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병자
천둥하고 번개가 치고 서쪽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윤장(尹樟)을 필선(弼善)으로, 김상옥(金相玉)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비국(備局)에서 전 함경도 감사 이선부(李善溥)와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의 말로써 계청하기를,
"북도(北道)의 친기위(親騎衞)는 1천 2백 명으로 한정해서 정초(精抄)하여 4등(四等)의 시재(試才)에 충정(充定)하여 수석을 차지한 출신(出身)은 바로 변장(邊將)을 제수하고, 한량(閑良)은 직부 전시(直赴殿試)535) 하게 하고, 공사천(公私賤)은 신역(身役)을 면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3일 정축
임금이 겨울 천둥 때문에 하교하여 책려(責勵)하고, 인하여 구언(求言)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아! 천둥과 번개가 전보다 더욱 참혹하여 우르릉거리는 소리와 번쩍거리는 빛은 비록 한여름이라 하더라도 드물게 있는 바인데, 갑자기 일어나니 마음과 뼈가 함께 놀라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 팔도(八道)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바야흐로 신음하고 공사(公私)가 텅 비어 구제해 살릴 방책이 없으니, 옥식(玉食)536) 을 대해도 맛이 없고 병침(丙枕)537) 이 되어도 불안하다. 비상한 재변이 또 이처럼 거듭 이르렀는데, 그 까닭을 궁구해 보면 오로지 나의 비덕(否德)에서 말미암은 것으므로,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여 감히 편안히 있을 겨를이 없다. 조정 위에는 서로 협력하여 화평한 기풍이 없고, 초가집 아래에는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있고, 부역(賦役)이 많고도 무거우며, 쌓인 폐단을 인순(因循)하고 있는데, 게다가 기강(紀綱)이 무너져서 백례(白隷)가 관직에 태만하고 문관·무관이 직무에 게을러 세월만 보내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만약 명확하게 계획을 바꾸어 경장(更張)하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늘의 노여움이 날로 깊어져서 마침내 나를 버리고 다시는 경고(警告)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는가.
승지(承旨)는 나를 대신해서 교서(敎書)를 초(草)하여 마땅히 정부(政府)에서부터 직언(直言)을 널리 구하여 소자(小子)가 미치지 못함을 바로 잡도록 하라. 말이 비록 맞지 않더라도 내가 너그럽게 용서할 것이나, 만약 시세를 틈타 경함(傾陷)538) 하는 말은 본디 보지 않으려고 한다. 아! 근래에 당습(黨習)이 날로 고질이 되어가는 것은 참으로 남의 위에 있는 자가 건극(建極)의 도(道)를 다하지 못한 데서 말미암았으므로, 내가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으나, 아래에 있는 사람도 또한 반드시 마음을 지극히 공정하게 가져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섞이지 않게 한다면, 거의 화정(和靖)될 희망이 있을 것이다. 지난해 대소(臺疏)는 말이 매우 옳지 않아 끝내 시관(試官)의 망(望)을 막았으면, 할아비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한 바가 과격한들 무슨 손상될 바가 있다고 한 번 헌직(憲職)을 체직한 후 다시 거의(擧擬)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화평한 도리이겠는가. 이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대들 대소 신료(臣僚)는 나의 경구(警懼)하는 뜻을 본받아 날짜만 보내는 습성을 엄격히 버리고 마음을 정백(精白)하게 가져 왕실을 위해 힘쓰도록 하라."
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의 재청(再請)으로 인하여 곧바로 비망기(備忘記)로써 중외(中外)에 널리 알렸다.
10월 4일 무인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천둥의 재변으로 글을 올려 면직을 청했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전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팔도에 흉년이 들었는데, 양호(兩湖)539) 와 기전(畿甸)이 더욱 심해 아픔이 내 몸에 있는 것 같아 금의(錦衣)540) 과 옥식(玉食)541) 도 편안치 못하다. 내가 바야흐로 묘당(廟堂)과 황정(荒政)을 강구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혹시라도 이산(離散)하지 말며 혹시라도 절도(竊盜)하지 말라. 더군다나 유산(流散)하는 자는 다시 모이기가 쉽지 않고 절도한 자는 열 명에 한 명도 살지 못하게 될 것이니, 이는 또 알지 않을 수 없는 뜻이므로, 각 고을에 신칙하여 명백히 효유(曉喩)하라. 수령들도 또한 내 뜻을 본받아 모든 진사(賑事)에 마음을 다해 요리(料理)하되,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듯이 하여 무고한 백성으로 하여금 구렁에 빠져죽는 근심을 면하게 하라는 일로 3도(三道) 감사에게 우선 하유(下諭)하라."
