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정미
명하여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覔山)·한강(漢江)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하였다.
윤덕준(尹德駿)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남취명(南就明)을 승지(承旨)로, 홍경렴(洪景濂)을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전라도 장성(長城)·진도(珍島) 등지에 가뭄이 들었다.
7월 4일 기유
유성(流星)이 우림성(羽林星) 위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왕세자(王世子)가 친히 영소전(永昭殿)의 대제(大祭)를 지냈다.
사헌부에서 논핵하기를,
"서명우의 상소는 오로지 조정을 괴란시킬 계책에서 나왔으므로, 생각해 내어 말하는 것이 극히 교묘하고 치밀하였는데, 장령(掌令) 김두남(金斗南)이 말을 허비해 가며 영구(營救)한 것이 마치 직언(直言)하는 자를 장려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파직을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이유와 좌의정 이이명이 사직소를 각기 네 번씩 올리니, 임금이 답하기를,
"일전에 사관(史官)과 함께 오도록 한 전교에서 반드시 출사하도록 권면하려는 뜻을 볼 수 있는데, 사양함이 더 굳어 조정에 나올 희망이 막연하니, 한결같이 독촉하는 것도 대신을 예대(禮待)하는 도리가 아주 아니다. 본직(本職)을 부득이 이제 우선 면부(勉副)423) 하니, 모름지기 속히 함께 들어와 지극한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관명(李觀命)이 일전에 재차 사직 단자를 올리자, 임금이 돌려주도록 명하였었는데, 이관명이 또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7월 5일 경술
부제학(副提學) 정호(鄭澔)가 휴가(休暇)를 받아 향리(鄕里)로 내려가니, 교리(校理) 이택(李澤)이 상소하여 머물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호의 충성심과 청렴하고 강개(剛介)함은 평소 사류(士類)에게 추앙받았습니다. 먼 변새(邊塞)에서 해를 넘기며 죽음을 모면하고 돌아오자, 특별히 수소(收召)를 가하여 다시 경악(經幄)의 장(長)을 삼았으나, 공격을 받은 나머지 설 자리가 위태로왔는데, 일찍이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이렇게 휴가를 청한 것은 대개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않을 계획에서 나온 것입니다. 정호같은 경학(經學)를 가진 사람을 어찌 물러나 돌아가도록 맡겨두고 만류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음이 합당하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급가(給暇)의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정호는 가토(加土)424) 로 휴가를 청함이 또한 간절하였고 이미 휴가를 준 명이 있었으니, 환수할 필요가 없다. 휴가 기한 안에 올라오라는 일을 별도로 신칙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7월 6일 신해
재차 용산강(龍山江)·저자도(楮子島)에서 기우(祈雨)하였다.
홍호인(洪好人)을 장령(掌令)으로, 곽만적(郭萬績)을 정언(正言)으로, 이유(李濡)와 이이명(李頤命)을 모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임명하고, 김우항(金宇杭)을 특별히 승진하여 우의정(右議政)으로 삼았다.
판부사(判府事) 이유가 상소하여 사관(史官)을 소환하기를 청하고, 인하여 전야(田野)에 물러가 살기를 원하였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공조 판서 김진규(金鎭圭)가 금오(金吾)에 갇힌 박태항(朴泰恒)의 일을 차관(次官)이 의언(議讞)425) 하라는 명을 상소하여 사양하였는데, 이르기를,
"최석항(崔錫恒)의 전후 소(疏)로써 보건대, 마땅히 혐의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혐의할 것이 있다면 차관(次官)이 되어 구애(拘碍)받음을 돌아보지 않음이니, 그 일을 조사하여 다스린다면 어찌 체모를 손상시킴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소사(疏辭)도 역시 의견이 있으니, 장관(長官)이 출사(出仕)하기를 기다려 의언하라."
하였다. 대개 박태항이 대동미(大同米)를 이공윤(李公胤)에게 내어준 죄로 갇혔는데, 최석항은 비국 당상(備局堂上)으로서 그 보장(報狀)426) 을 제급(題給)하였으므로, 이로써 의언(議讞)하지 않으니, 차관이 대신 행하라는 명이 있었다. 그래서 김진규의 소가 이와 같았는데, 후에 최석항이 다시 김진규의 소비(疏批)427) 로 사직소[辭疏]를 올리니, 임금이 사직하지 말고 의언(議讞)하라고 하였다.
7월 7일 임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사헌부에서 논핵하기를,
"기우제(祈雨祭)의 헌관(獻官) 이상열(李尙說)은 술마신 것을 이용하여 자기의 기세(氣勢)를 부려 해괴한 일을 많이 했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9일 갑인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첫 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卿)이 나를 섬긴 지 오래 되어 나도 경을 잘 알고 있다. 관후한 도량과 공평한 마음이 태사(台司)428) 에 맞으니,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속히 출사하여 논도(論道)하라."
하고, 인하여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가서 개유하게 하였다.
7월 10일 을묘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에서 세 번째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7월 11일 병진
한영휘(韓永徽)를 정언(正言)으로, 송성명(宋成明)과 홍중휴(洪重休)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7월 12일 정사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대개 임금이 지난날 발을 헛디뎌 넘어졌는데, 처음에는 그다지 아프지 않다가 오랜 후에야 매우 아픈 것을 느끼게 되니, 이미 10여 일에 이르렀다.
우의정 김우항이 재차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전라도 영광(靈光)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7월 13일 무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뜸을 떴는데, 우의정 김우항이 문안차 나와 숙배(肅拜)하고 진참(進參)하였다. 김우항은 비록 관후하다는 일컬음이 있었으나, 사로(仕路)에 부침(浮沈)하면서 건명(建明)한 바가 없었는데, 중비(中批)429) 로 배상(拜相)되니, 사론(士論)이 인정하지 않았다.
