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신축
부교리(副校理) 어유귀(魚有龜)가 상소(上疏)하여 마음을 다스리고 백성을 기르는 요체를 논하니, 답하기를,
"걱정하고 사랑하여 진계(陳戒)하니,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7월 3일 임인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전라도 감진 어사(全羅道監賑御史) 홍석보(洪錫輔)가 복명(復命)하여,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만직(李萬稷)이 진정(賑政)을 잘하여 한 도(道)의 으뜸이라고 포장(褒奬)하여 논계(論啓)하니, 상전(賞典)을 논하여 품질(品秩)을 올리도록 하였다. 홍석보가 또 백성의 폐막(弊瘼)을 조목별로 진달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방도를 논한 것으로 대략 이르기를,
"지금 국가에서 오직 사부(士夫)의 불편을 염려한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백성을 생각하고 보호하고자 한다면 먼저 호포(戶布)043) 를 시행하여 거꾸로 매달린 듯한 고통을 풀어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선조(先朝)의 수교(受敎)을 거듭 밝혀 양천(良賤) 모두 어미의 역(役)을 따르게 한다면 거의 인심을 수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 의논을 묘당(廟堂)에 내리니, 묘당에서는 조용히 상의하여 확정할 것을 청하였다.
7월 4일 계묘
신사철(申思喆)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진정(賑政)을 마치고 올린 장계(狀啓)에 의해 공주 목사(公州牧使) 채성윤(蔡成胤)과 청주 목사(淸州牧使) 김진옥(金鎭玉)의 상전(賞典)을 논하여 자급(資級)을 올릴 것을 명하였는데, 뒤에 채성윤은 어사(御史)가 출척(黜斥)을 아뢰었기 때문에 상자(賞資)를 도로 거두었다.
7월 5일 갑진
경기의 수원(水原)에는 조수(潮水)가 넘치고, 연천(漣川) 징파도(澄波渡)에는 밤중에 물이 닥쳐 10여 집이 침수(浸水)되었으며, 부평(富平) 등 고을에는 충재(蟲災)가 번졌다. 안성(安城) 땅에는 운석이 떨어져 돌로 변했는데, 북을 치고 쇠방울을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북쪽 하늘이 울리더니, 한 밭 가운데 갑자기 검은 돌이 떨어져 세 조각으로 깨어졌다.
7월 7일 병오
정언(正言) 안정(安䋊)이 논사소(論事疏)를 진달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칠정(七情) 가운데 오직 노여움이 병이 되기 쉬우니, 간절히 원하건대 지금부터 성심(聖心)에 맞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노여움을 더하지 마시고, 그 심정과 사실을 천천히 관찰하여 대공 지정(大公至正)하게 처리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수십 년 폐기(廢棄)된 무리 중에서 인륜과 의리를 범한 자는 진실로 의논할 수가 없지만, 그 나머지 허다한 세록(世祿)의 신하들은 또한 그 정죄(情罪)의 유무(有無)와 경중(輕重)을 상세히 조사하여 참작해 서용(敍用)한다면, 이것은 화기(和氣)를 인도하여 맞이하는 데 하나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논하기를,
"양호(兩湖)의 재황(災荒)이 금년에 더욱 심하니, 비국(備局)의 재신(宰臣) 가운데 지려(智慮)가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양호를 나누어 관장(管掌)하게 하고,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한 가운데 무릇 진정(賑政)에 관련된 일은 곧 가부(可否)를 판단하여 품지(稟旨)해 시행하게 하되, 옛날 송나라 신하가 서북 변경(邊境)의 일을 나누어 주관한 것과 같이 한다면, 구애받고 지체될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의 미처 거두지 않은 군포(軍布)의 수봉(收捧)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 또 논하기를,
"정시(庭試)는 인정전(仁政殿) 안팎의 뜰도 오히려 부족하여 분답(紛沓)하고 어지럽습니다. 만약 성중(城中)에 선비를 시험보이는 장소를 3, 4소(所)로 나누어 설치하고, 각기 시관(試官)을 정하여 널리 취(取)하고 방(榜)을 내어 전정(殿庭)에 모두 모이게 한다면, 장소가 넓어서 변란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수종(隨從)을 이끌고 들어오는 자의 경우는 수군(水軍)의 율(律)도 도리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선비들이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도 어전(御前)에서 정거(停擧)044) 하는 것보다 긴절한 것이 없으니, 발각되는 자는 10년을 한정하여 정거의 벌을 시행하고, 수종(隨從)으로 따라 들어온 무리는 사방 먼 변경으로 내쳐서 길이 변방을 채우는 백성으로 삼되, 대사령(大赦令)이 있어도 상관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체통이 높아지고 선비의 기습(氣習)이 바로 잡힐것이니, 어찌 여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정죄(情罪)의 유무와 경중을 상세히 조사하고 참작하여 서용하자는 말은 의견이 없지 않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절후가 초가을에 접어들었으나 재실(災實)을 미처 분변하지 못하였는데, 진휼을 마련하고 군포를 정봉(停捧)하는 것은 너무 경솔한 데에 관련된다. 정시 문과(庭試文科)의 초시(初試)는 전에 없던 일이니 새로 만들어내어 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수군의 율(律)이 원래 과중하지 않지만 정거의 벌로 고치는 것을 나는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였다.
7월 9일 무신
일전에 봉교(奉敎) 심공(沈珙)이 소를 올려 하료(下僚) 서명균(徐命均)이 상피(相避)045) 로 인하여 차서를 넘어 6품(品)에 오른 것은 나아가기 어려운 단서가 된다 하여 말하기를,
"약원(藥院)의 대신(大臣)이 한낱 사관(史官)의 거취(去就)에 무슨 급급한 사정이 있다고 별달리 변통하는 거조를 베풀려고 하는 것인지요. 서명균에 대해서는 간곡히 두호하는 바탕이 되겠지만, 사국(史局)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으니, 이를 그대로 둔다면 사국은 장차 폐지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말을 하는 즈음에 자못 평온함을 잃었다."