하고, 또 제주 목사(濟州牧使) 변시태(邊是泰)에게 하교하기를,
"궁벽한 바다 외딴 섬은 육지와 아주 다르니, 만약 곡식을 옮기지 않으면 어떻게 구제해 살리겠는가. 더군다나 굶주린 백성들이 먹여주기를 바라는 것이 학철(涸轍)속의 물고기542) 가 물을 기다리는 것뿐만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곡물을 바야흐로 이미 양남(兩南)543) 에 분정(分定)하여 즉시 잇따라 들여보내게 하였다. 명년에 진상(進上)할 말을 기르려고 예비한 곡물도 진자(賑資)에 옮겨 보태게 하라. 그대는 마음을 다해 진휼(賑恤)하여 한 사람도 쇠약하고 수척하는 근심이 없게 하라."
하였다.
10월 5일 기묘
대사간 권성(權𢜫)이 현도(縣道)를 통해 진소(陳疏)하여 첫머리에 당비(黨比)의 폐단을 논하기를,
"공명(公明)은 조정을 바로잡는 근본이니, 청컨대 한때의 좋아하는 바에 구애되지 말고 반드시 자세히 살피고 신중히 하여 그 현능(賢能)함을 확실히 알고서 임용하고, 이미 임용한 후에는 의심하지 말고 구임(久任)시켜 성효(成效)를 요구(要求)하고, 한두 사람이 일을 그르친 것으로써 그 나머지 사람을 모조리 싫어하지 말고, 한두 가지 일이 뜻에 거슬린 것으로써 그밖의 일까지 모두 의심하지 마소서."
하고, 끝에 가서 말하기를,
"재황(災荒)이 참혹하니, 청컨대 산도전(山稻田)에 급재(給災)하고 연해(沿海) 고을의 신포(身布)와 대동미(大同米)를 전례를 상고하여 받아들이기를 정지하고, 호남 연해 일대도 일체로 시행하소서."
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급재(給災) 등의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지사(知事) 이광적(李光迪)이 소회(所懷)을 진달하여 서명우(徐命遇)의 소를 극론하고, 신사철(申思喆)의 책벌(責罰)하라는 말을 따르기를 청하였다. 첫머리에 《시경(詩經)》 항백장(巷伯章)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서명우의 죄는 북쪽 변방으로 내치는 것으로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하고, 또 《주역(周易)》 비(否)·태(泰) 두 괘(卦)를 인용하여 음양(陰陽)·진퇴(進退)의 뜻을 말하니, 답하기를,
"서명우의 소어(疏語)가 위험함은 내가 이미 통촉하여 삭탈(削奪)의 벌을 시행하였다. 지금 경(卿)은 서명우에게 투비(投畀)의 형벌을 시행하지 않아서 겨울 천둥의 응험이 있다고 하는데, 그 뜻은 다만 부회(傅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 경(卿)은 백수(白首)의 나이에 재변을 만나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날을 당하여 서둘러 상소한 바가 하나는 서명우를 궁핵(窮覈)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서명우에게 가율(加律)하여 재변을 늦추는 첫 번째 계책을 삼으라는 것이니,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나는 실로 놀라서 탄식한다."
하였다.
수찬(修撰) 홍정필(洪廷弼)이 소회(所懷)를 가지고 상소(上疏)하였는데, 첫머리에 논하기를,
"주조(注措)하고 용사(用舍)하는 즈음에 탕평(蕩平)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마침내는 편사(偏私)의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근래에 대각(臺閣)에는 너무 심한 의논이 많았습니다."
하고, 인하여 유혁연(柳赫然) 등을 복관(覆官)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라는 것이 잘못임을 언급하고, 또 쇠모(衰耗)하다고 배척을 받은 강원 감사 남치훈(南致熏)을 신구(伸救)하고, 【바로 유숭(兪崇)의 소 가운데 있는 말이다.】 말미에 말하기를,
"강현(姜鋧)이 여러 해 동안 지색(枳塞)되고 있었으나, 조금도 자중(自重)하는 바가 없으니, 세도(世道)가 공평하지 못함을 신은 가만히 개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남치훈·강현의 일은 그대 말이 옳다. 강현의 심사(心事)를 남김없이 통찰하였는데, 여러 해 동안 지색(枳塞)당하였으나, 〈자중함이 없으니〉 아주 알 수가 없는 일이다."
하였다.
강화부(江華府)·개성부(開城府)에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천둥하는 것이 한여름과 다름이 없었다.
