이미 지나치게 되었었으니 진실로 탕척(蕩滌)해 버리고 수용(收用)함이 좋을 것이고,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에 대해서는 비록 왜오(註誤)011) 한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어찌 끝내 참적(讒賊)으로 단정해버리고 용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과연 이번에 예송(禮訟) 때문에 시기하여 싫어한 흔적을 잘 씻어버리고, 사사로움도 없고 인색하지도 않은 자신의 마음을 보여 줌으로써, 안으로는 자신의 아량을 넓혀가게 되고 밖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데, 그 두 사람인들 또한 어찌 감동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했었습니다.
송시열이 이 서함을 보고는 크게 원망하여 갑자기 ‘윤선거가 윤휴와 허목을 임용(任用)하도록 권했으니, 그가 일찍이 끊지 않았었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하면서 드디어 이를 가지고 망신을 주었었습니다. 대개 윤선거는 경자년012) 이래로 지켜 오는 한 가지 말이 ‘윤휴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예금(禮禁) 때문에 버릴 수는 없다.’고 하였었습니다. 그러므로 송시열이 나라의 일을 맡아서 정권을 잡고 있을 적에, 혐오(嫌惡)와 원망을 제거하고 흔적을 타파해 버리고서 탕평(蕩平)한 길로 들어서게 하려고 했던 것이고, 당초에 새로운 말을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송시열이 이에 있어서 비록 서로 꼭 맞게 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의심을 두어야 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이에 있어서 깊이 원망과 노여움을 가졌던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지금 그 서함(書緘)에 한 말의 수미(首尾)를 살펴보건대 은근하고 간절하게 반복해서 말을 하여, 서로 바로잡아가며 그가 과오가 없는 처지에 서게 되기를 바라고 했던 것이었으니, 어찌 정이 두터웠기 때문에 걱정하기를 깊이 하고 아끼기를 돈독하게 하며 충고하기를 간절하게 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시끄러워지게 된 것은 그 원인이 모두 이에서 나왔습니다. 그윽이 생각해 보건대 그 당시에 믿어주지 않는 충고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혹은 자신의 미의(微意)013) 가 있어서 도성(都城)을 떠나는 것 때문에 그러지 않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윤증(尹拯)이 슬그머니 명월(明月)014) 에 던졌다가 그의 겨누고 있는 칼을 만나게 된 것이니, 또한 허심 탄회(虛心坦懷)한 생각으로 경솔하게 믿었다는 책망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송시열은 본래 말씨가 세기에, 혹은 급선무(急先務)를 논하게 될 때, ‘먼저 당여(黨與)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을 했었는지 또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본래 농담에 가까운 것인데다가, 하물며 그 당시에 있어서는 서로 절차 탁마(切磋琢磨)해가는 의리에 방해되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윤선거는 벗들에게 대해서 책선(責善)015) 을 더욱 준엄하게 하여 ‘자주 하다가는 소원해지게 되는 법이다.’라고 한 말도 경계삼지 않았었기에, 일찍이 송시열에게도 절차 탁마하게 해 준 바가 매우 많아, 기유년(己酉年)에 보낸 한 장의 서함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송시열이 말하기를, ‘길보(吉甫) 【윤선거의 자(字)이다.】 는 우리들의 일에 대해서 옳게 여겨 주는 것은 볼 수 없고, 단지 그르게 여기는 것만 보게 된다.’고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윤선거는 진실로 지성스러운 마음을 가져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비록 조정의 헌관(憲官)에 있어서는 감히 감당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암(尤菴) 문정(門庭)의 쟁관(諍官)은 될 수 있고, 오늘날 우리들의 출처(出處)016) 가 비록 다르기는 해도 화복(禍福)의 길은 같을 것인데, 어찌하여 과감하게 말을 다하지 않겠는가?’ 했었습니다. 합치되지 않는 일이 있게 되면, 또한 말하기를, ‘명도(明道)017) 가 말한 바 「공(公)에게 유익하게 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에게 유익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진실로 지극한 말이다.’ 하여 서로 절차 탁마하여 성취되게 하려고 하기를 이처럼 저쪽과 이쪽의 간격이 없게 했었습니다. 비록 송시열이 ‘먼저 당여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을 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것을 가지고 혐오하려고 했겠습니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 말을 가져다가 공안(公案)으로 내세우며, 간사한 말을 하여 사람들을 해롭게 한 것에 관한 율(律)로 추단(推斷)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록 그의 문인(門人)이나 자제(子弟)들이 이런 말을 하게 되었더라도, 오히려 선대(先代)부터의 분의(分義)018) 를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억지로 끌어대고 망령되게 억측하는 짓을 한 죄를 면하지 못하게 될 일인데, 또한 어찌 송시열 그 자신이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윤선거는 연원(淵源)의 유구함과 문로(門路)의 올바름이 여러 사람들의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비록 조정에 나아가 베풀게 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입신(立身)과 행동은 본말(本末)이 구비되고 그가 남긴 말과 나머지 논의 및 저술해 놓은 글들은 모두 사람들이 듣고 보고 한 것이어서 속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알 수 없습니다마는, ‘더욱 윤휴에게 중독(中毒)되어 세도(世道)의 해가 되고 있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일을 가리키는 것이고, ‘윤선거를 보고 본받아 윤휴에게 뛰어 들어간다.’고 한 것은 과연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물며 ‘윤휴의 학문이 주자(朱子)보다도 낫다 하여 윤휴의 편당이 되어서 주자를 배반했다.’고 한 것에 있어서는, 세상에 어찌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설사 윤선거가 과연 모두 이러한 일이 있었다면 어찌 유독 송시열만이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지 못하고 있겠습니까?
