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5월

싸라리리 2025. 11. 1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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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갑신

사간원에서 대사간 정재희(鄭載禧)가 금령을 범하고 관기(官妓)를 거느렸다 하여 파직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교리 이이명(李頤命)·김만길(金萬吉)·부교리 이징명(李徵明)·수찬 조상우(趙相愚)가 국가에서 수모를 당하였다 하여 차자를 올려 면계(勉戒)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서쪽에서 온 소식이 언사가 극히 패만하니 이는 병정(兵丁)의 난 이후로 보기 드문 치욕입니다. 예로부터 약한 나라가 당하는 능멸과 강한 나라가 질책한 말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간혹 그 수치를 감추고 참아서 마침내는 광복의 대업을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특별히 여러 대신을 불러 이 일을 의논한다는 소식을 듣고 중외(中外)에서 모두 성명(聖明)께서 크게 마음을 움직여 무언가 조치가 있으리라고 기대하였으나, 돌아온 사신의 죄를 처리하고 들어갈 사신의 일정을 앞당겼을 뿐이었습니다. 아! 병정의 난이 있은 지도 벌써 50년이 되었습니다. 요사이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수치스러운 일인지도 거의 알지 못하니, 오늘날의 모욕이 혹시 하늘의 뜻이 그 화란을 준 것을 뉘우쳐서, 우리 나라를 놀라게 하고 우리 전하를 부추겨서 떨치고 일어나는 공을 꾀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지요? 효종 대왕의 사무친 아픔을 마음속에 두었다가 하신 전교를 신 이이명이 언젠가 연중(筵中)에서 전하를 위하여 외었습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이것으로써 뜻을 삼으셨다면 십여 년 동안 무슨 일인들 이룩하지 못하였겠습니까? 구민(丘民)152)  의 마음을 얻어서 그들로 하여금 윗사람을 친하고 윗사람을 위하여 죽게 한다면 성지(城池)와 갑병(甲兵)은 아마 말단적인 일일 것입니다.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증축은 병정의 난 이후 어려워해 온 일인데, 이제 수어장(守禦將)이 한창 농사철에 큰 공사를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백성을 시기에 맞추어 부리는 도리이겠으며, 외국 사신이 왔을 적에 그들의 이목(耳目)에 누설이 된다면 어찌 우려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때가 아닌 공사는 성인도 경계한 바인 만큼 묘당과 그 파역을 의논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소서. 예전에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사랑하던 신부인(愼夫人)은 옷이 땅에 닿지 않도록 입었고, 광무제(光武帝)가 중흥을 이룩하였으나 귀인(貴人) 이하의 녹봉이 수십 곡(斛)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요사이 후궁(後宮)이 입궐한 뒤 공전(公田)을 떼어다 재산을 만들고, 지방의 공물(貢物)을 그대로 진선(進膳)하고 있어 명분이 극히 참람하고 은수(恩數)가 너무 지나치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이처럼 불안하고 치욕스러운 때를 당하여 대련포(大練布)153)  는 검소한 모범을 궁중에 보여서 선도하는 방법을 강구하여, 다 같이 크게 성취해 보려는 뜻을 품고 있는 줄을 알게 하여야 됩니다. 양역(良役)154)  의 폐단은 고금에 없던 일로서,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衙門)의 폐단됨을 이루 셀 수가 없으니, 나라가 망하는 그 시초가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두 폐단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하고, 마지막에는 효종이 뜻한 일을 가지고 면계(勉戒)하니, 임금이 너그러이 비답하고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케 하였다.