10월 6일 경진
사간원에서 【정언(正言) 이명언(李明彦)이다.】 논핵하기를,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는 대과(大科)·소과(小科)의 복시(覆試)가 멀지 않은 날에 갑자기 휴가를 스스로 청하였고, 사폐(辭陛)하는 날에는 계품(啓稟)하여 저지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또 감시(監試)·복시(覆試)를 당하여 주문하는 사람은 마땅히 일소(一所)에 나가야 하는데도, 그의 아들이 과거에 응시했다는 이유로써 해부(該部)에 부탁해서 다른 곳으로 이의(移擬)하여 낙점(落點)하고 이송(移送)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또 문과 회시(文科會試)에서 이름이 이미 수의(首擬)하였는데도 소명(召命)을 두 번이나 어기었고, 마침내 부표(付標)를 변통(變通)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대관(大官)이 이와 같은데 소관(小官)을 어찌 논하겠습니까.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고, 또 감시(監試)·회시(會試) 때 대제학을 타소(他所)로 이의(移擬)하였다 하여 예조 참판 신임(申銋)을 종중 추고(宗重推考)하도록 청하였다. 또 청하기를,
"대과·소과·문과·무과의 시관(試官)으로 위패(違牌)한 사람으로서 사정과 병 때문에 억지로 시키기 어려웠음을 여러 사람이 함께 아는 자 이외에는 한결같이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밤에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10월 7일 신사
밤에 번개가 쳤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곡산 부사(谷山府使) 윤정주(尹廷舟)는 대계(臺啓)로 인하여 나문(拿問)하였는데, 좌죄(座罪)된 바가 어떠한 것인지도 알지 못하고서 지레 먼저 대임(代任)을 내었습니다. 이후에는 수령으로 나문당한 자는 조사를 마친 후에 대임(代任)을 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이건명(李健命)·이만성(李晩成)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였는데, 올라오도록 독촉하였을 때 두 사람이 향리에 있으면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청하기를,
"기묘과(己卯科)의 나이 60, 50이 넘은 자는 예(例)에 의하여 승륙(陞六)544) 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병상(李秉常)을 교리(校理) 겸사서(兼司書)로, 신사철(申思喆)을 부수찬(副修撰)으로, 노세하(盧世夏)를 장령(掌令)으로, 이택(李澤)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10월 8일 임오
사간원에서 【정언(正言) 이명언(李明彦)이다.】 논핵하기를,
"근래 진신(搢紳) 사이에서 혹은 이익을 말하는 기풍이 있습니다. 지난번 호조 참판 양중하(梁重厦)와 참의(參議) 임방(任埅)이 관용(官用)의 지지(紙地)를 본조(本曹)에서 무역해 들일 때 그 여러 갑절의 값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당상관이 되어 많은 이익을 차지한 것은 진실로 잘못이고, 수석(首席)은 안정(顔情)에 구애되어 방색(防塞)하지 못하였으니, 덕(德)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청컨대 양중하·임방은 체차하고 판서 조태구(趙泰耉)는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9일 계미
전교하기를,
"근래 《예기(禮記)》를 강하는데 증자문(曾子問) 편의 ‘군훙(君薨)’ 이하를 길사(吉事)로 말한 사람이 드물었으므로, 내가 이로 인하여 강연(講筵)에서 물으려 했으나, 그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오례의(五禮儀)》 흉례(凶禮) 가운데 오모(烏帽)·흑대(黑帶)의 제도는 민순(閔純)의 【선조조(宣祖朝) 때의 일이다.】 의논으로 인하여 이미 바로잡았으나, 단령의(團領衣)·포과모(布裹帽)는 변경해 고친 것이 없으므로, 고제(古制)를 참작하여 미진한 바가 있으면 한 번 바로 잡으려고 한 지 오래 되었는데, 고제를 회복하는 것이 옳은지, 이 예(禮)를 그대로 쓰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으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이후 대신(大臣)의 수의(收議)와 상교(上敎)는 갑오년545) 9월에 보인다.】
【태백산사고본】 62책 54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18면
【분류】의생활-예복(禮服)
[註 545] 갑오년 : 1714년.
경기(京畿)의 각 고을에 천둥하고 우박이 내렸다.
10월 10일 갑신
왕세자(王世子)가 경녕전(敬寧殿)에 친사(親祀)를 행하였다.
홍우녕(洪禹寧)을 대사간(大司諫)으로, 홍치중(洪致中)을 사간(司諫)으로, 이택(李澤)을 교리(校理)로, 신사철(申思喆)을 헌납(獻納)으로, 권첨(權詹)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정동후(鄭東後)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비변사에서 유숭(兪崇)의 말로 인하여 계청하기를,
"호남 연해의 수령은 무신(武臣)으로 가려 보내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11일 을유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가 병 때문에 중궁 탄신 기거(中宮誕辰起居)의 반열에 참석하지 못한 일로써 차자를 올려 대죄(待罪)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의원을 보내어 병을 돌보게 하였다.
문과 전시(文科殿試)에서 남세운(南世雲) 등 51인을 뽑았다.
10월 12일 병술
유명응(兪命凝)을 승지(承旨)로, 권변(權忭)을 집의(執義)로, 유숭(兪崇)을 보덕(輔德)으로, 이택(李澤)을 겸문학(兼文學)으로, 홍중휴(洪重休)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10월 13일 정해
평안 감사의 장청(狀請)으로 인하여 개천(价千)·덕천(德川) 두 고을 군교(軍校)를 철옹(鐵瓮)으로 이속(移屬)시켰는데, 대개 두 고을의 군향(軍餉)이 이미 철옹에 속했기 때문에 군교를 모두 이송하고, 은산 현감(殷山縣監)에게 두 고을을 대신하여 자모성 영장(慈母城營將)을 겸령(兼領)하게 하였다.
