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기해
유성(流星)이 오거성(五車星) 위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다.
근시(近侍)를 보내어 외방에 있는 대신(大臣)을 부르고 기구 재신(耆舊宰臣)에게 별유(別諭)를 내려 모두 시연(侍宴)의 반열(班列)에 나오라고 명하였으니, 경인년126) 의 예(例)를 따른 것이다.
9월 3일 신축
고모(姑母)를 죽인 죄인 옥유화(玉榴花)를 네 차례 형문(刑問)했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국청(鞫廳)에서 형조(刑曹)로 옮길 것을 계청했는데, 옥정(獄情)에 의문이 많기 때문이었다.
사관(史官)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지완(尹趾完)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최석정(崔錫鼎)이 혹은 노병(老病)으로, 혹은 정세 때문에 시연(侍宴)에 나오지 못한다는 뜻을 계문(啓聞)하였다.
한이원(韓以原)을 장령(掌令)으로, 이대성(李大成)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한세량(韓世良)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9월 4일 임인
응교(應敎) 이택(李澤)이 사간(司諫) 홍중휴(洪重休)의 소 가운데 【유혁연(柳赫然) 등에 대한 논계(論啓)를 거듭 발론(發論)한 일이다.】 침척(侵斥)한 말로 인하여 소를 올려 변명하기를,
"홍중휴가 유혁연 등이 죄를 입은 전말(顚末)에 대하여 자세히 듣고 본 바가 없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앞장서서 편을 들었으니, 이것이 당파를 두둔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공의(公議)를 두려워하지 않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는 등의 지목(指目)에 이르러서는 실로 또한 홍중휴의 자초지화(自招之禍)가 될 뿐입니다. 신이 도로 거두라는 계사를 거듭 발론하게 된 것은 다만 삼가 막고 대간(臺諫)의 체모를 보존하고자 한 것인데, 간악함을 신구(伸救)하는 의논이 갑자기 언관(言官)에게서 나왔으니, 세도(世道)가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소장 말미에 또 정원(政院)에 관한 일을 논하였다. 대개 며칠 전 이택이 홍중휴의 소로 인하여 궐문에 나아가 소를 올렸는데, 하리(下吏)가 처음에는 입계(入啓)하였다고 와서 전하므로 이택이 곧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조금 뒤에 다시 받지 않는다고 와서 전하면서 도로 들어오라고 하였으나 이택이 들어가지 않았고, 궐문은 이미 닫혔으므로 정원에서 추고(推考)하기를 계청하자, 이택이 이로써 끝에 덧붙여 진달한 것이었다. 임금이 답하기를,
"해를 넘긴 뒤에도 헐뜯기를 마지 않으니, 유달리 지나친 데 관련된다."
하였다.
9월 5일 계묘
전(前) 참봉(參奉) 이한겸(李漢謙)이 그 아비 고(故) 참찬(參贊) 이현석(李玄錫)이 찬(撰)한 《명사(明史)》 32책을 바치고 궐문에 나아가 소를 올려 《사기(史記)》를 찬수(纂修)한 지의(指意)와 초고(草藁)를 엮은 전말(顚末)에 대하여 대략 진달하기를,
"복수(復讎)와 토적(討賊)의 의(義)가 중대하고 존양 양이(尊王攘夷)의 법이 엄숙한데, 소율(素律)127) 이 시행됨이 없고 빈 법문을 빌려 뜻을 보였으니, 대개 성현(聖賢)이 《사기(史記)》를 엮은 뜻과 그 근고(勤苦)는 슬퍼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신의 아비는 여러 해에 걸쳐 연구하고 생각하여 《명사(明史)》를 편찬(編撰)하였으니, 대저 그 구구한 본의는 황조(皇朝)의 유택(遺澤)이 이미 민몰(泯沒)된 것이 슬프고 오늘날 대의(大義)를 펴지 못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삼가 우리 성상(聖上)께서 지으신 융당시(隆堂詩)를 보게 되자, 성의(聖意)를 표앙(表揚)하고 신유(宸猷)를 우러러 칭송하려 했으니, 이것은 그 평일에 쌓아왔던 소박한 뜻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경진년128) 봄 초본(草本)이 겨우 이루어지자 선신(先臣)이 갑자기 심한 병에 걸려 여러 해 동안 병이 갈수록 더욱 깊어졌습니다. 계미년129) 에 이르러 가족들에게 울면서 말하기를, ‘명년의 간지(干支)는 다시 갑신년130) 을 잇게 되는데. 이는 실로 숭정(崇禎) 이후 1주갑(周甲)이 된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성상의 마음도 또한 이 해에 감상(感傷)이 더할 것이요, 지사(知士)의 애통함도 더욱 깊으리라. 내 비록 병이 깊으나 정신을 가다듬어 이 서적(書籍)을 정리 완성하여 오는 갑신년 3월 안에 올리게 된다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책상자를 열고 병을 무릅쓰고 고증(考證)하다가 산정(刪整)을 미처 마치지 못하고 흉화(凶禍)가 갑자기 닥쳐 선신의 여러 해 동안 근고(勤苦)한 뜻을 성세(聖世)에 나타낼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하게도 오늘날 성명(聖明)의 권애(眷愛)가 오히려 이를 기억하시고 남긴 서적을 거두어 선신이 평일에 쌓아왔던 뜻을 성감(聖鑑) 앞에 거의 밝게 드러내게 되었으니, 10년 동안 뜻을 품어 왔던 영혼도 또한 장차 저 구천(九泉)에서 감읍(感泣)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그대의 소를 살펴보고 이어서 책자(冊子)도 열람하니, 선경(先卿)의 근고(勤苦)한 공력(功力)을 볼 수 있다."
하였다.
9월 6일 갑진
전라도 무장현(茂長縣)에 해일(海溢)이 일어났다.
