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정축
유성(流星)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갔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품정(稟定)할 일이 있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영의정 이유가 말하기를,
"부칙사를 접견하였을 때 지도를 보기 원했으나, 이미 경솔하게 보여줄 수가 없고, 또 원래 지도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으므로 단지 황폐하고 외떨어진 곳이어서 일찍이 그려 둔 적이 없다는 뜻으로 답했습니다. 또 산 남쪽 줄기는 어디서 그치냐고 묻기 때문에 ‘남해에 이르러 끝난다.’고 답하였습니다. 이에 저가 이에 가지고 온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내보이고, 인하여 우리 나라의 도본(圖本)을 요구하였는데, 역관들이 비록 방색(防塞)했으나 형세가 보여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마땅히 말하기를, ‘전일에 요구한 백두산 지도는 일찍이 모사(模寫)해 낸 일이 없으므로 없다고 대답하였으나, 지금 듣건대 동국의 전지도(全地圖)를 보고자 한다 하므로 가지고 왔다.’라고 하면 전후가 어긋날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비국(備局)의 지도는 너무 자세하므로, 내보일 수가 없고, 근래에 얻은 1건의 지도는 상세하지도 않고 간략하지도 않지만 백두산의 물줄기는 틀린 것이 많으니, 마땅히 이 지도를 내보이게 해야 합니다. 목차(穆差)의 도형(圖形) 1건은 박권이 일찍이 올려 보낸 것이 있으니, 이제 내보일 때 이 지도까지 보이면서 말하기를, ‘백두산의 형세를 짐작해서 그려냈기 때문에 물줄기가 이처럼 분명하지 못하나, 이 도본과 비교해 보면 그 틀린 곳을 알 수 있다.’고 하여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이렇게 말을 만들어 언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공조 판서 김진규(金鎭圭)는 아뢰기를,
"처음에는 황제의 뜻이 있었다고 일컫다가 지금은 갑자기 병을 핑계대어 상칙사로 하여금 대신 말하게 하니, 간사하고도 음흉함이 심합니다. 저들의 뜻은 우리 나라의 팔도 지형을 탐지하고자 하는 것인데, 지금 만약 한 번 이런 길을 열어 놓으면, 후일에는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게 될 것이니, 장차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하고, 좌의정 이이명은 말하기를,
"사체(事體)는 그렇습니다만, 이는 대단한 일이 아닌데, 반드시 고집해 다투고자 하면 한갓 치욕만 끼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겨 명하기를,
"말을 잘 만들어 언급한 후에 내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제주 목사 이익한(李翊漢)이 장계로 본주(本州)를 방어사(防禦使)라 칭하기를 청하기를,
"고려조(高麗朝)에는 겸 방호사(兼防護使)였는데, 그 후 혹 안무사(安撫使)라 불렀고, 세조조(世祖朝)에는 병마 수군 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라 고쳤으며, 무인년376) 에는 방어사(防禦使)라 불렀습니다. 그 후에 혁파한 것은 비록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지만, 영종진(永宗鎭)·안흥진(安興鎭)은 작은 진에 불과한데도 방어사로 부르라는 유서(諭書)가 있었으나 본도(本島)만은 유독 없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다시 방어사로 부르라는 유서를 특별히 내리소서."
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6월 3일 무인
강릉에 우박이 내렸다.
6월 4일 기묘
임금이 관소(館所)에 거둥하였는데, 영의정 이유(李濡)·좌의정 이이명·관반(館伴)377) 민진후(閔鎭厚)·도감 당상(都監堂上) 조태구(趙泰耉)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노사(虜使)가 각 고을의 도리(道里)를 보여달라고 청한 일로 임금 앞에서 서로 의논하였는데, 이이명이 말하기를,
"저들이 만약 오늘 성상께 물을 것 같으면, 마땅히 대답할 말을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하였는데, 이유가 말하기를,
"각처의 명산을 먼저 그려 주고, 도리(道里)의 원근은 원래 써서 둔 것이 없다는 뜻으로 언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지도가 이처럼 소루하니 우리 나라의 문적(文籍)에 미비된 것이 많음을 이에서도 알 수 있다.’고 답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연회를 베풀게 되어 노사(虜使)가 단지 말하기를,
"별유(別諭)를 이미 전했는데, 황제가 만약 물으시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앞으로 사신의 행차 때 마땅히 치사(致謝)할 것입니다."
하자, 노사가 말하기를,
"만약 저희들을 보려고 한다면, 마땅히 백두산 지도를 가지고 와서 바쳐야 합니다. 또 대국의 사정을 만일 듣고자 하시면, 마땅히 다 말씀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대국의 사정을 어찌 감히 탐문하겠습니까."
하였다. 노사가 또 말하기를,
"황제께서 유시(諭示)하기를 ‘조선왕(朝鮮王)이 묻는 바가 있거든 숨기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사례하였다. 무릇 수대(酬對)하는 즈음에 부칙사가 혼자 처리하는 일이 많았고, 상칙사는 모든 일을 반드시 부칙사에게 자문하였다.
