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윤4월

싸라리리 2025. 11. 17.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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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4월 1일 갑인

양이(量移)한 죄인 권대운(權大運)·민희(閔熙)를 배소(配所)로 도로 보냈다.

 

삭녕군(朔寧郡) 여인 매시(梅時)가 미쳐서 제 아들과 딸 세 명을 강물에 던지고 저도 벼랑에 떨어져 죽었는데, 그의 남편이 금위군(禁衛軍)으로서 서울에 입번(入番)하고 있어 시체를 거둘 사람이 없었으므로, 승정원에서 본도로 하여금 특별히 휼전(恤典)115)  을 베풀고 입번한 그의 남편을 휴가를 주어 보내서 시체를 거두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윤4월 2일 을묘

전교하기를,
"대소의 과장(科場)에 상피(相避)116)  할 사람만 있을 것 같으면 문득 고의로 회피할 계책을 내곤 하며, 이번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초시 시관(初試試官) 심재(沈梓)와 신정(申晸)이 두 번을 불러도 나오지 않으니, 너무도 놀라게 한 일이다.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윤4월 3일 병진

영광(靈光)에 사는 향화인(向化人)117)   25명이 물에 빠져 죽고, 전주(全州)에서는 민가 여러 10호가 불에 타 사람 네 명이 타 죽었는데, 모두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윤4월 4일 정사

우창적(禹昌績)을 승지(承旨)로, 이후항(李后沆)을 교리(校理)로, 이징명(李徵明)을 부교리(副校理)로, 최규서(崔奎瑞)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강양 도 관찰사(江襄道觀察使) 이유(李濡)가 평해(平海)의 민가에 불이 나서 연달아 1백 14호나 되는 많은 집이 연소되었다고 장계(狀啓)를 올렸는데, 휼전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평안도 영변(寧邊) 등 일곱 고을에 이 달 17일 밤에 서리가 내리고, 18일에는 눈비가 함께 내려 높은 산봉우리에는 눈이 겨울처럼 쌓여 곡식 싹이 얼어 죽었으며, 맹산(孟山) 등의 네 고을에는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는 노랑 콩만 하고 그 쌓인 두께는 한자나 되었다.

 

윤4월 6일 기미

부호군(副護軍) 이상(李翔)이 상소하여 경언(經筵)에 출입하라는 명을 사양하고, 덧붙여 백성을 진휼(賑恤)하는 방도를 진술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내용으로 비답하였다.

 

윤4월 7일 경신

대왕 대비께 풍정연(豐呈宴)을 올렸는데, 밤 삼고(三鼓)118)  에야 파하였다. 이튿날 풍정 도감 제조(豐呈都監提調)·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만기(金萬基) 등을 불러 인정전(仁政殿) 뜰에서 선온(宣醞)119)  을 내리고 차등을 두어 상품을 내렸다.

 

윤4월 8일 신유

비망기에 이르기를,
"근래 국가에서 일이 많은 까닭에 풍정의 거룩한 예를 오랫 동안 설행하지 못하여 마음이 늘 결연하였다. 어제 대왕 대비전에 삼가 상수(上壽)의 예를 행하였는데, 자손이 다 모여서 밤이 늦도록 시연(侍宴)하였고, 잔을 들어 수연을 경하하매 화기가 화락하였으니, 이는 실로 보기 드문 행사이다. 어찌 기뻐하는 정성을 이루 말하겠는가? 지난날을 되새기매 자신도 모르게 슬픈 마음을 억누르기 어렵다. 이내 생각하니 지존(至尊)의 회갑은 이보다 더 경사가 없고 보면, 휘호(徽號)를 올리는 예가 《실록》 속에는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다 하더라도 정과 예로 헤아려 볼 때 그만둘 수가 없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즉시 모든 대신에게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판중추(_)부사 민정중(閔鼎重)은 ‘옛 법전에 없다.’고 답하였고, 영중추부사 김수흥(金壽興)·판중추(_)부사 정지화(鄭知和)·이상진(李尙眞)·좌의정 남구만(南九萬)·우의정 정재숭(鄭載嵩)은 ‘효성을 펴고자 하여서라면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니, 전교하기를,
"지존의 회갑은 곧 드물게 있는 경사인즉 별도의 휘호를 올리는 것이 정과 예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식된 자의 한편 기뻐하고 한편 두려워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펴자면 이 지극한 정을 다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즉시 거행케 하라."
하였다.

 

권대운(權大運)·민희(閔熙)를 압송해 가던 도사(都事) 최경중(崔敬中)·박두세(朴斗世) 등이 혹은 죄인의 병이 무겁다고 핑계대는가 하면, 혹은 죄인이 시령(時令)120)  을 중하게 앓고 있다고 핑계대며, 임의로 지연시키고 곧바로 압송하여 가지 않았으므로,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推考)하도록 하고, 다른 도사로 하여금 압송하여 가게 하였다.