하고, 이어 그 소를 이조(吏曹)에 내렸다. 이에 이르러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우의정(右議政) 김우항(金宇杭)이 심공의 소로 인해 인혐(引嫌)하고 진소(陳疏)하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7월 11일 경술
지평(持平)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여 일을 논했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절선(節宣)의 방도는 안적(安適)을 귀중하게 여깁니다. 다만 퇴폐(頹廢)한 데 흐를까 두려우니, 비록 수응(酬應)하는 법에 있어서도 조금 간편함을 좇아 매양 적체(積滯)됨에 이르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한결같이 게으른 습속을 씻어버려 진작(振作)하는 효과를 이룩하소서. 옛날 소강공(召康公)이 성왕(成王)에게 말하기를 ‘힘써 덕있는 자를 공경하여 하늘에 빌어 장구한 명을 누리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하였습니다. 더욱이 엄숙하고 공경하는 데 날로 힘써야 한다는 것이 《대기(戴記)》에 실려 있고, 공경함이 백 가지 간사함을 이긴다는 말이 정자(程子)의 훈계에 나와 있습니다. 날로 힘쓰면 근력이 저절로 굳세어지고, 간사함을 이기면 재앙이 스스로 물러가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무일(無逸)046) 의 한 편(篇) 가운데 인용한 바 삼대(三代)의 장수(長壽)를 누린 임금은 덕있는 자를 공경한 효과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지금부터 게을리하지 말고 더욱 정성을 다하여 무릇 일용(日用)과 언어 동작(言語動作)과 생각할 즈음에도 반드시 ‘덕 있는 자를 힘써 공경한다[疾敬德].’는 것을 삼자부(三字符)로 삼아 크게 살피고 힘써 실천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저금 서늘해질 때를 기다려 혹 수시로 강관(講官)을 불러 서사(書史)를 진독(進讀)하게 하고, 혹 특별히 정원(政院)의 신하에게 명하여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여 품결(稟決)하게 한다며, 기혈(氣血)을 트이게 하고 정지(情志)을 유통시키는 도리에 있어 거의 두 가지를 다 얻을 것입니다."
하고, 끝에 말하기를,
"이상휘(李祥輝)·김빙(金砯)·이후열(李後說)·이징서(李徵瑞)는 모두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는데, 근래에 사령(赦令)이 잦아 귀양을 면하였으니, 또한 마땅히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어 엄중하게 징려(懲勵)해야 합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순천부(順天府) 향교(鄕校)의 재임(齋任) 이용연(李龍衍) 등이 석전(釋奠)에 쓸 잡물(雜物)을 거두지 않았다 하여 면임(面任)의 아비를 불러 독납(督納)할 것을 분부하였는데, 그 후 7일 만에 면임의 아비가 죽었습니다. 시친(屍親)047) 의 정장(呈狀)에 잡아 끌어 목이 빠졌다고 말하였으나 각인(各人)의 보고(報告)에는 원래 잡아 끈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태인 향교(泰仁鄕校)의 재임(齋任) 김번(金蕃)의 예에 의거하여 상명(償命)048) 하지 말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다시 밝게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하였다. 대개 김번 등이 성묘(聖廟)에 범마(犯馬)한 사람을 잡아들여 태(笞) 20도를 쳤는데, 3일 후에 죽었던 것이었다. 대신(大臣)이 이르기를,
"범마(犯馬)한 죄를 다스리는 것은 본래 사사로운 일이 아니고, 20도의 태벌(笞罰) 또한 중형(重刑)이 아니며, 향교의 집강(執綱)은 또 관임(官任)에 속합니다. 청컨대 참작하여 정배(定配)하게 하소서."
하였으므로, 김재로가 이 일을 끌어대어 말하기를,
"잡아 끈 것은 태벌에 비하여 더욱 가벼우니, 상명(償命)하지 않음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상휘 등이 죄명은 비록 무거우나 명분(名分)와 의리를 간범(干犯)한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도로 정침(停寢)할 필요는 없다. 상소 끝의 일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밝게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게 하라."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우의정(右議政) 김우항(金宇杭)·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구(趙泰耉)가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의 환후가 평복(平復)된 경사가 있다 하여 진연(進宴)을 청하고 여러 신하들도 누누이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았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도성의 백성들이 ‘이번 진연(進宴)에는 비록 각기 재물을 내어 연수(宴需)를 돕는다 해도 사양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니, 민정(民情)을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지 못해 따르고 연수는 힘써 절약하라고 하였다. 당초에 임금이 명하기를,
"여러 고을의 사원(祠院) 가운데 조정(朝廷)에 품의(稟議)하지 않고 임의로 창립(創立)한 것은 그때의 방백(方伯)·수령(守令) 및 수창(首倡)한 유생(儒生)을 모두 논하여 벌을 주라."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민진후(閔鎭厚)가 평안도의 이문(移文)을 가지고 아뢰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조사하여 훼철(毁撤)하는 일이 있어야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신은 혹시라도 시끄러운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우선 그대로 두었습니다. 평안도에는 이미 이문한 것이 있으니,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겠습니까."
