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계축
평안도(平安道) 영유현(永柔縣)에 무후(武侯)217) 의 사당을 중건하고 비(碑)를 세웠다. 【비문(碑文)은 대제학(大提鶴) 이민서(李敏敍)가 지어 올렸다.】 그 후에 도신(道臣) 이세백(李世白)이 비문 한 통을 박아내어 올리고 말하기를,
"임진년218) 과 같이 혼란했던 때에도 성조(聖祖)219) 께서 무후의 사당을 세우는 일을 서둘렀던 이유는 대체로 은미한 뜻이 있었던 것이었고, 선조(先朝)220) 때에 또다시 표게(表揭)221) 하는 명이 계셨습니다. 천년 이전의 사람도 오히려 한 지역의 선비들로 하여금 그러한 사실을 듣고 분발하게 하였는데, 더구나 현재 이러한 때에 도내에서 한 가지 기예(技藝)와 한 가지 능력(能力)이 있는 자라도 차례로 등용한다면 어찌 분발하여 일어설 자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대개 선조 대왕(宣祖大王)이 임진년에 서쪽을 피난 갔을 적에 영유현(永柔縣)에서 어가(御駕)를 머물고 그곳의 지명이 와룡(臥龍)임을 인하여 무후의 사당을 세우게 했었는데, 나중에 그것이 허물어지게 되자, 현종 때에 또다시 중건하게 하였으므로, 이세백이 이렇게 장계(狀啓)한 것이다.
8월 2일 갑인
신익상(申翼相)을 도승지(都承旨)로, 윤세기(尹世紀)를 승지로 삼았다.
8월 4일 병진
응교(應敎) 이이명(李頤命)이 상소하기를,
"장마와 가뭄으로 인하여 흉년이 들었으니, 청컨대, 감시(監試)·별시(別試)·정시(庭試)·중시(重試)·관무재(觀武才)와 북로(北路) 지역의 시재(試才)는 모두 명년으로 물려서 실시하여 일분의 폐단이라도 줄일 수 있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군사를 다스리는 도(道)는 무비(武備)를 잊지 않기 위한 것이다. 일찍이 효종(孝宗) 때에는 봄·가을에 시취(試取)하는 때도 있었다. 그 후에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비록 한결같이 전일의 규정처럼 할 수는 없었으나, 4년 뒤에 한 번씩 시취하고자 함은 본래 잘못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초시를 이미 마친 다음에 명년 봄으로 물려서 정한다는 것은 더욱 전도되는 일이다. 북쪽 지역에 과거를 보이는 것 또한 먼 지역의 백성을 위로해 주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이제 와서 도로 그만두게 되면 신용을 잃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식년(式年)에 동당(東堂)222) 에 감시(監試)하는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라."
하였다가, 뒤에 예관(禮官)의 건의에 의하여 물려서 실시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임상원(任相元)을 도승지(都承旨)로, 이익(李翊)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8월 6일 무오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문신들에게 정시(庭試)를 보였다.
