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기사
성균관(成均館)의 수재 유생(守齋儒生) 등이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이 소를 올려 황상로(黃尙老) 등의 소어(疏語)에 변명하였다 하여 인혐(引嫌)하고 권당(捲堂)150) 하였다. 임금이 동지관사(同知館事) 신임(申銋)과 대사성(大司成) 조도빈(趙道彬)에게 명하여 들어오도록 권유하게 하였다. 여러 유생의 소회(所懷)에 대략 이르기를,
"최석정의 소는 초초한 몇 마디 말로 ‘어찌 감히 성조(聖祖)를 무함했겠습니까.’라고 한 데 불과하였고, 원래 한 마디 말도 그 무함하지 않은 연유를 밝힌 것이 없었으며, 선정(先正)을 무함한 한 조항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거론하지 않았으니, 그 스스로 담당하는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성비(聖批)에는 신 등이 최석정에게 억지로 무함을 가했다고 하셨는데, 아! 《춘추(春秋)》의 토적(討賊)과 복수(復讎)의 의리를 성조(聖祖)께서 창론(倡論)하였고 선정(先正)이 아래에서 찬조(贊助)했으니, 이 의리를 기롱하고자 한다면 그 누구를 기롱함이 되겠습니까? 최석정은 송시열을 질시(嫉視)하는데 급급하여 대의(大義)를 기롱하는 데에 모든 힘을 남김없이 써서 그 말이 위로 성조를 침범하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공의(公議)가 준엄하게 나온 뒤에 이르러서야 성조와 선정의 일을 둘로 구분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았으므로, 곧바로 이런 모호(糢糊)한 말을 은연중에 가리고 숨길 계획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비(聖批)가 간곡하여 심지어 억지로 무함을 가했다고 하셨으니, 홀로 춘추의 대의가 흔적조차 없어져 버린 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신 등이 이미 억지로 사람에게 무함을 가했다는 엄지(嚴旨)를 받들었으니, 염의(廉義)가 있는 곳에 더욱 태연하게 있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다시 들어오도록 권유하게 하니, 여러 유생들이 또 분부에 응하지 않고 다시 소회(所懷)를 올려 이르기를,
"최석정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일조 일석(一朝一夕)에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 할아비 최명길(崔鳴吉)은 병·정(丙丁)의 호란(胡亂)을 당하자 척화(斥和)를 주장한 세 충신(忠臣)을 잡아보내어 죽이게 하였고, 연중(筵中)에서 문충공(文忠公) 신(臣) 김상용(金尙容)이 자결(自決)한 일을 헐뜯어 심지어 명예(名譽)를 구했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그 평생의 입론(立論)이 척화(斥和)의 언론(言論)은 부의(浮議)요, 《춘추(春秋)》의 의리는 공언(空言)이라고 하였으므로, 최석정이 이른바 명예를 구하는 공언이라고 한 것은 또한 이 뜻을 조술(祖述)한 것이니, 그 정상이 드러남이 이와 같았습니다. 최석정이 밖으로만 내달리는 공언이라는 지목(指目)을 억지로 선정에게 가하였으니, 신 등이 최석정에게 어찌 일찍이 억지로 무함을 가한 바가 있겠습니까. 성비(聖批)에 또 이르시기를, ‘대신이 이러한 무함을 입은 것은 원통하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는데, 신 등은 진실로 또한 선정이 최석정에게 무함을 받은 것은 실로 하늘에 사무치는 지극히 원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傳敎)하기를,
"문자를 들추어 내어 남에게 죄를 요구하는 것은 원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성조를 무함했다는 것이 어떠한 죄명인데 대신에게 억지로 가한단 말이냐. 이번 권당(捲堂)은 끝내 온당하지 않으니, 다시 권유하여 들어오게 함이 옳다."
하였다. 유생 김한석(金漢錫) 등이 그날로 도로 들어오니, 세상에서는 거취(去就)가 전도(顚倒)되고 염의(廉義)가 아주 없어졌다고 기롱하였다.
