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경오
좌의정 김창집(金昌集) 등이 숭릉(崇陵)의 마석(馬石)이 손상(損傷)된 곳을 봉심(奉審)하고 돌아와, 다시 만들지 말고 그대로 옛것을 다듬어서 만들 것을 청하였다. 손상된 곳이 크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임금이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금번 하례(賀禮)할 때에 강화(江華)·개성(開城) 두 유수(留守)는 하반(賀班)에 참여함을 핑계로 끝내 봉전(封箋)을 궐(闕)했으니, 사체가 미안합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법식을 정하여 입참(入參) 여부를 물론하고 모두 봉전을 올리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후에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진규(金鎭圭)와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연(金演)이 소를 올려 말하기를,
"외관(外官)의 봉전(封箋)은 하반(賀班)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하반에 참여한 자에게 어찌 봉전을 폐했다고 책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무릇 이미 외방(外方)에 있다 하여 봉전을 하고 또 조반(朝班)에 입참(入參)한다면, 봉전한 것으로 볼 때에는 외직(外職)이요 내직(內職)이 아니며, 참반(參班)한 것으로 논한다면 내직이요 외직이 아닙니다. 어찌 한 사람으로서 내외(內外)의 직사(職事)를 아울러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물어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말하기를,
"《대전(大典)》 조의조(朝儀條)에 외관(外官)의 배전(拜箋)·진하(陳賀)하는 자리에 개성 유수와 여러 도(道)의 관찰사 이하를 모두 실어 기록하였으니, 거류(居留)075) 의 신하가 배전하고 진하함은 본시 전장(典章)에서 폐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하반(賀班)에 반드시 참여할 필요는 없으나 하전(賀箋)은 궐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의논을 따랐다.
8월 2일 신미
유명웅(兪命雄)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상열(李尙說)을 필선(弼善)으로, 홍호인(洪好人)을 헌납(獻納)으로, 홍중휴(洪重休)를 부교리(副校理)로, 정식(鄭栻)을 수찬(修撰)으로, 심공(心珙)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8월 3일 임신
이병상(李秉常)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경상도 암행 어사(慶尙道暗行御史) 이병상(李秉常)의 서계(書啓)로 본도(本道)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 및 동래부(東萊府)로 하여금 초량(草梁)의 서쪽과 남쪽 두 곳에 성(城)을 쌓아 해안(海岸)에 이르게 하고, 저자를 성(城) 밖으로 옮겨 잡인(雜人)을 금지하며, 왜인(倭人)을 연향(宴享)할 때 여악(女樂)을 파(罷)할 것을 의논하게 하였다. 대개 이병상의 말에 이르기를,
"변방의 백성은 원래 매우 어리석고 왜인들은 교활(狡猾)하므로, 짐짓 더불어 서로 친하게 지내며 크고 작은 사정을 염탐하지 않음이 없으니, 초량(草梁)의 민가(民家)를 헐어내고 성(城)을 쌓은 것은 진실로 방어의 방편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은 다만 북쪽 한 면만 쌓았고, 가운데에 다대포(多大浦)로 왕래하는 큰 길이 있는데, 왜관(倭館)의 담장 밖으로 다니는 대소(大小) 행인들이 연락 부절하며, 혹은 왜인과 더불어 서로 만나 친압하기를 예사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촌가의 부녀자들과 해녀(海女)들은 생선과 채소를 가지고 와서 매일 아침 관문(館門) 밖에 저자를 벌여 놓고 서로 사고 팔고 있습니다, 전(前) 부사(府使) 권이진(權以鎭)이 들여보내게 했다고 하지만, 외국인과의 접촉을 막는 것은 뜻을 둔 바 있습니다. 다만 남녀가 서로 혼잡을 빚는 폐단만을 염려한 것이 아니니, 이런 조처는 실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저자를 성문(城門) 밖으로 옮겨 설치하고 통사(通事)들로 하여금 왕래하며 호시(互市)076) 하게 하고, 서·남 양쪽에도 모두 성을 쌓아 해변(海邊)에 이르게 하며, 특별히 문지기를 두어 잡인을 엄금하게 한다면 참으로 편리할 것입니다. 또 왜인을 연향(宴享)할 때는 으레 여악(女樂)을 쓰는데, 저들이 비록 오랑캐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접대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오직 예의(禮義)로써 상대(相對)함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음탕한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女色)을 뒤섞어 연향하는 자리에 올리고 이목(耳目)을 즐겁게 하는 바탕으로 삼으니, 참으로 해괴합니다."
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 회계(回啓)하니, 시행하도록 윤허하였다.
8월 4일 계유
부응교(副應敎) 홍치중(洪致中)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호남에서 옮겨온 곡식이 영남 백성에게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대개 각 읍에 저축해 둔 환곡(還穀)을 민간에 계산해 주어 선소(船所)에 수납(輸納)하게 한다면, 적치(積置)한 나머지 이미 흠축(欠縮)되는 바가 많고, 운반할 즈음에 저절로 소모와 손실을 초래하게 될 것이니, 개량(改量)할 때에 부족한 수량을 보충하는 것은 사세에 있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이미 주선하여 보충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춘궁기의 백성들에게 또 억지로 스스로 마련하게 할 수 없으므로, 환곡을 가급(加給)하여 흠축을 보충하는 바탕으로 삼지 않을 수가 없는데, 바야흐로 운납(運納)할 때에는 비록 목전의 급급함을 모면할 수는 있으나, 가을에 이르러 수봉(收捧)할 때에는 반드시 가급(加給)한 환곡까지도 아울러 독징(督徵)할 것이니, 호남의 백성은 본시 불쌍하거니와 영남의 백성들도 홀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이전(移轉)할 때에는 가급(加給)하고, 흠축을 보충한 숫자도 일체 탕감하여 곤궁한 백성들의 호원(呼寃)하는 단서를 없애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받아들여 이를 묘당(廟堂)에 내려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8월 5일 갑술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황당선(荒唐船)이 출몰(出沒)하는 일 때문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저들에게 주문(奏聞)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이 밖에 관서의 강변에서 범월(犯越)하는 폐단과 함경도 경원(慶源) 등지의 건너편에서 저쪽 사람들이 집을 짓고 전답을 개간하는 등의 일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주문(奏聞)함이 마땅하다고 하는데, 다만 북관(北關)의 일에 대하여 혹자는 말하기를, ‘저들이 만약, 「너희 나라에도 진보(鎭堡)와 촌락(村落)이 모두 강변에 늘어서 있는데, 유달리 우리만 금지함은 무엇 때문인가?」고 답변한다면 대답할 말이 없다.’고 하니, 이로써 품지(稟旨)하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다만 어채(漁採)와 채삼(採蔘) 등의 일을 먼저 주문(奏聞)하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조태구(趙泰耉)가 말하기를,
"저들이 강변에서 채삼함에 있어 비록 범월(犯越)할 염려가 있기는 하나, 만약 넘어와서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없다면 또한 우리가 금지할 만한 일이 아니니, 반드시 넘어와서 폐단을 일으키기를 기다려 그 표적(標迹)을 만들어서 주문한 후에야 안전한 계책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기고, 다만 황당선(荒唐船)과 어채(漁採)하는 폐단만 주문하게 하였다. 김창집이 진달하기를,
"양호(兩湖)와 영남이 모두 흉년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수륙(水陸)의 조련(操鍊)을 거행함은 폐단이 있으니, 청컹대 아울러 정지하고, 영장(營將)으로 하여금 편의(便宜)에 따라 점검(點檢)하게 하소서. 영남의 노비 추쇄(奴婢推刷)와 군병 도안(都案)의 개정(改正) 또한 풍년을 기다려 거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전(前) 좌윤(左尹) 임홍망(任弘望)이 나이 80이라 하여 최관(崔寬)·권열(權說) 등의 예(例)에 의하여 품계를 바꾸어 자헌(資憲)으로 승급(陞級)시킬 것을 명하였으니,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의 말로 인한 것이었다. 또 좌참찬(左參贊) 최석항(崔錫恒)의 진언으로 인하여 고(故) 의정(議政) 윤증(尹拯)의 집에 경인년077) 이후 보내던 월름(月廩)을 특별히 도로 거두도록, 하고 다만 3년을 한정하여 녹봉을 수송(輸送)하도록 명하였으니, 대개 윤증의 아들 윤행교(尹行敎)가 여러 차례 그 아비의 유언(遺言)을 이유로 늠록(廩祿)을 극력 사양했기 때문이었다. 사간(司諫) 유숭(兪崇)이 앞서 논계(論啓)한 일을 진달하고, 또 논하기를,
"송조 육현(宋朝六賢)의 승배(陞配)는 진실로 사문(斯文)의 큰 경사이니, 어찌 다른 의논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부사과(府司果) 이이만(李頤晩)이 감히 이론(異論)을 세우고 한 소장(訴章)을 올려 이르기를, ‘새로운 규례(規例)를 세우는 것은 홀로 《주례(周禮)》를 준수(遵守)하는 의리에 어긋남이 있다.’고 하면서 드러나게 비난하는 논평을 가하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니, 지극히 해괴합니다. 청컨대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에 소론(疏論)한 바가 지극히 근거가 없었다. 파직하라."
