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7월

싸라리리 2025. 11. 17.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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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계미

여러 승지들이 입대(入對)를 청하여, 가을 계절이 벌써 지나갔으니, 친제(親祭)는 정침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튿날 또 근일에 연일 비가 내리고 있으니 우선 정침하라고 청하니, 답하기를,
"수향(受香)194)  하는 절차가 곧 있을 터인데, 바로 멈추는 것은 미안하다."
하고, 드디어 어가를 사직단(社稷壇)으로 향하여 떠났는데, 소나기가 크게 내려서 대신들이 섭행(攝行)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드디어 환궁하였다.

 

7월 3일 을유

정언 윤지익(尹之翊)이 아뢰어 이배할 죄인 오정위(吳挺緯)를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7월 5일 정해

지평 김몽신(金蒙臣)이, 이단석(李端錫)이 옥후(玉候)가 편찮을 때 은밀히 강종(强宗)195)  의 집을 찾아 다녔는데,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는 그의 할아버지의 사당이 경내(境內)에 있는데도 근배(覲拜)하지 않고 도내의 이름난 사대부(士大夫)의 집에는 분주히 찾아 다녔으며,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서는 숙의방(淑儀房)의 봉진(封進) 문서에 ‘신(臣)’ 자를 썼고, 형제가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여도 척포(尺布)·두속(斗粟)을 즐겨 나누어 주지 않았으며, 오정위(吳挺緯)가 호조 판서가 되자, 뇌물로 상삼(上蔘) 두어 근을 바쳤다 하여,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죄율을 청하려고 하였는데, 대사헌 신익상(申翼相)이 듣지 않아서 각기 인피(引避)하였다. 사간원에서 신익상은 체직하고 김몽신은 출사케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지난일을 제기하는 행위는 너무 지나치다며, 신익상은 출사케 하고 김몽신은 체직케 하였다.

 

