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을사
장령(掌令) 유숭(兪崇)이 관서(關西)의 흉년이 든 상황을 진소(陳疏)하고 【유숭이 경시관(京試官)으로 겨우 관서에서 돌아왔었다.】 청하기를,
"개천(价川)·은산(殷山) 두 고을 가운데 더욱 심한 곳과 더욱 혹심한 재해를 입은 다른 고을은 헤아려 마땅히 급재(給災)하되, 혹은 신포(身布)를 감하고 적곡(糴穀)495) 을 감하고, 해서(海西)와 기전(畿甸)의 한전(旱田)은 급재(給災)하도록 허락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관서(關西)의 문풍(文風)이 크게 변했으니, 청컨대 공도회(公都會)496) 의 액수(額數)를 한두 사람 청천강(淸川江) 남북에 가정(加定)하여 많은 선비들의 희망을 위로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9월 2일 병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조태채(趙泰采)가 아뢰기를,
"북한성의 조적(糶糴)을 다만 파주·고양·양주에만 나누어 주면 백성은 적고 곡식은 많음을 면치 못하니, 교하(交河) 또한 똑같이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경리청(經釐廳)은 다만 명호(名號)만 있는데, 북교(北郊) 고사(庫舍) 밖의 좌기청(坐起廳) 및 북한산 9사(寺)에 또 별당(別堂)과 고사(庫舍)를 건축할 일이 있으니, 청컨대 공명첩(空名帖) 5백 장을 더 얻어 그 역사를 완성하게 하소서. 충익위(忠翊衞)에 모속(冒屬)된 자를 비국(備局)에서 본청(本廳)으로 이속(移屬)시켰는데, 액수가 수천에 지나지 않으니, 그대로 본청에 소속시켜 수첩 군관(守堞軍官)이라 이름하여 매년 베 1필씩을 받아 승속(僧俗)497) 을 접제(接濟)하는 밑천을 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조태채가 말하기를,
"경상좌도(慶尙左道)에서 감시(監試)의 방(榜)을 이미 7월 그믐께 내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그 가운데 입격(入格)한 유생들이 올라와 강소(講所) 문 밖에 모여 있으나 강(講)에 응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긍(可矜)합니다. 외간에 혹시 초방(草榜)을 등사해 가지고 온 자가 있으면, 우선 그것으로 청허(廳許)하고, 응강(應講)하는 것은 방목(榜目)의 계본(啓本)이 올라오기를 기다려 이름을 대조해 빙고(憑考)하는 것이 좋을 듯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수령의 일이 매우 근거없다 하여 나추(拿推)하도록 특명하였다. 강(講)이 파하자, 황해 감사 윤세유(尹世綏)를 인견하고 면유(勉諭)하여 보냈다. 윤세유가 청하기를,
"도내(道內)의 수령을 무변(武弁)은 정밀하게 가려서 차송(差送)하고, 문신(文臣)은 시종(侍從)으로 출입한 자를 가끔 차송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가 상소하여 매우 급히 귀양(歸養)하기를 원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황조(皇朝)의 대산(戴珊)498) 은 효 황제(孝皇帝)의 성심에서 우러난 부탁을 받았으니, 비록 귀양하고자 하였으나 감히 귀양하지 못한 경우가 본디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산은 해를 넘겨 관직에 머물다 죽어 마침내 한을 남겼으니, 효 황제가 부자 사이로 여긴 은혜로 처음에 만약 그렇게 될 줄을 알았으면, 어찌 불쌍히 여겨 허락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봄 무렵에 비지(批旨) 가운데에 유시한 바는 바로 대산을 가리킨 것이었다. 효 황제가 유대하(劉大夏)의 말로 인하여 유대하에게 이르기를, ‘경이 가서 대모(戴某)에게 「태평의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어찌 차마 짐(朕)을 버리고 먼저 돌아가려 하는가.」라고 설득하라.’ 하였다. 유대하가 이상의 말로 대산에게 고하자, 대산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는 집을 돌아갈 수가 없다.’ 하였으니, 이에서 군신(君臣)의 정의(情意)가 서로 미더웠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내가 함께 큰 일을 할 수 없지마는, 경(卿)은 숙덕(宿德)의 원로(元老)로서 나라의 위급한 형세를 홀로 생각하지 않는가."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가서 개유하게 하였다.
9월 3일 정미
크게 천둥하며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특진관(特進官) 윤취상(尹就商)이 청하기를,
"관서의 환곡(還穀)을 옮겨서 수원의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수원 군병(軍兵)의 신역(身役) 6두미(斗米)도 또한 1두를 감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환곡을 옮기는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수찬(修撰) 황귀하(黃龜河)가 청하기를,
"각 고을의 받아들이지 못한 옛 환곡(還穀)은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소서."