윤선거를 장차 장사지내게 될 적에 송시열이 제문(祭文)을 가지고 와 제전(祭奠)을 차렸었는데, 지조에 관해 추켜세우기를, ‘많은 물살이 마구 몰려도 지주(砥柱)는 끄덕하지 않고, 천지가 혼몽(昏濛)한 때 별 하나가 외로이 반짝이듯 했다.’ 하고, 학문에 관해 칭찬하기를, ‘신로(愼老) 【김집(金集)이다.】 가 돌아가고 그의 법도를 지니니 한 지방의 선비들이 그를 섬기듯 섬겼다.’ 하였으며 풍채(風采)에 관해 찬미하기를, ‘하의 혜패(荷衣惠佩)019) 처럼 깨끗하고 때가 없으니 완악(頑惡)한 자는 청렴해지고 나약(懦弱)한 자는 세워져, 그의 청풍(淸風)에 쇄락(洒落)020) 해졌다.’ 하고, 정분(情分)에 관해 서술하기를, ‘서로 오가며 절차 탁마(切磋琢磨)하여 둘이 다 진보해감도 몰랐고, 서함(書緘)의 왕복은 3일을 멀게 여겼었다.’ 했습니다. 서로가 알아 주고 서로가 허락하기를 이와 같이 하여, 오늘날에 와서 세도(世道)에 해가 된다고 배척한 것과는 진실로 한 사람의 말이 아닌 것 같았었습니다. 재차 치제(致祭)한 제문(祭文)에 있어서는, 대개 윤증(尹拯)이 윤휴(尹鑴)가 차린 제전(祭奠)을 받아들인 것에 따라 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대개 제전을 받아들인 것의 잘잘못에 대해서는 본래 뒷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어찌 이를 가지고 유명(幽明)을 달리한 사람과의 사이에 원망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본의가 이 문권[契券]을 자료로 하여 오늘날의 말썽거리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의 말에 이르기를, ‘요컨대 사람의 행신(行身)은 관(棺) 뚜껑을 덮고 나야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대개 사람들의 시종(始終)이 더러 한결같지 못한 바가 있는 법이어서 간직하고 있는 마음과 실천해 온 행적을 반드시 죽은 뒤까지 기다리다가 그의 한편생 일을 모아 놓고 논하면 틀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윤선거가 돌아간 지 장차 20년이 되는데, 그동안에는 또한 사변(事變)이 갖추 있었다 하겠습니다. 가령 윤선거가 과연 윤휴(尹鑴)와 편당이 되었었고 윤휴와 절교(絶交)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면, 그런 흔적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데가 있었을 것이고, 단지 빈말로 하게 될 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난날에 윤휴가 또한 일찍이 6, 7년 동안 뜻대로 하게 되었을 때 그가 윤씨(尹氏)를 대우하는 바가 과연 어떠했었고, 윤씨가 윤휴와 편당이 된 바가 과연 어떤 일이었습니까? 비록 평소에 망령되게 인식하고 망령되게 의심한 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 와서는 또한 확 풀리게 되어야 할 것인데, 윤휴가 이미 죄악이 쌓여 처벌받은 뒤를 당하여 기필코 사람에게 윤휴의 편당이라는 누명을 씌우려고 하니, 그의 마음에 참으로 세도(世道)에 관계가 있는 것이라 그만둘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좋지 못한 명목(名目)을 가려내어 함정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른바 강도(江都)에서의 일에 있어서는, 윤선거가 그 당시에 직사(職事)를 받은 바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적병(賊兵)을 피하려고 들어갔었다가 적병이 닥치자 떠났던 것입니다. 이는 곧 선비의 떳떳한 분수이고 진실로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의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스스로 분발하여 사우(士友)들과 의려(義旅)가 되기로 약조하였다면, 지키던 성첩(城堞)은 진실로 죽어야 할 곳이고, 함께 일을 같이 하기로 한 사람들은 진실로 함께 죽어야 할 의리가 있기는 합니다. 강화(講和)하는 일이 이미 이루어지고 수비(守備)를 또한 그만두게 된 때에 이르러서는 비록 하나의 성첩을 굳게 지키면서 죽어도 떠나지 않으려고 해도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일을 함께 하기로 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미 같이 힘쓰며 죽음을 바쳐야 할 곳이 없어져 버렸으니, 급작스러워 전패(顚沛)하는 동안에 더러는 살게 되고 더러는 죽게 됨은 곧 일의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진실로 감동하고 분발하여 의리를 취하는 뜻을 이루게 되었거니와 산 사람이라고 또한 어찌 더럽게 살려고만 하여 관청(官廳)을 저버린 사람이겠습니까? 