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5권, 숙종 40년 1714년 11월

싸라리리 2025. 11. 29.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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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기해

경상도 대구(大丘) 등지(等地)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11월 2일 경자

유성(流星)이 유성(柳星) 위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다.

 

대제학(大提學) 송사기(宋相琦)를 불러 반궁(泮宮)에 감귤(柑橘)을 내리고 선비를 시취(試取)하도록 명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송진명(宋眞明)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이기하(李基夏)를 다시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삼았다. 이기하는 대계(臺啓)로 인하여 나문(拿問)을 당하고 장임(將任)에서 해면(解免)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명하여 제수(除授)한 것이다. 이기하는 원래 재능이 없고 단지 탐독(貪黷)하다는 이름만 있었는데, 잠시 체직되었다가 곧바로 서용(徐用)되어 오랫동안 장임(將任)을 차지하였으므로, 당시의 의논이 기롱하였다.

 

11월 3일 신축

당초에 유생 성대령(成大齡) 등이 소를 올려 최석정이 제문(祭文)을 대작(代作)하여 선정(先正)을 침욕(侵辱)한 데 대하여 변론하고, 인하여 삼사(三司)에서 말하지 않음을 논핵하자,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가 모두 인피(引避)하였다. 이때에 와서 헌부(憲府) 【지평(持平) 조상건(趙尙健)이다.】 에서 대사간(大司諫) 윤세유(尹世綏)·정언(正言) 조명겸(趙鳴謙)의 피사(避辭)에 대하여 논하기를,
"근본이 되는 일은 팽개치고 모호(糢糊)하게 말을 꾸며 오로지 한 마디 말이라도 혹시나 대신을 침핍(侵逼)할까 두려워했으니, 이미 지나간 일이라 하여 버려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지평(持平) 김재로(金在魯)는 ‘오래 된 일을 추후에 제론(提論)하는 것은 지나침을 면하지 못한다.’며 이의(異義)를 세워 인피(引避)하고, 지평 조상건은 논계(論啓)한 사람이라 하여 또한 인피하였는데, 그 후 장령(掌令) 정동후(鄭東後)가 처치(處置)하여 김재로는 체직시키고 조상건은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충청도 괴산(槐山) 등지에 지진이 일어났다.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생 한두일(韓斗一)·정재교(鄭在僑)를 곧장 전시(殿試)에 나아가게 하라고 명하였다.

 

11월 4일 임인

유성(流星)이 호시성(弧矢星) 위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11월 5일 계묘

이때 반유(泮儒)들이 삼일제(三日製)160)  에서 수석을 차지한 사람인 이광보(李匡輔)에게 벌을 베풀었다. 이광보는 대개 윤증(尹拯)의 상(喪)에 유생으로서 제문(祭文)을 지어 조문(弔問)하였는데, 그 글은 곧 송시열을 침욕(侵辱)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유생들이 모두 통분하게 여기고 벌을 베풀어 전시(殿試)가 이미 박두하였는데도 이광보는 전시에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연(金演)이 이광보를 위하여 소를 올려 논하기를,
"이광보는 아직 창방(唱榜)을 하지 아니하여 조사(朝士)와 비록 차이가 있으나, 급제(及第)의 명이 내린 뒤이니, 또한 유생으로서 대우할 수는 없습니다. 유생으로 있을 때의 일을 추후에 제기하여 급제를 내린 후에 벌을 논하는 것이 사체에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다시 조가(朝家)에서 직부(直赴)하도록 분부하는 도리가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또 이후로는 직부하는 명이 내린 장에게는 유생이 벌을 베풀지 못하도록 법식을 정하여 시행함이 아마도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급제를 내린 뒤에는 비록 창방을 하지 않았더라도 유벌(儒罰)을 베푸는 것은 사체에 미안하다. 곧 벌을 풀어 직부하도록 허락하고, 지금부터 법식을 정하여 급제를 내린 자에게는 유벌을 베풀지 못하게 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김연(金演)을 도승지(都承旨)로, 박봉령(朴鳳齡)을 승지(承旨)로, 이택(李澤)을 교리(校理)로, 권변(權忭)을 사간(司諫)으로, 최상리(崔尙履)를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11월 6일 갑진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종기(腫氣)있는 곳에 침(針)을 맞았고, 약방의 세 제조(提調)가 여러 어의(御醫)를 데리고 직숙하였다.

