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임자
유성(流星)이 귀성(鬼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10월 2일 계축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10월 3일 갑인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당초 정유악(鄭維岳)을 편배(編配)한 것은 역시 너그러운 은전(恩典)에서 나온 것이고, 특별히 그 아비의 일로 인하여 지레 석방을 허락하여 그 어미를 만나 볼 수 있게 하였는데, 정유악의 사람됨이 간사스러운데다가 또다시 의술(醫術)·점술(卜術)·풍수(風水)의 재주까지 있어서 사대부(士大夫)들과 사귀며 감히 일반인과 다름없이 경성(京城)과 아주 가까운 지역에 내왕하며, 심지어는 과거보는 선비들의 책문(策問)의 문제까지 낸다고 합니다. 그가 만약에 조금이라도 국법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방자한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서울과 거리가 먼 곳으로 내쫓아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정유악이 한 짓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잡아다가 문초하여 죄를 논정(論定)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5일 병진
유성(流星)이 유성(柳星) 위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강세귀(姜世龜)를 승지로, 조의징(趙儀徵)을 지평(持平)으로, 서문유(徐文𥙿)를 교리(校理)로, 임상원(任相元)을 대사성(大司成)으로, 권항(權恒)을 정언(正言)으로 남용익(南龍翼)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회인 현감(懷仁縣監) 최신(崔愼)이 상소하여, 본 고을이 재해(災害) 입은 참혹한 정상을 극진히 진술하고, 여러 해의 각종 신포(身布)279) 를 감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비변사(備邊司)에서 복주(覆奏)하기를,
"회인현이 재해를 입은 것이 참혹하여 전 도(道)에서 가장 심합니다. 수령의 상소가 이러할 뿐만이 아니고 듣고 본 것으로 참작을 하더라도 그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별도의 진휼(軫恤) 정책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임술년280) 의 호남(湖南) 운봉현(雲峰縣)의 예에 의거하여 본현의 여러 가지 신역(身役)을 일체 감해주고 기병(騎兵)·보병(步兵)에 대한 과거의 신포(身布)를 거두지 못한 것은 모두 탕감해 주는 한편 금년의 것도 당분간 미루어두고 한 필을 감봉(減捧)하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별도로 구제 조치를 취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6일 정사
전교하기를,
"석회(石灰) 1백 섬을 선왕조(先王朝)에 졸(卒)한 봉보 부인(奉保夫人)281) 산소의 역사에 보내 주라."
하였다. 해조(該曹)에 분부한 다음에 또다시 네모난 조그마한 상석(床石)을 만들어 주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승지(承旨)들의 복주(覆奏)로 인하여 명령을 거두어 중지시켰다.
10월 7일 무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정언(正言) 이익수(李益壽)가 이징명(李徵明)의 낙점(落點)을 아끼시는 데 대해 경계하는 뜻을 진달하니, 임금이 유의하겠다고 비답하였다. 검토관(檢討官) 김만길(金萬吉)이 대각(臺閣)에서 이상진(李尙眞)을 논핵(論劾)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고 하니, 이익수가 인피(引避)하고, 장령(掌令) 안규(安圭)도 인피하였는데, 모두 출사(出仕)하도록 처치하였다.
함경도(咸鏡道) 암행 어사(暗行御史) 홍수헌(洪受瀗)이 회령 부사(會寧府使) 장시규(張是奎), 종성 부사(鍾城府使) 유하겸(兪夏謙), 경원 부사(慶源府使) 이행등(李行登),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상훈(李相勛) 등의 법을 지키지 아니한 죄상을 자세하게 보고하자, 모두 해당 관리에 회부시켜 혹은 삭직(削職)하고 혹은 사면(赦免)하였다.
10월 8일 기미
유상운(柳尙運)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임영(林泳)을 사간(司諫)으로, 박태상(朴泰尙)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최규서(崔奎瑞)를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민진주(閔鎭周)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후항(李后沆)을 수찬(修撰)으로, 김만길(金萬吉)을 교리(校理)로, 신완(申琓)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집의(執義) 이국방(李國芳)이 아뢰기를,
"이상진(李尙眞)이 고지식하고 순박하게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 정성은 온 세상에서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를 당하여 관대한 은전(恩典)을 베풀려고 한 데는 반드시 그만한 뜻이 있는 것인데, 그의 본의는 살피지 않고 갑자기 그 말만을 논박(論駁)하는 것은 다만 진정시키려는 뜻에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충간(忠諫)하는 길을 막게 될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이미 입을 다물고 있다는 배척을 당했으니, 어찌 감히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引避)하였으며, 지평(持平) 최석항(崔錫恒)은 말하기를,
"민희(閔熙)의 말이 군주를 무시한 죄를 범한 것과 홍우원(洪宇遠)의 상소의 뜻이 망측(罔測)한 것은 성상께서도 환히 아시는 것이니, 이상진(李尙眞)이 설혹 한때 망발(妄發)을 했다고 하더라도 옥당(玉堂)의 차자(箚子) 하나로 충분히 그 주착(做錯)스러움을 혼내줄 수 있었는데, 어찌 반드시 죄를 주어 배척한 뒤에야 합당하다고 하겠습니까?"