충청도 서산(瑞山) 등지에 크게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10월 14일 무자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현도(縣道)를 통해 사직하는 소를 올리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함께 오도록 한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개유하게 하였다.
전라도 각 고을에 크게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10월 16일 경인
전라도 감진 어사(全羅道監賑御史) 홍석보(洪錫輔)를 인견하고 면유(勉諭)하여 보냈다. 임금이 사복시(司僕寺)에서 초기(草記)를 입계(入啓)할 때 목자(牧子)를 고휼(顧恤)하라는 뜻을 판부(判付)하지 못하였는데, 승지에게 명하여 임금 앞에서 친히 쓰게 하여 때맞춰 구제(救濟)하도록 했다.
이만성(李晩成)을 도승지(都承旨)로, 조명봉(趙鳴鳳)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한 달 전에 민진후(閔鎭厚)가 진달한 바로 인하여 유학(幼學)·음관(蔭官)으로서 관계(官階)가 대부(大夫)인 자는 참상(參上)·참하(參下)를 물론하고 감시(監試)에 응시하지 말게 하는 여부를 예조(禮曹)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의논하기를,
"근래에 음관(蔭官)으로 이미 감찰(監察)·수령(守令)을 지낸 자 이외에는 모두 감시(監試)에 응시하는 것이 이미 규례가 되었는데, 이제 하순(下詢)하심을 받들어 비로소 국전(國典)을 상고하였더니, 이르기를, ‘생진과(生進科)는 통덕랑(通德郞)546) 이하의 응시를 허락한다.’ 하였습니다. 이는 통덕랑의 품계로 한정하여 대부(大夫)는 응시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주(註)에 또 이르기를, ‘수령(守令)은 생진시(生進試)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는 비록 통덕랑의 품계에 있더라도 수령인 자는 응시할 수 없음을 말하니, 어찌 이미 대부(大夫)와 수령이 되었으면 모두 현관(顯官)이기 때문에 아울러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찰(監察)에 이르러서는 비록 논한 바가 없지만, 그들이 현관이 된 것이 수령과 같으니, 응시를 허락하지 않은 것도 혹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통덕랑의 품계에 있으면 비록 참상(參上)에 있더라도 구애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대부(大夫)에 승진된 자는 본디 논할 것이 없고, 이미 수령을 지냈으면 비록 대부에 승진되지 않았더라도 응시할 수 없는 것이 매우 분명합니다. 오로지 수령만 제한이 있는 줄 알고 계급(階級)에 제한이 있는 줄을 몰라 잘못된 예를 인순(因循)하여 문득 법전(法典)의 본 뜻과 서로 어긋나게 했으니, 바로 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후에는 참상(參上)·참하(參下)를 물론하고 이미 대부가 되고 수령이 된 자는 응시를 허락하지 말고, 감찰은 마땅히 수령과 같게 해야 할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김우항(金宇杭)도 또한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하였으며, 다른 대신은 혹은 질병으로, 혹은 밖에 있어 헌의(獻議)하지 못하니, 김창집의 말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10월 19일 계사
정언(正言) 이명언(李明彦)이 응지(應旨)하여 상소(上疏)하였는데, 첫머리에는 ‘상주기에 힘쓰라’[懋賞]는 두 글자로써 금일의 증세에 대처하는 약제(藥劑)를 삼고, 또 붕당(朋黨)이 마침내 반드시 사람의 집과 나라에 화(禍)가 됨을 논하기를,