하니, 또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윤봉조(尹鳳朝)를 지평(持平)으로, 조명봉(趙鳴鳳)을 정언(正言)으로, 이진유(李眞儒)를 교리(校理)로, 황귀하(黃龜河)를 부교리(副校理)로, 어유귀(魚有龜)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신명(新命)을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9월 4일 무신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교리(校理) 신사철(申思喆)과 황귀하(黃龜河)가 유혁연(柳赫然) 등의 일을 진달하기를,
"문안(文案)을 다시 상고하여 처리하는 것이 진실로 삼가는 도리에 맞는데, 대계(臺啓)를 윤허하지 않으시니, 지극히 공정한 도리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고, 또 홍중휴(洪重休)를 공척하기를,
"대각(臺閣)을 침척(侵斥)함이 실로 한심스러우니, 마땅히 척벌(斥罰)을 더하여 호오(好惡)를 분명하게 보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차자를 올려 재이(災異)로써 면직하기를 원하고, 또 말하기를,
"경신(庚申)에【 경술년499) 과 신해년500) 이다.】 기근이 들었을 때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자신의 아픔처럼 근심하셨으며, 몇 명의 충근(忠勤)한 신하들은 진휼하는 일을 분장(分掌)하여 또한 정성을 다하였는데, 어떤 이는 감진(監賑)하다가 여역(癘疫)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원하건대 선왕께서 근심하신 것처럼 근심하시고 여러 신하 가운데 재능과 성의가 있는 자를 특별히 가려서 진휼하는 일을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말하기를,
"부진(附陳)한 일은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9월 5일 기유
유성(流星)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청하기를,
"병조(兵曹)·호조(戶曹)에 봉부동(封不動)501) 한 포목(布木)을 진청(賑廳)에 이송(移送)하여 경기·충청 두 도(道)에 나누어 대여(貸與)해서 백성을 진휼하는 밑천을 삼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말하기를,
"춘당대(春塘臺) 거둥 때 파진(罷陣)의 명이 내린 후 대장(大將)이 미처 궐문을 나오지 않았는데 중군(中軍)이 앞질러 먼저 파진하였습니다. 군법이 지극히 엄중한데, 어찌 장수의 영을 기다리지 않고 앞질러 파진할 수 있겠습니까. 대장 이기하(李基夏)는 기율이 엄하지 못함을 알 수 있으니 추고(推考)하고, 중군 이용(李溶)은 나문(拿問)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청하기를,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를 불러 면대해서 유시하여 머울러 있게 하시고, 판부사 이유(李濡)를 다시 돈소(敦召)하시고, 판부사 최석정(崔錫鼎)도 똑같이 소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정언(正言) 조명봉(趙鳴鳳)이 진계(進啓)하기를,
"헌납(獻納) 홍중휴(洪重休)는 소어(疏語)가 사리에 어긋나고 사당(私黨)을 굽혀서 비호하며 공의(公議)와 힘껏 싸우더니, 유신(儒臣)과 간신(諫臣)이 혹은 상소하기도 하고 혹은 인피하기도 하여 논척(論斥)이 골고루 이르자 상소하여 거듭 거리낌없이 꾸짖어 욕하였으니, 【홍중휴(洪重休)가 일전에 다시 상소하여 대신(臺臣)을 헐뜯었기 때문이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파한 후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를 불러들이게 하였는데, 이여가 입대(入對)하여 귀양(歸養)하기를 매우 간절히 원하자, 임금이 재삼 위유(慰諭)하고, 명하여 앞으로 나오게 하여 그 손을 잡고 또 대산(戴珊)의 일을 인용하여 개유하기를,
"군신 사이가 어찌 고금에 다름이 있겠는가. 병이 만약 더하면 명년 봄에 귀양하도록 허락할 것이나, 지금은 결코 귀양하게 할 수가 없으니, 이는 실로 가슴속에서 나오는 말이다."
하였다. 이여가 누누이 귀양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고, 인하여 명하기를,
"도성 안에 겨울을 지낼 집을 골라 주라."
하고,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시탄(柴炭)을 수송하게 하였다, 이후에 임금이 또 액정인(掖庭人)에게 명하여 별도로 시탄(柴炭)을 수송해 주게 하고, 또 하교하여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최석정(崔錫鼎)에게 개유하기를,
"이미 지나간 일은 내가 가슴속에 남겨 두지 않으니,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본받아 안심하고 도성으로 들어오라."
하고, 인하여 함께 오도록 하였다.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천둥한 이변(異變)으로 사직 차자를 올리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9월 6일 경술
서방(西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황일하(黃一夏)를 승지(承旨)로, 신사철(申思喆)을 헌납(獻納)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9월 7일 신해
금성(金星)이 태미원(太微垣) 좌액문(左掖門) 안으로 들어갔다.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차자를 올리기를,
"부모(父母)의 분산(墳山)에 불이 나서 번졌으나, 무덤만은 겨우 면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즉시 떠나 소제(掃除)하게 해 주소서."
하니, 이를 허락하고 말과 전수(奠需)를 주도록 명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가 사양하는 차자를 올렸으나, 【가사(家舍)를 골라 주고 시탄(柴炭)을 수송해 주라는 명을 사양한 것이다.】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9월 8일 임자
달이 우숙 제2성(牛宿第二星)을 범하였다.
제주(濟州)·대정(大靜)·정의(旌義)에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바다와 산을 뒤흔들어 나무가 부러지고 집이 무너졌는데, 무너진 인가가 2천여 호나 되도록 많고 사람이 또한 많이 압사하고, 우마 4백여 필이 죽었다. 명하기를,
"압사한 사람에게는 휼전(恤典)을 거행하도록 하라, 한 섬에서 입은 재해가 이처럼 혹심하니, 목사(牧使)가 순심(巡審)하여 장문(狀聞)하기를 기다려 즉시 곡식을 옮겨서 구제해 살릴 터전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현도(縣道)를 통해 사직소를 올리니, 함께 오도록 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유시하기를,
"한번 무함을 받았다 하여 문득 모두 물러나 귀양(歸養)한다면 반드시 조정이 텅비게 될 것이니,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빨리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려서 즉일로 도성에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9월 9일 계축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이 사직소를 올려 소명(召命)을 거두고 사관(史官)을 철수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지난해 약원(藥院)의 일은 경(卿)의 본정(本情)이 어찌 삼가지 않은데서 나온 것이겠는가. 내가 이미 일찍이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전교하였으니, 지금은 불안해 할 일이 없다."
하고, 인하여 즉일로 도성으로 들어오도록 명하고, 함께 오도록 한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유시하게 하였다.
9월 10일 갑인
유성(流星)이 위성(危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다.