 

5월 3일 병술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좌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이번에 청의 질책하는 말이 나온 이래 연신(筵臣)의 아룀이나 옥당(玉堂)155)  의 상소(上疏)가 다 같이 이 일로 인해 분발하면서 자강(自强)의 계책을 강구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를 다스리는 방도는 한가할 적에 정형(政刑)을 밝혀서 큰 나라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도록 하라는 것이 곧 예전의 훈계입니다. 다만 이른바 자강(自强)이라는 하라는 것은 인재를 얻고 민심을 결속시키고 무비(武備)를 갖추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루 이틀의 명령 시행으로 얻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무비로 말한다면 조종조에서 기병(騎兵)과 정병(正兵)을 두던 규정을 지금은 바꾸어 신포(身布)만 내는 군병을 만들었고, 외방의 전졸(戰卒)은 오직 속오군(束俉軍)156)  뿐인데, 이른바 속오군이란 벌써 급보(給保)157)  하지도 않고 또 급복(給復)158)  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군장(軍裝)을 마련하고 무예를 연습케 하였다가 평시에는 훈련장에 모아서 대기하게 하고, 사변이 있으면 죽엄의 땅으로 몰아넣고 있으니, 군제의 잘못이 이에 이르고 있습니다. 비록 잘 거행해 보려고 하여도 실상 그 대책이 없습니다. 만약 이를 다 개혁해 보려고 하여도 지금의 인정과 사세로서는 결코 가볍게 고칠 수 없을 것이니, 신이 밤낮으로 생각하고 헤아려 보아도 계획이 서지 않습니다. 효종 때 영장(營將)을 설립한 뒤로 삼남(三南)159)  의 속오군은 다른도에 비하여 조금은 정련(精鍊)되었으나 근래 잇달은 흉년으로 해서 습조(習操)를 정폐하고 거행하지 않은 지가 벌써 오랩니다. 이 뒤로는 영장(營將)이 순찰을 돌고 병사(兵使)가 습조하는 것을 풍흉(豐凶)을 막론하고 상례대로 거행케 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좌의정의 말은 내가 깊이 유념하리라. 그리고 제신(諸臣)들도 각기 소견을 개진하라."
하였다. 좌참찬 조사석(趙師錫)이 아뢰기를,
"근래 군정(軍政)의 허술함이 너무 심하여, 중외(中外)가 서로 다르고 본말(本末)이 전도되어 있으니, 꼭 변통의 도리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양국(兩局)160)   및 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 등의 군대는 진실로 연하(輦下)를 수호하는 데 쓰는 군대이므로, 꼭 별도로 조련할 필요가 없으나, 외방에 있어서는 위급한 상황의 대처하려면 속오군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서울은 군문이 너무 많기 때문에 도망치거나 죽은 자의 결원을 보충할 때마다 언제나 양정(良丁)161)  의 부족함을 걱정하게 되니, 비록 착실히 힘써 하려 하여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속오군은 병잔(病殘)한 자가 허다하고 또 군장과 복색도 스스로 마련케 하고, 원래 급보나 급복을 주는 규정도 없으니, 속오군의 잔폐함은 본디 괴이쩍을 것이 없습니다. 행여 불행한 일이 있어서 적(賊)의 경보가 갑자기 닥쳤을 경우 남쪽의 적이 장차 곧장 한강에 이른다 해도 막을 길이 없고, 북쪽의 적이 바로 사현(沙峴)에 이르러도 막을 길이 없을 것이니, 어찌 크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오직 서울의 군문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긴요하지 않은 군문을 혁파하여 외방의 군병을 보충하고는 사이(四夷)나 지킨다는 뜻을 약간 살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이 방금 금위영 제조(禁衞營提調)로 있으면서, 창설한 뒤로 큰 보탬이 있는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선 혁파하여 속오군을 보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얼굴을 붉히며 말하기를,
"서울의 군문이 너무 많다는 논의는 진작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전후의 능(陵)에 거둥할 때 서울에 머무는 군병이 부족하여 수원(水原)의 군병을 징발하기까지 하였으니, 서울 군병의 허술함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제조가 되었으니 당초 설립한 뜻을 모를 리가 없을 터인데도 진작(振作)해 다스리는 방도에 있어서는 한 마디의 말도 개진함이 없이 다만 본영을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만 하니, 군무를 수임하고 있는 자를 모두 혁파하여야 된다고만 한다면, 앞으로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제조도 반드시 혁파하여야 된다고 할 것이고, 어영청(御營廳)의 제조도 꼭 혁파하여야 된다고 할 것이다. 이 말은 너무도 호란(胡亂)하다."
하였다. 조사석이 황공하여 움츠리고 엎드렸는데, 땀이 나서 등이 젖으니, 여러 신하들이 잇따라 변명하였으나 임금이 오히려 화해되지 않자, 남구만이 아뢰기를,
"진달한 말이 성상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에 있어서는 이처럼 꺾어서는 아니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신이 그 직임을 띠고 있으면서 직무를 잘 거행할 방도는 생각하지 않고 극력 주장하는 말이 고작 혁파에 있기 때문에, 다만 일의 체모의 부당함을 말하였을 따름이지, 꺾은 것은 아니다."
하였다. 조사석이 종종걸음으로 나가자 훈련 대장 신여철(申汝哲)이 나아가 아뢰고, 병조로 하여금 삼남(三南)에서 받아들이는 여정(餘丁)의 신포(身布)와 기병·보병의 신포를 각도의 영장(營將)에게 결제해 주어 순시할 때 시재(試才)의 상격(賞格)162)  으로 쓰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라고 하였다. 조사석이 군문을 혁파하자고 한 말이 잘못이 아닌데도 임금이 역정을 내며 꾸짖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허견(許堅)·이남(李楠)163)  이 역모를 꾀할 때 김석주(金錫胄)가 병조 판서로 있었으나, 실상 제어할 만한 병권이 없어서, 금위영을 창설하여 병조 판서로 겸임케 한 것은 예기치 않은 사태에 대비하자는 것이었었다. 임금의 생각은 단지 창설한 본뜻만을 가지고 혁파하지 않으려고 하니, 이는 앞뒤의 시기적인 형세가 같지 않음을 헤아려 보지 않은 소치이다. 여러 신하 가운데 한 사람도 이러한 말로 임금의 뜻을 깨우쳐 주는 자가 없으니 안타깝다.