하였다. 또 논하기를,
"영종 첨사(永宗僉使) 김의만(金義萬)은 오로지 탐학(貪虐)을 일삼고 횡렴(橫斂)이 한정이 없으며, 상납(上納)하는 어물(魚物)도 억지로 남징(濫徵)을 더하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더욱 상세히 살펴 처치하라고 답하였다. 지평(持平) 조상경(趙尙絅)이 앞서의 계사(啓辭)를 진달하고, 또 논하기를,
"각사(各司)의 공상(供上)078) 하는 관원이 어공(御供)하는 물품을 손수 받아 가지고 가자(架子)079) 에 담아 전도(前導)하여 궐문(闕門)에 이르러 개문(開門)을 앉아 기다리는 것은 바꿀 수 없는 규례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이 법이 점차 폐지되어 어공(御供)의 물품을 혹 공물인(貢物人)의 집에서 곧장 마련해 궐문(闕門) 아래로 오고, 관원은 의막(依幕)에 와서 휴식을 취하다가 개문(開門)하면 비로소 들어옵니다. 청컨대 각사(各司)에 신칙하여 지금부터 그릇된 규례를 따르는 자는 각별히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논하기를,
"작년에 영남 사람 김이달(金履達)이라는 자가 한 소장(疏章)을 올렸는데, 비록 박녀(朴女)를 정포(旌褒)하는 일을 말하였지만 정신을 쏟은 바는 오로지 도신(道臣)을 무함하는데 있었습니다. 다만 조광한(趙廣漢)을 참요(斬腰)한 옛 일080) 을 끌어댔으니 생각하는 뜻이 위험했습니다. 박수하(朴壽河)가 형벌을 받은 것은 다만 언어의 패만(悖慢)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니, 송사(訟事)의 입락(立落)081) 에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이로 인하여 여러 가지를 주워모아 반드시 도신(道臣)에게 앙갚음을 하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전에 없던 일입니다. 청컨대 소두(疏頭) 김이달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율(律)을 헤아려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문의하니, 김창집 등이 말하기를,
"도신의 우연한 살인이 산송(山訟)과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감히 조광한을 참요했다는 등의 말을 이끌어댔으니, 이는 범연히 치죄하여서는 아니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여러 신하에게 물었는데, 모두 말하기를,
"그 소가 비록 근거는 없으나 이미 초야(草野) 사람의 상소라고 일컬으니, 한두 구절의 말을 가지고 죄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대간(臺諫)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민진후(閔鎭厚)가 각사(各司)의 관원들이 편복(便服)으로 드나드는 폐단을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경녕전(敬寧殿) 제향 때 여러 제관(祭官)들이 궁중으로부터 편복을 입고 나왔으니, 논죄(論罪)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傳敎)하기를,
"내가 석척제(蜥蜴祭)082) 를 지낼 때 조신(朝臣)들이 궁중에서 이미 편복을 입고 나오는 것을 또한 보았으니, 지금부터 드러나는 대로 논죄토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이 고(故) 기평군(杞平君) 유백중(兪伯曾)의 시장(諡狀)을 지었는데, 유백증이 고(故) 상신(相臣) 윤방(尹昉)을 논핵한 일을 논하여 이르기를,
"공(公)은 윤방이 묘사(廟社)의 위판(位版)을 더럽힌 데 대하여 논핵하였는데, 임금이 그 허실을 물었을 때 대답한 것이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였으므로, 임금께서 실상에 어긋났다 하여 특별히 파직을 명하였다. 그 후에 이회(李檜)가 심양(瀋陽)에서 돌아와 묘사의 위판을 더럽힌 정상을 극력 진달하였는데, 이회가 그때 궁관(宮官)으로서 일찍이 목도(目睹)하였으므로, 임금이 비로소 공(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하였다. 윤방의 후손 봉사(奉事) 윤중명(尹重明) 등이 소를 올려 그 무망(誣罔)함을 변명하고, 최석정의 조부(祖父) 최명길(崔鳴吉)의 말과 고 판서(判書) 이식(李植)의 비문(碑文) 가운데 원래 죄줄 뜻이 없었다는 말을 이끌어 이르기를,
"유백증과 이회는 모두 윤방과 더불어 오래 된 혐의가 있으므로 때를 틈타 날조하였는데, 최석정은 오로지 유백증에게 아부하여 그 자손을 기쁘게 하려고 하였으니, 청컨대 태상시(太常寺)083) 에 명하여 시장(諡狀) 가운데 무함한 말을 개삭(改削)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태상시로 하여금 개삭하는 일을 거행하게 하니, 봉상시(奉常寺)에서 그 시장을 유백증의 자손에게 내주어 산개(刪改)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유백증의 손자 전 군수(郡守) 유명담(兪命聃) 등이 또 소를 올려 윤방이 묘사의 위판을 더럽힌 정상을 논하여 이르기를,
"묘사의 위판을 봉환(奉還)할 때 빈 섬[空石]으로 싸서 말에 싣고 해진 버선과 잠방이 및 식기(食器)·작도(斫刀) 등의 물품을 그 가운데 뒤섞어 넣었으며, 여종으로 하여금 그 위에 타게 하니, 인심이 모두 분노하였습니다. 온 나라에 말이 왁자하게 퍼지자, 성상께서 그 죄상을 통촉하시고, 인하여 중도 부처(中道付處)084) 의 명을 내리셨습니다. 성조(聖祖)의 처분이 이와 같이 엄절하였는데, 그 자손된 자가 어찌 감히 비호하며 도리어 신변(伸辨)할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피차의 소변(疏辨)이 이와 같으니 공의(公議)에 따라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그 소를 해조(該曹)에 내렸다. 이에 이르러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순문(詢問)하니,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이 일은 이미 백 년이 가까와서 상세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유백중의 시장(諡狀) 가운데 유백증이 윤방을 논핵한 일로부터 이회의 상소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조보(朝報)에 나온 것이며, 윤중명이 칭원(稱寃)하는 바는, ‘비로소 공(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는 한 마디 말에 있는 듯합니다. 그때 이회가 상소한 뒤 윤방은 중도 부처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석방(釋放)되었으니, 성명(聖明)의 도량(度量)이 깊어 많은 신하들이 감히 그 한계를 엿볼 수 없었습니다. 윤방을 두둔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임금이 비록 여러 신하의 소청에 몰려 잠시 중도 부처를 허락하였으나 바로 은사(恩赦)를 내린 것은 반드시 윤방을 억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니, 이식의 문자 가운데 원래 죄줄 뜻이 없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고, 유백증을 두둔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이회가 상소한 뒤 이회는 죄을 입지 않고 윤방은 중도 부처되었으니, 이는 임금께서 반드시 이회의 말을 옳게 여긴 것이다. 이제 시장(諡狀) 가운데 이른바 비로소 공(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합니다. 옛사람도 간혹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각기 그 소견에 따라 말하는 자가 있었으니, 양편의 말을 모두 깊이 배척할 수 없으며, 이 밖에 다시 사핵(査覈)할 단서가 없습니다."