교리(校理) 신사철(申思喆), 부교리(副校理) 어유귀(魚有龜)·김유(金楺)가 차자를 올리기를,
"전일에 북사(北使)가 도성에 들어올 때 큰 비가 갑자기 쏟아졌는데, 물이란 음기(陰氣)이니, 분류함에 있어서 소인이 되고 도적(盜賊)과 이적(夷狄)이 됩니다. 우리 나라가 남쪽과 화목(和睦)한지 1백 년이 지났고, 북쪽과 화목한 지 80년 가까이 되어 천도(天道)와 물리(物理)가 지극히 가득 찼다고 할 수 있는데, 막대한 재이(災異)가 마침 북사(北使)를 접견하던 날에 있었으니, 천의(天意)의 소재를 어찌 현묘(玄妙)하고 심원(深遠)하다고만 하겠습니까. 지금 비록 중양(衆陽)이 바야흐로 성대하지만, 그사이에 여윈 돼지가 깡총거리는 일378) 이 없겠습니까. 그렇다면 쇠 멈춤대[金柅]로 묶어 정길(貞吉)하는 도리379) 를 더욱 마음쓰지 않을 수 없는데,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인재를 출척(黜陟)하여 쓰고 버리는 즈음에 선인(善人)을 좋아하면서도 마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악인을 미워하면서도 마음이 엄하지 못하여 건강(乾綱)380) 이 해이해지니, 국체(國體)가 훼손된 것은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일찍이 우리 선조께 ‘권강(權綱)을 총람(摠攬)해야 합니다.’라고 권한 까닭이 이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양(陽)을 부호(扶護)하고 음(陰)을 억제하며, 선을 드러내고 악을 미워하여 기강을 세우려고 하신다면, 어찌 이이의 말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두지 않으십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번 차자로 진달한 것은 대개 깊은 우려에서 나왔으므로 대의(大意)가 좋으니, 어찌 유의(留意)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6월 5일 경진
이보다 앞서 임금이 연중(筵中)에서 부제학(副提學) 정호(鄭澔)가 상소하여 선정신 송시열을 효종의 묘정(廟庭)에 추배(追配)하기를 청한 일을 물었는데, 영의정 이유가 말하기를,
"중국의 고사(故事)에는 혹 뒤에 죽어 추배된 자도 있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오직 세종조 때 황희와 세조조 때 한명회 두 사람만이 추배되었습니다. 신유년381) 에 이동명(李東溟)이 진소하여 이시백(李時白)과 송준길(宋浚吉)을 효종에게 추배하기를 청했는데, 그때 대신이 모두 어렵게 여겼고 민정중(閔鼎重)의 말은 더욱이 절실했으니, 신 또한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좌의정 이이명은 말하기를,
"영상(領相)이 진달한 바 이외에 남은(南誾)·이제(李濟)는 태종조에 이르러 특명으로 태조의 묘정에 추배되었는데, 송시열은 효종에게 있어 개국 훈신(開國勳臣)이 태조에 대한 것과 무엇이 다르기에 아직까지 배식(配食)하지 않는지 실로 한스럽습니다. 다만 종묘(宗廟)의 예절은 중하니 아래에서 어찌 곧바로 청하겠습니까? 다만 성상께서 재량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조태채(趙泰采)·김우항(金宇杭)·김진규(金鎭圭) 등 여러 신하들도 모두 어렵게 여기니, 임금이 우선 그대로 두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정호가 시골에서 도성에 들어와 진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인심이 날로 저하(低下)되고 의리(義理)가 아주 막혀서 성조(聖祖)의 지업(志業)이 거의 민멸되기에 이르렀는데, 다행스럽게도 성상께서 계술(繼述)하는 데 뜻을 두어 대의(大義)를 천명하였습니다. 만약 이 기회를 타서 성전(盛典)을 거행하시면, 다만 송시열 한 사람의 애영(哀榮)일 뿐만 아니라 실로 성조(聖祖)의 뜻과 일에도 빛이 있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송나라 때 조보(趙普)382) ·조빈(曹彬)383) 은 송 태조에게, 한기(韓琦)384) ·증공량(曾公亮)385) 은 송 영종(宋英宗)에게 모두 추배되었는데, 그때에 중대하다는 이유로써 어렵게 여겨 경솔히 정지시켰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살피지 않았다.
6월 7일 임오
유성(流星)이 저성(氐星) 위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6월 8일 계미
노사(虜使)가 돌아갔다.
평안도 강계·희천 등지에 우박이 내렸다.
6월 9일 갑신
유성(流星)이 남두성(南斗星) 아래에 나왔다.
옥당(玉堂)의 관원을 소대(召對)하였다.