6월의 도목정(都目政)을 늦추어 거행하여 이언강(李彦綱)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윤지인(尹趾仁)을 특승(特陞)하여 판윤(判尹)으로, 권성(權𢜫)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재(李縡)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유태명(柳泰明)을 승지(承旨)로, 황귀하(黃龜河)를 교리(校理)로, 신사철(申思喆)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윤봉조(尹鳳朝)를 부교리(副校理)로, 헌납(獻納) 조상경(趙尙絅)을 즉시 옮겨 사서(司書)로, 남세진(南世珍)을 장령(掌令)으로, 안중필(安重弼)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 유봉휘(柳鳳輝)가 상소하여 잉임(仍任)을 사양하고 안하여 진달하기를,
"본도(本道)의 더욱 심한 고을에는 먼저 감영(監營)에 저축된 전포(錢布)를 빌어서 주선하여 곡식을 모았으나, 이밖의 여러 고을은 두루 미칠 수가 없어서 환상(還上)의 금년의 모곡(耗穀)을 받아들이는 대로 모조리 주어 백급(白級)502) 하는 밑천을 삼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강원의 쌀·콩 4, 5만석을 이전하여 획급(劃給)하소서."
하니,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고, 인하여 사양하지 말고 진정(賑政)에 마음을 다하도록 하였다. 또 유봉휘의 장청(狀請)으로 도내(道內)의 정배(定配)한 사람 가운데 다른 고을에 정배하여 노예가 되기를 자원하는 사람은 역시 일체로 조금 충실(充實)한 고을로 이배(移配)하게 하였다.
9월 11일 을묘
눈이 오고, 밤에 번개가 쳤다.
도목정(都目政)을 하여 홍우서(洪禹瑞)를 특승(特陞)하여 승지(承旨)로, 권변(權忭)을 부교리(副校理)로, 홍호인(洪好人)을 필선(弼善)으로 김취로(金取魯)를 설서(說書)로, 이문흥(李文興)을 사간(司諫)으로, 홍치중(洪致中)을 겸보덕(兼輔德)으로 삼고, 성주 안핵 어사(星州按覈御史)를 다시 차임하였다. 처음에 성주 안핵 어사 정찬선(鄭纘先)이 반 년 동안 옥사(獄事)를 조사하였는데 끝내 그 단서를 얻지 못한 채 조명(朝命)을 기다리지 않고 앞질러 먼저 조정으로 돌아와 이내 옥정(獄情)의 경개(梗槪)를 소진(疏陳)하였으나, 역시 명백하게 조사해낸 말이 없었다. 임금이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말하기를,
"명을 받들어 옥사(獄事)를 조사하면서 아직껏 끝내지 못하고는 어렵다고 핑계하고 마음대로 올라왔으니, 일의 해괴함이 이보다 더 심함이 없다."
하고, 정찬선을 파직하라 명하니, 지평(持平) 남도규(南道揆)가 논계하여 삭탈 관작(削奪官爵)을 청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삭탈 관작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고, 따르지 않고, 이정제(李廷濟)를 정찬선 대신으로 안핵 어사를 삼았는데, 상소하여 인피하기를,
"사관(査官)과 친혐(親嫌)이 있으므로 안치(按治)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체직을 허락하고, 홍치중(洪致中)으로 이를 대신하였다.
9월 12일 병진
명하기를,
"평양 무열사(武烈祠)의 춘제(春祭)는 선무사(宣武祠)의 예에 의하여 황단(皇壇)에 제사를 지낸 후에 춘제(春祭)를 거행하도록 하다."
하였으니, 예관(禮官)의 말을 따른 것이다.
9월 13일 정사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경연(知經筵)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피중(彼中)에 들여보낸 문서 가운데 어보(御寶)의 자획(字劃)을 보완한 것이 정밀하지 못하다고 하는데, 이는 대개 화원(畫員)를 시켜 자획을 보완하게 하였는데 이 무리들이 전혀 전법(篆法)에 어두워 이렇게 되게 된 것입니다. 괴원(槐院)503) 의 전문 서사관(篆文書寫官)은 하는 일 없이 늠료(廩料)만 먹고 있으며, 운각(芸閣)504) 또한 인문(印文)을 모사(模寫)하는데 불과합니다. 이제 두 전관(篆官)의 늠료를 화원에게 옮겨 주어 달마다 취재(取才)하여 차등을 두어 부료(付料)한다면 반드시 흥기(興起)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말하기를,
"법강(法講)505) 에 무신(武臣)이 들어와 참여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뜻이나, 소회(所懷)를 진백(陳白)하는 자가 하나도 없으니,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서울에 있는 자로 하여금 비록 매번 진달하게 할 수는 없더라도 새로 밖에서 온 자는 문견을 다 진달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후일에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인하여 무신(武臣) 민순(閔純)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여 소회를 진달하게 하였는데, 대개 민순이 새로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에서 체직되어 왔기 때문이다. 민순이 대단히 폐막(弊瘼)이 없다고 대답하면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물러났다. 교리(校理) 홍우서(洪禹瑞)가 천재(天災)와 민은(民隱)으로써 금년 생진(生進)506) 의 유가(遊街)507) 를 금하기를 청하고, 민진후(閔鎭厚)는 대과(大科)도 일체로 거듭 금(禁)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관상감(觀象監)의 계사(啓辭)로써 일관(日官)을 추치(推治)하였다. 대개 초5일에 해와 달이 화성(火星)과 서로 합하였는데, 잘못으로 달이 미수(尾宿)를 범하였다고 계문했기 때문이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송정명(宋正明)이 사직소를 인하여 덧붙여 진계(陳啓)하기를,
"해택(海澤)은 치우치게 한재(旱災)를 입었는데 단지 8분재(八分災)만 주니, 혜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산군(山郡)은 또 풍재(風災)를 입었는데, 만약 실결(實結)508) 의 세(稅)를 요구한다면 백성들의 원망소리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좌우의 강 연안에는 산도(山稻)를 많이 심었으나, 모두 한전(旱田)인 까닭에 급재(給災)하지 않았으므로, 장차 백지(白地)509) 의 징세(徵稅)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경오년510) 과 무자년511) 에는 한 도(道)를 통틀어 7분재(七分災)를 주었고, 산도(山稻) 또한 급재(給災)하도록 허락했었는데, 유독 올해에만 위의 것을 덜어 아래 보태주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음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금년의 재황(災荒)은 호서가 가장 혹심하고 기전(畿甸)도 같은데, 근본512) 의 땅 또한 마땅히 진념(軫念)해야 하니, 내탕(內帑)을 열어 진휼에 보태는 것을 늦출 수 있겠는가. 이제 은자(銀子) 1천 냥을 내려 호서에 내려 보내고, 8백 냥은 기영(畿營)에 내려보내어 내가 적자(赤子)를 돌보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튿날 연중(筵中)에서 지경연(知經筵) 조태구(趙泰耉)가 아뢰기를,
"내장(內藏)이 이미 비었으니, 지부(地部)513) 에 저장된 것을 내어 호남에 내려보내 고루 혜택을 주는 뜻을 보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탕(內帑) 역시 남은 것이 없지 않다."
