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갑진
안중필(安重弼)을 정언(正言)으로, 홍호인(洪好人)을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3월 6일 정미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3월 9일 경술
이때 날이 오랫동안 가물었는데, 임금이 정섭(靜攝)하는 가운데에도 민사(民事)를 염려함이 지극하여 7일 저녁에는 몸소 향을 피우며 묵도(默禱)했더니, 다음날 비가 흡족하게 내렸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며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어제시(御製詩)를 내렸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단비가 때를 알고 밤에도 그치지 않으니
천지의 혜택 만물이 모두 입누나
병중인들 백성의 일 어이 잊으랴?
풍년이 모맥에서부터 시작되기 원하노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바로 농사철을 당하여 이런 단비를 얻으니, 민사(民事)가 다행스럽다. 각별히 권면하여 적기(適期)에 파종(播種)하고 행여 시기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비국(備局)에서 신칙하라."
하였다.
3월 10일 신해
유성(流星)이 방성(房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정원(政院)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왕세자는 이사(貳師)의 상사(喪事)에 대하여 거애(擧哀)·임조(臨弔)·치전(致奠) 등의 의절(儀節)이 사부(師傅)와 같다.’ 하였으니, 판부사(判府事) 윤증(尹拯)의 상사(喪事)에 치제(致祭)·치조(致弔)를 궐(闕)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인묘조(仁廟朝)에 상신(相臣) 신흠(申欽)이 졸(卒)하였을 때 특별히 친림(親臨)하여 치조(致弔)를 행한 일을 인용하고, 또 《오례의》에 시임(時任)과 원임(原任)을 구별한 말이 없다 하여 대신(大臣)에게 수의(收議)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판부사(判府事) 서종태(徐宗泰)가 헌의(獻議)하기를,
"이사(貳師)는 사부(師傅)의 버금이 된다 하여 《오례의》에 임조(臨弔)하는 예절(禮節)이 같은데, 원임 사부(原任師傅)를 조제(弔祭)하는 의절도 이미 시임 사부(時任師傅)와 같으니, 이번의 원임 이사(原任貳師)도 같은 예(例)로 거행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동지사(冬至使) 조태채(趙泰采) 등이 산해관(山海關)에 들어간 뒤 해적(海賊)의 정형(情形)을 탐문하고 서반(序班)015) 으로 인하여 등주 총독(登州總督) 이웅(李雄)의 제주 등본(題奏謄本)을 얻어 보냈다.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해적 진상용(陳尙勇)은 신장(身長)이 9척이며, 검은 낯과 금빛 수염 때문에 흑호 천왕(黑虎天王) 정로 장군(靖虜將軍)이라 일컫고, 연호(年號)는 숭명 원년(崇明元年)이라 합니다. 부하 장수 뇌택청(雷澤淸)·만인적(萬人敵)을 거느리고 조선(鳥船) 3천 척(隻)에 분승(分乘)하여 바닷길로 곧장 등래성(登萊城)을 20여 일 동안 포위했는데, 비병(飛兵)의 구원에 힘입어 그 형세가 조금 꺾였으나, 뇌택청이 봉래(蓬萊)를 거쳐 복산(福山)을 격파하고 바다 가운데로 잠입(潛入)하였습니다. 만약 때맞춰 방비하지 않으면 아마도 적의 형세는 더욱 치성(熾盛)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제주(題奏)에 이르기를,
"사정이 매우 긴급하며, 더욱이 조선(朝鮮)에 아주 가까와 조공(朝貢)하는 길에 관련되는 바이니, 내대인(內大人)의 화급히 고하는 격문(檄文)을 가지고 강남(江南)에 이르러 전성(全省)의 병마를 조발(調發)하여 속히 회동(會同)토록 하라.……"
하였다. 조태채가 또 덕림(德琳)의 옥사(獄事)가 있음을 듣고 탐문하여 아뢰기를,
"덕림은 태자에게 딸린 하(蝦)016) 로서 지혜가 많고 꾀가 비상하여 당파를 결합(結合)하는 데 능숙하다 합니다. 태자를 다시 폐위(廢位)한 뒤 덕림을 관동으로 보내라고 명했더니, 제멋대로 드나들며 쌓아 둔 은자(銀子)와 인삼(人蔘)을 도둑질하므로, 황제가 밀지(密旨)로 잡아 오게 하여 그 아비로 하여금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비가 죽은 것처럼 거짓을 꾸며 염습(斂襲)·화장(火葬)하고, 덕림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 뒤 몰래 스스로 바다로 가서 해적(海賊)을 유인하여 산동(山東)지방을 왕래했는데, 황제가 밀지로 덕림을 잡아다가 형부(刑部)에 보내어 사형(死刑)에 처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 후에 용천 부사(龍川府使)가 표류(漂流)하여 온 호인(胡人) 진대시(陳代時) 등에게 해적의 정상(情狀)을 빙문(憑問)하니, 진대시가 말하기를,
"해변에 출몰(出沒)하면서 어렵(漁獵)에 종사한 지 이미 5, 6년이 되는데, 일찍이 해적이 산동 지방에 왕래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진상용(陳尙勇)이 있음은 듣지 못하였고, 다만 적의 소굴(巢窟)은 남만자(南灣子)라고 합니다."