 

11월 7일 을사

유성(流星)이 호시성(弧矢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정동후(鄭東後)을 장령(掌令)으로, 이봉익(李鳳翼)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11월 9일 정미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종기 있는 곳에 침을 맞은 뒤 고름이 순하게 나왔다.

 

11월 11일 기유

조상경(趙尙絅)을 지평(持平)으로, 박성로(朴聖輅)를 문학(文學)으로, 이병상(李秉常)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삼았다.

 

성균관(成均館)에게 임금의 명으로 인하여 재임(齋任)으로 하여금 이광보의 벌을 풀라고 하였으나, 재임 한배두(韓配斗)가 소회(所懷)를 써 올려 이광보가 선정(先正)을 침욕한 죄상을 극력 논하고 끝내 벌을 풀지 않으니, 임금이 노하여 한배두에게 정거(停擧)를 명하였다. 정원(政院) 【승지(承旨) 박봉령(朴鳳齡)이다.】 에서 도로 거두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성(大司成) 조도빈(趙道彬)이 소를 올려 이르기를,
"반유(泮儒)가 벌을 베푼 것은 이미 한때의 공의(公議)에서 나왔으니, 풀거나 풀지 않는 것은 사림(士林)에게 맡겨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설령 과격한 의논이 있더라도 위엄으로 제어하기란 어려운 일인데, 한낱 작은 일로 인해 꺾어 사기(士氣)를 손상시켰으니, 이 어찌 평소 바라던 바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받아들여 한배두에 대한 벌을 늦추도록 하였다. 예조(禮曹) 【참판(參判) 조태로(趙泰老)·참의(參議) 송정명(宋正明)이다.】 에서 또 아뢰기를,
"만약 유벌(儒罰)을 풀지 않아 끝내 성명(成命)을 정지한다면 자못 규식을 정한 본의(本意)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전에 없었던 일이라 하여 성명을 정지할 수 없으니, 직부(直赴)를 허락함이 옳다."
하였다. 이광보는 드디어 직부하였다.

 

진사(進士) 이세경(李世庚) 등 70여 인이 소를 올려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 부자(父子)를 위하여 성대령(成大齡) 등의 소를 대변(對卞)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윤선거는 재덕(才德)을 감추고 발휘하지 아니하여 그 공덕이 비록 세상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그 몸을 닦고 마음을 수양하여 본말(本末)이 모두 갖추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소에 이르기를, ‘윤선거는 강도(江都)에서 절의(節義)를 잃었기 때문에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원래 듣기 싫어하였고, 항상 구차하고 고식적인 의논을 주장했다.’고 하였으니, 아! 말의 무리(無理)함이 이토록 심한 데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제문(祭文)가운데 이르기를, ‘출처(出處)의 의(義)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으며, 고괘(蠱卦)의 왕후를 섬기지 않음을 본받아 뜻을 고상(高尙)하게 가졌고161) 건괘(乾卦)의 잠룡(潛龍)을 인용하여 몸을 은둔(隱遁)했으니,162)   어찌 저 사람의 밖으로만 내달려 명예를 구해 공언(空言)을 실천하지도 못하고 고론(高論)을 이루지도 못한 것과 같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칭술(稱述)하는 글이란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는데, 뜻밖에도 취향(趣向)이 다른 무리들이 구절을 들추어 내어 다른 뜻을 부연하고 감히 말하지 못할 것에다 견주어 논의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번번이 송시열을 성조(聖祖)와 일체(一體)로 삼아 심지어 송조를 무함했다고 말함으로써 감히 무거운 데에 의거해 사람을 제어(制馭)할 계책을 삼았으니, 그 사실의 어떠함을 물론하고 또한 매우 참람하고 무엄한 일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사로운 제문(祭文)의 문자는 원래 조정(朝廷)까지 미루어 올릴 것이 아니며, 구절을 들추어 내어 억지로 주석(註釋)을 내어가며 남에게 죄를 구하는 것은 참으로 이미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 성대령 무리의 소 가운데 방자하게 무욕(誣辱)한 것이 양조(兩朝)의 예우(禮遇)하던 신하에까지 미쳤고, 반드시 유상(儒相)에게 앙갚음을 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결코 시골 유생이 홀로 주관한 일이 아니니, 더욱 해괴하다. 너희들의 변론이 명백함을 내가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11월 13일 신해

이대성(李大成)을 승진(陞進)시켜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삼고, 이관명(李觀命)을 승진시켜 우윤(右尹)으로 삼았으며, 홍치중(洪致中)을 겸보덕(兼輔德)으로, 송성명(宋成明)을 수찬(修撰)으로, 홍석보(洪錫輔)을 부수찬(否修副)으로 삼았다.