10월 3일 신미
임금이 날씨가 추워졌다 하여 숙위 군사(宿衞軍士)에게 유의(襦衣)151) 를 주라고 명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가 차자(箚子)를 올려 재력(財力)이 궁핍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정상을 진달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위유(慰諭)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우항(金宇杭)이 소를 올려 병이 났음을 고하고, 또 군포(軍布)를 반감(半減)하는 말을 거듭 이르기를,
"갑술년152) 에 수상(首相) 남구만(南九萬)이 대동미(大同米) 1등(等)을 감하기를 청하였고, 그 후에 승지(承旨) 이언강(李彦綱)이 신포(身布)와 공목(貢木)153) 을 감하기를 청하였으니, 갑술년의 은혜로운 정사(政事)가 저와 같이 훌륭하였습니다. 이제 안으로는 궁액(宮掖)에서부터 밖으로는 각사(各司)에 이르기까지 쓸데없는 비용을 극력 제거하고 서울과 외방(外方)에 저축되어 있는 것을 가지고 변통하여 대신 지급하게 하되, 갑술년의 예와 같이 한다면 어찌 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민진원(閔鎭遠)이 장계로 진달하기를,
"평양(平壤)의 내성(內城)은 이미 수축(修築)하였습니다. 하지만 성 밖에 중성(中城)이 있고 중성 밖에는 또 외성(外城)이 있으며, 동북쪽 모퉁이는 또 모란봉(牡丹峰)인데, 결코 이를 버려두어 규봉(窺峰)154) 이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성(城) 안에는 또 샘물이 없으나 만약 중성(中城)을 합하여 한 성(城)으로 한다면 샘물이 많이 있게 되어 사람들이 갈증에 시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옛사람이 흙으로 쌓은 기지(基址)가 완연히 남아 있으니, 옛터에 그대로 영축(營築)한다면 백성의 힘을 번거롭게 하는데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니, 묘당(廟堂)에서 사방 둘레가 넓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4일 임신
화성(火星)이 태미원(太微垣) 우액문(右掖門) 안으로 들어갔다.
이문흥(李文興)을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수찬(修撰) 정찬선(鄭纘先)이 소를 올려 논하기를,
"과장(科場)의 비편(備篇)은 곧 옛 헌장(憲章)입니다. 그런데 대신의 한 차자(箚子)로 인하여 경솔하게 혁파했으니, 사자(士子)에게 있어서는 비록 폐단을 제거하는 일이 되었지만, 옛 헌장을 경솔하게 변개(變改)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이석관(李碩寬)은 어리석고 비루(鄙陋)하므로 북곤(北閫)에 발탁된 것도 이미 인망(人望)을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처 부임(赴任)하기도 전에 통수(統帥)로 옮겨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유민(李裕民)은 자질과 경력이 얕고 지망(地望)도 본래 가벼운데 갑자기 서곤(西閫)에 발탁되어 공의(公議)에 크게 어긋났으니, 신은 저으기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과장의 비편은 실로 문구(文具)였던 것이었으니, 혁파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이석관과 이유민이 갑자기 승천(陞遷)되었다는 설(說)은 온당하다고 볼 수가 없다."
하였다.
10월 6일 갑술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가 소를 올려 사직(辭職)하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유(慰諭)하였다.
10월 7일 을해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정찬선(鄭纘先)이 이석관(李碩寬)·이유민(李裕民)을 소론(疏論)한 일로 인하여 인책(引責)하는 소를 올렸으니, 대개 이석관과 이유민은 모두 김창집이 천거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답하기를,
"이석관에 대한 일은 내가 일찍이 그 사람을 쓸 만하다고 생각했다. 작년 홍석보(洪錫輔)의 소와 오늘날 정찬선의 의논은 모두 공평하고 온당함이 부족하니, 내가 실로 취하지 않는다."
하고, 이어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유(慰諭)하였다.
간원(諫院)에서 논하기를,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기하(李基夏)는 저번에 당한 일이 비록 마음이 편치는 않겠지만, 연석(筵席)에서 개유(開諭)함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한결같이 오만하게 굴며 명을 받들 뜻이 없으니, 평시에도 이러한데 위급할 때에 어떻게 책임을 지우겠습니까.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치죄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두 번째 아뢰니,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3책 55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43면
【분류】사법-탄핵(彈劾)
10월 8일 병자
감시(監試)의 복시(覆試) 때에 평안도(平安道) 청북(淸北)의 거자(擧子) 김도하(金道厦) 등 전원(全員)이 과장(科場) 문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소(試所)에서 그 연유를 물었더니, 이르기를,
"참시관(參試官) 여필희(呂必禧)가 ‘이적(夷狄)’·‘금수(禽獸)’ 등의 말로 온 도(道)를 업신여겼으므로, 이 사람과 문생(門生)155) ·좌주(座主)156) 가 될 수 없기에 형세상 과장(科場)에 들어가기 어렵다."