하였다.
3월 11일 임자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의 진달로 인하여 진휼청(賑恤廳)의 돈 2만 냥을 호남에 내려 보내어 각 고을에 나누어 주어 곡종(穀種)에 보충하게 하고, 가을에 곡식으로 수봉(收捧)하여 본청(本廳)에 회록(會錄)하게 하였다.
호남의 진휼곡을 실은 선박(船舶)이 무사히 제주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이 매우 기뻐하며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어제시(御製詩)를 내렸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천 리 남녘 바다 잘 건너기 어렵고,
거센 바람 곡식 운반 또한 쉽지 않도다.
선박 모두 무사함을 알려왔으니,
환과(鰥寡)017) 를 구제하는 하늘의 뜻이 분명하도다."
하였다. 또 제주의 공인(貢人)이 도착했음을 듣자 차비문(差備門) 밖으로 불러들이도록 명하여 진정(賑政)의 전말(顚末)과 도중(島中)의 형편을 상세히 물었다. 대개 제주는 해외(海外)에 있어 왕화(王化)가 미치지 못하였는데, 금년에는 흉년이 더욱 심하므로 임금이 특별히 우휼(優恤)을 더하고 이처럼 위로하고 접대하니, 온 세상에서 모두 그 성덕(盛德)을 칭송하였다.
3월 13일 갑인
일전에 판부사 이이명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성상(聖上)께서 몸소 제주의 공인(貢人)을 부르시어 본주(本州)의 진정(賑政)과 민사(民事)를 물으셨는데, 그 사람이 매우 어리석어 비록 상세히 대답하지는 못했으나, 만약 도중(島中)에 돌아가 그 사실을 말한다면 일도(一島)의 백성들이 비록 주려 죽는다 하더라도 어찌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본주(本州)는 해외에 있으니 더 애휼(愛恤)함이 마땅한데, 더욱이 이제 큰 흉년을 만났으니 각별히 돌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후로 요청한 곡식이 4만여 석에 이르는데, 다만 잡곡(雜穀) 수만 석을 수송했을 뿐입니다. 만약 본도(本道)로 하여금 어느 곡식이든지 1만 석을 한정하여 다시 들여보내게 하고, 그 대곡(代穀)은 진휼청으로부터 경선(京船)으로 호남에 수송하게 한다면 거의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 의논을 묘당(廟堂)에 내리니, 묘당에서 그 의논에 의하여 시행할 것을 청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어 하교(下敎)하기를,
"도신(道臣)은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시급히 들여보내어 절해(絶海)의 굶주린 백성으로 하여금 한 사람도 손상(損傷)됨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본부(本府)에서 곡종(穀種)을 청한 장계도 방금 계하(啓下)하였으니, 또한 시급히 들여보내어 파종(播種)의 적기(適期)를 놓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7일 무오
이때 임금의 몸에 부기(浮氣)가 있어 연달아 들오리를 잡아 올리니, 임금이 그만두도록 명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군졸이 한가로운 틈이 많습니다. 수시로 잡아 올린들 무슨 폐단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기(禮記)》에 ‘어린 새끼와 알을 취(取)하지 말고 둥주리를 엎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옛 성인이 생육(生育)을 소중히 여기는 뜻이 이와 같았다. 하물며 질병에는 본시 다른 약이 있는데, 어찌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이명 등이 두 번 절하고 하례하기를,
"어진 은덕이 금수(禽獸)에까지 미치니, 성덕(聖德)이 지극합니다. 하늘이 반드시 도울 것이니, 어찌 약을 일삼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 함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제 선왕(齊宣王)이 소를 버리자 맹자가 이 마음이야말로 천하의 왕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고018) , 송나라 임금이 개미를 밟지 않으니 정자(程子)는 사해(四海)에까지 이 마음을 미루어 나갈 것을 청하였다. 참으로 이 마음을 몸받아 확대한다면 팔역(八域)의 백성이 누구인들 어진 왕화(王化)에 고무(鼓舞)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신하들이 이에 임금의 마음을 개도(開導)하여 어진 정사를 몸받아 시행하지 못했으니, 옛날에 이른바 ‘은혜가 금수(禽獸)에까지 미쳤으나 공덕(功德)이 백성에게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불행히도 가깝다. 애석한 일이로다."
