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을사
금성(金星)이 방성(房星)의 제2성(第二星)을 범하였다.
임금의 환후(患候)가 곤뇌(困惱)하여 더 신음하였는데, 새벽 후에는 한기(寒氣)가 있으므로, 약방에서 입진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고, 다만 의관(醫官)만 명하여 입시하도록 하였다. 또 여러 의원을 거느리고 직숙(直宿)하기를 청하니, 다만 의관만 명하여 직숙하도록 하였다.
경기 수원 등 고을에 천둥하였다.
11월 2일 병오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이 대궐 밖에 나와 상소하여 심정과 병을 드러내 아뢰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전라도 전주에 천둥하였다.
11월 3일 정미
이조 판서 황흠(黃欽)을 면직시키고 송상기(宋相琦)를 이조 판서로, 오명항(吳命恒)을 교리(校理)로, 양성규(梁聖揆)를 보덕(輔德)으로, 정수기(鄭壽期)를 사서(司書)로, 심공(沈珙)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대궐 밖에 나와 사직소를 올리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김중기(金重器)를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삼았다.
11월 4일 무신
약방에서 입진하였는데, 임금의 기후(氣候)가 점차 덜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의 진달로 인하여 명하기를,
"호위청(扈衞廳) 소속은 정식(定式)에 의하여 각각 2백 명을 두어 3청(廳)을 합하여 6백 명으로 하고, 매 10인마다 영장(領將) 한 명을 두되, 매 청(廳)마다 각기 50인을 더하여 영장(領將)의 여군(餘軍)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권상하(權尙夏)가 병상(病狀)을 도신(道臣)을 통해 장문(狀聞)하니, 우악한 비답으로 회유(回諭)하였다.
11월 5일 기유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상소하여 녹봉(祿俸)의 수송을 사양하였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6일 경술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장문(狀聞)으로써 명하기를,
"통진(通津) 수군(水軍) 1백 2명을 부평(富平)으로 이정(移定)하고, 안산(安山)의 93명을 본도(本道)에 그대로 두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7일 신해
명하기를,
"전라도 해남 등 연해 고을의 전세(田稅)는 모두 늦추어 받아들이고, 그 나머지 더욱 심한 곳은 대동(大同)을 절반으로 하도록 하라."
하였으니, 도신(道臣) 및 감진 어사(監賑御史)의 말을 따른 것이다. 또 강화 유수(江華留守)의 장청(狀請)으로 본부(本府) 제사(諸司)의 노비 신공(奴婢身貢)은 절반만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11월 8일 임자
황해도 옹진(瓮津) 등지에 비와 눈이 뒤섞여 내리고 천둥하여 번개가 크게 쳤다.
평안도 성천(成川) 등 네 고을의 세미(稅米)와 세태(稅太) 4천 석을 전라도로 옮겼는데, 도신(道臣)의 장청(狀請)에 따른 것이다.
11월 9일 계축
한영휘(韓永徽)를 장령(掌令)으로, 홍석보(洪錫輔)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11월 10일 갑인
호남(湖南)의 기흉(飢凶) 때문에 나주에 정배한 죄인 임홍(林泓)을 경상도 남해현(南海縣)으로, 강진(康津)에 안치한 죄인 오시복(吳始復)을 영해부(寧海府)로 이배(移配)하였다.
11월 11일 을묘
예조 참의(禮曹參議) 정호(鄭澔)가 향리에서 이천(利川)에 도착하여 진소(陳疏)하여 이명언(李明彦)의 소에 대해 변명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의 전소(前疏)에서 이른바 배사(背師)했다고 한 자는 바로 간신(諫臣)이 현자(賢者)라고 추대하는 자인데, 신이 감히 척언(斥言)하며 숨기지 않았으니, 그가 신을 가리켜 패류(悖謬)하여 간사하게 둔사(遁辭)만 일삼고 있다고 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명(聖明)께서도 그의 말이 합당하다고 하셨으니, 이는 성명께서도 또한 신을 패류하여 간사하게 둔사만 일삼고 있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사직하는 뜻에 언급하니, 답하기를,
"소어(疏語)가 화평에 아주 부족하니, 참으로 이상하다."
