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5권, 숙종 40년 1714년 6월

싸라리리 2025. 11. 2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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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신미

이대성(李大成)을 승지(承旨)로, 조태로(趙泰老)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이택(李澤)을 응교(應敎) 겸필선(兼弼善)으로, 송성명(宋成明)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6월 4일 갑술

임금의 환후가 한결같이 깨끗하게 나으니, 약방으로 하여금 본원(本院)으로 물러가 직숙하도록 명하였다. 이날 밤 약방에 어온(御醞)을 내리니 도제조 이이명이 지희시(志喜詩)040)  를 지어 유천군(儒川君) 이정(李濎)에게 보였는데, 금중(禁中)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차운(次韻)하여 화답하였다.

 

6월 5일 을해

영부사(領府事) 윤지완(尹趾完)이 임금의 환후를 받들기 위하여 서울에 머무러 있다가 이때에 와서 소를 남기고 돌아가니, 임금이 여러 차례 사관(史官)을 보내어 면유(勉諭)하였으나 윤지완이 끝내 머무르지 않았다.

 

이의현(李宜顯)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병상(李秉常)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안정(安䋊)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6월 8일 무인

황일하(黃一夏)를 승지(承旨)로 여광주(呂光周)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6월 9일 기묘

임금이 유천군(儒川君) 이정(李濎)에게 어제시(御製詩)를 내리고 또 초구(貂裘) 1령(領)을 내렸다. 그 시(詩)에 이르기를,
"약을 맛보는 정성을 쌓았고
황제(皇帝)와 기백(岐伯)041)  의 술업에 본래 정통하였네.
소통케 한 처방 홀로 신묘하니,
허실을 분변하여 어찌 밝히랴?
여덟 달을 온갖 방술로 다스렸지만
한 가지 환약으로 빠른 효험 얻었네.
지극한 그 공로 내 마음에 새겨 두니
이를 내려 종친에게 은총을 표하노라."
하였다. 이에 금중(禁中)의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그 시(詩)에 화답하여 한 권축(卷軸)을 이루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정(濎)의 영광으로 여겼다.

 

성주 안핵 어사(星州按覈御史) 홍치중(洪致中)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처음에 성주 사람 박수하(朴壽河)가 대구(大邱) 사람인 청안 현감(淸安縣監) 박경여(朴慶餘)와 더불어 산판(山坂)을 다투었는데, 박경여가 승소(勝訴)하여 묘소로 쓰게 되었다, 몇 년 뒤 박경여의 집에서 묘도(墓道)를 닦으려 하자 박수하가 금지하고 막으니, 박경여가 소장(訴狀)을 올려 영문(營門)에 호소하였다. 감사(監司) 이의현(李宜顯)이 본주(本州)로 하여금 사핵(査覈)하여 처리하게 하였는데, 박수하가 공사(供辭)에다 이의현을 배척하여 박경여와 인척(姻戚)이 되므로 박경여를 두둔한다고 하였다. 대개 박경여는 곧 이의현의 족숙(族叔) 이세최(李世最)의 자부(姊夫)가 되기는 하지만,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의 여당(餘黨)이므로, 원래 이의현이 두둔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를 빙자해 말한 것은 이의현을 협박하여 송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 이의현이 법에 의거하여 박수하를 형문(刑問)하였는데, 한 차례 형문에 죽어버렸다. 그러자 박수하의 일가 친척이 드디어 역군(役軍)을 동원하여 박경여의 아비의 묘에 가서 관(棺)을 파내어 시체를 베고 불살랐다. 또 박경여의 집안에서 금지할 것을 두려워하여 박수하의 딸 문랑(文娘)으로 하여금 함께 가도록 했다. 박경여는 이때 청안현(淸安縣) 임소(任所)에 있었는데, 그 친족과 노복(奴僕)들도 또한 몽둥이와 칼을 들고 산에 올라가 서로 싸웠다. 그러다가 박경여의 친족 박취휘(朴就徽)가 또한 피살(被殺)되었으나 시체를 감추고 내놓지 않자, 박경여의 집안과 박취휘의 아들이 모두 정장(呈狀)하여 치죄(治罪)를 청하였다. 국법(國法)에 묘를 파고 사람을 죽인 자는 모두 사죄(死罪)에 해당하므로, 박수하의 친족들은 장차 사형(死刑)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드디어 문랑(文娘)으로 하여금 자문(自刎)하게 하고 선언(宣言)하기를, ‘박경여의 친족들이 죽여서 그 원한을 갚았다. 그리고 박취휘는 거짓 죽은 것처럼 억지로 일컬었으니, 그 아들이 박경여의 꾐에 받아 그 아비가 피살되었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朝廷)에서 어사 정찬선(鄭纘先)을 보내어 추핵(推覈)하도록 하였는데, 정찬선이 1년을 머무르면서도 끝내 옥정(獄情)을 캐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영남(嶺南) 사람 김이달(金履達) 등이 타도(他道)의 불량한 무리들을 이끌고 문랑(文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상소하여 그 효성(孝誠)을 극구 칭송하고 박경여의 죄상을 크게 논박(論駁)하였다. 그리고는 이의현을 마구 헐뜯었으니, 대개 남의 사주(使嗾)를 받아 이의현을 구함(構陷)하려 한 것이었다. 서울에 있는 사부(士夫)들도 간혹 문랑을 위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칭송했으며, 심지어 박취휘는 거짓으로 죽은 것인데, 그 아들이 박경여의 꾐을 받아 거짓으로 상복(喪服)을 입은 것이라고 하였다. 홍치중은 어사가 되자, 이 옥사(獄事)의 요체는 박취휘의 시체를 찾는 한 가지 일에 있다고 생각하여 온갖 방도로 염탐한 끝에 몇 달 만에 과연 그 시체를 찾았는데, 박취휘는 박녀(朴女)의 친족에게 피살된 것이 명백하였고, 시체는 손상되고 썩어 그 참혹한 정상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이에 이르러 여러 갈래로 분분했던 의논이 점차 진정되었다. 문랑이 죽은 것은 목 밑의 칼날 흔적이 《무원록(無寃錄)》의 자문(自刎)의 조문(條文)과 부합되므로, 여러 의논이 점차 문랑이 자결(自決)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나, 그래도 엄체(淹滯)된 죄수들에 대해서는 판결이 나지 않았다.