송창(宋昌)을 좌승지로 삼았다.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 상소(上疏)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교리(校理) 이징명(李徵明)의 응지(應旨)에 대한 상소를 삼가 보았었는데, 첫 머리에서, ‘과거의 역사에 지진의 재변은 외척이 세도를 부리는 데에 말미암은 것이었다.’라고 말하고, 이어, ‘거처와 봉양이 습관의 변화를 초래한다.’는 등의 말로써 신을 지적하면서 심지어는 곤성(坤聖)223) 을 경계시키고 척리(戚里)224) 를 주의시켜야 한다고까지 청하였으니, 어떤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경계하도록 한 것은 엄격하고 간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 글을 보고 놀랍고 두려워서 마음과 뼈가 함께 섬짓할 정도였습니다. 잇따라 삼가 들으니, 간장(諫長) 【윤경교(尹敬敎)이다.】 의 상소에 또다시, ‘총애가 지나쳐서 교만이 생겼다.’고 말했다 하니, 신의 죄는 이 지경에 이르러 한층 더 첨가되었습니다. 신은 진실로 어리석어서 종전의 범죄가 어떠했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였으며, 마침내 죽게 된 때에 이르러서 이렇게까지 좋지 못한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징명의 마음씀은 거짓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진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경에게야 그 무슨 털끝만큼이라도 인책해야 할 일이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민유중(閔維重)은 조정에 벼슬한 지 30년 동안 한결같이 청렴하고 근신하였었는데, 국구(國舅)가 되고서는 더욱 더 조심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외척(外戚)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어느 날 임금이 사적으로 편전(便殿)에서 만나 보고 이어 외부의 일을 물어 보았는데, 대답하기를,
"신은 늙고 병들어서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이 적으므로 무릇 조정의 의논에 대해서는 참여하여 들은 것이 없습니다. 가령 한두 가지 들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하께서 만약에 신을 통하여 들으신다면 이는 바로 부정(不正)한 길이니, 어찌 성조(聖朝)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기뻐하지 않고 헤어졌으며, 이로부터 다시는 사적으로 만나지 아니하였다. 이징명의 상소의 뜻은 어찌 민유중이 참으로 잘못한 것이 있어서 그런 말을 했겠는가? 대체로 그 말을 엮어갈 적에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문제삼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임금이 이 징명을 미워하는 것은 반드시 국구를 위해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8월 7일 기미
정언(正言) 이의창(李宜昌)이 아뢰기를,
"지평(持平) 허윤(許玧)은 인망(人望)이 본래 가벼운데다가 또 비방이 있는데, 갑자기 대각(臺閣)에 제수하니 여론이 만족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청컨대, 체차(遞差)시키소서. 그리고 일전에 이징명(李徵明)을 환수(還收)하려는 계사(啓辭)에 대해서는 그 당시의 간관(諫官)들이 몇 가지를 더 첨가시켜야 한다는 말을 하다가 심지어 미안스러운 하교까지 받게 되었는데, 집의(執義) 이국방(李國芳)은 지난날 간관의 직무를 띠고 있었던 자로서 마침내 이튿날 전계(傳啓)할 적에 그 부분을 삭제하기에 급급하여 윗사람의 비위만을 맞추려는 뜻이 드러났습니다. 대각에서 논사(論事)함이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체차시키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는 대개 지난날 정언 조의징(趙儀徵)이 탑전(榻前)에서 전계할 적에 이징명을 환수하려는 계사 중에 ‘현재의 폐단에 적중하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징명의 상소 내용에 현재의 폐단에 적중한 말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튿날 이국방이 헌납(獻納)으로서 전계하면서 ‘현재의 폐단에 적중하다.’고 한 조항을 삭제하자, 세상의 평판이 이를 비난하였었는데, 과연 탄핵을 당하게 되었다.
8월 8일 경신
유성(流星)이 묘성(昴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지난 7월에 인제현(麟蹄縣)에 서리가 내리고 큰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비와 우박이 번갈아 내렸고 철원부(鐵原府)에 비와 우박이 많이 내렸는데 큰 것은 계란만 하였고 작은 것은 새알만 하였다. 감사(監司)가 이를 보고했는데, 여러 도에서도 대개 그러했으므로, 장계(狀啓)가 연달아 들어왔다.
8월 9일 신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마상재(馬上才)225) 와 언월도(偃月刀)226) , 기추(騎蒭)227) 등 각종 기예(技藝)를 시험보이고, 이어 문신(文臣)에게 후전(帿箭)을 시험보였는데,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숙(李䎘)이 활을 쏜 것이 절반도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임금이 웃었다. 어떤 한 노인(老人)이 갑옷과 투구 차림으로 땅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은 곧 군직(軍職)인 정헌 대부(正憲大夫) 이장(李璋)입니다. 일찍이 세 차례나 호종(扈從)한 적이 있었는데 나이 현재 84세입니다.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친히 임하셔서 시재(試才)하신다고 하니 매우 성대한 행사입니다. 신이 비록 늙어서 무능하나 성상 앞에서 말을 달려 성상의 웃음을 새롭게 해드리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장하게 여겨서 윤허하였다. 이장이 이에 말안장에 걸터 앉아서 전후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에 채찍을 가하며 달리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노인이 원기가 왕성하구나."