 

윤4월 9일 임술

달이 태미성 서원(太微星西垣)으로 들어갔다.

 

윤4월 10일 계해

홍만종(洪萬鍾)을 승지(承旨)로, 심수량(沈壽亮)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김창협(金昌協)을 부교리(副校理)로, 한범제(韓范齊)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승정원에서 경기도 관찰사 윤이제(尹以濟)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호조(戶曹)에서 덧붙인 절목(節目)에 숙휘 공주방(淑徽公主房)의 시장(柴場)의 절수(折受)를 다시 양근(楊根)으로 정하면서, 여섯 아문 중 긴요하지 않은 한 곳을 본군(本郡)에 내어 준 것은 부당하다고 극력 진술하고, 심지어는 ‘전하께서 궁가(宮家)를 대우하심이 도리어 각 아문보다도 더 중히 하시니, 일의 체모에 있어 더욱 타당치 못하다.’ 하므로, 해조의 복계(覆啓)에 의하여 시장은 영원히 본군에 귀속케 하고, 다른 공한지(空閑地)로 선정하여 올리기를 기다려 궁가에 획급(劃給)121)  함이 좋겠다고 하였으나, 좇지 않았다.

 

전교하기를,
"의금부에 현재 수감된 죄수가 30여 명에 이르니 형옥의 적체가 염려스럽다. 속히 개좌(開坐)122)  하여 처결토록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망종(芒種)이 벌써 다가왔는데도 구름만 끼고 비는 오지 않는다 하여 기우제를 설행할 것을 청하였다.

 

윤4월 11일 갑자

유성(流星)이 왕량성(王良星) 위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다가 북극성 밑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신완(申琓)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임상원(任相元)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윤4월 13일 병인

이언강(李彦綱)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예조 판서 여성제(呂聖齊)가 숙의방(淑儀房)의 삭선(朔膳) 진배(進排)123)  는 그 전례가 없다고 말하고, 또 아뢰기를,
"선왕의 숙의인즉 진배가 있어야 하나, 당저(當宁)의 숙의는 응행(應行)할 예가 없는 듯합니다."
하고, 교리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토지에 따라 공물(貢物)을 정하는 것이 본디 정당한 공물이나, 숙의방의 진배는 당연하지 않은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액정(掖庭)과 내관(內官)에게 물어 보니, 장귀인(張貴人)이 입궐할 적에 분명히 삭선을 진배한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고 하였다. 우의정 남구만(南九萬)이 다시 문서를 상고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홍천현(洪川縣)의 수어(守禦) 둔졸(屯卒)이, 그의 별장(別將)이 답험(踏驗)124)  을 할 적에 조세를 많이 물렸다 해서 네 사람이 패를 지어 총포를 쏘았는데, 본현에서 잡아다 추문(推問)한즉 세 사람은 승복하고 한 사람은 함께 가서 욕지거리만 하였을 뿐 총포는 쏘지 않았다고 하였으므로, 관찰사가 계문(啓聞)하였습니다. 형조에서 세 사람을 조율(照律)하기를 《대명률(大明律)》의 부민(部民)이 지부(知府)125)  ·지현(知縣)126)  을 모살(謀殺)하거나 군사가 천호(千戶)127)  ·백호(百戶)128)  를 모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율(律)에 의거하여 유죄(流罪)로써 정배(定配)를 하였다고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대명률》에 이른바 모살이란 한 사람이 은밀히 살해할 계획을 꾀한 것을 이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홍천의 둔졸은 네 사람이 패를 지어 욕지거리를 하고 총포를 쏘았으니, 강도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강도가 일반 백성에게 변을 일으켜도 다 처참(處斬)하는데, 더구나 관하(管下)의 사람이 그 영장(領將)을 범한 것이겠습니까? 이 같은 무리는 엄격히 다스려서 징계해 그치게 하는 바탕으로 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정배(定配)를 하였으니 다시 거론할 수는 없으나, 이 뒤에 행여 이러한 자가 있을 경우 또 이와 같은 예(例)로 처리하여서는 아니됩니다. 과조(科條)를 정하여 세우는 것이 좋을 듯하여 감히 계달(啓達)합니다."
하고, 형조 판서 이사명(李師命)이 아뢰기를,
"그 정상(情狀)을 살펴보면 실은 조대립(趙大立)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남구만이 또 아뢰기를,
"인조(仁祖) 때 이갱생(李更生)이 남중(南中)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고을 사람이 죽이려고 하여 칼에 찔려 다쳤는데 다행히 죽음은 면하였습니다. 만약 《대명률》로 말한다면 이는 또한 다치게만 한 자는 교수(絞首)에 처한다는 율이 적용될 뿐입니다. 그런데 들으니, 그때 경옥(京獄)으로 잡아다가 삼성 추국(三省推鞫)129)  을 개설하였다고 하니, 이는 대역(大逆)의 율로 다스린 것입니다."
하고, 여성제가 아뢰기를,
"비록 미리 정배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다시 처치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배소(配所)에서 효시(梟示)토록 하라."
하였다. 남구만이 다시 아뢰기를,
"이 죄인은 이미 전가 사변(全家徙邊)130)  을 하였는데, 만약 배소에서 효시한다면 그의 처자가 그대로 정배가 되니 이는 두 가지의 율을 중첩(重疊)해 시행하는 것입니다. 본현(本懸)으로 잡아다가 변을 일으킨 곳에서 효시한다면 다른 사람을 징계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죄인을 본도로 잡아다가 효시토록 하라."
하였다.

