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임오
조의징(趙儀徵)을 정언(正言)으로, 심계량(沈季良)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숙(李䎘)이 면직(免職)되었다.
9월 2일 계미
남용익(南龍翼)을 형조 판서로, 윤계(尹堦)를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삼고, 이단하(李端夏)를 우의정으로 임명하고, 이사명(李師命)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강화 유수(江華留守)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불에 탄 민가(民家) 20여 호(戶)를 본부(本府)로 하여금 전례에 따라 구휼(救恤)하게 했다.
9월 5일 병술
유성(流星)이 천창성(天倉星) 위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다.
박태상(朴泰尙)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윤지익(尹之翊)을 지평(持平)으로, 김우항(金宇杭)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도총 경력(都摠經歷) 이현성(李玄成)·이지학(李之㰒) 등을 추고(推考)한 함답(緘答)에 장형(杖刑) 80을 속전(贖錢)으로 거두는 율(律)로 정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분간(分揀)하라."
하였다. 대개 이현성(李玄成) 등은 7월 초3일에 감군(監軍)으로 수점(受點)239) 하고, 이튿날 새벽에 감군패(監軍牌)를 받들고 돈화문(敦化門)으로 들어가 금천교(禁川橋) 위에 이르니, 여러 승지들이 금호문(金虎門)에서 막 승정원으로 들어가려다가 뒤에서 가금(呵禁)시켰으나 이현성 등은 어패(御牌)를 받들어 모셨기 때문에 즉시 물러서지 아니하였다. 승지 임상원(任相元)과 신엽(申曅) 등이 성을 내어 추고(推考)할 것을 계청(啓請)하기를,
"오늘 여러 승지가 차례로 서서 들어올 적에 도총 경력 이헌성 등이 거만한 태도로 곧장 들어가면서 앞길을 가로막았으니, 그 어리석고 외람되어 일의 체모를 모르는 행위는 매우 놀랄 만합니다."
하였다. 대체로 감군패(監軍牌)는 어압(御押)이 있으므로 비록 왕자(王子)와 삼공(三公)이라 하더라도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피하는데, 이는 거기에 소중한 임금의 도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임상원 등은 어압(御押)의 존귀함은 생각지 아니하고 다만 이현성 등을 비천(卑賤)한 무부(武夫)로만 인정하여 거만한 태도로 가금(呵禁)하였으며, 이는 먼저 체통을 잃은 것인데도 도리어 이현성 등을 가리켜 일의 체모를 모른다고 하면서 방자스럽게도 추고하기를 청하였으니, 만약에 불경죄로써 논한다면 임상원 등은 반드시 벌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간(臺諫)은 이를 탄핵할 것은 생각지 않고 마침내 이현성 등이 마치 죄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하여 장률(杖律)로 결정하였고, 임금도 그 경위를 살피지 아니하고 다만 분간(分揀)하라는 하교(下敎)를 내렸으니, 듣는 이들이 놀라서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령(掌令) 이국화(李國華)·원진택(元振澤)과 지평(持平) 이덕성(李德成)이 아뢰기를,
"지금은 천재(天災)가 거듭 이르러서 백성의 생명이 거의 죽게 된 때이므로, 바로 성상께서 지성으로 백성을 구제하여 다른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시기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듣건대, 궁중 안에 요즈음 집을 짓는 일이 있어 목재(木材)를 실어 오고 목수(木手)를 불러들이는데, 반드시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 하도록 하여 외부 사람들에게 알지 못하도록 했다고 하는데, 그 일이 사실이라면, 이는 하늘을 순응(順應)하여 성실하게 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대성인(大聖人)의 광대하고 광명한 도리(道理)에 있어서도 어찌 불만스러운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천둥의 이변(異變)이 바로 천지(天地)가 수장(收藏)240) 할 시기에 일어났으므로, 근심스럽고 두려운 심정이 이르지 않음이 없어서, 감히 외부에서 들리는 소문으로써 이렇게 면계(勉戒)합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궁중 안에서 집을 짓는 크고 작은 일들을 일체 중지시키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말단의 일은 그것을 전해 듣는 것이 사실과 어긋난 데 지나지 않는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렇게 경계하는 말을 해주니, 이 또한 걱정하고 사랑해 주는 성심에서 우러난 것이라 어찌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궁중에 마침 집을 짓는 일이 있었던 것을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는 임금이 궁인(宮人) 장씨(張氏)를 위하여 별당(別堂)을 짓는 것인데, 외부 사람들의 귀를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 목재를 운반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이덕성(李德成)의 계사(啓辭)내용이 이와 같았다."
고 하였다. 그런데 임금은 전해 들은 것이 사실에 틀린다고 핑계를 하고서 마침내 그 역사(役事)를 중지시키지 아니하였다.