하자, 김창집은 말하기를,
"사람의 수효가 많다 하여 분간(分揀)함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김우항·이이명은 청하기를,
"유지(宥旨)049) 전의 일로써 그 죄를 분간하고, 임의로 세운 사원은 훼철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가운데 정주(定州)의 주자 서원(朱子書院)과 평양(平壤)의 홍익한(洪翼漢) 서원은 김창집과 민진후의 말로 인하여 훼철하지 말도록 명하였고, 의주의 강감찬(姜邯贊)과 임경업(林慶業)의 사우(祠宇)도 승지(承旨) 권수(權𢢝)의 진달로 인하여 한결같이 그대로 두게 하였다. 무안(務安) 김권(金權)의 서원에서 임의로 유계(兪棨)를 추향(追享)하였기 때문에 민진후의 진달로 인하여 처음에는 감사(監司)는 추고(推考)하고 수령은 파직하도록 명하였다가, 또 유지(宥旨) 전의 일이라 하여 모두 논하지 말라고 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양주(楊州) 유생(儒生)이 예조(禮曹)에 정장(呈狀)하여 향교(鄕校) 가운데 백(白)·숙(叔) 두 정자(程子)의 차서가 바뀌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로 인해 태학(太學)에 물어보았더니, 태학에서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연전에 승출(陞黜)할 때 서무(西廡)에서 척출(斥黜)된 위패(位牌)가 동무(東廡)보다 많아서 차례로 올라갔으므로, 동서(東西)를 아울러 그 차서를 헤아린다면 과연 선후(先後)가 도착(倒錯)되어 일이 매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금년 가을 석채(釋菜)를 기다려 서울과 외방(外方)을 아울러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임술년050) 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말로 인하여 송조 육현(宋朝六賢)051) 을 승무(陞廡)하여 배향(配享)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풍년을 기다려 거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일이 지금까지 천연(遷延)된 것은 흉년으로 인한 듯한데, 설령 풍년이 들더라도 어찌 대성전(大成殿)을 개조(改造)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여러 차례 석전제(釋奠祭)에 참여하여 일찍이 보았는데, 십철(十哲)052) 의 위패(位牌)를 모신 교의(校椅)가 자못 컸으니, 지금 만약 그 제도를 조금 줄인다 해도 협착(狹窄)하여 용납하기 어려운 데에 이르지는 않을 듯합니다. 청컨대 본관 당상(本館堂上)으로 하여금 상세히 살펴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7월 12일 신해
간원(諫院)053) 에서 병조 좌랑 박치원(朴致遠)을 논핵하기를,
"탄핵한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명류(名流)에 끼어 의기양양하게 조정(朝廷)의 반열에 나아가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3일 임자
충청 감사(忠淸監司) 심수현(沈壽賢)이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칙유(勅諭)하여 보냈다.
7월 14일 계축
간원(諫院)에서 논하기를,
"왕세자가 수하(受賀)할 때 2품 이상은 당(堂)에 올라 대면(對面)하여 절하였는데, 잡직(雜職)도 품계가 높은 자는 혼동하여 당에 올라 절하였으니, 분의(分義)가 외람되고 사체(事體)가 미안합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왕세자가 수하할 때 이런 자들은 당에 올라 함께 절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그 후에 예조(禮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문신(文臣)은 이미 시종(侍從) 혹은 당상(堂上)의 실직(實職)을 지낸 자, 무신(武臣)은 곤수(閫帥)를 지낸 자, 음관(蔭官)은 동반(東班) 2품 실직을 지낸 자 이외에는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홍호인(洪好人)을 장령(掌令)으로, 조태채(趙泰采)를 판윤(判尹)으로 삼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일상(李一相)에게 문숙(文肅)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정원(政院)에 보류되어 있는 경외(京外)의 공사(公事)는 점하(點下)054) 한 것을 제외하고 3일로 나누어 입계(入啓)하라고 명하였다.
7월 15일 갑인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집(李㙫)이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칙유(勅諭)하여 보냈다. 이집이 청하기를,
"영남(嶺南)에서 옮겨 올 곡식 5만 석은 우선 정봉(停捧)하도록 허락하여 덕의(德意)를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교리(校理) 황귀하(黃龜河)가 생각한 바를 진소(陳疏)하였는데, 첫머리에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선묘(宣廟)의 병환이 새로 치유(治癒)된 날을 당하여 심법(心法)과 치리(治理)로써 간곡히 진계(陳戒)한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성궁(聖躬)을 보양(保養)하는 방도는 기욕(嗜慾)을 절제(節制)하고 심기(心氣)를 기르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맹자의 말에 ‘마음을 수양하는 데에는 과욕(寡慾)보다 나은 것이 없다.’하였는데, 이는 마음을 수양하는 방법도 되지만 몸을 보섭(保攝)하는 데도 또한 과욕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금번의 진연(進宴)에 있어서 ‘간약함을 따른다[從約].’란 두 글자에서 겸양(謙讓)의 성덕(聖德)을 볼 수 있으니, 더욱 조심하고 삼감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훈국(訓局)의 군저(軍儲)가 바닥이 나고 친병(親兵)의 의식(衣食)이 핍절(乏絶)함을 항상 걱정하고 있습니다. 호조(戶曹)에서 이송(移送)한 포목(布木)과 선혜청(宣惠廳)에서 빌려 준 미곡(米穀)이 그 수효가 매우 많으며, 또 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衞營) 양영(兩營)에서 포목 각 1백 동(同)을 빌려 준 일도 있습니다. 지금 주장(主將)으로 있는 자는 병권(兵權)을 쥐고 중요한 재정(財政)을 맡아 거의 20년을 통제하고 구획(區劃)하여 왔는데도, 아직 저축의 넉넉함을 보지 못하고 날로 소모되고 달로 없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헛된 지위(地位)만 차지한 채 동서(東西)로 빌리기만 하여 일이 이보다 한심할 수가 없으니, 결코 미려(尾閭)처럼 새어 나가도록 내맡겨 두어 거듭 군민(軍民)에게 원망을 끼칠 수는 없습니다. 