하고 특명으로 자급(資級)을 올려 주게 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자급은 이미 정헌 대부에 이르렀으나 다만 실직(實職)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자급은 더 올려 주지 말고 다음날 정사(政事) 때에 실직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고, 또다시 편추(鞭蒭)228) 와 살수(殺手)229) 등의 잡기(雜技)를 시험하게 하고, 이어 편전(片箭)230) 을 시험보이고, 또 내일 친히 임하겠다는 전교를 내렸는데, 김수항이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8월 10일 임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잡기(雜技)의 시예(試藝)를 마치고 수석(首席)을 한 양선한(楊選漢)·이지학(李之㰒)·박장세(朴長世) 등에게 모두 수령(守令)을 제수하니, 견식이 있는 자들은 모두 말하기를, ‘백성들의 즐겁고 괴로움이 수령들에게 달린 것인데, 양선한 등은 다만 한때의 무예(武藝)로써 곧바로 목민(牧民)하는 임무에 임명되었으니 이러한 일은 전일에 없었던 것이다.’고 하였다.
8월 12일 갑자
유성(流星)이 헌원성(軒轅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별시 문과(別試文科)에서 민진장(閔鎭長) 등 10명을 뽑았다.
8월 14일 병인
엄집(嚴緝)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정재숭(鄭載嵩)이 여러 번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렇게까지 굳이 사직하니 본직(本職)만은 우선 면세시켜 경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겠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청대(請對)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지난해 칙사(勅使)가 돌아갈 적에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증(李增)이 장황하게 치계(馳啓)한 말에, ‘칙사가 가질 말[馬]을 본 고을에서 기르고 있었는데, 범에게 물려서 많이 죽었습니다.’라고 하였었습니다. 그 뒤에 곡절을 자세하게 들어 보았더니 말이 죽은 것은 본래 범에게 물려서 죽은 것이 아니고 대개 말 기르는 것을 감독하는 관원이 밤에 술에 취해서 말을 붙잡으려고 할 적에 한 마리의 말이 놀라서 뛰어 나가자, 많은 말들이 모두 놀라서 도망해 가다가 강물에 뛰어들어서 대다수가 죽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증은 사건이 생길까 염려가 되어서 범에게 물려 죽었다고 핑계를 대고서 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금강산의 범을 현상금을 주고 잡아오게 하여 칙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다행하게 그들의 트집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초에 이증이 만약에 사단이 발생할 것을 염려했으면 한편으로는 임시 방편으로 그들에게 말해 주고, 한편으로는 사실대로 조정(朝廷)에 치보(馳報)했어야 옳았을 것인데, 시종(始終) 조정까지 함께 속였으니, 이는 지극히 형편 없는 짓이었습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이세백(李世白)은 나중에야 그 실상(實狀)을 들어 알고서 처음에는 치계(馳啓)하여 논죄(論罪)하려고 하였으나, 일이 번거롭게 될 우려가 많으므로 우선 다른 일로써 논계하여 파직시키고, 이어 개인적인 편지로 신 등에게 문의하여 바야흐로 그 당시의 여러 감색(監色)들을 잡아다가 죄상을 밝힐 계획을 하려고 하였었는데, 신이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였더니, 모두가 말하기를, ‘지금 만약에 감색을 신문 조사하게 되면 멀고 가까운 지역을 막론하고 번거롭게 될 염려가 없지 않은데, 일이 이미 번거롭게 되면 반드시 저들이 의심을 일으키는 일이 생길 것이다.’ 하므로,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아직 신문 조사하는 일은 보류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증이 전후에 속인 죄상에 대해서는 성상께 아뢰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에 나도 범에게 물렸다고 하는 것을 믿었었는데, 이제 대신이 아뢴 말을 들으니 이증이 한 행위는 매우 형편 없는 짓이었다. 마땅히 잡아다가 신문하여 죄를 논정(論定)해야 할 것이나, 일이 번거롭게 될 성격이므로 끝까지 다스릴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죄상을 논한다면 또한 파출하는 정도로 그칠 수는 없으니, 이증은 영구히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8월 16일 무진
공홍도(公洪道) 내의 각 고을에 이달 이후에 찬 바람과 찬 비가 연일 크게 내렸고, 은진(恩津) 사람 정시진(鄭時進)이 길에서 찬비를 맞고 얼어 죽었는데, 도신(道臣)이 그 사실을 알렸다.