하였다.
11월 13일 정사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건명(李健命)이 이명언(李明彦)의 상소로 인하여 하향(下鄕)하여 여러 차례 사직하는 소를 진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울에 들어와서 이날 연중(筵中)의 특별히 추고(推考)하라는 명을 받고 비로소 왕명을 받들었다.
11월 16일 경신
달이 여귀성(輿鬼星)의 서남쪽 별을 범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典獄)에 가서 죄가 가벼운 죄인을 석방하게 하였다.
사간원에서 논하기를,
"도하(都下)의 서민(庶民)들이 아침 저녁으로 허둥지둥하면서 이미 떠도는 거지의 무리가 있게 되었으나, 형부(刑部)와 경조(京兆)의 징채(徵債)가 여전하여 백성들이 감내(堪耐)할 수가 없습니다. 추조(秋曹)558) ·경조(京兆)의 추노 징채(推奴徵債) 등의 일은 명년 봄을 한정하여 방색(防塞)하소서. 정주 목사(定州牧使) 이삼(李森)은 일찍이 기읍(畿邑)에 부임하여 그 잔박(殘薄)함을 싫어하여 마침내 체직을 도모하기에 이르렀고, 본주(本州)에 임명되어서는 서둘러 사조(辭朝)하여 다만 고을 모양의 후박(厚薄)만 보고서 진퇴할 계책을 삼았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고, 이삼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였다.
예조에서 군신의 복제(服制) 【임금이 일찍이 연중(筵中)에서 하교한 일이 위에 보인다.】 한 조항으로써 여러 대신들에게 문의(問議)하니,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의논하기를,
"이 일은 국조(國朝) 이래 일찍이 말한 자가 없었고, 평시에는 기휘(忌諱)하는 것으로 여겨 감히 강론(講論)하지 못하였는데, 일에 임해서 갑자기 비록 혹 말하는 이가 있었기는 하나 매양 속론(俗論)에 저지되어 아직껏 변개하지 못했으니, 예(禮)를 아는 선비들이 크게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제 성명께서 경서(經書)로 인해 의리(義理)를 일으켜 전고(前古)의 잘못을 씻고 일대(一代)의 제도를 새롭게 하려고 생각하시니, 뜻이 매우 훌륭합니다. 부모를 위하고 임금을 위한 최복(衰服)은 《의례(儀禮)》에 처음 보이는데, 진한(秦漢) 이래 상복이 날로 문란하여 한(漢)나라 제유(諸儒) 및 당(唐)나라 두우(杜祐), 송나라 마단림(馬端臨) 등이 모두 논저(論著)한 바가 있으나, 시왕(時王)의 연혁한 제도에 불과합니다. 주자에 이르러 군신의 복의(服議)에 고금을 참작하고 정문(情文)을 줄이거나 보태었는데, 그 설(說)이 아주 구비되어 그 이치가 지당하니 고례(古禮)를 회복하려고 한다면 이를 버리고 무엇을 따르겠습니까.