이언강(李彦綱)을 형조 판서로, 이세면(李世勉)을 승지로, 이병상(李秉常)을 헌납(獻納)으로, 윤봉조(尹鳳朝)·홍우서(洪禹瑞)를 부수찬(副修撰)으로, 김재로(金在盧)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6월 10일 을유
영의정 이유가 첫 번째 정사(呈辭)386) 하니,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논핵하기를,
"봉산(鳳山)에 정배(定配)한 죄인 장대유(張大維)는 함부로 배소(配所)를 떠나 서울 집에 왕래하고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며 보통 사람과 같이 생활하니, 청컨대 고율(考律)하여 가배(加配)하소서. 본관(本官)은 그가 왕래하는 대로 맡겨두고 찾아 돌아오게 할 마음이 없으니, 청컨대 해당 군수를 파직하소서. 상서 직장(尙瑞直長) 황위(黃霨)는 대간(臺諫)의 상소에서 삭판(削版)까지 청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관직에 있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6월 11일 병술
사헌부에서 논핵하기를,
"결성(結城)의 토호(土豪) 심정원(沈廷元)은 유학(幼學) 강세겸(姜世謙)의 어미 무덤을 발굴하여 관을 끌어내어 도랑에 던지고 횡판(橫板)과 삽선(翣扇)387) 을 모조리 불태웠으므로, 본도에서 조사해 아뢰게 하였는데, 미처 회계(回啓)하지 아니하여 사유(赦宥)로 인해 탕척(蕩滌)되었다고 합니다. 전부터 정범(情犯)이 매우 무거우면 비록 사유를 만나더라도 가볍게 석방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본율(本律)에 의해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6월 12일 정해
영의정 이유가 두 번째 정사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네 번에 이르렀으나, 모두 같았다.】
【태백산사고본】 62책 54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0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6월 16일 신묘
민진후(閔鎭厚)를 예조 판서로, 임방(任埅)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세최(李世最)를 승지로, 홍우서를 부교리(副校理)로, 홍정필(洪廷弼)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상성(李相成)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황해도 각 고을에 폭풍이 불고 푹우가 쏟아져서 나무가 부러지고 뽑히었으며, 육지가 강을 이루었다.
장령 서명우(徐命遇)가 상소하기를,
"신은 듣건대 북사(北使)가 왔을 때 국가에서 접대하는 절차에 황망하여 잘못 조치해서 절차가 전도되어 경시당한 것이 많이 있었다 합니다. 가교(駕轎)가 궐정(闕庭)에서 달리거나 관소(館所)로 돌아갈 적에 우회하는 길로 인도한 사실은 전에 없던 바이니, 신은 실로 한심하게 여깁니다, 지도를 보여 주기를 요구한 것은 이미 칙지(勅旨)가 아니었으니, 전례를 들어 막는 것은 스스로 방법이 있었는데, 아깝게도 낭묘(廊廟)에 있는 자가 혼모(昏眊)하고 비루하여 처음에는 성상께 없다고 대답하도록 권했다가, 저들에게 핍박을 받아 마침내 내어 보이기를 허락하였으니, 아! 이것이 무슨 거조입니까. 평일에 대신이 총애를 받아 자리를 굳히고 자신을 위해 계책을 세우는 것은 치밀하다고 할 수 있으나, 한 번 외인(外人)을 만나면 겁을 먹어 자기의 지킬 바를 잃어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실언하는 탄식을 면치 못하게 하는 데 이르렀고, 필경 나라를 욕되게 하는 데로 돌아 갔으니, 그 밖의 일이야 오히려 어찌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난날 전장(銓長)과 아석(亞席)이 동시에 인입(引入)하였는데, 다시 출사(出仕)하였다가 번갈아 인입하여 소란스러움이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당초 아전(亞銓)388) 의 소(疏)에 ‘저들이 비록 자처(自處)하는데 미진하였다.’는 등의 말까지 있었으니, 전장(銓長)을 기척(譏斥)한 것이 가볍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데, 끝내는 이에 장석(長席)을 먼저 출사(出仕)시키고 그대로 다시 주저앉아 있으니, 염의(廉義)를 무너뜨림이 거의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 가을 이후 서로 잇따라 전조(銓曹)에 들어온 자가 만약 당여(黨與)를 심어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배척하지 않으면, 대부분 공도(公道)를 무시한 채 사정(私情)에 따라 두 차례의 도정(都政)389) 에서 순전히 한쪽 사람만 썼습니다. 대부분 인아(姻婭)와 압닐(狎昵)390) 한 무리이었는데, 전장의 집 선사(先祠)391) 를 영건한 공로로 참람하게 주의(注擬)392) 받았으며, 이상(李翔)의 문도(門徒)는 외람되이 스승을 송사(訟事)하는 글을 진달했는데, 이만성(李晩成)이 전조에 들어오던 날 갑자기 수망(首望)에 두어 공정한 조정의 전선(銓選)하는 자리를 하나의 사사로운 은혜를 갚는 장소로 만들었으니, 그 외잡(猥雜)함은 거의 이전에 듣지 못하던 바입니다. 국자감(國子監)393) 과 옥서(玉署)394) 의 장관(長官)은 모두 극선(極選)해야 하는데 단번에 신통(新通)395) 하여 가끔 함부로 뽑은 것이 있고, 동전(東銓)396) 의 좌이(佐貳)397) 는 구망(舊望)을 모조리 버리고 순전히 신의(新擬)를 써서 망(望)이 나온 후에 밖의 의논이 시끄럽습니다. 그래서 담당하는 자는 생각건대, 반드시 익히 들었을 것인데, 거짓 모르는 체하여 아무렇지 않게 공무를 집행하니, 그 역시 부끄럼이 없습니다."
