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임인
경기의 유학(幼學) 이경하(李景夏) 등 5인이 돈의문(敦義門)에 괘서(掛書)했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성상의 환후가 여러 달을 끌고 있으니 신자(臣子)된 자로서 정성으로 기도를 올려 재앙을 물리치는 절차가 있어야 마땅하다. 5부(五部)의 백성으로 하여금 성금(誠金)을 내어 제수(祭需)를 돕게 하라."
하였다. 또 한성부(漢城府)에 글을 올리고는 이어 그 무리 20여 인을 이끌고 제물(祭物)을 갖추어 노량진(露梁津)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는데, 3일 만에 그쳤다. 천지(天地)와 산천(山川)에 제사하는 것은 본시 전장(典章)에 정해져 있으니, 이경하 등의 일은 비록 임금을 위하는 정성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당시의 여론(輿論)은 예(禮)에 어긋난다 하여 비난하였다.
5월 3일 계묘
임금의 환후가 더하여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유천군(儒川君) 이정(李濎)이 홀로 도수환(導水丸)을 진복(進服)해야 한다는 의논을 주장하여 밖에서 제조(提調)와 힘써 다투고, 임금 앞에 나와서도 또 다투었다. 여러 어의(御醫)들이 비로소 모두 시험삼아 복용해도 무방(無妨)하다고 하니, 오늘부터 도수환을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때 문부(文簿)를 들여오지 못하여 안팎의 죄수가 많이 적체(積滯)되어 있었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형조의 사형수 외에 현재 갇혀 있는 죄인과 경외(京外)의 의옥(疑獄)033) 에 관한 문서(文書)를 청컨대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금부 당상(禁府堂上)으로 하여금 조당(朝堂)에 모여 상의하여 논단(論斷)하게 하고, 단초(單抄)로 계하(啓下)하여 소석(疏釋)하는 방도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며칠 뒤에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우의정(右議政) 김우항(金宇杭)이 원임 대신과 금부·형조의 여러 당상과 더불어 빈청(賓廳)에 모여 현재 갇혀 있는 죄인의 처리를 의논하여 감률(勘律)하여 소석(疏釋)하고, 또 12일에 다시 빈청에 모여 외방(外方) 의옥의 처리를 의논하여 20여 인을 감률하였다.
5월 4일 갑진
임금이 도수환(導水丸)을 복용하고 설사(泄瀉)를 하니, 포만증(飽滿症)이 약간 줄어들었다.
5월 8일 무신
가주서(假注書) 권익순(權益淳)이 이헌장(李獻章) 【곧 임진년 034) 에 등과(登科)한 사람이다.】 을 천거하여 당후(堂后)035) 의 망(望)에 비의(備擬)하려 하자, 승지(承旨) 조도빈(趙道彬)·이덕영(李德英)이 막으므로, 권익순이 여러 차례 극력 다투다가 곧장 나가 버렸다. 정원(政院)에서 이 일을 아뢰자, 임금이 권익순을 파직하라 명하였다.
5월 10일 경술
강화·개성 양부(兩府) 및 경기에는 비가 너무 많이 내렸고, 경상도에는 달포를 가물어 황모(黃蟊)036) 가 성하게 발생하였으며, 평안도에는 큰 비바람에 화곡(禾穀)이 꺾였다.
5월 13일 계축
김상직(金相稷)을 승지(承旨)로, 이집(李㙫)을 전라도 관찰사로, 심수현(沈壽賢)을 충청도 관찰사로, 윤성준(尹星駿)을 강원도 관찰사로, 김재로(金在魯)를 지평(持平)으로, 황선(黃璿)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여러 도(道)에 우박이 쏟아졌다.
5월 14일 갑인
비변사(備邊司)에서 형조(刑曹)로 하여금 조당(朝堂)에서 회의(會議)한 예에 의하여 본조 당상(本曹堂上)이 모두 모여 각도(各道)의 강도(强盜) 및 유배(流配)된 자 가운데 석방할 자와 석방하지 않을 자의 무리를 의논해서 처리하여 별단(別單)에 써서 들이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 후에 형조 당상이 모두 모여 의논해서 처리하여 별단으로 입계(入啓)하였다.
5월 17일 정사
김상원(金相元)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서명균(徐命均)을 사서(司書)로, 홍치중(洪致中)을 부응교(副應敎)로, 권수(權𢢝)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5월 20일 경신
임금의 환후가 근래에 와서 침수(寢睡)가 가장 나아지고 여러 가지 증후(症候)도 모두 차도가 있어 부기(浮氣)가 날마다 점차 사라지니, 도수환(導水丸)의 효험 때문이었다.