8월 17일 기사
유성(流星)이 오거성(五車星)에서 나왔다.
8월 19일 신미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승정원(承政院)에서는 매사에 힘쓰고 경계할 것을 아뢰었고, 옥당(玉堂)에서는 청대(請對)하여 매사를 두려워하고 반성할 것을 아뢰고, 이어 이징명(李徵明)의 삭직(削職)과 파출(罷黜)을 환수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경상도(慶尙道) 안의 각 고을에 큰 비가 쏟아져 내렸고 광풍(狂風)이 또 일어났으며, 우박까지 내려서 나무가 부러지고 기와가 날아가고 하여 마을의 인가가 거의 다 무너졌으며, 또다시 눈까지 내리는 재변이 생겨서 가을 추수를 기대하기 어려울 형편이었는데, 도신이 그 사실을 아뢰었다.
8월 20일 임신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아! 재앙이 일어나는 일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마는, 어찌 오늘날처럼 매우 참혹한 경우가 있었겠는가? 내가 왕위에 오른지 10여 년 사이에 두려워하고 놀랄 만한 재변이 난 것이 이루 다 손꼽을 수 없을 정도였으며, 게다가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팔도[八路]가 모두 그러하나, 저축한 것이 다 떨어져서 구제해 줄 대책이 없고, 밤낮으로 기대하는 것은 오직 농사가 잘 되기를 바랄 뿐이었는데, 불행하게도 바람과 서리와 우박과 눈의 이변(異變)이 가뭄과 장마가 계속된 뒤에 겹쳐 이르게 되어 가을 추수를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전야(田野)의 백성들은 어쩔 줄을 모르니, 백성의 부모가 된 내가 어떻게 해야 마땅할 것인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치 내가 슬픔을 당한 것과 같았었다. 그런데 뜻밖에 또 다시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변괴가 다시 이러한 때에 나타났으니, 아! 알 수가 없지만, 어떤 재앙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데에 숨어 있기에 하늘에서 재변을 내려 나를 경계시킴이 이렇게도 곡진(曲盡)하단 말인가? 하늘의 형상은 까마득하게 멀어서 비록 쉽사리 엿보아 헤아릴 수는 없는 것이나, 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잘못 되어 하늘의 재변이 위에서 반응을 나타내게 된다면, 오늘날에 재앙을 부르게 된 원인은 과인(寡人)이 재주와 덕이 없어 정령(政令)의 시행이 천심(天心)에 크게 부합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가 아님이 없는 것이다. 스스로 돌이켜서 허물을 반성하니, 더욱 조심스럽고 두려워서 먹고 잠자는 것까지도 편안하지 못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서(敎書)를 초안해서 마땅히 의정부(議政府)로부터 널리 직언을 구하여 나의 모자라는 점을 바로잡아서 하늘의 견책(譴責)에 보답하게 하라."
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에서 바로 성상의 하교(下敎)를 중외(中外)에 널리 전파하기를 청하여 두 번 아뢰어서 윤허를 받았다.