올 여름 경녕전(敬寧殿)에서 제향을 올릴 때 헌관(獻官)이 향축(香祝)을 받들고 나아갔는데도 전랑(殿郞)이 문외(門外)에서 지영(祇迎)하지 않았고, 안향청(安香廳)에 이르러 여러 차례 독촉하였으나 끝내 와서 기다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임무를 대신 거행하게 하였습니다. 헌관이 대감(臺監)055) 에게 분부하여 곧 정과(呈課)하게 하였으나, 그때의 대관(臺官)은 그대로 덮어두고 논열(論列)하지 않았으니, 또한 빨리 책벌(責罰)을 가하여 그 태만한 기습(氣習)을 징계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훈국(訓局)은 금위영·어영청 양영(兩營)과 달라 군병의 의식(衣食)을 다른 관사(官司)에서 취해다 쓰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 주장(主將)에게 허물을 돌려 드러나게 침척(侵斥)하니, 자못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소 끝의 일은 보기에 해괴하니, 참봉(參奉)을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6일 을묘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황당선(荒唐船)의 출몰이 금년처럼 빈번한 적이 없었으니, 앞으로 사행(使行) 때 해금(海禁)을 거듭 엄하게 한다는 뜻으로 말을 만들어 주문(奏聞)할 일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처음에 정언(正言) 안정(安䋊)이 연기현(燕岐縣) 임소(任所)로부터 소명(召命)을 받들고 대각(臺閣)에 부임(赴任)하였는데, 본원(本院)에서 바야흐로 충청 병사(忠淸兵使) 구봉창(具鳳昌)을 논계(論啓)하는 일이 있으니, 인혐(引嫌)하여 말하기를, ‘상하관(上下官)의 체모에 형편상 참계(參啓)하기 어렵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일전에 지평(持平) 권엽(權熀)이 소를 올려 논하기를,
"간신(諫臣)이 얼마 전에 인피하면서 이른바 혐의스러운 사단이란 것은 너무나도 말이 되지 않으며, 그 분의(分義) 운운한 것은 더욱 잘못된 일입니다. 옛날에 상하관이었다는 체모 때문에 과연 이처럼 견제(牽制)된다면, 하읍(下邑)에서 부름을 받은 대신(臺臣)은 비록 방백(方伯)과 곤수(閫帥)의 법에 어긋나는 일을 목격하더라도 논핵(論劾)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하고, 그 아래에 또 안정이 논한 박치원(朴致遠)의 일에 대하여 논하기를,
"박치원은 곧 기묘 명현(己卯名賢)056) 박훈(朴薰)의 후손인데, 연소한 신진(新進)으로 또 재주가 영민(英敏)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비쇄(鄙瑣)한 것으로 지목함은 전혀 근사하지 않고, 이와 같은 언의(言議)는 결단코 공평하지 않습니다. 이 편벽되고 각박한 논의는 당초에 정수기(鄭壽期)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정수기가 봄 사이에 소란을 일으킨 것은 심히 해괴한고 망령된 일이었습니다. 혹 약방의 신하를 배척하기도 하고, 혹 자기와 의견을 달리한 원한을 갚기도 하였는데, 대개 그 정신을 쏟은 바는 다만 전지(銓地)에 있는 사람을 공격하여 스스로 명백하게 표방(標榜)하는 데에만 있었고, 성후(聖候)의 정섭(情攝)에 해로움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도리로 헤아리건대 어찌 감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 대각(臺閣)에서는 삭출(削黜)을 청해야 마땅한데도 천연(遷延)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니, 만약 한 차례 징려(懲礪)하는 길이 없다면, 이 논의를 부식(扶植)하는 무리들이 또한 장차 연달아 일어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쾌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고, 끝에 또 임의로 세운 원사(院祠)의 철거하는 일에 대해 논하기를,
"품의(稟議)하지 않고 임의로 향사(享祀)한 것은 참으로 조령(朝令)을 어긴 것이나, 먼 시골의 선비들이 미처 진품(陳稟)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 듯하니, 위판(位版)을 철거하는 것은 너무 경솔한 듯합니다. 사우(祠宇)의 창건(創建)은 서원(書院)과 다르니, 일체 훼철한다면 또한 소란이 일어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간신(諫臣)의 피사(避辭)는 거의 사리에 맞지 않으며, 새 계사(啓辭)도 역시 공평함이 부족하다. 정수기의 일은 진실로 소사(疏辭)와 같으나 삭출(削黜)의 벌을 추후에 시행함은 합당하지 않다. 원사는 금령(禁令)을 어기고 제멋대로 세웠으니, 훼철해야 마땅하다.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안정이 인피(引避)하여 대략 이르기를,
"신의 피사 가운데는 다만 상하관(上下官)의 분(分)이라고 말하였는데, 헌신(憲臣)이 분자의 아래다 억지로 ‘의(義)’자 하나를 더하여 신을 배척하는 장본(張本)으로 삼았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휘진(李彙晉)과 박치원(朴致遠)은 모두 향족(鄕族)으로서 외람되게 청환(淸宦)의 계제(階梯)에 올랐는데, 헌신(憲臣)이 앞장서서 두둔하되 크게 수고롭게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명현(名賢)의 후손이라 하여 문득 함부로 나아감을 허락한다면 허다한 선현의 후손을 현재의 품등(品等)이 어떠한지도 묻지 않고 모두 명류(名流)의 틈에 끼울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용잡(冗雜)한 무리를 극력 끌어들이고 또 따라서 두호하니, 신이 논한 바는 전하(殿下)를 위하여 명기(名器)를 아끼는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전일 태거(汰去)를 청한 계사에서 기성(騎省)057) 까지도 아울러 논하였는데, 그 탄핵한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염치없이 다시 나아가니, 염우(廉隅)가 손상되어 물의(物議)가 더욱 격렬해졌으니 파직의 벌도 가볍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정언(正言) 조명겸(趙鳴謙)이 처치하여 안정을 체직시켰다. 권엽(權熀) 또한 인피하여 첫머리에 황귀하(黃龜河)의 소에 논한 정과(呈課)의 일을 끌어 스스로 변명하고, 안정의 피사(避辭)에 대하여 대략 이르기를,
