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4권, 숙종 39년 1713년 12월

싸라리리 2025. 11. 29.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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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갑술

이보다 앞서 양사(兩司)에서 함께 유혁연(柳赫然)·이원정(李元禎)의 복관(復官)을 환수하기를 아뢰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간원(司諫院)에서 【정언(正言) 박성로(朴聖輅)와 조상경(趙尙絅)이다.】  먼저 정계(停啓)하니, 물의(物議)가 엄히 징토(懲討)하는 뜻을 잃었다 하여 비난하였다.

 

통신사(通信使) 조태억(趙泰億) 등 3인에게 비로소 직첩(職牒)을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조태억 등은 봉사(奉使)하면서 왕명(王命)을 욕되게 하여 거듭 대론(臺論)을 입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직첩을 주었는데, 청의(淸議)가 그래도 불쾌하게 여겼다.

 

전라도 전주에 천둥이 쳤다.

 

12월 2일 을해

명하기를,
"임진란(壬辰亂)에 싸우다 죽은 고(故) 첨사(僉使) 정발(鄭撥)·군수(郡守) 조영규(趙英圭)·유생(儒生) 문덕겸(文德謙), 비장(裨將) 김희수(金希壽)·송봉수(宋鳳壽), 호장(戶長) 송백(宋伯)·겸인(傔人) 신여로(申汝櫓)·부민(府民) 김상(金祥) 등을 모두 동래(東萊)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配享)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라."
하였는데, 충렬사(忠烈祠)는 바로 고(故)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의 사당이다.

 

12월 4일 정축

목성(木星)이 누벽진(壘壁陳) 성좌의 제6성(第六星)을 범하고, 유성(流星)이 남하성(南下星) 위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12월 5일 무인

유성(流星)이 각성(角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12월 6일 기묘

임금의 환후(患候)가 한열(寒熱)이 또 일어나 잠을 자지 못하고 수라(水剌)를 들지 못하므로, 약방(藥房)의 세 제조가 본원(本院)에서 직숙(職宿)하였다.

 

12월 7일 경진

최규서(崔奎瑞)를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이의현(李宜顯)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정식(鄭栻)을 응교(應敎)로, 신사철(申思喆)을 부교리(副校理)로, 홍정필(洪廷弼)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택(李澤)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이정제(李廷濟)를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12월 9일 임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이때에 충주(忠州) 사람 이동석(李東奭)이 풍수설(風水說)을 부회(傅會)하여 몰래 참기(讖記)를 만들어 이를 새겨 벽돌을 구웠는데, 허망한 말이 많았다. 도신(道臣)이 붙잡아 임금께 아뢰니, 국청(鞫廳)을 베풀어 신문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진백(陳白)하여 청하기를,
"우선 성상의 환후(患候)가 조금 낫기를 기다려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10일 계미

약방에서 입진하였는데, 임금의 환후 여러 증세가 똑같았다. 핵처(核處)에 소독(消毒)하는 고약(膏藥)을 붙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출신(出身) 박태준(朴泰俊)이 침술(鍼術)을 잘한다고 하여 본도(本道)로 하여금 말을 주어 올려 보내게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11일 갑신

약방에서 입진하여 입맛이 쓰고 위(胃)에 해롭다 하여 우선 탕제(湯劑)를 정지하고, 인삼(人蔘)과 좁쌀 미음[粟米飮]을 올렸다.

 

12월 12일 을유

충청도 남포(藍浦) 등지와 강원도 회양(淮陽) 땅에 지진이 있었고, 충청도 부여 등지에 천둥하였다.

 

12월 13일 병술

약방에서 입진하여, 임금의 각부(脚部)가 당기고 아픈 증세로 좌우 슬안혈(膝眼穴)에 뜸을 떴다.

 

12월 14일 정해

약방에서 입진하여 임금이 뜸을 떴다.

 

임금이 판부사(判府事) 윤증(尹拯)의 병세가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의원에게 약을 가지고 가서 보게 하고, 잇따라 서계(書啓)하도록 했다.