하고, 즉시 비망기를 내려 또 1천 냥을 내어 호남으로 내려 보내기를 명하였다.
9월 14일 무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경연(知經筵) 조태구(趙泰耉)가 말하기를,
"북한(北漢)에 저장된 어공미(御供米) 3백 석을 바야흐로 광흥창(廣興倉)의 쌀로 이송하는데, 운반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금후에는 기읍(畿邑)의 전세(田稅) 중에서 3백 석은 북한으로 보내고, 1년을 걸러서 절반씩 개색(改色)514) 하여 3백 석은 항상 남겨 두는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평안도 철산(鐵山) 등지에 지진이 있었다.
9월 15일 기미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청하기를,
"전라 감사 유봉휘(柳鳳輝)의 소에 의하여 강도(江都)의 쌀 1만 석을 호남(湖南)에 이송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갈두산(葛頭山)에 저장된 곡식과 호남 연해(沿海) 고을 진청(賑廳)의 회부곡(會付穀) 1만 석을 한정하여 제주로 들여보내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호서(湖西) 연해 고을에는 7분재(七分災)를 주소서."
하고, 이어 말하기를,
"기읍(畿邑)과 호남도 또한 다르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호남 감진 어사(湖南監賑御史)를 차출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르고, 감진 어사를 우도 감진 어사라 일컬어 내려 보냈는데, 송상기(宋相琦)의 말을 따른 것이다.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괴원 분관(槐院分館)이 아직까지 늦어지고 있습니다. 우위(右位)는 비록 이미 삭직(削職)하였으나, 차관(次官)은 조령(朝令)이 아니면 거행할 수 없는 것이 예(例)라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차관이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근래에 과거(科擧) 후 사람들의 말이 시끄러워서 사람들이 모두 고관(考官)을 싫어하여 피하고 있습니다. 작년 정시(庭試)의 고관은 지금까지 인혐(引嫌)하고 있고, 대신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일제(九日製)515) 는 아직껏 명령이 나오지 않아 장차 설행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마땅히 신칙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김창집 및 좌참찬(左參贊) 최석항(崔錫恒)이 모두 정시(庭試)의 고관(考官)으로서 인혐(引嫌)하고 사직하니, 임금이 인혐하지 말고 빨리 구일제(九日製)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조태로(趙泰老)가 본부(本府)의 재황(災荒) 때문에 청하기를,
"병자년516) 의 전례에 의하여 군향(軍餉) 각종 곡식 환분(還分)의 절반을 늦추어 받아들이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공명첩(空名帖)을 얻어 곡식을 모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이 청하기를,
"성주 어사(星州御史) 홍치중(洪致中)이 내려갈 때에 일을 잘 아는 자 한두 사람을 별도로 데리고 가게 하되, 말[馬]을 주지 말고 관공(官供)을 제(除)하고 약간의 자급(資給)으로써 기탐(譏探)하는 방도를 삼게 하소서."
하고, 민진후 또한 말하기를,
"만약 잘 염탐하면 논상(論賞)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비국(備局)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명하기를,
"전라도 각 고을 유생(儒生)의 고강(考講)을 정지하고, 각 산성(山城)에 소속된 백성의 환곡(還穀)은 모두 받아 본읍에 머물러 두고, 함경도 삼수(三水)·갑산(甲山)과 육진(六鎭) 유생의 고강(考講) 또한 정지하는 것을 윤허한다."
하였다.
9월 16일 경신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고, 유성(流星)이 북하성(北河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유숭(兪崇)을 사간(司諫)으로, 신사철(申思喆)을 헌납(獻納)으로, 김유(金楺)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어유귀(魚有龜)를 부교리(副校理)로, 한지(韓祉)를 수찬(修撰)으로, 홍석보(洪錫輔)를 전라우도 감진 어사(全羅右道監賑御史)로 삼았다.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이 현도(縣道)를 통해 진소하여 사관(史官)을 철수하기를 청했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충청도 직산(稷山) 등지에 바람이 불고 천둥하고 우박이 내렸다.
9월 17일 신유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현도(縣道)를 통해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누누이 답을 내리고, 함께 오도록 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개유하도록 하였다.
평안도 의주(義州) 등지에 천둥하며 우박이 내리고, 용강(龍岡) 등지에는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었다.
9월 18일 임술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조태구(趙泰耉)가 말하기를,
"허원(許遠)을 일찍이 사행(使行)에 딸려 들여보내는 일로 품정(稟定)하였으나, 의기(儀器)를 미처 만들지 못하였고, 또 그가 의주에서 배워온 산법(算法)을 모조리 이해하지 못하였으니, 이번 행차에 들여보내기가 어렵겠습니다. 우선 허원으로 하여금 먼저 붓·먹·종이·부채 등의 물건을 가지고 사력(司曆)에게 글로 문안하며 가르침을 받겠다는 뜻을 전하게 하고, 후에 들여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헌부에서 논핵하기를,
"흥덕 현감(興德縣監) 김중태(金重泰)는 토민(土民) 이명진(李命稹)에게 화를 내어 이명진 아비의 무덤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추인(蒭人)517) 을 만들어 그의 아비 성명을 쓴 다음 죄를 다스려 초사(招辭)받기를 살아 있는 사람과 같이 하고, 마침내 끌어내어 찢어 버렸으니, 거조가 해괴하였습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구일제(九日製)를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김광운(金光運)에게 급제(及第)를 내려 주었다.