"간신(諫臣)이 제일 먼저 다투는 바는 ‘분의(分義)’란 두 글자가 있고 없고에 있는데, 본부(本府)에서 등사(謄寫)한 소보(小報)와 조지(朝紙)에 분명히 분의 두 글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조지를 본 것도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또한 이 두 글자를 가지고 말을 전하면서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소를 올려 논하는 가운데에 아울러 언급한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박치원의 일에 대해서는 일필(一筆)로 단안(斷案)을 내려 능멸하고 업신여김이 전보다 갑절이나 더하였습니다. 조가(朝家)에서 명현을 대우함에 있어 매양 우악(優渥)한 은전(恩典)을 더하여 비록 후손이 잔약(孱弱)하여 스스로 출세하지 못하는 자라도 또한 모두 채용(採用)하였습니다. 하물며 이 젊은 신진(新進)은 옛 명현의 후손인데, 그 문지(門地)를 멸시함이 어찌 이에 이른다 말입니까. 박치원은 일찍이 입신(立身)하였고, 또 재주가 영민하다고 소문이 났는데, 간신이 곧장 시골의 향족(鄕族)으로 몰아붙였으니,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장령(掌令) 홍호인(洪好人)이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며칠 뒤 대사헌(大司憲) 윤덕준(尹德駿)이 소를 올려 권엽(權熀)을 배척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권엽의 소본(疏本)에 정수기(鄭壽期)를 추죄(追罪)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니, 대개 정수기가 미움을 받은 것은 정호(鄭澔)의 일을 논한 데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정호의 고질(痼疾)은 편당(偏黨)에 있습니다. 지난해는 향유(鄕儒)를 모아 상소하여 조정(朝廷)을 어지럽혔는데, 길에서 호창(呼唱)하며 저자 거리를 함부로 휩쓸었으니, 명망(名望)이 있는 재신(宰臣)이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정호는 마땅히 칼을 삼켜 창자를 깎아내고 잿물을 마셔 씻어야 할 터인데도, 전혀 뉘우치는 바가 없이 갈수록 더욱 방자해졌습니다. 정수기의 말은 너무 지나쳤고 또한 적절한 시기에 나온 것은 아니지만, 진실로 그 고집(固執)하는 바는 있었습니다. 전조(銓曹)의 정주(政注)에 관련된 일에 이르러서는 격렬한 번뇌(煩惱)에서 말미암았으니 말이 공평함을 잃었다고 이를 만하나, 이는 도리어 자신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실로 사람들의 저윽이 논의한 것을 따른 것이니, 정수기는 원래 죄줄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삭출(削黜)의 율(律)을 추가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지난해 서명우(徐命遇)의 일과 비슷한데, 서명우의 일은 대체로 당동 벌이(黨同伐異)한 형적을 모면할 수가 없겠지만, 그 사실에 있어서는 반드시 모두 거짓을 꾸며 무함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상의 처분이 지나쳤고, 연로한 재신(宰臣)이 또 따라서 가죄(加罪)하기를 청하는 소(疏)를 올렸으니, 이는 노망한 말입니다. 이제 큰 경사를 맞이하여 패택(霈澤)이 바야흐로 넘쳐나고 있는데, 서명우는 여전히 금고(禁錮)의 적(籍)에 들어 있습니다. 일전에 대신(臺臣)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명분과 의리에 간범(干犯)한 자는 구별한다고 하였는데, 서명우의 죄도 또한 명분과 의리에 간범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좋아하다고 미워함이 중도(中道)를 얻지 못하고 좇고 어김이 정당함을 잃었으니, 이와 같이 하고도 습속(習俗)을 바로 잡고 조정이 안정되기를 바란다면, 끊는 물을 휘저어 열(熱)을 식히려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언관(言官)에게 죄를 가하려는 논의가 전후에 계속되어 물정(物情)을 갈수록 더욱 격렬하게 하고 울분케 하니, 이는 또 파란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정수기가 논한 바가 공평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죄를 추가하자는 말은 너무나 지나친 데 관계된다. 대신(臺臣)의 상소에 대한 비답 가운데 명분과 의리를 간범했다는 전교는 측히 중한 경우를 들어서 말한 것일 뿐이며, 서명우의 좌죄(坐罪)한 바가 명분과 의리를 간범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일편(一篇)의 정신이 오로지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려는 데에 있으니, 어찌 깊이 미워하고 통렬히 배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권엽이 또 이로 인해 인피(引避)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정수기가 전조(銓曹)를 공격한 것은 처음에는 대망(臺望)에 관한 한 가지 일이었는데, 그 허두(虛頭)의 말이 해괴하였음은 성명(聖明)께서 이미 통촉하신 바입니다. 이 사람이 당동 벌이(黨同伐異)하는 데 팔뚝을 걷어붙이고 온갖 힘을 써서 쳐 흔들었으니 누가 그 정상을 모르겠습니까마는, 그 밖에 좌우로 충돌(衝突)하는 것이 마치 돌격(突擊)하는 기사(騎士)가 끊는 물과 타는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어찌 다만 정호를 일착(一着)으로 가혹하게 탄핵했을 뿐이겠습니까. 무릇 정호는 강직하고 염결한 지조를 꺾지 않아 사람들의 입에 올라 무한한 곤욕을 입었는데, 이제 또 전일에 이미 결론이 난 말을 제기하여 정수기가 다하지 못했던 죄안을 덧붙였으니, 이처럼 심각한 논의는 헌장(憲長)인 중신(重臣)에게 일찍이 소망했던 바가 아닙니다. 장료(長僚)의 소가 밖으로는 비록 상세한 듯하나, 중간에는 근일 전조(銓曹)에서 의망(擬望)한 일을 논핵하였고, 마침내는 지난번 대론(臺論)의 단서(端緖)를 주워모아 납리(納履)의 혐의058) 를 생각하지 아니한 채 도리어 남을 공격하는 계책에 급급했으니, 이 어찌 전조(銓曹)를 출입하는 나이와 지위가 높은 중신이 할 바이겠습니까."
하였다. 윤덕준이 또한 맞서 인피하기를,
"정호를 배소(配所)에서 풀려나게 한 뒤 곧장 청요(淸要)한 자리에 두어 마치 바른말 하는 자에게 상전(賞典)을 내리듯 했으니, 전조(銓曹)에서 한 바는 이미 공의(公議)를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수기가 삭출(削黜)로써 논한 것은 그 율(律)의 비의(比擬)가 비록 과중하나, 한 번의 규정(糾正)059) 은 그만 둘 수가 없는 바입니다. 정주(政注) 사이의 일에 이르러서는 정수기가 홀로 지어낸 것이 아님을 밝힌 데 불과한 것이니, 전관(銓官)의 진퇴(進退)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 뒤 정언(正言) 박성로(朴聖輅)·조명겸(趙鳴謙)이 처치(處置)하여 윤덕준을 체직하고 권엽을 출사(出仕)시켰다.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이 소를 올려 정상과 질병으로 억지로 따르기 어려워서 교외(郊外)에 머물러 있으라는 명을 받들 수 없음을 진달하니, 임금이 사관을 보내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7월 17일 병진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늘고 병이 깊다는 이유로 본직(本職)과 여러 겸직(兼職)의 해임(解任)을 청하니, 임금이 손수 글을 써서 답하고 특별히 승지(承旨)를 보내어 위유(慰諭)하였다.
