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6월

싸라리리 2025. 11. 17.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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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갑인

대사간 김진귀(金鎭龜)·헌납 민진주(閔鎭周)가 변방 백성에서 발생된 일로 욕이 나라에 미쳤으므로, 해당 함경도 관찰사와 남도 병마 절도사(南道兵馬節度使)는 모두 삭탈 관작(削奪官爵)하고 평안도의 전후 관찰사도 아울러 파직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6월 3일 을묘

이조에서 음과(蔭菓) 중에 무과(武菓)를 더 낼 것을 아뢰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호조·형조·공조의 낭관(郞官) 중 각 1명과 사재감 첨정·의금부 도사 각 1명씩을 무과로 차출하도록 윤허하여 내렸다.

 

대신(大臣)과 비변사(備邊司)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저들 중 자문(咨文)에 이미 사신 등을 종중 과죄(從重科罪)하라고 하였으니,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속히 의논해 결정하여 그 문서가 사신 행차에 미칠 수 있게 해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어코 어쩔 수 없다면 무슨 죄율을 써야 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김수항이 직위를 혁파하고 정배(定配)하는 것으로 처단할 것을 청하니, 좌의정 남구만(南九萬)과 비변사의 여러 중신 및 삼사(三司)176)  도 이의가 없어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형조 판서 이사명(李師命)이 충의위(忠義衛)에 속이고 등록한 자를 참작할 것을 진달(陳達)하니, 김수항은 말하기를,
"만약 일체 사변(徙邊)케 한다면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납속(納贖)177)  하겠다는 자는 허가하여 줌이 좋겠습니다."
하고, 남구만은 말하기를,
"그 주호(主戶)만을 들어 납속을 시킴이 좋을 듯하며, 또 대수를 제한하는 조치는 더욱 없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대수를 제한하는 조치는 곧 대단한 변통이 되는 만큼 2품 이상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케 하소서."
하였다. 빈청에서 의논이 엇갈리니, 밖에 있는 대신에게 물어보라고 명하였는데,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아뢰기를,
"열성(列聖)의 후예도 이미 대수를 제한하는 조치가 있었는데, 공신의 지속(支屬)에게는 도리어 한계가 없다면 어찌 모순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공신(功臣) 봉사손(奉祀孫) 외의 중자(衆子)로 충의위에 있는 자는 5대(代)를 한도로 하여 구전(口傳)178)  으로 제수케 하라."
하니, 그대로 정식(定式)을 삼았다.

 

우의정 정재숭(鄭載崇)이 죄를 정했다 해서 도성 밖으로 나가서 녹사(錄事)를 시켜 명소(命召)를 가져다 바치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다시 돌려주었다.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효원(李孝源)이 상소(上疏)하여 강변 채삼(採參)의 금지가 허술함을 극력 말하고, 이어 파수(把守)를 증설케 할 것을 청하여 이를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는데, 비변사에서 본도로 하여금 형편을 자세히 살핀 다음 사세를 헤아려 계문(啓聞)케 하여 품처(稟處)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6월 4일 병진

유성이 위성(危星) 밑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우의정 정재숭에게 유지를 전달한 사관의 서계(書啓)로 전교하기를,
"다시 사관을 시켜 명소를 주어서 보내었으니, 속히 입성(入城)토록 하라."
하고,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전에 사신(使臣)이 이러한 일을 당하게 되면 감죄(勘罪)한 자문(咨文)이 나오기 전에는 그대로 관직에 있었는지의 여부를 상고하여 아뢰라."
하니,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정유성(鄭維城)이 유황(硫黃) 일로 해서 직위를 혁파한 주문(奏文)을 갑진년179)   2월에 들여 보내어 6월에 돌아왔으나, 원임(原任)이기 때문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속에 행공(行公)180)  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고 상신 정태화(鄭太和)와 홍명하(洪命夏)가 도망쳐온 사람의 일로 해서 삭탈 관작하여 먼 변방에 정배(定配)하였다는 주문을 병오년181)   9월에 들여보내어 정미년182)   1월에 돌아왔으나, 정태화는 자문을 들여보낸 뒤에 곧장 정사(呈辭)183)  하였고, 홍명하는 그대로 행공을 하면서 사대(査對)184)  할 때만 차먹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6월 5일 정사

신익상(申翼相)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이명(李頤命)을 사인(舍人)으로, 서문유(徐文𥙿)를 수찬(修撰)으로, 신엽(申曅)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연중(筵中)의 이야기가 새어 나간 일로 해서 별도로 엄히 신칙하였으니, 무릇 남에게 누설한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 자는 장(杖) 1백 도(徒) 3년에 처하고, 관계가 중대한 것은 별달리 무겁게 다룰 것으로 특별히 비망기(備望記)를 내렸다.

