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3월

싸라리리 2025. 11. 17.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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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정사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조정의 사체(事體)가 날이 갈수록 무너져서 대간(臺諫)이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을 예사로 봅니다. 일전에 대사간 송창(宋昌)·사간 윤빈(尹彬)·헌납 한범제(韓笵齊)·정언 허지(許墀)·집의 엄집(嚴緝)·장령 심평(沈枰)·지평 김만채(金萬埰) 등이 일시에 패초를 어겼으니, 그 사이에는 비록 사정이나 병고로 해서 억지로 나오기 어려운 자도 있었겠지만, 바로잡고 경계하는 조처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체차(遞差)하라고 명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지존(至尊)의 환갑은 고금에 드문 일이다. 풍정(豐呈)을 장차 설행하려고 하는데, 자전(慈殿)의 분부가 매번 흉년이 거듭된 것을 깊이 우려하여 기필코 낭비를 줄이고자 하시니, 이 뜻을 도감(都監)에게 신칙하라."
하였다. 이에 예조 판서 여성제(呂聖齊)가 외명부(外命婦) 중 외정조신(外庭朝臣)으로서 문무관(文武官) 정2품 이상, 공신(功臣)과 삼사(三司)의 장관, 육승지(六承旨)의 아내로서 당연히 입참(立參)할 자를 줄여서 번다한 형식을 생략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 황창 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의 이장(移葬) 및 김석익(金錫翼)의 예장(禮葬)의 명을 내리자, 대관(臺諫)이 환수할 것을 청하며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는데, 남구만이 그 말을 좇을 것을 청하자, 임금이 이에 환수할 것을 명하고, 예조를 시켜 장사 물품을 넉넉히 보내 주도록 하였다.

 

3월 4일 무오

김재현(金載顯)을 승지(承旨)로, 윤진(尹搢)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유명일(兪命一)을 사간(司諫)으로, 김만길(金萬吉)을 헌납(獻納)으로, 윤성교(尹誠敎)를 정언(正言)으로, 조종저(趙宗著)를 집의(執義)로, 박세장(朴世樟)을 장령(掌令)으로, 이징명(李徵明)을 지평(持平)으로, 이윤수(李允修)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함경도 부령(富寧) 기병(騎兵) 정광홍(鄭光弘)의 아우 정인홍(鄭仁弘)이 범에 물리게 되자, 정광홍이 도끼를 메고 그 앞으로 바짝 달려들어 범을 죽이고 아우를 구제하였다고 북병사(北兵使) 원상(元相)이 포상할 것을 장계로 청하였는데, 이를 병조에 내려 복주(覆奏)케 하고, 특별히 군역(軍役)을 면제해 주었다.

 

3월 5일 기미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서 백관의 조참(朝參)을 받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3월 7일 신유

동지사(冬至使) 겸 진주사(兼陳奏使) 낭원군(郞原君) 간(偘) 등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오면서, 먼저 역관(譯官)을 보내어 예부(禮部)의 회자(回咨)를 치주(馳奏)하였는데, 그 자문에 이르기를,
"그 나라 임금이 임의로 하인을 놓아 보내어 금령을 어기고 강을 건너와 산삼을 캐느라 흠차(欽差)067)  한 관역(官役)에게 창을 던져 사람을 해쳤으니, 법령을 크게 범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 국왕 아무개[姓諱]에게 벌은(罰銀) 2만 냥을 물린다."
하였다.

 

3월 8일 임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가고 유성(流星)이 문창성(文昌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윤이도(尹以道)·박태손(朴泰遜)을 승지(承旨)로, 신정(申晸)을 판윤(判尹)으로, 허지(許墀)를 장령(掌令)으로, 윤지익(尹之翊)을 지평(持平)으로, 윤지완(尹趾完)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삼았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좌의정 남구만(南九萬) 등이 청(淸)나라 자문의 원책(怨嘖)한 말에서 벌이 임금의 몸에까지 미친 것으로, 소장을 올려 견면(譴免)068)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위로하여 타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다.