"전하께서 매양 ‘이 무리들을 통솔하는 것은 출척(黜陟)·여탈(與奪)에 있다.’고 하시고, 마침내 1년 남짓 동안에 어지럽게 진퇴시켰습니다. 비록 정호(鄭澔)의 일로써 말하더라도 배사(背師)했다는 배척은 패류(悖謬)함이 막심하였으나, 당초에 변방으로 내친 것은 혹시 조금 중하였던 듯하였습니다. 그를 근일에 다시 끌어들여 복관시킨 것은 잘못하여 크게 용서하신 것으로서, 또한 처음과 달라지셨다고 할 수 있으니, 피사(詖辭)·음사(淫辭)·사사(邪辭)·둔사(遁辭)의 말을 어디로부터 그치게 하겠습니까. 다만 이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경계할 줄을 모른 채 당류(黨類)를 부식(扶植)해서 널리 포치(布置)하고, 자기와 의논이 다른 자에게는 눈을 부릅뜨고 힘써 막으며 조성(助成)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데, 문득 언어(言語)·문자(文字)로써 타파시키고 소멸시키는 도구로 삼고자 하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논핵하기를,
"이정익(李禎翊)·한영휘(韓永徽)는 지나치게 불식(拂拭)함을 가하여 외람되이 납언(納言)에 통하였고, 이봉익(李鳳翼)은 갑자기 참하(參下)의 묘선(妙選)에 통하였으나, 이진검(李眞儉)은 간장(諫長)에 새로 통하지 못하였고, 이진망(李眞望)·권첨(權詹)·이정제(李廷濟)·오명항(吳命恒)은 오랫동안 저해하여 까닭없이 묶어 둔 채 쓰지 않은 것이 손가락을 꼽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자기와 의논이 다른 자는 말망(末望)에 주의(注擬)하는 데 불과하였을 뿐이니, 어찌 한때의 지수(智數)로써 여러 사람의 입을 막고 임금의 총명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절검(節儉)을 숭상하는 방법을 논하기를,
"왕자에게 돌아간 선조(先朝) 때의 궁주(宮主)의 집이 많고, 혹은 팔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마침내 사들인 것도 있다 합니다. 또 듣건대 내수사(內需司)의 공억(供億)이 부족하여 내노비(內奴婢)로 하여금 값을 치르고 자속(自贖)하게 하였다고 하는데, 전하께서 과연 절검하시는 실상이 있다면, 어찌 인주(人主)의 부(富)가 이렇게 넉넉하지 못하다는 근심이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김유경(金有慶)의 상소는 비록 때가 늦은 혐의가 없지 않으나, 진실로 전하의 겸양(謙讓)을 지키는 덕(德)을 우러러 도운 일에 불과한데, 묘당(廟堂)에서는 영관록(瀛館錄)에서 누락시켰고, 전조(銓曹)에서는 대성(臺省)의 망(望)을 막았으니, 지난번 홍계적(洪啓迪)의 한 상소가 아니었으면, 이만성(李晩成)이 잠깐 검의(檢擬)한 것이 청조(淸朝)의 수치가 됨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윤세유(尹世綏)가 상소하여 헐뜯고 배척함은 사대부의 수치인데, 청도(淸塗)의 극선(極選)에 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정신(李廷臣)이 성상의 뜻에 영합하여 사의(私意)를 이룬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서명우(徐命遇)의 소는 벌이(伐異)547) 한 것에 관계되는 듯하나, 또한 일찍이 없는 것을 있다고 한 일이 없고, 시병(時病)에 확실하게 맞는 것이었는데도 이에 도리어 경알(傾軋)한다고 의심하고 음험하다고 지목해서 서둘서 공격해 제거하는 계사(啓辭)가 배척을 받은 대신(臺臣)에게서 먼저 나왔습니다. 이광적(李光迪)이 천재(天災)에 부회(傅會)하여 감히 궁핵(窮覈)하기를 청한 것은 늙은 사람의 헛소리이므로 깊이 책망할 것이 없는데, 승지의 직책에 있는 자가, ‘총애를 희구하여 지위를 굳혔다.[徼寵固位]’는 네 글자를 뽑아내어 공동(恐動)시키고 현혹시킬 계책을 삼았으니, 어찌 잘못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하고, 또 논하기를,
"관방(官方)548) 이 뒤섞여 어지러운 것이 근일보다 심한 적이 없었으니, 일로(一路)의 풍습을 살펴보건대 혹 소모(笑侮)를 끼치고 있습니다. 장월(仗鉞)의 중진(重鎭)에서 한갓 탐욕만을 일삼고, 재간(才幹)이 본래 없으면서 갑자기 웅부(雄府)를 차지하며, 정적(政績)에 흠이 많은데 혹은 포상(褒賞)을 받았으나, 모두 종핵(綜核)549) 할 수 없는 폐단입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신린(臣隣)을 대우하는 데 정지(情志)가 미덥지 못하고, 대신을 대우하는 것이 허례(虛禮)가 너무 심합니다."