하였다. 시소에서 이 일을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개유(開諭)하여 과장에 들어오게 하라고 명하였으나, 유생들이 끝내 명을 받들지 않았다. 시소에서 또 계품하기를,
"사목(事目)에 의하여 수창(首倡)한 자는 죄를 줄 것이요, 막중한 경과(慶科)를 이로 인하여 폐지할 수는 없으니, 청컨대 이내 선비를 시취(試取)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다음날 장령(掌令) 이홍(李宖)이 소를 올려 이르기를,
"선비는 본시 지조(志操)가 있으니, 강박(强迫)함은 옳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양장(兩場)157) 에 모두 들어간 자와 종장(終場)에 참여한 자는 일소(一所)158) 로 옮겨 명일 시소에 나아가게 한다면 조가(朝家)의 경사를 함께 하는 도리에 있어서 또한 합당함을 얻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는 내 뜻과 꼭 부합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이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그 후 헌납(獻納) 홍호인(洪好人)이 소를 올려 이르기를,
"유생의 무리들이 반드시 그 사감(私憾)을 풀고자 하여 시관(試官)을 몰아내니 거조가 참으로 이를 것이 없는데, 시소(試所)를 옮겨 나아가게 하라는 요청이 도리어 법을 맡은 자리에서 나왔으니, 무궁한 폐단을 열게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이어 청하기를,
"시소를 옮겨 나아가는 자는 비록 합격이 되더라도 해조(該曹)로 하여금 곧장 빼버리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경기 암행 어사 어유귀(魚有龜)가 들어와 장단 부사(長湍府使) 남지훈(南至熏)과 고양 군수(高陽郡守) 이관수(李觀壽)를 폄(貶)하여 파직시키고, 금천 현령(衿川縣令) 최상항(崔尙恒)을 포장(褒奬)하였다.
10월 9일 정축
권상유(權尙游)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10월 11일 기묘
김흥경(金興慶)을 승지(承旨)로, 한지(韓祉)를 수찬(修撰)으로, 이관명(李觀命)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10월 12일 경진
충청도 유생 성대령(成大齡) 등 2백여 인이 소를 올려 최석정이 제문을 대신 지어 송시열을 침욕(侵辱)한 일에 대하여 논핵(論劾)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생각건대 이 대의(大義)는 성조(聖祖)께서 위에서 주장(主張)하시고 선정(先正)이 아래에서 받들어 밤낮으로 경영한 바와 위아래에서 힘쓴 바가 오직 《춘추(春秋)》 일통(一統)의 의리에 있었으므로,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모두 눈을 씻고 목을 내밀어 큰 공훈이 이룩되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송시열의 친지(親知) 가운데에 몰래 다른 뜻을 품은 자가 있었으니, 곧 고(故) 집의(執義) 윤선거(尹宣擧)였습니다. 대저 윤선거는 강도(江都)에서 절의(節義)를 잃었으므로 춘추 대의(春秋大義)의 말을 원래 듣기 싫어하였으니, 그 후 문장(門墻)의 변고(變故)159) 가 생긴 것도 반드시 이 한 단서(端緖)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최석정이 이제 유상(儒相)의 제문(祭文)에서 선정(先正)을 한없이 헐뜯은 것은 대개 유상이 윤선거의 아들이기 때문에 최석정의 의중에는 송시열을 배척하고 윤선거를 높임으로써 유상에게 아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제 최석정이 이미 그 대작(代作)임을 자복(自服)하였고, 또 대의(大義)를 무망(誣罔)함이 드러나 숨기기 어렵게 되었으니, 그 무함한 바가 어찌 홀로 뜻을 받든 선정에게만 미치고 주장한 성조에게 미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최석정의 간악한 정상을 엄중히 배척하여 성조의 뜻을 밝히고 선정의 억울함을 펴게 하소서."
하고, 말미에 또 삼사(三司)에서 말하지 않는 허물과 반유(泮儒)들이 권당(捲堂)하였다가 도로 들어간 잘못을 논하여 이르기를,
"이목(耳目)과 논사(論思)의 책임을 맡고서도 모두 입을 다물고 침묵했으니, 장차 삼사(三司)를 어디다 쓰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권당을 했으면 오직 그 소회(所懷)를 극력 진달함이 마땅한데도 이에 미안하다는 비답으로 인하여 급급히 도로 들어왔으니, 수선(首善)인 태학(太學)이 이 무리들 때문에 망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번의 소어(疏語)는 저번 반유(泮儒)의 소를 주워 모은데 불과하며, 삼사의 여러 신하와 태학의 여러 유생을 모두 헐뜯어 그 뜻이 분란을 일으키는 데 있으니, 이미 온당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윤선거의 일을 거론한 데 이르러서는 유상(儒相)을 침욕(侵辱)하는 뜻이 드러났으니, 이 어찌 시골 유생들이 홀로 주간한 일이겠는가. 지극히 해괴하다."
하였다.
10월 15일 계미
월식(月食)하였다.
