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4월

싸라리리 2025. 11. 17.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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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을유

이때 팔도[八路]에서 다 같이 눈이 내렸다고 계문(啓聞)하였는데, 산협 고을은 특히 심하여 날씨의 차갑기가 한겨울이나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4월 3일 정해

유성이 규성(奎星) 위에서 나왔다.

 

임금이 성균관(成均館)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알현(謁見)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행례를 마치고 나서 이에 막차(幕次)로 돌아와 명륜당(明倫堂)에서 시사(試士)를 하려고 하는데, 이때 서울과 지방의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수없이 몰려왔다. 임금은 연신(筵臣)이 말한 것을 적용하여 명륜당의 서쪽 담장을 헐어서 비천당(丕闡堂)의 바깥 뜰과 통하도록 하여 소란함과 비좁은 폐단을 막도록 하라고 명하였으나, 이에 미쳐 거자(擧子)들이 앞다투어 뜰 안으로 먼저 들어가려고 하다가 쓰러져 밟혀 죽은 사람이 8명이나 되었고, 그 나머지 다쳐서 목숨이 거의 끊어지게 된 사람도 매우 많아서, 반교(泮橋) 밖에 울부짖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임금이 듣고 크게 놀라서 급히 의원을 보내고 약을 보내어 죽지 않은 사람을 살펴보도록 하고,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고, 지방에 사는 자는 상여로 운송하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승지와 대신을 인견(引見)하니, 도승지 신완(申琓)·영의정 김수항(金壽恒) 등이 입대하여 임금에게 속히 과장(科場)을 파하고 환궁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난처해 하다가 다른 대신을 불러서 문의하니, 영중추부사 김수흥(金壽興)·좌의정 남구만(南九萬)도 다 같이 마땅히 파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김수항이 또 삼사(三司)의 관원으로 자리에 있는 자를 불러다 문의할 것을 청하였는데, 삼사의 여러 신하가 다 같이 말하기를,
"오늘의 거조는 작헌례가 소중하고, 시사는 대단치 않습니다. 작헌례를 이미 이루었으니 시사하지 않은 것을 큰 결함으로 삼을 것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의논이 이와 같다면 과장을 파하겠다. 그러나 무사(武士) 중에 초시(初試)에 합격한 자는 반드시 실망하였을 것이니, 다시 날짜를 가려 춘당대(春塘臺)에서 정시(庭試)를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이 죽었다. 이정영은 이경직(李景稷)의 아들이다. 이경직은 이이첨(李爾瞻)에게 붙었다가 반정(反正) 뒤에 자주 탄핵을 받은 바 있으며, 이정영은 비록 효행은 있다고 하나 조정에서의 언론은 볼 만한 것이 없었으며,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였을 때는 또한 재물을 탐하였다는 소문이 있었는가 하면, 만년(晩年)에는 여러 아들을 위하여 저택을 지었는데, 다 같이 극도로 사치스럽게 하였다. 또 허적(許積)의 무리에게도 붙어서 송시열(宋時烈)의 예론(禮論)을 배척하고 시의(時議)에 영합하였다 하여 공론이 병통으로 여겼으며, 마침내는 대각(臺閣)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서(隷書)를 잘 써서 공사의 금석 글씨가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고, 이것으로써 벼슬이 극품(極品)에 이르렀다. 이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71세였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4월 4일 무자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대략 아뢰기를,
"신이 젊어서 주차(朱子)의 글을 읽어 그 문자로 전한 문사의 조박(糟粕)을 대강은 엿보았습니다. 그러나 의리설(義理設)에 있어서는 의혹되는 점이 많아서 읽어 갈즈음에 감히 막히는 곳을 사우(師友)들에게 질정하려는 것이었고, 감히 참람되게 주석의 범례에 비기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생각 밖에 대신이 신극(宸極)086)  에 상달하여 간행하여 반포하라는 명이 내려지기까지 하였으니, 신이 이 말을 듣고 너무도 놀란 나머지 앞으로 사문(斯文)087)  에 죄를 지을 것 같아서 침식(寢食)이 불안합니다. 빌건대 내리신 명을 멈추어서 글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키고 있는 이 시대에 조금이라도 하자가 없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타이르기를,
"간행하여 널리 반포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연한 일이 아닌데 경은 어찌하여 그 겸손함이 이다지 지나친가?"
하였다.