한영휘(韓永徽)를 필선(弼善)으로, 한지(韓祉)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신정하(申靖夏)를 헌납(獻納)으로, 이병상(李秉常)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5월 22일 임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이날은 임금이 평좌(平坐)하여 인접(引接)하고 수작(酬酢)하는 것이 평일과 같았다. 도제조 이이명이 아뢰기를,
"여러 대신(大臣)이 여러 달 동안 뵙지 못하여 모두 울적하고 답답한 마음을 품고 있으니, 마땅히 한 번 사대(賜對)하셔야 할 것입니다. 영부사(領府事) 윤지완(尹趾完)도 안후(安候)를 받들고자 오랫동안 경저(京邸)에 머물러 있는데, 병폐(病廢)한 사람이라 입시(入侍)할 수 없을 것이니, 성상께서 존문(存問)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비단 대신(大臣)뿐만 아니라 승지(承旨)와 옥당(玉堂)도 또한 때때로 인접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옛날 선묘(宣廟)께서는 미령하실 때면 매양 근시(近侍)를 인접하여 나라 일을 강론하고 혹 한담(閑談)도 하셨습니다. 일찍이 옥당(玉堂) 이준민(李俊民)과 더불어 신선(神仙)의 일을 논하다가 이준민이, ‘신이 오늘 신선을 보았습니다. 판부사(判府事) 원혼(元混)은 나이 80이 넘었지만 걸음이 나는 듯하고 시청(視聽)과 동작(動作)이 모두 평일과 같으니, 참으로 지상(地上)의 신선입니다.’ 하니, 선묘께서 크게 웃으셨습니다. 근시(近侍)를 무시로 인접하심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5월 23일 계해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과 우의정(右議政) 김우항(金宇杭)의 인견(引見)을 명했는데, 이이명(李頤命)의 진달로 인한 것이었다. 김창집이 삼공(三公)을 갖추지 않았다 하여 빨리 수상(首相)을 뽑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각도(各道)에 신칙하여 재읍(災邑)의 수령(守令)은 추봉(秋捧)하기 전에는 체개(遞改)하지 말도록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5월 24일 갑자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이유(李濡)의 인견(引見)을 명하였다. 최석정과 이유가 남들의 탄핵하는 말을 입어 물러나 칩복(蟄伏)해 있는 정상을 진달하고 인하여 향리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위유(慰諭)하고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하였다. 이유가 문서와 접응(接應)을 간략하게 줄이기를 청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다음날 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조상우(趙相愚)의 인견(引見)을 명하였다. 조상우가 면계(勉戒)하는 말을 소매 속에서 내어 올리면서 이르기를,
"옛날 선묘(宣廟)께서 병환이 회복되시자,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진계(陳戒)하기를, ‘오랜 병환 끝에 착한 단서(端緖)가 열려 호령(號令)이 내려지니, 인심이 열복(悅服)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신민(臣民)의 바라는 바는 초복(初服)037) 과 다름이 없습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선정의 일기(日記)에 실려 있습니다. 원컨대 맑게 살피고 이를 몸소 체득하여 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승지(承旨) 조도빈(趙道彬)이 아뢰기를,
"전일 형옥 문서(刑獄文書)를 묘당(廟堂)과 해조(該曹)에서 모두 모여 의감(議勘)하였는데, 계자인(啓字印)038) 을 찍지 않고 연월일(年月日)도 쓰지 않았으니 법례(法例)에 손상되며, 뒷날에 빙신(憑信)하는 도리도 아닙니다. 청컨대 잠시 성상의 환후가 쾌히 회복됨을 기다려 차례차례 입계(入啓)하여 계(啓)자를 찍어 내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26일 병인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진달한 바로 인하여 형조에서 금부(禁府)로 옮긴 죄수를 대신(大臣)에게 문의하여 별단(別單)으로 계하(啓下)하도록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최석항(崔錫恒)·지의금(知義禁) 권상유(權尙游)·동의금(同義禁) 권성(權𢜫) 등이,
"왕부(王府)는 해조(該曹)와 달라 모든 죄수는 반드시 형추(刑推)를 청한 뒤에 의처(議處)와 조율(照律)을 차례로 거행하는 것인데, 지금 대신(大臣)에게 나아가 문의하여 곧장 계하(啓下)하는 것은 미안한 바가 있다."
하고, 상소하여 잠시 성후(聖候)가 평복(平復)되기를 기다려 차례대로 입계(入啓)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소사(疏辭) 또한 의견이 있으니 의처와 조율을 차례대로 거행하되, 정원(政院)에서는 날짜를 나누어 입계(入啓)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7일 정묘
이만성(李晩成)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김만주(金萬胄)·이홍(李宖)을 장령(掌令)으로, 이기익(李箕翊)을 지평(持平)으로, 신사철(申思喆)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5월 28일 무진
임금의 환후가 훈열(熏熱)과 격기(膈氣)039) 로 침수(寢睡)가 편안하지 않고 여러 가지 증세(症勢)가 더해지다가 덜해지다가 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도제조 이이명이 옛사람의 수성(守成)이 창업(創業)보다 어렵다는 말을 인용하여 진계(陳戒)하기를,
"병을 다스리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성상의 환후가 점차 회복되는 듯하니, 절선(節宣)·조양(調養)하는 도리를 더욱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물의 이치에도 또한 길흉 회린(吉凶悔吝)이 있는데, 길한 것 외에 세 가지는 모두 흉한 것에 속하니, 한 몸에 비유한다면 길한 일은 항상 적은 것입니다. 성체(聖體)가 근래에 질병이 잦으시니, 어찌 크게 경계하고 신칙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음식은 비록 조그만 일이나 또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대개 임금의 환후가 비록 간혹 차도가 있다가도 조섭을 잘못하여 문득 다시 더해지므로, 이이명이 이런 말로 진계한 것이다.
5월 29일 기사
이우항(李宇恒)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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