우리 나라 선조(宣祖) 때의 일은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저서에 자세히 보이는데, 성교(聖敎) 가운데 민순(閔純)의 의논으로 인하여 바로 잡은 것이 이것이며, 효종(孝宗) 초년에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 또한 《오례의(五禮儀)》가 고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헌의(獻議)한 바가 있었으니, 두 신하는 모두 주자(朱子)의 의논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가 일찍이 경사(京師)에 조회갔을 때 마침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승하(昇遐)한 때를 당하여 성복(成服)하는 반열에 따라 참여하였는데, 그 문무 백관(文武百官)의 상복(喪服)이 한결같이 최질(衰絰)의 제도를 따른 것을 보고, 그 일을 유집(遺集) 가운데에 갖추 기록하였습니다. 황조(皇朝)의 예서(禮書)가 아직 남아 있으니, 지금도 상고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예제(禮制)가 이러하다면, 더욱 마땅히 중국을 따라야 할 것이니, 마땅히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이런 서적들을 널리 상고하여 긴요한 곳을 초록(抄錄)하여 예람(睿覽)에 대비하게 하고, 다시 예관(禮官)에게 내려 참작 상의(商議)하게 해서 최질(衰絰)로 성복(成服)하고, 포모(布帽)와 포대(布帶)차림으로 시사(視事)하는 것을 한결같이 주자의 의논에 의거해서 정하여 저령(著令)을 삼는다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조금도 손상됨이 없어 만세(萬世)의 법이 될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은 의논하기를,
"생각건대 신이 일찍이 갑인년559) 인선 대비(仁宣大妃)의 상(喪)에 현관(賢關)560) 에 있으면서 감히 이 논의를 창도(倡導)하고, 문득 많은 선비들과 함께 잇따라 글을 올려 호소하면서 주 부자(朱夫子)의 정론(定論)과 황조(皇朝)에서 이미 행한 일을 끌어대었으나, 끝내 청을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신은 일찍이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하였는데,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의 의논은 대지(大旨)가 대략 김창집과 같았다. 판부사(判府事) 조상우(趙相愚)는 의논하기를,
"기억하건대 기해년561) 국휼(國恤) 때 양사(兩司)의 합계(合啓)로 인하여 성상께서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하기를 명하셨는데, 신의 스승 문정공(文正公) 신(臣) 송준길(宋浚吉)이 실로 문정공(文正公) 신(臣)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힘껏 고례(古禮)를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은 그때 포의(布衣)로서 관유(館儒) 남이성(南二星) 등과 함께 글을 올려 양사(兩司)의 계청(啓請)을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두 세 대신(大臣)의 의견이 조금 달라서 중지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 의논은 본디 신의 사문(師門)이 굳게 지킨 바이고, 신이 우견(愚見)을 조술(祖述)한 바인데, 전하께서 순문(詢問)하심에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우의정 김우항(金宇杭)과 판부사 서종태(徐宗泰)의 의논은 이이명의 의논과 같았으며, 판부사 최석정은 정병(情病)으로 사양하고 끝내 헌의하지 않았고, 판부사 이유는 세 번 하문하자 비로소 대략 헌의하였는데, 뜻은 여러 대신과 같았다. 명하기를,
"밖에 있는 대신 및 유신(儒臣)에게 다시 의논하라."
하였다.
11월 17일 신유
임금의 환후(患候)가 오랫동안 정섭(靜攝)562) 중인데다 입춘(立春) 전에는 무고(無故)한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승정원에서 금년의 계복(啓覆)563) 을 정지하기를 계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전라도에 큰 바람이 불어 왕래한 선박이 많이 침몰하여 인물 1백 90여 명이 빠져 죽었는데, 각별히 휼전(恤典)을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11월 18일 임술
달무리가 토성(土星)을 둘렀다.
비국(備局)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제주(濟州)에 표류(漂流)해 온 사람에게 호조로 하여금 저고리와 바지를 만들어 주게 하고, 관서(關西)를 지날 때에 사람마다 은자(銀子) 2냥씩을 준례에 따라 나누어 주게 하였다. 또 서울에 머물면서 휴식한 후 출발하도록 하였다.
11월 19일 계해
사헌부에서 논핵하기를,
"가산 군수(嘉山郡守) 조경(趙儆)은 효성령(曉星嶺) 수목을 초석(硝石)564) 을 굽는다고 핑계대어 낭자(狼藉)하게 벌채하여 팔아 돈을 취해 모조리 자기가 차지하고, 군관(軍官)의 제번포(除番布)565) 를 경화(輕貨)로 바꾸어서 그의 집으로 실어 보냈으니,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니, 윤허하지 않았다.
홍우녕(洪禹寧)을 승지(承旨)로, 오명항(吳命恒)을 응교(應敎)로, 홍호인(洪好人)을 필선(弼善)으로, 이몽엽(李夢畢)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11월 20일 갑자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이 청대(請對)하였다.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청하기를,
"함경북도의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에 모곡(耗穀)을 주도록 허락하고, 공명첩(空名帖)을 만들어 보내 진자(賑資)에 보태게 하고, 제주에서 응당 바쳐야 할 각 관사(官司)의 물종(物種)을 적당히 헤아려 견감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후에 명하기를,
"물종(物種) 가운데 말·대모(玳瑁)·귤유(橘柚)는 감하라."