 

대사간 박태상(朴泰尙)이 거자(擧子)가 너무 많아서 밝혀 죽는 사고까지 있었다는 것으로 상소하여, 별도로 넓은 곳을 골라 과장을 설치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이를 의논하라고 내리니, 예조에서 복주(覆奏)하기를,
"별시(別試)의 초시(初試)가 이미 임박하여 형편상 주선이 어렵게 되었으니 우선 그대로 동학(東學)에 설치하게 하고, 다시 숙강(熟講)을 더하여 장소를 택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4월 5일 기축

임금이 춘당대(春塘臺) 장전(帳殿)으로 나아가서 문사(文士)·무사(武士)를 시험보이고 이내 문무의 여러 신하와 종신(宗臣)들에게 사후(射侯)할 것을 명하였는데, 총융사(摠戎使) 구일(具鎰)은 4발, 훈련 대장(訓鍊大將) 신여철(申汝哲)은 3발을 맞히니, 임금이 자못 흔쾌해 하며, 모두 가자(加資)088)  하라고 명하였다. 독권관(讀券官)089) 남구만(南九萬)에게 명하여 여러 시관(試官)과 함께 문과(文科)의 시권(試券)을 수합하여 조식(趙湜) 등 9명을 뽑게 하고, 아울러 무과에도 급제(及第)를 주고는 이내 즉일에 방방(放榜)하니, 이는 알성(謁聖)의 사례를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내 환궁하였다.

 

임영(林泳)을 검상(檢詳)으로, 이삼석(李三碩)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4월 6일 경인

승정원에서 초여름에 눈이 내리는 이변을 가지고 진계(陳戒)를 지극하게 하고, 홍문관에서도 차자를 올려 수성(修省)090)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너그러이 비답하고 가상하게 받아들였다.

 

4월 7일 신묘

유성이 저성(氐星) 위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문·무과(文武科)를 창명(唱名)한 지 사흘이면 으레 문묘(文廟)를 알현(謁見)하는 것인데, 문과 장원 조식이 갑인년091)   이후 고묘론(告廟論)을 제창하였다가 사문(斯文)에 죄를 얻고 유림(儒林)에게 중벌을 받아서 풀리지 않은 지가 7년이나 되었다. 이에 이르러 성균관 유생들이 거절하고 알현을 허락하지 않자, 방하(榜下)092) 박정(朴涏)이라는 자가 장원으로 묘정(廟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의리상 같이 행동하여야 된다 하고, 들어가지 않고 나가니 듣는 사람들이 놀라와 한탄하였다.

 

4월 9일 계사

예조에서 아뢰기를,
"숙의(淑儀)가 입궐한 뒤 물선(物膳)의 봉진(封進)은 의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신해년093)  에 내관(內官)의 수본(手本)094)  에 의하여 장귀인방(張貴人房)에 삭선(朔膳)095)  을 그대로 올렸기 때문에 금번에도 각도에 분부하여 전례를 상고하여 봉진토록 하였으나, 외부에서 모두 숙의가 궐내에 있을 때에는 일찍이 물선을 봉진한 사례가 없다고 말하므로, 다시 각도에 이문(移文)하였으나 역시 의거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4월의 삭선이 이제 들어올 것인데, 청컨대, 우선 환송케 하고 옛 사례를 자세히 물은 뒤에 처리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장귀인 【곧 인조(仁祖)의 후궁(後宮)이다.】  이 궐내에 있을 때에 물선을 봉진한 전례가 분명히 있다 하여 그대로 봉진케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고사(故事)에 당저(當宁)096)  의 후궁에게는 으레 물선을 봉진하지 않았는데, 여성제(呂聖齊)가 임금의 비위를 맞추느라 그래도 받들어 올려서 많은 사람들이 놀라와 하는데도 대각(臺閣)이 전혀 한 마디 말도 없었으니, 일마다 규찰하여 바로잡는 그 의리가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3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재정-진상(進上) / 역사-사학(史學)