하고, 끝에 가서 말하기를,
"3도(三道)의 기황(飢荒)이 참혹하니, 청컨대 양남(兩南) 산군(山郡)의 조곡(糶穀)이 너무 많은 곳은 헤아려서 본 고을에 남겨두고, 그 나머지는 연해 고을로 옮겨 진휼에 보태게 하소서. 도적이 몰래 일어날 근심은 곳곳마다 다 그러하니, 영장(營將)을 각별히 가려서 임명하여 실효(實効)를 책구한다면 거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정호가 배사(背師)했다는 말로 시종 남에게 이기기를 힘쓴 것은 참으로 놀랍고 괴이하기 때문에 이미 미안하다는 뜻을 보였으니, 처음과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진망의 일은 그대의 말이 옳지만, 상소 가운데, ‘당류(黨類)를 부식(扶植)하여 널리 포치(布置)하고, 입을 막고 총명을 가린다.’는 등의 말은 아주 미편하며, 영합하여 사의(私意)를 이루었다고 한 것은 더욱 매우 잘못된 것이다. 서명우의 상소는 말뜻이 위험하였는데 신구(伸救)하는 말이 대각(臺閣)에서 나오니, 그 또한 이상하다. 조곡(糶穀)이 과다한 곳에 진자(賑資)를 헤아려 남겨 두고 연변(沿邊)으로 수송하는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토포사(討捕使)를 택차(擇差)하는 일은 서전(西銓)550) 에 신칙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튿날 이명언이 비지(批旨)가 엄준함으로 인하여 인피(引避)하고 물러가서 물론(物論)을 기다렸는데, 지평(持平) 안중필(安重弼)이 사헌부에 나아와서, 오로지 경알(傾軋)에서 나왔으니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말로써 처치하여 체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공평(公平)이 부족하다고 말하면 되겠지만, 만약 ‘오로지 경알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불가하다. 정호에 대한 소론(疏論)은 합당한데도 한결같이 경알로 돌린다면 시비(是非)가 아주 밝혀지지 않으므로 인심을 복종시킬 수 없다."
하였다. 안중필이 이 일로 인피하면서 이명언이 경알한 형상을 낱낱이 진달하였는데, 그가 정호에 대해 논한 한 조항에 말하기를,
"강개(剛介)한 성품은 바로 그의 가풍(家風)이므로, 평소부터 시세(時勢)를 따라 부앙(俯仰)하지 못하여 백수(白首)로 귀양을 갔다가 온갖 위험을 겪고 돌아왔는데, 간신(諫臣)이 성상의 미안하다는 비답으로 인하여 【정호가 방송(放送)을 입은 후 곧 윤증(尹拯)의 일을 다시 사소(辭疏)에 거듭하였는데 비지(批旨)에 미안하다고 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 또 처치하면서 크게 꾸짖고자 하였으니, 과연 공심(公心)으로 국사(國事)를 논한 것입니까."
하였는데, 지평(持平) 김상옥(金相玉)이 처치하여 출사(出仕)시켰다.
10월 20일 갑오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가 차자를 올려 액례(掖隷)를 보내 문병하고 진귀한 약과 음식을 잇따라 내려 준 것을 사례하고, 인하여 문후(問候)하는 반열(班列)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하여 인죄(引罪)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팔도(八道)에 천둥하고 비가 왔다는 장문(狀聞)이 잇따랐다.
10월 21일 을미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이 임금의 환후가 미령(未寧)하다는 말을 듣고 도성 밖에 이르러 진소하니, 임금이 즉시 도성에 들어오도록 승지를 보내어 개유하게 하였다.
이때 조신(朝臣)이 이명언(李明彦)의 상소 때문에 대변(對辨)하는 글을 많이 올렸는데,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관명(李觀命)은 상소하여 대략 말하기를,
"이명언의 상소(上疏)가 말은 임금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오고 뜻은 시국을 근심하는 데에서 나와서 사의(私意)를 협잡(挾雜)하였다 하여 한둘의 장주(章奏)를 책(責)하였다면, 스스로 사심(私心)이 없음을 밝힌 것이라 하겠으나, 천천히 그가 조진(條陳)한 것을 따져보면, 장려하고 칭도(稱道)한 자는 사당(私黨)이 아닌 사람이 없고, 억지로 허물을 들추어 내어 헐뜯은 자는 거의 자기와 의논이 다른 자이니, 어찌 그의 말이 그 뜻에 반대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이진검(李眞儉)이 그 선조(先祖)의 원수를 잊고 손수 교지(敎旨)를 쓴 것은 의리를 지키는 바가 밝지 못하여 대각의 탄핵을 많이 받았으니, 신통(新通)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정사의 체모가 본디 그런 것입니다. 이진망(李眞望)의 소어(疏語)가 비패(鄙悖)하였으므로, 한때 지색(枳塞)하여 이미 공의(公議)를 보였으면, 성교(聖敎)가 내려진 다음 반드시 자기의 견해를 교수(膠守)551)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춘방(春坊)552) 과 대성(臺省)은 아직 의망(擬望)할 자리가 없었는데, 이제 성명의 권주(眷注)를 빙자하여 믿고는 곧바로 신에게 무엄한 배척을 가했습니다. 이진망이 선조의 무함을 통박(痛迫)하여 이미 대신(臺臣)에게 찬양(讚揚)받았으면 이진검(李眞儉)이 선조의 원수를 방과(放過)한 것은 마땅히 대신(臺臣)에게 천오(賤惡)받아야 할 것인데, 일체로 부식(扶植)하였으니, 호오(好惡)가 바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명항(吳命恒)이 여러 사람을 낱낱이 들어 각기 제품(題品)553) 을 설정한 것은 거의 천염(薦剡)과 같았으니, 이와 같은 거조는 전에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조가(朝家)에서 책면(責勉)하여 새로 제료(諸僚)를 천망(薦望)하던 날을 당하여 앞질러 구천(舊踐)을 의망하여 억지로 양시론(兩是論)을 삼은 것을 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정제(李廷濟)의 사람됨은 비록 대신(臺臣)이 아호(阿好)554) 할망정 어찌 그가 논사(論思)의 자리에 맞지 않음을 모르겠습니까. 전하께서 일찍이 그의 명민(明敏)함을 칭찬했기 때문에 아껴서 버리지 못하시니, 신은 가만히 애석하게 여깁니다. 김유경(金有慶)이 근일 중간에 있으면서 조용(調用)되지 못한 것과 권첨(權詹)을 이제 이미 관직에 제배한 것은 원래 논할 것이 없는데, 많은 사람을 두루 거론하여 뒤섞어 말을 만들어 천청(天聽)을 현혹시켜 억지로 허물을 들추어 내니, 아! 역시 괴이합니다."