 

윤4월 14일 정묘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시독관(侍讀官) 김창협(金昌協)이 글뜻을 풀이하며 진계(陳戒)에 갖추고, 또 아뢰기를,
"지난 임진 왜란에 진주(晋州)의 한 성에서 절의에 죽은 사람이 매우 많은데, 김천일(金千鎰)·황진(黃進)·최경회(崔慶會)는 더욱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왜적(倭賊)이 일찍이 진주에서 크게 패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성을 함락시켜 분을 풀고자 하므로, 이 사람들이 동심 협력하여 굳게 지키면서 힘껏 싸우다가 황진은 탄환을 맞아 죽고, 김천일·최경회 및 기타의 장수들이 모두 성이 함락되던 날 순절(殉節)하였습니다. 그들의 충렬(忠烈)도 참으로 늠름하거니와, 한 지방을 방어한 공은 장(張)·허(許)가 수양(睢陽)을 지킨 일131)  에 밑돌지 않습니다. 고을 사람들이 그 의열(義烈)을 사모하여 사당을 세웠고 조정에서 또 사액(賜額)하여 포장까지 하였으나, 신이 영남의 사명을 받들고 갔을 적에 진주를 지났는데 사당도 퇴폐하였고, 청소할 사람조차 없었으며 봄 가을의 향사(享祀)도 설행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인근의 중이 아직도 그 의열(義烈)을 사모하여 해마다 성이 함락된 날이면 고을 마을에서 쌀을 빌어다가 재(齋)를 올린다고 하는데, 듣고 나니 참으로 측은했습니다. 매년 한재(旱災) 때면 조정에서 근시(近侍)를 보내어 향과 축문을 가지고 가서 본고을의 전쟁에 죽은 사람에게 치제(致祭)하고 있으나, 상시의 제사는 도리어 폐지하고 있습니다. 이 어찌 조정에서 그 충절을 마음 아파하는 뜻이 되겠습니까? 조정에서 별달리 신칙을 더하여 제사가 전처럼 폐지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당에 이미 사액하였으나 제사가 폐지되어 지내지 않는다 하는데, 듣고 나니 한심스럽다. 본도로 하여금 봄가을의 향사(享祀)를 각별히 거행하여 폐지되지 않도록 함이 좋겠다."
하였다. 김창협이 또 아뢰기를,
"근래 궁금(宮禁)이 엄격하지 않아 그 폐단이 오래 되었습니다. 이번 풍정(豐呈) 때 나인(內人)의 족속이 함부로 들어온 자가 많아서 내간의 말이 항간에 전파되어 그 시끄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내간의 말이 나가지 않고 외간의 말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옛사람이 깊이 경계한 바입니다. 내간의 일을 성상께서 혹 다 알지는 못하시더라도 이제부터는 각별히 엄중히 신칙하여 전과 같이 난잡한 폐단이 없도록 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외를 막도록 엄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연신(筵臣)의 아뢴 바가 실로 걱정하고 아끼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이 뒤에는 마땅히 다시 신칙을 더하리라."
하였다.

 

윤4월 15일 무진

전교하기를,
"조정의 일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반드시 피차의 사리와 경중을 헤아려서 되도록 적중함을 얻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숙의방에 삭선(朔膳)을 진배(進排)하는 일도 자세히 헤아려 처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도에 다시 물어 보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양의 물종(物鍾) 및 숙설(熟設)132)   할 때 탄(炭)·소목(燒木)·의전(衣纏)·말장(末醬)·양치장(養齒匠) 등의 일은 각전(各殿)의 상궁(尙宮)·시녀(侍女) 등에게도 진배하는 규정이 있은즉 어찌 도리어 6품 시녀의 밑에 두어서 그에게만 진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반드시 그러할 리가 없다. 호조에서 이와 같은 곡절을 살펴보지도 않고 일례로 지레 경감하였으니 너무도 경솔하다. 각양의 공상(供上)을 응당 진배할 것을 한번 명백히 분부하지 않을 수 없다. 혼동해 경감하지 말고 전대로 거행하도록 각 관사에 분부하라."
하였다.