앞서의 해에 대신이 탑전(榻前)에서 진달한 말에 이르기를, ‘윤선거가 북지왕(北地王) 심(諶)의 일021) 을 인용하여 자신의 처지로 삼으려고 했었는데, 북지왕은 곧 한(漢)나라 종실(宗室)의 황자(皇子)이어서 그의 처지는 윤선거와는 아주 다르므로 빗대어 논할 바가 아닙니다.’ 한 것에 있어서는 대신이 어디에서 알고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윤선거가 겸손하게 사양하고 자기자신을 책망해 온 일에서는 그의 강개(慷慨)하고 측은(惻隱)한 마음이 지극한 정성에 근본한 것이어서 보통의 인정으로는 따라갈 수 없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인책하고서 벼슬을 하지 않은 것에 있어서는, 오로지 상소하여 오랑캐의 사자(使者)를 배척했는데도 오랑캐의 환난을 면하게 된 것을 지극한 한탄과 깊은 치욕으로 여긴 것으로 그의 미의(微意)의 소재는 진실로 대의(大義)를 붙잡아 세우고 인륜[人常]을 똑바로 가꾸려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가지고 자정(自靖)022) 하며 세상을 떠나 외로이 섰으면서도 후회가 없었기에 그의 상소에 이르기를, ‘오늘날 신(臣)의 본심을 논하는 사람들이 혹자는 「벗들과 함께 일을 하기로 해 놓고서 벗들은 죽었는데도 자신은 죽지 못했다.」 하고, 혹자는 「아내와 죽기로 약조해 놓고 아내는 죽었는데도 자신은 죽지 못했다.」 합니다. 이래서 인책하며 벼슬을 할 뜻이 없었던 것인데, 이는 또한 신(臣)의 실상(實狀)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게 된 까닭은 벗들을 위한 것도 아니고 또한 아내를 위한 것도 아니기에, 단지 신(臣)의 몸이 구차게 살고 있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했었던 것입니다. 효종(孝宗)께서 비답(批答)을 내리시기를, ‘그대의 이른바 죽을 죄를 졌다는 일은, 세속을 벗어난 개결(介潔)한 행신이 아닌 것이 없다. 내가 이로써 간절한 생각을 잊어버리지 못하며 기필코 불러내려고 하게 된 것이다.’ 하셨고 보면, 윤선거를 깊이 알아줌이 효종보다 더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윤선거가 수립(樹立)해 온 바는 명백하고 우뚝하여 백세(百世)토록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김익겸(金益兼)과 권순장(權順長)은 이미 앞서 살신(殺身)했고, 윤선거는 죽을 때까지 자폐(自廢)함으로써 뒷날에까지 대의(大義)를 부지(扶持)하였으니, 비록 사생(死生)이 다르게 되기는 했습니다마는 성취(成就)해 놓은 바는 한가지로서, 이른바 천하에 큰 신의(信義)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이 진실로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송시열(宋時烈)이 삼학사전(三學士傳)을 지을 적에 그 끝부분에 말해 놓기를, ‘깨끗하게 자신을 지키고 더럽히지 않은 사람으로는 윤공(尹公) 선거(宣擧) 같은 제현(諸賢)들이 비록 사정은 같지 않았어도 다같이 일치(一致)하게 된 것이어서 모두 다 빠뜨릴 수 없는 일이다.’ 했던 것입니다. 송시열이 평소에 윤선거의 지조를 이처럼 허여(許與)해 놓고 오늘날에는 갑자기 변경하여 ‘그는 권순장·김익겸과는 서로 반대되어 앞뒤가 서로 어그러지는 것을 고찰(考察)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무슨 일이겠습니까? 또 송시열이 조금이라도 강도(江都)에서의 일이 부끄럽고 분하게 여기며 버려져 있어야 하는, 세상에 자신을 세울 수 없을 만한 일이라고 여겼었다면, 장차 윤선거를 위해 깊은 방책을 마련하면서, 비록 윤선거가 세상에 나서려고 하더라도 나가지 말도록 권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매번 자신은 나왔는데 윤선거는 유독 나서지 않는 것을 들면서 너무 고집하는 것이라고 여겼고, 일찍이 ‘여망(汝望) 【윤문거(尹文擧)로서 다리에 병이 있어 벼슬하지 않았었다.】 이 다리를 펴게 되고 길보(吉甫)가 머리를 돌리게 된 다음에야 일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여 나와서 자기에게 협조해 주기를 바라기를 깊이 했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의 겸손하게 사양한 말을 뒤쫓아 핵실(覈實)하여 흠을 잡을 재료로 삼으려고 하니, 이는 과연 무슨 마음이겠습니까?