하였다. 이때 이조 판서 송상기(宋相琦)가 문형(文衡)을 겸대(兼帶)한 것으로 논핵을 당하였다 하여 【위에 보인다.】 인혐하고 들어갔는데,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청하기를,
"송상기의 문형(文衡) 직임을 해면하여 즉시 본직(本職)에 행공(行公)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호남 연해에 흉년이 든 것 때문에 청하기를,
"식년과(式年科) 초시(初試)를 명년 가을로 늦추어 행하고, 회시(會試)는 후년 봄에 설행하소서."
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말하자, 임금이 명하기를,
"초시는 8, 9월에 택일하되, 회시는 후년 봄에 설행(設行)하라."
하였다. 여러 대신이 다 불가하다고 말하자, 임금이 명하기를,
"초시(初試)는 8, 9월에 택일(擇日)하고, 회시(會試)는 우선 겨울 전으로 날짜를 정하라."
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호남에 떠도는 거지가 길에 가득한데, 조금 넉넉한 곳에 사는 사람들이 용접(容接)하기를 허락하지 않으니, 청컨대 도신(道臣)과 수의(繡衣)566) 에게 신칙하여 혹은 관가(官家)에게서 접제(接濟)하거나 혹은 부민(富民)으로 하여금 먹여 주거나 양식을 주어 돌려 보내게 하소서. 앞으로는 수의가 내려갈 때 염찰(廉察)하여 만일 경내(境內)에 굶주려 죽은 자가 있으면 수령을 논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말하기를,
"홍주(洪州)의 유생(儒生)이 상소하여 이유태(李惟泰)의 서원(書院)에 사액(賜額)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미 품(稟)하지 않고 먼저 세웠고, 또 그 상소에서 이미 세우고도 세우지 않은 것으로 하였으니, 더욱 아름답지 못합니다. 이는 마땅히 헐어야 할 조목(條目)에 듭니다."
하고, 김창집도 또한 마땅히 헐어야 한다고 말하니, 임금이 이를 헐고 그 수창(首倡)한 유생을 죄주라고 명하였다. 민진후가 또 청하기를,
"호남 사람으로 별천(別薦)을 받은 자는 각별히 조용(調用)하고, 송파진(松坡津)의 군대 1초(哨)567) 와 갑사둔(甲士屯)은 일체로 수어청(守禦廳)의 천총(千摠)에 속하게 하여 얼음이 얼 때 모아서 점열(點閱)하고 앞으로 다시 더 모집하여 모양을 이루도록 하며, 수첩 군관(守堞軍官)으로 가까운 데 있는 자도 또한 초출(抄出)하여 점열에 동참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정언(正言) 조상경(趙尙絅)이 상소하여 국사(國事)를 논했는데, 첫머리에 천재(天災)로 흉년이 들었는데 조신(朝臣)들이 당동 벌이(黨同伐異)568) 를 일삼고 있는 것을 말하고, 공명한 건극(建極)의 도(道)로써 결말(結末)을 지었으며,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 구언(求言)하시면서 이언강(李彦綱)·이진망(李眞望)이 고관(考官)에게 지색(枳塞)당한 일과 발이 부르튼 지 오래 되었다는 일로써 하교하신 바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이처럼 재변을 만나 구언(求言)하는 날에 이런 말을 내십니까. 이런 사지(辭旨)는 이미 구언하는 체모가 아닌데, 마치 이 때문에 재변이 이른 것처럼 하시니, 어찌 매우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이광적(李光迪)이 서명우(徐命遇) 때문에 천재가 응하였다고 한 것은 아주 사리에 어긋난 말이며, 비지(批旨) 안에 ‘백수의 나이[白首之年]’란 네 글자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예대(禮待)하는 도리에 부족하니, 빨리 산개(刪改)를 명하소서. 그윽이 듣건대 지난날 진자(賑資)에 보탠 은화가 내수사(內需司)에서 나왔는데, 전하께서 전부터 저축하여 불시(不時)의 수용(需用)으로 삼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상시 재물을 아끼고 사정(私情)을 버린 덕(德)을 이에서 그 만분의 일이나마 엿볼 수가 있습니다. 내수사의 각궁(各宮)의 세입(稅入)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미려(尾閭)569) 로 새고 남상(濫觴)으로 쓴다면 절용(節用)하는 방도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재물을 기울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는 것으로써 관청(觀廳)을 용동(聳動)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시고, 더욱 사사로이 소비함이 없이 절검을 숭상하는 도리에 마음을 쓰소서.