 

윤4월 17일 경오

김재현(金載顯)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대신과 의정부 동서벽(東西碧)133)   이하를 인견하고, 자의 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의 존호를 의논해 정하게 하였는데, 좌의정 남구만(南九萬) 등이 의논하여 존호를 강인(康仁)으로 정하여 올리니, 이를 예조에 계하(啓下)하였다.

 

윤4월 18일 신미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시독관(侍讀官) 김창협(金昌協)이 글뜻의 풀이를 마치고 나서 나아가 아뢰기를,
"성상의 학문의 고명하시어 설혹 문난(問難)이 있다 하여도 오늘의 연신(筵臣)이 응대할 만한 자가 없습니다만, 가슴을 터놓고 문난을 한다면 상하의 심지가 저절로 잘 맞을 것입니다. 선묘(宣廟)께서 날마다 연신과 더불어 경서의 뜻을 토론하시다가 어느날 《가례(家禮)》를 가지고 문난하셨는데, 여러 신하들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정철(鄭澈)만이 대답을 하자, 선조께서 크게 칭찬을 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진강(進講)하는 《역경(易經)》은 여느 다른 글과 비할 바가 아니므로, 오묘한 뜻을 이해하시기 어려운 곳은 연신 외에 여러 신하에게도 물어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이 가만히 엿보건대, 성상께서는 자질이 뛰어나셔서 학문이 날로 새로워지고 있는데도 한갓 간묵(簡默)만 일삼고 문난을 하지 않으시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시사(時事)가 위태위태한 만큼 구태 의연하게 처져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니 《역경》에서 양강(陽剛)을 귀중히 여기는 것도 거기에 자강(自强)할 수 있는 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시는 바와 같이하시면 결코 떨치고 일어나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하들을 대우함에 있어서도 말단의 예절은 버리시고 때때로 인견하여 치도(治道)를 물으신다면 어찌 유익함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계한 바가 참으로 절실하다. 깊이 유의하겠다."
하였다. 김창협이 또 아뢰기를,
"무릇 장주(章奏)134)  에 대하여 반드시 깊이 유념하시겠다고 전교하시면서도 끝내 그 실상이 없었는데, 오늘 신이 아뢴 것은 행하려고만 하신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며, 사실이 나타난 뒤에야 아래에서 반드시 그 정성을 본받으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다고 하였다.

 

윤4월 19일 임신

심유(沈攸)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주강에 나아갔다. 시독관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이번 문과 별시(文科別試)에서 이소(二所)135)  의 시관이 ‘조(趙)나라 소진(蘇秦)136)  이 종약(從約)137)  의 장이 되어 육국(六國)의 정승이 되는 것을 거절하는 표(表)로써 시제(試題)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종약의 장이란 원래 관작이 아니고 육국의 정승도 조나라에만 거절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출방(出榜)은 하였더라도 마땅히 경책(警責)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말이 옳다. 내가 보아도 이 시제는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이소의 시관을 모두 추고(推考)토록 하라."
하였다.

 

윤4월 20일 계유

옥당(玉堂)138)   관원을 소대(召對)하였다. 시독관 이이명(李頤命)이 《통감강목(通鑑綱目)》 한(漢)나라 성제(成帝)의 본기(本紀)를 강의하며 말하기를,
"성제가 제대로 마치지 못한 것은 여색으로써 몸을 망쳤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감히 성명(聖明)에게 염려할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마땅히 ‘단주(丹朱)139)  처럼 거만함은 없어야 한다.’는 뜻 같은 것은 늘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하였다. 이때 임금이 숙의 김씨(金氏)를 새로 간선하였고, 또 총애하는 장씨(張氏)가 있었기 때문에 연신이 이로 인해 색을 경계하라고 풍간(諷諫)한 것이다.