9월 6일 정해
달이 남두(南斗)를 침범했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는데, 대사성(大司成) 김창협(金昌協)이 청대(請對)하여 함께 들어왔다. 이때 대제학(大提學) 이민서(李敏敍)가 여러 번 과시(科試)의 패초(牌招)를 어겼는데, 그것은 지난해에 이정명(李鼎命)의 일로 인하여 시관(試官)을 맡기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옥당관(玉堂官) 조상우(趙相愚)가 논박(論駁)하여 배척하니, 이민서는 더욱 불안하여 오래도록 직무를 수행하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와서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변통해 줄 뜻으로 아뢰니, 임금이 문형(文衡)을 체임(遞任)시키고 본직(本職)인 이조 판서의 직도 체임시키게 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신정(申晸)이 아뢰기를,
"강도(江都)에 돈대(墩臺)를 설치한 후로는 모든 군기(軍器)중에 장총(長銃)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 돈대는 서로의 거리가 매우 멀어서 늘 조총(鳥銃)을 쓰게 되나 멀리 미치지 못하므로, 반드시 장총이라야 제대로 쓸 수가 있는데 한 돈대에 비치된 것은 10자루에 불과하니, 그 수효가 매우 적습니다. 바야흐로 더 설치하고자 하오나 들어가는 철탄(鐵炭)을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이민서(李敏敍)가 일찍이 본부(本府)에 부임했을 적에 철탄을 준비하기 위하여 값을 약간 지급하면서 사람을 모집하여 마련하고 일을 마친 다음에 이를 계문(啓聞)하여 상을 주기를 청하였으나, 아직까지 한 사람도 상을 받은 자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지금도 그 방법에 의하여 모집하려고 하나 자원하는 자가 없으니, 진실로 개탄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응모하게 하고 그 공로를 상주지 않는 것은 타당한 일이 못된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제때에 수용(收用)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강도(江都) 나루의 배는 그 수효가 매우 적습니다. 전선(戰船)에는 군병(軍兵)만 실을 뿐 소나 말은 실을 수가 없으니, 반드시 나루터에 배를 많이 준비해야만 위급할 때에 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들으니 전라도(全羅道) 좌수영(左水營)에 배를 만드는 목재가 바람에 의해 꺾어진 것이 매우 많다고 하니, 이제 그 중에서 배 만드는데 알맞은 목재를 가려서 나룻배 수십 척을 만들어 운반해 온다면, 일이 매우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김창협(金昌協)이 아뢰기를,
"재(齋)241) 를 지키고 있는 유생(儒生)은 다만 향중(鄕中)의 원점(圓點)242) 을 찍는 무리들이고, 경중(京中)의 선비는 한 사람도 들어가 지키고 있는 자가 없습니다. 성상(聖上)께서 만약에 별도로 권장하는 방도가 있으시면 거재(居齋)243) 하는 선비들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하고, 김수항(金壽恒)은 아뢰기를,
"지난 조종조(祖宗朝) 때에는 선비만을 위해서 권장했을 뿐만이 아니고, 오로지 성묘(聖廟)를 지키는 중요성을 위하여 혹은 승지(承旨)를 특별히 보내기도 하고, 혹은 액정서(掖庭署)의 하인(下人)으로 하여금 가서 식당의 도기(到記)를 상고하여 즉시 제술(製述)하도록 명하고 특별히 직부(直赴)244) 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으며, 또 특명을 내려 갑·을·병의 과거 제도를 별도로 만들어 방방(放榜)한 일이 있었으므로 유생 모두가 기뻐하여 기꺼이 거재(居齋)했었으나, 지금은 시골 선비들 약간 명 외에는 재(齋)를 지키는 사람이 따로 없으니, 근래에 이러한 폐단은 진실로 염려가 됩니다. 그러니 격려하는 방도를 별도로 세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들을 권장시키기 위한 특별 과거는 지난 가을에 이미 시행했다. 그러나 내가 일찍이 조종조(祖宗朝) 때의 정사(政事)를 살펴보니, 그러한 특별 과거는 자주 있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유신(儒臣) 이이명(李頤命)의 건의에 의하여 무릇 탑전(榻前)에서 전계(傳啓)하는 것은 문자로 아뢰지 아니하고 말로 해석하여 아뢰도록 규정을 정했었는데, 장령(掌令) 원진택(元振澤)이 일을 아뢸 적에 겁을 먹고 당황하여 계사(啓辭)의 말을 만들 적에 반수 이상이나 누락시켰고, 또 제대로 말로 해석하여 아뢰지 못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대간(臺諫)이 일을 아뢸 적에 반드시 말로 해석하여 아뢰게 했는데, 이 대간만이 문자로 아뢰며 또 누락시킨 것이 많이 있으니,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원진택이 두려워하며 대답할 바를 모르다가 겨우 아뢰기를 마치고 물러갔다. 헌납(獻納) 최규서(崔奎瑞)가 앞서의 계청(啓請)을 되풀이하고 심지어는 오정위(吳挺緯)를 먼 곳으로 고쳐 유배(流配)시키자고까지 하였는데, 임금이 관례대로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오정위를 이배(移配)시킬 적엔 오정위를 용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바닷가의 죄인을 모두 한 고을에 겹쳐 유배시킬 수가 없으므로 유배 장소를 우연히 장수(長水)로 정한 것이었는데, 대간들이 여러 달을 두고 고집스럽게 논쟁(論爭)하면서 압송(押送)하는 도사(都事)를 중로(中路)에 머물게 하여 주전(廚傳)245) 하는 폐단이 있게 하였으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사(都事)를 중로에 오래 머물게 한 것도 폐단이 있는 것이다. 오정위를 다른데로 유배시키라."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원진택(元振澤)은 문자로 전계(傳啓)하였고 또 김환(金煥)의 계사(啓辭)에 대해 전연 말을 만들 줄 몰라 성상의 하교까지 계시게 하였으니, 청컨대 체직(遞職)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권시경(權是經)을 승지(承旨)로, 김우석(金禹錫)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여성제(呂聖齊)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민서(李敏敍)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오두인(吳斗寅)을 판윤(判尹)으로, 강현(姜鋧)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9월 9일 경인
지평(持平) 이덕성(李德成)이 아뢰기를,
"대과(大科)·소과(小科)의 시험장에서 자못 사람들의 말썽이 있었는데, 이는 대개 경솔하고 천박한 무리들이 시험관의 책임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모두 이언강(李彦綱)이 비방을 얻은 것은 이번 별시(別試) 때문이라고 지목하였다.】 지금부터는 시험을 담당하는 사람을 반드시 신중하고 공정한 사람으로 가려 의망(擬望)해서 시험장을 엄하게 감독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게 하소서. 현재 재변(災變)과 흉년이 매우 참혹하여 백성의 목숨이 거의 끊어지게 되었으니, 경기(京畿)와 함경도(咸鏡道)의 내수사(內需司) 〈노비(奴婢)〉 추쇄(推刷)246) 를 일체 중지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어제(御題)를 내어 반궁(泮宮)247) 의 유생(儒生)에게 시험을 보이고 1등 한 사람 이언기(李彦紀)·박사일(朴思一)에게 급제(及第)를 하사했다.