7월 18일 정사
유성(流星)이 벽성(壁星)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박성로(朴聖輅)를 정언(正言)으로, 신사철(申思喆)·신정하(申靖夏)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연신(筵臣)이, 교리(校理) 김상원(金相元)이 일찍이 한림(翰林)을 지냈으나 병이 있어 해서(楷書)를 쓰지 못하니, 그 시정기(時政記)060) 의 초본(草本)을 바치도록 명할 것을 청하였었다. 이에 이르러 검열(檢閱) 최상리(崔尙履)가 소를 올려 그 불가함을 논하기를,
"3백 년 이래 없었던 거조로, 장차 김상원으로부터 나쁜 선례가 시작될 것입니다. 《사기(史記)》란 백대(百代)에 징신(徵信)할 자료이니 이 얼마나 엄중하고 비밀스런 일입니까. 그런데도 행초서(行草書)로 수출(修出)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7월 20일 기미
조도빈(趙道彬)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7월 21일 경신
한성군(韓城君) 이기하(李基夏) 【시임 훈장(時任訓將)으로 있었다.】 가 사직소(辭職疏)를 올려 황귀하(黃龜河)의 소에 대하여 변명하고 인하여 물러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이르기를,
"내가 경(卿)을 신임(信任)해 쓴 지 오래 되어 결코 탐오(貪汚)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다.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윤덕준(尹德駿)이 소를 올려 서명우(徐命遇)를 구원한 일 때문에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또 비답을 내리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황해도(黃海道) 옹진현(甕津縣), 충청도(忠淸道) 연기현(燕岐縣), 경상도(慶尙道) 현풍현(玄風縣)에서는 한 태(胎)에 세 아들이 태어난 이적(異蹟)이 있었고, 충청도 공주(公州) 등 9고을에서는 3월 21일에 지진이 일어났으며, 홍산(鴻山) 등 7고을과 전라도(全羅道) 전주(全州) 등 13고을과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 등 12고을에는 여역(癘疫)이 크게 번졌다. 함경도(咸鏡道) 고원(高原)에는 우박이 쏟아졌고, 함흥(咸興)에는 5월에 눈이 내렸으며, 황해도 각 고을에는 비가 지나치게 내려 수안(遂安)에는 사태가 나서 2명이 압사(壓死)하였으며, 문화(文化)에는 충재(蟲災)가 번졌다. 제주에는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모두 소와 말을 잡아 먹었으며, 가뭄이 심하여 소와 말이 목이 타서 죽었다.
7월 22일 신유
사과(司果) 이이만(李頤晩)이 소를 올려 송조 육현(宋朝六賢)의 승배(陞配)하는 일을 논하기를,
"문묘(文廟)의 제도는 모두 황조(皇朝)의 전례(典禮)를 모방하여 사성(四聖)061) 은 전(殿) 안에 종향(從享)하고, 십철(十哲)은 좌우에 나누어 배향하였는데, 이는 모두 공문(孔門)에서 친히 배워 승당 입실(陞堂入室)062) 한 사람들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감히 가감(加減)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동무(東廡)·서무(西廡)에 열향(列享)한 제현(諸賢)의 좌차(坐次)는 한결같이 세대(世代)의 선후를 따라 그 위차(位次)를 정한 것이니, 이 어찌 후대에 감히 의정(議定)할 바이겠습니까. 비록 《고사촬요(考事撮要)》가운데에 기록된 바를 보더라도 정백자(程伯子)와 소강절(邵康節)은 한유(韓愈)의 아래에 있고, 주염계(周㾾溪) 이하 사현(四賢)은 범영(范寗)의 뒤에 있으니, 도덕(道德)의 고하(高下)를 추론(追論)하여 위치를 변경할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다만 이 육현(六賢)의 학문과 도덕은 십철(十哲)에 견주어 혹 말할 만한 등차(等差)가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모두 동무·서무에 배열(排列)하고 대성전 안에 오르지 못한 것은 어찌 세대(世代)가 현격하여 친히 성문(聖門)063) 에서 배운 자와 차이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묘(聖廟)의 사전(祀典)은 지극히 엄중하여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경하고 옛 전장(典章)을 따를 뿐입니다. 어찌 감히 새로운 규식(規式)을 세워 경솔히 옛 전장을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3백 년 동안 명현과 거유(巨儒)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일찍이 이런 논의가 있었음을 듣지 못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갑자기 이러한 거조가 있으니, 신은 그것이 과연 예제(禮制)와 의리에 합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풍문으로 듣건대 지난해 여러 신하가 헌의(獻議)한 일이 있다고 하는 데, 성묘(聖廟)의 막중한 전례(典禮)에 대하여 황조(皇朝) 이전에 없었던 제도를 어찌 한때의 의논으로 가볍게 변경하여 후세(後世)의 비난을 초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대신(大臣)과 재신(宰臣) 및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에게 다시 순문(詢問)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제 이 육현(六賢)을 대성전 안에 승배(陞配)하는 것은 예제(禮制)와 의리에 합당하니, 진실로 사문(斯文)의 경사이다. 어찌 그 사이에 다른 의논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성명(成命)을 내린 지 이미 30년이 지났으니, 내가 바야흐로 지금까지 천연(遷延)한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그대의 상소 가운데에 또한 ‘육현의 학문과 도덕은 십철에 견주어도 말할 만한 등차가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도 억지로 이의(異議)를 세우니, 이는 또한 홀로 무슨 뜻인가. 작년에 저 청나라에서도 주자를 승배(陞配)하는 거조가 있었으나 이의가 없었는데, 이런 저지(沮止)하는 의논이 도리어 우리 나라에서 나오니 지극히 개탄할 일이다."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강원도 암행 어사 조석명(趙錫命)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강원도의 도신(道臣)과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군보(軍保)064) 를 단속하는 절목(節目)을 강구(講究)하게 하였다. 대개 조석명이 ‘평해(平海)·울진(蔚珍)은 울릉도와 거리가 멀지 않고 왜선(倭船)의 왕래가 빈번한데, 관동(關東) 연해(沿海)의 일대(一帶) 8백여 리 사이에 다만 두서너 진영(鎭營)이 있을 뿐이니, 해방(海防)의 허술함이 참으로 매우 염려가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7월 23일 임술
간원(諫院)에서 논하기를,
"오수원(吳遂元)의 과명(科名)에 흑막이 있는 것은 온 세상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아 진위(眞僞)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거두어 서용(敍用)하는 벽두에 갑자기 당후(堂后)065) 의 망(望)에 비의(備擬)했으니, 듣는 이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청컨대 정원(政院)의 당해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게 하소서. 창녕 현감(昌寧縣監) 이석형(李碩亨)은 관아에 출근하는 날이 항상 드물고, 환곡(還穀)을 수봉(收捧)하고 군정(軍丁)에 편입시키는 일을 감색(監色)066) 에게 일임(一任)했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유원 첨사(柔遠僉使) 장탁(張濯)은 일찍이 병조 서리(兵曹書吏)가 되어 간사하고 외람되어 곤장을 맞고 태거(汰去)되었으니, 변방의 통솔하는 임무를 맡길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고, 인하여 청하기를,
"지금부터 각 군문(軍門)의 교련관(敎鍊官)은 서리(胥吏)나 출신(出身)이 아닌 시정(市井)의 무리로 차정(差定)하지 않는 일을 정식(定式)으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다만 정원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는 일과 장탁을 파직하는 일만 따르고, 말단의 일은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경기(京畿) 수원(水原) 땅에 해일(海溢)이 일어났고 교동(喬桐)에는 이충(泥蟲)이 크게 발생하였다.