 

윤4월 21일 갑술

주강에 나아갔다. 시독관 이이명이 글뜻의 해석을 매우 상세히 하니, 지평 홍수헌(洪受瀗)이 아뢰기를,
"이제 연신의 진강(進講)을 보니 상세함을 갖추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특진관 권열(權說)이 아뢰고 싶은 것이 있으면서도 황공하여 감히 아뢰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상께서 마땅히 하순(下詢)하셔야 겠습니다만 날씨가 너무 뜨거워서 성궁(聖躬)이 피로하실 것이 두렵습니다. 연신으로 하여금 서로 문난케 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자세히 계달케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권열의 강론은 본의(本義)140)  를 퍽 숭상하여 심지어는 ‘복서(卜筮)를 어찌 적게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까지 하였다. 이이명이 아뢰기를,
"《주역》의 뜻은 길흉(吉凶)과 상수(象數)141)  에 있는데, 연신은 오로지 의리만을 가지고 말하기 때문에 권열의 말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끝까지 진달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윤4월 22일 을해

유성(流星)이 북극성(北極星) 위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주강에 나아갔다. 소축(小畜)괘를 강의하는데, 시독관 이이명이 글뜻을 설명하며 아뢰기를,
"초구(初九)는 양효(陽爻)로서 양위(陽位)에 있으며 정도(正道)를 지키고, 또 앞의 음효(陰爻)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쌓이는 것을 받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국가의 일로 말하더라도 병자년142)  ·정축년143)   이후 오늘날까지 점점 음유(陰幽)로 들어가서 양복(陽復)을 기약하기 어려우니,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다 같이 위로 나아가겠다는 뜻을 잊지 않은 뒤에야 국사를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조부 고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가 효종조에 차자를 올려 국사를 말하자, 효종께서 비답하시기를, ‘공리(功利)가 나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참으로 사무친 아픔이 가슴에 맺혀 있어 날은 저물고 길은 멀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성조(聖祖)의 이 교지를 본받아 힘써 일을 만들어서 양복(陽復)의 뜻을 저버리지 마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은 매우 좋다. 내가 깊이 유념하리라."
하였다.

 

윤4월 23일 병자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좌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청백리(淸白吏)를 초선(抄選)하라는 명령이 진작 있었으나 사체가 중대하여 여태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무변(武弁)144)   중 양식(粱拭)같은 자는 여론에서 모두가 이 초선에 합당하다고 하나, 전번에 경상도 좌수사(慶尙道左水使)가 되었다가 거듭 토질(土疾)145)  을 얻어서 죽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살아 있어도 포장을 할 만한데, 죽었다고 어찌 추증하는 포장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지신사(知申事) 신여철(申汝哲)이 또 양식의 청백함을 많이 말하고 이어 영구(靈柩)를 운반하기 어려움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식의 청렴함과 근신함은 숭상할 만하다. 특별히 포증(褒贈)하고 장사지낼 물품도 내려 주어서 영구를 운반케 하라."
하였다. 임금이 근래 무과에 합격한 사람 중에 쓸 만한 사람이 너무 적다고 깊이 한탄하고, 하교(下敎)하기를,
"입시한 여러 신하 중에 자제(子弟)를 여러 명 둔 사람이 있거든 무반(武班)으로 나가도록 권유하라."
하자, 신여철이 아뢰기를,
"사람들 대다수가 업신여기는데, 누가 선뜻 그 자제를 가르치려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신(武臣)을 경시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고질적인 폐습이므로 신여철의 말이 지나친 것이 아니다. 전번에 영중추부사 김수흥(金壽興)의 진달(陳達)로 해서 홍득귀(洪得龜)·신확(申瓁)을 구문치(具文致)의 예에 의거하여 활을 잡게 하였는데, 이제 신확은 문과 초시(文科初試)에 입격하여 조정의 영을 따르지 않고 임의로 과거에 응시하였으니, 너무도 부당하다. 전시(殿試)에는 응시하지 못하게 하고 홍득귀와 함께 당장 활을 잡도록 다시 분부하라."
하였는데, 김수흥의 연백(筵白)146)  으로 해서 문과 시험에 응시케 하여 신확·홍득귀 등이 모두 특별히 6품에 올랐으니, 이는 앞으로 발탁시켜 쓰자는 것이다.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서북(西北)지방 사람들을 거두어 쓸 것을 여러 차례 진달하였으나 여론이 갈수록 격화되어 잠시 썼다가 곧바로 버렸습니다. 예컨대 전백록(全百綠)·장치세(張治世)같은 자는 도총부(都摠府)를 한 번 거친 뒤에 장치세는 막 초상을 당하였고, 전백록은 병영(兵營)의 우후(虞候)에서 임기가 차자 다시 조용(調用)하지 않았으며, 황여즙(黃汝楫)은 거산 찰방(居山察訪)에 제수되어 직무를 잘 수행한 효과가 있었으나 탄핵받고 파직되어 돌아갔습니다. 어사(御史)가 온 도에서 그 인망이 가장 높다며 우선적으로 거두어 쓰라고 서계(書啓)를 하였기 때문에 비변사에서도 그를 조용할 것을 복계(覆啓)한 것입니다만, 이미 반년이 지났는데도 양전(兩銓)147)  에서 한 번도 의망(擬望)을 검토하지 않았습니다. 홍우적(洪禹績)은 총명이 남달라서 전번에 서북 지방 사람을 별도로 조용하라는 명이 있음으로 해서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제수한 바, 신이 판서가 되었을 적에 그의 직무 수행하는 것을 본즉 남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론이 서북 지방 사람을 이 직위에 처음 둔 것을 불만스러워하다가 드디어 천례(賤隷)라고 비방하였습니다. 이대로라면 이 먼 지방의 사람은 설혹 남다른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수용받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당(唐)나라가 범양(范陽) 땅의 장사를 쓰지 않다가 마침내 화란이 일어나자, 그 당시 사신(史臣)이 재상 최식(崔植)과 두원영(杜元穎)이 원대한 계략이 없어서 안위(安危)의 대체를 알지 못한 때문이라고 허물하였습니다. 서북 지방 사람을 거두어 쓰지 않는 것 또한 오늘날의 옳은 처사가 아닙니다. 전백록 등을 속히 등용토록 하시고, 홍우적의 천례(賤隷) 여부는 애매해서 알기 어려운 일은 아니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공론을 캐어 물어서 과연 터무니없는 비방이면 거두어 씀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정언(正言) 김우항(金宇杭)이 궁장(宮庄)을 다시 조사할 것을 거듭 아뢰니 좇지 않다가, 이이명(李頤命)의 진달로 해서 윤허하였다.