박세채(朴世采)를 대사헌(大司憲)으로, 박태상(朴泰尙)을 도승지(都承旨) 겸 예문관 제학(兼藝文館提提學)으로, 이언강(李彦綱)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제주도(濟州島)에서 기르는 소와 말이 얼어죽은 것이 2천 8백 90마리에 이르렀다.
9월 11일 임진
임금이 친히 초복(初覆)248) 을 시행하였다.
9월 12일 계사
사헌부(司憲府)에서 앞서의 계청(啓請)을 되풀이하였는데, 임금이 시관(試官)을 가려 의망(擬望)하는 일만을 윤허하였다.
하교하여 경기(京畿)와 함경도(咸鏡道) 각 관아의 노비 추쇄(推刷)를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9월 13일 갑오
대사헌(大司憲) 김창협(金昌協)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십수 년 동안에 가뭄과 장마의 피해와 바람과 벼락, 그리고 서리와 우박의 재앙과 별들의 이변과 기후의 이상과 요사스러운 인물들이 해마다 겹쳐서 나타나 천이나 백으로 헤아릴 정도입니다. 그러한 이변을 당할 때마다 성상(聖上)의 마음은 문득 놀라셔서 자신의 죄책으로 돌리시며 직언(直言)을 구하시는 하교와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근심하시는 말씀을 한해 중에도 여러 차례 내리셨는데, 전후에 내리신 성상의 하교를 살펴보건대 두려워하시는 뜻과 애통해하시는 말씀은 굳이 오늘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이미 지극하였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은 속일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신은, ‘하늘이 진실로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사람도 속일 수가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근세(近歲)에 애절한 하교가 내렸을 적에 중외(中外)에서 이를 예사롭게 보고 막연히 반응이 없는 것은 전하에게서 애당초 성심(誠心)이 없으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심정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은 청컨대 지금부터는 단순하게 말과 글로써 하늘에 대응하고 사람을 감동시키려는 도구로 믿지 마시고, 근본의 절실한 처지에 깊이 유념(留念)하신다면, 재앙을 소멸시킬 수도 있고 화란(禍亂)을 구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연(經筵)의 한 가지 일로 말씀드린다면 전하께서 경연에 임하여서 강독(講讀)하심이 부지런하시지 않은 것은 아니나, 오로지 침묵만을 숭상하시고 어려운 점을 물으려고 하지 않으시는데, 아마도 이러한 병근(病根)249) 은 성상의 재질이 현명하시면서도 깊이 탐구하심은 부족한 데서 연유한 것 같습니다. 그 성현(聖賢)의 경전(經傳)을 읽으실 적에도 대략 강독하여 이해가 되시면 문득 이미 다 알았다고 여기고, 그 중에 무한하게 이치를 따질 것과 무한하게 완미(玩味)해야 할 곳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여 무릇 매일같이 응접(應接)하는 기무(機務)의 잘되고 잘못됨과 신료(臣僚)들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점과 언론(言論)의 시비와 의견의 차이에 대해서 마땅히 낱낱이 강구(講究)해야 할 것들도 대체로 깊이 생각하시거나 밝게 분변하지 않으시니, 이 또한 뜻을 세움이 독실하지 못하고 도(道)를 구하는 마음이 성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어물어물 구차하게 지내다가 사정(私情)에 치우치고 인색함에 얽매이는 단서로 마침내 그 많은 것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되면, 따라서 이를 숨기고 덮어두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려고 하실 것이니, 이 때문에 전하의 마음이 안과 밖이 통달하기를 청천 백일(靑天白日)처럼 환하지 못하고 때로는 혹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날 사헌부(司憲府)에서 논계(論啓)할 때에 궁중 안에 집을 짓는 일을 말씀 드렸을 적에 전하께서는 그것을 전해 들은 것이 사실과 틀린다고 하시면서도 오히려 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이시고 언짢게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신이 처음 비답(批答)을 읽고서는 성상께서 마음을 비우시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시는 미덕(美德)을 가만히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헌부의 신하가 들은 것이 과연 잘못됨이 없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으니, 궁중 안에서 실제로 집을 짓는 일이 있어서 큰 목재를 구하는 목수들이 자못 민간 사이를 출입하고 있는데, 대간(臺諫)들이 말한 바, ‘목수를 불러들이고 목재를 실어 나를 적에는 반드시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에 한다.’는 말이 진실로 거짓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일로써 살펴본다면 전하께서 전날에 비답하신 것은 다만 겸손한 말로써 스스로를 속였을 뿐이고, 처음부터 마음을 비우고 들어서 채택할 실상은 없었던 것입니다. 대체로 군주의 은미한 한 가지 생각이라도 혹시 성실하지 못함이 있게 되면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진실로 열 손가락이 가리키고 열 눈으로 보는 것과 같으므로 가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위로는 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하시고 아래로는 스스로 허물하는 하교(下敎)를 내리시어 경계하시는 뜻을 보여 주셨으면서도 궁중 안에는 급하지도 않은 역사(役事)를 일으켜 놓고서 밖으로는 이를 막아 가리우는 말씀을 하시어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시니, 저 내려다보고 계신 하늘이 어떻게 전하께서 하시는 일을 믿고서 노여움을 돌이켜 기뻐하고 재앙을 바꾸어 상서가 되게 하려 하겠습니까?