신익상(申翼相)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엄집(嚴緝)을 집의(執義)로, 임규(任奎)를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삼았다.
경상도(慶尙道) 김해군(金海郡)에 궁둔전(宮屯田)231) 으로 잘못 들어간 민간의 전지를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라고 특명을 내렸다. 이는 일찍이 정언(正言) 김우항(金宇杭)이 아뢴 바에 따라 본도(本道)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게 했더니, 궁가(宮家)에서 제방을 쌓는다는 핑계로 백성의 전지를 강제로 떼어갔으므로,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다.
문신(文臣)의 중시(重試)에서 신계화(申啓華) 등 7명을 뽑았다. 경신년232) 에 경화(更化)한 이후로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의 시험이 공정하다고 일컬었었는데, 이때 와서 고관(考官) 이언강(李彦綱)이 사람됨이 경솔하고 천박했으므로, 시권(試券)에 고교(考校)를 마치고 미처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발설하기를, ‘내가 어떤 글은 누구의 작품이라고 여겼었는데 맞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그러자 세상 사람의 비난이 시끄럽게 일어났었는데, 이 사람이 고관(考官)이 되면 문득 말썽을 일으키므로 세상의 지목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
8월 21일 계유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오늘날 나라의 형편은 극도로 위태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위로 쳐다보나 아래로 내려다보나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금년에 이르러서 온 나라[八路]의 재해는 사실상 백성[邦本]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계기가 달려 있는 문제인데, 8월에 눈이 내려 제비와 참새가 얼어 죽은 것은 과거의 역사에도 드물었던 일이니, 사람의 심정에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이 그 때문에 더 심했었는데, 뜻밖에 이번에 또 이렇게 예사롭지 않은 변괴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방금 성상께서 왕위에 오르시고 여러 현사(賢士)들이 보필하고 있는데, 어떻게 덕을 잃고 정치를 잘못하여 위로 천심(天心)을 거역함이 있었겠습니까? 진실로 그 원인을 추구해 보면 신과 같이 용렬한 자가 오래도록 정승의 지위를 탐하여 자리만을 지키고 앉아 어진 사람의 진출을 방해하여, 스스로 죄를 불러들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면직(免職)을 윤허(允許)하시고, 다시 나이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을 선택하셔서 백성의 생명을 구제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게 하시면, 진실로 만행(萬幸)이겠습니다.
재변을 종식시키는 방법에 있어서는 신과 같이 학식(學識)이 천박한 자로서는 실로 어두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경전(經傳)에 나타난 것으로 말씀드리면 옛날에 현철(賢哲)한 군왕이 재변을 만났을 적에 감응시킨 것은 그 방법이 별다른 것이 아니고 ‘하늘의 경계를 능히 삼가한다.’, ‘선왕(先王)의 정치(政治)를 닦는다.’, ‘몸조심을 하고 행실을 닦는다.’라고 한 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른바, ‘능히 삼가한다.’, ‘닦는다’라고 한 것은 그 일이 허다하게 있으나, 거짓말을 내세우지 않고 그 실상대로 다할 것을 힘썼으므로, 마침내 재앙을 바꾸어 상서가 되게 해서 다시 일어나는 아름다움을 이룩하였으니, 천인(天人)의 감응은 이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제 삼가 성상의 하교를 보니, 그 자신을 꾸짖고 도움을 구하며 신하들을 격려시킨 데 대해서는 매우 간절하고 애처로움을 더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곧 이 제거하려는 마음이 문득 제거시킬 수 있는 약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과연 능히 그러한 마음을 확대시키셔서 온갖 일에 이를 미루어 정성스럽게 실행하고, 유구(悠久)하게 보존한다면 하늘의 마음을 감격시켜 하늘의 큰 명령을 이어지게 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어찌 다른 데에서 구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내용으로 비답하였다.