7월 14일 기미
사직단(社稷壇)과 북교(北郊)에서 네 번째 기우제를 지냈다.
어유귀(魚有龜)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양성규(梁聖揆)를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7월 15일 경신
김유(金楺)를 부교리(副校理)로, 서명균(徐命均)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7월 16일 신유
곽만적(郭萬績)을 지평(持平)으로, 신사철(申思喆)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생우황(生牛黃)을 대궐 안으로 들이라고 명하였는데, 내국(內局)에서 즉시 구하여 바치지 않으니, 특별히 엄교(嚴敎)를 내려 의관(醫官)을 나치(拿治)하게 하자, 지부(地部)430) 의 당상관(堂上官)과 낭관(郞官)이 궐하(闕下)에 와서 대령하였다. 임금이 널리 찾도록 독려하여 사사로이 도살(屠殺)하는 것을 허락하고, 반드시 얻어낼 것을 기필하기에 이르니, 이로부터 죽인 소가 수백 마리뿐이 아니었다. 부교리(副校理) 홍우서(洪禹瑞)가 이로써 진소(陳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제 선왕(齊宣王)이 소가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는 양(羊)으로 바꾸게 하였고431) , 송 인종(宋仁宗)은 밤에 구운 양고기를 생각하다가 마련하지 못하게 하여432) 후세에 성덕(盛德)이라 일컬어졌는데, 모두 생물의 목숨을 중히 여겨서입니다, 이번에 생우황(生牛黃)을 대궐안으로 들이라는 명이 있었으니, 무릇 유사(有司)의 신하로서 어찌 감히 털끝만큼인들 만홀(慢忽)하겠습니까마는, 무릇 약용(藥用)에 관계된 것은 대부분 말려 두었으며, 또 우황(牛黃)이 있음을 겉에서는 알지 못하므로 지금에 와서 급히 구해도 진실로 갑자기 얻기가 어렵습니다. 전하는 말을 듣건대 수일 사이에 공사간에 도살한 것이 이미 수백 두(頭)에 이르렀으나 아직 많이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일이 어약(御藥)에 관계되어 말참견을 할 수는 없지마는, 다만 생각하건대 죽인 소가 이미 아주 많고 장차 한량이 없을 것이니, 사세(事勢)가 이지경에 이르면 헤아려 처리하는 도리가 없어서는 안될 듯합니다. 전하께서 만약 참으로 이와 같음을 굽어살피신다면, 반드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 처분이 계실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내가 처음에 생우황을 얻기 어려움이 이 지경에 이를 줄 헤아리지 못하였는데, 며칠동안 들인 바가 아주 적으니 역시 알 만하다.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으나, 그대의 말이 옳다. 즉시 정지하게 하라."
하고, 인하여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어약(御藥)인 생우황을 얻기 어려움으로 인하여 사사로이 도살하는 것을 허락함은 마땅하지 않아 애초에 막으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여 며칠 사이에 공사간에 도살한 것이 수백 마리나 되도록 많았다. 이는 비록 짐승이지만 마음에 측은하니, 현방(懸房)433) 의 도살을 5일을 한정으로 우선 정지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강원도 유생(儒生) 정필형(鄭必亨) 등이 상소하여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고, 끝에 태학(太學)에서 소청(疏請)하지 않은 것을 논하기를,
"김시형(金始炯)·이덕순(李德淳)이 이미 벌(罰)을 받았으면 무고한 사람을 즉시 내보내고 속히 소사(疏事)를 완결하는 것이 이치에 당연한데, 이에 일찍이 중벌을 받은 것 때문에 이름이 삭락(削落)에 있는 이시덕(李蓍德)·조정빈(趙鼎彬)을 구차하게 재임(齋任)에 차임하여 일부러 소사(疏事)를 끈질하게 방해할 계책을 삼았으니, 당초에 여러 차례 공당(空堂)434) 하여 번거롭게 변통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개 이필형 등의 상소는 비록 태학(太學)에서 진장(陳章)하지 않은 일을 개탄하는 것 같지만, 그 뜻은 실로 중대한 일을 빙자해서 말을 만들어 재임의 권한을 다시 빼앗고자 하는 것으로 지난번 권당(捲堂)한 것과 같은 투였다.
7월 17일 임술
약방에서 입진하여 임금이 침(鍼)을 맞았다.
경기 부평(富平)에 해일이 있었고, 여주(驪州)·양천(陽川)·가평(加平) 등지에 충재(蟲災)가 있었다.
7월 18일 계해
비변사에서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일로써 여러 재신(宰臣)들과 상의하여 녹사(錄事)·서리(書吏)·군관(軍官)·군병(軍兵) 등 여러 색목(色目)의 경우는 한결같이 그 액수(額數)를 정하여 마땅히 감하거나 파(罷)할 자는 별단(別單)을 써서 들일 것을 미리 분부하고, 미처 문서를 수정하지 못한 것은 추후 마련한다는 뜻을 계달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7월 19일 갑자
임금이 한재(旱災) 때문에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말하기를,
"아! 하늘이 경계(警戒)를 보임은 어찌 모두 놀랍고 두려운 것이 아니겠는가마는, 무엇이 한재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김맨 후의 가뭄이 봄·여름보다 심하여 농가(農家)에서 아주 꺼리는 것은 대개 절후가 서성(西成)435) 에 임박하여 다시 가망(可望)이 없기 때문이다. 아! 작년 농사가 흉년에 이르지는 않았고, 이번 여름의 보리와 밀도 조금은 익었으므로,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다만 가을 농사가 잘 익어 우리 백성이 거의 소생(蘇生)하는 것에 있을 뿐인데, 어찌 대단한 가뭄의 재앙이 이렇게 극도에 이를 줄 헤아렸겠는가. 10일만 비가 오지 않아도 오히려 벼가 없게 된다고 말하는데, 지금 비가 오지 않은 것이 그 며칠째인가. 바로 남와(南訛)436) 를 당하여 끝내 큰비를 아끼고, 가을에 든 이래 바람이 더욱 차게 불어 전야에서 허둥지둥하고, 백성들의 생명이 다 죽게 되었는데 호서·호남의 소식이 더욱 비참하니, 백성의 부모가 되는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말과 생각이 이에 이르니 그대로 잠이나 자면서 꼼짝하지 않았으면 싶다.