지난번에 이징명(李徵明)의 상소(上疏)가 성상의 노여움을 거듭 촉발시켰었는데, 그때 성상의 하교는 오로지 척리(戚里)250) 문제 하나만으로 죄를 주었으며, 그 아래의 한 가지 일 【곧 장녀(張女)를 쫓아 낸 일이다.】 은 곧 잘못 전해 들은 것이라고 핑계를 대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고 없었는지는 외부 사람으로서는 감히 알 수 없는 것인데도 민간에서는 소문이 쫙 퍼져서 모두들 궁중에는 사실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여기는데, 전하께서 이를 숨기는 것이고, 또 이징명에게 성을 내신 것은 사실상 이 일이 있었는데도 이미 숨겨야 할 것이므로 다른 일로써 죄를 주었다고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서는 후궁(後宮)으로서 가까이 사랑할 사람이 간혹 있을 수도 있겠으나 진실로 관어(貫魚)251) 를 순서대로 할 수 있게 하여 종사(螽斯)252) 의 경사가 있게 하고 미색(美色)에 마음이 현혹될 근심과 치우치게 사랑에 빠져 은총을 열어 준다는 비난을 없게 한다면, 이것이 성덕(聖德)에 무슨 결점이 되겠기에 반드시 그 일을 숨겨야 하겠습니까? 심지어 사의(私意)가 크게 행해지고 공도(公道)가 펼쳐지지 않아서, 등용하고 버리는 것은 모두 청탁을 따르고 형벌과 송사는 대다수가 뇌물에 의해 좌우되어, 붕당(朋黨)끼리 알력이 생기고 논의(論議)가 편파적으로 일어나는데, 이는 어찌 전하께서 스스로 사심(私心)을 제거하지 못하고 항상 치우치게 얽매임이 많아서 공평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그 원인을 살펴서, 신이 말씀드린 근본의 절실한 곳으로 빨리 되돌리셔서 한결같은 생각으로 뜻을 두어 규모를 정하소서. 그런 다음 먼저 글을 읽고 학문을 강구하며, 이를 실천에 옮기시되 조금이라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으면, 문득 사색(思索)을 더하여 몸소 이를 체득하고 조용히 탐구하여 마음으로 이해해서 반드시 성현(聖賢)의 말씀과 도리(道理)의 실상이 나의 마음과 눈에 환해져서 영롱하게 탁 트이고 막힘이 없게 해야 합니다. 이를 미루어 정치에 임하는 일에 대처하며 말을 듣고 사람을 관찰하는 데 이르면, 정밀하게 생각하고 명백하게 분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공과 실패, 옳고 그름, 어질고 간사함의 소재(所在)를 찾아서 적절하게 조처한다면 궁리(窮理)의 공부가 여기에 이르게 되어, 내 마음으로 아는 것이 그 기능을 다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망령되게 스스로 겸손만 하지 마시고, 새로운 각오로 분발하셔서 깊이 체득하고 자주 반성하시어 힘써 실행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나라를 근심하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경계해 주고 가르쳐 준 것은 간절하고 지극한 논의가 아님이 없으므로, 내가 가상(嘉尙)하게 여기는데, 마음에 새겨두고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이징명(李徵明)을 죄준 것은 사실 척리(戚里)의 일로 말미암은 것인데, 상소 중에서 말한 것은 너무 지나친 억측으로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장계(狀啓)하기를,
"수원(水原) 등 아홉 고을에 천둥과 번개가 크게 일어나고 비와 우박이 번갈아 쏟아져서 큰 것은 밤톨만 하고 작은 것은 새알만 하여 곡식들이 가장 큰 손상을 입었습니다."
하였다.
9월 14일 을미
박세당(朴世堂)·성호징(成虎徵)을 승지로, 임영(林泳)을 사간(司諫)으로, 이익수(李益壽)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9월 15일 병신
진천 향교(鎭川鄕校)의 복성공(復聖公)253) 과 아성공(亞聖公)254) 의 위판(位版)이 부서졌다. 경시관(京試官)255) 김몽신(金夢臣)이 과거를 보이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해 계품(啓稟)하였다. 대신들이 모두들 이미 결정한 과거이므로 중지할 수가 없다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9월 16일 정유
북도(北道)에서 정시(庭試)를 특별히 실시하여 문과(文科)에서 한원(韓沅) 등 3명을 뽑았다.
9월 17일 무술
엄집(嚴緝)을 집의(執義)로, 이의창(李宜昌)을 지평(持平)으로, 김만중(金萬重)을 대제학(大提學)으로, 이세백(李世白)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창집(金昌集)을 헌납(獻納)으로, 윤진(尹搢)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조성보(趙聖輔)를 강양도 관찰사(江襄道觀察使)로 삼았다.
9월 18일 기해
임금이 친히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9월 20일 신축
유성(流星)이 북극성(北極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고, 북두성(北斗星) 위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조종저(趙宗著)를 사간(司諫)으로 정래상(鄭來祥)을 장령(掌令)으로, 이제민(李濟民)을 지평(持平)으로, 서문유(徐紋裕)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9월 21일 임인
유성이 천창성(天倉星) 위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고, 장성(張星) 아래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다.