 

6월 6일 무오

대사간 김진귀(金鎭龜), 지평 이덕성(李德成)·한성우(韓聖佑), 헌납 민진주(閔鎭周), 정언 윤지익(尹之翊)이 합계(合啓)하기를,
"진주사(陳奏使)가 정문(呈文)한 것은 실로 국가를 위하여 신변(伸辨)을 하자는 데서 나왔으나, 자문(咨文)이 나옴에 이르러 사연의 말이 극히 패만하여 차마 듣고 보지 못할 말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죄는 사신에게 있는데도 욕이 군주에게 미쳤으니, 분의(分義)가 너무도 통분하다는 뜻으로 힘껏 쟁변하여야 함에도 다만 황공하다는 사죄의 뜻만 보였을 뿐 끝내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돌아왔으니, 사명을 받드는 의리로 볼 때 결코 그냥 두고 논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진주사 정재숭(鄭載嵩)·부사(副使) 최석정(崔錫鼎)·서장관(書狀官) 이돈(李墩)을 모두 파직토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다시 너그럽게 생각하지 않고 경솔히 논핵(論覈)을 가하니 내가 매우 놀랍다. 당장 멈추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6월 8일 경신

지평 한성우(韓聖佑)가 사간 이홍적(李弘迪)·장령 안규(安圭)가 합계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논계하여 체직되었다.

 

6월 9일 신유

옥당(玉堂)의 관원을 소대(召對)하였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전 부사(府使) 이행등(李行登)이 시집간 서질녀(庶姪女)를 구석진 한 방으로 불러들여 그 첩의 동산(同産)185)  으로 하여금 협간(脅奸)케 하여 예법을 무너뜨려 이를 들은 자가 놀라워하고 통분해 합니다. 청컨대 이행등 및 그의 첩의 동산을 해당 관사로 하여금 잡아다 신문하고 죄를 주도록 하소서."
하니, 그것을 따랐다.

 

6월 10일 임술

강세귀(姜世龜)를 승지(承旨)로, 최규서(崔奎瑞)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6월 11일 계해

공홍도(公洪道)에 5월 28일 밤에 비가 많이 내려서 평지가 바다를 이루고, 회인(懷仁) 등의 여덟 고을의 민가[人戶]가 산사태에, 묻히고 표류하여 죽은 사람이 50여 명이라고 상문(上聞)하니,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6월 13일 을축

비변사에서 평안도 관찰사의 장계(狀啓)로 해서 삼화 현령(三和縣令)을 부사(府使)로 승격시켜 청남 방어사(淸南防禦使)를 겸임케 하고, 광량 첨사(廣梁僉使)는 그대로 둘 것을 복계(覆啓)하니, 윤허하였다.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진휼(賑恤)에 쓴 공명첩(空名帖)186)   값의 쌀을 다시 징수하지 말 것을 진달하고, 또 후궁에게 절급(折給)하는 공전(公田)이 너무 많아서는 아니되며, 사복시(司僕寺)의 목장(牧場)을 궁가(宮家)에 절급하는 것을 윤허하지 말 것을 논계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또 금위영(禁衞營)의 혁파 여부를 논하기를,
"여러 사람의 의논이 별대(別隊)는 훈련 도감(訓鍊都監)으로 돌려보내고 정초병(精抄兵)은 병조로 돌려보내고자 하나, 너무 자주 변통하는 것도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혁파는 전도된 처사라고 답하였다. 또 여러 궁가의 둔전(屯田)의 폐단을 논하였는데, 좌의정 남구만(南九萬)도 이를 말하니, 임금이 여러 궁가와 각 아문의 둔전 가운데 임자년187)   이후에 설치한 것은 조사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지평 이덕성(李德成)이 내간(內間)에서 괴석(怪石)을 완상하는 일에 대하여 진계(陳戒)하고 응교 서종태(徐宗泰)도 이를 말하였다. 남구만이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가 저 〈청나라〉에서 죽어 천하 후세에 할 말을 남겼으므로, 증직(贈職)하여 시호를 내리고 자손을 거두어 쓸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또 해조(該曹)에 명하여 오달제의 첩자(妾子)에게 늠료(廩料)를 주도록 하였다.

 

6월 16일 무진

김창협(金昌協)을 집의(執義)로, 신정(申晸)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6월 17일 기사

조사석(趙師錫)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삼고, 김창협을 승지(承旨)로 승진시켰다.

 

6월 19일 신미

지평 한성우(韓聖佑)가 아뢰기를,
"근래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서 절수(折受)를 구실로 민가의 전토를 함부로 빼앗는 폐단을 대신의 진달(陳達)로 인해 곧장 모두 조사할 것을 윤허하셨습니다. 그러나 명례궁(明禮宮)·수진궁(壽進宮)·어의궁(於義宮)·용동궁(龍洞宮) 및 명안 공주방(明安公主房)의 것은 임자년188)   이후에 절수한 것이므로 거론하지 말라고, 교지에 첨서(添書)하였다고 하니, 궁중과 관부를 일체로 보는 의리에 어긋납니다.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으니, 청컨대 모두 사정(査正)토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다섯 궁은 임자년 이후에 신설한 곳이므로 계해년189)  의 전교에 의거하여 혁파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계해년 이후의 것은 저절로 조사 대상 속에 들어 갈 것이고, 명안 공주의 봉작(封爵)은 임자년에 있었는지라, 일례로 함께 혁파한다면 남은 토지가 거의 없을 것이다. 이것을 참작하여 구별한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6월 20일 임신

한재(旱災)로 해서 기우제를 거행하였다.