[註 093] 신해년 : 1671 현종 12년.[註 094] 수본(手本) : 자필로 쓴 글월.[註 095] 삭선(朔膳) : 매달 초하루에 각도(各道)에서 나는 산물로 음식을 차려서 임금이나 후비에게 올리던 밥상.[註 096] 당저(當宁) : 그 때의 임금.
사신은 논한다. "고사(故事)에 당저(當宁)096)  의 후궁에게는 으레 물선을 봉진하지 않았는데, 여성제(呂聖齊)가 임금의 비위를 맞추느라 그래도 받들어 올려서 많은 사람들이 놀라와 하는데도 대각(臺閣)이 전혀 한 마디 말도 없었으니, 일마다 규찰하여 바로잡는 그 의리가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임금이 하교하기를,
"숙의가 별궁에서 입궁하기 전에 마땅히 한 번은 예물을 보내는 일이 있어야 될 듯하다. 그리고 장귀인 때의 문서가 난리를 치르느라 상고할 길이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대신과 의논할 것을 청하였는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진(晋)나라 무제(武帝)가 삼부인(三夫人)·구빈(九嬪)을 맞으려고 할 적에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황후(黃后)를 맞음에는 각규(殼圭)를 쓰나, 잉첩에게는 예폐의 제도가 없으며, 책조(冊詔)를 절하고 건네주는 일은 위씨(魏氏)의 고사에 의거할 수 있습니다.’ 하니, 이에 당장 사자(使者)에게 부절(符節)을 주어 보내어 가서 절하고 조책을 건네주게 하였으니, 그 처사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유독 예폐는 한 절목도 없었으니, 이는 아마도 황후를 책봉하는 의절과 분별을 표시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법에도 실려 있지 않고 전례에도 의거할 만한 것이 없으니, 시행하지 않음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공홍도(公洪道)097) 천안(天安)의 유학(幼學) 서몽조(徐夢祖)가 상소하여 ‘과장에 수행인이 마구 들어가는 폐단을 극렬히 논하며, 이제부터 정시(庭試)와 알성시(謁聖試)098)  도 다 같이 초시(初試)를 설행할 것을 청하고, 또 재변의 참혹함과 기근의 상황을 개진하고는 풍정(豐呈)을 가을로 물려서 거행할 것도 청하였다. 이어 《주역(周易)》을 강론할 적에 본의(本義)만을 치우치게 폐지하여도 아니되니 먼저 《계몽(啓蒙)》·《계사(繫辭)》 등의 책들을 강의할 것이며, 성의와 예절을 더욱 돈독히 하여 유신(儒臣)을 초빙하여야 한다고 하니, 임금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공홍도 관찰사 권시경(權是經)이 치주(馳奏)하기를,
"쌍수 산성(雙樹山城)은 실로 관방(關防)의 요해지입니다. 그러나 무너진 곳이 자못 많으니, 청컨대 승군(僧軍)을 조발하여 보수케 하소서."
하니, 이를 묘당(廟堂)에 내려 복의(覆議)케 하여 시행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규령(李奎齡)이 순흥(順興)의 창락역(昌樂驛)을 풍기(豐基)로 환속시킬 것을 치계(馳啓)하였습니다. 그러나 풍기·순흥 두 고을은 처음에 《지리지(地理誌)》에 의해 그 경계를 정하고 그 구역을 찾은 것인데, 오늘날 그 편의 여부에 따라 마음대로 주거나 받을 것 같으면 장래 분쟁의 사단이 반드시 그칠 때가 없을 것입니다. 풍기에서 단양(丹陽)까지의 50리 사이에 창락의 한 역참은 마땅히 영원히 혁파하여 신설된 고을에서 주전(廚傳)099)  하는 폐단을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4월 10일 갑오

성호징(成虎徵)을 승지(承旨)로, 임영(林泳)을 사인(舍人)으로, 이홍적(李弘迪)을 사간(司諫)으로, 박태상(朴泰尙)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윤성교(尹誠敎)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4월 11일 을미

달무리가 토성(土星)을 에워싸고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집의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가자(加資)의 은전(恩典)도 가볍게 베풀어서는 아니되거니와, 숭품(崇品)100)  에 승진시켜 제수하는 것은 사체가 더욱 분별되어야 합니다. 어찌 일시의 시예(試藝)로 인해 은전을 지나치게 베풀어져야겠습니까? 청컨대 신여철(申汝哲)·구일(具鎰)에 대한 가자의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전의 규례가 있고 또 특별한 은전에서 나온 것이므로 윤허할 수 없다."
하였다. 시독관 이이명(李頤命)·검토관 이윤수(李允修) 등이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의 공도 당시에 가자하는 데 지나지 않았으니, 조종조(祖宗朝)의 신중히 선택하는 뜻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서종태가 아뢰기를,
"능원에 거둥하시었다가 환궁하실 적에 거가를 주필(駐蹕)하신 교장(敎場)에서 태복시 정(太僕寺正)이 채찍을 올리기 위하여 어가 뒤에 서 있었는데, 어떤 소환(小宦)101)  이 마치 노예를 꾸짖듯이 욕지거리를 하고 밀쳐서 땅바닥에 쓰러질 번 하였으니, 패만(悖慢)한 그 버릇은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조사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추고(推考)할 것만을 명하였다가, 서종태가 다시 간쟁(諫爭)하자, 이에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서종태가 또 아뢰기를,
"황창 부위(黃昌副尉)의 집에 호상(護喪)으로 나간 중사(中使)102)  가 일로 인하여 서계(書啓)를 올리면서 양주 목사(楊州牧使)를 추고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어찌 감히 법규를 벗어나서 조정 관원을 경시함이 이와같이 무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국가의 법이 오직 중관(中官)103)  이 법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제도입니다. 사직의 영장(靈長)도 이에 힘입은 바가 있는데, 오늘날에 와서 이것마저도 무너졌으니, 그 우려됨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남의 국가에 화란(禍亂)을 끼치는 것은 모두가 싹트는 시초에 일찌감치 방지하지 못한 데서 연유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교만하고 방자한 행위는 깊이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敍用)치 마소서."
하니, 임금이 처음에 난처해 하며 말하기를,
"여러 고을에서 모두 역정(役丁)을 보내어 왔는데, 유독 양주(楊州) 사람이 이르지 않아서 서계에 이 일을 말한 것인데 추고를 청한 한 가지 일은 아마 규례를 모르는 데서 그렇게 된 것일 것이다."
하였다. 서종태가 또 아뢰기를,
"중사가 된 자는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진계(陳啓)하고 처분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더구나 양주 목사는 관질(官秩)도 낮지 않은데. 제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일에도 매번 두호(斗護)하시는 표정을 보이시니, 신은 실로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그 일의 실상만을 말하였을 뿐인데, 두호한다고 하니 이는 나의 본의를 알지 못하는 탓이다."
하고, 이내 그대로 따랐다. 승지 홍만종(洪萬鍾)이 아뢰기를,
"시종신(侍從臣) 목임일(睦林一)의 아비 목내선(睦來善)이 올해에 나이 70입니다. 마땅히 한 자급을 가자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곧 한때의 특은(特恩)으로서, 겨우 법식만 정하여진 것이니, 이제 다시 그 길을 열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하였다.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홍만종이 아뢴 바는 참으로 외람되며 대신(臺臣)이 추고를 청하지 않는 것도 체통을 너무 잃은 처사입니다."
하니, 서종태가 비로소 인피(引避)하였다.