아! 이번 재앙을 초래(招來)한 것은 진실로 나의 부덕(否德)에서 말미암았으니, 백관(百官)을 칙려(勅勵)하는 것 또한 매우 부끄러우나, 서로 수성(修省)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한 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말할 만한 것이 진실로 한둘이 아니지만 가장 절급(切急)한 것은 조정이 화평하고 편안해질 기약이 없다는 것이다. 아! 조정이 화평하고 편안해진 후에야 정신을 모을 수 있고, 정신을 모은 후에야 나라 일을 다스릴 수 있는데, 당습(黨習)이 날로 고질화되고 경알(傾軋)이 날로 심해져서 조금만 마음에 맞지 않으면 크게 성을 내고, 한 번 작은 과실을 들으면 마치 기화(奇貨)를 얻은 것처럼 하여 허구 날조함이 끝이 없어서 반드시 만 길 구덩이에 남을 빠뜨린 후에야 그만두니, 이것이 참으로 무슨 마음인가.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나는 나라 일이 다시는 다스릴 수가 없게 되어 날로 위망(危亡)한 지경으로 나아가게 될까 두렵다. 금일의 계책은 반드시 먼저 구습을 엄중히 개혁해서 정백(精白)한 일심(一心)으로 오로지 나라의 계책과 백성의 근심에 마음을 쓰고, 참으로 조정(朝政)에 할 만한 것이 있으면 일에 따라 일을 논하여 가부를 서로 의논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다.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끼지 않으면, 조정이 거의 공경하며 화합하는 희망이 있고, 국가가 화평한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대들 대소 신료(臣僚)들은 내 말을 분명하게 들어 각자 두려워하여 하늘의 견책(譴責)에 답하고,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라."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중외(中外)에 반시(頒示)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한재(旱災)가 이처럼 혹심하니, 흠휼(欽恤)하는 일일 없어서는 안 되니, 의금부(義禁府)와 형조(刑曹)의 시수(時囚) 및 편배(編配)한 무리를 모두 모레 탑전(榻前)에서 소결(疏決)하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판의금(判義禁) 최석항(崔錫恒)을 패초(牌招)하여 일을 보도록 명하였다. 이때 형조 판서 윤덕준(尹德駿)이 논핵을 당했는데, 승정원에서 형관(刑官)의 인원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써 계품(啓稟)하니, 개차(改差)하라고 명하였다.
황흠(黃欽)을 이조 판서로, 송상기(宋相琦)를 형조 판서로, 이택(李澤)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비변사(備邊司)의 계사(啓辭)에 과장(科場)의 거자(擧子) 무리들이 입장(入場)한 후 시지(試紙)에 타인(打印)할 즈음에 서로 엉켜 싸우며 작경(作梗)한 폐단이 있었다고 한 것으로 인하여 명하기를,
"이후로 대소과(大小科)에는 시권(試券)을 거두어 축(軸)을 만든 후 답인(踏印)하는 일을 정식(定式)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7월 20일 을축
유성(流星)이 왕량성(王良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윤봉조(尹鳳朝)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광좌(李光佐)의 장청(狀請)에 의하여 북병사(北兵使) 이택(李澤),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휘(李暉)를 잉임(仍任)437) 하도록 청하고, 【대개 이택(李澤)이 병들어 체임(遞任)하고 이휘로 대신하였는데, 이택의 병이 이미 나았기 때문에 잉임(仍任)하기를 청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반송사(伴送使) 윤덕준(尹德駿)이 장계(狀啓)하기를, ‘기린역(麒麟驛)의 역졸(驛卒)이 주머니에 지니고 가던 돈을 통관(通官)의 가정(家丁)에게 수색당했는데, 역리배(驛吏輩)들이 사단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소통사(小通事) 김영걸(金永傑)에게 애걸했더니, 김영걸이 중간에서 뇌물을 요구하고는 문서를 만들어 서로 약속하기에 이르렀으나, 역관(曆官) 민도흥(閔道興)에게 붙잡혔습니다. 그가 도로 찾도록 주선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중간에서 뇌물을 받으려 하였으니, 정상이 절통하여 우선 한 차례 엄형(嚴刑)하였는데, 청컨대 다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김영걸의 일이 비록 사정을 누설하는 것과는 다름이 있으나, 일이 피인(彼人)들에게 관계가 되니, 다른 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마땅히 엄중하게 추궁하여 폐단을 막아야 하는데, 역시 어떤 율(律)을 써야 마땅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물었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나라의 기강(紀綱)이 엄하지 못해서 우리 나라 사정이 누설됨이 많으니, 이와 같은 자는 드러나는 대로 엄격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영걸의 죄는 비록 효시(梟示)하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으나, 다만 뇌물은 문서만 만들고서 미처 주고받지는 못했으니, 율문(律文)으로써 논죄하면 사죄(死罪)에 이르지는 않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여러 신하 중에 혹은 말하기를, ‘마땅히 극률(極律)을 써야 합니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마땅히 차율(次律)을 써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김우항이 또 말하기를,