하고, 조태채(趙泰采) 등은 말하기를,
"시장 또한 공가(公家)의 문장인데, 함부로 산개(刪改)하게 한다면 그 폐단이 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시장을 산개하지 말라고 명하고, 또 그때의 시비(是非)를 지금 작정(酌定)하기 어려우니, 예조(禮曹)의 복주(覆奏)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8월 6일 을해
강화 유수 김진규(金鎭圭)가 송조 육현(宋朝六賢)을 승배(陞配)하는 일로 본부(本府)의 난편(難便)한 사세(事勢)를 장계로 진달하기를,
"본부 향교(鄕校)에 송조 유현(宋朝儒賢)으로 양무(兩廡)에 종사(從祀)한 사람은 다만 도국공(道國公)085) ·예국공(豫國公)086) ·낙국공(洛國公)087) ·휘국공(徽國公)088) 네 분인데, 이제 육현(六賢)의 도덕이 서로 비등하다 하여 일체 승배(陞配)하는 거조가 있으니, 서울과 외방(外方)에서 일례로 거행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런데 혹은 육현을 승배하고 혹은 사현을 승배한다면, 참차 부제(參差不齊)089) 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며, 만약 전일 양무(兩廡)에 종사(從祀)하지 않은 사람을 전내(殿內)에 추배(追配)한다면 다만 사체(事體)에 미안할 뿐만 아니라, 또한 조종조(祖宗朝)에서 작정한 전례(典禮)에 어긋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또 향교에 동무·서무를 설치한 것은 원래 오로지 동방(東方) 유현(儒賢)만을 종사(從祀)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으니, 전일에 중조(中朝) 유현을 열향(列享)하고 인하여 동방 유신(儒臣)을 그 아래에 붙이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숭배한 뒤에는 향학(鄕學)의 양무(兩廡)에 장차 중조 유현은 없고 다만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이하 여러 유신만 종사(從祀)될 것이니, 당초 설치한 본의(本意)에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대전속록(大典續錄)》에 이르기를, ‘개성부(開城府) 및 모든 도(道)의 계수관(界首官)090) 을 제외한 그 나머지 주(州)·부(府)·군(郡)의 학(學)은 양무(兩廡) 제위(諸位)의 제향을 면제하고, 현학(縣學)은 전(殿) 위의 10위(位)의 제향까지도 아울러 면제하며, 오직 송조(宋朝)의 염계 주 선생(濂溪周先生)·명도 정 선생(明道程先生)·회암 주 선생(晦庵周先生) 및 신라(新羅)의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고려(高麗)의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는 주·부·군의 학에서도 아울러 모두 향사(享祀)한다.’ 하였습니다. 《대전속록》은 성종조(成宗朝)에 이루어졌으니, 그 전에는 향학(鄕學)에서 송조 사현(宋朝四賢)을 종사(從祀)하지 않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양현(兩賢)을 한결같이 태학(太學)의 예(例)에 따라 일체 추배(追配)한다면 진실로 전례(典禮)를 바로 잡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비록 조종조(祖宗朝)에서 작정(酌定)한 바에는 약간 어긋나지만, 오늘날 양현을 추배함은 성종조 때 양무(兩廡)에 종사하라는 분부와 더불어 함께 아름다움이 될 것이니, 의리로 헤아려보아도 아마 대단히 미안한 데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허다한 주·부·군에서 일제히 승배하자면 구애되는 일이 많을 것이니, 개성부 및 모든 도(道)의 계수관은 태학(太学)과 일체로 거행하고, 주·부·군의 학에서는 다만 앞서 종사(從祀)한 송조 사현을 십철(十哲)의 아래에 승배하여, 현학(縣學)에서는 한결같이 옛 규례를 따라 변동(變動)하지 않음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은 말하기를,
"예관(禮官)의 복주(覆奏)가 합당합니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는 말하기를,
"주·부·군의 학은 십철(十哲)의 위패(位牌)가 이미 태학의 제도와 같으니, 육현을 승배함은 참치 부제함이 있어 옳지 못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김창집의 의논을 따랐다.
8월 7일 병자
이기익(李箕翊)을 정언(正言)으로, 한지(韓祉)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대사헌(大司憲) 신임(申銋)이 소를 올려 조섭하는 방도를 논하고, 의서(醫書)의 바람 피하기를 화살 피하듯 하라는 말로 희로(喜怒)를 경계하고 음식을 절제하는 도리를 이끌어 말하기를,
"이는 모두 섭생(攝生)의 요결(要訣)이니 병을 조섭하는 날에는 더욱 근신하여야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근래 새로 제수된 수령이 하직하기도 전에 도신(道臣)이 치계(馳啓)하여 체직을 청하는 것은 상규(常規)에 어긋난 일인데, 지난번 양계(兩界)의 방백(方伯)이 또 어려워함 없이 잇따라 그렇게 하였습니다. 부임 후 그 능력 여부를 보아 처리함이 사리에 마땅한 것인데, 조정(朝廷)의 명리(命吏)091) 가 부임(赴任)하기도 전에 앞질러 배격(排擊)함은 자못 치척을 고사(考査)하여 출척(黜陟)하는 뜻이 없으니, 경책(警責)하는 방도가 있음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송조 육현을 승향(陞享)하자는 논의는 실로 사문(斯文)의 큰 경사이며 성대(聖代)의 거룩한 전례(典禮)인데, 뜻밖에 저지하는 의논이 갑자기 사대부 사이에서 나와 3백 년 이래로 이런 논의는 듣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또 세대가 현격(懸隔)하여 공문(孔門)에서 직접 배운 사람과 차이가 있다고 하나, 이 일은 벌써 고(故)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가 예조 판서로 있을 때 이미 이러한 의논이 나왔으니, 원래 오늘날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세대를 장애로 여긴다면 자사(子思)가 어찌 공리(孔鯉) 위에 있으며, 직접 배운 것으로써 말한다면 맹자가 어찌 안자(顔子)·증자(曾子)의 열(列)에 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새로 제수된 수령이 하직하기도 전에 도신(道臣)이 치계하여 체직을 청하는 것은 일찍이 보지 못한 일로 항상 미안하게 여겨 왔다. 양계(兩界)의 감사(監司)를 모두 추고(推考)하여 경책(警責)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그리고 전일 이이만(李頤晩)의 소는 그 뜻이 저지(沮止)하는 데 있었으니, 지극히 통분(痛憤)하게 여길 만하다. 경의 논한 바가 옳다."
하고, 며칠 후에 임금이 이이만에 대한 삭탈 관작의 논계를 윤허하였다.
8월 8일 정축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가 여러 차례 사직소(辭職疏)를 올리고 대신(大臣)이 첨서(添書)를 청한 것과 【대신(大臣) 김창집(金昌集)은 곧 송상기의 내종형(內從兄)이 되므로, 이로써 더욱 인혐(引嫌)하였다.】 차점(次點)으로 수점(受點)된 것을 인혐(引嫌)하여 행공(行公)하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와서 육현의 승배(陞配)에 관한 반교문(頒敎文)을 제진(製進)하는 일로 하루에 세 차례나 소패(召牌)를 내리니, 비로소 명을 받들고 숙배(肅拜)하였다.
북병사(北兵使)가 경원(慶源)에서 호인(胡人)들이 강변(江邊)에 집을 짓고 전토를 개간하는 일 때문에 장문(狀聞)하기를,
"경원부의 병방(兵房)과 군관(軍官)들이 평복(平服)으로 변장하고 강변을 거닐다가 고기 잡는 호인을 만나 집을 짓고 농사짓는 연유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이 땅은 비옥한데다 또 영고탑(寧固塔)의 호인이 장차 옮겨 오려고 한다 하므로 집을 짓고 농사 지을 땅을 먼저 차지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황제의 명령에서 나왔는가 영고탑 장령(將令)에게서 나왔는가의 여부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아직 황제의 명령도 없고 또 장령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훈융(訓戎) 건너편에 집을 짓는 호인의 호수(戶數)와 호수(戶首)의 이름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호수(戶首)의 이름은 삼거(三巨)요 호수(戶數)는 단지 3호이며 종호(從胡)는 5명인데, 이는 후춘(後春)에 거주하는 호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8월 9일 무인
달이 남두(南斗)의 제6성(第六星)을 범하였다.
송조 육현(宋朝六賢)을 문묘(文廟) 대성전(大成殿) 안에 승배(陞配)하였다. 도국공(道國公) 주돈이(周敦頤)는 위공(魏公) 복상(卜商)의 아래에 봉안(奉安)하였고, 예국공(豫國公) 정호(程顥)는 영천후(穎川侯) 전손사(顓孫師)의 아래에 봉안하였으며, 낙국공(洛國公) 정이(程頤)는 도국공 주돈이의 아래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신안백(新安伯) 소옹(邵雍)은 예국공 정호의 아래에 봉안하였으며, 미백(郿伯) 장재(張載)는 낙국공 정이의 아래에 봉안하였고, 휘국공(徽國公) 주희(朱熹)는 신안백 소옹의 아래에 봉안하였다. 전우(殿宇)는 개조(改造)하지 않고 상탁(牀卓)과 교의(交椅)의 제도를 약간 줄여서 추이(推移)해 봉안하였으며, 평명(平明)에 진하(陳賀)하고 반교(頒敎)하였다. 임금이 숭릉(崇陵) 능 위에 석물(石物)을 파손(破損)한 작변인(作變人)을 아직 체포하지 못하였다 하여 특교(特敎)를 내려 좌우 두 포도 대장(捕盜大將)을 추고(推考)하게 하고, 다시 신칙(申飭)을 더하여 꼭 체포하라고 하였다.