하고, 인피하였는데, 뒤에 처치하여 모두 출사(出仕)하게 하였으나 옥당(玉堂)의 차자(箚子)로 인하여 이국방을 파직시켰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10월 9일 경신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부호군(副護軍) 이인징(李仁徵)이 소(疏)를 올렸는데, 병조(兵曹)의 순장(巡將)을 감하(減下)한 것 때문에 당시 낭관(郞官)이었던 김몽신(金夢臣)에게 감정을 품고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허위 사실을 꾸며대기를, ‘김몽신은 적신(賊臣) 이유정(李有湞)의 조카이고 이홍식(李弘式)의 사위인데, 그의 장인이 곤장을 맞고 죽은 것을 분하게 여겨 반드시 중상모략을 하고자 하다가, 이번 8월 16일 기성(騎省)282) 에 입직(入直)할 적에 이름을 부르며 꾸짖고서 신의 순장직(巡將職)을 체임(遞任)시켰습니다. 그 마음의 목적한 바는 이유정과 다를 것이 없으며 김몽신과 이유정은 처가(妻家)로 가까운 친척이 됩니다. 그러니 그 사이에 아마도 그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옛사람의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골육(骨肉)의 사정(私情)을 끊은 의리는 본받지 않고, 도리어 신을 원수로 여기고 그 밖에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순장을 감하할 때의 계목(啓目)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8월 19일 이인징 등 몇 사람이 혹은 노병(老病)으로, 혹은 외방에 있다는 이유로써 전례에 따라 감하된 것인데, 이인징 등은 그로 인해 혐의를 품고서 심지어는 남의 신하된 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면서 제멋대로 모함하기를 이렇게까지 하였으니, 그 혐의로 인하여 남을 모함한 죄는 엄하게 신문(訊問)하여 왕법(王法)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인징이 글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반드시 그를 사주하여 지어준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 역시 철저하게 밝혀서 엄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음흉스러운 상소를 받들어 들일 수가 없으므로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지금 계사(啓辭)를 보건대 이인징이 한 행위는 진실로 매우 흉칙스럽다. 마땅히 엄하게 문초하여 중하게 다스려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 이인징의 상소를 가져오게 하여 즉시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이인징을 잡아다가 국문하여 사주한 사람을 신문하게 하니, 그 초사(招辭)가 그의 동생 이성징(李聖徵)과 고(故) 참판(參判) 최일(崔逸)의 아들 최봉거(崔鳳擧)에게 관련되었는데, 최봉거는 증거가 없어서 석방되었고, 이성징은 상소의 초안을 지어준 죄로 인하여 형을 받고 정배(定配)되었다. 그리고 이인징은 적신(賊臣) 이유정을 잡은 공으로 인하여 판부사(判府事) 민정중(閔鼎重)이 차자를 올려 구제했는데, 세 차례 엄하게 형신(刑訊)한 다음에 사형을 감하여 정배하였다.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이 차자를 올려서 군정(軍政)의 소활(疏濶)한 폐단을 조목별로 진술하기를,
"1. 각도(各道)의 영장(營將)을 별도로 뽑아 보낼 것.
2. 비국(備局)에서 선발한 사람은 순차(順次)에 의하지 않고 장수로 삼을 것.