"이광좌(李光佐)가 비국(備局)에 보고하기를, ‘사유(赦宥) 후에 받아들이지 못한 적곡(糴穀)을 탕감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전례에는 원회(元會) 및 상평창(常平倉)에서 진휼(賑恤)하는데 이전한 군향(軍餉)을 일체 탕감한 일이 있었다.’고 했기 때문에 지금도 명백한 것을 알아서 품정(稟定)하고자 합니다. 금년에는 마땅히 한결같이 아울러 견감(蠲減)하도록 명하고, 경기(京畿) 각읍(各邑) 가운데 강도(江都)·남한(南韓)의 곡식도 또한 마땅히 탕감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민진후가 시지(試紙)가 너무 두꺼운 폐단에 대해 말하기를,
"방(榜)을 내기 전에 만일 분부하려고 하면 분요(紛擾)를 초래(招來)하기가 쉬우니, 방을 내어 1등은 입계(入啓)할 때 승정원에서 고찰하고, 2등 이하는 예조에서 고찰하여 품질이 두껍고 무게가 무거운 것은 계달하여 방에서 빼버리고, 거자(擧子)는 정거(停擧)438) 하고, 주장관(主掌官)은 논책(論責)하게 하소서. 조흘(照訖)439) 의 법을 근래에 행하지 않았으니, 시권(詩卷)을 내어 줄 때 조흘을 빙고(憑考)하여 주면 법을 행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시권을 고교(考校)할 때 종이의 품질이 너무 두꺼운 자는 비록 글이 주옥(珠玉)같더라도 처음부터 취해 보지 않으면 이런 폐단이 저절로 없어질 것인데, 방을 낸 후 고찰하여 빼어버리면 일이 타당하지 않으니, 시소(試所)에 분부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민진후가 또 봉산(鳳山)에서 백토(白土)를 굴취(掘取)한 폐단에 대해 말하기를,
"백토는 처음 양구(楊口)에서 굴취하다가, 폐단이 있기 때문에 본현(本縣)의 현령이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그만두고 봉산으로 옮겨 정하였는데, 봉산의 폐단을 도리어 양구보다 심합니다. 일찍이 듣건대 양구현에서는 만약 그 고을의 전부(田賦)를 모조리 감해 주면 담당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본현의 전부(田賦)는 그 수량이 많지 않아서 봉산에서 수납(輸納)하는 비용과 거의 맞먹으니, 지금 만약 그 전부를 견감하고 백토 5백 석(石)을 아울러 굴취해 바치게 한다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진주(晋州)의 백토는 품질이 양구의 것보다 못한데, 원 수량이 2백 50석이어서 비록 50석의 수량을 감하더라도 넉넉히 쓸 수 있고 그 폐단도 또한 감할 수 있으니, 지금부터 마땅히 2백 석으로 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좌윤(左尹) 권상유(權尙游)가 말하기를,
"신이 지금 국경에 나가야 하는데, 대보단(大報壇)440) 의 일을 저들이 만약 제기해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마땅히 바른 대로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가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망극한 은혜를 입어 잊을 수 없는 뜻을 두었기 때문에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야 한다.’ 하기도 하고, 혹은 말하기를, ‘권사(權辭)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김우항이 말하기를,
"저들이 힐문하는 일이 없을 듯하나, 설사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우리에게 이런 일이 없다.’고 대답해야 하며, 바른 대로 대답하면 처리하기 어려운 걱정이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고, 민진후 이하 여러 신하는 모두 바른대로 대답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갑신년441) 단(壇)을 쌓은 후 동평위(東平尉)의 행차가 바로 을유년442) ·병술년443) 에 있었기 때문에 혹시 거기에 대해 물음이 있을까 염려했었다. 지금은 꼭 만 10년이 되었고, 사개(使介)가 잇달았지만 저들이 일찍이 제기하지 않았으니, 지금 어찌 반드시 돌이켜 제기하겠는가. 설령 묻더라도 사실대로 대답하는 것이 의리(義理)에 해로움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권상유가 인하여 재황(災荒) 때문에 진계(陳戒)하기를,
"오늘날 염려되는 바는 오로지 당론(黨論)에 있으니. 진언(進言)하는 자가 모두 중(中)을 세우고 극(極)을 세워 구제할 계책을 삼아야 한다고 하는데, 중(中)자와 극(極)자는 같은 뜻으로, 지선(至善)이 있는 곳이 바로 중(中)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두 가지의 가운데를 잡는 것을 중이라고 하지만 잘못이고, 일의 대소(大小)를 물론(勿論)하고 반드시 지선(至善)이 있는 곳을 궁구(窮究)하여야 이것이 바로 중입니다."
하고, 또 주자(朱子)의 황극변(皇極辨)을 인용하여 건극(建極)의 뜻을 논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김진규가 말하기를,
"장생전(長生殿)의 재궁(梓宮)이 모두 5부(部)인데, 그 가운데 안 너비가 가장 넓은 것이 1척 7촌이며, 그 이하는 더욱 좁습니다, 기해년444) 에는 【효종(孝宗)의 대상(大喪) 때이다.】 부판(附板)을 썼고, 갑인년445) 에는 【현종 때이다.】 다른 광판을 썼는데, 안 너비가 모두 2척 2, 3촌이었으니, 이 일은 예비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당합니다. 지금은 여러 도(道)에 흉년이 들었고, 관동(關東)에서는 더욱 수재(水災)를 입었으니, 경차관(敬差官)을 보내는 것이 비록 폐단이 있다 하더라도 막중한 일을 또한 미룰 수만은 없습니다. 만약 민폐(民弊)를 생각한다면 단지 2부(部)에 한하여 작정해 나무를 베게 하고, 경차관은 마땅히 가을 무렵에 내려 보내소서."