 

5월 5일 무자

서문중(徐文重)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창협(金昌協)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송창(宋昌)을 승지(承旨)로, 민진주(閔鎭周)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5월 8일 신묘

함열(咸悅)에 지진이 일어났다.

 

5월 11일 갑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검토관 최규서(崔奎瑞)가 외간의 전설에 궁내에서 목석(木石)을 끌어들인다는 말이 들린다고 진계(陳戒)하고, 시독관 이이명(李頤命)이 이어서 잇따라 아뢰니, 임금이 답하기를,
"항간의 말을 어찌 다 믿겠는가? 이는 대단한 공사는 아닐 것이다."
하였다.

 

5월 13일 병신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좌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청의 자문 속에 창을 던진 사람 여섯 명을 함께 당장 베도록 의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사를 마친 뒤 체포하여 본즉 운총(雲寵)에서 국경을 넘었는데 자문(咨文) 속에 들어 있지 않은 자 네 사람도 이 여섯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에게 수의하여 보았으나 소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처리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운총에서 국경을 넘은 한 사람은 자문 속의 여섯 사람과 일체 논단(論斷)하라. 그리고 자문에 함께 당장 베도록 의논하라고 하였으니, 그 자신만 베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논단한 뒤에 예부(禮部)에 보고만 하고 별도로 주문(奏文)할 것은 없을 것이니 그 자신만 베어도 괜찮을 듯합니다."
하였다.

 

5월 14일 정유

진주사(陳奏使) 우의정(右議政) 정재숭(鄭載嵩) 등이 성밖에 와서 소를 올려 인구(引咎)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국사에 마음을 다하였으나 마침내 일이 불행하게 되었고 저들이 죄를 주라고 하기 때문에 부득이 따라 시행은 하나, 이것도 미안하다. 경들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존호(尊號)를 올릴 때에 대전·중궁전께서 안에서 진하(陳賀)하는 의절이 예문에 실려 있지 않으므로, 품하였던 바 대신에게 물어 보라고 명하셨는데, 대신들이 모두 진하를 하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안의 왕 세자가 조하(朝賀)하는 의절에 의거하여 마련하라."
하였다.