7월 24일 계해
임금이 대제학(大提學)의 회권(會圈)067) 을 명하고, 인하여 개정(開廷)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우의정(右議政) 김우항(金宇杭)이 권점(圈點)하는 일로 와서 모였는데, 전 대제학 송상기(宋相琦)는 바야흐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의 직책을 띠고 있으면서도 두 번 패초(牌招)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니, 대개 송상기는 전직(銓職)에 나아가지 않기로 결심하여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었다. 김창집 등이 차자(箚子)을 올려 적당히 변통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우선 송상기의 전직(銓職)을 체직시키고, 곧 군함(軍銜)에 붙여 천망(薦望)하게 하였다. 송상기가 비로소 명을 받들고 김진규(金鎭圭)를 수천(首薦)하였는데, 대신(大臣)이 첨서(添書)068) 를 계청(啓請)하자, 송상기가 차점(次點)으로 대제학에 제수되었다.
신임(申銋)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지평(持平)으로, 안중필(安重弼)을 장령(掌令)으로, 김상원(金相元)을 부교리(副校理)로, 어유귀(魚有龜)를 수찬(修撰)으로, 이택(李澤)을 교리(校理)로, 황흠(黃欽)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김상옥(金相玉)을 사서(司書)로 삼았다.
황해도 장연(張淵)의 유생(儒生) 김경유(金景游) 등이 소를 올려 기자(箕子)의 화상(畫像)을 본부(本府)에 묘향(廟享)할 것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원나라 순제(順帝)가 멀리 우리 나라에 유람왔을 때 은밀히 〈기자 화상을〉 간직했으니, 그때 기자 화상이 중국으로부터 와서 문수암(文殊庵)에 봉안되었다고 민간에서 지금까지 전설(傳說)이 소연(昭然)합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러 민몰(泯沒)되어 있는 곳을 알지 못하다가 이제 학림사(鶴林寺)에서 발견했는데, 유상(遺像)이 완연하고 또 그 위에 ‘기자상(箕子像)’ 세 글자가 있었습니다. 몇 칸 모옥(茅屋)에 우선 임시로 봉안하고 있으나 대성인(大聖人)의 유상을 무엇에 구애되어 사당에 향사(享祀)하지 않는 것인지요?"
하니, 임금이 그 소를 예조(禮曹)에 내렸다. 예조에 복주(覆奏)하기를,
"김경유(金景游) 등이 당초에 주자 서원(朱子書院)을 세울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자, 또 기자 화상을 얻었다고 하니,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일이 중대한 데에 관련되니, 청컨대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하여 보고(報告)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7월 26일 갑자
당초에 평안도 암행 어사 여필희(呂必禧)가 서계(書啓)로 서관(西關)의 풍속을 두루 열거(列擧)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관서(關西) 한 도(道) 가운데서 평양에는 선현(先賢)이 남긴 풍속이 없지 않으나, 그 나머지 각 고을은 무지하고 어리석어 간혹 몸을 수칙(修飭)하고 지조를 지키는 선비가 있으면 괴상하다고 지목하고, 《소학(小學)》을 읽으면 더욱 조소(嘲笑)합니다. 청북(淸北)069) 에 이르러서는 갑절이나 문란하고 혼탁하여 빈천(貧賤)하고 의지할 데 없는 무리들이 다른 집에서 의식(衣食)을 의탁할 경우 그 주인이 사망하면 머리를 풀고 상복(喪服)을 입어 한결같이 부모의 상(喪)을 입은 것같이 하며, 부재모상(父在母喪)에도 부모는 한결같다 하여 모두 3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습니다. 양반을 자칭하는 무리들은 조금만 권력이 있으면 아내가 있는데도 취처(聚妻)함이 성하여 모두 한 가지이고, 비록 하천(下賤)에 속한 자도 처첩을 거느리는 자가 많습니다. 그리고 처첩이 본부(本夫)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살 경우 약간 안정을 얻은 뒤에 본부가 도로 추심(推尋)해 가겠다는 뜻으로써 소장(訴狀)을 올리고 제사(題辭)를 받아 후부(後夫)를 공갈 협박하여 생계(生計)의 밑천으로 삼으니, 이적(夷狄)·금수(禽獸)와 서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 밖에 해괴하고 놀랄 만한 일을 이루 다 손 꼽을 수 없을 정도이니, 청컨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각별히 염문(廉問)하여 낱낱이 적발하게 하고, 또 《소학(小學)》을 간포(刊布)하여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각별히 권과(勸課)하게 하소서."
하였다. 관서(關西)의 유생 길인화(吉仁和) 등이 일제히 일어나 신변(申辨)한다 일컬으며 1백 60여 인이 연명(聯名)하여 소를 진달하였으나 정원(政院)에서 후폐(後弊)에 관련된다 하여 받지 않으니, 길인화 등이 또 소를 올려 정원을 침척(侵斥)하였다. 정원에서 이를 계품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체(事體)가 있는 곳에 이렇게 함은 옳지 않다."