하였는데, 김우항 또한 옳게 여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교리(校理) 홍우서(洪禹瑞)가 진언(進言)하기를,
"옛날에 이르기를, ‘1년에 두 번 사유(赦宥)하면 선인(善人)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다.’ 하였습니다. 이번의 소결(疏決)은 또 사령(赦令)에 가까우니,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킬까 두렵습니다."
하였는데, 민진후 및 여러 신하들이 모두 홍우서의 말을 여겼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가뭄을 근심하여 죄수의 죄상을 조사해 밝히는 것은 지금 처음이 아니며, 또 소결(疏決)은 사령(赦令)과 다른데, 어찌 폐지하고 거행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헌납(獻納) 이택(李澤)이 논핵하기를,
"반송사(伴送使)의 임무가 비록 문안사(問安使)와 다르지만 피인(彼人)의 만사(慢辭)446) 를 역설(譯舌)이 몽롱하게 받아 전하여도 하는 대로 맡겨두고 끝내 지휘(指揮)한 일이 없었으니, 추고(推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반송사 윤덕준(尹德駿)을 파직하소서."
하니, 【문안사의 일은 위에 보인다.】 임금이 말하기를,
"반사(伴使)는 문안사와 다름이 있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7월 21일 병인
여러 대신 및 의금부(義禁府)·형조(刑曹)의 여러 당상관을 인견하여 죄수를 소결하였다. 문외 출송(門外黜送)한 죄인 서명우(徐命遇), 도배(徒配)한 죄인 오수원(吳遂元)은 방송(放送)하고, 형조의 죄인 이덕태(李德泰)는 【이덕태의 일은 위에 보인다.】 실성(失性)한 것이 분명한 까닭에 감사(減死)하여 논배(論配)하고, 그 나머지는 경중을 나누어 혹은 그대로 두기도 하고, 혹은 참작하여 처리하였다. 판부사(判府事)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이번에 칙사(勅使) 행차가 돌아갈 때 으레 주는 물건이 모두 정교(精巧)하지 못하였고, 또 서로(西路)에서 청구한 것도 기축년447) 의 예에 의거한다고 핑계대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으므로, 저 사람들이 이로써 화를 내어 심지어 만사(慢辭)로 문안사에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또 듣건대 청천강(淸川江)을 건널 때에 상칙사(上勅使)의 가정(家丁)이 화를 내어 감사(監司)의 빈 가마를 때려 부수었다 하며, 용만(龍灣)448) 에 머물던 날에는 칙사가 본부의 장교(將校)에게 글을 부쳐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청인(淸人)에게 가서 전하게 하였더니, 장교가 물에 빠져 글을 잃었다고 핑계대고는 끝내 전해 주지 않았으므로 목차(穆差)가 또한 매우 화를 내어 말하기를, ‘길을 떠난 후 국왕의 뜻을 본받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합니다, 저들은 연로(沿路)에서 접향(接享)하는 폐단을 모조리 없애 버렸고, 심지어 오르내리는 한 가지 절목(節目)까지도 또한 편리한 대로 따르기를 허락하였는데, 우리는 이에 삼가서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또 변방의 일은 마땅히 낱낱이 장문(狀聞)해야 하는데, 가마를 부수고 글을 잃어버린 등의 일은 끝에 보고하지 않았으니, 양서(兩西)의 방백(方伯)과 빈신(儐臣)에게는 모두 마땅히 논책(論責)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이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양서(兩西)의 감사(監司)는 파직하고, 반송사도 일체로 파직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말하기를,
"해서(海西) 여러 고을의 청구를 한결같이 상정(詳定)한 후에 모두 영문(營門)에서 모아 별장(別將)으로 하여금 요리(料理)해서 처리하게 하였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모리배(牟利輩)인 까닭에 싼값으로 사들여서 준비한 바가 모두 정교(精巧)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이제(李濟)가 설시한 바이니, 마땅히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김창집이 또 당론(黨論)의 폐해를 진달하고, 중도(中道)를 세우는 도리에 힘쓸 것을 청하였는데, 김우항이 상세하게 잇따라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번 폐출(廢黜)한 자는, 신은 그 죄명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제 이미 20년이 지났는데도 죄가 있는지 없는지 논함이 없이 한결같이 금고(禁錮)449) 시키면 반드시 억울한 기운이 있을 것입니다. 체울(滯鬱)한 자를 소통(疏通)시키는 것도 재변을 그치게 하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됩니다."
하였는데, 김창집은 말하기를,
"그 가운데 명의(名義)를 범하고, 어진 사람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한 자를 어찌 경솔히 의논하겠습니까. 그러나 영남의 무고(無故)한 사람은 거두어 임용해도 무방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右相)의 말도 역시 죄가 명의(名義)에 관계된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대개 까닭 없이 폐출된 자를 말하는 것이니, 대의(大意)는 좋다."
하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갑(甲)·을(乙)을 물론하고 논의에 용감한 자는 나라일에 전심(傳心)하지 않으니, 내가 매우 좋아하지 않는다. 조신(朝臣) 가운데 혹 유난히 괴상하고 망측한 자가 누구누구인가를 내가 모두 알고 있는데, 이러한 자는 탁용(擢用)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난번 김운택(金雲澤)은 척리(戚里)로서 논사(論事)함이 많아 매우 타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후 여러 차례 낙점(落點)을 하지 않았었다."