하고, 또 논핵하기를,
"김덕기(金德基)를 지신사(知申事)로 외람되게 의망했고, 한영휘(韓永徽)는 죄가 강상(綱常)에 관계되는데 정조(政曹)에서 거의(擧擬)함이 전례를 따른 듯이 여겼으며, 양양하게 대각에 들어간 것은 평인(平人) 같았습니다. 이정익(李禎翊)은 분수를 범하고 의리를 무시했는데, 여러 차례 수망(首望)에 두고 힘껏 공의(公議)와 싸웠으니, 너무 무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묘과(己卯科)398) 의 추복(追復)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공론(公論)인데, 김유(金楺)가 농락하고 시배(時輩)가 회복하기를 도모한 후에야 그만두었습니다. 괴원(槐院)399) 은 분관(分館)400) 을 허락하지 않고, 대지(臺地)는 통청(通淸)401) 을 준엄하게 배척하고, 궁관(宮官)은 또한 도당록(都堂錄)402) 을 의논했는데, 도당록 가운데의 여러 관료(官僚)가 나파(拿罷)되던 날에 염치를 무릅쓰고 곧바로 나가 거리낌없는 듯이 했으니, 신은 가만히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하고, 끝에 말하기를,
"작년에 이성조(李聖肇)가 삼척(三陟)에서 헌직(憲職)으로 옮길 때 진소하여 일을 논한 말이 먼저 서울에 전파되자, 상신(相臣)이 탑전(榻前)에서 급급히 종성(鍾城)의 새 수령 조식(趙湜)을 체직하고 이에 이성조로 대신하기를 청하였었는데, 이는 변방의 자리를 빌어 대간(臺諫)의 자리를 빼앗은 것에 불과하지만 제멋대로 국전(國典)을 흔들고 임금의 총명을 가린 것은 옛날의 권신(權臣)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삼사(三司)의 신하로서 전하를 위해 말하는 자가 없었으니, 오늘날의 조정은 역시 위태하다고 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변방 수령의 나이를 70세로 한정한 것은 저절로 영전(令典)이고, 조식은 강건한데도 급히 이성조를 옮기려고 한 것은 변법(變法)하여 체차(遞差)하도록 청한 것이며, 정필동(鄭必東)은 아첨을 잘하고 은밀한데도 부유한 고을을 맡기려고 한 것은 말을 변경해서 제수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상신과 전관(銓官)이 앞뒤에서 화응(和應)하여 방자하게 법을 무너뜨려 농락함이 이토록 극도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소가 들어간 이튿날에야 비로소 답하기를,
"그대의 소사(疏辭)를 살펴보니 한 편의 정신이 오로지 상신(相臣)과 전관(銓官)에게 없는 사실을 꾸며 모함해서 조정을 파괴하고 어지럽히려는 계책에 있으며, ‘대신이 총애를 희구하여 자리를 굳혔고 자신을 위한 꾀가 치밀하다.’라고 한 것은 그 마음씀이 아주 위험하다. 저들이 요구한 것이 전후가 다르므로 나의 대답이 이와 같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처음부터 두려워한 일이 없었다면 어찌 실언한 탄식이 있었겠는가. 또 변방 수령의 연한(年限)을 변통하자는 청을 뜻이 있어서 발론한 데에 돌리고, 하나는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언로(言路)를 거슬려 막은 것이니, 비록 옛날의 권신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하였고, 둘째는 ‘앞뒤로 화응하여 방자하게 법을 무너뜨려 농락하였다.’ 하였으니, 어찌 그 패망(悖妄)한 말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이만성(李晩成)이 당한 바는 이의현(李宜顯)과는 같지 않은 데도 인혐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특교(特敎)로 출사하도록 권면한 것이며, 장관 역시 출사하여 공무를 집행하였으니 염의(廉義)를 무너뜨려 손상시켰다는 배척은 또한 괴이하지 않은가. 김덕기(金德基)를 은대(銀臺)403) 의 장석(長席)에 주의한 것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고, 한영휘(韓永徽)가 무함받은 것은 이미 신변(伸辨)되었으니 정조(政曹)에서 거의(擧擬)한 것은 자연히 예사로운 일이다. 기타 침척(侵斥)한 것은 결코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역시 잘못이 많음을 알겠다. 기묘과(己卯科)를 추복하는 것은 조금도 불가함이 없는데, ‘회복하기를 도모했다.’는 등의 말은 이의만(李宜晩)의 여론(餘論)을 주워 모은 데 불과하니, 참으로 가소롭다."