9월 9일 정미
일전에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대성(李大成)이 사직소(辭職疏)를 올려 말하기를,
"참의(參議)의 전망(前望) 가운데 들어 있는 사람의 수효가 또한 많았는데, 혹은 외임(外任)을 핑계하고 혹은 연좌된 바가 있다고 칭탁하였지만, 유봉휘(柳鳳輝)에 이르러서는 처지(處地)와 인망(人望)이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는데도 공연히 빼버렸습니다. 만약 당초 의망(擬望)한 것을 차서를 넘어 새로 통망(通望)한 것이라고 허물한다면, 근래 이 규례를 답습해 행하고도 일찍이 의심하거나 중난(重難)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유독 유봉휘에게만 이처럼 고집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요. 지금 삼사(三司)에 한 사람도 다른 당색(黨色)을 가진 사람이 없고, 간혹 책임이나 면하기 위해 의망하는 것은 반드시 행공(行公)하지 않을 자 한두 사람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무단히 금고(禁錮)해 막은 무리를 신이 만약 소통(疏通)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시끄러운 사단이 일어날 것이요, 만약 머리를 숙이고 순종하고자 한다면 이는 단지 가외(加外)의 관원이 될 뿐입니다."
하였는데, 판서(判書) 이건명(李健命)·참판(參判) 이만성(李晩成)이 모두 이로 인해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다. 이만성의 소에 대략 이르기를,
"참의(參議)를 차출(差出)할 때 전망(前望) 가운데서 의망할 만한 자는 혹은 도신(道臣)의 포문(褒聞)으로 인하여 바야흐로 승자(陞資)를 복주(覆奏)하였고, 혹 해읍(海邑)의 수재(守宰)로 부임(赴任)하여 1순(旬)도 차지 않았으므로 의망을 청할 수 없었던 것은 사세가 곧 그러했습니다. 유봉휘는 지난해 대소(臺疏)에서 명분과 의리를 원수로 삼고 수치(羞耻)도 알지 못한다고 이미 논핵한 바 있어 그 후 전조(銓曹)의 자리에 한 번도 의망하지 않았으니, 이제 다시 통망(通望)함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삼사(三司)에서 통색(通塞)131) 할 즈음에 일에 연루(連累)되어 벼슬길이 막힌 자를 제외(除外)하고는 일찍이 참착(參錯)하여 의망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알지 못하겠습니만, 허다히 금고(禁錮)되어 막혀 있는 자란 과연 누구입니까. 연고가 있어 벼슬길이 막히게 되면 ‘무단(無端)하다.’ 하고 통융(通融)하여 의망하면 ‘책임만 면하려 한다.’고 하니, 오늘날 전조(銓曹)의 처지가 또한 어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건명의 소비(疏批)에 ‘이대성의 소어(疏語)는 자못 화평한 마음이 부족하다.’고 하니, 이대성이 이로 인해 허물이 있다 하여 물러갔으며, 이건명과 이만성도 또한 여러 차례 사직하고 나오지 않았다. 임금이 이건명의 재소(再疏)에 대한 비답에 이르기를,
"이대성은 출사(出仕)한 뒤 조용히 상의하여 확정한들 무슨 불가할 것이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곧장 의심과 노여움을 가하였으므로 이것을 내가 자못 화평한 마음이 부족하다고 한 것이다."
하고, 인하여 속히 나와 행공(行公)하라고 명하였다.
9월 10일 무신
유성(流星)이 벽성(壁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진규(金鎭圭)가 본부(本府)의 형편과 이해(利害)를 조열(條列)하여 진달하여 별단(別單) 5폭(幅)을 올렸으니, 첫째는 ‘수비(守備)’, 둘째는 ‘군제(軍制)’, 세째는 ‘기계(器械)’, 네째는 ‘양향(糧餉)’, 다섯째는 ‘풍습(風習)’이었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본부(本府)는 강과 바다가 에워싸 험고(險固)한 요새(要塞)를 이루었고, 한수(漢水)와 임진강(臨津江)이 모여들어 기보(畿輔)를 제어(制御)했으며, 5도(道)의 뱃길의 요충(要衝)에 자리잡아 서남방을 호령하니, 왕씨(王氏)가 이곳에 들어와 거의 40년 동안 사직(社稷)을 보존한 것이 어찌 그 연유가 없겠습니까? 정축년132) 의 난(難)은 그 책임이 사람들의 계모(計謀)가 잘못된 데 있었고 지리(地利)가 믿지 못할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수비(守備)에 그 편의(便宜)를 잃고 군제(軍制)에 정리되지 않은 것이 많으며, 군량은 점점 감소해 줄어들고 병기(兵器)는 쓸 만한 것이 적은데다, 토민(土民)의 풍습이 악한 데 이르러서는 위급할 때 힘을 얻기를 바라기는 어려울 듯하므로, 신이 감히 말씀을 올리는 바입니다. 삼가 장계(狀啓)의 별단(別單)의 규례를 본떠 별폭(別幅)에 써서 예람(睿覽)하시기에 편리하도록 하였으니, 성상께서는 또한 깊이 유의(留意)하시고 그 이해(利害)를 모두 궁구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우선 어좌(御座) 곁에 두시고 조용히 열람하신 후에 천천히 묘당(廟堂)에 내리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인하여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집의(執義) 한중희(韓重熙)가 논사소(論事疏)를 올려 첫머리에 말하기를,
"북병사(北秉使) 막좌(幕佐)인 평사(評事)는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여 회피합니다. 저번에 이병상(李兵常)은 형제가 없는 독신으로서 병중에 있는 어버이를 멀리 떠나는 것은 사정(私情)이 절박하다 하여 체직을 허락하였으나, 그것이 타당한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번에 송성명(宋成明)이 여러 달을 두고 병을 이유로 정사(呈辭)하고 부임(赴任)하지 않으려 하자, 그대로 파직하여 그 소원을 꼭 맞춰 들어주고야 말았으니,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해짐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송성명의 평사의 직임을 파직시키지 마셔서 국체(國體)를 존엄(尊嚴)하게 하소서."