 

부호군(副護軍) 박세채(朴世采)가 향리에 있으면서 상소(上疏)하고, 전의 하교(下敎)에 따라 주자(朱子)의 유문(遺文)을 올리니, 비답하기를,
"올린 책자는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교정하게 하리라."
하였다.

 

윤4월 25일 무인

신익상(申翼相)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조상우(趙相愚)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무신(武臣) 최숙(崔橚)이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의 형세를 자세히 논하고 계청하기를,
"문경(聞慶)·풍기(豐基) 두 고을의 군병을 각기 그 곳의 영장(營將)에게 예속시키지 말고 별도로 독진(獨鎭)을 설치하게 하고, 문경의 군병은 오로지 조령만 지키고 풍기의 군병은 오로지 죽령만 지키게 하여 전란이 있을 때 방어하는 계책을 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과 더불어 상의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윤4월 26일 기묘

달이 금성(金星)을 범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17차례나 정사(呈辭)를 하였는데, 특별히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승지를 보내어 달래었다.

 

주강에 나아갔다.

 

윤4월 27일 경진

좌윤(左尹) 최관(崔寬)이 상소하기를.
"뒤늦게 들은즉 금중(禁中)의 공회(公會)장에서 신의 죄악이 무거움을 극력 논하고, 또 신의 심술이 간사함을 논함이 있었으며, 이어 신이 《주역(周易)》의 뜻을 전혀 모른다고 논하였다고 합니다. 빌건대 신의 죄를 다스려 물의(物議)에 사과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경의 청렴한 지조와 강직한 절개는 내가 본디 잘 아는 바인데, 청렴하고 강직하면서 이러한 죄를 졌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설령 사람들의 말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믿지 않으니 지나친 사양은 않는 것이 옳겠다."
하고, 이어 최관이 소에서 한 말을 가지고 승정원에 물으니, 승정원에서 대답하기를,
"참지(參知) 신엽(申曅)이 이르기를, ‘최관이 젊었을 때 과장(科場)에 들어가서 동인(東人)의 글을 등사해 쓰려다가 같이 공부한 무리들의 조롱을 받고는 기가 죽어 백지를 내었으니, 그가 《주역》에 통달하였다는 말은 내가 믿지 못하며, 평양 판관(平壤判官)으로 있을 적에 그의 아우가 찾아갔는데, 밥을 따로 차리지 않고 자기의 것을 나누어 먹었다 하니 이는 상정(常情)이 아닌 데 가까운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신엽이 최관과는 재종(再從) 간의 친척인데 이는 한 집안에서 전해 나온 것을 이야기하던 차에 언급된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고 하였다. 최관이 사퇴하기를 마지 않았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최관이 벼슬살이에서 청백(淸白)한 사람으로 이름이 있었으나, 그의 행위가 간혹 인정에 어긋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이 이러하였다.

 

윤4월 28일 신사

김창협(金昌協)을 헌납(獻納)으로, 서종태(徐宗泰)를 응교(應敎)로, 김만길(金萬吉)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주강에 나아갔다. 시독관(侍讀官) 이징명(李徵明)이 영유(永柔)의 덕지통(德池筒)과 함평(咸平)의 진하산(珍下山) 목장을 숙의방(淑儀房)에게 절수(折受)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뜻으로 진백(陳白)하고, 여러 신하가 이어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물정(物情)이 이와 같으니, 덕지통은 도로 내주고 다른 곳으로 바꾸어서 망정(望呈)148)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검토관 조상우(趙相愚)가 아뢰기를,
"기근(饑饉)이 거듭되고 재변이 중첩되어 성상의 마음이 무척 괴로와하시고 있음에도 대신·중신의 모임은 마치 승평한 때와 같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하고, 이징명이 또 이어서 아뢰니, 임금이 별도로 신칙하겠다고 하였다.