주강에 나아갔다. 판부사(判府事) 이상진(李尙眞)이 나아가 많음을 내세워 은퇴하기를 청하며 상세하게 말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상진이 이에 아뢰기를,
"팔도(八道)의 흉년은 경신년256) 과 신유년257) 보다 더 심합니다. 지금 백성을 구제하는 일로써 급선무를 삼아야 할 것인데, 요즈음 하는 일들은 합당하지 못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사직단(社稷壇)에서 비오기를 빌려고 할 적에 이미 재실(齋室)에 들어가서 생폐(牲幣)258) 를 차리려고 하다가 마침 비가 쏟아져 내리니, 즉시 법가(法駕)259) 를 돌리셨고, 승정원(承政院)의 여러 신하들은 축문(祝文)의 내용을 고칠 방법은 생각지도 않고 즉시 난가(鑾駕)260) 를 돌리기를 청하였으니, 하늘을 섬기기를 성실로써 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무재(武才)를 시험 보이는 일은 그것이 성대하고 화락한 일이므로 그 일을 한 번 치르게 되면 무한한 경비가 들지만, 그것을 가지고 진구(賑救)에 옮겨 쓴다면 반드시 보탬이 될 것인데도, 지금은 도리어 긴요치도 아니한 곳에다가 헛되게 소모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자주 실시하는 것에 이르러서도 근래에 고질적인 폐해가 되어오다가 올해는 더욱 심합니다. 이러한 흉년을 만나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은 생각지 않고 서둘러 겹쳐서 시행하고 있으니, 신은 실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진천 향교(鎭川鄕校)의 변고(變故)는 매우 놀랍고 참혹한 일입니다. 옛날에는 종묘(宗廟)에 재앙을 당하면 3일 간 곡(哭)을 하였는데, 이번 성묘(聖廟)의 변고는 종묘의 재앙보다 못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사리(事理)로 보아 어찌 태연스럽게 과거를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남도(南道)와 북도(北道)에서 과거를 보이는 것은 비록 위로해 주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본도(本道)에도 심한 흉년이 들었는데, 경시관(京試官)을 비롯한 중신(重臣) 외에도 대우해야 할 인원이 많으니 그 폐단을 추측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반드시 용도 절약을 우선한다면 충분히 지탱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제사 음식물과 어전에 바치는 물품이라도 적절하게 줄여하 할 것입니다. 조정(朝廷)에서는 또 망국(亡國)의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동서(東西)로 당파가 나뉘어진 것은 선조(宣祖) 때부터 비롯된 것인데, 전해 내려오는 폐해가 오늘날에는 극도에까지 이르러 색목(色目)261) 에 구애를 받아 전적으로 한쪽만을 배격하고 있습니다. 영남(嶺南) 지역은 본래부터 인재의 부고(府庫)라고 일컫는데도 경신년262) 이후로는 한 사람도 등용된 사람이 없었으며, 비록 등용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시론(時論)에 아부하는 무리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것은 제대로 등용된 것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일찍이 최관(崔寬)은 청렴 결백한 것으로써 아뢰어져 관계(官階)가 승진되었는데 이 사람은 《주역(周易)》을 깊이 연구하여 상당히 체득(體得)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개강(開講)하는 날을 당하여 초빙하는 것이 매우 합당하겠습니다. 박신규(朴信圭)는 관직(官職)에 있을 적에 아주 청렴 결백하였으며 지조가 굳고 확실합니다. 만약에 그의 단점을 논하더라도 그것은 고집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찍이 우의정(右議政) 이단하(李端夏)와 서로 겨루었으나 박신규는 잘못이 없는 것 같으니, 우의정이 조정에 들어온 후에 만약 박신규를 버린다면 인심(人心)을 복종시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여공저(呂公著)263) 는 정승이 되었어도 가종민(賈種民)을 버리지 아니하였습니다. 가종민은 소인(小人)이었는데도 오히려 버리지 아니하였거든 하물며 박신규 같은 자이겠습니까? 유헌(兪櫶)의 지조는 청렴 결백하고, 윤지완(尹趾完)의 대중을 통솔하는 재능과 지략은 모두 발탁하여 등용해서 선임할 만합니다.
홍우원(洪宇遠)의 상소(上疏)에서 《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를 인용한 것에 대하여 현재 말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성(慈聖)을 핍박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개 《주역》의 괘(卦)로써 자성(慈聖)을 거론할 경우는 곤괘(坤卦)만이 해당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홍우원은 가인괘(家人卦)를 인용하였으니, 이는 사실 잘못 인용한 것입니다. 가인괘의 단사(彖辭)에, ‘군장(君長)이 있으니 부모(父母)를 말함이다.’라고 하였는데, 홍우원이 인용한 것은 아마도 거기에서 나온 듯합니다. 그 본래의 심정을 구명(究明)해 본다면 자성을 핍박하는 말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성인(聖人)의 말씀에, ‘의심스러운 죄는 가볍게 처벌하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홍우원의 죄도 의심스러운 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나이 80세가 넘었고 귀양 간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전리(田里)에 돌아가 죽게 한다고 해도 관대한 성덕(聖德)에 해될 것이 없습니다. 민희(閔熙)의, ‘복선군이 있다.[福善在]’라고 한 말은 역적 허견(許堅)의 부자(父子)가 모두 죽은 다음에 나온 것이고 또 증거도 없습니다. 지극히 밝히기 어려운 죄를 가지고 오래도록 귀양살이를 시켰으니, 이제 와서 참작하여 조처하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참찬관(參贊官) 신계화(申啓華)가 아뢰기를,
"홍우원의 본정은 신이 비록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상소의 말이 자성(慈聖)을 범한 것이 없다고 하여 갑자기 석방하기를 청하는 것은 신으로서는 사실 옳은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검토관(檢討官) 김만길(金萬吉)은 아뢰기를,
"자성을 범한 말은 더할 수 없는 죄악인데, 대신이 이와 같이 아뢰니 신은 실로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이상진(李尙眞)은 아뢰기를,
"홍우원의 상소는 신이 비록 보지는 못하였으나, 그 내용을 들어 보니 그렇게 대단히 자성을 침범한 곳은 없었습니다."