북평사(北評事) 박태만(朴泰萬)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힘써 개유하여 보냈다.
임금이 지난날 친히 임어(臨御)하여 무재(武才)를 관람했을 적에 훈련 도정(訓鍊都正) 이지원(李枝遠)이 나이 늙었다는 핑계로 치사(馳射)·기추(騎蒭)를 하지 않았고, 어가(御駕)가 돌아간 다음에는 선전관(宣傳官) 오헌(吳巚)도 기추·치사할 때에 활을 버리고 화살을 던졌었는데, 하교하여 모두 추고(推考)하게 하였다.
8월 23일 을해
심유(沈攸)를 대사간(大司諫)으로, 김만길(金萬吉)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조상우(趙相愚)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8월 24일 병자
경사(京司)에 바쳐야 할 금년의 모든 신역(身役)을 면제시켰다.
8월 25일 정축
김우항(金宇杭)을 지평(持平)으로, 박신규(朴信圭)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응교(應敎) 이이명(李頤命)과 교리(校理) 조상우(趙相愚)·김창집(金昌集)·서문유(徐文𥙿)와 수찬(修撰) 김성적(金盛迪)이 응지(應旨)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첫머리에서 천명(天命)을 기원하고 소민(小民)을 화합시키는 도리를 말하고, 다음에 현재의 폐단 7개 조항을 말하고, 끝에서는 선왕(先王)이 재해를 만나 경비를 줄여서 나라를 살려내고 백성을 소생시킨 사실을 인용하여 오늘의 수성(修省)할 법으로 삼도록 하였는데, 그 7개 조항을 말하기를,
"1. 성상(聖上)의 학문이 그 근본에 힘쓰지 아니하여 뜻을 세움이 오랫동안 견디는 실상이 없고, 도(道)를 구함에 있어 분발(憤發)하는 성의가 없는 점.
2. 수포(收布)를 아무렇게나 매기는 폐단.
3. 충의위(忠義衛)의 대수(代數)를 한정(限定)하는 폐단.
4. 직첩(職帖)을 판 값으로 백성에게 진휼(賑恤)해 준 쌀을 가을에 다시 받아들이는 폐단.
5. 곡식을 바치고 직첩(職帖)을 받은 자들을 충장위(忠壯衛)에 충정(充定)시키는 폐단.
6. 궁궐의 단속이 엄하지 못한 점.
7. 은전을 베푸는 정도가 너무 지나치십니다.
하니, 무릇 수천 마디 말이었다. 비답하기를,
"재변이 매우 심하여 근심과 두려움이 바야흐로 간절하였었는데, 그대들의 경계하여 가르치는 차자(箚子)는 실로 나라를 근심하고 나를 사랑하는 성심에서 우러난 것으로서 지극히 간절한 논의(論議)가 아님이 없으므로,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마땅히 마음에 두고 잊지 않을 것이다. 차자 끝에 언급한 일도 【전 교리(校理) 이징명(李徵明)이 간언(諫言)으로 인하여 죄를 받았으므로 도로 거두기를 청한 것이다.】 마땅히 적절하게 조처하겠으며 그 밖에 변통할 수 있는 일들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나중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옥당(玉堂)의 차자를 가지고 【옥당의 차자는 비국(備局)에 회부시키라고 하였으므로, 이때 면대하여 품의한 것이다.】 나와서 아뢰기를,
"차자 중에 충의위(忠義衛)에 관한 일은 조처하시겠다는 하교를 받았으나, 그 중 직첩(職帖)의 값으로 받은 쌀은 매우 곡절이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백성에게 진휼하는 물품을 만약에 죽을 쑤어 주기로 한다면 원 회계부(元會計簿)에 수록된 곡물이더라도 마땅히 탕감해 주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직첩의 값으로 받은 쌀이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이미 건량(乾糧)233) 으로 나누어 주었으므로 처음에 조정의 사목(事目)에서 되[升]와 말[斗] 정도의 곡식을 아껴서가 아니라, 다만 각 고을에서 허실(虛實)을 서로 속이는 폐단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그 수량을 알고자 하여 반드시 도로 바치게 한 것입니다. 또 연달아 흉년을 만나다 보니, 앞으로 진구(賑救)해야 할 물자도 계속 잇대기 어려운 염려가 있으므로 갑자기 탕감할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금년에는 흉년이 매우 심하니, 탕감하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기도 합니다. 