8월 10일 기묘
약방에서 입진하여 임금이 침(鍼)을 맞았다.
간원(諫院)에서 논하기를,
"당진 현감(唐津縣監) 강성복(姜聖復)은 오로지 수탈(收奪)만을 일삼고 가까운 곳에 있는 집에 짐바리가 잇달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세 번 아뢰자 비로소 따랐다.
8월 11일 경진
약방에서 입진하여 임금이 침을 맞았다.
8월 12일 신사
이보다 앞서 유생(儒生) 이광보(李匡輔)·박필현(朴弼顯) 등이 윤증(尹拯)의 상사(喪事)에 글을 지어 제전(祭奠)을 올렸다.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이 그 제문(祭文)을 대신 지었는데, 송시열(宋時烈)을 침척(侵斥)한 말이 있었고, 심지어 ‘공언(空言)092) 은 실천하지 못하였고, 고론(高論)093) 은 이룬 것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대개 송시열의 복수 대의(復讎大義)를 공언과 고론이라며 비꼰 것이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황상로(黃尙老) 등이 이에 이르러 소를 올려 논변(論辨)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의리(義理)란 우주(宇宙)의 기둥이며 국가의 명맥입니다. 의리 가운데서도 또 춘추(春秋)의 존왕 양이(尊王攘夷)의 의리보다 더 큰 것이 없으므로, 하루라도 이러한 의리가 없다면 인류(人類)는 금수(禽獸)로 변할 것이니, 기둥이 꺾이고 명맥이 끊어지는 것은 논할 겨를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강화(講和)의 치욕을 당한 후에 성지(聖志)를 분발하여 장차 큰 일을 도모하여 하셨습니다. 한편 심덕(心德)을 같이한 신하인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은 대개 일찍이 영교(令敎)를 받들어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으며, 그 주장한 바는 실로 이른바 춘추의 대의로서 그 풍성(風聲)과 의열(義烈)은 오늘까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환히 남아 있으니, 족히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갑자기 사람들의 무함을 받아 모욕하고 업신여기되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인심과 세도(世道)의 변화가 극에 달했고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앙화가 닥친 것입니다.
신 등이 판부사 최석정이 제생(諸生)을 대신하여 지은 윤증의 제문(祭文)을 얻어 보니, 거기에 이르기를, ‘가문(家門)의 원수가 이미 깊고 국가의 수치를 씻지 못하였으나 끝내 잊었다 할 수 없고, 돌아가 일신의 결백을 지킨 데 가깝도다. 어찌 저 사람의 밖으로만 내달려 명예를 구해 공언(空言)을 실천하지도 못하고 고론(高論)을 이루지도 못한 것과 같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그 뜻은 국치(國恥)를 당한 후에 오직 종신토록 폐인(廢人)을 자처하며 세상과 관계를 끊는 것이 의(義)에 합당하다고 생각한 것이며, 이에 세무(世務)를 담당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토적(討賊)과 복수(復讎)를 일로 삼은 자는 도리어 밖으로 내달려 명예를 구하는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무릇 국치를 당한 뒤 토적과 복수의 일을 담당한 자가 송시열이 아니고 누구이며, 송시열이 이 책임을 맡게 된 것은 누가 시켜서 그런 것입니까? 아! 효묘(孝廟)께서 천지(天地)가 뒤집히는 변을 보시고, 와신 상담(臥薪嘗膽)의 의지를 가다듬어 초야(草野)에 있는 송시열을 맞아 들였으니, 계합(契合)094) 의 융숭함이 천고(千古)에 비길 데가 없었습니다. 그 힘써 경영한 바는 첫째도 복수 설치(復讎雪恥)요, 둘째도 복수 설치였으니, 그 정성은 금석(金石)을 뚫고 귀신도 감동시킬 만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효묘의 의지는 곧 송시열의 의지이며, 송시열의 일은 곧 효묘의 일이었으니, 어찌 이른바 군신 동덕(君臣同德)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최석정이 송시열을 밖으로 내달려 명예를 구하였다고 하면 효묘께는 장차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독대(獨對)의 설(說)은 오로지 내수(內修)의 실(實)을 위한 것이었으니, 어떻게 이를 공언(空言)이라고 둘러댈 수 있으며, 초구(貂裘)의 하사(下賜)는 장차 요동(遼東)과 계주(薊州)의 풍설(風雪)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었으니 이를 고론(高論)으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이룬 것이 없다고 말한 것에 이르러서는 신이 더욱 절통해 합니다.
아! 황천(皇天)이 돕지 아니하여 성조(聖祖)께서 선어(仙馭)하여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시고, 송시열 또한 마침내 뜻만 품고 세상을 떠났으나, 우리 수천 리 동방(東邦)이 이적과 금수의 지역이 됨을 면하게 된 것은 당시 군신(君臣)이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은 공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춘추(春秋)의 지어짐은 천하가 한 번 다스려진 운회(運會)에 해당하였고, 맹자가 양묵(楊墨)을 배척한 공(功)은 우(禹)임금보다 못하지 않다 하는데, 그 어찌 공언일 뿐 이룩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한 소열(漢昭烈)과 제갈양(諸葛亮)이 비록 중원(中原)을 평정하는데 미치지는 못했으나, 천하에 대의(大義)를 펴지 못했다고 이를 수 있겠으며, 남송(南宋) 효종(孝宗) 때 금(金)나라가 비록 틈탈 만한 흔단은 없었지만 주자(朱子)의 수공(垂拱)의 주문(奏文)에 철장(鐵杖)과 목마(木馬)095) 의 뜻을 찬양하였으니, 또한 이룬 것이 없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최석정은 윤증을 찬양하기 위하여 송시열을 무함하고 헐뜯어 심지어 공언일 뿐 이룬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병자년096) ·정축년097) 의 호란(胡亂)과 같이 강화(講和)를 주장하고 척화(斥和)한 여러 신하를 잡아보낸 연후에야 바야흐로 이룬 것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대개 대의(大義)를 배척함은 절로 전해져 온 묘맥(苗脈)이 있으니, 이 사람에게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이제 최석정은 다만 송시열을 미워했기 때문에 스스로 그 말의 무함이 성조(聖祖)에까지 미치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니, 어찌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 글에 교만하고 질투하고 포학함이 온 나라에 파다하다는 등의 말로써 송시열을 비난하고 배척하면서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무릇 송시열의 광명 정대한 학문과 도덕을 곧장 좀도덕의 죄과로 돌렸으니, 아! 또한 참혹합니다. 신 등이 이에 여러 말로써 변명할 겨를도 없습니다만, 유독 그 밖으로만 내달려 공언만 한다고 한 데 대해서는 크게 관련되는 바 있어 특히 송시열만 무함을 받았을 뿐이 아니니, 신 등의 놀라고 분통해 함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아! 이천(伊川)에 피발(披髮)098) 한 자가 나타나자 신유(辛有)는 백 년 뒤 오랑캐 땅이 될 것을 알았고099) 〈왕안석(王安石)이〉 《춘추(春秋)》의 강(講)을 폐지하자 호씨(胡氏)100) 는 정강(靖康)의 앙화101) 가 미칠 것을 통탄하였습니다. 이제 최석정은 대신이요, 그 글을 가지고 제전(祭奠)을 올리는 자는 또한 모두 유생이라 이름하는 자들이니, 그 해괴함이 피발(披髮)한 늙은이보다도 심하며, 헐뜯는 말이 심지어 당시 대의(大義)를 담당한 사람에게 미쳤으니, 《춘추》를 한때 폐강(廢講)한 것과 비교하여 또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최석정이 무함하고 헐뜯은 말을 밝게 분변하여 사설(邪說)이 다시 이 세상에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대신이 대신 지은 제문(祭文) 가운데 몇 구절 말이 그 지적해 물리친 바가 과연 너희들이 논한 바와 같은지 알지 못하겠다. 하물며 이 유생들이 유상(儒相)을 위하여 지은 제문은 공가(公家)의 문자가 아니니, 이를 조정(朝廷)에까지 밀어 올리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다음날 황상로 등이 또 재차 소를 올려 논변하기를,
"최석정이 다른 일을 들어 송시열을 무함하더라도 오히려 성조(聖祖)의 밝으신 덕에 누(累)를 끼칠까 염려가 되는데, 하물며 이 막중한 의리가 곧 당시의 군신(君臣)이 함께 주장한 바이겠습니까? 정개청(鄭介淸)의 배절의론(排節義論)102) 도 본시 공가(公家)의 문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특별히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문단(文段)마다 배척하여 열읍(列邑) 향교(鄕校)에 반포(頒布)하셨습니다. 지금 최석정이 송시열을 무함한 것은 정개청이 절의를 배격한 죄보다도 더욱 심한데, 성명(聖明)께서는 무엇을 꺼리시어 선조께서 일찍이 변척(辨斥)하신 것처럼 변척하지 않으십니까? 설령 성조(聖祖) 세대에 바야흐로 독대(獨對)를 마치고 초구(貂裘)를 반사(頒賜)하셨을 때에 한 신하가 있어 문자를 지어 말하기를, ‘이는 밖으로만 내달려 명예를 구하는 것이다.’ ‘이는 공언(空言)일 뿐 이룬 것이 없다.’고 한다면 성조(聖祖)께서 이 사람을 장차 어떻게 처치하셨겠습니까? 그 지적해 물리친 바가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시었겠습니까? 아니면 이는 공가(公家)의 문자가 아니니 조정(朝廷)에 올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시었겠습니까? 이것이 신 등이 후세에 기롱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는 까닭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어제 비지(批旨)에 이미 상세히 말했는데 어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바가 있는가? 이제 또 소장을 올렸으니, 나는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8월 14일 계미
이교악(李喬岳)을 승지(承旨)로, 조명봉(趙鳴鳳)을 사서(司書)로, 홍석보(洪錫輔)를 부교리(副校理)로, 이봉익(李鳳翼)을 주서(注書)로 삼았다.