 

4월 12일 병신

사관(史官)을 보내어 봉조하(俸朝賀) 송시열(宋時烈)을 타이르고 불렀다.

 

주강에 나아갔다. 시독관(侍讀官) 이이명이 유현(儒賢)을 초빙하여 강문(講問)에 도움을 받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 봉조하에게는 이미 돈독하게 타일러 불러오도록 명하였으니, 박세채(朴世采) 및 이상(李翔)도 승정원으로 하여금 하유(下諭)케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또 아뢰기를,
"대사헌 최관(崔寬)과 우윤(右尹) 권열(權說)도 역학(易學)에 자못 힘을 썼습니다. 최관을 불러 연석(筵席)에 출입케 하고 권열은 특진관(特進官)으로 차정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13일 정유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재신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바야흐로 뭇관원을 책려(責勵)하고 계시는 만큼 비록 낮은 관원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경계해 살펴야 할 터인데, 더구나 높은 관원이야 어찌 게을리하고 소홀하게 하겠습니까? 전 판윤 신정(申晸)은 병을 이유로 관직을 떠난 뒤에 빈객을 응접하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니, 병이 대단치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좌참찬 조사석(趙師錫)이 겸임하고 있는 비변사 유사 당상은 본래 한가로운 직임이 아님에도 잇따라 사직 단자를 올리고 한 번도 참석을 않을 뿐 아니라, 멀리 강상(江上)으로 나가서 문첩(文牒)까지도 일체 물리치고 보지 않으니, 모든 것이 너무 부당합니다. 마땅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여 경책(警責)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남구만이 또 아뢰기를,
"국가에 갑자기 전에 없었던 치욕(恥辱)이 있으므로 신들이 묘당(廟堂)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으니,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 의리로 헤아려 볼 때 어찌 감히 편히 자리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낼 수 있겠습니까? 영의정이 나라의 일을 맡아 보기에 당하여 병을 앓고 있으니, 신이 스스로 가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진주(陳奏)와는 차이가 있고, 또 우의정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경은 더 더욱 다시 갈 수 없다."
하였다. 병조 판서 이숙(李䎘)이 아뢰기를,
"무신(武臣) 오도홍(吳道弘)은 곧 고(故) 상신(相臣) 오윤겸(吳允謙)의 족손(族孫)으로 그의 사람됨이 쓸 만합니다. 그러나 내외 관직에 주의(注擬)를 하여도 오랜 동안 낙점[天點]을 아끼시므로, 어떤 이는 전라도 병마 절도사 때의 전죽(箭竹)의 사건 때문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합니다. 만약 그 일이라면 그의 죄는 아닙니다."
하니, 형조 판서 이사명(李師命)이 곧 하인들이 교묘히 도둑질하는 폐단을 극구 말하며 이르기를,
"오도홍이 처음에 굳게 봉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잘못이 있으나, 정선(精選)하지 않았다는 것은 실상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자못 그렇다고 하였다. 남구만이 나아가 아뢰기를,
"한 무사(武士)가 죄없이 폐출을 당한 것도 진실로 안타까운 일인데, 더구나 여러 신하가 일을 말하다가 죄를 얻는 것이겠습니까? 언로(言路)는 국가에 있어 마치 사람의 혈맥(血脈)과 같으므로 혈맥이 막히면 사람이 병이 들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가 망합니다. 신이 일찍이 효종·현종 두 왕조를 섬겼거니와, 나이 젊고 기질은 날카로운데 대각에 있게 되면 어찌 지나친 말이 없겠습니까? 그래서 간혹 축출도 당하였지만, 곧바로 불러 들였습니다. 근래 조정에 언론이 분리되고 심지가 서로 막혀서 말로써 거슬림을 받으면 해를 넘기며 죄받고 버림을 당하는데도 신과 같은 자는 스스로 높은 자리를 만들어서 규찰하여 탄핵할 자가 곁에 없으니, 사사로운 계책은 얻었다 하겠으나 국가의 일이 어찌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언로를 넓히는 일을 나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여러 신하의 저촉된 바가 각기 경중이 있기 때문이다. 아뢴 바는 진실로 좋으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대사간 정재희(鄭載禧)가 아뢰기를,
"지난날 인심이 본성을 상실하여 사특한 말이 자행되어, 사림(士林)을 해치고 국가에 화환을 끼치려던 계획이 고묘론(告廟論)104)  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새로 급제한 조식(趙湜)이 방수(榜首)에 참여하였다 하여 상례대로 전적(典籍)을 주었으나, 이같이 음흉한 사람은 벼슬아치의 반열에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남구만에게 물었다. 남구만이 대답하기를,
"조식이 성균관에 들어가서 상소하려고 할 적에 그의 종도 그것이 흉한 상소임을 알고 애써 말리니, 조식이 크게 성을 내며 급박하게 말을 차비하라고 하자, 그 종이 목을 매어 죽었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어느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제야 따랐다.