아! 송시열이 윤선거에게 대해 사귀며 지나옴이 과연 어떠했습니까? 약관(弱冠) 때부터 도의(道義)의 벗이 되어 훈창 지화(塤唱篪和)023) 하기를 백수(白首)가 되도록 하였으니, 정의가 도탑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윤선거는 사람됨이 화평하고 정직하여 진실하였고 주밀하고 친절함이 지극하여, 억지 심정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을 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또한 산림(山林)에서 일생을 마쳤었기 때문에, 이해(利害)나 득실(得失)과 경탈(傾奪)하거나 당비(黨比)하는 사심(私心)이 가슴속에 들어있지 않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언론과 지취가 으레 송시열과는 동떨어지게 되는 바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맛이 달라야 진실로 서로 이루어지게 되고 길이 달라도 같은 데로 돌아가기에 방해되지 않는 것이니, 반드시 물에다 물을 더하고 칠에다 칠을 더하게 된 다음이라야만 바야흐로 붕우(朋友)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송시열은 나이가 많고 인망(人望)이 높아 우뚝하게 외로이 서 있으니, 마땅히 옛벗들의 생각을 일으키고 지난날에 좋게 지낸 사람들을 깊이 추억하기를 마치 제갈양(諸葛亮)이 원직(元直)024) 과 최주평(崔州平)을 잊지 못하고, 주희(朱熹)가 언제나 경부(敬夫)025) 와 백공(伯恭)026) 을 생각하듯이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그만둘 수 없는 바인데, 바야흐로 또한 이미 해골(骸骨)이 된 사람과 피아(彼我)의 잘잘못을 따지려하여 한없는 말을 늘어놓아 이기기 좋아하는 사심을 이루려고 하므로, 사람들이 진실로 논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송시열이 이처럼 하는 것은, 자못 돌아다보며 길게 생각을 하여 천하 후세의 공론을 위한 계책을 하지 않는 일입니다.
신들도 또한 심하게 변명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만, 통탄스러운 일은 윤선거는 너그러우면서도 굳센 출중한 자질로 가정의 정수(精粹)한 학문을 이어받아, 현회(顯晦)027) 를 권형(權衡)에 맞추어 하고 진퇴(進退)를 법도가 있게 하므로, 사론(士論)이 추앙하여 사법(師法)으로 삼았고, 임금이 사모하면서도 만나보지 못했던 것인데, 그만 하루아침에 사설(邪說)을 한다고 배제(排擠)하고 별스러운 사람이라고 배척하여 화(禍)를 빚기를 낭자(狼藉)하게 하므로, 한 세상의 죄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성명(聖明)하신 임금께서 불찬성의 말씀이 없으셨고 조정에서도 어그러졌다고 논박하는 공론이 없었으니, 어찌 송시열이 기유(耆儒)이고 숙덕(宿德)이기는 하지만 늙어서 정신이 혼몽해진 것으로 여겨, 우선 그대로 뜻을 받들어서 그의 뜻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이 그윽이 생각해보건대, 그전에 우리 효종(孝宗)께서 일찍이 윤선거의 상소에 답하시기를, ‘군신(君臣)의 사이는 서로 마음을 알아줌이 귀중한 것이다.’ 하셨고, 당장 사복(士服)차림으로 인견(引見)하시었었으니, 효종께서 윤선거를 보기도 전에 이미 마음을 알겠다고 허여(許與)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종(顯宗)께서는 즉위(即位)하신 첫머리에 즉시 유지(諭旨)를 내리시기를, ‘지금 내가 너를 부른 것은 곧 유지(遺志)를 계승(繼承)하기 위한 것이다.’ 하셨었습니다. 윤선거가 죽게 되자 현종께서 경연(經筵)에 임하셨다가 시신(侍臣)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일찍이 윤선거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으면서도 실현하지 못했었는데 어느새 죽었다니 놀라움과 애도(哀悼)를 견딜 수 없다.’ 하시고, 이어 그의 나이가 얼마인지와 기품(氣稟)의 강약(强弱)을 물으시며 한탄하고 애석해하시는 뜻이 말씀 표면에 넘치셨었습니다. 