 

3월 9일 계해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지평 이징명(李徵明)이 나와 아뢰기를,
"숙의(淑儀)의 간택이 저사(儲嗣)를 늘리기 위함이라면 더욱 살펴서 간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궁중에 모아서 간택하는 것이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그의 취사(取舍)하는 것이 용모의 미악(美惡)을 보는 데에 불과할 뿐이었으므로,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일찍이 차자를 올려 이 일을 말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성상(聖上)께서는 대신에게 물어서 그 가법(家法)을 가려서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해 내려오던 옛 법규를 오늘날에 폐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찌 용모를 취사하여 신중히 간택하는 도리를 소홀히 하겠는가."
하였다. 이징명이 또 아뢰기를,
"신이 지난 겨울 사명을 받들고 북관(北關)에 갔을 적에 무산(茂山)에 이속(移屬)된 관노비들이 곳곳에 모여서 지탱하기 어려운 실상을 호소하였고, 또 들으니 무산부를 다시 설치한 뒤로 불편한 일이 많다고 하니, 변통하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광해조에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었을 때를 당하여 정도를 잡고 의논을 드렸다가 북청(北靑)으로 귀양을 가 죽었는데, 그 고을 선비들이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액(賜額)하여 어진이를 높이고 선비를 기르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묘당(廟堂)과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품처(稟處)하라고 하였다. 뒤에 대신의 연백(筵白)으로 인하여 무산부는 그대로 둔 채 개혁하지 않았고, 예조의 복주(覆奏)로 이항복의 사당에는 특별히 사액을 허락하였다.

 

3월 10일 갑자

이동명(李東溟)을 승지(承旨)로, 서종태(徐宗泰)를 사간(司諫)으로, 심평(沈枰)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3월 11일 을축

충청도 문의(文義)에서 생원(生員) 오재창(吳再昌)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선정신(先正臣) 송인수(宋麟壽)·정염(鄭𥖝)을 병향(並享)하고 있는 노봉 서원(魯峰書院)에 함사(合祠)할 것을 청하니, 이를 예조에 내려 복의(覆議)케 한 다음 그의 시행을 윤허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이세백(李世白)이 치주(馳奏)하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증(李增)이 일찍이 평양부(平壤府)를 맡았을 적에 몰래 본부의 관기를 간통하고, 다른 고을로 옮겨가서도 그 정을 잊지 못하여 왕래하는가 하면, 또 그의 아버지를 막하(幕下)에 데려다 두고는 정령(政令)을 내리는데 있어서도 그의 말을 많이 들으며, 이득이 생기는 일은 언제나 그에게로 돌려서 사람들의 말썽이 걷잡을 수 없이 자자하니, 그대로 중진(重鎭)을 맡길 수 없습니다."
하니, 이를 묘당(廟堂)에 내려 파직(罷職)하였다.

 

3월 12일 병인

유성이 화개성(華蓋星) 위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다.

 