9월 19일 계해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주강에 나아갔다.
박권(朴權)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조태채(趙泰采)가 장차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으므로, 진소하여 병판(兵判)을 사면하였다.】 삼았다.
비국(備局)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백두산에 목책(木柵)을 설치하는 역사를 흉년 때문에 우선 정지하였다.
9월 20일 갑자
흉년 때문에 명하기를,
"우선 호서의 수군·육군의 조련 및 함경남도 병사(咸鏡南道兵使)의 순조(巡操)를 정지하라."
하였다.
9월 21일 을축
비국(備局)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명하기를,
"기영(畿營)과 호서(湖西)에 보낸 호조와 병조의 무명 3백 동(同) 가운데 1백 동을 덜어 전라도에 나누어 보내 진자(賑資)에 보태도록 하라."
하고, 또 명하기를,
"전라도 각 군병(軍兵)의 도안(都案)과 식년 호적(式年戶籍)은 명년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고, 더욱 심한 고을의 세초(歲抄)는 우선 정지하라."
하였다
대사헌 권상하(權尙夏)가 현도(縣道)를 통해 사직소를 올리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9월 22일 병인
유성(流星)이 위성(胃星) 아래에서 나와 북방(北方)으로 들어갔다.
승정원에서 천둥의 이변으로 진계(陳戒)하고, 또 청하기를,
"성덕(聖德)이 이미 닦였다 하여 자만(自滿)하지 마시고, 방내(方內)에 근심이 없다 하여 혹시라도 소홀하지 마시고 더욱 건극(建極)518) 하는 도리와 보민(保民)하는 정사에 유의하소서. 우배 창언(禹拜昌言)519) 의 덕을 넓히시고, 우순(虞舜)의 칙천지명(勑天之命)520) 의 정성을 본받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번 천둥하는 이변이 갑자기 입동(入冬) 후에 발생했으므로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위태함에 애가 타는데, 진계(陳戒)한 것이 아주 간절하니, 마음에 두지 않겠는가."
하였다.
9월 23일 정묘
개성부(開城府)에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천둥하고, 우박이 내렸다. 강화부(江華府)에는 비와 우박이 내리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9월 24일 무진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이 현도(縣道)를 통해 봉소(封疏)를 올리기를,
"경악(經幄)의 장(長)이 또 전일에 경의(經義)를 훼파(毁破)했다고 배척을 제기하였으니, 시의(時議)의 엄준함을 이에서도 볼 수가 있는데 오히려 어찌 거취(去就)에 대해 감히 논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미 지나간 일을 잊지 않고 있으니, 진실로 온당하지 않다."
하고, 인하여 안심하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홍문관에서 【교리(校理) 황귀하(黃龜河)와 부교리(副校理) 어유귀(魚有龜)이다.】 천둥한 이변으로 진계(陳戒)하는 차자를 올렸는데, 첫머리에 말하기를,
"논의(論議)가 매우 어지럽고, 기강이 무너지고, 백성이 곤궁하고, 군역(軍役)이 번거롭고 괴로우며, 도적이 몰래 일어나고, 변경[邊圉]이 허술하고, 옥송(獄訟)이 지체되고, 풍속이 무너진 것은 천심(天心)을 거슬려 천재를 부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고, 인하여, 선왕(先王)의 정사를 닦고, 선왕의 마음을 본받아 수성(修省)하는 방도를 삼아야 한다면서 말하기를,
"세종 대왕께서는 재변을 만난 날을 당하여 법에 어긋나는 징렴(徵斂)과 급하지 않은 역사는 한결같이 정파해서 백성들이 힘을 펴게 하셨고, 선조 대왕께서는 임진년521) 병란을 당한 후에 계사년522) 과 갑오년523) 양년(兩年)의 흉년을 당하자 어공(御供)을 덜어내어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셨는데, 지금 전하께서 급재(給災)하고 부세를 견감하신 것은 바로 세종께서 징렴을 정지한 뜻이며, 내탕(內帑)을 내어 진휼에 보탠 것은 선조께서 어공을 줄인 뜻입니다. 과연 이런 마음을 지켜 부지런히 힘써 게으르지 않고 순실(純實)하게 행하고, 오랫동안 지니시어 한결같이 우리 조종(祖宗)과 같게 하신다면, 천심(天心)을 감격시키어 재변을 소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끝에서는 또 위 무공(衞武公)이 90세 억시(抑詩)524) 를 풍송(諷誦)한 일을 인용(引用)해 말하기를,
"전하의 춘추(春秋)는 무공(武公)의 나이에 비해 겨우 그 절반을 넘었으나, 책임의 중함과 시세(時勢)의 어려움은 무공보다 백 배나 되니, 감히 무공이 시종 계근(戒謹)한 것으로써 우리 전하께 권명(勸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팔도 유생(八道儒生) 최홍제(崔弘濟) 등이 상소하여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종사하는 것은 사체가 중대하다고 비답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비국(備局)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명하기를,
"함경도 6진(六鎭)과 삼수(三水)·갑산(甲山)의 전세(田稅)를 전감(全減)하고, 그 나머지 각 고을 가운데 더욱 심한 곳은 3분의 1을 감하라."
하였다.