하고, 말단에 말하기를,
"사간(司諫) 홍중휴(洪重休)와 이택(李澤)이 더불어 다툰 시비는 우선 버려두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관(臺官)이 남에게 배척을 당하면 대각(臺閣)에 나아가 스스로 그 전말(顚末)을 논열(論列)하는 것이 규례인데, 한 번 상소하고 두 번 상소하면서도 끝내 인피(引避)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대체(臺體)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성명에 대한 일은 소장의 말이 진실로 옳다, 평사가 비록 싫어하여 회피하는 직임이라 하지만, 국가에 조금이라도 기강이 있다면 어찌 감히 끝내 부임하지 않고 이와 같이 방자할 수 있겠느냐? 참으로 지극히 해괴하니, 나문(拿問)하여 처치하도록 하라. 대신(臺臣)이 즉시 인피(引避)하지 않는 것은 조가(朝家)에서 경책(警責)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9월 11일 기유
헌신(憲臣)이 논하기를,
"김천 군수(金川郡守) 윤회(尹會)는 그 이름이 백간(白簡)133) 에 올라 나문(拿問)까지 당했으나, 곧 정침(停寢)되었음을 핑계로 탄핵을 무릅쓰고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지사(地師) 몇 사람을 관아(官衙)에다 데려다 두기도 하고, 뇌물은 공공연하게 행해지며 아전들이 따라서 간사한 짓을 하므로, 백성이 그 해를 입어 원망이 길에 가득합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일전에 사도(私屠)의 금령(禁令)을 범(犯)한 사람은 속전(贖錢)을 징수하지 말고 가장(家長)을 정배(定配)하는 일을 이미 정탈(定奪)134) 하였는데, 형조에서는 요사이 잡혀온 자들에게 여전히 속전을 받는다고 합니다. 법을 세운 초두에 이처럼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니, 경책(警責)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였는데, 다만 말단의 일만 윤허하였다. 【윤회(尹會)의 일은 세 번 아뢰자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3책 55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40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사법-법제(法制) / 농업-축산(畜産)
[註 133] 백간(白簡) : 탄핵(彈劾)하는 내용을 담은 주장(奏章)을 말함.[註 134] 정탈(定奪) : 임금이 재결함.
송상기(宋相琦)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정식(鄭栻)을 교리(校理)로, 신심(申鐔)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최석정(崔錫鼎)이 반유(泮儒) 황상로(黃尙老) 등의 소로 인하여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년 봄 유상(儒相)135) 이 작고하자 일가(一家)의 소년(少年)이 뇌문(誄文) 3본(本)을 가지고 와서 보이면서 재정(裁定)을 가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신이 받아 자세히 보았더니, 문자(文字)가 지리하고 산만하였으며 말에 간혹 하자(瑕疵)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뜻대로 내키는 대로 산삭(刪削)하고 이어 윤색(潤色)하였는데 자구(字句)의 첨입(添入)도 또한 많았으니, 말을 전하는 자들이 신이 대작(代作)했다고 하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 글의 몇 구절은 이미 예람(睿覽)을 거쳤으니, 반소(泮疏)의 말을 얽어 만든 뜻은 성감(聖鑑)이 이미 간파(看破)하셨을 것입니다. 성조(聖祖)를 무함했다는 것이야말로 이 얼마나 망극(罔極)한 말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인신(人臣)이 되어 문득 스스로 떠들썩하게 숱한 말을 해대었으니, 이는 유달리 분의(分義)로 보아 감히 입 밖에 낼 바가 아닌 것입니다. 또 들으니 반소(泮疏)가 재차 나오고 대계(臺啓)가 이어 일어났다 하므로, 도리가 마땅히 조용히 물론(物論)을 기다려야 할 것이니, 한결같이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외람되게도 불러 위유(慰諭)하라는 성지(聖旨)를 입었으니, 감격하고 황송함이 절로 평일의 갑절이나 됩니다. 오직 받은 죄명은 신인(神人)이 용납하지 못할 바이며, 왕법(王法)에 있어 반드시 죽여야 할 바이니, 만약 추호라도 사람들의 말과 비슷한 점이 있다면 국가에서 드러나게 형벌을 가함이 마땅할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또한 억울한 무함을 밝게 씻어 평인(平人)에 낄 수 있도록 해 주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만약 성상(聖上)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통촉해 주시는 은혜를 입는다면, 비록 죽는 날이라도 오히려 살아 있는 해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기를,
"지적한 몇 구절의 말은 내가 이미 보았는데, 어찌 여러 유생들의 말한 바와 비슷함이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끝내 윤유(允兪)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아! 성조(聖祖)를 무함함은 인신(人臣)의 지극한 죄악이니, 비록 미관(微官)·서료(庶僚)라 할지라도 이런 망극한 말을 억지로 가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대신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대신의 무함을 입은 것은 억울하다고 할 만하니, 안심하고 대죄(待罪)하지 말라."
하였다.
충청도 덕산현(德山縣)에서 과부(寡婦)가 뱀 두 마리를 낳았다.
9월 12일 경술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한중희(韓重熙)가 송성명(宋成明)의 북평사(北評事)를 체차(遞差)하도록 허락한 것을 논핵할 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리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유(慰諭)하였다.
9월 13일 신해