하였다, 영의정 이유(李濡),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서명우(徐命遇)의 상소 때문에 모두 명소패(命召牌)404) 를 바치고 도성 밖으로 나가니, 임금이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고,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돌려주게 하였다. 삼사(三司)도 또한 모두 인혐(引嫌)하여 진장(陳章)하였으며, 정언(正言) 윤양래(尹陽來)는 인피(引避)한 후에 물러가 기다리지 않고 즉시 발계(發啓)하기를,
"서명우가 한 통의 소장을 올려 조신(朝臣)을 일망 타진하니, 마음씀이 교묘하고 말이 음험합니다. 낭묘(廊廟)를 침범하여 욕하면서 허구 날조가 아님이 없고, 전지(銓地)를 공격한 것이 오로지 현혹시키는 데에서 나왔으며, 기타 여러 신하의 죄상(罪狀)도 모두 억지로 꾸미고 현환(眩幻)하여 반드시 조정을 비게 한 후에야 그만두려고 하였으니, 청컨대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6월 17일 임진
경상도 대구 등의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6월 18일 계사
좌의정 이이명이 다시 명소패(命召牌)를 바치고 사직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도에 대한 일이 전후가 다르게 된 것은 지난번 성교(聖敎)가 해와 달처럼 밝으니, 신은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저들이 가지고 온 지도가 이미 자세하고 참되므로, 우리 나라에서 숨기면 한갓 그들의 의심과 노여움만 더하게 될 뿐이었으니, 일의 기틀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대저 할말이 있어도 굽혀 따른 것은 후폐(後弊)가 있을까 의심함이니, 그 생각은 진실로 장원(長遠)하지마는, 이익이 없는데도 억지로 거슬리는 것은 의심과 욕만 스스로 취하는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닐 듯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다른 대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차라리 청의(淸議)를 지닌 자에게 구설(口舌)을 받더라도 국가에 일이 발생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신이 어리석고 미혹한 죄이므로, 감히 수문(脩門)405) 에 들어가지 못하고 또 이렇게 번거롭게 합니다."
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유시(諭示)하기를,
"지도에 대한 일은 객사(客使)의 요구함이 전후가 달랐는데, 서명우 또한 어찌 알지 못하였겠는가. 반드시 마음에 만족하게 여기고자 하여 핑계하여 모함하려고 한 것이니,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나라를 욕되게 한 일이 없었는데 어찌 인책(引責)할 죄가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즉일(卽日)로 도성에 들어오기를 명하였다. 이후에 영의정 이유가 또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들이 갑자기 백두산 물줄기를 거론하면서 그곳 지도를 보여 주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신들이, ‘백두산은 황폐하고 외떨어진 땅이므로 일찍이 지도를 만든 바가 없다.’는 뜻으로 진달했더니, 성상께서 이로써 대답하셨습니다. 저들이 관소(館所)에 나간 후 가지고 온 지도를 내보이고, 인하여 우리의 팔도 지도를 요구했는데, 만약 이것까지도 본래 없다고 핑계하는 것은 사리에 가깝지 않고, 또한 성실이 부족한 것이 될 것이며, 더군다나 그들이 이미 한 본(本)을 내보였으니, 우리가 비록 숨기더라도 또한 이익은 없이 한갓 의심만 사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저들이 전후에 말한 바가 이미 달랐으니, 우리의 응답한 것도 저절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데, 어찌 실언한 한탄이 있겠으며 또한 나라의 체모에 손상됨이 있는지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식(趙湜)은 연한이 이미 박두하였고, 먼 변새(邊塞)는 내지(內地)와 같지 않으니, 전조(銓曹)에서 차견(差遣)하는 것 또한 정체(政體)에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차(改差)하기를 진달하였으며, 인하여 문관·무관을 물론하고 나이 60이 넘은 자는 육진(六鎭) 등처에 차견하지 말도록 정탈(定奪)406) 한 바가 있습니다. 이는 실로 전관(銓官)이 강외(江外)에 있을 때이니, 사사로이 서로 화응(和應)하여 미리 조식을 체차하고 변방 자리를 빌어 이성조(李聖肇)의 대함(臺銜)을 빼앗을 계책을 삼았다는 것은 이미 억지입니다. 금년 2월에 이만성(李晩成)이 ‘변방 수령의 연한을 60세로 하는 일은 군색한 단서가 있다.’고 진달한 것은 본래 별도로 영갑(令甲)을 정하려는 뜻이 아니라고 앙대(仰對)했더니, 성상께서 드디어 이로써 별도로 영갑을 정하지 말고 비록 육순이 넘더라도 정강(精强)한 자는 차송(差送)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신이 당초 정탈한 것은 다만 한때의 폐단을 고치려는 것이었고, 그후 주대(奏對)에서 또 그것이 별도로 영갑을 정하려는 것이 아님을 밝혔으니, 경솔하게 성헌(成憲)을 고쳤다고 말함은 어찌 천만 뜻밖이 아니겠습니까. 총애를 희구하고 지위를 굳힌다는 것은 지도 한 가지 일에 관계되지 않는데 그 아래에 삽입하였으니, 그 뜻이 지극히 깊으며, 갑자기 권신(權臣)이란 명목을 씌워서 헤아리기 어려운 처지에 빠뜨리니, 아! 역시 참혹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도는 핑계댄 말에 불과하며 ‘총애를 희구하고 지위를 굳힌다.’는 등의 말은 그 마음이 소재자 매우 음험하니, 아주 놀랍고 한탄스럽다. 변방 수령의 연한을 변통한 본뜻을 내가 자세히 알고 있는데, 권신이란 명목을 씌워서 곧바로 헤아릴 수 없는 죄과로 몰아넣었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하고 인하여 즉일로 도성에 들어오기를 명하고, 또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가서 개유하게 하였다.