9월 25일 기사
흰 구름 같은 한 줄기 기운이 손방(巽方)에서 일어나 건방(乾方)을 가리켰는데, 길게 하늘을 가로질렀으며, 한참 후에야 사라졌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정읍(井邑) 땅에 적당(賊黨) 1백여 명이 창(槍)을 지니고 포(炮)를 쏘며, 그 괴수는 갑옷[甲冑]을 입고 말을 타고 인가에 돌입(突入)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실로 비상한 변고이니, 다만 토포사(討捕使)에게만 위임하여 잡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로 하여금 같이 잡게 하소서."
하고,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은 말하기를,
"나주 영장(羅州營將) 백한상(白漢相)은 집이 장흥(長興)에 있어서 동도(同道)의 사람이므로 반드시 마음놓고 도둑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니, 개차(改差)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지사(知事) 송상기(宋相琦)의 말로 인하여 이후에는 동도(同道) 사람으로 영장(營將)을 차송하지 말하는 일을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였다. 김창집이 또 청하기를,
"호남 감진 어사(湖南監賑御史) 홍석보(洪錫輔)가 군관(軍官)을 거느리고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옳게 여겼는데, 사간(司諫) 유숭(兪崇)이 말하기를,
"연해(沿海)는 6, 7일 노정(路程)에 불과하고, 홍석보는 나이와 근력이 바야흐로 강성하니, 군관을 데리고 가서 폐단을 끼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두도록 명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괴원(槐院)의 관원은 우위(右位)가 죄를 입으면 차관(次官)이 대신 분관(分館)을 맡을 수 없다고 하니, 삭탈(削奪)한 사람을 모두 서용하여 속히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고원 군수(高原郡守) 어사충(魚史忠)은 백도(白徒)525) 로서 문무(文武)를 교대로 차송하는 고을에 차임되었으니, 체차하여야 마땅합니다.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이와 같은 사람을 다시는 수령(守令)에 차임하여 보내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전(前) 군수(郡守) 정중만(鄭重萬)은 그의 부모 무덤이 사릉(思陵)526) 과 아주 가까운 땅에 있어서 이제 곧 이장(移葬)하려 하는데, 사릉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와 발인(發靷)할 때 장차 정자각(丁字閣) 앞으로 곧바로 지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막기가 어려울 듯하나, 사체에는 미안합니다."
하자, 김창집과 김우항이 모두 금하기 어렵다고 하니, 임금이 명하여 윤허하였는데, 또 명하기를,
"석물(石物)은 옮겨가지 못하게 하고, 천폄(遷窆)527) 할 때 신칙하여 시끄럽게 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정씨(鄭氏) 선영(先塋)이 사릉 뒤에 있으니 마땅히 능관(陵官)으로 하여금 분묘를 상하게 하는 수목(樹木)을 자주 제거하게 하여 허물어지지 않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사액 서원(賜額書院)은 모입(募入)한 자를 20명으로 한정하고, 사액하지 않은 것은 10명으로 한정하였으며, 향교(鄕校)는 처음에 거론하지 않았는데 대신이 말하기를, ‘서원에 비해 마땅히 그 수효를 배로 해야 한다.’라고 하니, 청컨대 40명으로 한정하소서. 또 서원의 추향(追享)은 일이 마땅히 소청(疏請)하여 윤허를 받은 후에 거행해야 하는데, 근래에 혹시 품주(稟奏)하지 않고 먼저 추향하는 자가 있으니, 각도(各道)에 사문(査問)하여 이와 같은 자가 있으면 도신(道臣)·읍재(邑宰) 및 수창(首倡)한 유생(儒生)을 논벌(論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경기(京畿) 여러 고을에 크게 천둥하고 우박이 내렸다.
9월 26일 경오
이택(李澤)을 부수찬(副修撰)으로, 홍상빈(洪尙賓)을 문학(文學)으로, 송성명(宋成明)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삼았다.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차자를 올려 약원(藥院)과 군문(軍門)의 관직을 해면(解免)하기를 청하고, 끝에 또 말하기를,
"신과 이유(李濡)는 함께 의정(議政)하다가 같이 수치를 받았습니다. 이제 이유는 황교(荒郊)에 오랫동안 물러가 살면서 은소(恩召)를 받들지 않고 있는데, 신은 그대로 높은 반열에 있으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같이 하면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밖에 있는 대신이 아직껏 조정에 나오지 않는 것 때문에 매우 억울(抑鬱)해 하고 있는데, 경(卿)이 또 이렇게 아주 뜻밖에 물러가기를 청하니, 몹시 놀라 깨우칠 말이 없다. 다시는 말하지 말고 조금 기다렸다가 공무(公務)를 집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7일 신미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와 함께 오도록 한 사관(史官)이, 이유가 지난 밤부터 갑자기 질환(疾患)이 있어 우선은 도성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뜻으로 계문하니, 명하기를,
"의원(醫員)에게 약물(藥物)을 가지고 가서 보게 하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핵하기를,
"연일 현감(延日縣監) 최태제(崔泰齊)는 좌수(座首) 김최(金最)의 말만을 치우치게 듣고서 함부로 인명을 죽인 것이 3인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고, 좌수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8일 임신
유명응(兪命凝)을 집의(執義)로, 홍호인(洪好人)을 장령(掌令)으로, 이명언(李明彦)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팔도 유생(八道儒生) 최홍제(崔弘濟) 등이 세 번째 상소하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서종업(徐宗業)도 또한 상소하여 잇따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많은 선비들의 진청(陳請)은 지성에서 나온 것이나, 내가 어렵게 여기는 것은 그 사체가 중대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서종업(徐宗業) 등이 세 번이나 상소하여 청했으나, 임금이 또한 따르지 않았다.