3월 13일 정묘

임금이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또 청나라 자문이 올 때에 그 욕설이 성궁(聖躬)에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것으로 죄를 끌어서 면직을 빌며 아뢰기를,
"국가에 일이 있으면 그 책임은 보필하는 정승에게 있습니다. 신이 불초한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있지 못할 자리에 있으면서 군부(君父)에게 욕이 돌아가게 하고서도 신하로서 죽어야 하는 의리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온 나라 신민(臣民)의 아픔을 위로할 길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위로하여 타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김수항이 청나라에 사은사(謝恩使)를 보내고 이내 벌금을 부치되, 사신을 미리 차출하여 두었다가 진주사(陳奏使)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곧장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숙의(淑儀)를 간택하는 일은 종묘 사직의 대계를 위한 것인 만큼 덕선(德選)하는 도리를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아니됩니다. 옛사람의 말에 ‘용모나 말하는 사이에 그 덕기(德器)와 복상(福相)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취사할 즈음에 징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병조 판서 이숙(李䎘)이 아뢰기를,
"후주(厚州)의 존폐 여부를 원임 대신에게 물으니, 판중추부사 정지화(鄭知和)는, ‘당초의 설치가 이미 온당치 않았으니, 지금에 와서 파한다 하여도 아니될 것이 없다.’고 하고, 판중추부사 이상진(李尙眞)은, ‘이곳이 옥토(沃土)이고 또 병민(兵民)이 많이 모여 있는데 이왕 설치한 것을 도로 파하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하는 등 두 대신의 뜻이 같지 않습니다."
하니, 좌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신이 선조(先祖) 때 후주의 설치를 건의하여 세웠던 바, 오늘날에 미쳐서 국가에 일이 생겨 욕이 성궁에게 미치었으니, 죄는 실로 신에게 있습니다. 신으로서는 다시 진달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지만, 예전에 조충국(趙充國)069)  이 오랑캐를 격파할 적에 어떤 이가 두 장군이 출격을 한 공이라고 하자, 조충국이 스스로 둔전(屯田)을 설치한 공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스스로 자랑함을 만류하자, 조충국은, ‘변방 일의 이해(利害)는 뒷날의 법이 된다.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 혐의스럽다 하여 명주(明主)를 속여서는 아니된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신도 또한 어찌 감히 죄를 기다리는 처지라 하여 한 마디 분명한 말을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삼수(三水)·갑산(甲山)의 진보(鎭堡)는 모두가 강변인지라, 오늘날 월경을 범하는 데는 여러 곳이 똑같고 보면 후주라 하여 유독 산삼 캐는 길이 된다는 이치는 결코 없습니다.
오늘날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법을 어기고 국경(國境)을 넘는 사람이 양식을 모으기가 어려운데, 후주는 땅이 비옥하여 곡물이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다른 곳의 사람들이 다 후주에서 양식을 구해다가 국경을 넘어 산삼을 캐는 밑천을 삼으므로 이를 파하여야 된다.’고 하지만, 변진(邊鎭)의 설치란 산삼 채취를 금지하는 한 가지 일만이 아니라, 위급한 사태에 유용한 것으로서 반드시 그 때가 있는 것입니다. 듣건대, 저 나라에서는 일찍이 공허한 땅이었는데도 지금 애양(靉陽)·관전(寬奠)·노성(老城) 등 여러 곳에 모두 한창 병력을 첨가하며 성을 쌓고 있는데, 우리는 예전 사람처럼 속(粟)070)  을 변방으로 옮기는 일도 못하면서 도리어 변방 땅에 곡식이 나는 것을 우환으로 여겨 이미 설치한 진을 파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진을 파한다 하더라도 땅은 그대로 있는데 변장을 믿을 수 없다 하여 그것을 파한다면 삼수와 강계(江界)에 차정(差定)하여 보낸 파수군은 어떻게 유독 믿을 수 있으며, 반드시 그 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는 것을 금지하리라고 믿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김수항에게 물었다. 김수항이 대답하기를,
"신이 그 곳을 보지 못하여 형세와 이해(利害)는 실상 자세히 모릅니다. 그러나 판중추부사 민정중(閔鼎重)의 말을 들은즉 토지는 비록 좋으나 형세가 고립되어 영문(營文)의 호령이 멀어 서로 미치지 못하므로, 끝내 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민정중은 북방의 일을 잘 알고 있어서 그의 말은 반드시 소견이 있을 것이며, 다른 사람의 말도 파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광주 유수(廣州留守)는 일찍이 그 관찰사를 지냈으니, 소견이 어떠한가?"
하자, 그때 윤지선(尹趾善)이 막 입시하였다가 나아와 대답하기를,
"국경을 넘어서 산삼을 캐는 걱정은 후주를 파하고 파하지 않는 데에 매인 것이 아니니, 신은 파하지 않는 것이 온당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가는 사단이 반드시 후주의 설진(設鎭)으로 연유한 것은 아니나, 민 판중추부사가 일찍이 본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파하는 것이 좋다고 하고, 바깥의 의논도 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의견이 많다 하니, 파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수항이 나아와 아뢰기를,
"계해년071)  간에 김석주(金錫胄)가 조지겸(趙持謙)·오도일(吳道一)·한태동(韓泰東) 등의 일을 논하여, 조지겸과 한태동은 파직이 되었는데 모두 바로 거두어 쓰고, 오도일은 외직으로 내보내어 4년 동안 불러들이지 않았으니, 벌을 주는 도리가 이러하여서는 아니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영원히 버리고자 하는 뜻이 아니다."
하였다.