8월 15일 갑신
김취로(金取魯)를 문학(文學)으로, 박성로(朴聖輅)를 사서(司書)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논하기를,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유민(李裕民)은 비록 잘 다스린다는 명성(名聲)은 있으나, 병영(兵營)을 제어(制馭)하는 인망(人望)이 있음은 듣지 못했는데 갑자기 웅곤(雄閫)에 올랐으니, 물정이 미흡해 합니다.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이산 군수(理山郡守) 한재후(韓在垕)는 일찍이 남쪽 고을을 맡아서 오로지 수탈(收奪)만을 일삼았는데 갑자기 본군(本郡)에 올랐으니, 물정이 모두 해괴하게 여깁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재차 아뢰자, 한재후에 대한 일은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3책 55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36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8월 16일 을유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장계하기를,
"본도(本道)에 여역(癘疫)이 크게 번져 5천여 명이 죽었는데, 수백 첩의 약으로는 모두 구제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하니, 임금이 의사(醫司)에 명하여 상당한 약물(藥物)을 더 보내어 주라고 하였다.
8월 17일 병술
장령(掌令) 안중필(安重弼)이 논사소(論事疏)를 올렸는데, 첫머리에 반유(泮儒) 황상로 등에 대한 소비(疏批)의 미안함을 들어 말하기를,
"대신이 대신 지은 제문(祭文) 가운데 몇 구절의 말은 명의(命意)가 예사롭지 않으니, 그 누군들 선정(先正)을 지척(指斥)하여 나온 말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공언(空言)·고론(高論)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헐뜯는 데 힘써 성조(聖祖)까지 범하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 글이 한 번 나오자 중외(中外)에 널리 퍼져 한 가문(家門)에서 사사로이 기록하여 간직한 데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니, 이것이 공가(公家)의 문자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누조(累朝)에서 예우(禮遇)한 대로(大老)를 무함받은 채 버려두고 신설(伸雪)해 밝히지 않는다면, 비단 뭇 선비들의 울분이 더욱 깊어질 뿐 아니라, 또한 성조(聖朝)의 흠전(欠典)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오직 원하건대 빨리 변척(辨斥)을 내리소서."
하고, 또 길인화(吉仁和) 등이 여필희(呂必禧)를 소척(疏斥)한 일에 대하여 논하기를,
"여필희의 별단(別單)에 풍속을 조열(條列)하여 아뢴 말은 사실을 지나쳐 온 도(道)를 들어 무지 몽매(無知蒙昧)한 데로 돌림을 면하지 못했으니, 길인화 등이 한 번 변명하여 밝히려 함도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 족숙(族叔)을 위해 보복하고 여색(女色)을 탐해 도처(到處)에서 유련(留連)했다는 등의 말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데에 속하는 것이므로, 성비(聖批)에서도 이런 곳에 대하여 깊이 배척을 더하셨습니다. 다만 여필희의 소비(疏批)에는 변석(辨釋)하심이 부족한 듯하니, 혹시 성명(聖明)께서 관서(關西)의 울분한 마음을 위로하시고자 하여 이런 편중된 하교(下敎)가 있지 않았나 합니다."
하고, 또 윤덕준(尹德駿)이 정호(鄭澔)를 소론(疏論)한 일에 대하여 변론하기를,
"그 소에 이른바 향유(鄕儒)를 모아 상소하여 어지럽게 만들었다는 것과 길에서 호창(呼唱)하고 저자를 휩쓸었다는 것은 누가 보고 누가 전했는지 비록 알지 못하나, 이것이 어찌 지위가 재신(宰臣)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할 바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정호가 행한 일이 윤덕준이 말한 바와 방불하다고 여기신다면 본시 의관(衣冠)의 반열에 둘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찌 흔쾌하게 명백히 밝히지 아니하시고, 무고(無辜)한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무함을 입어 신설(伸雪)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정호의 청렴하고 충직(忠直)함은 온 세상에서 모두 추앙하는 바이며, 전일 스스로 변명한 소에 그 사실을 대략 밝혔으니, 어찌 감히 추호라도 거짓말로써 군부(君父) 앞에 아뢰었겠습니까. 일종의 질투하는 무리들이 근거없는 말을 지어내어 뒤집어 씌우고 협박하여 반드시 참으로 이런 일이 있는 것처럼 몰아넣고자 하니, 이것은 전하께서 깊이 살피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문자를 보는 안목은 각자 다른 법이다. 제문 가운데 몇 구절의 말을 내가 살펴보건대 반드시 유생들이 논한 바와 같지는 않다. 그리고 여필희의 소는 길인화 등이 소를 올려 변명한 것을 기망(欺罔)한 죄목으로 돌렸으므로, 이것이 바로 괴이하다는 전교(傳敎)가 있게 된 까닭이다. 그 죄상을 논열(論列)한 데 이르러서는 이미 깊이 배척했으므로 다시 제론(提論)하지 않겠으나, 원래 편중된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윤덕준의 상소 가운데 저자를 휩쓸었다는 말은 비록 그 허실(虛實) 여부를 알지 못하겠으나, 이제 그대의 소에는 조금도 말할 만한 허물이 없는 것처럼 말했으니, 이는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였다. 다음날 안중필이 인피(引避)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제문 가운데 이른바 ‘어찌 그 사람과 같겠는가.’라 한 그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을 가리킨 것이며, 고론(高論)과 공언(空言) 등의 말은 과연 어떤 언론(言論)을 지적한 것이겠습니까? 신은 끝내 유생들이 논한 바에 오인(誤認)한 바가 있음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정호의 일에 이르러서는 성비(聖批)에 ‘그대의 소에는 조금도 말할 만한 허물이 없는 것처럼 말하였으니, 이는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교하셨는데, 신 또한 어찌 감히 정호가 추호도 말할 만한 허물이 없다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개결하고 강직한 지조는 평소부터 들어왔습니다. 유생을 모아 소를 올리게 하고 저자를 휩쓸며 다녔다는 말은 과연 누가 목격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거짓말을 주워모아 죄를 구성하여 황막(荒漠)한 변방으로 내쫓아 만 번 죽음 속에서 겨우 살아왔는데, 그 미워하는 마음이 오히려 가시지 아니하여 조가(朝家)에서 변석(辨釋)한 후에도 다시 전날의 말을 끌어내어 오직 죄에 깊이 빠뜨리지 못함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또한 너무나 심합니다."