6월 19일 갑오
반송사(伴送使) 윤덕준(尹德駿)과 평안 감사 유집일(兪集一)이 치계(馳啓)하기를,
"칙사(勅使)의 행차가 평양에서 잤는데, 내일도 그대로 머물고자 합니다. 대저 송도(松都) 및 해서(海西) 두 영(營)의 증물(贈物)이 정교하지 못함으로 인해 추급(追給)하자 문득 물리쳤으나, 칙사가 자질구레한 이익에 마음을 두는 뜻이 있어 매양 오래 머물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 곳의 칙수 별장(勅需別將)을 잡아들여 곤장을 치고 인하여 수역(首譯)을 엄칙(嚴飭)했더니, 어두워진 후에야 비로서 군령(軍令)을 내어 내일 길을 떠날 계획이라고 합니다. 중로 문안사(中路問安使) 한세량(韓世良)이 문안 어첩(問安御帖)을 받들고 평양에 도착했는데, 상칙사(上勅使)가 밥을 먹는다거나 혹은 술에 취해 누웠다고 핑계하면서 봉입(捧入)을 허락하지 않다가, 끝에 가서는 또 성을 내어 말하기를, ‘내말을 그대 나라에서 거행하지 않았으니, 승지(承旨)가 왔다는 일을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사체에 오래 지체할 수 없다는 뜻으로 역관들을 엄칙했더니, 역관 김지남(金指南)이 부칙사(副勅使)에게 직소(直訴)하여 비로소 상칙사와 통하여 들어가 전하였는데, 부칙사가 ‘근시(近侍)가 멀리 와서 문안하니, 감사함을 금하지 못하겠다.’고 답하고, 상칙사는 단지 ‘삼가 잘 알았다.’라고만 하였습니다. 한세량이 이런 뜻을 들어 치계(馳啓)하여 말하기를, ‘비록 부칙사의 답사(答辭)와 다름이 있으나, 답사가 구례(舊禮)와 조금 다르다 하여 다툴 필요가 없으므로, 이로부터 도로 올라가려 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의(時議)는 단지 삼가 잘 알았다고 한 것은 욕을 끼침이 큰데, 한세량이 다투지 못하고, 다만 들어가 전한 것만 다행으로 여겨, ‘구례(舊禮)와 조금 다르다,’는 등의 쓸데없는 말로 스스로 변명하고 있으니, 직무를 그르침이 큽니다."
하였다. 후에 사간원에서 한세량의 죄를 논핵하여 먼저 파직한 후 추고하기를 청하고 또 반송사 윤덕준의 파직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단지 한세량에 대한 계청(啓請)만 윤허하고, 윤덕준은 추고하기를 명하였다.
도승지 이선부(李善溥)가 상소하여 서명우(徐命遇)를 구하고, 승지와 대간(臺諫)을 배척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헌신(憲臣)의 소어(疏語)가 비록 적당하지는 못했지만, 당로자(當路者)를 자거(刺擧)407) 하며 시휘(時諱)를 피하지 않았으니 칭찬할 만한 것이 있는데, 논의가 갈려져 문득 색목(色目)으로 단정하여 당동 벌이(黨同伐異)408) 의 죄과에 몰아놓고, 특체(特遞)의 명이 또 뜻밖에 나왔으니, 본원(本院)에서 전지(傳旨)를 곧바로 받든 것은 사체에 부족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간신(諫臣)이 물러가 기다리지 않고 공격해 제거하기에 급급한 것은 무슨 거조입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구해(救解)하는 데 급급하니, 진실로 이상하다."
하였다. 승지 유명홍(兪命弘) 등이 진소(陳疏)하여 대변(對辨)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은 잘못이 없다."
하였다. 정언 윤양래(尹陽來)도 역시 이로써 인피(引避)하여 말하기를,
"이선부는 영호(營護)하는 데 급급하여 대각(臺閣)을 능멸하고 조정을 경모(輕侮)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이선부가 이튿날 첫 번째 정사(呈辭)하자 체차하였다. 이 뒤에 지평 박성로(朴聖輅)가 이선부를 논핵하여 말하기를,
"서명우를 영구(營救)하려고 대간(臺諫)을 침척하면서 방자하고 패류(悖謬)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6월 20일 을미
대사간(大司諫) 임방(任埅)이 상소하여 서명우를 크게 논핵하였는데,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백두산 남쪽 물줄기는 전국 여지(全國輿地)의 명목(名目)이 각각 다르고, 요구한 것이 같지 않으므로, 조정의 허락 여부는 모두 참량(參量)하여 나왔는데, 실언(失言)했다는 말을 어디에 근거하여 발설한 것입니까. 더군다나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모두 다른 말이 없었는데, 지금 그 죄를 오로지 시임(時任)에게 돌리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총애를 희구하고 지위를 굳혔다는 죄목이 과연 가르키는 바가 있다면, 어찌 분명한 말로 바로 논하여 무슨 일로 죄를 삼았는지 알게 하지 않고, 전말(顚末)을 감춘 채 숨어서 농락하며 오로지 막된 소리로 헐뜯는 것을 상쾌하게 여기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조식(趙湜)은 나이가 60이 넘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먼 변새(邊塞)에서 주무(綢繆)409) 하는 것은 그의 소임이 아니니, 대신의 말은 실로 변방 일을 염려해서인데, 어찌 일찍이 국전(國典) 밖에 별도로 영갑(令甲)을 정하였겠습니까. 