 

홍만종(洪萬鍾)·이언강(李彦綱)을 승지(承旨)로, 김창집(金昌集)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임상원(任相元)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3월 14일 무진

장령 허지(許墀)가 인피(引避)하며 아뢰기를,
"신은 본부(本府)에서 민희(閔熙)·권대운(權大運)의 양이(量移)072)  를 환수하라고 한 아룀에 있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두 신하가 연좌된 일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죄에 저촉된 이래로 무릇 얼마의 세월이 지났으며, 몇 번의 사령(赦令)을 거쳤습니까? 많은 세월을 가시울타리 속에서 보내는 구신(舊臣)이 애처로운 노릇임에도 쟁론(爭論)이 해를 넘기고도 아직도 정지되지 않고 있으니, 혼미한 소견으로는 구차스럽게 같이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처치하여 체직되었다.

 

3월 16일 경오

임금이 숭릉(崇陵)073)  을 알현(謁見)하고, 이어 현릉(顯陵)074)  ·목릉(穆陵)075)  을 일일이 알현한 다음, 건원릉(健元陵)076)  에 이르러 또 봉심(奉審)을 행하였다. 주정소(晝停所)077)  에 이르러 소를 잡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장사(將士)들을 크게 먹이고, 사하리(沙河里) 교장에 이르러서는 말에서 내려 장단(將壇)으로 올라가 열무(閱武)하려 하니, 이에 삼사(三司)078)  ·승정원의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알현하고 간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좌의정 남구만(南九萬),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수흥(金壽興)이 또한 입대를 청하여 극력 간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훈련 대장(訓鍊大將) 신여철(申汝哲)에게 명하여 방진(方陣)079)  을 치게 하고, 금군 별장(禁軍別將) 민섬(閔暹)으로 하여금 금군을 거느리고 창을 가지고 훈련 도감의 진영으로 달려가서 그 기고(旗鼓)를 빼앗게 한 다음, 또 병조 판서 이숙(李䎘)에게 명하여 수기(帥旗)080)  를 가지고 단상에 올라, 좌작 진퇴(坐作進退)의 호령을 상례대로 다 마친 뒤에 환궁(還宮)하였다.

 

3월 17일 신미

박태손(朴泰遜)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한범제(韓笵齊)를 장령(掌令)으로, 임영(林泳)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임규(任奎)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3월 18일 임신

달이 저성(氐星) 안으로 들어갔다.

 

이홍적(李弘迪)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대사헌 임상원(任相元)·장령 한범제(韓范齊)·지평 이징명(李徵明)이 김중하(金重夏)의 논계를 정지하니, 정언 이덕성(李德成)이 경시를 당하였다 하여 인피하였는데, 임상원·한범제·이징명 등도 인피하였다. 교리 박태만(朴泰萬)·수찬 이윤수(李允修)가 이를 처치하여 이덕성은 출사(出仕)케 하고, 임원상 등은 체차(遞差)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5년 동안을 서로 버틴 것도 벌써 지리함을 겪었으므로 이제 비로소 논계를 정지한 것이 또한 늦었다고 이르겠는데, 괴격(乖激)한 무리들이 오히려 경솔하다 하여 소란스러운 단서를 야기시켜 이기고야 말겠다니, 그 습성이 참으로 밉다. 임상원 등은 출사시키고 이덕성은 체차하라."
하였다. 승정원에서 재차 아뢰어 명을 환수하여 대각에게 너그러이 대하는 뜻을 보여 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뒤에 사간원에서 또 논계하여 간쟁하였으나 역시 따르지 않았다.