사람을 쓰는 즈음에 사사로운 마음이 너무 많으니 외관(外官)과 내직(內職)에 청탁이 어지럽고, 도정(都政) 때에 양전(兩銓)의 문에 관절(關節)570) 이 구름처럼 모여듭니다. 처음 입사(入仕)를 가려서 의망하는 전교를 신신 당부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허정(虛靜)571) 을 지켜 염담(恬澹)572) 하는 선비를 조사하여 천거함이 적고, 청탁하고 조경(躁競)573) 하는 무리를 문득 먼저 거두어 녹용(錄用)한다면, 백성들이 곤란을 받는 것이 어찌 초사(初仕)를 가리지 않는 일에 말미암지 않겠습니까. 부지런히 애를 써서 독서(讀書)하고서도 여러 차례의 천거에 들지 못한 무리는 진실로 마땅히 수습해야 하는데, 전주(銓注)하는 사이에 녹용되는 자가 드무니, 역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별도로 택용(擇用)하게 하여야 합니다.
이명언(李明彦)의 상소가 비록 붕비(朋比)를 일삼지 않는다고 자허(自許)했지만, 한편의 말뜻이 대개 자기와 의논이 다른 자를 배척하고 사당(私黨)을 추켜세우는 데서 나왔는데도 도리어 사당을 편들지 않은 일로써 군부(君父) 앞에서 질증(質證)하여 ‘하늘이 싫어한다’는 등의 말을 인용하여 억지로 맹세하니, 어찌 그의 외설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김만주(金萬胄)는 비오(鄙汚)하여 대선(臺選)에 합당치 않으므로, 논박(論駁)하여 바로잡는 계청은 대개 공의(公議)를 따른 것인데, 아무렇지 않게 대궐에 나아와서 이에 스스로 변명하는 상소에서 도리어 ‘함해(陷害)·유망(謬妄)’ 등의 말로써 오로지 언자(言者)를 공격하였으니, 신은 실로 놀랍게 여깁니다."
하고, 끝에 말하기를,
"승평(昇平)한 날이 오래 되어 융정(戎政)이 점차 소홀해졌습니다. 영남의 군기(軍器)는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으니, 영남이 이와 같다면 다른 도(道)는 알 만합니다. 각도의 감사(監司)·병사(兵使)에게 신칙하여 일일이 친히 검열(檢閱)하게 하고, 값을 주어 개비(改備)하게 하여 음우지비(陰雨之備)를 삼도록 하소서 우리 나라의 정병(精兵)은 서북을 첫째로 쳐서 위급한 사태의 사용에는 실로 이 무리들에게 힘입었는데, 금삼(禁蔘)의 뒤에는 교역(交易)하는 길이 끊어졌으며, 총(銃)을 봉해 두고 포렵(砲獵)을 금지하였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우리 나라 경계에서 채렵(採獵)하는 것을 모두 복구(復舊)시켜 그들에게 의식(衣食)을 의뢰하도록 하되, 만일 범월(犯越)한 자가 있으면 드러나는 대로 중죄로 다스려 그 간사함을 징계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난번 비망기(備忘記) 중에서 하교(下敎)하기를, ‘이로써 재변을 초래(招來)했으니 공평의 도리로써 힘쓰는 데 불과할 뿐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광적(李光迪)의 비지(批旨) 중에 말한 것 또한 회책(誨責)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므로, 나는 그것이 미안함을 보지 못하겠다. 별도로 택용(澤用)해야 한다는 한 조항은 전조(銓曹)에 신칙한 것이고, 제조(諸道)의 군기(軍器)에 관한 일 및 소 끝의 채렵(採獵)을 허락하는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처음에 황조(皇朝)의 태조(太祖)가 우리 나라에 내린 마패(馬牌) 4개 및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특사(特賜)한 것은 2개가 아직껏 상서원(尙瑞院)에 있었는데, 임금이 이를 듣고는 대궐 안으로 들이기를 명하여 친히 보고는 내렸었다. 이때에 이르러 승지 유태명(柳泰明)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그것을 넣은 함이 깨끗하지 못하고, 또 일용(日用)하는 마패가 있는 곳에 뒤섞어 두니,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마땅히 함을 깨끗하게 만들어 벽상(壁上)에 높이 걸어 존주(尊周)의 뜻을 나타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함에 옻칠을 하여 각별히 높은 다락에 두도록 명하였다.