오로지 성상께서 재량하여 조처하실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 탕감해 주는 것을 어렵게 여긴 것은 그 다소를 헤아려서 아꼈던 것이 아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여러 도의 흉년이 이렇게 심하여 비록 원 회계부(元會計簿)에 수록된 곡물이라고 하더라도 다 바치기가 어려운 형편인데, 더구나 이렇게 사소한 칙첩 값의 쌀이겠는가? 탕감해 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곡식을 바치고 직첩을 받은 무리들을 충장위(忠壯衛)에 충정(充定)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신이 남쪽 지방에 있을 적에도 그 원망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체로 충장위의 역사(役事)는 본래 힘이 들지 않기 때문에 그 전부터 다만 전사한 사람의 자손들만을 입적(入籍)시키도록 하였으니, 나라에서 그들을 대우한 도리는 상당히 차이를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곡식을 바치고 직첩을 받은 무리들을 충장위에 충정시키는 것은 병진년234) 부터 비롯된 것으로서 고(故)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의 건의에 의하여 그 규정이 정해진 것입니다. 대개 그 뜻은 곡식을 바친 무리들을 비록 천역(賤役)에 충정시키는 것은 불가하나 전연 역사(役事)를 시키지 않을 수도 없으므로, 충장위에 예속(隸屬)시키게 한 것입니다. 그 본래의 뜻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나 백성들의 원통함을 일컫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변통하는 방법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도 면제시키라."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오늘날 성상께서 어공(御供)의 모든 물품과 모든 관아의 경비를 줄이지 아니한 것이 없으므로 다시 더 절약하여 줄일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아랫사람들의 희망하는 것은 오늘날의 용도를 마치 전쟁 중에 있을 때와 같이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궁가(宮家)에 내려 주는 물품을 일체 감손시킨 뒤에야 이것을 미루어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베풀 수가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평상시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절도있게 써야만 백성을 보전할 수가 있는 것인데, 더구나 이렇게 큰 흉년을 만나서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대신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진주(晋州) 등의 고을에 이달 초7일에 눈이 내려 제비와 참새가 얼어 죽었고, 영해(寧海) 등 다섯 고을에는 초7일에 바다가 넘쳐서 바닷가의 어민(漁民)의 집이 여러채 떠내려 갔으며, 서리와 눈, 바람과 비의 재앙으로 각종 곡식이 손상을 입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온 도의 백성이 떼 지어 모여서 울부짖는다고 도신(道臣)이 사실을 알렸다.
8월 27일 기묘
의금부(義禁府)의 계사(啓辭)에 의하여 죄인 허식(許植)·이귀점(李貴點)·서정일(徐廷逸)·이우영(李友英)·신이현(愼而賢)·한위겸(韓位謙) 등을 각별히 엄하게 형문(刑問)하도록 명하였다. 대체로 허식 등 5명은 서북(西北)의 변장(邊將)으로서 삼군(蔘軍)을 월경(越境)하여 보냈다가 구속당하여 벌을 받는 자들이다. 앞뒤에 형벌을 받은 것이 7, 8차였으나 한결같이 억울하다고 하므로, 모두 엄하게 심문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한위겸은 본래 중인(中人) 신분으로서 일찍이 잡직(雜職)을 지낸 자이다. 비리(非理)로써 송사하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업을 삼았으며, 또 임금의 비답(批答)과 열성(列聖)235) 의 수교(手敎)와 병조(兵曹)의 인신(印信)과 대간(臺諫)의 계사(啓辭)와 세계(世系)·공문(公文) 등을 가짜로 만들어 백성을 속이고 뇌물을 받았었는데, 그 사실이 드러나자 형을 받게 된 것이다.