하고, 그 아래에 또 이정익(李禎翊)·한영휘(韓永徽)·이봉익(李鳳翼)이 배척을 입은 것을 신구(伸救)하여 계속 말하기를,
"이 몇 사람은 대신(臺臣)이 좋게 여기는 가운데 있었다면 그 칭송함이 반드시 권첨(權詹)·이정제(李廷濟)의 무리에게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소(臺疏) 가운데 입을 막았다는 등의 말은 아주 미안하니, 전조(銓曹)에 있는 자가 변명하지 않을 수 없지마는, 이제 그대의 상소를 보건대 사기(辭氣)가 분분(忿忿)하고 말을 많이 가리지 않았으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이정익(李禎翊)을 대성(臺省)·춘방(春坊)에 거의(擧擬)한 것은 끝내 마땅치 못하여 내가 시종 낙점(落點)을 아낀 것이고, 이정제가 논사(論思)의 자리에 맞지 않는다는 말은 결단코 공심(公心)이 아니니, 더욱 괴이하다."
하니, 이관명이 엄지(嚴旨)로 인해 위패(違牌)하여 파직되었다.
10월 22일 병신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이 승지(承旨)의 전유(傳諭)로 인하여 병이 조금 나으면 억지로 일어나 명을 받들겠다고 답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다시 가서 전유하게 하기를,
"도문(都門)의 아주 가까운 데에 있으면서 어찌 병든 것이 조금 낫기를 기다리겠는가. 즉시 속히 도성에 들어오라."
하니, 최석정이 질병이 심하여 끝내 우러러 받들지 못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튿날 또 차자를 올려 감히 갑자기 수문(修門)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0월 23일 정유
비국(備局)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전라도 곡물을 제주로 입송하는 대신에 강도(江都)의 쌀 3천 석을 획급(劃給)하게 하였다.
10월 24일 무술
암행 어사 이병상(李秉常)·윤봉조(尹鳳朝)·여광주(呂光周)·조석명(趙錫命)·여필희(呂必禧) 등이 여러 도(道)에 나누어 갔다.
10월 27일 신축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니, 경리청 당상(經理廳堂上) 조태채(趙泰采)가 함께 들어와 그가 출강(出疆)한다는 이유로써 경리(經理)의 직임을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개정(開政)하라는 명이 내린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는데, 이조 판서 황흠(黃欽)이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어기고 나오지 않고 【대개 황흠이 유숭(兪崇)의 상소로 인하여 불안해 하였는데, 이제 또 이명언(李明彦)의 상소 때문에 인혐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명을 기다리기에 이르니, 임금이 참판(參判)에게 명하여 궐원(闕員)의 대신을 대신(大臣)에게 물어 차출하게 하자, 신임(申銋)이 참판이 되었으나, 또한 이명언(李明彦)의 상소 때문에 진소(陳疏)하여 인혐(引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명을 받들어 개정(開政)하여 조도빈(趙道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정언(正言)으로, 이택(李澤)을 헌납(獻納)으로, 김만주(金萬胄)를 장령(掌令)으로, 이진망(李眞望)을 지평(持平)으로, 오명항(吳命恒)을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10월 28일 임인
금천(衿川)의 유학(幼學) 이만엽(李萬葉)이 응지(應旨)하여 수천 마디의 말로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실심(實心)으로 실사(實事)를 시행하시지 못하고, 인순(因循)에 익숙해지셔서 고식(姑息)을 편히 여겨 일심으로 엄외(嚴畏)하여 일에 따라 분발하지 못하십니다. 대저 인순(因循)하고 고식적인 것을 속(俗)이라 말하는데, 속이란 한 글자는 무한한 병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주(人主)가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근심하여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며 정사(政事)·상벌(賞罰)로 고무(鼓舞)하고 진작(振作)시키는 큰 권병(權柄)이 한 가지 일이라도 실처(實處)에 당착(撞着)함이 없으면 한 가지 일이라도 문구(文具)에 돌아가지 않음이 없고, 병들지 않은 곳이 없고, 무너지지 않은 일이 없어 한 조각의 물거품 같은 세계를 양성(釀成)하게 되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실심(實心)이라 하는가 하면, 곧 이른바 항상 재변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랫동안 지켜 변하지 않는 것이 이것입니다. 