7월 6일 무자

부교리 이징명(李徵明)이 상소(上疏)하여 재이(災異)를 두려워할 것과 수성(修省)에 힘쓸 것을 논하고, 이어 아뢰기를,
"근년의 천재와 시변은 모두가 놀랍고 괴이할 만한 것이오나 그 중에서도 지진은 더욱 두렵습니다. 지난해의 서울의 지진과 작년과 올해에 있은 모든 도(道)의 지진은 신은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사기(史記)》를 상고하여 본즉 혹은 외척(外戚)의 집권으로 혹은 여알(女謁)의 극성으로 연유하였다고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도 일찍이 생각이 여기에 미친 적이 있으신지요? 오늘날의 외척은 모두가 사류(士類)이므로, 아직은 염려할 만한 자취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처와 봉양에 습성이 바뀌니 인정이 변하기 쉽고, 대간(臺諫)의 탄핵에 충격을 받으면 행여 반성에 어둡기 마련인 만큼 일에 앞서서 경계하는 것은 억측에 가깝다 하더라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옛사람의 명백한 교훈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성상(聖上)께서 곤성(坤聖)을 면계(勉戒)하고 외척을 칙려(飭勵)하여 근신하시기를 마치 후한(後漢) 명덕 황후(明德皇后)의 외가와 같이 하신다면, 국가의 행복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 곤성의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아름다운 덕이 또한 영원히 보전되어 휴손되지 않을 것입니다. 숙의(淑儀)의 간선에 이르러서는 부득이한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임을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궁내에 들어온 지 반년이 채 못 되어 벌써 과람한 조짐이 많이 보이고 있으니, 이는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또 외간에 전해진 말을 들으니, 궁인(宮人)으로서 은총을 받고 있는 자가 많은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역관(譯官)        장현(張炫)의 근족(近族)이라고 합니다. 만일 외간의 말이 다 거짓이라면 다행이겠습니다마는 만약 비슷한 것이 있다면, 신은 종묘 사직의 존망이 여기에 매어 있지 않으리라고 기필하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상처를 받는 길이 많아지고 나면 병을 조심하려는 뜻이 늦추어지기 쉽고, 말을 받아들이는 계제가 바르지 않으면 참소의 길이 쉽게 열리는 법입니다. 이것이 어찌 성명(聖明)께서 절실히 경계하고 두려워 하셔야 될 바가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장현의 부자(父子)는 일찍이 정(楨)196)                  ·이남(李枏)197)                  에게 빌붙은 자이겠습니까? 그의 마음가짐이나 하는 일들이 국인(國人)에게 의심을 받아온 지가 오랩니다. 이제 만약 그들의 근족을 가까이하여 좌우에 둔다면 앞으로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국가의 화란이 다 여총(女寵)으로 말미암고, 여총의 화근은 대개 이러한 사람에게서 나왔습니다. 전하의 명성(明聖)으로 어찌 알지 못할 바가 있겠습니까마는, 신은 바라건대, 성상께서 장녀(張女)를 내쫓아서 맑고 밝은 정치에 누를 끼치지 말게 하소서."
하였는데, 소(疏)가 들어가자, 임금이 크게 분노하여 장녀의 대한 일은 비답하지 않고, 곤성을 면계하라는 것은 할 말이 아니라면서 그 언근(言根)을 바짝 캐물었다. 승정원에서 극력 간쟁하자 임금이 더욱 노하여 진계(陳啓)한 승지        신엽(申曅)·김두명(金斗明)을 가두었다. 옥당(玉堂) 김창집(金昌集)·박태만(朴泰萬) 등이 입대(入對)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소회(所懷)를 써 올리라고 명하므로, 김창집 등이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을 간략히 개진하였는데, 보지도 않은 채 다시 비망기를 내려 이징명(李徵明)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승지        홍만종·김창협이 또 거듭 아뢰며 간쟁하기를, 주자(朱子)의 ‘꾸짖기도 하고 몰아치기도 했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처사는〉 재변을 만나서 수성(修省)198)                  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 말의 뜻이 분명하고도 절실하였으니, 김창협이 얽은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은 이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나는 본래 배우지 않아서 아는 것이 없다. 내가 비록 어둡기는 하지만 결코 이 호서(狐鼠) 같은 무리들에게 제재를 차마 받지 못하겠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또 서로 잇따라 구원해 해명하는 것은 이징명의 죄율이 가볍기 때문이라며 죄를 더 씌워서 삭직(削職)하여 내쫓았다. 옥당 이이명(李頤命)·서종태(徐宗泰)·김만길(金萬吉)·김창집(金昌集)·박태만(朴泰萬)이 입대를 청하고, 홍만종·김창협도 같이 들어갔는데, 서종태가 아뢰기를,
"이징명이 죄를 입은 것은 오히려 사소한 일입니다. 성상의 지나친 거조가 중첩되고 있고 이것이 걱정스럽고 한탄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말하기를,
"너희들의 방자함이 이와 같기 때문에 북인(北人)199)                  이 군주는 약하고 신하가 강하다는 말을 한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반복하여 간절히 간하여도 임금이 끝내 듣지 않았다. 대사간        윤경교(尹敬敎)·장령        이국화(李國華)·지평        한성우(韓聖佑)·예조 판서        여성제(呂聖齊)가 함께 상소하여 이징명을 구원하였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영중추(_)부사        김수흥(金壽興)도 차자를 올려 말하고, 또 정언        윤지익(尹之翊)이 명령을 환수하라는 논계를 올렸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고, 오직 갇혔던 승지만 김수항의 말로 인해 놓아 주었다.
삼가 고찰하건대, 이징명이 폐행(嬖幸) 장씨의 일을 항론(抗論)한 것은 사기(辭氣)가 강경하여 근신(近臣)으로서 일을 논하는 체통을 제대로 얻었으니, 송(宋)나라        왕소(王素)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할 만하다. 지난달 인조(仁祖) 때 역신(逆臣) 조귀수(趙龜壽)가 은총을 받을 적에 이징명의 족조(族祖) 이명준(李命俊)이 소를 올려 내쫓기를 청하였는데, 인조가 비록 그 말은 채택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강직함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대사간을 제수하였다. 오늘날 이징명의 말도 실로 이명준과 같은 것이었는데 성상의 처분은 도리어 인조에 못 미치니, 개탄과 안타까움을 견디지 못하겠다. 그리고 말단의 말에다 노염을 두고서 엉뚱하게도 척리를 칙려하라는 보통의 이야기를 트집 잡아 큰 죄로 삼은 것은 인심을 복종시키기에 더욱 부족하여, 심지어 배우지 않았느니, 어둡다느니, 신하가 강하다는 등의 말로써 오로지 분노만 내뿜고 임금의 윤음의 귀중한 것에 크게 손상되는 것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 군덕(君德)에 누가 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이징명이 학식은 모자란다 하더라도 원래 편협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남이 하기 어려운 말을 능히 하여, 그 가세(家世)의 경직(勁直)한 기풍을 떨어뜨리지 않았는데, 그의 말은 기사 환국(己巳換局)에 이르러 더욱 증험이 되어 드디어 후세 사람의 귀감이 되었는지라, 온 세상이 다 함께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한다.