【태백산사고본】 63책 55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28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재정-진상(進上) / 역사-사학(史學)
[註 018] 제 선왕(齊宣王)이 소를 버리자 맹자가 이 마음이야말로 천하의 왕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고 : 제 선왕이 희생(犧牲)으로 쓸 소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양으로 바꾸라고 하자, 맹자가 소나 양이나 불쌍하기는 매한가지라 하고 그런 마음을 백성들에게까지 베풀어 인정(仁政)을 펴라고 권한 고사(故事).
사신은 논한다.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 함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제 선왕(齊宣王)이 소를 버리자 맹자가 이 마음이야말로 천하의 왕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고018) , 송나라 임금이 개미를 밟지 않으니 정자(程子)는 사해(四海)에까지 이 마음을 미루어 나갈 것을 청하였다. 참으로 이 마음을 몸받아 확대한다면 팔역(八域)의 백성이 누구인들 어진 왕화(王化)에 고무(鼓舞)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신하들이 이에 임금의 마음을 개도(開導)하여 어진 정사를 몸받아 시행하지 못했으니, 옛날에 이른바 ‘은혜가 금수(禽獸)에까지 미쳤으나 공덕(功德)이 백성에게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불행히도 가깝다. 애석한 일이로다."
3월 18일 기미
경상좌도 암행 어사(慶尙左道暗行御史) 이병상(李秉常)이 들어와 계문(啓聞)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명준(李明浚)을 포장(褒奬)하였다.
3월 19일 경신
황해도 암행 어사 윤봉조(尹鳳朝)가 들어과 계문하여 장련 현감(長連縣監) 안정서(安廷瑞)를 포장(褒奬)하고, 풍천 부사(豐川府使) 정이운(鄭以雲)·옹진 현령(甕津縣令) 김구령(金九齡)·송화 현감(松禾縣監) 윤석(尹晳) 등을 척출(斥黜)하였다.
3월 24일 을축
제주에 역질(疫疾)이 크게 유행하여 1천여 명이 죽었다.
3월 27일 무진
반궁(泮宮)019) 에서 유생을 시험하여 거수인(居首人) 이광보(李匡輔)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동지사(冬至使) 조태채(趙泰采) 등이 청국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청국 황태자(皇太子)의 일을 물으니, 조태채가 말하기를,
"황제가 처음에는 방금(防禁)이 매우 엄중했는데 근래에는 조금 누그러졌으며, 또 태갑(太甲)을 동궁(桐宮)에 내친 것020) 으로써 시제(詩題)를 냈기 때문에 저들도 마침내는 복위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태자가 어질지 못하여 비록 10년을 폐하여 가둔다 하더라도 허물을 고칠 가망이 없고, 불량한 무리와 사귀어 오로지 이익만을 일삼아서 재산이 국고(國庫)와 비등하다 하며 덕림(德琳)의 옥사(獄事) 또한 이에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황장손(皇長孫)이 매우 현명하므로 폐립(廢立)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3월 18일은 곧 황제의 탄신일로서 태자가 마땅히 헌수(獻壽)해야 할 것이므로 그때 변통(變通)하여 다시 세울 듯하다 하며, 금년이 황제의 환갑이 되므로 반드시 두 차례 칙사(勅使)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황제가 비록 반유(盤遊)021) 를 좋아하기는 하나, 백성을 침학(侵虐)하는 일은 없고 오로지 문학을 숭상하니, 주자(朱子)를 문묘(文廟)에 승부(陞祔)한 것을 보더라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또 《황청회전(皇淸會典)》을 손수 저술하였는데, 교사(郊祀)와 제천(祭天)을 모두 삼대(三代)022) 의 전례(典禮)로 준칙(準則)을 삼았으니, 대개 옛날 서적을 많이 읽고 나라의 정사(政事)를 밝게 익힌 것입니다. 그러나 황음(荒淫)이 날로 심해져서 4월이면 문득 창춘원(暢春院)에 갔다가 다시 해변(海邊)으로 가는데, 대개 그 하는 바로 보건대 비록 오랫동안 보전(保全)하기는 어려울 듯하나, 그 배치(排置)한 형세로 본다면 아직 위험하거나 우려할 만한 사단은 없습니다.
그리고 근래 해적이 자주 나타나므로 관내(關內)의 오래 폐지된 연대(煙臺)023) 도 따로 수선(修繕)한다 합니다. 또 듣건대 해적의 소굴은 조정(朝廷)에서도 또한 추측할 수 없으므로 아직 토벌해서 잡지 못했는데, 가끔 밤을 타고 겁략(劫掠)하여 출몰(出沒)이 무상(無常)하다 합니다. 또 ‘황당선(荒唐船)024) 의 일로 전에 예부(禮部)에 자문(咨文)025) 을 보내어 금지를 청했는데 아직도 왕래가 잦다.’고 물었더니, 통관(通官)의 무리들이 ‘예부에서는 자문에 의하여 신칙할 뿐이니 직접 주문(奏聞)한다면 반드시 금단(禁斷)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3월 30일 신미
일출 때에 빛깔이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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