 

윤4월 29일 임오

명하여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을 불러 인견하고 진주사(陳奏使) 정재숭(鄭載嵩) 등의 장계(狀啓)의 별단(別單)을 보이며 말하기를,
"극히 패만한 말투의 그 꾸지람은 실로 병자년149)                   이후로 아직 없었던 모욕이다."
하였다. 이는 사신 정재숭 등이 벌금을 내라는 모욕을 듣고 나서 예부(禮部)에 정문(呈文)하자, 예부의 제본(題本)에 국왕에게 아뢰지도 않고 함부로 먼저 정문부터 올렸다고 죄를 씌워 입주(入奏)하였는데, 호황(胡皇)의 노여움이 채 가시지 않아서 예부시랑(禮部侍郞)        오합(敖哈)이 그 황제에게 고하기를, ‘조선 사신은 죄를 지었으니 반상(頒賞)은 하지 아니하더라도 그 나머지의 정관(正官) 등에게는 선례대로 접대함이 마땅할 듯하다.’고 하니, 호황이 크게 노하여 그를 끌어 내려 꾸짖고는 직위를 혁파하여 내쫓아 보냈다는 것이다. 예부에서 다시 그 정문 속의 말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서경(書經)》에 ‘과오를 용서함에는 큰 것도 꺼리지 말라[宥過無大]’고 하였다. 그러나 또 ‘고의범을 처벌함에는 작은 것도 가리지 말라[刑故無小]’고도 하였다. 금령을 여러 차례 범하고도 고칠 줄 모르는가 하면, 우리 백성을 해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과오인가, 아니면 고의인가? 고의가 아닌 것을 가엾이 여겨 우선 가벼운 징계의 뜻만 보였는데도, 제가 이내 큰 과오로 자처하는 말을 쓰지 않고 함부로 군부(君父)에게 관용을 요구하니, 그 광패(狂悖)함의 첫째이다."
《춘추(春秋)》에서는 그 정상(情狀)을 캐어 죄를 정하므로, ‘위후 훼(燬)가 형(邢)을 멸하다[衛侯燬滅邢]’라고 하였는데, 호안국(胡安國)의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에서 글은 그 경(經)을 해석한 것이지만 특별히 위후의 죄를 무겁게 다루었으니, 이는 그 정상으로 보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춘추》에도 정상의 경중을 캐어 가차(假借)함이 없거니와, 황상(皇上)께서 변방 백성을 특별히 돌보는 것은 당신네 나라에서도 잘 아는 바이다. 그런데도 함부로 해치고도 일찍이 기탄함이 없는가 하면 도리어 선유(先儒)의 말을 잘못 끌어대기나 하고, 《춘추》의 주폄(誅貶)하는 의리를 모르고 있으니, 그 광패함이 둘째이다.
인장(印章)을 새기고 녹이는 것은 바로 초한(楚漢)이 한창 다투고 있어 군신(君臣)이 정하여지지 않았던 당시의 계책이다. 어찌 명령만 내리면 그대로 행해지고 상벌을 확실히 하고 있는 큰 정치에 이러한 일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 광패함이 세째이다.
《주역(周易)》 환(渙)괘에 ‘그 큰 호령(號令)은 땀이 온 몸에 흐르듯 발한다.’고 하였는데, 호령이 땀과 같다 함은 땀이란 한번 나오면 다시 거두어 들일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유향(劉向)150)                  이 그 임금에게 규간(規諫)한 것은 바로 이른바 출령(出令)하는 것을 때를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이를 반(反)하면 마치 땀을 다시 들어가게 하는 것같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서, 이는 임금으로서 크게 경계할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속히 다시 거두어 들이라고 하니, 이것이 그 광패함의 네째이다.
《서경(書經)》에 이윤(伊尹)이 말한 ‘필부(匹夫)가 〈임금에게〉 스스로 다함을 얻지 못한다[匹夫不獲自盡]’는 것을 인용하여 경망하게 성왕(聖王)을 위하여 부끄럽게 여긴다고 표현하였는데, 이것도 신자로서 잘못을 들어 사죄할 때 할 말이 아니다. 이것이 그 광패함의 다섯째이다.
대저 저 나라가 작기는 하다지만, 임금과 신하의 분의야 어찌 유독 없겠는가? 과연 억울한 일이 있게 하였다면 그 국왕이 응당 글을 올려 스스로 해명하고 애걸하며 청원할 일인데, 하찮은 비천(卑賤)한 무리가 어찌 그 임금에게 고하지도 않고 경솔하게 붓끝을 희롱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다 그 나라가 임금은 약하고 신하가 강한 데 연유함이니, 우리 조정의 보호가 없었던들 몇 번이나 찬절(簒竊)을 치렀을지도 모를 일이거니와 그 귀신의 면모와 도깨비의 수단이 저 나라에 있어서는 이미 익숙한 횡역(橫逆)을 하여 죽음을 피할 수 없는데도, 문득 빛나는 하늘 밝은 태양 아래에 스스로 드러내고 있으니, 우리 황상은 온 천하를 한 집안으로 삼고 대륜(大倫)을 펴고 대의(大義)를 행하고 있으므로, 외복(外服)이라 해도 이처럼 임금을 무시하는 신하는 용납하지 않으시리라. 법이 유사(有司)에게 있는 만큼 반드시 죄주고 용서함이 없으리니, 이에 정재숭 등을 엄중히 잡아 그 국왕에게 보내어 무겁게 치죄(治罪)토록 하는 바이며, 아울러 이 정절(情節)을 일일이 그 국왕에게 전해 주어 다 알도록 하는 바이다."