 

진주사(陳奏使) 정재숭(鄭載崇) 등을 인견하였다. 정재숭 등이 인구(引咎)하기를 매우 간절히 하고, 이어 김거군(金巨軍)의 말을 들어 사행(使行)을 조금 물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15일 무술

김진귀(金鎭龜)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임환(林渙)을 정언(正言)으로, 윤이도(尹以道)를 승지(承旨)로, 강현(姜鋧)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5월 18일 신축

이선(李選)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덕성(李德成)을 지평(持平)으로, 김만중(金萬重)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시독관(侍讀官) 이징명(李徵明)이 장령 이국화(李國華)·심평(沈枰)과 지평 이삼석(李三碩)이 정고(呈告)하고 출사(出仕)하지 않는다 하여 탄핵하여 체차할 뜻을 진달하니, 임금이 그들의 과실을 꾸짖고 모두 체차(遞差)하였다.

 

5월 20일 계묘

사간원에서 어떤 환관(宦官)이 양아들의 며느리를 맞는데, 옥교(屋轎)를 썼고 시배(侍陪)가 많았으며, 또 그날 축하하러 온 여러 환관들도 모두 옥교를 탄 사실을 논하고, 너무도 한심하다며 모두 적발하여 함께 죄를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주강에 나아갔다.

 

5월 21일 갑진

성호징(成虎徵)을 승지(承旨)로, 송규렴(宋奎濂)을 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로, 안규(安圭)·이후항(李后沆)을 장령(掌令)으로, 조의징(趙儀徵)을 지평(持平)으로, 홍수헌(洪受瀗)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5월 23일 병오

우의정 정재숭(鄭載嵩)이 차자를 올려 무거운 처벌을 받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는 자문(咨文)을 가지고 갔을 적에 저들이 물어보고는 죄를 가볍게 주었다고 할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타이르기를,
"죄를 묻는 처사는 실로 뜻밖에 나왔으니, 참으로 국가의 불행이다. 묘당(廟堂)에 물어서 적당히 처리하겠다."
하였다. 묘당에서 복계(覆啓)하기를,
"영의정이 출사하는 것을 기다려서 품정(稟定)함이 마땅합니다. 이번 역관의 소임은 다만 죄인을 행형(行刑)한 사실을 보고할 뿐이온즉, 국서(國書)164)  가 이르기도 전에 먼저 누설시키는 것은 사리상 결코 부당합니다. 통관(通官)들이 혹시 묻는 말이 있거든, 진주사가 돌아와서 국경을 범한 사람을 곧바로 행형한 뒤에 이 자문을 받들어 떠날 것인데, 죄를 심문하는 일로 많은 관원이 모여서 의논하기 때문에 아직은 미처 듣지 못하였고, 또 주문(奏文)이 뒤를 이어 들어올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노염을 사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우선 이렇게 일러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5월 25일 무신