 

4월 14일 무술

달무리가 토성(土星)을 둘러쌌다.

 

4월 15일 기해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러쌌다.

 

동부승지 신엽(申曅)이 아뢰기를,
"함경도 관찰사 이단석(李端錫)이 4월 초하루 진상 물목(物目) 중에 숙의방(淑儀房)에 올리는 것을 중궁전에 올리는 것과 조금도 차등없이 하였고, 또 ‘숙의방’의 세 글자를 각전과 함께 극행(極行)105)  으로 썼습니다. 청컨대 추고케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에서는 파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는 따르지 않았다. 이 단석이 숙의를 극행에 썼을 뿐만 아니라, 올리는 물품의 봉함에다 ‘신근봉(臣謹封)’이라고 서명하기까지 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의 무식함에 놀랐다.

 

4월 16일 경자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주역(周易)》을 진강하는데, 음석(音釋)을 채 마치기도 전에 특진관 권열(權說)이 자리에서 나가 상수(象數)106)  를 이것저것 늘어놓는 것을 승지가 만류하고, 강의를 마치기를 기다려서 글뜻을 진술하게 하였는데, 권열은 그나마 말소리만 크고 갈팡질팡 허둥대어 임금이 괴이하게 여기는 표정을 지었다. 권열은 본시 경솔하고 나이가 많은데다 귀까지 먹었으며, 길에서 들은 상수의 나머지로 또 특진관에 특차(特差)되었다. 여러 차례 강연(講筵)에 들어가서 상수를 뇌까렸으나, 용잡하게 횡설수설하여 차례가 없는가 하면, 책을 들고 앞에 나아갈적마다 자기 소희의 개진을 청하여 임금 역시 흔연(欣然)히 웃음거리를 삼았다. 지평 이삼석(李三碩)이 아뢰기를,
"동지사(冬至使) 낭원군(郞原君) 간(偘)·부사(副使) 이선(李選)·서장관 김경(金澋)을 모두 삭탈 관작(削奪官爵)하고, 수역관(首譯官) 등은 끝내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예사로 보고 국사(國事)를 만홀히 하였으니,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하니, 이는 모욕스런 글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금이 좇지 않았다. 지경연(知經筵)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시종신(侍從臣)의 아비인 나이 70이 된 사람을 초계(抄啓)하여 가자(加資)하는 것이 법전에 실려 있지 않은데도 해마다 상례처럼 시행하는 것은 실로 의의(意義)가 없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민정중(閔鼎重)이 지금부터 법식을 정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올해까지는 초계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민서가 또 아뢰기를,
"관직이 높은 반열에 있는 사람까지도 그의 아들이 시종신으로 있다 하여 일체로 가자를 한다는 것은 극히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추은(推恩)하는 식전은 통정(通政)에 그치는 것이 마땅하다. 가선(嘉善) 이상은 논하지 말라."
하였다. 이민서가 또 아뢰기를,
"인조(仁祖) 때의 시종신 가운데 전 정(正) 성진병(成震丙)과 전 참의 황준구(黃儁耉)가 나이 70이 넘었으나, 전일에 가자할 때 유독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계달(啓達)합니다."
하자, 민정중이 아뢰기를,
"일체로 시행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일체로 시행하라고 하였는데, 뒤에 이민서가 문서를 상고하여 본즉 가자가 아니고 음식물을 내린 것이므로, 이민서가 상소하여 그 잘못됨을 스스로 진술하여 두 사람의 가자를 환수하였다.