정필동은 나이가 비록 60에 찼으나, 정력이 바야흐로 강성하며, 성상께서 연신(筵臣)이 거듭 계품함으로 인하여 비록 60이 넘었더라도 정력이 강성한 자는 차견하라고 전교하셨으니, 정필동을 서변(西邊)에 의망(擬望)한 것이 다시 어찌 구애되겠습니까. 이성조(李聖肇)가 헌직(憲職)에 제배된 것은 열흘 남짓에 불과하고, 바야흐로 영외(嶺外)에 있었으니, 그가 소론(疏論)하고자 한 여부가 어찌 서울[都下]에 알려졌겠습니까. 더군다나 그때에 전관(銓官)은 바야흐로 밖에 있으면서 면직을 청하고 있었으니, 대신과 화응(和應)했다고 한 것이 과연 근사(近似)하겠습니까. 이를 권신(權臣)이라고 한다면, 전후하여 병축(秉軸)410) 하여 전조에 있었던 자로서 그 누가 면할 수 있겠습니까.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손자 및 의병장(義兵將) 김덕령(金德齡)과 순절한 사람 변응정(邊應井) 등을 봉사(奉祀)할 사람이 정사(政事)에서 주의(注擬)받은 데 이르러서는 무슨 의심할 만한 것이 있기에 잇따라 동성(同姓)을 의망했다고 하고, 사사로운 은혜를 갚았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교묘하게 사소한 잘못을 찾아내어 고생스럽게 말을 만들어 내니, 다른 것이야 어찌 말하겠습니까. 천관(天官)411) 의 장석(長席)은 임무가 다른 사람과 달라서 비록 본조(本曹) 당랑(堂郞)412) 과 같은 극선(極選)이라도 으레 혼자 통의(通擬)하는 일이 많았는데, 옥서(玉署)413) 와 국자(國子)414) 는 무슨 구애됨이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이미 간문(簡問)한 일이 있었고, 또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한 사람의 손에서 잇따라 통망(通望)했다는 말은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동전(東銓) 좌이(佐貳)를 새로 의망한 것도 또한 곡절이 있습니다. 전망(前望)이 둘 있었으나, 혹 일찍이 사석(師席)을 무릅써서 많은 물의(物議)를 초래했거나 혹은 과옥(科獄)을 상소로 구한 옛 이력(履歷)에 막혔으므로, 공론을 따라 새로 통망한 것은 사리에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이에 억지로 전망(前望)을 굽혀서 곧바로 수망(首望)에 주의한 잘못된 일로 끌어대고는 비교해서 똑같다고 여겼으니, 그 또한 가소롭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서명우(徐明遇)는 시골의 비루한 사람으로, 행실이 천박하여 세상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지난번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의 일을 논핵한 것은 진실로 의관(衣冠)의 부끄러움인데, 전혀 자처하는 도리에 어두워 염치를 무릅쓰고 일을 논하였으니, 그 사람은 책망할 것도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간관(諫官)의 아뢴 말이 매우 초초(草草)하였으나, 형률(刑律)은 삭출(削黜)에 그쳤습니다. 이미 대간(臺諫)의 체통을 잃었는데, 후사(喉司)415) 의 장관인 자가 감히 영구(營救)할 계책을 내어 말을 허비하여 억양(抑揚)하기를 장려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출납(出納)하는 자리에 이렇게 놀랍고도 가소로운 자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말하기를,
"조목별로 논한 것이 명쾌하다 할 만하나, 삭출(削黜)하는 것도 넉넉히 죄를 징계할 수 있는데, 어찌 죄를 더하겠는가."
하였다.
이조 판서 송상기(宋相琦)가 사직소(辭職疏)를 올려 서명우의 소를 변명하였다. 그가 국자(國子)·옥서(玉署)·전좌(銓佐) 및 동성(同姓)을 연달아 주의(注擬)한 일을 변명한 것은 대략 임방(任埅)의 소와 같았는데, 끝에 가서 말하기를,
"김덕기(金德基)를 지신사(知申事)에 의망한 것은 스스로 공론(公論)이 있었고, 한영휘(韓永徽)의 대망(臺望)은 도정(都政) 후에 있었으므로 신도 또한 전례에 따라 의망하였으며, 이정익(李禎翊)은 한때 낭료(郞僚)의 말 때문에 그대로 파면시키고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참관(參官) 신임(申銋)도 또한 옥서(玉署)의 장관을 새로 통망(通望)한 데 참여하여 들은 일로써 사직소를 진달하니,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다소 사직소를 올리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가서 개유하게 하였다.