3. 총융청(摠戎廳)의 군병을 더 뽑아서 연곡(輦轂)283) 에 두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원로 대신(元老大臣)이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조목별로 진술한 계책은 절실하지 아니한 말이 없으므로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10월 10일 신유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임금이 승지(承旨)를 불러 하교하기를,
"이상진(李尙眞)의 본 마음은 죄인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데, 대각(臺閣)에서 논핵(論劾)한 것이 옳은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어제 이국방(李國芳)이 인피(引避)한 말에 이르러서도 시비가 분명하지 아니한데도, 대신의 망발(妄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언로(言路)가 막히는 것만을 문제삼아 말하였으니, 사심(私心)에 치우친 것이 너무도 뚜렷하다. 그런데도 정언(正言) 권항(權恒)은 이를 구별하지 아니하고 혼동하여 내쫓으려고 하였으니, 일을 조처함에 있어 정당성에 어긋나게 한 책임을 벗어나기 어렵다. 체차(遞差)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전교하기를,
"이는 환수할 일이 아니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평안도(平安道) 암행 어사(暗行御史) 최석항(崔錫恒)이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효원(李孝源)의 선치(善治)한 업적을 포장(褒奬)하였는데 해조(該曹)의 복계(覆啓)에 의하여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승진시켰다.
10월 11일 임술
이태룡(李台龍)을 장령으로, 이제민(李濟民)을 지평으로, 한성우(韓聖佑)를 정언으로, 유상운(柳尙運)을 호조 판서로, 이선(李選)을 대사헌으로, 이이명(李頤命)을 집의로 삼았다.
대신의 수의(收議)로 인하여 진천현(鎭川縣)을 혁파하였다. 그것은 본현의 사직(社稷)과 성황당(城隍堂)의 위판이 변고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황해 감사(黃海監司)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금교 찰방(金郊察訪)인 박재시(朴載時)를 흥양(興陽)의 사도진(蛇渡鎭)에 충군(充軍)시켰다. 박재시는 본도의 감시 수권관(監試收券官)으로서 그와 혼인한 집안 사람으로 과거를 본 안태유(安泰維)를 시관(試官)인 김주(金澍)에게 사사로 부탁하면서 편지를 보낼 적에 편지 첫머리에서 합격시켜 줄 것을 바로 청하였는데, 그 사실이 낭자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10월 12일 계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10월 13일 갑자
좌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청국(淸國)에서 돌아오면서 데리고 간 비장(裨將)을 먼저 보냈는데, 그 별단(別單)에 이르기를,
"신 등이 흑룡강 장군(黑龍江將軍) 살포색(薩布索)의 제본(題本)을 보니, ‘수직(守職)한 지 5, 6년 동안 적(賊)과 대적(對敵)한 것은 몇 차례에 지나지 않으나 지역이 넓고 기후가 추워서 사람과 말이 추위에 떨고 있으며, 쥐새끼 같은 도둑들은 매우 교활하고 여러 가지로 잔꾀가 많아서, 우리 군사가 진영(鎭營)을 설치하면 도둑들은 이를 엿보고, 우리 군사가 공격을 하면 도둑들은 통로(通路)를 막으므로, 비록 대포(大砲)가 있기는 해도 일시에 나아갈 수도 포진할 수도 없어 군대의 위력을 발휘할 수 없으니, 어떻게 대적할 수가 있겠습니까? 도둑 떼들은 아무리 설득하고 무마해도 와서 항복하는 자가 없으며, 이로운 물품으로 유인해도 동요시킬 수가 없으니, 심력(心力)이 이미 다하여 나라에 보답할 수가 없습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신의 직임을 대신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아라사(鵝羅斯)는 북해(北海)와 접하고 있는 대국인데, 대비(大鼻)284) 와 가까운 지역으로서 대비가 두려워하여 복종하는 나라입니다. 예부 시랑(禮部侍郞)이 접반(接伴)하고 병부 시랑이 영을 나가 북해까지 나아가 하륙(下陸)하고 몽고(蒙古)의 오왕(五王)들이 말을 번갈아 타면서 들여 보내는데, 그러한 점으로 보아 아마도 강대국인 듯하오며, 이렇게 접대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대비(大鼻)와의 승부(勝負) 관계가 달린 것 같습니다. 정극상(鄭克塽)은 현재 북경(北京)에서 경(卿)의 작위를 받고 있고, 그의 자제(子弟)는 각각 5품(五品)의 관작을 받고 있으며, 대만(臺灣)과 팽호(澎湖) 등 여러 섬에 부(府)·현(縣)을 설치하고 군대도 주둔시킬 것이라고 합니다. 신이 옥하관(玉河館)에 있을 적에 성(成)·부(傅) 두 사람이 왔었는데, 한(韓)·정(鄭) 두 역관(譯官)을 시켜 묻기를, ‘우리 나라가 대국에게 죄를 짓기는 하였으나 지난번 자문(咨文) 등에서 문책을 당한 말은 사실상 억울한 것이 많다. 위엄과 노여움 때문에 감히 변명은 하지 못하였으나, 대국에서 그 죄에 대해 변명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만약에 실지로 그러한 죄가 있다고 여긴다면 이는 더욱 억울하다.’ 하였더니, 두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이번 상주(上奏)한 글에서 만약에 변명하는 말을 늘어 놓았다면, 반드시 도리어 사단을 유발시켜 그 해는 전날의 정문(呈文)보다 더 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인책 사과를 한 외에 스스로 변명하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이번의 표문(表文)에서도 말을 잘 만들어서 견책을 당하지 않게 한 것은 진실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10월 15일 병인