하였는데, 장령(掌令) 최경식(崔慶湜)이 처치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8월 20일 기축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강원 감사(江原監司) 윤성준(尹星駿)이 흉년이라 하여 합조(合操)·취재(取才)·고강(考講) 등의 일을 정지하기를 청하였는데, 매년 연습을 폐지하면 군정(軍政)이 허술해질 것이니, 올 가을에는 전례(前例)에 의하여 거행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 이조 판서 황흠(黃欽)이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어기고 행공(行公)하지 아니하는지라 임금이 사체(事體)가 미안하다 하여 속히 행공을 재촉하였으나, 황흠은 전날 유숭(兪崇)의 상소 가운데에 윤차(輪次)로 낸 이판(吏判)이란 말이 있었다 하여 인혐하고 나오지 않았다. 김창집과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모두 황흠은 출사하지 않기로 결심하여 형세상 강박(强迫)하기 어렵다고 말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 황흠을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김창집이 사관(史官) 최상리(崔尙履)가 논한 김상원(金相元)의 사초(史草)에 관한 일 【최상리의 일은 위에 보인다.】 로써 진달하기를,
"사초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찌 감히 행서(行書)나 초서(草書)로 써서 들일 뜻이 있겠습니까. 다만 김상원의 병세로 보아 이미 해서(楷書)로 수정하여 바칠 가망이 없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만약 행서나 초서를 허락하면 거의 완성(完成)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렇게 정탈(定奪)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듣건대 초서(草書)로 수정(修正)한 것이 매우 많다고 하는데, 만약 정서(正書)하게 한다면 몇 해가 걸리지 알지 못하니, 일이 지극히 난처합니다."
하고, 김우항이 또한 뒤를 이어 진달하니, 임금이 전일의 정탈에 의하여 초서로 수정해 들이라고 명하였다. 김창집이 또 사무(事務)를 간편하게 하는 방도에 대해 진달하기를,
"선묘조(宣廟朝) 명신(名臣) 유희춘(柳希春)의 일기(日記)에 이르기를, ‘승지(承旨)로 하여금 공사(公事)를 상세히 살펴 그 요점만을 추려서 말단에 붙이고 성상으로 하여금 한눈에 요연(瞭然)하게 한다면, 거의 정신이 상쾌하여 피곤한 데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유희춘은 선조 즉위 초년에도 오히려 이처럼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 성상께서는 춘추가 이미 쇠년에 접어들었고 건강이 겨우 회복되셨는데, 중요한 정무를 수응(酬應)하는 규례를 한결같이 예전대로 따르고 변통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 유희춘의 말처럼 대소의 공사(公事)와 여러 신하의 소장(疏章)을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먼저 그 긴요한 말을 추리고, 비지(批旨) 가운데 마땅히 제론(提論)할 것을 별지(別紙)에 몇 줄 혹은 몇 구절을 열서(列書)하여 위에 붙이도록 하여 성상께서 먼저 보시고 그 대체적인 뜻을 이해하신다면, 그 나머지 지엽적인 말은 정신을 써서 끝까지 보지 않으셔도 될 것이니, 분부와 비지(批旨)를 내릴 즈음에 간편해질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삼강(三江)103) 의 분교관(分敎官)에 대해서 무인년104) 에 근무한 연한(年限)이 차면 실직(實職)에 승진(陞進)케 할 것을 허락하였고, 신묘년105) 에는 최석항(崔錫恒)이 천전(遷轉)106) 하는 법을 혁파하기를 청하였으며, 대신(大臣)은 아직 현직(現職)에 있는 사람은 그대로 두고 다만 실직(實職)에 승진하는 길만은 혁파하자고 하였는데, 분교관은 이미 30삭(朔)을 준(準)하였으니 법식을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분교관은 동몽(童蒙)을 가르쳐서 성취하게 하는 효과가 없다며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최석항이 또 강화(江華) 분교관의 혁파를 청하였는데, 계사년107) 에 조태로(趙泰老)가 잡기 천전(雜岐遷轉)의 규례에 의할 것을 청하여 이제 도리어 승륙(陞六)의 첩경(捷徑)이 되었으니, 또한 삭수(朔數)를 한정함이 마땅합니다."
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의려(義旅)108) 는 소중하니, 혁파함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에 민진후가 60삭(朔)을 한정하여 참봉(參奉)에 승진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내관(內官)109) 의 보솔(保率)110) 은 반드시 본토인(本土人)으로 정해 주게 하였는데, 전속(專屬)된 고을에서는 전속이라 핑계하고 정해 주기를 허락하지 않으니, 이는 참으로 억울한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규식(規式)을 정하여 비록 전속된 고을이라도 내관의 보솔을 정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건명(李健命)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선부(李善溥)를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삼았다.
8월 22일 신묘
우의정 김우항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대소과(大小科) 시권(試券)의 비편(備篇)111) 은 원래 해서(楷書)로 비편(備篇)을 갖추어 인재를 선택하는 방도를 삼았던 것이었는데, 비편을 갖추는 규례가 폐지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간혹 있기는 하나 표(表)가 있다 하여 취하지 않고 다만 옛 규례를 보존한다는 뜻으로 초서(草書)로 비편을 갖추는 것이 이미 규례를 이루어 문란하기 짝이 없으니, 실로 의의가 없습니다. 그리고 1등에 합격한 시권(試券)의 경우도 이로써 어전(御前)에 아뢰게 되니 경근(敬謹)에 몹시 부족합니다. 더욱이 지금 시지(試紙)를 변통한 뒤에 종이의 품질이 매우 얇아서 안팎에 다 쓰기란 형편상 불편합니다. 또 작년에 시장(試場) 안에서 타인(打印)하는 규례를 제거한 후로 시장 안의 분답한 폐단은 없어졌으나, 선비의 습속이 아름답지 아니하고 폐단이 또 다시 생겨 밖에서 미리 비편을 써 가지고 시장에 들어오는 자도 있어 발각되어 가두고 치죄하기까지 한다고 하니, 진실로 해괴하고 놀랍습니다. 차라리 무익한 형식을 제거하여 뜻밖에 발생하는 폐단을 막는 것이 마땅하니, 지금부터 대소과(大小科)의 비편을 모두 제거하기로 규식을 정하여 시행함이 사리(事理)에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차자를 예조(禮曹)에 내렸다. 예조에서 복계(覆啓)하기를,
"《대전(大典)》 제과조(諸科條)에, ‘생원(生員) 초시(初試)에는 오경(五經)의 의(義)와 사서(四書)의 의(疑) 2편(篇), 진사(進士) 초시(初試)에는 부(賦) 1편과 고시(古詩)·잠(箴)·명(銘) 가운데 1편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조종조(祖宗朝) 이래 전해오는 금석(金石)같은 법전(法典)이며, 초서(草書)로 비편을 쓰는 것 또한 옛 규례를 보존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갑자기 변경해 고치는 것는 자못 중난(重難)한 데 관계됩니다. 밖에서 비편을 미리 쓰는 폐단을 막고자 한다면, 시장(試場) 안에서 타인(打印)하는 법을 도로 복구하고 소(所)마다 각기 세 개의 인(印)을 보내어 시제(試題)를 건 뒤에 곧 타인하게 한다면, 분답한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대단한 변통에 관계되는 것이니,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좌의정 김창집은 말하기를,
"법전에 실린 바를 하루 아침에 변경해 고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은 말하기를,
"금옥(金玉)과 같이 소중한 법전을 그대로 따르고 변경하지 않는 것이 어찌 수성(守成)의 좋은 법이 아니겠습니까마는, 형식과 본질에 폐단이 서로 생긴다면 때에 따른 손익(損益)은 성왕(聖王)도 또한 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국가의 헌장(憲章)에 실린 바를 추후에 변경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구법(舊法)을 모두 따르지도 못하면서 홀로 폐단만 있고 유익함이 없는 이 일에 대해서는 고치기를 중난(重難)하게 여기니, 실로 신이 이해하지 못할 바입니다. 만약 헌장이 점차 변개됨을 염려하여 이것만이라도 보존할 뜻을 두고자 한다면, 비편(備篇)을 갖춰 올리기를 원하는 거자(擧子)에게는 그 정식(程式)에 의해 지어 써서 올리게 하여 인재를 선택하는 본의(本意)를 폐하지 않도록 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문리(文理)도 이루지 못하는 글을 어지럽게 써서 올리지 말게 한다면 거의 실지에 힘쓰는 정사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이명의 의논을 따랐다.