 

7월 7일 기축

비망기를 내려 이르기를,
"대왕 대비전께서 타시는 가마가 해가 오래 되어 빛이 바래졌기 때문에 묵은 가마를 상의원(尙衣院)에 내어 주고 그 모양대로 새 가마를 만들어 들이라고 하였더니, 그 뒤 망측한 말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자자하게 들린다. 이를 그대로 둔다면 앞으로 국가의 체통을 엄중하게 하고 요사스런 말을 지식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초에 전교를 듣고 간 상의원의 그 서리는 이미 무거운 죄로 결장(決杖)하고, 가마도 벌써 상의원으로 내어 보내어 불사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때 감조(監造)하던 낭청(郞廳)도 그 죄는 똑같으니, 잡아다가 죄를 결정하라."
하였다.

 

최규서(崔奎瑞)·최석항(崔錫恒)·홍수헌(弘受憲)을 서북도(西北道)의 강변으로 나누어 보내어 산삼 캐는 사람과 변방 위의 사정을 염찰(廉察)하여 오게 하였다.

 

7월 8일 경인

이익수(李益壽)를 지평(持平)으로, 서문유(徐文𥙿)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7월 9일 신묘

응교 이이명(李頤命)·부응교 서종태(徐宗泰), 교리 김만길(金萬吉)·김창집(金昌集), 수찬 박태만(朴泰萬)이 응지(應旨)하여 차자를 올리면서 학문에 힘쓰고 정사에 부지런하고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보살피고, 인재를 구하고 언로를 넓히며 군비를 확충하고 재용을 절약하며, 기강을 진작시키고 풍속을 바로잡을 도리를 논하고, 진심으로 이를 이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가상하다며 받아들였다.

 

7월 10일 임진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입대(入對)를 청하여, 근일 내린 전교의 취지가 너무 지나침을 극력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침 성난 때를 당하여 자신도 모르게 말이 지나쳤다. 대신의 말이 옳으니, 지나친 말들은 모두 마땅히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외척을 억제하라는 것은 본디 사론(士論)이오나, 경신(敬愼)으로서 자신을 지키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당연히 의뢰도 하고 중하게 대하여야 합니다. 이를테면 심연원(沈連源)·심의겸(沈義謙)·박응남(朴應南) 등이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외척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그 사람의 현부(賢否)와 일의 시비(是非)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경신 출척(庚申黜斥) 이후로 일종의 논의가 훈척(勳戚)과는 같이 일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청론(淸論)인 듯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논의가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이번 이징명(李徵明)의 상소(上疏)는 참으로 경솔하지만, 만약 그 말이 외척과 연관된다 하여 죄를 준다면 소문이 좋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또 효종께서 노하셨을 적에는 일을 접어두고 다시 생각하지 않다가 밤에 생각을 해서 퍽 평온한 전교를 얻었다는 것과 ‘마땅히 할 일이면 즉시 하여야지 어찌 뒷날을 기다릴 것인가?’ 하며 즉시 김홍욱(金弘郁)의 관작을 복직케 한 두 가지 일을 들어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자, 임금이 유의하겠다 답하였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신이 들은즉 전하께서 옥당(玉堂)200)  에서 입대를 청하였을 적에 ‘심지어 임금은 약하고 신하가 강하다.’는 말을 거론하셨다고 하니, 더욱 놀랍고 두렵습니다. 지난날 어느 한쪽 사람들이 이런 제목을 가지고 송시열(宋時烈) 이하 여러 사람의 죄를 구성하였던 것을 성상의 통찰과 보호에 힘입어 보전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살아남은 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성상께서 혹시라도 이 말을 그렇게 여기신다면 이는 뭇신하의 죄는 죽어도 그 책임을 면하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신이 이 하교를 들은 뒤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만약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조정 신하들의 죄를 구성한다면 뭇신하들이 어찌 감히 하늘과 땅 사이에 자립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하에게 참으로 그 죄가 있다면 죄를 줄 일이지, 어찌 숨기고 참으면서 서로 의심할 리가 있겠는가? 칠정(七情) 중에서 쉽게 발동하고 제재하기 어려운 것이 오직 노여움이다. 내가 성미가 급하여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하였으나, 추후해서 생각하고 그 말의 지나침을 매우 후회하였으니, 《일기(日記)》201)  에는 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이에 가마를 불사른 일을 가지고 아뢰기를,
"그 가마가 이미 대왕 대비전의 어좌(御坐)를 위하여 만들어졌다면, 그 조작된 말이 망칙하다 하여 불사르라고 명하기까지 하신 일은 매우 미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외간에서는 숙의(淑儀)를 태우기 위하여 제조하였다는 말이 자자하다고 하는데, 어찌 숙의를 태우기 위하여 주홍색의 가마를 제조할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오늘날 만약 그 가마를 그대로 두었더라면 와전된 말이 앞으로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특별히 불사르라고 명한 것이다."
하였다. 김수항이 이어 궁금(宮禁)을 엄히 할 방도를 개진하였는데, 임금이 받아들였다. 김수항이 창성 부사(昌城府使) 정덕겸(鄭德謙)이 일찍이 탐욕(貪慾)으로 해서 사형을 감하여 유배를 정하였는데 개차(改差)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개차를 명하고, 이어 이 뒤로는 장오죄(贓汚罪)를 범한 자는 혹 사면으로 해서 용서를 받더라도 벼슬길을 터 주지 않는 것으로 법식을 정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 12일 갑오