신엽(申曅)을 승지(承旨)로, 이익(李翊)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동욱(李東郁)을 장령(掌令)으로, 유득일(兪得一)을 지평(持平)으로, 김홍복(金洪福)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0월 16일 정묘
집의(執義) 이이명(李頤命)이 논핵(論劾)하기를,
"광주 경력(廣州經歷) 심집(沈楫)이 일찍이 호남(湖南)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과거에 합격한 도신(道臣)의 조카를 위하여 그의 동생인 고부 군수(古阜郡守) 심극(沈極)과 축하하는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어서 상관에게 아첨하였는데, 호남 지역의 인사들이 지금까지도 침뱉고 비루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가 뒤에 파직만 명하였다.
10월 17일 무진
이선(李選)을 도승지(都承旨)로 삼고, 임영(林泳)을 올려서 승지(承旨)로 삼고, 엄집(嚴緝)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10월 18일 기사
유성(流星)이 천중(天中)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고, 문창성(文昌星) 위에서 나와 헌원성(軒轅星) 아래로 들어갔다.
10월 19일 경오
강현(姜鋧)을 헌납(獻納)으로, 신엽(申曅)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김창집(金昌集)을 교리로, 서종태(徐宗泰)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10월 20일 신미
유성(流星)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 북쪽으로 들어갔고, 대각성(大角星) 아래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다.
정시 문과(庭試文科)를 실시하여 김진규(金鎭圭) 등 7명을 뽑았다.
10월 21일 임신
오두인(吳斗寅)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삼았다.
10월 22일 계유
유성이 왕량성(王良星) 위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고, 달이 서원(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10월 23일 갑술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판부사(判府事) 이상진(李尙眞)은 박신규(朴信圭)와 신이 서로 겨룬 일을 가지고 아뢴 적이 있었으나 신은 이미 서로 미워하는 마음이 없었는데, 조정에서 또한 어찌 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앞서 박태보(朴泰輔)를 등용하는 일로 여러번 아뢰었으나 성상께서 아직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상소에도 신을 논박(論駁)한 것이 한 건이 있는데, 4년이나 버려두고 있으니, 공론이 모두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마땅히 발탁해서 등용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끝까지 버려둘 수야 있겠는가?"
하였다. 행 사직(行司直) 이숙(李䎘)이 아뢰기를,
"금년의 흉년은 호남(湖南) 지역이 특별히 심한데, 사민(士民)들의 상소와 대신(臺臣)들의 계청(啓請)을 볼 때 그 절박함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조정에서 불쌍히 여겨 대책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나라의 저축은 이미 바닥이 나서 다시 손쓸 곳이 없습니다. 지난번에 도신(道臣)의 장계(狀啓)를 보니, ‘도내의 군포(軍布)를 감축하려고 비축된 2백 동(同)을 경중(京中)에 수납(收納)하여 경아문(京衙門)에서 모자라는 숫자를 대여(貸與)하고자 한다.’고 하는데, 그 많은 포(布) 2백 동을 경중에 운반해 둔다는 것은 사실상 불편한 일입니다. 신이 편리한 방법에 따라 변통해 보자는 뜻으로 이사명(李師命)과 상의하였더니, ‘병조(兵曹)의 군포는 경솔하게 쓸 수가 없으나 진휼청(賑恤廳)의 은포(銀布)같은 것은 그래도 융통해서 충당해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각 아문에 보내 준 뒤에 본영(本營)에서 조치한 2백 동은 본도에 그대로 두고 재해를 입은 고을에 나누어 주어 진구(賑救)하는 밑천을 삼게 하여 조정에서 별도로 진휼(軫恤)하는 뜻을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매우 타당하다. 그렇게 하라."