헌납(獻納) 신사철(申思喆)이 소회(所懷)를 상소하여 맨 먼저 흉년의 백성들 고통에 대해 말하며 더욱 백성을 살리는 정사를 강구하기를 청하고, 잇따라 서명우(徐命遇)의 일을 말하기를,
"당의(黨議)가 있어온 이래로 조정 신하들을 두루 헐뜯고 뜻을 다해 허구 날조한 것이 서명우의 상소과 같은 것이 없었으니, 삭출(削黜)하는 벌로 어찌 충분히 그 죄를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조정 신하들을 무욕(誣辱)하면서 거의 천고(千古)의 간사한 사람이라 지목하고, 혹은 털끝만한 것을 가리켜 태산처럼 크다하고, 허무한 것을 가리켜 실제 있는 일로 삼았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다른 사람을 끝없이 참소하니, 북쪽 변방으로 내쫓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무리를 말한 것입니다. 한때 작은 죄로 처벌했다가 즉시 사유(赦宥)로 인해 특별히 감벌하였는데, 이는 서명우에게 있어서는 털끝만큼도 손해가 없으나, 대신이 지위를 떠나고 여러 신하들이 물러가서 조정의 모양이 분열되어 수습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서명우의 계책이 행해졌습니까, 행하여지지 않았습니까. 서명우의 소어(疏語)가 교특(巧慝)하지 않음이 없으나, 가장 큰 ‘총애를 구하여 지위를 굳혔다.[徼寵固位]’는 네 글자는 더욱 놀랍고 한탄스럽습니다. 대신에게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어찌 분명하게 말하고 드러나게 지적해서 그 죄를 들추어 내지 않고, 이에 전말(顚末)을 숨긴 채 그 말을 현혹시켜 속여서 의란(疑亂)시키고 명예를 손상시키는 계책을 삼는 것입니까. 지금 대신들이 나오기 어렵다고 결심한 것은 바로 이에 있고, 함께 일하던 대신도 매우 불안한 마음을 품어 어제 또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니, 오늘 한 보상(輔相)을 잃고 내일 한 보상을 잃으면, 전하께서는 장차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엄중히 벽파(劈破)를 가하셔서 대신의 심사(心事)를 밝히고 참소하는 사람의 간사한 계책을 막으소서."
하고, 말미에 재이(災異) 때문에 경외(敬畏)하는 도리에 힘쓰기를 권면하니, 답하기를,
"누누이 면계(勉戒)한 것이 매우 가상(嘉尙)하다. 서명우의 소는 매우 위험하였으니, 이번 논한 바의 대의(大意)가 참으로 좋다. 그러나 삭탈(削奪)의 벌이면 그 죄를 충분히 징계할 수 있다."
하였다.
처음에 좌의정 김창집이 제주(濟州)의 기흉(飢凶) 때문에 청하기를,
"갈두산(葛頭山)에 저장된 곡식과 호남 연해 고을에서 1만 석에 한정하여 들여보내소서."
하였는데, 그후에 다시 전(前) 목사(牧使) 이익한(李翊漢)이 저장해 둔 곡식이 1만 5천 석이 되니 다만 5천 석만 입송(入送)하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제주(_)목사 변시태(邊是泰)가 도민(島民)의 황급한 상황을 치계(馳啓)하여 청하기를,
"양남(兩南)의 곡물을 보리가 나오기 전까지 한정하여 계속 입송(入送)하소서."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여 청하기를,
"5천 석을 우선 엄중히 신칙하여 급히 보내고, 호조의 세염(稅鹽) 3백 석도 또한 획급(劃給)하기를 허락하고, 목장(牧場)과 둔마(屯馬)의 낙인(烙印)·점열(點閱) 및 군병(軍兵)의 조련(操鍊), 노비(奴婢)의 추쇄(推刷) 등의 일은 모두 정지하고, 노비의 옛날에 미수(未收)한 신공(身貢)을 정지하되 새로 받아들이는 것은 절반으로 하고, 또 공명첩(空名帖) 1백 장을 주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공명첩(空名帖) 50장을 더 주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절도(絶島)는 육지(陸地)와 달라서 곡식을 옮기는 외에는 구활(救活)할 계책이 없다. 온 섬의 백성이 모두 나의 적자(赤子)인데, 어찌 차마 그들이 죽는 것을 서서 보면서 구제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무슨 곡식이거나 더 잇따라 들여보내어 우리 무고한 백성으로 하여금 쇠약하고 수척하는 근심이 없도록 하라."