태백(太白)이 사지(巳地)에 보였고 그 후에 여러 차례 나타났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광좌(李光佐)가 성진(城津)의 방영(防營)을 혁파(革罷)하고 단천(端川)에 독진(獨鎭)을 설치하는 편의(便宜)에 대해 장계(狀啓)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진진(城津鎭)은 주먹만한 조그만 작은 산에 성은 마치 말[斗]과 같아 그 자리가 좁고 거민(居民)이 적으니, 반드시 길주(吉州)와 더불어 힘을 합한 연후에야 방수(防守)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인데, 아문(衙門)의 모양과 관원의 지망(地望)이 총괄하여 제어(制御)하는 길주의 형세에 도저히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대소(大小)를 바꾸어 설치하였으니, 비단 통솔과 탄압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질시하고 서로 미워하여 일마다 서로 엇갈리니, 수비(守備)의 기구(器具)가 더욱 두서(頭緖)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천령(磨天嶺) 일대(一帶)에는 길주 지방으로부터 단천(端川)의 경계로 넘어가는 데 무릇 아흡 가지의 길이 있는데, 가장 동쪽의 것은 응봉령(鷹峰嶺)으로 지금은 막혀버렸지만 옛날에는 관로(官路)였습니다. 그 다음은 갈판령(乫板嶺)으로 곧 중대로(中大路)이고, 그 다음은 판막령(板幕嶺)·판질령(板叱嶺)으로 한 길이나 갈래가 져 있습니다. 그 다음은 안미령(眼美嶺)·사각령(蛇角嶺)으로 또한 한 길이나 갈래가 져 있고, 그 다음은 마천령(磨天嶺)으로 곧 대로(大路)가 되는 데 가장 서쪽 해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진(城津)으로부터 지름길로 마곡(磨谷) 아래로 나오는 것을 우지령(牛指嶺)이라 이르고, 바다를 따라 곧장 단천(端川)으로 달리는 것을 사기령(沙器嶺)이라 이릅니다. 위급함을 당하면 대병(大兵)이 비록 마천령에 있더라도 위아래 아홉 가닥 길목을 모두 군병을 나누어 파수(把守)하여야 하는데, 성지의 지형과 사세(事勢)로는 결코 여러 길목을 총괄(總括)할 수 없을 것이니, 방영(防營)을 설치하는 것은 더욱 이로울 바가 없습니다. 이제 만약 성진의 방영을 혁파한다면 길주 목사로 방어사(防禦使)를 겸임시키고, 성진에는 첨사(僉使)를 지극히 잘 선택하여 길주의 중군(中軍)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진에 성(城)을 수축(修築)하고 군량을 적치(積置)하는 것과 여러 길목을 나누어 파수(把守)하는 일들을 주(州)와 진(鎭)으로 하여금 힘을 합하고 계획을 서로 알리게 하여 다시는 서로 엇갈리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단천의 경우는 독진(獨鎭)을 설치하여 온 고을의 남녀를 모두 군병으로 삼고, 또 부사(府使)로 승격(陞格)시켜 수장(守將)을 겸임하게 하되, 지극히 잘 선택하여 차송(差送)하게 하소서. 그리고 길주와 단천으로 하여금 안팎에서 힘을 합하여 함께 영애(嶺扼)를 지키도록 하여야 할 것인데, 성진은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회피하여 비록 지극히 잘 선택하라고 하여도 매양 빈말로 돌아가곤 하니, 이제 만약 당상(堂上)의 자리로 승급시켜 훈련원 정(訓鍊院正) 및 수석 부정(副正)으로서 오랫동안 근무한 자를 차송(差送)하는 것으로 영구히 법식을 삼아 시행하게 한다면, 꼭 잘 선택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잘 선택될 것입니다. 윤각(尹慤)은 단천의 4보(堡)를 갑산(甲山)에 소속시키는 것을 불편하다며 단천에 전속시키고자 하는데, 이것은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천령(磨天嶺)이 비록 중요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변경(邊境)에서 대여섯 곳의 대진(大鎭)을 거쳐 6, 7일이 걸려야 비로소 당도하는데, 갑산의 경우는 서쪽은 압록강 상류와 지척의 거리에 있고, 동쪽은 허항령(虛項嶺)으로부터 저들의 지경(地境)과 통하여 한 군데도 가려진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땅은 넓지만 사람은 드물고 군병이 적으니, 만약 사변(事變)이 있을 경우 적(敵)을 방어할 길이 없는데, 4보(堡)가 한쪽편으로 갑산과 서로 접하고 있는지라 한 번 급한 경보(警報)가 있으면 자연 연달아 원조할 수가 없으니, 결코 이동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천에 비록 독진(獨鎭)을 설치하더라도 4보는 갑산에 소속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묘당(廟堂)에서 그대로 따라 성진의 방영(防營)을 혁파하고 길주 목사로 하여금 방어사(防禦使)를 겸임하게 하였다. 그러나 단천에 독진(獨鎭)을 설치하는 일은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9월 14일 임자
황귀하(黃龜河)를 지평(持評)으로, 김동필(金東弼)을 문학(文學)으로, 신사철(申思喆)을 교리(校理)로, 홍석보(洪錫輔)를 수찬(修撰)으로, 이택(李澤)을 응교(應敎) 겸필선(兼弼善)으로 삼았다.
9월 15일 계축
찬선(贊善) 권상하(權尙夏)가 병 때문에 시연(侍宴)의 반열에 나아가지 못한다며 소를 올려 인죄(引罪)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9월 16일 갑인
남도규(南道揆)를 사간(司諫)으로, 이병상(李秉常)을 겸사서(兼司書)로 삼았다.
평안 감사(平安監司)가 장보(狀報)하기를,
"이산(理山)의 강변(江邊)에 청인(淸人)이 무단(無端)히 넘어와 파수군(把守軍)을 잡아갔는데, 군수(郡守) 신명식(申命式)은 숨긴 채 보고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죄상을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19일 정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진연례(進宴禮)를 거행하였다. 왕세자가 제1작(第一爵)을 올리니, 음악은 여민락만(與民樂慢)을 연주하였고,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제2작을 올리니 음악은 제1작과 같았다. 왕세자 이하 머리를 조아리고 산호(山呼)하니, 백관(百官)이 꽃을 뿌렸다.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이 제3작을 올리니 음악은 오운개서조곡(五雲開瑞朝曲)을 연주하였고, 무동(舞童)이 들어와 초무(初舞)의 춤을 추었다. 임금이 비로소 술을 하사하니 왕세자 이하 자리에서 떠나 무릎을 꿇고 마셨으며, 탕(湯)을 올리자 음악은 청평곡(淸平曲)을 연주하였다. 연령군(延齡君) 이훤(李昍)이 제4작을 올리니 음악은 정읍만기(井邑慢機)를 연주하였고 무동이 다시 들어와 아박(牙拍)의 춤을 추었으며, 탕을 올리자 음악은 환환곡(桓桓曲)을 연주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가 제5작을 올리자 음악은 보허자(步虛子)를 연주하였고 무동이 들어와 향발(響鈸)의 춤을 추었으며, 탕을 올리자 음악은 하운봉(夏雲峰)을 연주하였다. 회원군(檜原君) 이윤(李倫)이 제6작을 올리자 음악은 여민락만(與民樂慢)을 연주하였고 무동이 들어와 무고(舞鼓)의 춤을 추었으며, 탕을 올리자 음악은 낙양춘(洛陽春)을 연주하였다.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제7작을 올리니 음악은 보허자(步虛子)를 연주하였고, 무동이 들어와 광수(廣袖)의 춤을 추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문무 종친 백관(文武宗親百官)에게 술을 하사하고 탕이 나온 후에 악(樂)을 그치는 것이 본래 예절(禮節)인데, 이제 그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먼저 악을 그쳤으니, 자못 조용한 기상(氣象)이 없다. 제7작부터는 비로소 예(禮)가 끝나기를 기다려 악을 그치도록 하라. 이것이 온당하다."