 

6월 21일 계유

유성이 좌기성(左旗星) 위에서 나와 천봉성(天棓星) 아래로 들어갔다.

 

이선(李選)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6월 23일 을해

유성이 위성(危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대사간 송창(宋昌)이 그의 소회(所懷)로써 삼사(三使)190)  의 신하를 속히 파직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는 재계(齋戒)로 해서 전계(傳啓)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교리 김만길(金萬吉)도 이어서 진계하니, 임금이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에게 묻기를,
"삼사(三司)191)  의 말은 이와 같으나, 대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김수항이 아뢰기를,
"신이 정재숭(鄭載嵩)을 가 본즉, 사세가 정미년192)  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서둘러 우선 파직하고 다시 교대할 사람을 내어 사신이 가는 길에 이것을 말한다면 저들도 격노(激怒)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송창이 또 청문(廳聞)을 번거롭게 할 수 있으므로 속히 처분토록 하라고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직 사신이 갔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의처(議處)하겠다."
하였다.

 

6월 24일 병자

유성이 천강성(天江星) 밑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다.

 

재차 기우제를 거행하였다.

 

김두명(金斗明)을 승지(承旨)로, 김우석(金禹錫)을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홍문관에서 차자로 올려 속히 합계(合啓)를 윤허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6월 25일 정축

송창(宋昌)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6월 26일 무인

유성이 북두성 위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다.

 

6월 27일 기묘

대신을 보내어 사직(社稷)·종묘(宗廟)·북교(北郊)에 기우제를 올리라 명하고, 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가뭄을 민망히 여기며 자신을 경책(警責)한 다음 의정부로 하여금 직언(直言)을 널리 구하게 하고, 뭇 관원을 칙려(飭勵)하여 서로 공경하고 협조하도록 힘쓰라고 이르고, 감선(減膳)193)  하고 금주(禁酒)토록 하였다. 이어 승정원으로 하여금 직언을 구하는 전교를 대신 기초하라고 하니, 승정원에서 직접 임금의 말로 반포할 것을 청하였는데, 재차 아뢰자 이에 윤허하였다.

 

6월 28일 경진

대신과 의금부·형조의 당상(堂上)을 불러서 여러 죄인의 소결(疏決)을 시행하는데, 혹은 놓아주고, 혹은 그대로 두고, 혹은 감등도 하다가, 김환(金煥)의 일에 이르러서 임금이 대신에게 물으니,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만약 이번에 완전히 놓아 준다면 의논이 반드시 분분할 것입니다. 이배(移配)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중도(中道)에 이배하라고 명하여 조사기(趙嗣基)·이옥(李沃)·채범하(蔡範夏)·이지린(李之麟) 등이 모두 남방으로 이배되었다. 대개 이들이 북변(北邊)에 많이 모여 있어서 남의 말썽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수항(金壽恒)이 또 아뢰기를,
"삼수(三水)·갑산(甲山) 두 고을은 땅이 척박하여 생활이 극히 어려워서 오직 산삼을 캐어 생활을 꾸려 나가는데, 이번의 엄한 금령으로 해서 살아갈 길이 갑자기 끊어졌으니, 만약 별도의 구호가 없다면 필시 보존할 형편이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본도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형세를 잘 헤아려서 가장 좋은 방도를 계문(啓聞)케 한 다음 상의하여 품처(稟處)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6월 30일 임오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밑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헌납 이국방(李國芳)·정언 윤지익(尹之翊)이 아뢰기를,
"김환(金煥)의 죄명은 이미 심상한 유배(流配)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타인과 혼동하여 가벼운 형만을 베풀어서는 아니됩니다. 청컨대 배소(配所)를 개정하여 극히 먼 변방으로 유배케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놓아주어도 아니될 것이 없는데도, 너희들은 반드시 자기의 의견만을 옳다고 하며 이기기를 좋아하는 논의를 마음대로 하니, 참으로 가소롭고도 놀랄 일이다."
하였다.

 

도목정(都目政)을 하여, 이이명(李頤命)을 응교(應敎)로, 엄집(嚴緝)을 교리(校理)로, 김성적(金盛迪)을 수찬(修撰)으로, 윤경교(尹敬敎)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임상원(任相元)을 도승지(都承旨)로, 이선(李選)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다음달 초3일에 사직(社稷)에 친히 기우제를 올리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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