 

12월 15일 무자

유성(流星)이 위성(危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12월 16일 기축

사헌부(司憲府)에서 논핵하기를,
"영남의 의인(醫人) 유이태(劉以泰)는 내국(內局)574)  에서 재촉하여 전주에 이르렀는데, 병을 핑계대어 오지 않다가 끝내는 집으로 돌아가 거드름을 피우면서 편하기를 도모했으니, 중전(重典)에 처해야 마땅합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엄중히 조사하여 처리하소서. 도신(道臣)은 마땅히 재촉해 올려 보냈어야 하는데도 내국(內局)에 탈보(頉報)575)  하고는 그가 곧바로 돌아가도록 맡겨두었으니, 청컨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18일 신묘

흰구름 한 줄기가 곤방(坤方)에서 일어나 손방(巽方)을 가리켰다.

 

임금이 전라도 감진 어사(全羅道監賑御史) 홍석보(洪錫輔)가 품정(稟定)할 일이 있어 상경(上京)했다가 임금의 환후(患候)가 미령(未寧)한 것으로 인하여 청대(請對)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는 홍석보와 좌상(佐相)·우상(右相)에게 명하여 함께 인견(引見)하였다. 홍석보가 청하기를,
"진청(賑聽) 및 강도(江都)의 쌀을 합해 3만 석을 얻어 전세(田稅)·대동미(大同米)와 바꾸어 쓰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각기 1만 석을 주도록 하였다. 또 영남에 별도로 모은 곡식 3만 석을 얻기를 청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쌀 5천 석과 벼 1만 석을 획급(劃給)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홍석보가 말한 바로 인하여 영남의 환상미(還上米) 1만 석과 벼 2만 석을 수송하여 그대로 받아 본도(本道)에 머물러 두게 하였다. 홍석보가 또 청하기를,
"호서의 예(例)에 의하여 더욱 심한 고을의 대동미(大同米)는 2두(斗)를 감하고, 호조·병조의 무명으로 진휼에 보탤 물건을 모두 탕감하여, 도내 환상(還上)의 금년 모곡(耗穀)은 전부 백급(白給)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고 더욱 심한 고을의 모곡(耗穀)은 전부 백급(白給)하게 하였다.

 

신심(申鐔)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여광주(呂光周)를 교리(校理)로, 홍만우(洪萬遇)를 부수찬(副修撰)으로, 홍중휴(洪重休)를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12월 20일 계사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최석항(崔錫恒)에게 명하여 승지(承旨)와 함께 감자(柑子)를 나누어 주고 반궁(泮宮)에서 시사(試士)하게 하여 수석을 차지한 구명규(具命奎)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12월 22일 을미

임금의 환후(患候)가 더욱 곤뇌(困惱)하고 구담(口淡)이 특별히 심해졌으므로, 약방에서 금일부터 사옹원(司饔院)으로 옮겨 직숙하고 유천군(儒川君) 이정(李濎)도 또한 따로 생기(省記)576)  를 만들어 입숙(入宿)하게 하였다.

 

12월 23일 병신

밤에 검은 구름 한 줄기가 손방(巽方)에서 일어나 곤방(坤方)을 가리켰다.

 

12월 25일 무술

영부사(領府事) 윤지완(尹趾完)이 임금의 환후(患候)가 미령(未寧)하다는 말을 듣고 도성 안에 도착했는데, 승정원에서 아뢰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이 아뢰기를,
"봉사(奉事) 황처신(黃處信)이 의술(醫術)에 정통하니 특명으로 불러오고, 양산(梁山)에 유배(流配)된 죄인 이공윤(李公胤)의 의술이 자못 기이하게 맞는데, 본도(本道)의 방미방(放未放)577)  의 계본(啓本)이 지금 승정원에 머물러 있다하니, 곧바로 방송(放送)하여 기발(騎撥)578)  로 하여금 올라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12월 26일 기해

밤에 달이 남두 제6성(第六星)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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