 

김만중(金萬重)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김덕원(金德遠)을 판윤(判尹)으로, 이여(李畬)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집의 서종태(徐宗泰)가 사행(使行)107)  의 일을 상소하여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 연경(燕京)에 가는 사행은 대신으로 차출하여 보내야 합니다. 당초 성상께서 종반(宗班)을 차출하여 보낸 것 자체가 이미 사의(事宜)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대신이 자청하는데도 또 윤허하지 않으시는 것은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국가가 이처럼 전에 없었던 치욕을 당한 만큼 사은(謝恩)하는 사행에 마땅히 해명하는 조치가 있어야 합니다. 전대(專對)의 책임은 묘당(廟堂)에 위임함이 마땅하겠습니다. 변금(邊禁)이 엄격하지 못하여 갑자기 분쟁이 생겼는데 그의 허물과 책임을 논한다면 모두 아랫사람에게 있지만, 필경 그에 대한 치욕과 문책은 오로지 성상의 몸으로 돌아가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너그러이 비답하고, 좌의정 남구만(南九萬)을 정사(正使)로 삼았다.

 

수찬 홍수헌(洪受瀗)이 군덕(君德)의 성취(成就)의 요점과 조사(朝士) 분당의 우려 및 무릇 청선(淸選)108)   속에 있는 사람을 궐원에 따라 곧장 금곡(金穀)·병민(兵民)을 다스리는 직임에 전보하는 문제, 각 아문의 둔전(屯田)에 별장(別將)을 없애고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관리케 할 것 등으로 소를 올려 개진하였는데, 무려 수천 마디에 이르렀다. 임금이 너그러이 비답하였다.

 

교리 강현(姜鋧)이 소(疏)로 《주역(周易)》 건(乾)괘와 곤(坤)쾌의 뜻을 논하고, 그의 아버지 강백년(姜栢年)이 인조 때 올렸던 ‘양심 양생 동일법잠(養心養生同一法箴)’을 올리니, 임금이 가상하게 받아들이고 또 권장하였다.

 

4월 17일 신축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도 입시하여, 서종태(徐宗泰)가 소(疏)로 논의한 바에 있는 사신 차송(差送) 문제를 누누이 진달(陳達)하고 꼭 갈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종태의 뜻도 의견이 없지는 아니하나 또 염려되는 것은 이번 걸음에도 맡은 일이 있는데, 우의정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경은 영의정으로서 떠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좌의정이 수고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김수항이 또 선왕 때 영의정이 들어간 예를 들어 거듭 청하자, 임금이 온갖 말로 위로하고 타일렀다.

 

평안도 강서(江西) 등 일곱 고을에 이 달 초열흘에 지진이 있었는데, 지붕이 흔들리고 사람과 말이 놀라 움추렸다.

 

4월 18일 임인

서리가 내렸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영중추부사 김수흥(金壽興)이 나아가 아뢰기를,
"봉조하 송시열(宋時烈)이 지난날 유배지에 있으면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주석하여 《차의(箚疑)》라고 이름하였는데, 거의 완료가 되었습니다.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의 석의(釋疑)의 예에 의거하여 간행한다면 권질이 많지 않아서 널리 반포하기도 쉬울 것입니다.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그 책자를 가져다가 친히 보신 뒤에 간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또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의 봉사손(奉祀孫) 이연(李綖)을 특별히 수록(收錄)토록 명하여 그의 선대 제사를 받들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또한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다가오는 풍정(豐呈)을 올릴 때에 외명부(外命婦)109)  는 이미 감하기로 하였으나, 정사 원훈(靖社元勳) 이시백(李時白)·이후원(李厚源)의 아내가 여태 살아 있으니 다른 사람과는 다름이 있습니다. 특명으로 나와서 참여케 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경의 말이 의당하다. 그들을 들어와 참여케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수항이 또 차자를 올려 체직시켜 연경(燕京)에 보내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위로하여 타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9일 계묘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이 뒤로 여러 차례 나타났다.

 

4월 20일 갑진

서리가 내렸다. 여러 도에서 서리 내렸다는 장계(狀啓)가 연이어 올라 왔다.