한은(韓垽)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7월 13일 을미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형조 판서 이사명(李師命)과 공조 참판 서문중(徐文重)으로 하여금 진휼청(賑恤廳)의 재곡(財轂)을 같이 관리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어제 상의원(尙衣院) 서리를 차비문(差備門)에서 죄를 다스린 일은 이것이 비록 전례라고는 하나, 이는 궁중과 관부를 일체로 보는 뜻이 아닙니다. 유사(有司)에게 분부하여 법으로써 다스림이 국가의 체통에 맞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전례가 있기 때문에 내가 따른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유사에게 분부하여 다스리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금번 저 사람 〈청나라의〉 자문(咨文) 속 말미에 ‘신하는 강하고 임금은 약하다.’라는 말은 신하된 자로서 차마 듣지 못할 바인데, 일종의 논의가 신하가 강하다는 말을 이미 저 사람들이 발설하였으므로, 오시수(吳始壽)의 죄는 이제부터 저절로 벗겨질 것이라고 하니, 이는 너무 옳지 못한 말입니다. 오시수의 죽음은 신하가 강하다는 말을 지어 내어서가 아니고, 이 말이 역신(逆臣) 이남(李柟)에게서 발설된 것을 오시수가 증언하여 성립시킨 것이므로, 오시수가 지어 낸 말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 것입니다. 이를테면 오시수의 죄는 저 사람들이 두 번의 제사를 설행할 적에 역관들이 김석산(金石山)에게 물은 바, 하나는 승하(昇遐)하였기 때문에 치제(致祭)하는 것이라 하고, 하나는 선왕(先王)이 질병이 악화되어 끝내 승하하셨으므로, 특별히 애도하는 뜻에서 올리는 제사라고 하였다 하며, 또 저들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양반(兩班)이 매우 고약하다.’고 하였다는데, 오시수가 이 말을 속여서 저 사람들이 선왕께서 강한 신하에게 제재를 받은 것이 애처로와서 짐짓 별도로 치제하는 것으로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지금 도착한 자문에 강한 신하라는 말이 있다 하더라도 오시수가 어찌 말끔히 벗어날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 사사(賜死)한 것이 신하가 강하다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두 번 치제한 일을 가지고 차마 듣지 못할 말로 속인 것은 극히 괘씸하다. 이것으로 사사(賜死)한 것인데, 오늘날에 와서 사람들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은 더욱 놀랄 만하다. 신원(伸冤)의 논의에 이르러서는 임금을 무시하는 방자한 자가 아니라면 어찌 감히 이와 같은 논의를 발의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응교 이이명(李頤命)이 정축년202) 척화 삼신(斥和三臣)203)  에게 시장(諡狀)을 기다릴 것 없이 특별히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김수항에게 물어 윤허하였다. 이이명이 또 아뢰기를,
"고(故) 재신(宰臣) 김성일(金誠一)의 시호 중의 문(文) 자에 ‘도덕 박문(道德博聞)’으로 그 주석(註釋)이 달려 있는데, 김성일이 비록 강직하고 청간(淸簡)하다는 칭찬이 있었으나, 유현(儒賢)과는 다름이 있으므로 그 주석(註釋)을 고치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김수항이 또 그러하다고 하니, 임금이 따라서 드디어 ‘근학 호문(勤學好問)’으로 고쳤다.