하고, 김만길은 아뢰기를,
"이와 같은 죄는 결코 나이 많다고 하여 석방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신계화는 아뢰기를,
"홍우원은 한평생 경학(經學)으로 자처한 사람인데 어찌 가인괘(家人卦)를 모르고서 잘못 인용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상진이 아뢰기를,
"민희(閔熙)의, ‘복선군이 있다.’라고 한 말은 역적 허견(許堅)의 부자가 모두 죽은 다음에 나온 것이고 다른 증거가 없으며, 의심스러운 죄이어서 규명하기가 어려우니, 이 일로 벌을 주는 것은 아마도 지나친 처사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 해가 되었으니, 마땅히 참작해서 조처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신계화가 아뢰기를,
"그 당시에 증거가 있었으면 마땅히 국문을 했겠지만 다만 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 죄가 귀양 정도로 그친 것입니다. 이번에 대신들이 상세히 아뢴 것은 대체로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고 재이(災異)를 사라지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마는, 죄 있는 사람을 석방시키는 것이 어찌 하늘을 감응시키는 도리가 되겠습니까?"
하였다. 이상진이 또 아뢰기를,
"요즈음 대간(臺諫)들이 김환(金煥)의 일로써 달이 넘도록 논쟁(論爭)을 하며 고집을 부리고 있으나, 신은 아마도 무고죄(誣告罪)로 다스릴 필요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일찍이 인조(仁祖) 때에는 비록 무고한 자라고 하더라도 또한 죄를 주지 아니하였었는데, 그것은 대개 깊고 먼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말세(末世)를 당해서는 상변(上變)하는 길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 이상진의 나이는 73세였으니, 정력(精力)이 비록 강건(强健)하다고 하더라도 등대(登對)하는 기간 중에 아뢴 말이 수백 마디뿐만이 아니고 보면 그 중에 어찌 노망(老妄)한 것이 없을 수 있겠는가? 임금은 전례에 따라 비답을 내렸고 별로 채택한 일이 없었는데, 홍우원의 상소 내용이 자성(慈聖)을 핍박한 것에 이르러서는 더 할 수 없는 죄악인데도 불구하고 앞장서서 구제하고 나서면서 심지어 석방까지 청했다가 연신(筵臣)들에게 배척을 당한 다음에서야 마침내 상소를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민희(閔熙)의, ‘복선군이 있다.’라고 한 말은 예사로운 문제가 아닌데도 규명하기 어렵다고 핑계하고서 반드시 참작하여 조치하게 하고자 하는가? 아! 조정의 의논이 엇갈려서 시비가 도치(倒置)되고 인심이 거기에 빠져들어 눈치를 보는 것이 풍속을 이루었다. 나이 70에 무엇을 구하는 사람이기에 차마 이렇게 하는 거이며, 그리고 천리(天理)와 민이(民彝)264) 가 어찌 멸절(滅絶)하는 데 이르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시강관(侍講官) 조상우(趙相愚)는 마침내 한 마디의 말도 변명함이 없다가 이에 아뢰기를,
"새로 부임한 양서(兩西)265) 지방의 방백(方伯)은 모두 여론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윤계(尹堦)는 전에 강도(江都)를 맡았을 적에 뇌물 사건으로 탄핵을 받았었고, 황해 감사(黃海監司) 임규(任奎)는 일찍이 호남(湖南)을 안찰(按察)할 적에 자기 기첩(妓妾)의 병을 위하여 선화당(宣化堂)266) 에다 신사(神祀)를 설치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시 변방의 책임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상진(李尙眞)은 자못 변명하였으나 조상우는 다시 두 사람의 일을 더욱 강력하게 논핵하였는데, 임금이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뒤에 임규의 상소에 의하여 조상우가 일찍이 태인(泰仁)을 맡았을 적에 허위 기록한 사실이 들추어져서 도배(徒配) 형을 받게 되었다. 또 윤계의 아들 윤세기(尹世紀)가 자기 아버지를 위하여 신문고(申聞鼓)를 치고 억울함을 하소하자, 강도(江都)의 등록(謄錄)을 고찰해 냈는데 윤계가 당시 조처한 일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조상우는 사실과 틀리게 다른 사람을 논박했다는 책임을 물어 다시 파직되었다.
9월 23일 갑진
유성(流星)이 천중(天中)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들어갔다.
9월 24일 을사
부응교(副應敎) 조상우(趙相愚)와 부수찬(副修撰) 김만길(金萬吉)이 차자를 올리기를,
"지난날 경연석(經筵席)에서 판부사(判府事) 이상진(李尙眞)이 죄인을 석방하여 재앙(災殃)을 해소시키는 방책을 삼자고 하면서 이에 홍우원(洪宇遠)과 민희(閔熙) 등의 죄목이 분명치 않은 사실을 말하였는데 거기에 대해 신 김만길이 대략 변명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비록 두 사람의 범죄(犯罪)가 매우 중한 것은 알고 있아오나 민희의 옥사(獄事) 내용과 홍우원의 상소 내용은 잊은 것이 많이 있어서 명백하게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해와 달의 밝음으로 빠짐없이 다 환하게 비치고 계시나 혹 나이 많은 대신(大臣)의 말이라 하여 동요되거나 현혹됨이 있게 되면 그것이 세도(世道)에 해를 끼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지난날 성상(聖上)께서 어리신 나이로 즉위(卽位)하셔서 외롭게 상중(喪中)에 계실 적에 이정(李楨)267) 과 이남(李楠)268) 등은 왕실의 지친(至親)으로서 대궐에 출입하며 온 세상을 농락하였고, 심복들을 널리 심어 중외(中外)에 배치시켰으므로 나라 일의 위태로움이 잡아맨 기(旗)의 술과 같았으니, 홍수(紅袖)의 변고(變故)269) 는 단지 작은 사건이었습니다. 자성(慈聖)께서는 친히 스스로 임하여 하유(下諭)하시고 귀양 보내는 형률을 적용하여 조처하시니, 누가 감읍(感泣)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그런데 홍우원(洪宇遠)은 사당(私黨)을 구호(救護)하기에 급급하여 도리어 그 허물을 자성에게 돌리면서 감히, ‘불이과(不貳過)270) ’의 말로써 방자하게 글로 썼습니다. 그리고 그의 상소에서 인용한 《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의 말은 더욱 날조된 것으로서 의리에 크게 어긋납니다. 