 

3월 20일 갑술

박세당(朴世堂)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가, 감시관(監試官) 때에 패초(牌招)를 어겼다 하여 파하고, 당시 정재희(鄭載禧)로 대신하고, 엄집(嚴緝)을 사간(司諫)으로, 민진주(閔鎭周)·서문유(徐文𥙿)를 정언(正言)으로, 서종태(徐宗泰)를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3월 21일 을해

유성이 태미원(太微垣) 단문(端文) 밖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다.

 

목임일(睦林一)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수찬 강현(姜鋧)이 상소(上疏)하여 진계(陳戒)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청컨대 전하께서 때때로 《주역(周易)》을 받아 읽으시고 그 중 한두 가지를 추려서 예람(睿覽)에 대비하소서. 《주역》의 글은 대개 음양(陰陽)에 순종하여 변화를 다하는 방도이니, 사물(事物)에 산포하면 일만 가지가 다 다른 바가 있으나, 마음속에 거두어들이면 본디 똑같은 이치로서 간격이 없습니다. 건(乾)괘의 초구(初九) 효에 이른바 ‘잠재한 용이니, 쓰지 말라[潛龍勿用]’함은 괘유(卦縲)081)  로 본다면, 양기가 잠재해 있는 때를 말함에 불과하나, 이를 나의 마음속으로 돌이켜서 말한다면 사려(思慮)가 아직 싹트지도 않고 사물에 접하지도 않아서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고 있는 때이며, 곤(坤)괘의 초육(初六) 효에 이른바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온다[履霜堅氷至]’함은 괘유로 본다면 음기가 장차 움직이려는 징후를 이름에 불과하지만, 이를 나의 마음속으로 돌이켜서 말한다면, 도심(道心)은 잠재하나 인욕(人慾)이 싹터서 뾰족하게 장차 발동하려고 하는 기상입니다. 한 모퉁이를 들어서 나머지 세 모퉁이를 반증해 본다면 64괘, 3백 80효의 체용(體用)과 동정(動靜)이 어찌 일심(一心)상의 태극(太極)에 벗어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과연 입으로 말씀하고 능히 몸으로 행하시며, 몸으로 행하시고 마음으로 다하실 수 있겠습니까? 희로(喜怒)의 발단이 간혹 그 중도를 잃고 상벌(賞罰)의 법전이 혹은 그 규범을 어기는 것도, 이 모두가 평일 함양(涵養)하신 공부가 조금 미진한 데가 있어서 의리의 마음이 더러는 혈기(血氣)의 부리는 바를 면치 못하여 마침내는 함홍(含弘)의 도량이 모자라고 영예(英銳)의 기운이 너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병통은 심학(心學)상의 공부에 큰 방해가 되니, 바라건대, 전하께서 깊이 살피소서."
하고, 이어 한 고을에서 어미를 봉양하게 해주기를 바라니, 임금이 너그러이 비답하고 가상하게 받아들이고는 그 소를 이조에 내리니, 이조에서 다시 의논하여 아뢰기를,
"《주역》을 강론하는 날에 글 뜻을 제대로 아는자를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정은 간절하나, 청컨대 아직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공홍도(公洪道)082)  에 전염병이 만연되어 한창 앓고 있는 자가 2백 9명이고, 전라도는 3백 19명이었는데, 관찰사가 계문(啓聞)하였다.