임금이 대왕 대비전의 존호를 ‘강인(康仁)’이라 더해 올렸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서 백관의 하례를 받고. 반사(頒赦)165)  , 반교(頒敎)166)  하니, 그 글에 이르기를,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온 나라가 다 함께 자전의 교화를 입었는데, 마침 주갑(周甲)의 날이 돌아왔다. 두 글자가 지극한 어짊에 하도 걸맞아서, 이에 세상에 드문 의식을 거행하노라. 이는 팔방(八方)이 온통 귀를 기울여 들을 터인데, 어찌 십항(十行)의 교서가 없을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성모(聖母)의 장경(莊敬)하심은 실로 열조(列祖)의 지치(至治)를 협찬하셨다. 몸이 정위(正位)에 거처하매 임사(姙姒)167)  의 사휘(嗣徽)168)  를 뒤따랐고, 엿을 물고 손자를 희롱하시매 마등후(馬鄧后)169)  의 참정(參政)을 비루하게 여겼도다. 숨은 공로는 안팎으로 널리 미치었고, 누리신 수(壽)는 앞뒤를 멀리 벗어났도다. 40여 년의 애환을 거치시니 신명이 같이 보호하고, 세 조정의 봉양을 받으시니 복지는 더욱 융숭하였도다, 내가 왕위를 잇는 어려움에 미쳐서는 상천(上天)의 시련도 잦고 가혹하여 풍정(豐呈)의 작은 의절도 또한 여러 해 만에서야 이루었도다. 기뻐하고 두려워 하는 미세한 성의를 어찌 하루인들 게을리하랴. 대효를 다하고자 할 것 같으면 응당 존호를 더해 올림이 합당하겠으므로 예관에게 거듭 명하여 조종(祖宗)께서 이미 시행한 일들을 상고하였고, 공론에 따라서 금고의 지극히 아름다운 칭호를 얻었노라. 폐백을 드려 정례(情禮)를 갖추었고, 좋은 날을 가려 호첩(號牒)을 올렸노라. 이미 본년 5월 25일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존호를 더해 올리기를, ‘강인(康仁)’이라 하였으니, 건도(乾道)에 배합되는 성덕(聖德)을 어떻게 다 묘사하랴? 다만 남은 날을 아끼는 촌심(寸心)이나 펴자는 것이다. 이미 정성어린 은언(恩言)을 반포하였으니, 어찌 뇌우(雷雨)의 패연한 은택을 아끼겠는가? 본월 25일 이른아침 이전의 잡범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면제하고, 관직에 있는 자에게는 각기 한 자급(資級)씩을 올려 주며, 자궁(資窮)인 자는 다른 가족에게 대신 더하게 하라. 아! 좋은 운기가 모일 적에는 감통(感通)함이 어긋나지 않는 바이다. 집과 나라를 이끌어 가자면 효자의 덕행이 남에게 미치는 교훈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그 누구인들 부모가 없겠는가? 함께 경하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도록 하라. 짐짓 이 교서를 내리니, 잘 알기 바라노라."
하였고, 옥책문(玉冊文)에 이르기를,
"삼가 생각건대, 예식은 처음으로 진수(進壽)에 미치니 이미 정례(情禮)와 위의(威儀)를 다하였고, 효도는 존친(尊親)보다 큰 것이 없으니 의당 이전(彝典)을 거행하여야겠습니다. 이에 뭇신하의 청에 따라 감히 아름다운 칭호를 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자의 공신 휘헌 대왕 대비 전하(慈懿恭愼徽獻大王大妃殿下)께서는 그 도가 황상(黃裳)170)  에 부합하고 검소하심은 대련(大練)171)  에 빛났습니다. 은근히 열조(烈祖)의 큰 사업을 도우시니 유가(柔嘉)172)  한 덕에 맞고, 성자(聖子)와 신손(神孫)을 길러 성취시키시니 묘말(眇末)173)  까지 미치었습니다. 오직 마음속에 지니신 지극한 미덕이 있기에 끝없는 이 순수한 복을 누리셨습니다. 세 조정의 융숭한 공봉으로 온갖 물건의 보양을 다 갖추었으니, 백령(百靈)이 복을 내리는데 어찌 좋은 기도의 말씀을 기다리겠습니까? 마침 근년에 걱정스런 근심을 당하여, 나의 회포속에 우러러 받듦이 더할 뿐이었습니다. 풍정(豐呈)을 오랜 동안 미루어 오다가 다행히 오늘을 만났고, 보산(寶筭)174)  이 바야흐로 늘어나시니 마침 주갑(周甲)175)  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 경사는 진실로 지난 사첩(史牒)에도 드물고 보니, 생각은 미성(微誠)을 다하고 싶습니다. 일찍이 여러 번 존호를 올렸다 하나 이것으로는 성덕을 조금도 그려내기 어려웠습니다. 함홍 광대(含弘光大)하심은 곧 곤원(坤元)의 인(仁)을 체험하심이요, 평강 정직(平康正直)하심은 황극(皇極)의 준복이십니다. 어찌 능히 의의(擬議)한다 하겠습니까? 다만 유양(揄揚)하는 뜻을 표현하기 위해 삼가 존호를 더해 올리기를 ‘강인(康仁)’이라 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거룩한 의식을 받으시고 더많은 수명을 누리셔서 한전(漢殿)에서 엿을 물고 손자나 희롱하던 그 즐거움을 길이 천 년토록 보전하시고 주가(周家)에서 선한 자손을 대대로 두던 그 아름다움을 멀리 백대(百代)에 미치도록 하소서."
하였다. 【모두 대제학 이민서(李敏敍)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9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어문학-문학(文學)