하였다. 부원군(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이 제8작을 올리자 음악은 여민락을 연주하였고 무동이 들어와 향발(響鈸)의 춤을 추었으며, 탕을 올리자 음악은 정동방지곡(靖東方之曲)을 연주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구(趙泰耉)가 제9작을 올리자 음악은 보허자를 연주하고 무동이 들어와 광수(廣袖)의 춤을 추었다. 소선(小膳)을 물리고 대선(大膳)을 올리자 음악은 태평년지곡(太平年之曲)을 연주하였고 이어 여민락을 연주하였으며, 처용무(處容舞)를 추고 나서 악을 거두었다. 시연(侍宴)에 입참(入參)한 자는 종친(宗親) 및 의빈(儀賓) 51원(員)과 대신(大臣)·재신(宰臣) 이하 1백 15원이며, 전(殿)에 오르지 않은 자가 55원이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나아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성대한 거조를 보고 지난날 애태우며 걱정하던 때의 정경을 생각한다면, 하루의 연례(宴禮)로 나라의 경사(慶事)를 어찌 만분의 일인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옛사람의 말에 ‘너무 지나치게 즐기기만 하지 말라.’ 하였고, 또한 ‘즐거움을 극진히 함은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대신(大臣)이 지금 바야흐로 입시(入侍)했으니 진계(陳啓)할 창언(昌言)136) 을 하순(下詢)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 등 여러 대신이 차례차례 삼가고 겸억(謙抑)하는 도리를 진계(陳啓)하니, 임금이 모두 가납하였다.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말하기를,
"소공(召公)은, ‘덕있는 자를 힘써 공경하는 것으로 불쌍한 백성에 정성을 다하는 근본을 삼고, 불쌍한 백성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 하늘에 장구한 운명을 비는 근본으로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근래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하니, 이제 만약 덕음(德音)을 널리 펴시어 1년의 신포(身布)에서 특별히 1필(疋)을 감하여 함께 즐거워하는 뜻을 보이신다면 어찌 거룩한 은덕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근본이 되는 말이다."
하였다. 좌의정 김창집 등 여러 대신이 모두 말하기를,
"각사(各司)의 경비가 모두 바닥이 났으니, 1필을 감하는 일은 아마도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고, 이이명이 말하기를,
"김우항은 주량(酒量)이 있습니다. 과음하여 취중(醉中)에 발언하였으니, 미처 헤아리지 못한 듯합니다."
하니, 김우항이 말하기를,
"각사의 경비가 비록 바닥이 났다고 하나, 만약 낭비를 절약하고 또 조가(朝家)에서도 별달리 주선한다면 비록 1필을 감하더라도 어찌 지탱하기 어려운 데 이르겠습니까? 지금 신이 비록 술에 취했으나 이는 평생에 품어왔던 것이므로 우러러 진달한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右相)의 말이 옳다. 그러나 헤아려 본 연후에 조용히 강론(講論)하여 다시 품정(稟定)함이 옳겠다."
하였다.
평안도 암행 어사 여필희(呂必禧)의 서계(書啓)를 본도(本道)에 내려 강변(江邊)의 군제(軍制)를 상의하여 확정하게 하였다. 여필희의 서계에 이르기를,
"강변의 군액(軍額)이 충실하지 아니함은 실로 고폐(痼弊)가 됩니다. 근래 조가(朝家)의 명령으로 인하여 상사(上司)에서 보인(保人)을 채우도록 급하게 요구하는데, 토병(土兵)의 자손들이 지극히 드물어 가까운 진(鎭)·부(府)의 백성들까지 점차 갈수록 침범하게 되므로, 사람들이 이 신역(身役)을 마치 사지(死地)에 들어가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아침에 겨우 군정(軍丁)에 편입(編入)시키면 저녁에는 이미 철가(撤家)하여 변방이 텅텅 비니, 실로 작은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변의 여섯 진보(鎭堡)에 모입(募入)된 사람들로 하여금 쌀 1석(石)을 바치게 하고,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워 영원히 토졸(土卒)의 역사(役事)를 침범하지 말도록 하되, 그 바친 쌀을 파수(把守)하는 군졸에게 분급(分給)하고, 또 양영(兩營)으로 하여금 상의해서 힘을 합해 면포(綿布) 10여 동(同)을 염출하여 매년 가을이 되면 1필씩 내주게 할 것입니다. 또 보인을 채우는 기한을 늦추어 혹 토병(土兵)의 자손(子孫)이나 혹 달리 얻은 한정(閑丁)으로 천천히 충정(充定)한다면 보인의 궐액(闕額)이 거의 다 채워질 날이 있을 것이고, 백성들의 심정도 모두 서로 다 편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였다. 여필희가 또 강변의 간사한 무리들이 호인(胡人)과 더불어 잠상(潛商)하는 폐단을 진달하고,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으로서 스스로 적발해 내는 자와 동류(同類) 가운데에서 자수(自首)하여 발고(發告)하거나 체포하는 자는 모두 면죄(免罪)를 허락하고, 만약 다른 일로 인하여 드러나는 자는 중형(重刑)으로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며, 또 체포하거나 발고하는 자는 상(賞)을 받는다는 명령을 내릴 것을 청하니, 묘당(廟堂)에서 시행을 허락하였다.
9월 20일 무오
유성(流星)이 패과성(敗苽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판부사(判府事) 조상우(趙相愚)가 질병으로 인하여 진연(進宴)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하여 차자(箚子)을 올려 인구(引咎)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유(慰諭)하였다.
9월 21일 기미
유성(流星)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조상건(趙尙健)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가 차자(箚子)를 올려 노령(老齡)을 칭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선영(先塋)을 성묘(省墓)하고 따뜻한 데로 가서 조섭(調攝)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천천히 봄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그 지극한 정을 펴도록 하라 하였다. 이여가 또 연달아 차자를 올려 간곡히 청하니, 임금이 힘써 만류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여러 대신(大臣)들이 진연(進宴)을 청한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므로, 굳게 거절하기 어려워서 애써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마음에 불안함은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시혜(施惠)하는 등의 일은 이미 시행한 전례가 있어 이미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어 생각하건대 오늘날 쌓여온 폐단으로 인족(隣族)137) 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우리 백성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먼저 이를 진념(軫念)함이 옳을 것이며, 만약 잘 변통한다면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없을 것이다. 호포(戶布)와 구전(口錢)138) 가운데에서 충분히 강구하고 처리해서 거꾸로 매달린 듯한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2일 경신
진연(進宴) 때 술잔을 올린 재신(宰臣) 및 진연청(進宴廳) 당상(堂上)·낭청(郞廳)과 여러 집사(執事)에게 차등 있게 상(賞)을 내렸다.