하였다. 집의(執義) 이이명(李頤命)이 이상진(李尙眞)을 논핵(論劾)하려고 하였으나, 정언(正言) 김홍복(金洪福)이 모나게 이견(異見)을 내어 인피(引避)하니 이이명도 인피하였는데, 옥당(玉堂)에서 처치하여 이이명은 출사(出仕)하고 김홍복은 체임(遞任)시키도록 하였다.
10월 24일 을해
유성(流星)이 성성(星星) 아래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다.
사학(四學)의 유생(儒生) 유복기(兪復基) 등이 상소하여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을 소환할 것을 청하고, 이어 동참하지 아니한 성균관(成均館)의 유생을 배척하였다. 비답하기를,
"대로(大老)285) 를 소환하자고 요청하는 것은 사실 현인을 존경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성심에서 나온 것이니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이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송시열에게 하유(下兪)하기를,
"경이 서울을 떠난 지가 어느덧 3년이 되었으니 허전한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심정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재변이 매우 비참하여 근심이 눈앞에 넘치는데 흉년이 잇달아 백성의 생명이 부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대소 신료(臣僚)들이 마음을 합하여 공동으로 구제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를 극복하지 못하게 될까 걱정인데, 더구나 경은 두 조정286) 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고 한 시대의 중대한 명망을 지고 있으니, 내가 의지하려는 마음과 조정이나 지방에서 기대함이 어떠하겠는가? 뒤를 이어 보답해야 할 도리와 기울어지는 것을 붙들 계책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고결함을 지키겠다는 뜻만을 고수하면서 조정으로 돌아올 시기는 전연 아득하니, 이는 나의 진실된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 데에 말미암은 소치이므로, 다만 스스로 간절하게 부끄러울 뿐 차라리 말하고 싶지가 않다. 이에 사관(史官)을 보내어 나의 간절한 뜻을 전달하니, 모름지기 목마를 때 물을 찾는 듯한 정성을 받아들이고 영원히 떠나겠다는 마음을 속여 되돌려서 봄 날씨가 약간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속히 올라와 현재의 어려움을 구제하기 바란다."
하였다.
10월 25일 병자
천둥하였다.
10월 27일 무인
집의(執義) 이이명(李頤命)과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가 합계(合啓)하기를,
"지난달 탐전(榻前)에서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상진(李尙眞)은 홍우원(洪宇遠)의 동조(東朝)287) 를 범한 상소를 가리켜 망발(妄發)이라 하고, 민희(閔熙)의 임금을 업신여기고 임금을 저버린 죄를 가리켜 밝지 못한 것이라고 하며, 심지어 관대하게 놓아주기를 청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범한 죄는 사실상 신(神)이나 사람이 함께 분노해야 할 일이고 왕법(王法)에 용서받기 어려운 것인데도, 그 자신이 대신으로서 유언(流言)에 동요되어 변명 구제하자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였으니, 이상진을 파직시키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대신이 진달한 말은 사실상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그 본의를 구명해 보면 그를 변호하기 위한 생각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파직시키자는 의논은 너무 지나친 것 같다."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논계(論啓)하기를,
"전 승지(承旨) 김두명(金斗明)은 유세기(兪世基)의 아내와 형제간으로서, 유세기가 사사로 민정(民丁)을 동원하여 제방을 쌓은 일을 벗겨주려고 감히 계품(啓稟)해서 조사하라는 명령을 중지시키게 하였습니다. 그 기회를 타서 교활한 행위를 하고 사심을 품고 윗사람을 속인 행위를 떠들어댄 정상을 잡아다가 신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 뒤에 강화 유수(江華留守) 신정(申晸)이, 경력(經歷) 조상개(趙相槪)의 조카 조대수(趙大壽)와 김두명의 아우 김하명(金夏明)이 유세기 등과 더불어 군정(軍丁)을 동원하여 제방을 쌓은 사실을 밝혀 내어 장계(狀啓)로 알리므로, 조상개는 충군(充軍)시키고, 조대수는 장형(杖刑)을 집행하고, 김두명은 당초에 한 말이 윗사람을 속인 죄를 면할 수가 없다 하여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했다.
10월 29일 경진
정내상(鄭來祥)을 장령(掌令)으로, 이진휴(李震休)를 지평(持平)으로, 이숙(李䎘)을 판윤(判尹)으로, 이희룡(李喜龍)을 강양도 관찰사(江襄道觀察使)로, 신익상(申翼相)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박태보(朴泰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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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8월 (0) | 2025.11.17 |
|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7월 (0) | 2025.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