하였다. 교리(校理) 홍우서(洪禹瑞)가 말하기를,
"당습(黨習)이 더욱 심한 자를 가리켜 경책(敬責)한다면 반드시 징계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성교(聖敎)에 이미 ‘누구누구가 논의를 좋아하는지 내가 모두 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으니 즉시 깨우쳐서 계칙(戒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일 혹시라도 감추어 쌓아두고서 발표하지 않는다면, 이는 비격(否隔)450) 의 상(象)이 됩니다. 이후로 신료(臣僚)에게 만약 미안(未安)한 일이 있을 때 즉시 가르치고 경계하여 의심하고 막히는 일이 없도록 하면, 정지(情志)가 유통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임금이 외방(外方)의 죄수가 많이 체옥(滯獄)되어 있다 하여 신칙하여 체옥을 소통시키도록 명하고, 또 호남(湖南)의 연해(沿海)가 해마다 대단히 가문 것이 혹 원기(冤氣)를 초래(招來)함이 없지 않다 하여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자세히 살펴 계문하게 하였다. 또 군함(軍銜)을 겸직하고서 하향(下鄕)한 자가 매우 많다 하여 다시 신칙하여 엄금하기를 명하였다. 승지 이세최(李世最)가 진언하기를,
"이돈(李墩)이 두루 저촉한 일은 처음에 윤팽수(尹彭叟)·갑술(甲戌)로써 사증(詞證)을 삼았는데, 여러 하인을 엄히 신문하여 실토시켰지만, 옥체(獄體)는 끝내 명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연달아 대경(大慶)을 만나 사죄(死罪)를 모두 사유(赦宥)받았으나, 이돈만은 홀로 사유의 은전(恩典)을 입지 못했으니, 어찌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신석(伸釋)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증(詞證)이 구비되고 두루 저촉한 것이 드러났는데, 어찌 쉽게 거론하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유시하기를,
"서원(書院)을 겹쳐 세우는 폐단이 오래 되어서 사액(賜額)을 청하는 상소가 어지러운 것은 일체의 법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비록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된 유현(儒賢)일지라도 만일 서원을 겹쳐 세우는 일이 있으면 엄중히 금단(禁斷)을 가하고, 사액 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일을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만들어 시행하라."
하였다.
7월 22일 정묘
햇빛이 검푸른데도 움직이면서 햇무리가 있었다.
사은사(謝恩使)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과 부사(副使) 권상유(權尙游)가 청대(請對)하였다. 권상유가 말하기를,
"사행(使行) 때 가지고 가는 공화(公貨)를 비국(備局)에서 정식(定式)하였는데, 절사(節使)는 관은(官銀) 2만 3천 냥으로 한정되어 있으나, 별사(別使)는 명백한 정수(定數)가 없습니다. 은화(銀貨)의 용도(用度)는 방물(方物)을 입정(入呈)할 때 많이 쓰이는데, 절사의 방물은 단지 3기(起)뿐이나, 이번 행차는 5기(起)이니 이번은 마땅히 넉넉히 가지고 가야 할 것입니다. 허다한 공비(公費)를 역관의 무리에게 거두는 것은 일이 구차하고 어려운데, 현재까지 채화(菜貨)가 미처 오지 않고 있으니, 만약 공화(公貨)를 얻지 못하면 역관의 무리들은 빈손으로 가는 것을 면치 못하여 거두는 방도가 더욱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임금이 승지를 불러 수서(手書)로 전교하기를,
"작년에 유혁연(柳赫然)과 이원정(李元禎)을 복관(復官)하라는 명은 유혁연 등에게 사정(私情)을 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들의 억울함을 명백히 알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후 한 대신과 【한 대신은 바로 이이명(李頤命)이다.】 김진규(金鎭圭)가 힘써 환수하라고 논하여 비록 의금부로 하여금 문안(文案)을 고출(考出)하라는 전교가 있었으나, 경신년451) 옥안(獄案)은 고출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내가 잘 아는 바이다. 지금 비록 고출하더라도 내가 이전의 견해를 일찍이 변개(變改)한 일이 없으니, 고출하지 말고 전의 판부(判付)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이후에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이로써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예비(例批)를 내리면서 ‘경의 간절한[卿懇]’이란 두 자를 빼었는데, 이는 대개 미안한 뜻을 보인 것이다.
7월 23일 무진
판부사(判府事) 서종태(徐宗泰)가 병 때문에 소결(疏決)에 입참하지 못한 것으로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고, 겸하고 소회(所懷)를 진달하기를,
"성상께서 재변을 만나 경구(警懼)하시어 기우(祈雨)하도록 특별히 명하시니 규벽(圭璧)이 다 떨어졌으며452) , 죄수의 죄상을 조사해 밝히도록 특명하시니 소석(疏釋)이 많은 편입니다. 그런데 잇따라 비올 기미가 있으면서도 아직 쏟아지지 않고 있으니, 하늘의 감응이 한결같이 왜 까마득합니까."
하고, 인하여 궁정(宮庭) 안에서 경건한 정성과 묵묵히 빌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비답을 내리기를,
"차자의 말이 아주 간절하니, 유의(留意)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작년에 본조(本曹)의 계품(啓稟)으로 인하여 제도(諸道)의 각종 방물(方物) 및 삭납 물선(朔納物膳)을 명년 가을까지 한정하여 재감(裁減)하였는데, 방물은 전례에 의하여 복구(復舊)하고 물선은 동지부터 시작하여 복구해 봉진(封進)하는 뜻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명하기를,
"명년 가을까지 한정하여 우선 감하라."