9월 24일 임술
토성(土星)이 태미원(太微垣) 우액문(右掖門) 안으로 들어갔다.
부사과(副司果) 김일경(金一鏡)이 소를 올려 구작시(九爵詩) 및 경덕(敬德)·함민(諴民) 두 잠(箴)을 올리니, 답하기를,
"올린 두 잠(箴)에 어찌 유의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예조에서 군신(君臣)의 복제(服制)에 대하여 외방(外方)에 있는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수의(收議)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지완(尹趾完)은 의논하기를,
"군신(君臣)의 복제(服制)에 대한 의논은 이미 주자(朱子)의 소(疏)에 나와 있습니다. 옛날 우리 인조(仁祖)의 대상(大喪) 때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이 또한 이로써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위에서 여러 신하에게 순문(詢問)하신 바 의논하는 자가 중난(重難)하게 여김이 많았으므로, 일이 드디어 정침(停寢)되었습니다. 기해년139) 에 이르러 대각(臺閣)에서 합계(合啓)한 데 대하여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항소(抗疏)가 있었고, 유신(儒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 또한 시행함이 옳다 하였는데, 대신(大臣) 문충공(文忠公) 이경석(李景奭) 등 당시의 명상(名相) 5, 6인이 모두 불편하다고 하였으므로 또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양조(兩朝)의 지난 일은 어찌 옛날과 지금의 사세가 다르고 구애되는 바 있어 시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오직 널리 순문하고 자세히 살펴 처리하소서."
하고, 행 대사헌(行大司憲) 권상하(權尙夏)는 의논하기를,
"《의례(儀禮)》 참최장(斬衰章)의 경(經)에는 ‘군(君)’이라 하였고, 전(傳)에는 ‘군(君)은 지존(至尊)이다.’라고 하였으며, 《예기(禮記)》에는 방상 삼년(方喪三年)이라 하고, 주소(注疏)에 ‘방(方)은 견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으니, 아비의 상례(喪禮)에 견주어서 임금의 상사(喪事)에 행한다고 이른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군신(君臣)의 복제(服制)에 대해 의논하기를, ‘참최 삼년(斬衰三年)은 아비를 위하고 임금을 위한 것이므로, 그 복제는 포관(布冠)과 포삼(布衫)에 최(衰)·벽령(辟領)·부판(負版)·엄임(掩袵)·포츤삼(布襯衫)·포관(布裙)·마요질(麻腰絰)·마수질(麻首絰)·마대(麻帶)·관구(菅屨)·죽장(竹杖)을 가했으니,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귀천(貴賤)으로 증손(增損)하는 바 있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아들이 아비에게 신하가 임금에게 그 상사(喪事)에 대한 예(禮)는 다름이 없었으니, 이는 만세(萬世)에 이르도록 통행(通行)되어 변역하지 않는 제도입니다. 주공(周公)이 앞에서 저술하고 주자(朱子)는 뒤에 의논했으니 일성(日星)과 같이 분명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데, 우리 나라에서 임금의 상사(喪事)에 대한 예(禮)는 이미 상복(喪服)도 아니요 또 공복(公服)도 아니니, 참으로 이른바 모전(茅纏)과 지과(紙裹)로서 모양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기해년140) 성조(聖祖)141) 의 상사(喪事) 때에 신의 스승 문정공 송준길·문정공 송시열이 주자(朱子)의 설(說)에 의하여 군신(君臣)이 함께 최복(衰服)을 입기로 청하였는데, 그 당시의 대신으로 극력 배척하는 자가 있어 드디어 시행되지 못하자, 선사(先師)가 일찍이 이를 크게 한스러워하였습니다. 이제 성상(聖上)께서 그릇된 제도를 그대로 따르는 것을 개연(慨然)해 하시고 옛 전례(典禮)를 회복하고자 하시니, 성학(聖學)의 고명(高明)하심과 성지(聖志)의 탁월하심에 진실로 우러러 찬탄(讚歎)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오직 원하건대 성상(聖上)께서 단연코 시행하여 만세(萬世)에 준행할 전례(典禮)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를,
"이 일은 주자(朱子)의 정론(定論)이 있어 원래 의심할 것이 없으니, 단연코 시행함이 옳다."
하였다. 당초에 임금이 경연(經筵)에 나아가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와 더불어 강론하다가 군신 복제장(君臣服制章)에 이르러 드디어 개연히 느낀 바가 있어 옛 전례(典禮)를 회복하고자 하여 여러 대신에게 수의(收議)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비로소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9월 25일 계해
정언(正言) 이기익(李箕翊)이 소를 올려 첫머리에 말하기를,
"며칠 전의 연례(宴禮)는 하늘이 순종(順從)하는 자를 도와 일기(日氣)가 온화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명을 맞이하는 기미입니다."
