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5권, 숙종 40년 1714년 1월

싸라리리 2025. 11. 29.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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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계묘

임금이 어제(御製) 오언 절구(五言絶句) 3(首)를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내렸다. 그 첫수에 이르기를,
"새해를 무엇으로 축원하리
연경(燕京)의 요사한 기운 말끔히 개이기를 원하노라
태평한 운세 이제부터 열리어
황조(皇朝)의 대업(大業)이 다시 밝으리로다."
하고, 둘째 수에 이르기를,
"새해를 무엇으로 축원하리
온 나라에 풍년 들기 원하노라
우순(雨順) 풍조(風調) 이제부터 시작하여
그 경사 팔역(八域)이 함께 하리로다."
하고, 세째 수에 이르기를,
"새해를 무엇으로 축원하리
조정이 함께 화협하기를 원하노라
옛 폐습 이제부터 바로 잡아서
정신 모으고 다시 마음 모으리로다."
하였다. 이때 임금의 병환이 침중(沈重)한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백성의 곤궁함을 근심하고 붕당(朋黨)을 염려하는 뜻이 오히려 음영(吟咏)에 나타나고, 존주(尊周)의 대의(大義)에 이르러서는 첫 구절에 밝게 나타나 사람을 용동(聳動)케 할 만한 바가 있었으므로, 온 세상이 감탄하며 전송(傳誦)하였다.

 

1월 3일 을사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다.

 

사은사(謝恩使)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권상유(權尙游)·한중희(韓重熙) 등이 청국에서 돌아왔는데, 그곳의 사정(事情)을 염탐하여 별단(別單)에 논주(論奏)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폐태자(廢太子)를 별처(別處)에 가둔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청황(淸皇)이 중간에 뉘우치는 뜻이 있어 사람들이 혹은 장차 복위(復位)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덕림(德琳)의 판삼(販蔘)에 관한 옥사(獄事)가 있어 태자에게 간련(干漣)되었으므로 우선 중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1월 11일 계축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유성(流星)이 북극성(北極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1월 12일 갑인

최상리(崔尙履)를 검열(檢閱)로 삼았다.

 

1월 15일 정사

선혜청(宣惠廳)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경기·호서·호남·영남의 관수(官需)에서 8분의 1, 2를 감하고, 또 삼남(三南)의 월과(月課)인 조총(鳥銃)을 정지했으니, 을해년001)   재감(災減)의 예(例)를 따른 것이다.

 

1월 16일 무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제조(提調) 조태구(趙泰耉)가 심신(心神)을 편안히 하고 기(氣)를 펴고, 또 마음 다스리는 방법을 생각하여 심화(心火)가 발동해서 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그 말로 인하여 아뢰기를,
"송(宋)나라 신하 장영(張詠)이 그의 문인(門人) 이전(李畋)의 질병이 새로 쾌유됨을 보고 경계하기를, ‘네가 마음 옮기는 방법을 아는가? 병자(病者)는 항상 두려워하고 근신하기를 마치 군부(君父)의 옆에 있는 것같이 하고, 오랜 질병이라 하여 망령되게 조급해 하거나 번요(煩擾)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습성(習性)으로 이루어지고 심지(心志)가 굳게 정해질 것이다. 비록 질병이 나은 뒤라 하더라도 항상 상제(上帝)를 모신 것같이 하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 더 치밀해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상(聖上)께서도 또한 병환이 오래 됨을 근심하지 마시고, 항상 깊은 못에 임한 듯하고 살얼음을 밟는 듯한 경계를 두신다면, 마음이 줏대가 있고 신기(神氣)가 편안하고 태연하여 질병이 저절로 몸을 떠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1월 19일 신유

전교(傳敎)하기를,
"진정(賑政)과 권농(勸農)을 각별히 신칙해야 할 이때에 질병이 이와 같아 몸소 별유(別諭)하지 못하니, 제도(諸道)의 감사(監司)와 양도(兩都)의 유수(留守) 및 감진 어사(監賑御史)002)  에게 정원(政院)에서 말을 만들어 하유(下諭)하도록 하라."
하니, 좌승지(左承旨) 홍우녕(洪禹寧)이 대신 말을 지어 여러 도에 반시(頒示)하였다.

 

1월 22일 갑자

지진이 일어났다. 달이 방수(房宿) 제2성(第二星)을 범하였다.

 

1월 24일 병인

호남의 저치미(儲置米)003)   3천 석(石)을 제주에 수송(輸送)하라고 명하였다.

 

1월 29일 신미

김흥경(金興慶)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취로(金取魯)·조성복(趙聖復)을 정언(正言)으로, 김유경(金有慶)을 지평(持平)으로, 여광주(呂光周)를 필선(弼善)으로, 임상덕(林象德)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장청(狀請)으로 인하여 강도(江都)의 쌀 5천 석을 이송(移送)하여 진정(賑政)에 보충하게 하였다.

 

1월 30일 임신

강화(江華)·개성(開城)과 평안도(平安道)의 평양(平壤) 등 20고을 및 경기의 수원·안성과 황해도의 해주 등지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이 뒤에 팔도에서 모두 장문(狀聞)하였다.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윤증(尹拯)이 졸(卒)하니, 나이 86세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여 애도(哀悼)함이 지극하였고, 뒤에 문성(文成)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윤증은 이미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하여 사림(士林)에서 죄를 얻었고, 또 유계(兪棨)가 편수(編修)한 예서(禮書)를 몰래 그 아버지가 저작한 것으로 돌려 놓았다가 수년 전에 그 사실이 비로소 드러나니, 유계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이를 노여워하여 편지를 보내 절교하였다. 윤증은 젊어서 일찍이 유계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에 이르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윤증이 전후로 두 어진 스승을 배반했으니, 그 죄는 더욱 용서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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