하였다.
7월 24일 기사
큰 바람이 불었다.
성균관의 거재 유생(居齋儒生) 등이 향유(鄕儒) 정필형(鄭必亨) 등의 상소 때문에 【정필형의 상소는 위에 보인다.】 인혐(引嫌)하여 권당(捲堂)하고, 소회(所懷)를 글로 써서 바쳤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이 이시덕(李蓍德)을 동일방(東一房)의 재임(齋任)에 망정(望定)453) 하고 여러 차례 돈면(敦勉)한 나머지 형세가 장차 나와서 대제(大祭)를 담당하려 하였는데, 상소를 거론함으로 인하여 뜻밖에 억제하고 괴란(壞亂)을 꾀하는 자가 무뢰배를 사주하여 한 통의 소를 올렸으니, 그 한 편(篇)의 정신은 모두 재임이 행공(行公)하는 것을 끈질기게 방해하려는 데 있었고, 종사(從祀)를 청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재임이 정필형의 상소 때문에 인입(引入)하고 나오지 않는데, 당초에 재임을 망정(望定)한 자는 신 등이므로 편안치 못한 마음이 재임보다 심하니, 감히 태연히 입당(入堂)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거두어 들어가도록 명하였으나, 제생(諸生)이 명을 받들지 않았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정필형의 소 가운데, ‘구차하게 재임(齋任)을 차임하였다.’는 말은 아주 무상(無狀)하니, 재임은 한결같이 인입(引入)할 필요가 없고, 제생의 권당(捲堂)도 또한 너무 지나치니, 다시 권유(勸諭)하게 하라."
하니, 이튿날 제생이 마침내 입당(入堂)하였다. 이후에 이시덕은 정세가 편안하지 못하다고 청탁하여 끝내 들어와서 나아가 석전(釋奠)을 대행(代行)하지 않으니, 제일(祭日)이 이미 가까와졌으므로 성균관에서 별도로 변통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계품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시종 인혐하는 것은 실로 미안하니, 즉시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7월 25일 경오
큰 바람이 불어 남산의 큰 괴목(槐木) 두 그루가 뽑혀 넘어지고, 대궐 안의 소나무가 부러졌다.
용산강(龍山江)·저자도(楮子島)에서 일곱 번째 기우제를 지냈다.
경상도 안동(安東) 등지에 큰 바람이 불었다.
7월 26일 신미
박권(朴權)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조도빈(趙道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윤지인(尹趾仁)을 대사성(大司成)으로, 민진원(閔鎭遠)을 평안도 관찰사로, 윤세수(尹世綏)를 황해도 관찰사로, 이대성(李大成)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김간(金榦)과 유숭(兪崇)을 장령(掌令)으로, 이진망(李眞望)을 지평(持平)으로, 홍우서(洪禹瑞)를 헌납(獻納)으로, 남도규(南道揆)를 정언(正言)으로, 이택(李澤)을 교리(校理)로, 송성명(宋成明)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헌릉(獻陵) 곡장(曲墻) 밖의 큰 나무들이 모두 부러졌다는 예조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위안제(慰安祭)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또 성균관 성전(聖殿) 동무(東廡)·서무(西廡)의 암막새·수막새 및 전내(殿內)의 기와가 바람에 날려 떨어지고, 합문(閤門)의 자물쇠가 부러졌으며, 전정(前庭)의 은행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향삼문(香三門)이 파괴되었으므로 위안제(慰安祭)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황해도 송화(松禾) 등 10고을에 큰 바람이 불었다.
7월 27일 임신
유성(流星)이 왕량성(王良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홍우녕(洪禹寧)을 승지(承旨)로, 곽만적(郭萬績)을 사서(司書)로, 이필중(李必重)을 설서(說書)로, 홍치중(洪致中)을 부교리(副校理)로, 홍정필(洪廷弼)을 수찬(修撰)으로, 윤양래(尹陽來)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개성부(開城府)·강화부(江華府)와 강원도 여러 고을에 큰 바람이 불었다.
7월 28일 계유
사은사(謝恩使)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과 부사(副使) 권상유(權尙游), 서장관(書狀官) 한중희(韓重熙)가 청국(淸國)에 갔다.
이건명(李建命)을 판윤(判尹)으로, 이택(李澤)을 헌납(獻納)으로, 박필몽(朴弼夢)을 정언(正言)으로, 권첨(權詹)을 부응교(副應敎)로, 홍우서(洪禹瑞)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7월 29일 갑술
손방(巽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어유귀(魚有龜)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전라도·경기 각 고을에 큰 바람이 불고, 전라도 영광·함평(咸平) 등지에 해일(海溢)이 있었고, 경기 광주(廣州)에는 서리가 내렸다.