 

이국방(李國芳)을 장령(掌令)으로, 민진주(閔鎭周)를 헌납(獻納)으로, 서종태(徐宗泰)를 부응교(副應敎)로, 한태동(韓泰東)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봉조하 송시열이 사관의 서계(書啓)에 붙여서 진계(陳啓)하기를,
"들으니 선사(先師)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말하기를, ‘《역학계몽(易學啓蒙)》을 알지 못하고 《주역(周易)》을 읽는 것은 잣대[尺度]를 갖지 않고 장단(長短)을 알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주역》의 한 글을 주부자(朱夫子)께서 일생 동안 공부하셨지만, 이를테면 ‘용구(用九)’·‘용륙(用六)’110)   등의 뜻은 오히려 구양수(歐陽脩)의 논설을 기다려서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하면서 인하여 이르시기를, ‘정전(程傳)은 물을 부어도 새지 않을 만치 치밀하지만 《주역》에는 알지 못할 것이 많았다.’ 하고, 드디어 《계몽》을 지은 것입니다. 《계몽》의 글을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孔子)가 《주역》을 논하기를, ‘《주역》을 지은 자는 아마 우환이 있었을 것이다. 《주역》이 다시 일어날 적에 문왕(文王)과 주(紂)의 일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 말이 위태로왔으니, 위태롭게 여기는 자는 안정되게 하고 쉽게 여기는 자는 무너지게 만드나, 그 종시(終始)를 두려워하면 그 귀요(歸要)는 허물이 없게 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건대 《주역》을 배우는 방도는 이에서 더 큰 것이 없다고 봅니다. 삼가 듣건대 오늘날 진언(進言)하는 사람들이 모두 안일(安逸)함과 일락(逸樂)으로써 경계를 한다고 하니, 만에 하나라도 성명(聖明)께서 이러한 조짐이 있다면 이 한 마디 말에 어찌 더욱 경계하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다시 사관을 보내어 타이르기를,
"진계(陳戒)한 말은 내가 각별히 유의하여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4월 22일 병오

영의정 김수항이 처음 정사(呈辭)하였는데, 임금이 불윤(不允)의 비답을 내렸다.

 

주강에 나아갔다.

 

임영(林泳)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4월 26일 경술

부교리 박태만(朴泰萬)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숙의(淑儀)에게 삭선(朔膳)을 봉진하는 일은 의혹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고사(古事)에 후궁의 삭선은 선조(先朝) 때 빈어(嬪御)에게만 있었는데, 예조에서 널리 상고하지 않고 지레 계청(啓請)하였으니, 너무도 잘못되었습니다. 예전 제도가 한 번 변하고 그 길이 점점 넓어지면 존비(尊卑)의 등위(等威)까지도 그 정도(正道)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이단석(李端錫)의 범한 것이 비록 다른 뜻이 없다 하더라도 존비의 질서를 문란케 하고 등위의 존엄성을 어지럽힌 것은 보통 잘못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더구나 봉표(封標)에도 타당하지 않은 바가 있었다고 하니, 대신(臺臣)이 파직하자는 계청은 곧 대수롭지 않은 말이었을 뿐입니다."
하고, 또 대간이 아뢰어 사신에게 죄줄 것을 청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논하고, 의리를 살펴 처리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장귀인(張貴人)이 궐내에 있을 적에 삭선을 진배(進排)111)  한 사실이 분명히 증거가 있고, 이단석의 일은 비록 놀랄 만한 일이라 하더라도 실상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며, 사신이 극력 논쟁하지 못한 것도 사세가 부득이한 데서 연유한 것이니 파직과 삭직을 청한 것이 꼭 합당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였다.

 

숙의(淑儀) 김씨(金氏)가 입궐하였다.

 

4월 27일 신해

임상원(任相元)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임영(林泳)을 집의(執義)로, 심평(沈枰)을 장령(掌令)으로, 김우항(金宇杭)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4월 28일 임자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편집한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사관(史官)편에 부쳐 올리고, 또 아뢰기를,
"일찍이 박세채(朴世采)와 더불어 《주자대전》에서 누락된 주자 문자의 약간 조목을 모아 별도로 작은 책을 만든 바 그 책이 현재 박세채에게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또 박세채에게 유시하고는 주자의 유문(遺文)을 가져다가 홍문관에 내려서 이를 고증한 뒤에 간행하여 올리게 하였다.

 