그리고 본괘(本卦)에 없는 삼종(三從)의 설271) 을 가지고 은연중 그 사이에 삽입(揷入)시켜 윤휴(尹鑴)가 말한 ‘조관(照管)272) ’이란 두 글자와 서로 표리(表裏)를 삼고 있으니 그 범한 죄값을 논한다면 죽어도 죄가 남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목숨이 붙어 있게 한 것은 사실상 형벌 적용에 크게 잘못된 것인데도 그를 구제하려는 말이 대신의 입에서 나오고 있으니, 마음속으로 놀랍고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홍우원의 상소 중에 대단히 많은 흉패(凶悖)스러운 말은 지금 낱낱이 제기할 필요가 없겠아오나, 다만 ‘불이과(不貳過)’라고 한 세 글자만 살펴보더라도 그것이 자성(慈聖)에게 허물을 돌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며, 그것이 자성을 범한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대신은 본래의 상소는 보지 못하였고 사람들의 말이 이와 같다고만 하니 도대체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같이 있는 것인데, 진실로 붕당에 치우쳐 법을 굽혀서 홍우원을 비호하려는 자가 아니라면 처음에 형벌을 제대로 적용시키지 아니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소인이 간사한 말을 만들어내어 대신의 귀에 들어가게 했기에 대신이 다시 차근차근히 구명(究明)하지도 않고서 갑자기 탑전(榻前)에서 아뢰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신은 또 민희(閔熙)가 ‘복선군이 있다.’라고 한 말이 과연 사실이면 민희는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하겠으나, 만약에 명백한 증거가 없으면 죄줄 수가 없다고 하는데, 당초에 이 말은 역적 허견(許堅)의 입에서 나온 것이고, 정원로(鄭元老)와 강만철(姜萬鐵)도 같아 앉아서 들었으며, 공초(供招)가 명백하여 비록 역적 허견이 이미 나라의 정해진 벌을 받아 다시 물어볼 데가 없으므로 감사(減死)하는 율(律)로써 적용시켰으나, 그 스스로 변명한 말을 가지고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민희는 허적(許積)의 사인(私人)으로서 그의 입김을 힘입어 함께 공조(公朝)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인데, 체부(體府)를 다시 설치하고 차옥(次玉)의 옥사(獄事)를 번복시킨 것은 모두 민희가 협조하여 빚어낸 것이니, 그의 몸가짐과 일에 대처함에 있어 이미 그와 같고, 여러 적(賊)의 공초도 또 이와 같은데 어떻게 반드시 그러한 일이 없을 것임을 알고서 죄가 없는 곳에다 두려고 하는 것입니까. 두 사람의 처지에서 일종의 의논을 제기하는 자들은 그들이 나이 많아 장차 죽게 되었다고도 하고 벌을 받은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고도 하면서 아뢰는 말들이 역시 방자스럽게 그들이 억울하다고 말한 자는 없었습니다. 지금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를 계승하여 일어설 자가 장차 이르지 않음이 없을 것인데, 어찌 크게 한심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하기를,
"두 사람이 범한 죄는 내가 이미 자세히 알고 있다. 차자의 말은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9월 25일 병오
유성(流星)이 묘성(昴星) 아래에서 나와 삼성(參星) 아래로 들어갔고, 유성(柳星) 위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다.
황흠(黃欽)·이현기(李玄紀)를 수찬(修撰)으로, 민진주(閔鎭周)를 교리(校理)로, 최석항(崔錫恒)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9월 26일 정미
유성(流星)이 천중(天中)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윤빈(尹彬)을 사간(司諫)으로, 김우항(金宇杭)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9월 27일 무신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례(常參禮)를 행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대제학(大提學) 김만중(金萬重)이 두 번이나 패초(牌招)의 부름을 어긴 것은 의금부(義禁府)와 경연관(經筵官)의 두 직임을 겸하고 있는 것을 미안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고, 대개 문형(文衡)273) 직을 고사(固辭)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난날 문형을 담당했던 자는 비록 수망(首望)274) 이 아니더라도 수점(受點)하여 행공(行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문형의 책임은 매우 중하기 때문에 권점(圈點)을 할 적에 비록 점수의 많고 적은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본래부터 문망(文望)이 드러난 자였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부망(副望)275) 으로 수점하였다고 행공 할 수가 없었던 적은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당시 대간(臺諫)들이 일의 체모를 깨닫지 못하고서 거론한 일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제 와서 그 문제를 끌어들인다는 것은 진실로 너무 지나친 것이니, 결코 체임(遞任)을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전부터 문형을 담당한 자가 수망이 아니라 하더라도 수점하여 행공한 자가 많이 있었다. 그의 고사(固辭)로 인하여 즉시 체임을 윤허하기는 하였으나 지금은 이미 수망으로 제수되었으니, 공의(公義)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있으므로, 더욱 사양할 의리가 없는 것이다. 한 차례 그 문제를 끌어들인 것이 매우 지나친 것이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빨리 임무를 살피게 하라."
하였다. 응교(應敎) 이이명(李頤命)이 농사가 흉년이 든 점을 먼저 아뢰고 분재(分災)276) 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이렇게 큰 흉년을 당하여 깨우칠 만한 비상 대책을 실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위로 종묘(宗廟)와 백관(百官)의 경비라든지 승여(乘輿)와 복식(服飾)의 비용과 기타 긴요치 아니한 물목(物目)들은 정밀하게 필요한 것만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우선 절감해야 실질적인 혜택이 백성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것이 진실로 옳다.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절감할 수 있는 물목을 서로 의논하여 뽑아 올리게 하겠다."