8월 23일 임진
예조 낭청(禮曹郞廳)을 보내어 고려(高麗)의 여러 왕릉(王陵)을 적간(摘奸)하게 하였다.
정언(正言) 조명겸(趙鳴謙)이 양구현(楊口縣)에서 소명(召命)을 받들고 들어와 양구 백성들이 백토(白土)를 채굴하는 폐단에 대하여 상소로 진달하기를,
"백점토(白粘土)는 높은 산 가운데에 있는데, 양구의 부역(赴役)에 응하는 민호(民戶)는 5백 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5백 호의 백성으로 천 길이나 되는 높은 산꼭대기를 타고 뚫게 하여 겨우 토맥(土脈)을 찾으면 언덕이 바로 무너져 압사(壓死)하는 역부(役夫)가 없는 해가 없습니다. 수개월의 공력을 들여 5백석의 정토(正土)를 겨우 채취한 뒤 춘천·홍천·인제·낭천·양구 다섯 고을에서 각기 인부(人夫)를 내어 선소(船所)로 운반하여 분원(分院)에 상납하는데, 춘천·홍천·인제·낭천 네 고을은 당초 채굴하는 역사(役事)에는 참여하지 않고 다만 운납(運納)하는 수고로움만 담당하는데도 오히려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더욱이 이 양구 고을에는 지토선(地土船)112) 도 없이 백토를 채굴하는 중역(重役)을 홀로 떠맡고 있는데, 또 운납하는 큰 역사(役事)를 더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소를 사옹원(司饔院)에 내렸다.
8월 24일 계사
권상유(權尙游)를 부제학(副提學)으로, 김상원(金相元)을 부교리(副校理)로, 홍중휴(洪重休)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황해도 관찰사 이의현(李宜顯)이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면유(面諭)하였다. 이의현이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수령을 가려 보낼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25일 갑오
평양부(平壤府)에서 고모(姑母)를 죽인 죄인 옥유화(玉榴花)를 잡아 올려 삼성 추국(三省推鞫)을 베풀었다.
정찬선(鄭纘先)을 교리(校理)로, 이병상(李秉常)을 부교리(副校理)로, 홍만우(洪萬遇)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강원도 원주 등 여덟 고을에 서리가 내렸다.
8월 27일 병신
임금이 이조 판서 이건명(李健命)이 인혐(引嫌)하고 나오지 않는다 하여 특교(特敎)를 내려 재촉하니, 이건명이 명을 받들고 정사(政事)를 열어 민진후(閔鎭厚)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이택(李澤)을 응교(應敎)로, 한중희(韓重熙)를 집의(執義)로, 홍중휴(洪重休)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장령(掌令) 최경식(崔慶湜)이 생각한 바를 진소(陳疏)하기를,
"양남(兩南)과 기호(畿湖)의 연해(沿海)와 야읍(野邑)의 건조(乾燥)한 곳은 파종(播種)할 시기가 늦어지니, 감사(監司)로 하여금 재해(災害)를 입은 고을을 따로 추리고, 수령(守令)에게 엄중히 신칙해서 직접 실태를 조사하여 전재(全災)를 입은 곳을 정밀히 추려 그 조세(租稅)를 감해 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목화(木花)는 참혹하게 재해를 입은 곳이 영남보다 심한 곳이 없으니,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더욱 심한 곳을 가려 참작하여 급재(給災)113) 하게 한다면 곤궁한 백성의 소망을 거의 위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가(朝家)에서 언제나 백골 징포(白骨徵布)114) 를 염려하여 여러 차례 변통을 논의했는데, 우리 나라 신역(身役)의 괴롭고 무거운 것으로 군포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각 군문(軍門)과 각 아문(衙門)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징포(徵布)의 등류(等類)를 1석(石)마다 1필로 법식을 정하고, 부족한 경비(經費)의 수를 주전(鑄錢)하여 그 수를 채우게 한다면, 비록 영구히 법식으로 정할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대전(大典)》 산송조(山訟條)에 일체 품수(品數)로 그 보수(步數)가 정해져 있었는데, 병진년115) 수교(受敎)에 좌우 용호(左右龍虎)의 수목을 섬기는 곳에는 타인의 입장(入葬)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조항(條項)이 있고나서부터 쟁단(爭端)이 사방에서 일어나 금지할 길이 없습니다. 신은 사부가(士夫家)에서 단독으로 금양(禁養)116) 하는 곳은 병진년 수교에 의하여 좌우 용호(左右龍虎)로 한정을 삼게 하고, 그 나머지는 한결같이 《대전》의 보수(步數)의 법에 따라 용호의 한정에 구애되지 말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소를 묘당(廟堂)에 내렸다. 그 후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경연(經筵)에서 복주(覆奏)하기를,
"부세(賦稅)를 해마다 감봉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목화(木花)의 급재(給災)는 으레 허실을 서로 속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군문(軍門)에서 주전(鑄錢)하는 일은 처음 그 문을 여는 것은 옳지 않으며, 《대전》과 수교(受敎)는 자주 변경할 수 없으니, 모두 그대로 두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지평(持評) 김재로(金在魯)가 논사소(論事疏)를 올렸다. 그 첫머리에 김만주(金萬胄)가 고관(考官)에 합당하지 않음을 들어 말하기를,
"오늘날 선비의 풍습이 아름답지 아니하여 장옥(場屋)에 자주 분란이 일어나니, 고관을 더욱 각별히 선택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꺼리는 마음을 갖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이를 등한히 여겨 구차하게 충당해 내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해조(該曹)에 신칙하여 앞으로 대소과(大小科)의 초시(初試)·회시(會試) 시관(試官)을 모두 각별히 가려서 의망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당하관(堂下官)이 교자(轎子)를 타는 것은 조가(朝家)에서 여러 차례 금령(禁令)을 내렸습니다. 더욱이 헌부(憲府)의 직책은 다른 관사(官司)와 다르고 역마(驛馬)는 사마(私馬)와 다른데, 장령(掌令) 최경식(崔慶湜)은 소명(召命)을 받들고 서울로 올라올 때 조복(朝服) 차림으로 역마 위에서 교자를 타고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신은 그것을 목격하고 마음속으로 놀라와하면서 반드시 자처(自處)하는 거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동정(動靜)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명백하게 책벌을 보이시고 거듭 금령을 내리소서. 필선(弼善) 이상열(李尙說)은 지난번 소패(召牌)를 받들고 숙배 사례(肅拜謝禮)하던 날 술에 만취된 채 인사 불성이 되어 동서로 비틀거리는 것을 좌우에서 부축하여 겨우 기복(起伏)하였으나 배읍(拜揖)도 이루지 못하는지라, 옆에서 보고 입을 가리며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특별히 파직하여 조정에 경계가 되게 하소서. 금직(禁直)117) 에서 경출(徑出)118) 하는 자는 곧장 금추(禁推)119) 를 받도록 본래부터 수교(受敎)가 있는데, 혹 친병(親病)·신병(身病) 및 편안하기 어려운 정세(情勢)가 있는 경우에는 정원(政院)에서 ‘연유없이 경출하는 경우와는 다르다.’면서 말을 얽어 진계(陳啓)하여 다만 추고(推考)만 하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또한 근래에 한 예가 되어 경출하는 자가 잇따랐으나 금추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작년에 승선(承宣)의 진달로 인하여 신병을 핑계로 경출하는 자는 다시 말을 얽어 두둔하지 말고 곧장 금추를 받는 일로 새로 법식을 정했는데, 그 후 금직했던 신하로서 신병을 핑계로 경출한 자가 너댓 명이란 많은 수에 이르렀음에도 옛날처럼 말을 얽어 두둔하고 한 사람도 금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모든 일이 법을 세운지 조금만 오래되면 매양 해이(解弛)해졌지만, 어찌 이 일처럼 새로 법식을 정하고 곧바로 폐지하여 시행하지 않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이것을 정원(政院)에 신칙하소서.