함경 남도 암행 어사(咸鏡南道暗行御史) 최규서(崔奎瑞)가 들어와서 서계(書啓)하기를,
"인삼 판매를 금지시킨 한 건은 금년에 처음 생긴 사건이기 때문에 관리들이 단속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으며, 변방 지역의 백성도 법을 두려워할 줄을 알고 있으니, 그전처럼 제멋대로 하는 폐단은 없을 듯합니다. 다만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두 고을은 지역이 항상 일찍 춥기 때문에, 거기에 사는 백성들은 상마(桑麻)236) 를 생업(生業)으로 삼지 않으며, 또 어염(魚鹽)237) 의 길도 끊어졌으므로, 다만 초피(貂皮)와 인삼의 이익으로 생활 밑천을 삼아 왔었는데, 이번에 나라의 금령(禁令)이 너무 엄하여 모두 다른 데로 흩어질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이 실로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방수군(防戍軍)의 입번(入番)을 청하는데, 대체로 남쪽 지역 군인이 방수하러 오게 되면 양식을 운반하기가 어려워서 혹은 소금과 베로써 바꾸기도 하므로, 토민(土民)들이 그로 인해 없는 것을 무역하고 있으니, 그보다 더 좋은 계책은 없습니다."
하였다.
8월 28일 경진
최규서를 헌납(獻納)으로, 조상우(趙相愚)를 부응교(副應敎)로, 신계화(申啓華)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재변으로 인하여 사면하기를 청했는데, 임금이 위로하고 개유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오늘날 백성들의 원망은 수포(收布)를 아무렇게 매기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은 없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을 풀어 주고 화기(和氣)를 이르게 하려면 이 일을 변통시키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건의한 것은 바로 나의 뜻에 부합한다. 속전(贖錢)을 거두는 한 건은 빨리 탕감하게 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특별히 상교(上敎)로 중외(中外)에 반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마침내 비망기(備忘記)를 추후(追後)하여 내려서 이르기를,
"처음에 이정청(釐正廳)을 설립할 적에 사목(事目)을 별도로 만들어서 무릇 아무렇게나 종속(從屬)시키는 자는 모두 사변율(徙邊律)을 적용시키게 했는데, 그것은 대체로 간사한 행위를 방지하고 폐단을 막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나, 한편 생각해 보면 이렇게 재변이 매우 참혹하고 농사가 아주 흉년이 든 때를 당하여 허다한 사람에게 한결같은 법을 적용시켜 조금도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이는 아마도 진휼(軫恤)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또한 화기(和氣)를 이르게 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이번에 범죄로 전가 사변(全家徙邊)이나 죄를 감등(減等)시켜 주는 유(類)에 대해서는 모두 탕감하여 조정의 관대한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고, 임금이 이어 하교하여 흉년으로 인한 호남(湖南) 지역에는 삼명일(三名日)238) 에 진상(進上)하는 물품을 명년 가을까지 한하여 특별히 탕감하게 하였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이징명(李徵明)의 상소(上疏)는 말이 비록 망령되고 경솔하였지마는, 이미 응지(應旨)에 의해 나온 것이므로, 벌을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재변을 만나 구언(求言)하는 때를 당하여 만약에 너그럽게 용서하여 언로(言路)를 열어준다면 어찌 성상의 덕(德)에 빛이 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징명이 죄를 받은 것은 본래 정도에 지나친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재변을 당한 때에 한편으로 구언(求言)하면서 한편으로 죄를 주는 것은 수성(修省)의 도리가 아니니, 특별히 관대한 법을 적용하여 환수(還收)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8월 29일 신사
유성(流星)이 북극성(北極星) 위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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