 

6월 10일 경진

달이 저성(氐星)을 범하였다.

 

6월 11일 신사

밤에 달이 방성(房星)의 제3성(第三星)을 범하였다.

 

6월 12일 임오

지난 겨울의 도목정(都目政)042)  을 추후(追後)로 거행하였다. 【임금의 환후가 미령하여 이제야 비로소 물려서 거행한 것이다.】 윤덕준(尹德駿)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시환(金始煥)을 필선(弼善)으로, 신정하(申靖夏)를 수찬(修撰)으로, 김흥경(金興慶)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6월 14일 갑신

도목정을 거행하였다. 조상경(趙尙絅)을 정언(正言)으로, 남도규(南道揆)를 헌납(獻納)으로, 신사철(申思喆)을 겸사서(兼司書)로, 윤세유(尹世綏)를 대사간(大司諫)으로, 박사익(朴師益)을 겸설서(兼說書)로, 여필희(呂必禧)를 문학(文學)으로, 김유경(金有慶)을 사서(司書)로, 이의현(李宜顯)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삼았다.

 

6월 16일 병술

도목정을 거행하였다. 홍중휴(洪重休)를 수찬(修撰)으로, 이재(李縡)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신사철(申思喆)을 부교리(副校理)로, 권첨(權詹)을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임금의 환후가 미령하여 3일 만에 비로소 마친 것이다.

 

6월 20일 경인

예조(禮曹)에서 임금의 환후가 평복(平復)되었다 하여 고묘(告廟)와 진하(陳賀)와 반사(頒赦)를 청하니, 임금이 전교(傳敎)하기를,
"한 가지 질병이 오래 끌어 우리 선왕(先王)께 걱정을 끼쳐 드렸으니, 고묘와 진하는 마음에 불안하다. 거행하지 말라."
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또 거행하기를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억지로 따른다고 답하였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선유(先儒)의 말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도가(道家)에서 수양(修養)을 쌓아 수명을 연장하는 것과 국가에서 하늘에 빌어 장구한 명을 누리는 것과, 학자가 학문에 힘써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모두 사람의 힘으로 천지의 조화(造化)를 탈취한 말이니, 청컨대 유념하셔서 힘써 덕있는 자를 공경하고, 엄숙하고 공손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하늘에 빌어 장구한 명을 누리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하고, 제조(提調) 조태구(趙泰耉)는 말하기를,
"살 길을 잊고 욕심에 따라 죽는다는 말을 옛사람은 여색(女色)을 경계할 때 썼습니다. 성상의 기력이 장년(壯年)과는 다르니, 마땅히 깊이 경계하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6월 21일 신묘

권엽(權熀)을 지평(持平)으로, 최경식(崔慶湜)을 장령(掌令)으로, 이병상(李秉常)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6월 23일 계사

김상원(金相元)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6월 25일 을미

임금이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賞)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유집일(兪集一)을 도승지(都承旨)로, 조명겸(趙鳴謙)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6월 28일 무술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위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6월 29일 기해

권수(權𢢝)를 승지(承旨)로 승진시키고, 어유귀(魚有龜)를 부교리(副校理)로, 이병상(李秉常)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신사철(申思喆)을 겸사서(兼司書)로, 한지(韓祉)를 수찬(修撰)으로, 유숭(兪崇)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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