하고, 또 정자(程子)의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인접(引接)할 때가 많아야 한다.’는 말과 위 무공(衞武公)이 지은 설어(暬御)142) 의 잠(箴)을 인용하여 진계(陳啓)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가납(嘉納)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송상기(宋相琦)가 소를 올려 문형(文衡)143) 의 직임에서 해임(解任)해 주기를 청하고 이어 양역(良役) 변통의 방책(方策)을 논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비망기(備忘記)를 보았더니 양역(良役)의 고질적인 폐단을 깊이 염려하시어 호포(戶布)와 구전(口錢) 가운데 충분히 강구해 처리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그 병이 골수(骨髓)에까지 든 양역의 폐단을 성상께서 이미 밝게 통촉하시어 호포와 구전의 의논이 나온 지 오래 되었으므로,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도 이일에 대해 적이 헤아린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지금 각 고을에는 역호(役戶)가 있고 유호(遊戶)가 있습니다. 이른바 역호는 곧 각 고을에 있는 양역의 부류요, 유호는 곧 사부(士夫)·유생(儒生) 등 신역(身役) 없이 한유(閑遊)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나라 양정(良丁)의 수효가 원래 사부 이하 한유자(閑遊者)에게 미치지 못하니, 이제 양역의 호(戶)를 한유자의 호에 비교한다면 대저 유호(遊戶)가 반드시 역호(役戶)보다 많을 것입니다. 신이 병조의 각 고을 군안(軍案)과 기호(畿湖)에 응납(應納)할 수효를 상고하고 양도(兩道) 각 고을의 원호(元戶)를 등출(謄出)하여 대조해 보았더니, 호수(戶數)가 군액(軍額)보다 혹은 세 갑절 혹은 두 갑절이 되었습니다. 기전(畿甸)과 삼남(三南)은 양반(兩班)의 명색(名色)이 다른 도(道)에 비교하여 가장 많은데, 서북(西北)의 여러 도(道)가 과연 모두 이와 같은지는 알지 못하나 아마도 큰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양역 가운데에서 본래 호포(戶布) 2필을 바치던 자에게 1필을 감하고 그 나머지 1필은 여러 유호(遊戶)에게 분배해야 할 것인데, 이른 바 유호란 그 명목(名目)이 많아서 위로 조관(朝官)으로부터 아래로 토품(土品)·교생(校生)·군관(軍官) 등속에 이르기까지 모두 1필을 바친다면 곧 호포(戶布)와 차이가 없을 것이니, 그 방법이 조금은 간편(簡便)할 듯합니다. 만약 이 방법을 시행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먼저 각 고을의 여러 종류의 납포(納布)의 수효를 취하여 그 몇 명이 되는지 안 연후에 또 고을의 호적(戶籍)을 취하여 역호(役戶)와 유호(遊戶)를 구별하고 그 많고 적음을 비교해야 합니다. 만약 역호가 적고 유호가 많다면 매호(每戶)에 비록 1필을 받더라도 그 상납하는 수효는 옛날과 비교하여 증가될 것이니 본시 걱정할 것이 없고, 혹 유호가 적고 역호가 많아서 그 바치는 바가 비록 전보다 줄어들더라도 절장 보단(截長補短)이 되어 한 도(道)에서 상납(上納)하는 총수(總數)를 따진다면 족히 경비(經費)의 수용(需用)이 될 것이니, 또한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이를 건의(建議)했는데 비난(非難)하는 자가 말하기를, ‘호포(戶布)의 법은 대·중·소·잔(殘)에 따라 그 납포(納布)의 다소(多少)를 정했으니, 이는 균역(均役)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 민호(民戶)의 대소를 물론하고 모두 1필을 바치게 한다면 뒤섞여 차등이 없을 것이니, 이는 왕정(王政)이 아니다. 「적은 것을 근심하지 않고 고르지 못한 것을 근심한다.」는 것이 공자(孔子)의 교훈이 아니던가.’ 하기에 신이 응답하기를, ‘이것이 바로 고르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15구(口)에서 20구 이상이 대호(大戶)가 되며, 곧 이른바 양반(兩班)으로서 혹은 자녀가 많고 혹은 아래에 거느린 노복(奴僕)이 있는데, 그 가산(家産)을 말한다면 가난하여 스스로 보존하지 못하고 기한(飢寒)에 쪼달리는 자가 많으니, 이같은 자를 대호(大戶)라 이르고, 몇 필(疋)의 포(布)를 징수한다면 반드시 그 억울함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8구의 가호에 이르러서는 생계가 유족하여 대호에 비교할 때 그 소득이 너무나 차이가 나는데도 다만 1필을 바친다면 그 고르지 못함이 심한 것이다. 선왕(先王)이 백성의 산업(産業)을 제정함에 있어서도 빈부(貧富)를 헤아려 차등을 정한 것이니, 도리어 반드시 그 인구(人口)의 다소(多少)를 계산하여 낮추고 높이겠는가. 이제 1필의 포(布)는 피차간에 후박(厚薄)을 없게 한 것이니, 이것이 곧 균등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비난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역호는 유호에 비하여 비록 상반(相半)이 되더라도 그 가운데 역호는 다만 제 한 몸의 양역뿐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인족(隣族) 여러 사람의 포(布)를 바치는 경우도 또한 많다. 이제 만약 한결같이 호적(戶籍)을 따라 자신의 1필을 감한다면 종전에 바치던 인족의 포(布)는 어디에서 책임지워 내게 하겠는가?’ 하므로, 신이 응답하기를, ‘안으로 도성(都城)으로부터 밖으로 팔방(八方)에 이르기까지 인호(人戶)의 원수(元數)를 한 번 보면 분명히 알 수 있고, 통틀어 논한다면 유호가 반드시 역호보다 많을 것이니, 통융(通融)하여 분배한다면 어찌 족히 충당하지 못하겠으며, 비록 남고 모자람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변통하여 보충할 길이 없겠는가.’ 하였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신의 이 말은 감히 스스로 반드시 시행할 만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말미에 경비를 절용(節用)할 것과 위에서 용도을 감소하는 도리를 말했는데,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진연(進宴)한 후 시혜(施惠)할 한 조항을 가지고 품주(稟奏)하기를,
"여러 사람의 의논이 대동미(大同米)를 양감(量減)하는 것이 한때의 혜택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순문(詢問)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 등 여러 사람은 모두 대동미를 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구(趙泰耉)는 환곡(還穀) 중에서 오래 된 것에 한해 1년분을 탕감하고, 대동미는 1두(斗)를 한정하여 적당히 감봉(減捧)하기를 청했으며,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도 또한 조태구의 말과 같았다. 임금이 8도의 1년 환곡을 고루 탕감할 것을 허락하고, 양호(兩湖) 연해(沿海)의 더욱 심한 고을은 대동미를 참작하여 감제(減除)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또 병술년144) 과 경인년145) 의 전례(前例)에 의하여 대신·재신(宰臣)·당상관(堂上官) 및 부인(夫人) 70세 이상에 미육(米肉)을 하사(下賜)하고, 기로(耆老)·종반(宗班)으로 70세 이상은 의자(衣資)와 미육을 하사하며, 조사(朝士)의 부인(夫人) 및 부녀 80세와 상한(常漢)의 여인 90세 이상은 모두 미육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또 김창집의 말로 인하여 선조(先朝) 무신년146) 의 전례에 따라 재신(宰臣)·시종신(侍從臣)의 부모(父母) 70세 이상은 서계(書啓)하여 혹은 가자(加資)하고 혹은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이유가 말하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삼군문(三軍門)에 분속(分屬)시키고, 삼군문에서는 각기 그 초관(哨官)·교련관(敎鍊官)의 무리로 감관(監官)을 삼을 것인데, 군향(軍餉)의 출납(出納)은 저들의 관할(管轄)할 바가 아니니, 마땅히 당상(堂上) 가선(嘉善)의 무변(武弁) 가운데에서 선택하여 별장(別將)을 삼아 온 성(城)을 전관(專管)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유가 또 말하기를,