하였고, 이 밖의 사연 속의 말도 국가를 모욕하는 패만한 말들이 그지없이 차마 볼 수 없었다. 김수흥 등이 다 보고 나서 아뢰기를,
"저 나라가 강하기는 해도 우리 나라를 경시한 적은 없었는데, 중국으로 들어가고는 점점 교만해지다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멋대로 욕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장래의 걱정이 말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인년151)                   간에 칙행(勅行)이 줄을 이으며 사기(事機)가 위급하였지만 오늘과 같은 모욕은 있지 않았다. 수모가 이에 이르렀으니, 장래의 걱정도 참으로 경들의 말과 같겠다. 예부의 관원이 주선을 하려다가 직위를 혁파하고 몰아 내쫓기까지 하였으니, 그 뜻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하였다. 김수흥 등이 아뢰기를,
"정문을 물리친 것은 혹 그러할 수도 있지만 문자를 지적해 내어 조목조목 논죄(論罪)한 것은 실로 뜻밖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의 노여움이 이와 같으니, 사은사(謝恩使)를 기한에 앞당겨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김수흥 등이 아뢰기를,
"사신을 의죄(議罪)한 건은 지연시킬 수 없습니다. 사은사의 노정(路程)에 속도를 갑절로 늘려서 빨리 들어가게 하여, 놀라와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5월 안으로 들어가게 하겠으나, 대신이 나라를 위하여 정문을 올렸다가 도리어 전에 없던 모욕을 당한 것이 마음에 매우 아픈데, 또 게다가 죄까지 준다는 것은 내가 실로 차마 못하겠다."
하였다. 김수흥 등이 아뢰기를,
"성교(聖敎)가 이와 같으시니, 그 누가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형세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선조(先祖)의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도 저 나라에 잘못 보임으로 해서 직위가 혁파되고 폐치(廢置)를 당하였는데 이번의 감죄(勘罪)에서도 직위 혁파를 당하고 전에 없던 모욕이 성상에게까지 미쳤으니, 대신은 죄벌을 억울하게 받는다 하여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북 지방의 월경 금지는 실로 오늘날의 급무이다. 묘당(廟堂)에서 별도로 법식을 정하여 엄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수흥 등이 아뢰기를,
"금령을 범하는 문제는 매번 우리 나라 사람에게서 비롯되고 있으니, 별달리 신칙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금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종조에서 대신이 변방을 순시한 일이 있었으니, 이는 변방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만약 명망이 현저한 사람을 선발하여 어사(御史)로 삼아서 매년 산삼을 캐는 시기에 보내어 규찰케 한다면 거의 금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물러가서 묘당과 상의하여 품정(稟定)토록 하라."
하였다.

 

윤4월 30일 계미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왔다.

 

정재희(鄭載禧)를 대사간(大司諫)으로, 민진주(閔鎭周)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시독관 이징명(李徵明)이 청(淸)의 나무람을 극구 논하며 통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어 북로(北路)의 군기(軍器)가 극히 허술함을 진달하니, 지평 홍수헌(洪受瀗)이 아뢰기를,
"이징명의 아뢴 바는 참으로 급선무입니다. 민심(民心)을 굳게 결속하는 것이 제일의 계책인 듯하나, 관서(關西)의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 소속된 군병의 징포(徵布)가 그 경중이 일치하지 않아서 한집에서 내는 것이 그 수효가 매우 많습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이를 침작해 정하여 다급한 어려움을 구제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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