4월 29일 계축

여성제(呂聖齊)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이국화(李國華)를 장령(掌令)으로, 홍수헌(洪受瀗)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장령 심평이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자, 시독관(侍讀官) 이이명(李頤命)이 나아가 아뢰기를,
"국가에서 대각(臺閣)을 둔 것은 이목(耳目)의 역할을 기여하여 그로 하여금 공론을 채택하게 하고 일마다 의논케 하기 위한 것인데, 근래 주상께서 일체 물리치시니 이미 성덕(盛德)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 헌신(憲臣)이 4, 5건의 일을 논계한 데에서 어찌 1, 2건도 윤허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단지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굳게 거절하시니, 신은 속으로만 개연해하는 바입니다. 권대운(權大運)·민희(閔熙)가 범한 죄는 그 관계가 매우 무거우니, 옛일로 말하더라도 사흉(四凶)112)  의 죄를 오랜 세월이 지났다 하여 가벼이 놓아 주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노기(盧杞)의 내이(內移)113)  를 진경(陳京) 등이 다투었고, 여혜경(呂惠卿)의 과궐(過闕)114)  을 상안민(常安民)이 걱정한 바 있습니다. 두 사람의 죄는 노기·여혜경의 죄보다 더 큰데도 점차 풀어 주어서 마침내 거두어 쓰게 되면 국가에서 다시 그 화를 받게 될 것입니다. 헌신(憲臣)의 아룀에 속히 윤허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두 사람의 범죄를 모르는 바가 아니나 양이(量移)한 지 해를 넘긴 뒤에 다시 거두는 것도 미안하지 않은가? 죄명이 용서할 만해서 윤허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이어 심평이 아뢰기를,
"당초에 변방으로 귀양 보낸 것만도 관대한 처분에서 나온 것입니다. 종신토록 변방에 물리쳐 두어도 본디 애석할 것이 없는데, 점차 형률을 감하여 마침내 서울 가까운 곳에서 편히 쉬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의 징악(懲惡)하는 도리이겠습니까?"
하고, 이이명이 아뢰기를,
"성명(聖明)께서 방금 《역경(易經)》을 강의하셨다면 부양 억음(扶陽抑陰)을 하는 것이 어찌 역경의 큰 뜻[義]이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의 일은 그 처분이 점차 늦추어져서 이미 이의(異議)가 제기되고 있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마땅히 윤허하시어 공론을 펴 주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과 대신(臺臣)의 말이 이와 같으니, 공론은 알 수 있다. 민희·권대운의 양이의 명은 다시 거두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이명이 또 아뢰기를,
"송(訟)괘의 상구(上九)에 이른바, ‘혹 반대(搫帶)를 주더라도 하루 아침 동안에 세 번 빼앗기리라.[或錫之搫帶終朝三褫]’라는 말은 대개 비리(非理)로 이긴 자는 비록 명복(命服)의 상(賞)을 받는다 해도 당연히 도리어 빼앗긴다는 것이니, 임금이 내리는 작상(爵賞)에도 이러한 도(道)가 있다는 것입니다. 윤선도(尹善道)의 화심(禍心)과 흉계(凶計)는 온 나라 사람이 다 같이 분개하는 바인데도 증직(贈職)에 시호까지 내리셨으되, 이는 곧 지난날 권간(權奸)이 권력을 장악하였을 적의 일이어서 이제 이미 증직과 시호는 환수되었으나, 그의 아들 윤인미(尹仁美)가 외람되게 증직의 은전을 받은 것은 더욱 근거가 없는 일입니다. 정관(政官)이 막 입시하였으니, 청컨대 하순(下詢)하여 환수하게 하소서."
하니, 이조 참판 박태상(朴泰尙)이 아뢰기를,
"윤인미를 추증(追贈)한 일은 참으로 근거가 없으니 환수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검토관 이윤수(李允修)가 환수하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자, 이윤수가 그냥 물러났다. 이튿날 상소하여 민희·권대운을 구제하고 다시 윤인미의 일을 개진하니, 승정원에서 그의 방자하고 무엄함을 극력 논하면서 글을 지어 바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소의 사연을 보고 나도 몰래 크게 놀랐다. 내 분명히 밝혀 통렬히 배척하리라."
하고, 이어 비망기를 내리기를,
"권대운 등이 지은 죄는 왕법(王法)으로 다스린다면 만인 앞에서 베임을 면치 못할 것이로되 그 벌이 유배에 그친 것은 실로 관대한 은전(恩典)에서 나온 것이다. 작년에 이배(移配)한 것도 정적(情迹)이 용서할 만하여서가 아니라, 다만 공론을 따라 내렸던 명을 거두어들인 것인데, 이윤수가 이에 감히 앞장서서 소를 올리는가 하면, 온 종이를 가득히 메운 설화가 속이고 은폐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인심이 그 본성을 상실함이 이에 이르렀단 말인가? 관작을 삭탈하라."
하였다. 사간원에서 죄를 더 가하여 문출(門黜)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교리 목임일(睦林一)이 이윤수에 잇따라 소를 올렸는데, 승정원에서 그 사연이 더욱 무엄하다 하여 진계(陳啓)를 받들어 올리니, 전교하기를,
"권대운 등의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실로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로서, 목임일도 역시 사람인데 어찌 그 지은 죄가 지극히 무섭고 공론이 지극히 준엄함을 알지 못하랴마는, 감히 조정을 경시하고 뒤이어 소를 올려 마음대로 무리를 두둔하며, 조금의 거리낌도 없으니, 이런 것을 버려 둔다면 앞으로 사특한 말이 멎을 날이 없을 것이다. 삭탈 관작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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