6월 21일 병신
판부사(判府事) 김창집(金昌集)이 지도를 내보일 때 참여해 들었다는 일을 가지고 서명우가 상소한 것으로 인하여 사직 차자를 올리니, 우악한 비답를 내렸다. 이후에 판부사 서종태(徐宗泰)와 조상우(趙相遇)가 모두 이로써 사직소를 올리니,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대사헌 이건명(李健命)도 또한 일찍이 전관(銓官)의 장으로서, 서명우의 소론(疏論)을 입었기 때문에, 진소하여 그 ‘순전히 한쪽 사람만 쓰고, 인아(姻婭)를 대부분 천거했다’는 말과 이성조(李聖肇)를 종성(鍾城)에 이배(移拜)한 것, 호남 사람으로 선조의 사당을 영건한 자를 옥서(玉署)의 장관에 수용하고 신통(新通) 이정익(李禎翊)을 통의(通擬)했다는 등의 일을 【대의(大意)는 임방(任埅)의 소와 같다.】 상세히 변명하니, 역시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정호(鄭澔)가 말하기를,
"근래 과장(科場)에서 전적으로 사륙문(四六文)416) 을 숭상하여 문체가 점차 쇠약해지고 있으니, 부(賦)·책(策)·잠(箴)·명(銘)·송(頌)을 섞어 출제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책(策)은 단시일에 시취(試取)할 바가 아니니, 다른 글을 섞어 출제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정호가 또 말하기를,
"윤봉조(尹鳳朝)와 이병상(李秉常)이 관직(館職)417) 을 미루는 것은 모두 근거할 바가 없으니, 청컨대 신칙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교리(校理) 홍우서(洪禹瑞)가 서명우(徐命遇)의 뒤흔들고 괴란시킨 형상을 낱낱이 진달하고, 먼저 아전(亞銓)을 【바로 신임(申銋)이다.】 신칙하여 공무를 집행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관(銓官)은 결코 체직을 허락할 이치가 없고, 신임이 당한 것은 더욱 가벼우니, 속히 출사(出仕)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6월 22일 정유
금성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장령(掌令) 김두남(金斗南)이 현도(懸道)를 따라 상소하여 서명우를 구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서명우의 상소는 진실로 어리석고 고지식한 정성에서 나와 시휘(時諱)를 촉범(觸犯)하였는데, 말이 비록 적절하지 못하지만 받아들이는 도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너그럽게 용납하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지나치게 꺾어 누르시니, 신은 참으로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변방 수령의 연한(年限)을 변개하여 헌신(憲臣)을 변방 고을에 옮겨 제수한 것은 실로 듣기에 놀라우니, 어찌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며서 속이며 괴란시킬 계책을 했겠습니까. 언지(言地)에 있는 자는 환수하기를 고청(固請)했어야 하는데, 배척받은 대관(臺官)이 인피하여 물러가지 않고 급급하게 논계(論啓)하여 삭출(削黜)에 이른 후에야 그만두었으니, 대간의 체모를 손상시킴이 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서명우의 소어(疏語)는 매우 위험하니, 시비를 명백히 하는 도리에 있어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였다.
6월 23일 무술
이때 이조(吏曹)의 당상관(堂上官)이 서명우의 상소 때문에 연일 패소(牌召)418) 를 어기고 나오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참판 신임이 비로소 패소를 받들어 개정(開政)하여 유명웅(兪命雄)·윤세수(尹世綏)를 승지로, 권변(權忭)을 사간(司諫)으로, 조명봉(趙鳴鳳)을 장령(掌令)으로, 이병상(李秉常)을 부교리(副校理)로, 윤봉조(尹鳳朝)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가 차자를 올려 처음에는 서명우의 상소로써 혐의를 하고, 끝에서 말하기를,
"참소하는 말을 제멋대로 행하여 더없이 거리낌이 없으므로 일을 맡은 대신(大臣)이 낭패하여 급히 물러가 야외에서 이수(泥首)419)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세(時勢)로는 비록 방두(房杜)420) 의 재주와 한범(韓范)421) 의 어짊이 있더라도 진실로 한 가지 계책을 내고 한 가지 일을 조치할 수가 없는데, 이대로 간다면 오로지 서로 망쳐서 날로 실패하는 것만 보게 될 것이니, 가만히 국가를 위해 마음이 아픕니다."
하고, 인하여 더욱 정성과 예절을 더하여 기필코 소환(召還)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너그러이 답하기를,
"소환하라는 청은 실로 내 뜻에 맞는다. 원로 대신의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을 깊이 감탄하였으니, 마음에 두지 않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이유와 좌의정 이이명이 또 사직하는 소를 올리니, 임금이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6월 25일 경자
이민영(李敏英)을 승지(承旨)로, 한중희(韓重熙)를 헌납(獻納)으로, 정찬선(鄭纘先)을 교리(校理)로, 최석항(崔錫恒)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정언(正言) 윤양래(尹陽來)가 사직하는 소를 올려 김두남이 상소로 배척한 것을 대단히 변명하기를,
"서명우의 뜻은 오로지 온 조정을 일망 타진하려는 데 있었으나, 정상이 이미 탄로되었습니다. 전부터 이러한 배척을 받는 자가 물러가지 않고 그대로 아뢰는 것이 한둘이 아니니, 신이 어찌 억지로 물러가 논하지 않겠습니까. 췌마(揣摩)422) 하는 계책을 경영하였으나, 그 중에 한 가지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기회를 엿보아 느닷없이 꺼내는 말이 어딘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김두남의 상소는 오로지 영구(營救)하기 위해 나왔으니, 어찌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6월 26일 신축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임금이, 영의정 이유(李濡)와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또 사직소를 올리니, 모두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6월 27일 임인
이택(李澤)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6월 29일 갑진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충청도 홍양 등지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6월 30일 을사
영의정 이유와 좌의정 이이명이 또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자상한 비답을 내려 위석(慰釋)한 것이 지극했으며, 인하여 사관(史官)을 명하여 함께 오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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