관절(關節)120) 의 폐단을 전후로 금단한 것이 지극히 준엄할 뿐만이 아니었는데도, 나라에 기강(紀綱)이 없고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여 한갓 받들어 시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점차 범람한 데에 이르고 있습니다. 더욱이 근년 이래로 사대부의 풍습이 크게 무너져 재상(宰相)과 명류(名流)들이 또한 외방에 갖가지 물품을 청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무수(武帥)와 무재(武宰)에게 사람을 보내어 걸태질을 하는 자도 간혹 있다고 합니다, 저 무수와 무재들이 비록 감히 어기지는 못하나 그 마음속으로는 반드시 업신여길 것이니, 조정(朝廷)의 체모가 어떻게 준엄해질 수 있겠습니까? 인묘조(仁廟朝) 때는 김시양(金時讓)의 말을 채택하여 관절을 엄금하고 범(犯)한 자는 일죄(一罪)121) 로 논하였으나, 다만 율명(律名)이 너무 무거웠으므로 70년 사이에 한 사람도 법에 저촉된 자가 없었습니다. 신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한갓 법만 만들어 놓고 시행하지 않을 바엔 차라리 묘당(廟堂)에 순문(詢問)하여 그 율(律)을 약간 낮추어 시행할 수 있게 한 연후에 다시 따로 준엄하게 신칙하되, 만약 다시 범하는 자가 있다면 드러나는 대로 단연코 용서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또한 반드시 도움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김만주가 고관(考官)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을 자못 지나친 데 관계되나, 가려서 의망(擬望)하라는 말은 좋으니, 해조(該曹)에 신칙하겠다. 최경식이 금령(禁令)을 어기고 교자(轎子)를 탄 것은 진실로 온당하지 않으니 특별히 파직하고 다시 금령을 신칙할 것이며, 이상열의 일은 자못 해괴하니 또한 파직하라. 금직(禁直)한 신하가 신병을 핑계로 경출(徑出)할 경우 정원에서 다시 말을 얽어 진계(陳啓)하지 말고 곧장 금추(禁推)를 시행함이 마땅하다. 소(疏) 말단의 일은 별달리 준엄하게 신칙하지 않을 수 없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8월 28일 정유
이홍(李宖)을 장령(掌令)으로, 조명봉(趙鳴鳳)을 필선(弼善)으로, 정식(鄭栻)을 수찬(修撰)으로, 신사철(申思喆)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8월 29일 무술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창집이 김재로(金在魯)의 소 가운데 관절(關節)의 폐단에 대하여 복주(覆奏)하기를,
"이제 만약 그 법을 약간 가볍게 해서 다시 범하는 자가 없다면 좋겠지만, 끝내 실질적인 효과가 없고 다만 그 법만 바꾼 결과가 된다면 그대로 두고 따로 신칙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이후로 만약 금령을 범하는 자가 있다면 대관(臺官)으로 하여금 듣는 대로 논핵(論劾)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관절을 일죄(一罪)로 논한 것을 본시 옛날부터 전해오는 법이니, 경솔하게 변경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범한 바에 또한 경중(輕重)이 있는데, 만약 그 일이 관절에 관련된다 하여 모두 일죄로 처단(處斷)한다면, 대간(臺諫)들이 비록 들은 바가 있다 하더라도 차마 발론(發論)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옛법은 고치지 말고 일이 발각 된 뒤 그 경중을 참작하여 일죄에 해당하는 자는 일죄로 처단하고 정범(情犯)이 약간 가벼운 자는 또한 약간 감형(減刑)함이 마땅할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으로 법식을 정함이 옳을 것입니다."
하고, 김창집이 말하기를,
"정관(政官)과 형관(刑官) 및 법부(法府)에서 금란(禁亂)하는데도 모두 사사로운 청촉(請囑)이 있습니다. 정관에게 청촉하는 한 가지 일로써 말하더라도 만약 적절하지 않은 사람을 잘못 천거하면 그 죄가 또한 중합니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대관(臺官)이 듣는 대로 논계(論啓)할 것이니, 성상께서 참작하여 처치하심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절의 폐단은 통렬히 금지하지 않을 수 없으니, 수교(受敎)는 고치지 말고 대관(臺官)이 듣는 대로 논책하라. 발각된 뒤에 무거운 자는 일죄로 처단하고 가벼운 자는 참작하여 처치함이 옳겠다."
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헌신(憲臣)이 소를 올려 금직(禁直)에서 경출(徑出)하는 사람은 곧장 금추(禁推)를 받도록 청했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군직(軍職)을 띠고 임의로 시골에 내려간 자도 또한 다름이 없으니, 일체 금추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저번에 대계(臺啓)에서 각 군문(軍門)의 장교(將校)는 이서(吏胥)나 시정(市井)의 무리로 차정(差定)하지 말 것을 청하였습니다. 도감(都監)의 지구(知彀)·기패(旗牌) 등 임직(任職)을 으레 항오(行伍)에서 승진시켜 정하고, 도감(都監)의 서리(書吏)로서 연한(年限)이 차고 일을 잘 아는 자는 항오(行伍)의 예에 의하여 승차(陞差)하는데, 이런 무리들은 오래 근무하여 연한이 차면 곧 모두 승천(陞遷)하므로 용잡(冗雜)함이 비길 데 없으니, 이와 같은 자들은 태거(汰去)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병조 판서(兵曹判書) 박권(朴權)이 말하기를,
"각 군문(軍門)에서 당초에 인재를 가리지 않고 구차하게 충차(充差)하였다가 개정(開政)에 임하여 과만(瓜滿)이 되면 본병(本兵)에서 예에 따라 승천(陞遷)시키니, 이는 일을 전담(專擔)시켜 오래 근무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군문(軍門)의 장교(將校)를 당초에 신중하게 가리지 않기 때문에 변장(邊將)에 적당한 인재를 많이 얻지 못합니다. 변장을 가리고자 한다면 먼저 장교를 가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지평(持平)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서(吏胥)로서 장교에 오른 자는 비록 일찍이 차정(差定)한 자라도 모두 태거(汰去)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이서로서 일찍이 변장을 지낸 자는 그대로 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태거하라."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고(故) 판서(判書) 이현석(李玄錫)이 일찍이 소를 올려 《명사(明史)》를 수찬(修撰)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역(工役)을 마치자마자 죽었습니다. 청컨대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찾아오게 하여 우선 1본(本)을 정사(淨寫)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언(正言) 이기익(李箕翊)이 앞서 논계(論啓)한 말을 아뢰었는데, 이유민(李裕民)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물으니, 김창집이 이유민의 명성(名聲)과 치적(治績)을 크게 추겨 말하고, 또 이르기를,
"신이 연경(燕京)에 들어갈 때 요동(遼東)에 이르러 호인(好人)의 말을 들었더니, 새로 부임(赴任)한 만윤(灣尹)122) 은 어진이라고 하였습니다. 서곤(西閫)에 발탁(拔擢)해 둔다면 또한 적국(敵國)이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김창집의 말을 따르고 대계(臺啓)는 윤허하지 않았다. 또 민진후의 진달로 인하여 2품(品) 이상을 치제(致祭)하되, 무관(武官)은 일찍이 곤수(閫帥)를 지낸 자에 한하고 잡직(雜職) 2품은 모두 치제를 허락하지 않았다. 【가선(嘉善)으로서 수사(水使)가 된 자는 또한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3책 55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38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군정(軍政) / 인사-임면(任免) / 출판-서책(書冊)
[註 122] 만윤(灣尹) : 의주 부윤(義州府尹).
강원도 감시(監試) 초시(初試)의 종장(終場)에 유생들이 소란을 일으켜 파장(罷場)하였다. 대개 영서(嶺西)123) 의 유생 40여 인이 다른 도(道)의 유생으로서 함부로 들어온 자가 있다 하여 영문(營門) 뜰에 돌입(突入)해 사관(四館)124) 의 관원과 감사(監司)에게 욕설을 퍼부었는데, 감사 윤성준(尹星駿)이 그 수창(首倡)한 자 황호(黃灝)·황세명(黃世命) 두 사람은 사핵(査覈)하여 잡아 가두었다가 곧 석방하고 효유(曉諭)하여 보냈으나, 종장에 이르러 또 다시 소란을 일으켜 마침내 파장(罷場)하기에 이르렀다. 윤성준이 이로써 소를 올려 진달하니, 임금이 수창인(首倡人)을 빨리 조사하여 치죄(治罪)하라고 명하였다. 그 후 간원(諫院)에서 논계(論啓)하여 윤성준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할 것을 청하고, 또 황호과 황세명은 우선 잡아 가두고 별달리 무거운 추구(推究)을 가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폐단을 막게 할 것을 청하였다. 또 녹명관(錄名官)125) 이 숨기고 두호하며 함부로 들어온 자를 즉시 적발하지 아니하여 선비들의 격노(激怒)를 초래하였다 하여 나문(拿問)하여 치죄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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