하고,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 후에 대사헌(大司憲) 신임(申銋)이 소를 올려 이르기를,
"이미 온 도(道)의 소(疏)라고 일컬었으니 받아들임이 마땅할 듯합니다. 한번 예람(睿覽)하시어 말이 패만(悖慢)한 데 관계되면 엄중히 꾸짖고, 일이 원통하고 억울한 데 관계되면 쾌히 위유(慰諭)를 내려 먼 지방의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분의(分義)의 두려움을 알고, 인하여 스스로 안정(安定)된 도리를 찾게 하소서. 만약 한결같이 퇴각(退却)하였다가 더욱 난처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국가에 욕을 끼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 그 소를 받아들이라고 명하였다. 길인화 등의 소에는 여필희를 여지없이 침욕(侵辱)하여 혹은 용심(用心)이 음험하다 하고, 혹은 임금을 속이고 사람을 무함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필희의 종숙(從叔) 여겸제(呂謙齊)는 전에 자인 현감(慈仁縣監)을 맡고 있을 때 탐욕이 한정이 없어 이로 인하여 탄핵을 당했는데, 그 한집안 사람과 더불어 췌마(揣摩)070) 한 것이 익숙했을 것입니다. 또 여필희는 듣도 보는 것이 밝지 못하고 출척(黜陟)이 공정하지 못하여, 심지어 소경 어사[瞽御史]라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성후(聲候)가 여러 달 동안 미령한 때를 당하여 같은 때에 염문하러 간 여러 어사들은 복명(復命)하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여필희는 여색(女色)을 탐하여 가는 곳마다 머물러 놀다가 맨 나중에 돌아왔습니다. 이미 군부(君父)에 대한 정성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니, 안렴(按廉)하는 일에 있어서도 한결같이 애증(愛憎)에 따라 자신의 사욕을 차린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율(律)을 상고하건대 남을 무고(誣告)한 자는 반좌(反坐)071) 의 법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어사의 서계(書啓)에 대하여 억지로 추악한 죄목을 가하여 오로지 모욕을 일삼으니 심하다고 이를 만하다. 너희들의 진소(陳疏)를 보지 않더라도 이미 실상에 의거한 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다만 왕명을 받들어 염문(廉問)함은 사체가 가볍지 않은데, 말을 쓸 즈음에 가리지 않고 함부로 발언한 바가 많았으니, 그 이른바 ‘음험’과 ‘반좌’·‘췌마’란 것은 참으로 이미 미안한 바였으며, 군부에 대한 정성과 사랑이 없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놀랄 만한다."
하였다.
7월 29일 무진
헌부(憲府)에서 논하기를,
"의관(醫官) 정시제(丁時梯)는 접때 성상의 환후가 첨중(添重)했던 날 치유를 담당하려 하지 않고 걸핏하면 기량이 바닥이 났다면서 드러나게 미루고 관망(觀望)하는 뜻이 있었으며, 제조(提調)가 책망하자 성을 내고 안색이 바뀌며 갑작스레 패만한 말을 지껄이니, 좌우에서 듣고는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가 만일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었겠습니까. 지난번 대계(臺啓)로 나문(拿問)을 청한 것은 대개 깊이 치죄(治罪)하고자 함이었는데, 삭직(削職)의 벌은 마침내 너무 관대한 데로 돌아간 것입니다. 하물며 그 상으로 준 자급(資級)은 죄를 짓고도 뒤섞여 받은 것이었으니, 사체로 헤아려 보더라도 그대로 줄 이치가 만무합니다, 여정(輿情)이 울분하여 오래 될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있으니, 청컨대 가자(加資)의 명을 도로 거두고 빨리 먼 곳으로 정배(定配)하게 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보안 찰방(保安察訪) 이이제(李以濟)는 오로지 탐오(貪汚)만을 일삼아 여러 가지로 거두어들인 재물이 많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정시제를 논한 바가 너무 지나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사산 감역(四山監役)072) 이형령(李衡齡)은 이름이 대계(待啓)에 올라 정관(政官)까지 문비(問備)073) 의 벌을 받았는데, 태연히 직임(職任)에 있으면서 사피(辭避)할 뜻이 없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임금이 앞서 아뢴 이석형과 이형령에 대한 일을 윤허하였다.
약방에서 입진하니,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도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이여가 마음을 맑게 하고 사려(思慮)를 더는 것이 섭양(攝養)의 제일가는 처방(處方)임을 진달하니, 임금이 좋게 여겼다. 이여가 또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여가 또 유천군(儒川君) 이정(李濎)은 공로가 큰데도 상은 박하다고 말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도 이어서 진달하였다. 인하여 또 의관(醫官) 권성징(權聖徵)과 최태령(崔泰齡)의 상이 박함을 진달하니, 임금이 정(濎)의 승자(陞資)를 허락하고, 권성징·최태령은 모두 한 등급을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7월 30일 기사
어유귀(魚有龜)·황귀하(黃龜河)·김상옥(金相玉)·이진유(李眞儒)·이진망(李眞望) 등을 여러 도(道)에 나누어 보내어 염문(廉問)하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숭릉(崇陵) 능 위의 석마(石馬)의 귀를 쇄파(碎破)하였으므로 예조(禮曹)위에서 위안제(慰安祭)를 거행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능관(陵官)을 추고(推考)하고 그 수복(守僕)을 잡아 거두어 작변(作變)한 사람을 기어코 체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일이 지극히 통분하다. 입번(入番)했던 수복(守僕)은 즉시 잡아 가두고, 작번한 사람은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날짜를 정하여 체포하도록 하라. 능에서의 작변(作變)은 언제나 시기와 원망에서 말미암은 것이었으니, 참봉은 추고하지 말라."
하였다.
충청도 도신(道臣)의 장청(狀請)으로 인하여 분포(粉浦)에 창고를 설치하고 금북(錦北)074) 의 조세(租稅)를 받도록 하였다. 대개 공주(公州) 등지는 아산(牙山)의 공진(貢津)과의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종성부(鍾城府) 승암(僧巖)에 돈대(墩臺)를 설하였는데, 함경도(咸鏡道) 북병사(北兵使)의 장청(狀請)을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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