무엇을 실사(實事)라 하느냐 하면, 이 실심으로써 인주의 직분상 마땅히 먼저 실행해야 할 바에 나아가 가장 급히 힘쓸 것을 성심으로 구해 힘껏 행하되, 세속의 격식을 제거하고 상벌을 조종하여 때로 뜻밖의 비상한 일을 행하여 한 시대의 혼타(昏惰)함을 경계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무엇을 인주의 직분(職分)이라 하느냐 하면,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폐단을 구제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은, 양역(良役)이 재변을 부르는 근원이 되고 흉황(凶荒)이 목전(目前)의 급함이 되니,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을 신중히 가리는 것이 두 가지의 요체(要諦)가 되고, 절검(節儉)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두 가지의 근본이 됩니다, ‘세속의 버릇을 버리고 실상에 힘쓴다[去俗務實]’는 네 글자는 상하를 통하여 그 사이에 행한 후에야 거의 천재(天災)를 소멸시키고 인화(人和)를 감동시켜 나라가 조금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그 아래에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일에 대해 논하기를,
"호포(戶布)·구전(口錢)·결포(結布) 세 가지는 그 하나만 시행하여도 모두 그 편중(偏重)함을 구할 수 있으니, 청컨대 공경(公卿)·대신(大臣)을 모아 급히 강구하고, 적당한 사람을 가려 맡겨 책성(責成)을 위임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금년의 기황(飢荒)은 양호(兩湖)의 연해(沿海)가 더욱 심하니, 청컨대 특별히 대신(大臣)과 장신(將臣) 가운데 한 사람을 보내어 양호(兩湖) 경계에 개부(開府)555) 하여 모든 진황(賑荒)과 안민(安民)하는 정사에 관계되는 것을 일체 편의에 따라 처리하게 하여 무마해 안집(安集)시키게 하소서."
하고, 끝에서 말하기를,
"감사(監司)를 신중히 가리고 성적(成績)을 상고하는 법을 제정하여 출척(黜陟)하소서."
하고, 또 사람을 천거하는 방도(方道)를 말하기를,
"구하는 자가 규례(規例)에 불과하기 때문에 천거하는 자도 또한 규례에 불과하며, 천거하고 임용하는 것이 또한 그렇습니다. 청컨대 실심(實心)으로 구하고 규례 이외에 그 능부(能否)를 구별하여 그 천주(薦主)를 상벌(賞罰)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가상(嘉尙)하게 여기니, 유의(留意)하지 않겠는가. 다만 진달한 바의 말이 어떤 것은 허명(虛名)을 일삼고, 어떤 것은 요점(要點)에 맞지 않으며, 어떤 것은 가리지 않은 것이 있다."
하였다.
10월 29일 계묘
동지사(冬至使) 조태채(趙泰采)·김상직(金相稷)·한지(韓祉)가 청(淸)나라에 갔다.
임금의 환후(患候)에 한기(寒氣)가 다시 일어나 약방에서 입진(入診)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고 다만 의관(醫官)만 명하여 입시(入侍)하도록 하였다.
충청도 해미현(海美縣) 봉화대(烽火臺)의 고직(庫直)이 벼락에 맞아 죽고, 고사(庫舍) 한 간이 불탔다.
10월 30일 갑진
약방에서 입진하였는데,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양영(兩營)의 군병(軍兵)으로 재해를 입은 고을에 있는 자는 상번(上番)할 수가 없으니, 청컨대 묘당(廟堂)556) 과 장신(將臣)이 상의하여 납월(臘月)557) 부터 기한을 정하여 번을 정지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후에 묘당에서 12월부터 명년 5월에 이르기까지 번을 정지하는 뜻으로 복주(覆奏)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임금의 환후(患候)가 오랫동안 미령(未寧)하다는 것을 듣고 도성 밖에 왔는데,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가서 개유(開諭)하게 하기를,
"나의 병이 조금 덜하기를 기다려 마땅히 면유(面諭)할 것이니, 안심하고 대죄(待罪)하지 말라."
하고, 또 사관(史官)을 보내어 병이 조금 덜하면 면유(面諭)하겠다는 뜻을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에게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비변사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명하기를,
"호서 각 고을의 조곡(糶穀)은 더욱 심한 가운데에서도 더욱 심한 고을에는 당년조(當年條)를 반감(半減)하고, 더욱 심한 고을은 3분의 1을 감하고, 그 다음은 다만 옛날의 미수(未收)만 정지하며, 더욱 심한 가운데에서도 더욱 심한 곳은 금년 모곡(耗穀)을 주어서 진자(賑資)에 보태도록 허락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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