하였다. 이이명이 또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민희(閔熙) 등을 중도(中道)에 부처(付處)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아뢰어서 마침내 다시 유배시키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원임 대신(原任大臣)은 민희와 홍우원(洪宇遠)이 범한 죄가 분명치가 않다고 하여 심지어 경연(經筵)에서 석방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거기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민희의 ‘복선군이 있다.’라는 말은 여러 역적들이 이미 처벌을 받은 뒤에 나온 것이라 질문할 데가 없었으므로 우선 차율(次律)을 적용했던 것인데, 이제 와서 범한 죄가 분명치 않다고 하겠습니까? 홍우원의 패악(悖惡)스러운 죄는 지금 다시 번거롭게 말씀 드릴 필요가 없겠아오나, 그 당시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277) 은 장차 예측할 수 없는 화를 당하게 되었었으므로, 자성(慈聖)께서 취하신 처분은 사실 순(舜)임금이 남몰래 업고 도망가는 도리278) 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신하들로 하여금 손쓸 곳을 없게 하려고 함이었습니다. 홍우원의 상소는 이미 가인괘(家人卦)와 물이과(勿貳過)의 말로써 제창하였고, 박헌(朴瀗)과 조사기(趙嗣基) 등은 서로 잇달아 상소하면서 더욱 흉악스러운 말을 하였습니다. 당초에 귀양으로 끝난 것도 이미 잘못된 너그러운 법이었는데, 성모(聖母)의 3년 상(喪)을 겨우 마치자 마침내 이렇게 거리낌 없이 석방을 청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신은 마음속으로 분통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아뢴 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옥당(玉堂)의 차자에 비답(批答)할 적에 이미 나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뜻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하였다. 이이명이 또 아뢰기를,
"지난날에 한두 소신(小臣)들이 이러한 일을 가지고 자기 당(黨)을 비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가 모두 죄를 받았었는데, 지금은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어찌 원로 대신이라고 하여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대간(臺諫)들 또한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홍우원(洪宇遠)이 상소한 뒤에 맨 먼저 배척을 당한 자는 신이었습니다. 그 상소 중에서 인용한 가인괘(家人卦)는 진실로 이미 실상이 없는 것이고, 현재 ‘물이과(勿貳過)’라는 말을 가지고 논한다면, 신하가 군주에게 진언(進言)함에 있어 그 과실을 곧바로 지적하는 것이 불가한 것만은 아닙니다. 설령 모후(母后)께 고할 적에도 조정에 임하여 정치에 관여하셨을 적에 곧바로 그 과실을 지적하여 말했다고 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홍우원은 자성(慈聖)의 일로써 전하(殿下)께 말씀드리면서 이에 ‘물이과’라고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동등한 처지 이하의 경우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감히 그 부모의 허물을 바로 지적할 수가 없는 법인데, 더구나 지존(至尊)에 대해서이겠습니까? 이정(李楨)과 이남(李柟) 등의 음란(淫亂)한 죄는 비록 알 수가 없사오나 홍우원은 과연 억울하다고 여기면서 그 상소에서 말하기를, ‘정과 남이 과연 죄를 범한 것이 있다면 삼사(三司)에서는 마땅히 죄를 청하기에 여가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는 그때 부제학(副提學)으로 있으면서 마침내 한 마디의 말도 죄를 청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성께서 친히 나서서 하교(下敎)하신 것은 만부득이(萬不得已)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당시에 만약 이러한 결정이 없었다면 신은 그 일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만약 홍우원(洪宇遠)의 죄를 가지고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면 윤휴(尹鑴)의 조관(照管)이란 말 또한 깊이 처벌할 수가 없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내가 이미 자세히 알고 있는데 이번에 대신이 아뢴 것이 더욱 명백하다. 이상진(李尙眞)은 그 상소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매우 미안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9월 28일 기유
이국화(李國華)를 집의(執義)로, 강현(姜鋧)을 교리로, 김만길(金萬吉)을 부교리로, 최석항(崔錫恒)을 지평으로, 안규(安圭)를 장령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시강관(侍講官)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임규(任奎)의 일은 신이 지난해에 호남(湖南)을 왕래할 적에 상세하게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임규의 신사(神祀)에 대한 근거없는 비방은 전파된 지가 이미 오래였으므로, 호남 사람들에게 자세히 물어보았더니 모두가 거짓말이라고 하였으며, 조상우(趙相愚)가 그 일을 아뢴 뒤에는 사람들이 망령되고 경솔하다고 책망하여 조상우도 뉘우치고 한탄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임규의 도리로서는 오직 마땅히 공의(公議)를 기다려야 할 것인데, 지금 마침내 조상우의 죄상을 자신의 변명하는 상소에다 삽입시켜서 마치 서로 고발하려고 하는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풍습이 자라게 하면 앞으로 일을 말하는 신하는 보전할 자가 적을 것이니, 나라에서 마땅히 조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임규가 상소하여 자신만을 변명하는 것은 있을 수 있겠으나, 일을 말한 사람의 죄과를 지적하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9일 경술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 위에서 나와 북극성(北極星) 아래로 들어갔다.
공홍도(公洪道) 진천현(鎭川縣)에서 사직(社稷) 위판(位版) 두 개와 성황당(城隍堂) 위판을 훔쳐 내다가 부수어 길거리에 버렸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본현(本縣)에서는 성묘(聖廟)의 변고(變故)가 있자마자 또 이런 일이 생겼으니 매우 놀랄 일입니다. 위판을 만들 밤나무와 봉안(奉安)할 때 쓸 향축(香祝)을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속히 내려 보내게 하소서. 성황당에 지내야 할 발고제(發告祭)와 여제(厲祭)는 지금은 이미 기일이 지났으므로 시행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본 고을에서 전후하여 변고를 일으킨 사람은 별도로 징계하는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본도의 감사(監司)에게 명령을 내려서[知委] 덫을 놓아 체포하여 기필코 잡아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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