10월 16일 갑신
이택(李澤)을 사간(司諫)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정언(正言)으로, 김간(金榦)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10월 17일 을유
8도 유생 이종해(李宗海) 등이 소를 올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신중히 해야 한다는 뜻으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종해 등이 네 번 소를 올렸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8일 병술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건명(李健命)이 면직(免職)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박권(朴權)이 이판(吏判)으로 옮겨 제수(除授)되었다.
이병상(李秉常)·어유귀(魚有龜)를 교리(校理)로, 황귀하(黃龜河)를 부교리(副校理)로, 김취로(金取魯)를 지평(持平)으로, 조상경(趙尙絅)을 문학(文學)으로, 홍치중(洪致中)을 응교(應敎)로, 조태구(趙泰耉)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첫 번째 사직소(辭職疏)를 올리니, 승지(承旨)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10월 19일 정해
영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첫 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좌의정 김창집이 사직 차자(辭職箚子)를 올리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함께 오라고 하였다.
10월 20일 무자
영의정 서종태가 사직 차자를 올리니, 사관을 보내어 위유하고 함께 오라고 하였다.
10월 22일 경인
이때 삼공(三公)이 모두 인입(引入)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에 여러 차례 위유를 내리고 나오기를 권면하니, 이날 김우항이 비로소 침(鍼)과 뜸질의 치료를 받고 출사(出仕)하였다.
10월 23일 신묘
권상유(權尙游)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건명(李健命)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권상하(權尙夏)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병상(李秉常)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10월 25일 계사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영보(李英輔) 등이 소를 올려 최석정이 송시열을 헐뜯은 죄상을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문자(文字)를 들추어 낸다는 것은 본뜻을 궁구하지 않고 구절을 날조해 맞추는 것을 이르는 것이요, 남에게 죄를 구한다는 것은 저 사람이 원래 죄가 없는데 고의로 얽어 만드는 것을 이르는 것이며, 문자를 보는 안목이 다르다는 것은 문세(文勢)가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보는 자가 비록 달라도 각자가 말을 이룰 수 있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이제 최석정이 지은 제문(祭文)을 보건대 분명하게 지척(指斥)함이 있어 애당초 흐릿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으니, 이것이 과연 들추어 내어 억지로 가한 데에 어찌 근사(近似)한 바가 있으며, 그 글을 보는 자가 어찌 다르게 풀이할 리가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두둔하시는 바와 최석정이 스스로 변명하는 바는 다만 성조(聖祖)를 무함한 한 조항에 있는데, 최석정 또한 인심(人心)은 있을 것이니 어찌 감히 성조를 무함하는 데 뜻을 두었겠으며, 여러 유생의 소 또한 어찌 최석정이 직접 성조를 무함했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선정(先正)의 대의(大義)는 곧 효묘(孝廟)의 대의입니다. 이제 최석정이 송시열을 무함하는 데 급급하여 위로 성조를 침범하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으니, 그 말이 비록 성조를 직접 무함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성조의 대의는 이미 무함을 당한 것입니다. 그의 스스로 변명함에 있어서도 또한 그 소이연(所以然)을 밝히지 못하고, 다만 ‘내가 어찌 일찍이 성조를 무함하였는가’라고 하였으니, 그것이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말단에 또 극언하기를, ‘인심이 날로 험악해져 평소 송시열을 추앙하던 자들도 또한 간혹 눈을 흘기고 입술을 삐쭉거리는 자가 있다.’고 하여 그 헐뜯고 배척함이 한 구절에서 한 구절로 넘어 갈수록 심하였습니다. 이렇게 절차(節次)를 미루어 올리다가는 아마도 그 이른바 공언(空言)과 고론(高論)이 가면 갈수록 패언(悖言)이 되고 패론(悖論)이 될 것이니, 대의(大義)의 한 일은 마침내 송시열의 죄안(罪案)이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난번 소비(疏批)에 이미 내 뜻을 효유하였다. 설령 몇 구절의 지적한 뜻이 너희가 말한 바와 같다 하더라도 사사로운 제문(祭文)의 문자는 공조(公朝)와 무관한 것이므로 원래 선정에게 손익(損益)됨이 없으니, 결코 죄줄 수 없다."
하였다.
10월 28일 병신
이조 참판(吏曹參判) 권상유(權尙游)가 소를 올려 연석(筵席)에서 진달한 말을 거듭 아뢰어 【경연(經筵)의 말은 위에 보인다.】 청하기를,
"청국(淸國)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경원(慶源)·훈융(訓戎)의 건너편에 호인(好人)이 전지(田地)를 개간(開墾)하고 집을 짓는 일을 금지하게 하여 앞날의 염려가 없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석(前席)에서 이미 내 뜻을 효유하였고, 재자관(䝴咨官)이 오래지 않아 돌아올 것이니, 사정을 상세히 안 뒤에 이자(移咨)함이 완전할 듯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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