[註 165] 반사(頒赦) : 특사를 반포함.[註 166] 반교(頒敎)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백성에게 널리 알림.[註 167] 임사(姙姒) :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과 무왕의 어머니 태사.[註 168] 사휘(嗣徽) : 아름다움을 이음.[註 169] 마등후(馬鄧后) : 동한(東漢) 때 마 황후와 등 황후.[註 170] 황상(黃裳) : 《주역》 곤괘(坤卦) 육오(六五)의 효사(爻辭) 황상원길(黃裳元吉)로, 왕후(王后)의 정위(正位)를 뜻함.[註 171] 대련(大練) : 올이 굵은 거친 비단으로 후한(後漢) 때 마 황후(馬皇后)가 입었다는 것으로, 황후의 검소한 생활을 기리는 말.[註 172] 유가(柔嘉) : 유화한 미덕.[註 173] 묘말(眇末) : 자기의 겸칭(謙稱).[註 174] 보산(寶筭) : 성수(聖壽).[註 175] 주갑(周甲) : 회갑.

 

엄집(嚴緝)을 집의(執義)로, 한성우(韓聖佑)를 지평(持平)으로 삼고,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금창부위(錦昌副尉) 박태정(朴泰定)·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임창군(臨昌君) 혼(焜)·임성군(臨城君) 이엽(李熀)을 대비의 가까운 친척이라 하여 특별히 한 품계(品階)씩을 올려 주었으며, 익평군(益平君) 홍득기(洪得箕)·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麟)·경안군(慶安君) 이회(李檜)·황창 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능창 부위(綾昌副尉) 구봉장(具鳳章) 등은 모두 죽었으므로 한 계급씩 추증하였다.

 

5월 27일 경술

효종 때의 후궁 귀인(貴人) 이씨(李氏)를 안빈(安嬪)으로 삼고, 당저(當宁)의 숙의(淑儀) 김씨(金氏)를 소의(昭儀)로 삼았다.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이 밀차(密箚)를 올려, 묘당(廟堂)의 기밀한 일이 항간에 전파되어 국가의 금령이 없는 형편인데, 이는 출납할 즈음에 승정원에서 범연히 지나쳐서 기밀한 계획을 사람마다 알고 있으니, 이 법을 엄칙(嚴飭)하지 않았다가는 마침내 말하기 어려운 화환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또 서울과 지방의 고질적인 폐단을 누누이 열거하니 수천 자에 달하였는데, 임금이 너그러이 비답하기를,
"누누이 진달한 말들이 걱정하고 아끼는 정성과 지극히 절실한 논의가 아닌 것이 없다.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니, 당연히 묘당으로 하여금 채택하여 시행케 하겠다."
하였다. 묘당에서 그의 논의는 거의가 조정에서 이미 거론된 것이라 하며, 그 중 당연히 거행할 일만을 각 해당 관사 및 여러 도에 분부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5월 28일 신해

조상우(趙相愚)를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윤지익(尹之翊)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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