11월 21일 을축
명하기를,
"경외(京外)의 충신(忠臣)·열녀(烈女)·효자(孝子)에게 혹은 정려(旌閭)·증직(贈職)·제직(除職)·복호(復戶)·면천(免賤)으로 각기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라."
하였다. 【무릇 4백여 명이었다.】
【태백산사고본】 62책 54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21면
【분류】구휼(救恤)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역(軍役) / 신분-천인(賤人)
11월 22일 병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수라(水剌)를 평소만큼 회복하지 못한 것 때문에 다시 탕제(湯劑)를 올렸다. 임금이 제조(提調) 이이명(李頤命)·조태구(趙泰耉)와 함께 강희 태자(康熙太子)를 처치한 일에 대해 논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듣건대 태자의 성품이 매우 패려(悖戾)하여 매양 말하기를, ‘고금 천하에 어찌 40년이나 되는 태자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니, 그 성행(性行)을 알 수가 있습니다. 13왕(王)가운데 제3왕(第三王)이 또 무군 감국(撫軍監國)을 일컬었으니, 이는 난리를 초래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하고, 조태구는 말하기를,
"태자가 무상(無狀)하여 뇌물을 많이 받고, 또 제왕(諸王)과 서로 당파(黨派)를 세웠으니, 강희(康熙)가 만약 죽는다면 국사(國事)를 알 만합니다. 우리 나라도 또한 염려가 되니, 마땅히 미리 방비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비국(備局)에서 대계(臺啓)의 복주(覆奏)로써 청하기를,
"한성부(漢城府)와 형조(刑曹)의 오래된 추노 징채(推奴徵債)는 천천히 처리하고, 그 나머지는 참작하여 청리(聽理)하고, 또 북도(北道)의 삼수(三水)·갑산(甲山)과 육진(六鎭)의 세초(歲抄)는 명년 가을을 한정하여 정지하기를 허락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23일 정묘
이대성(李大成)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신정하(申靖夏)를 수찬(修撰)으로, 황규하(黃奎河)를 검열(檢閱)로 삼고, 밀산군(密山君) 이찬(李澯)에게 정혜(靖惠)란 시호(諡號)를, 증 판서(贈判書) 조위(曹偉)에게 문장(文莊)이란 시호를, 형조 판서(刑曹判書) 여이재(呂爾載)에게 숙헌(肅憲)이란 시호를 내렸다.
11월 24일 무진
약방에서 입진하였는데, 임금의 환후가 한결같았으나, 핵처(核處)에 은근히 아픈 조짐이 있었다.
11월 27일 신미
판부사(判府事) 윤증(尹拯)이 현도(縣道)를 통하여 사직소를 올리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유(慰諭)하였다.
11월 28일 임신
약방에서 입진하였는데, 임금의 환후의 여러 증세는 가감(加減)이 없었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의 진달한 바로 인하여 유천군(儒川君) 이정(李濎)으로 하여금 입참(入參)하여 진찰하고 약을 의논하게 하였다.
이집(李㙫)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홍호인(洪好人)을 장령(掌令)으로, 이병상(李秉常)을 헌납(獻納)으로, 이택(李澤)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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