7월 30일 을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풍재(風災) 때문에 진계(陳戒)하고, 청하기를,
"낭비를 줄이고 영선(營繕)을 정파(停罷)하여 오로지 백성의 일에 마음쓰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김우항이 말하기를,
"진연(進宴)은 우선 가을 농사를 보아 해야 할 일이라고 일찍이 하교(下敎)하셨는데, 흉년이 이 지경에 이르니 다시 청할 겨를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정지하기를 명하였다. 김우항이 말하기를,
"충청 감사 송정명(宋正明)이 수전(水田)은 7분(七分)을 한정해서 급재(給災)454) 하고, 산도전(山稻田)455) 은 경오년456) 과 무자년457) 의 예에 의하여 일체 급재(給災)할 것이며, 추노(推奴)와 징채(徵債), 전민(田民)의 사송(詞訟), 군병 세초(軍兵歲抄)·교생(校生)의 고강(考講)은 일체 정파하는 일로써 장문(狀聞)하였습니다. 수전(水田)으로 바닷가의 더욱 심한 곳은 마땅히 참작하여 분재(分災)458) 를 주어야 하나, 산도전(山稻田)은 진실로 급재(給災)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밖에는 모두 시행하도록 허락할 만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는 말하기를,
"신해년459) 같은 흉년에도 세초(歲抄)를 일찍이 정지하지 않은 것은 대개 그 뜻이 있었던 것이니, 이를 요개(撓改)함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더욱 심한 고을은 분재(分災)를 주되 산도전은 급재를 허락하지 않으며, 추노 징채(推奴徵債)은 모두 장계에 의해 시행하게 하고, 더욱 심한 고을은 세초(歲抄)도 또한 정지하게 하라."
하였다. 김우항의 경상 감사 이탄(李坦)의 장계로써 이뢰기를,
"‘각도의 적곡(糴穀)은 경진년460) 조(條) 이상은 탕감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본도는 원래 임오년461) 이전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없고, 을유년462) ·병술년463) 이 가장 오래 된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만약 근년의 것이라 하여 탕감을 허락하지 않으면, 균등하게 혜택을 주는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였으니, 일체로 견감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민진후는 단지 을유년 것만 감해야 한다 하고, 조태구(趙泰耉)는 일체 탕감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한결같이 견감하도록 명하였다. 김우항이 또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연(金演)의 장계로써 계청(啓請)하기를,
"우수참(右水站)의 수부(水夫)로서 혁파된 자들을 본부(本府)에 추이(推移)하여 대급(代給)하소서."
하니, 민진후는 말하기를,
"수부를 혁파한 후에 각 고을에서 그 출급(出給)을 바라고 있는데 송도(松都)에 전속시키면 반드시 실망할 것이니, 앞으로 형세를 보아가며 환정(換定)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장녕전(長寧殿)의 어진(御眞)을 봉안(奉安)할 때에 감사(監司)는 수로(水路)가 편리하다 하고 유수(留守)는 육로(陸路)를 주장하였습니다. 수로로 받들고 가는 것은 본래 폐단을 없애려 한 것인데, 바닷길은 위험하니, 끝내는 육로의 편안한 것만 못합니다."
하고, 김우항도 또한 그 말을 옳게 여기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면서 절목(節目)을 십분 간략하게 하기를 명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외방(外方)의 사우(祠宇)를 진청(陳請)하지 않고 창건한 경우, 감사와 지방관은 논죄하고 유생(儒生)은 정거(停擧)하는데, 논죄는 일정한 율(律)이 없고 정거는 연한이 없으니, 마땅히 정식(定式)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유생은 3년을 한하여 정거하고, 논죄하는 한 조항은 김우항에게 물으라."
하였다. 김우항이 처음에는 고신(告身)을 빼앗는 것으로 정하려 하였다가 다시 민진후의 말로 인하여 감사는 추고(推考)하고 수령은 파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소환(小宦)에게 명하여 작은 궤자(櫃子) 하나를 가져오게 해 민진후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명릉(明陵)464) 과 익릉(翼陵)465) 사이에 한 언덕이 있는데, 후일의 땅이 될 만하기에 한 소지(小紙)에 친히 써서 봉해 두었으니, 예관(禮官)은 마땅히 알도록 하라."
하였는데, 민진후가 자물쇠를 열고 보니 상자 속에 소지(小紙)가 있어 쓰이기를,
"명릉·익릉 사이에 간좌 곤향(艮坐坤向)의 언덕이 있다. 후일 내상(內喪)이 있게 되면 이 언덕을 쓰되 서로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으니, 명릉 정각(丁閣) 안에다 연달아 3상(床)을 설치해 목릉(穆陵)466) 의 제도처럼 하라."
하였다. 임금이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모두 보게 하고, 본 후에 그대로 자물쇠를 봉하여 내시에게 주었다. 조태구(趙泰耉)가 말하기를,
"오관 사력(五官司曆)이 나왔을 때에 허원(許遠)이 의기(儀器)와 산법(算法)을 배웠는데, 그대로 의주에 따라가서 그 기술을 다 배우게 하였습니다. 의기(儀器)의 쓰임에는 의상지(儀象志)와 황적(黃赤)·정구(正球) 등의 책이 있으니, 산서(算書) 및 이들 책을 인포(印布)하게 하고, 의기(儀器)도 또한 만들게 하였는데, 사력(司曆)이 또 말하기를, ‘그대 나라에 없는 서책(書冊)과 기계(器械)는 마땅히 돌아가 아뢰어 찾아 주겠다.’라고 하였으니, 훗날 사행(使行)에 허원(許遠)으로 하여금 따라가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헌납(獻納) 이택(李澤)이 다시 유혁연(柳赫然)·이원정(李元禎)의 복관(復官)을 환수하라는 논계(論啓)를 내었는데, 대략 말하기를,
"어제 연중(筵中)에서 추안(推案)을 고출(考出)하라는 명이 계셨는데, 대각(臺閣)에서 우선 정지하고 기다린 것은 대개 반한(反汗)467) 이 마땅히 상고하여 아뢸 때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이에 복주(覆奏)를 기다리지 않고 다시 전의 명을 거듭하니, 징토(懲討)를 엄중히 하고 제방(堤防)을 근신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황해도 해주(海州) 등의 고을에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왔으며, 연안(延安)·배천(白川)에는 우박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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