 

7월 14일 병신

이익(李翊)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7월 16일 무술

유성이 묘성(昴星) 밑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다.

 

7월 17일 기해

권지(權持)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7월 18일 경자

유성이 천시 서원(天市西垣) 안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고(故) 판서(判書) 이식(李植)은 무사(誣史)를 간정(刊正)한 공이 있는데도 죄를 입고 죽었으므로, 베풀어야 할 애도의 법전도 베풀지 못하고, 폄장(貶葬)하라는 유명까지 있어서 자손 또한 감히 시호를 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사를 바로잡은 공으로 보아 특별히 증직과 시호를 내리고 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따라서 드디어 영의정을 증직하고 문정(文靖)의 시호를 내렸다. 김수항이 또 이단하(李端夏)를 명하여 부를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수찬 신계화(申啓華)가 효종 계사년204)  과 현종 갑진년205)  의 선례에 의거하여 북도(北道)에 별도의 과거를 보일 것을 청하니, 임금이 중신을 보내어 과거를 보이되, 날씨가 춥기 전에 진작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신계화가 또 북도 사람 이진영(李震英)을 거두어 쓸 것을 청하니, 이진영은 곧 임진 왜란 때 북도 병마 평사(北道兵馬評事) 정문부(鄭文孚)와 같이 순절할 사람 이붕수(李鵬壽)의 손자이다. 교리 서문유(徐文𥙿)가 정언 윤지익(尹之翊)이 김환(金煥)의 이배(移配)한 일로 해서 인피(引避)하는 말 속에 자기의 주견을 세우지 못하고 여론에 흔들림을 받았다고 논하자 체직시켰다. 신계화·서문유가 또 사헌부의 관원 이국화(李國華)·이태룡(李台龍)·한성우(韓聖佑) 등이 이단석(李端錫)의 일로 해서 인피를 할 때 사연이 분명하지 못하였던 잘못을 논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김몽신(金夢臣)은 이단석(李端錫)이 강종(强宗)을 찾아 간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논핵(論覈)하며, 옥후(玉候)가 편찮으시던 날에 찾아갔다는 것으로 말을 만들기까지 하여 죄를 성립시켰으니, 이는 곧 난역(亂逆)입니다. 어찌 사판(仕版)의 삭제에만 그치겠습니까? 거기에 가담한 여러 신하의 인피한 사연 중에도 시비가 전혀 분간이 없으니, 대각(臺閣)의 논의가 이래서는 아니됩니다. 모두 체차(遞差)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상례에 따라 인피하는 것은 극히 모호한 행위이다. 장령이 태룡·지평 한성우를 함께 체차하라."
하였다.

 

밤에 유성이 천시 서원(天市西垣)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7월 19일 신축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유성이 실성(室星) 위에서 나와 위성(危星) 밑으로 들어갔다.

 

7월 20일 임인

윤이도(尹以道)·권시경(權是經)을 승지(承旨)로, 김창협(金昌協)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송창(宋昌)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후항(李后沆)을 사간(司諫)으로, 강현(姜鋧)을 장령(掌令)으로, 김우항(金宇杭)을 지평(持平)으로, 신계화(申啓華)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전라도 관찰사 김진귀(金鎭龜)가 하직하니, 인견을 하고 민사(民事)를 당부하여 면려하였다.

 

7월 21일 계묘

주강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조사석(趙師錫)이 중국의 법규에 의거하여 벽돌을 구워 성을 쌓을 것을 청하였는데, 이때 조사석이 막 금위영 제조(禁衞營提調)를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도제조(都提調)와 더불어 상의하여 품정(稟定)토록 하였다.