 

3월 23일 정축

유성이 북하성(北河星) 위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입대(入對)를 청하여 아뢰기를,
"숙의(淑儀)의 간선(揀選)이 이미 종묘 사직의 대계를 위한 것이온즉 여느 때의 간선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반드시 복덕(福德)이 있고 질병과 연고가 없는 사람을 간선해 얻어야 비로소 오늘날의 소망에 부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리는 말에 장차 청양 현감(靑陽縣監) 김창국(金昌國)의 딸로 정하려 한다고 하니, 김창국은 곧 신의 형의 아들입니다. 사람이 합당한지의 여부는 신으로서 감히 논할 바가 아니나, 어릴 적부터 배를 크게 앓아서 경후(經候)가 고르지 못하다 하니, 이는 참으로 후사(後嗣)를 구함에 있어 크게 꺼리는 바입니다. 규중(閨中)의 병을 외인이 자세히 알수 없는 일이나 신은 한 집안의 사람으로서 늘 염려해 온 터입니다. 이미 이러한 것을 알고 있다면 어찌 감히 숨기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궁금(宮禁)과의 혼인하는 것은 사부(士夫) 집에서 회피하는 것이어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것으로써 신에게 의심을 가질 것입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은 없지만 대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이 어찌 국가의 막대한 일인데 감히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운 뜻을 가지고 헛말을 꾸며서 우러러 지존(至尊) 앞에 계달하겠습니까? 뒷날에 마땅히 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나, 걱정스러움과 절박함을 견디지 못하여 생각에 생각을 반복한 끝에 마지 못하여 병을 무릅쓰고 입대를 청하는 바입니다. 일의 체모가 삼간(三揀)을 한 뒤와는 다름이 있는 만큼 지금이라도 개선(改選)하소서. 이것이 신의 구구한 소망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여염집 처자의 병을 한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외면으로 말한다면 나이가 이미 장성하고 또 병색이 없으며, 허다한 사람 중에서 반드시 이를 정한 것도 우연한 뜻이 아닌데, 더구나 부인의 임산(姙産)이란 오로지 복병(腹病) 유무에 달린 것이 아니라면, 지금에 와서 다시 개선한다는 것도 끝내는 거듭 곤란한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신의 이 말이 뒷날 죄를 면하기 위한 입장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처하고 있는 자리가 작은 벼슬자리에 견줄 바가 아닌 만큼 비록 다른 집의 처자라 하더라도 만약 그에게 병이 있는 것을 안다면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한 집안 사이에서 그것을 알고서 어찌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며, 지극한 말로 힘써 진달하기를 반복하여 마지 않았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신은 들으니 조종조(祖宗朝)에서 빈어(嬪御)를 간택하는 규정에 혹은 단번에 여러 사람을 간선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또 널리 간택을 하지 않는다면 후사를 구하는 길이 점점 지연될 것이니, 성상의 뜻에 만약 개정하기가 어려우시다면 지금이라도 널리 간선을 하는 것이 만전의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또 윤허하지 않았다. 김수항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서 아뢰기를,
"신은 고질병이 몸에 들어 뿌리가 점점 깊어져서 모든 직무를 폐지하고 있으니, 그 죄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국가의 기강이 해이되어 모든 관리가 직무에 태만하고 있으니, 대신이 된 자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서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뭇관료를 인도해서 타락된 면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 병을 말하고 허명만 띠고 앉아서 어진 사람의 진출의 길을 가로막고 녹만 훔치고 있었으니, 지금 이 면직을 비는 것은 실로 충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털끝만치라도 스스로의 편의를 생각하는 의도가 있다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의 직임이란 여러 관료에 비길 것이 아니며 굳이 사양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나의 마음이 불안하다. 부디 다시는 사양하지 말고 합(閤)에 누워서라도 도(道)를 논하라."
하였다.

 

3월 24일 무인

우박이 내리고 유성이 대각성(大角星) 위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다.