송준길(宋浚吉)이 아뢰기를, ‘사우(士友)들의 의논이 「만일 윤선거가 조정에 있었다면 반드시 군상(君上)께서 엄격하게 여겨 꺼리시게 되셨을 것이다.」라고 했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송준길이 물러나와 조복양(趙復陽)에게 말하기를, ‘성상께서 일찍이 한 번도 윤공(尹公)을 보지 못하셨는데도 못잊어하며 중하게 여기기를 이토록 하심은 웬일입니까.’ 하니, 조복양이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 소장(疏章) 내용에 있어서 진실로 이미 그의 사람됨을 파악하신 것입니다.’ 했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2대의 조정이 윤선거를 예우(禮遇)하게 되었던 것은 오로지 성신(誠信)이 서로 감통(感通)하게 되었던 것이고, 단지 성음 소모(聲音笑貌)028) 만으로 거짓 공손하게 공경할 뿐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가 이미 도(道)를 지키다 죽었습니다. 만절(晩節)이나 말로(末路)의 일이 논평해야 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나타나지 않은 죄악이나 오래된 허물이 전에는 탄로되지 않았다가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전하(殿下)의 때에 와서 멋대로 남을 중상하며 훼방하고 있는데도 구휼(救恤)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까? 대개 여탈(與奪)이 합당함을 잃게 되면 사람들의 심정이 억울해하게 되고, 포폄(褒貶)이 법대로 되지 않으면 풍속이 부패(腐敗)하게 됩니다. 공명 정대(公明正大)한 체통(體統)이 무너져 버리고 아부하면서 우선만 편하려고 하는 풍습이 이루어지고, 돈후(敦厚)하고 순박한 도리는 없어지며, 모함하고 참소하는 풍조(風潮)가 자라남을 순치(馴致)하게 되어, 얼마 가지 않아 인자(仁者)와 현자(賢者)가 하나도 없고 사직(社稷)이 기울어 위태해져도 진작(振作)할 수 없게 되는 법입니다. 이래서 신들이 크게 한숨쉬며 눈물을 흘리고 큰 소리로 다급하게 외치기를 그만둘 줄 모르게 되는 것이고, 단지 신들의 돌아간 스승만을 위해 사사로이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3월 22일 경자
우윤(右尹) 이수언(李秀彦)이 나양좌(羅良佐)를 배척하고, 그의 스승 송시열(宋時烈)이 모함받은 상황을 호소하니, 임금이 너그러운 비답(批答)을 내렸다. 【원래의 상소와 비답한 교지는 앞에 보인다.】 그의 상소에 내용에 이르기를,
"윤선거(尹宣擧)가 이미 윤휴(尹鑴)를 마음이 검다느니 음흉하다느니 했고, 또한 융통(融通)하고 보합(保合)해야 한다는 말을 했음은 곧 자기가 전후에 우물쭈물해온 실상을 밝힌 것이니, 이는 또한 그럴 듯하기는 하지만 실지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윤휴의 당(黨)들의 예론(禮論)은 이미 화심(禍心)이 있었던 것이고 보면 진실로 소소(宵小)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 근본을 논한다면, 사사로운 편당이 되어 세상을 오도(誤導)하고 권세를 쥐려고 남을 넘어뜨리기로 한 술책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1백여 년 동안 대대로 전해온 의논이고 반평생을 사람들이 같이 외쳐온 모의(謀議)이기에, 옛적의 간흉(奸凶)들이 한때만 위세(威勢)를 부렸던 것과는 같지 않으니, 비록 그들의 죄를 엄중하게 배척하지 않을 수도 없지만, 또한 율(律)을 가볍게 정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윤선거가 그 사람들을 논하여 소소(宵小)하다고 배척하고, 세상의 도의(道義)를 염려하여 보합(保合)하도록 권면한 일은, 이는 그의 공정한 마음과 원대한 식견을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당론(黨論)에 병이 든 자로서는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닌데, 이 때문에 그의 말이 서로 반대됨을 의심하는 것은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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