 

7월 22일 갑진

조의징(趙儀徵)을 정언(正言)으로, 유득일(兪得一)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정호(鄭澔)를 검열(檢閱)로 삼고, 서종태(徐宗泰)를 특별히 올려 승지(承旨)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7월 23일 을사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북도에 과거를 설행할 적의 액수(額數)를 검토하고 아뢰기를,
"갑진년206)  ·병진년207)   두 해에 다 3백 명을 뽑았기 때문에 군병으로서 합격한 자가 거의 반이나 되어 군액(軍額)이 많이 비었으니, 그 폐단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정원의 수도 참작하여야 되거니와, 무예(武藝)의 규정도 전기(前期)해서 판하(判下)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1백 명만 뽑고, 규정도 전기해서 취품(取稟)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김수항이 충의위(忠義衞)에 속이고 올린 자에게 속전(贖錢)을 받는 일에 대하여 부자 형제 합쳐서 4, 5명에 수포(收布)하는 자가 있는데, 부자가 아니더라도 한 집에 동거하는 자로서 4, 5명에 이르면 그 중 한 명에게는 수포(收布)를 감하여 주고, 음관(蔭官)의 자손이나 나이 60이 찬 자도 면제하여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무릇 크고 작은 죄를 매기고 조율(照律)할 때 예전 관례에는 친공신(親功臣)·원종 공신(原從功臣)을 막론하고 대수를 한정하지 않고 모두 부표(付標)208)  하여 감등(減等)하는 것을 허용하였었으나, 바깥 의논이 혹은 구전(口傳)으로 이미 대수를 한정하였은즉, 공감(功減)의 규정도 제한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전으로 대수를 제한한 것은 다만 대오(隊伍)를 편성하여 돌아가며 번(番)을 세워서 오위(五衞)에 소속케 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것 때문에 공감의 규정도 함께 폐지할 수는 없으니, 반드시 일정한 법식이 있어야 준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신 자손을 율에 의해 감등하는 것은 충의위에 구전으로 대수를 정한 것과는 같지 않다. 옛 관례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여성제(呂聖齊)가 아뢰기를,
"대왕 대비전에 존호를 올린 것을 사당에 고유하고 진하(陳賀)한 뒤에는 마땅히 경과(慶科)209)  를 설행하여야 합니다. 인조 갑자년210)   인목 대비(仁穆大妃)의 존호를 올린 뒤 즉시 경과를 설행하지는 않았으나, 을축년211)   세자의 관례(冠禮)·책례(冊禮) 등의 경사를 합하여 별시(別試)를 설행하였습니다. 이번에 존호를 올린 것은 단순한 한 가지 경사이기는 하나, 의당 경과를 설행하여야 합니다. 청컨대 대신에게 하문하시어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김수항에게 물었는데, 김수항이 아뢰기를,
"이미 전례가 있으니 그만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정시(庭試)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정언 조의징(趙義徵)이 벽동 군수(碧潼郡守) 정지빈(鄭之彬)은 수령(守令)에 합당하지 않다고 논하고 체직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자, 김수항이 아뢰기를,
"대간(臺諫)이 변지(邊地)의 수령을 논하면서 파직은 청해도 체차는 청하지 않는 것이 원래의 법례입니다. 그런데 간신(諫臣)이 체차(遞差)로써 논계(論啓)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였다. 조의징은 이로 인하여 인피(引避)하였는데, 출사(出仕)하도록 처치(處置)하였다. 진휼청(賑恤廳) 당상(堂上) 이사명(李師命)의 건백(建白)으로 인해 호조와 선혜청(宣惠廳)이 진휼청에서 서로 꾸어간 곡식과 이조·예조·형조 등 3조와 돈녕부(敦寧府)·사간 원이 진휼청에서 임시로 꾸어간 곡식을 모두 탕감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진휼청을 신설하고 나서 물력이 넉넉지 못하여 호조와 선혜청에서 서로 곡물을 꾸어 왔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설립한 지도 오래 되었거니와 곡물이 점차 넉넉하게 되었고, 또 주관하는 사람이 이재(理財)에 능하여 저축된 것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청이 있었다. 그러나 재물을 아끼는 도리는 생각하지 않고, 또 앞으로 다가올 걱정조차 소홀히 하니, 근래 서울과 지방에 국가의 저축이 고갈된 것도 탕감의 한 일에 연유하지 않는다고는 기필할 수 없다. 안타까움을 이루 다 말하랴! 김수항의 말로 인해 삼남(三南)212)  의 관찰사를 파직하라고 명하고, 대신에게 물어서 의천(擬薦)케 하는 규정을 두어 이조에서 이를 의망(擬望)하게 하였다. 이는 을묘년213)  간에 정관(政官)의 건백(建白)으로 해서 이러한 예가 있게 된 것이다.