 

3월 25일 기묘

정언 서문유(徐文𥙿)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3년의 상(喪)을 이미 마치시고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는 예를 막 치르시어, 이른 아침에 거가(車駕)로 거동하여 능원(陵園)에 전배하시니, 석문(石文)의 송백(松栢)에 이슬이 젖어 흐르는 구슬 빛을 우러러보시고 출척(怵惕)해 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열무(閱武)의 거행이 돌아오시는 길에서 있었는지라, 만인이 목도 하는 바에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또 날이 저물어서 환궁하시느라 앞으로 몰아 질주하다가 도로에 쓰러져서 다시 대열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 무슨 거조이십니까? 삼사(三司)083)                  가 번갈아 앞에서 간쟁하고 대신이 잇따라 뒤에서 아뢰었으면 혹시 응당 행하여야 할 일이라도 오히려 그만둘 수 있는데, 더구나 행하지 않아도 될 일이겠습니까? 또 엎드려 듣건대 거둥하시던 전일에 선전관(宣傳官) 및 수가 금군(隨駕禁軍)을 불러 모아 후원에서 관사(觀射)하시고 이어 호괴(犒饋)와 시상(施賞)을 하셨다고 하니, 이날은 곧 전하께서 청재(淸齋)084)                  하시는 날로서, 승정원(承政院)의 문서와 대관(臺官)의 계사(啓辭)도 일체 물리치고 모든 관료가 재숙(齋宿)하며 내일 거행할 일을 기다리고 계셔야 할 것인데, 유독 전하께서는 장전(帳殿)에 나가셔서 말을 몰아 달리며 돌진하여 활쏘는 광경을 평일이나 다름없이 관람하셨으니, 이것이 과연 옛사람이 이른바 ‘정제(整齊)되지 않은 점을 정제하여 재계를 다한다[齊不齊以致齋]’는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이는 오늘날에 처음 시작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상소의 사연이 이와 같으니, 내 마땅히 유의를 하겠다."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숙의(淑儀)를 세번 간택한 뒤에는 응당 거행할 절목이 있어야 할 터인데, 지금 본조의 문서에는 고증해 의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의 일기에, ‘후궁 장숙의(張淑儀)를 가례청  도청(嘉禮聽都廳)이 본가로부터 모시고 이현궁(梨峴宮)으로 나아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태화가 당시 전 응교로서 도청이 되었으니, 이는 신빙할 만한 문자입니다. 이번에도 이에 의거하여 가례청(嘉禮聽)을 설치하고 도청과 낭청(郞廳)을 차출하여 검칙(檢飭)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3월 27일 신사

최관(崔寬)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익태(李益泰)를 장령(掌令)으로, 윤진(尹搢)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서종태(徐宗泰)를 응교(應敎)로, 강현(姜鋧)·이이명(李頤命)을 교리(校理)로, 서문유(徐文𥙿)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심유(沈攸)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김창협(金昌協)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권상하(權尙夏)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3월 28일 임오

유성이 북극성(北極星) 밑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서종태(徐宗泰)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명하여 김씨(金氏)를 숙의로 삼고, 노비 1백 50명을 내려 주었다. 김씨는 곧 현감 김창국(金昌國)의 딸이다.

 

황창 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의 집에서 여주(驪州) 장흥사(長興寺)를 훼철하고는 변광보를 절터에 이장(移葬)하고, 이내 그 절을 원당(願堂)으로 삼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를 이조에 내린 바 복주(覆奏)하여 시행하지 말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특별히 윤허하였다. 승지 송창(宋昌)이 논집(論執)하여 아뢰기를,
"궁가(宮家)에서 사찰을 절수(折受)085)  하는 것은 원래 법례(法例)가 아니며, 본 고을의 형세로 보아도 반드시 지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에 전의 명을 정침하였다.

 

3월 29일 계미

문의(文義) 등 16고을에 3월 12일에 지진이 우레같이 일어 지붕이 흔들렸다고 관찰사가 계문(啓聞)하였다.

 

3월 30일 갑신

가례청(嘉禮廳)에서 아뢰기를,
"숙의(淑儀)가 입궐(入闕)할 때에 대전 및 대왕 대비전·중궁전에 마땅히 조현(朝見)의 예가 있어야 할 듯하나, 예조에 의거할 만한 문서가 없어서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과 의논하라고 명하였는데, 여러 대신이 모두 이르기를,
"숙의는 곧 내명부의 하나이므로, 입궐할 때 조현의 예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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