하였는데, 변시태의 급함을 알리는 장계가 또 다다랐다. 비국(備局)에서 청하기를,
"영남 연해 고을의 곡식 5천 석을 급히 들여보내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9일 계유
유성(流星)이 천택성(天澤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가고, 또 북두성(北斗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사간(司諫) 유숭(兪崇)이 근일의 일에 대해 소론(疏論)하였는데, 첫머리에 말하기를,
"유혁연(柳赫然) 등의 복관(復官)을 시종 쟁집(爭執)하는 것은 참으로 한 번 복관(復官)을 허락하면 조제(弔祭)·사시(賜諡)는 스스로 응당 행해야 할 일이니, 어찌 숙특(淑慝)528) 을 구별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없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정찬선(鄭纘先)은 명을 받들고 옥사(獄事)를 다스리면서 다시 품지(稟旨)하지 않고 앞질러 돌아왔으니 임금의 명을 도로에다 버린 것과 다름이 없는데, 죄가 어찌 파직하는 박벌(薄罰)에 그치겠습니까. 성주(星州) 박녀(朴女)의 효행은 세상에서 보기가 드문데, 박경여(朴慶餘)가 형세를 빙자하여 남의 장지(葬地)를 빼앗은 것을 더욱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인하여 청하기를,
"엄중히 신칙(申飭)을 가하여 억울한 옥사를 속히 결단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호남 연해에 서로 불러 모아 무리를 이룬 도둑들은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여러 섬과 진(鎭)에 출몰할 걱정이 없지 않은데도 차견(差遣)한 변장(邊將)은 모두 한 관직에 오래 근무한 무리이므로, 그들이 모려(謀慮)를 내는 것을 보장하기가 어려우니, 역시 무변(武弁) 가운데 성망(聲望)이 있는 자를 가려 보내어 무어(撫禦)하는 방도를 삼아야 합니다. 양서(兩西) 지방의 재황(災荒)은 신이 전소(前疏)에서 듣고 본 것을 부진(附陳)하였으나, 해당 관청에서 한결같이 방계(防啓)529) 하였습니다. 한전(旱田)의 급재(給災)는 허실(虛實)을 서로 속일 것이 염려스럽고, 모맥(麰麥)530) 의 밭은 한 도(道)를 통틀어 10분의 1에도 차지 않으니, 기타 서속(黍粟)을 경작하는 땅에는 장차 백지 징세(白地徵稅)를 하겠습니까. 또 듣건대 한 방백(方伯)이 처음에는 재상(災傷)으로 장문(狀聞)하였다가, 문득 등숙(登熟)531) 으로 치계(馳啓)하여 대죄(待罪)하였다 합니다. 올해의 흉년은 온 나라에서 같이 걱정하고 있는데, 어느 땅이 이런 재해를 면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옛사람은 재변을 숨기는 것을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혹시 이러한 말 듣는 것을 좋아하신다면 그 나라가 망하는 것은 즉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신의 행차가 해서(海西)를 지나갈 때 왕자방(王子房)에서 재령(載寧) 땅에 제방을 쌓고 있었는데, 황주(黃州)·봉산(鳳山) 등의 고을로 하여금 다 쌓기를 기약하였으나, 포구(浦口)가 넓어 두 고을 민정(民丁)을 합하여 세 번이나 부역(赴役)하게 했어도 아직껏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흉년에 백성을 사역하는 것 또한 폐단에 관계되니, 마땅히 명년 가을로 한정하여 우선 정지하게 해야 합니다. 경조(京兆)532) 에는 탄핵을 입은 재상(宰相)이 오랫동안 아경(亞卿)을 차지하고 있고, 나이가 쇠모(衰耗)한 사람이 방면(方面)을 나가서 다스리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守令)에게 달려 있으므로, 이런 흉년을 당하여서는 마땅히 더욱 간택해야 하는데, 한 고을에 과궐(窠闕)이 있으면 여러 대신(大臣)들이 문득 부탁함이 있어 전관(銓官) 또한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時人) 사이에, ‘대신을 알지 못하면 관리에 임명될 수 없다.’는 말이 있으니, 성상께서 건극(建極)하셔서 몸소 바로잡으시면 그 폐단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천관(天官)533) 의 장관은 바로 옛날의 총재(冢宰)로 한 세상을 권형(權衡)하여 인물을 진퇴(進退)시키는데, 위임의 중대함이 이와 같으므로 아무에게나 경솔하게 제수함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근래에는 여러 논의가 많고 국면(局面)이 자주 바뀌어 비평(批評)과 탄핵(彈劾)이 문득 먼저 전지(銓地)에 미치게 됩니다. 전하께서는 정사(政事)를 행하는 데만 급하시어 재망(材望)이 합당한지 여부는 돌아보지 않으시고 한갓 자급(資級)이 서로 맞는가에만 따르므로, 전후의 제배(除拜)가 돌아가며 차례로 차임(差任)하는 것과 같음이 있으니, 신은 항상 개탄하고 애석하게 여기며, 또한 이 일을 어렵게 여겨 신중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회(所懷)가 있어 진언(進言)하니, 깊이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유혁연 등의 복관은 조금도 불가할 것이 없고, 복관하는 사람이라 하여 반드시 모두 사시(賜諡)하는 것이 아니니, 이 일로써 말하는 것은 더욱 뜻밖이다. 정찬선은 이미 파직의 벌을 시행했으니, 삭탈은 지나치다. 박녀(朴女)의 효도와 박경여(朴慶餘)의 죄는 막 품처하라고 명하였으며, 재령(載寧)에 제방을 쌓는 역사를 명년 가을을 기다려 하는 것과 호남 연변(沿邊)의 변장(邊將)을 가려 보내는 일과 급재(給災)하는 일은 묘당(廟堂)과 지부(地部)534) 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겠다. 지난말 오명준(吳命峻)의 장문(狀聞)은 원래 재해를 숨기는 것이 아니었고, 또 그대의 소어(疏語)와 장문과는 틀린 것이 있다. 한 번 대간(臺諫)의 탄핵을 만났다 해서 어찌 다시 아경(亞卿)의 자리에 있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연한이 된 쇠모(衰耗)한 사람을 방면(方面)의 자리에 보냈다고 한 말은 비록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르겠으나, 방백(方伯)은 수재(守宰)와 다른데 어찌 연한에 구애되어 모두 적당하지 못하겠는가. 천관(天官)의 장관은 진실로 맞지 않은 자가 있으면 어찌 분명하게 말하여 드러내어 배척하지 않고, 지금 ‘재망(材望)이 합당한지 여부를 돌아보지 않고 차례에 따라 돌아가며 차임(差任)한다.’고 뭉뚱그려 말하여 해당되는 자로 하여금 모두 불평을 품게 하니, 나는 실로 알지 못하겠으며, 대신을 알지 못하면 관리에 제수될 수 없다고 한 말은 더욱 이상하다."
하였다.
9월 30일 갑술
유성(流星)이 권설성(卷舌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전 현감 이헌좌(李軒佐) 등이 상소하여 그 스승 박세채(朴世采)를 자운 서원(紫雲書院)에서 강향(降享)하는 것이 불가함을 논하고, 조익주(曹翊周) 등이 폄박(貶薄)한 형상을 배척하니, 【사실은 위에 보인다.】 답하기를,
"강향하는 곡절은 이미 해조(該曹)의 복주(覆奏) 가운데 자세하니, 이는 폄강(貶降)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평안도 증산(甑山) 등지에 크게 천둥하고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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