 

7월 24일 병오

조종저(趙宗著)를 집의(執義)로, 이일익(李日翼)·안규(安圭)를 장령(掌令)으로, 이제민(李濟民)을 지평(持平)으로, 이현기(李玄紀)를 수찬(修撰)으로, 강현(姜鋧)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7월 25일 정미

전교하기를,
"숙휘 공주(淑徽公主)가 장차 분묘에 가서 성분(省墳)을 하겠다고 하니 말미와 말[馬]·요전상(澆奠床)214)   등을 주되 숙명 공주(淑明公主)의 예에 의하여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이국방(李國芳)을 집의로, 신완(申琓)을 도승지(都承旨)로, 성호징(成虎徵)·허윤(許玧)을 지평으로, 임상원(任相元)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창집(金昌集)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전라도 옥구(沃溝)·낙안(樂安) 등의 고을에 바람이 강하게 불고 폭우가 쏟아져 나무가 꺾이고 집이 도괴되었다. 이때 호남의 일대가 어떤 곳은 큰물이 지고 어떤 곳은 가뭄에 마르는가 하면, 충재(蟲災) 또한 극성을 부렸다.

 

7월 26일 무신

유성이 삼태성(三台星) 밑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가고, 또 묘성(昴星) 밑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이단하(李端夏)가 축적하는 방도에 유의할 것을 극구 진달하자. 시독관(侍讀官) 신계화(申啓華)가 아뢰기를,
"축적은 오늘날의 급무(急務)가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이단하가 다시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정치를 논할 적에 반드시, ‘대본(大本)이 있고, 급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본이란 임금의 덕이 그것이다. 대본은 본디 닦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다음이 급무인데, 오늘날의 급무는 축적만한 것이 없습니다. 신이 매번 사창법(社倉法)215)  을 시행하여 축적하는 방도로 삼으려고 하였는데도 여태 시험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습니다. 저축은 다만 위아래가 절약하고 검소하는 데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축적하는 방도는 점차로 할 수 있는 것이지, 갑자기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이의창(李宜昌)을 정언(正言)으로, 원진택(元振澤)을 헌납(獻納)으로, 김창집(金昌集)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중국 사람 유위(游魏) 등 80여 명이 진도(珍島) 남도포(南桃浦)에 표류해 와 닿았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복건성(福建省) 대만(臺灣) 지역에 산다.’고 하였다. 대만은 곧 정지룡(鄭芝龍)이 점거하였던 옛 섬으로 일찍이 경왕(耿王)의 부내(部內)에 속해 있었는데, 경왕이 패하자, 정지룡이 손자 정극상(鄭克塽)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취직을 하여 녹을 받아 먹음으로써 대만을 고쳐 멱라부(汨羅府)로 삼았으니, 지금 중국은 다 청나라에 속해 있다. 이들이 장사를 하러 일본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왔다면서 파손된 배를 수리하여 돌려 보내 줄 것을 청하고, 이어 인장이 찍힌 문서를 내보였다. 본도에 명하여 파손된 배를 수리하고 식량을 주어서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7월 27일 기유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예조(禮曹)의 말로 해서 여러 도의 경신년216)   이후 흉년으로 인하여 감소하였던 각전(各殿)의 삭선(朔膳)을 다시 회복토록 명하였다.

 

공홍도(公洪道)에 폭우와 광풍이 덮쳐서 여러 고을이 많은 재해를 입었고, 경상도에도 같은 날 비바람이 크게 몰아쳤다.

 

대사헌 임상원(任相元)·장령 안규(安圭)·지평 김우항(金宇杭)이 또 이징명(李徵明)의 삭출(削黜)을 환수하라는 논계를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30일 임자

고 영의정 김육(金堉)의 분묘에 보토(補土)할 때 중사(中使)를 보내어 공역(工役)을 감독하도록 하고 본도에 명하여 각별히 보살피도록 하였다. 【김육은 곧 명성 왕비(明聖王妃)의 할아버지이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73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풍속-예속(禮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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