"북한 산성의 군향 5, 6만 석(石)을 제외한 나머지 곡식은 마땅히 탕춘대(蕩春臺) 외창(外倉)에 수납(輸納)하여야 하며, 이는 의당 총융청(摠戎廳)으로 하여금 주관(主管)하게 하여 후일 위급한 사태가 있으면, 총융사(摠戎使)가 탕춘대에 유진(留鎭)하여 외적(外敵)을 방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외방(外方) 사찰(寺刹)에 있는 승도(僧徒)의 다소(多少)를 조사하여 남한 산성·북한 산성에 각기 의승(義僧)을 3백 50명씩 정하고, 액수를 정하여 차례로 번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允許)하였다. 김창집(金昌集)이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일로 청하기를,
"따로 당상관(堂上官)을 내어 청사(廳舍)를 마련하고, 호포(戶布)와 구전(口錢) 가운데에서 그 편의를 충분히 강정(講定)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호포와 구전 및 도헌(都憲)의 소에 논한 3건(件)의 일을 모두 통융(通融)하여 두루 의논하게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저번에 한 수령(守令)의 말을 들으니, ‘각 군문(軍門)의 군병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여러 관사(官司)에 소속된 창준(唱準) 같은 제원(諸員) 등의 부류는 모두 감해 없애야 할 것이요, 각 고을에서 거둔 호포(戶布)는 올려보내어 여러 관사(官司)에 분급(分給)하게 하고, 여러 관사에 입속되었던 자를 군정(軍丁)에 편입(編入)시킨다면, 군병은 저절로 궐액(闕額)이 없을 것이며, 또 친족에게 침책(侵責)하는 폐단도 제거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 또한 상의하여 확정(確定)하는 가운데에 첨입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권상유(權尙游)가 구전(口錢)의 편리함을 극력 말하기를,
"주(周)나라 때 부포(夫布)147) 가 있었으니, 그 설(說)이 《주례(周禮)》에 상세히 실려 있으며, 한 고조(漢高祖) 4년(B.C. 203)에 또 정전(丁錢)을 시행했으니, 정전은 곧 구전입니다. 후세에 의논하는 자들이 한(漢)나라 4백 년 기업(基業)이 실로 이에서 말미암았다고 하는데, 그 법이 《주례》에 실린 바와 더불어 은연 중 부합합니다. 만약 성의(聖意)를 굳게 정하고 맡겨 책임지운다면 어찌 시행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자, 조태구가 말하기를,
"한(漢)나라 때에는 천하가 모두 돈을 주조하였으므로 이 법이 시행되었으니, 우리 나라에는 전화(錢貨)가 지극히 귀하니, 결코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유가 말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충분히 상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저번에 대신이 황당선(荒唐船)과 서북(西北) 변방의 일을 저들에게 통보해 알리기를 청했으나, 여러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다만 황당선 한 가지 일만 통보하였습니다. 서쪽 변방은 신명식(申命式)의 일로써 본다면 【곧 이산 군수(理山郡守)이니, 이에 관한 일은 위에 보인다.】 사단(事端)이 이미 벌어졌으나, 그래도 북도(北道)의 더욱 염려스러움만 못합니다. 금번 사행(使行)에 설령 탐문하여 온다 하더라도 형편상 장차 명년(明年) 동지사(冬至使)의 행차 때 주문(奏文)을 순부(順付)148) 하게 될 것인데, 그동안 저들의 촌락(村落)이 더욱 번성한다면 더욱 난처할 것이니, 지금 서북 변방의 일을 황당선의 일과 합하여 하나의 주문(奏文)으로 만들어 사신(使臣)으로 하여금 형편을 보아 올리게 하되, 그렇지 못하면 도로 가지고 오더라도 불가할 것은 없을 듯합니다."
하고, 권상유는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중원(中原) 사람들이 우리 지경에서 10리의 거리 안에 보(堡)를 설치(設置)한 것을 근심하여 따로 주청사(奏請使)를 보내기를 청했으니, 일을 염려함이 심원(深遠)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금번 사행(使行)에도 주청사의 칭호를 겸한다면 이이의 말과 부합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의 말하기를,
"탐문하고자 하는 것은 대저 황제(皇帝) 명령 여부(與否)를 알고자 함이다. 주청사를 겸한다는 말이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대신의 여러 의논도 각기 달라 혹은 말하기를,
"서쪽 변방에는 사단이 이이 벌어졌으니 황당선의 일과 더불어 함께 주문(奏聞)하지 않을수 없으나, 북쪽 변방의 일은 사행(使行)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상세히 사정을 탐문하고 주문(奏聞)하여야 비로소 완전할 것이다."
하였다.
9월 26일 갑자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유집일(兪集一)에게 명하여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와 더불어 함께 반궁(泮宮)149) 에 가서 선비를 시취(試取)하게 하고, 이어 수석을 차지한 정필녕(鄭必寧)으로 하여금 곧장 전시(殿試)에 나가게 하였다.
9월 27일 을축
화성(火星)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의 제2성(第二星)을 범하였다.
좌상과 우상을 불러 복상(卜相)하게 하였으나, 우상 김우항은 나오지 않았고, 좌상 김창집이 명을 받들어 매복(枚卜)하여 서종태(徐宗泰)를 영의정(領議政)으로 삼았다.
우의정 김우항이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辭職)하였다. 전석(前席)에서 진달한 신포(身布)를 감하기를 청한 말로 인해 대신 및 여러 신하에게 배척을 당하였다 하여 스스로 그 경솔하고 망령된 실수를 인책(引責)한 것이었다. 임금이 답하기를,
"전석에서 진달한 바는 그 대의(大意)가 매우 좋았으니, 무슨 경솔한 실수가 있었겠는가?"
하고,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위유(慰諭)하게 하였다.
9월 30일 무진
평안도 창성(昌城) 등 고을에 천둥과 번개가 치고 지진이 일어났다.
이익한(李翊漢)을 승지(承旨)로, 이병상(李秉常)을 교리(校理)로, 정찬선(鄭纘先)을 수찬(修撰)으로 삼고, 특별히 홍만조(洪萬朝)를 발탁하여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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