 

증광 전시(增廣殿試)에서 이정소(李廷熽) 등 39인을 선발하여 뽑았다. 이때에 이광보(李匡輔)가 벌을 무릅쓰고 전시(殿試)에 나아갔는데 이정소가 또 그 나쁜 본을 받아 벌을 당하고도 전시에 나아갔으므로, 물론(物論)이 이를 비난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권상하(權尙夏)가 현도(縣道)를 거쳐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스승 송시열이 남의 무멸(誣衊)을 입었으니, 이는 실로 세도(世道)의 변괴입니다. 신의 스승이 평생 지킨 바는 《춘추(春秋)》의 의리입니다. 비록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돕지 아니하여 큰 업이 중도에 어긋났으나, 그 마음은 신명(神明)에 질정(質正)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번에 간흉(奸凶)들이 신의 스승에게 죄를 얽어 못하는 짓이 없었으나, 또한 일찍이 무멸함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는데, 이제 그 간악한 말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으니, 신은 적이 마음이 아픕니다. 옛날 화정 윤씨(和靖尹氏)163)  가 소명(召命)을 받들고 구강(九江)에 이르렀을 때 언관(言官)이 정자(程子)를 헐뜯자, 윤씨가 사절(辭絶)하기를, ‘정씨(程氏)에게 배운 자가 신입니다. 살아서 20년을 섬겼고 이제 또 20년이 되었으니, 청컨대 출척(黜斥)하소서.’ 하였습니다. 이에 신의 스승이 무함을 입은 것이 정자보다도 심한데, 신이 비록 무상(無狀)하지만 평생 심복해 섬긴 의리는 윤씨가 정문(程門)에 대한 것에 밑돌지 않습니다. 이러한 때에 또한 무슨 마음으로 소명(召命)을 받들고 가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비국(備局)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추은(推恩)하는 한 조항에 대해 명하기를,
"기로 대신(耆老大臣) 이하 여러 재신(宰臣)과 당상(堂上)·문관(文官)·남행(南行)·무관(武官) 및 부인(夫人) 70세 이상과 종반(宗班) 70세 이상 및 부인과, 조사(朝士)의 부인 및 사부(士夫)의 부인(婦人) 80세 이상과, 상한(常漢) 남녀(男女) 90세 이상에게 의자(衣資)와 미육(米肉)을 분등(分等)하여 마련하고 별단(別單)으로 작성(作成)하여 들일 것이며, 외방에 있는 사족(士族)의 부녀(婦女) 80세 이상 및 상한 남녀 90세 이상은 그 도(道)로 하여금 낱낱이 초출(抄出)하게 하고 이 예(例)에 따라 마련하여 분급(分給)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6일 갑인

지평(持平) 조상건(趙尙健)이 논사소(論事疏)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춘추(春秋)》의 의리는 천지의 상경(常經)이요, 백성의 병이(秉彝)입니다. 성조(聖祖)께서는 위에서 창도하시고 선정(先正)이 아래에서 도우시어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대의(大義)를 존중해야 함을 알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최석정이 공공연히 배척하여 문자에 올리고 당시 강마(講磨)하던 바를 가리켜 곧장 실천성없는 공언(空言)으로 돌렸는데, 지난 간흉들이 선정을 얽어 무함하는 데 온갖 힘을 남김없이 썼지만 그래도 감히 이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대신의 손에서 나온 제문(祭文)으로 대신에게 제전(祭奠)을 올렸고, 이를 받들고 간 유생이 한두 명에 그치지 않았으니, 실로 사가(私家)에 간직한 문자와는 다른 바가 있습니다. 더욱이 또 유생의 소와 대헌(臺憲)의 글에 이미 그 전말(顚末)을 진달하였으며, 이세경(李世庚) 등은 또 다시 신변(伸辨)한다는 핑계로 대신을 두둔하여 피차의 말이 이미 공조(共朝)의 문자가 되었는데, 전후의 성비(聖批)에는 드러나게 한편을 두둔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군주(君主)의 말이란 한 번 나오면 사방에 전파되는 것이니, 쇠세(衰世)의 구차한 습속이 그 어찌 존주(尊周)의 대의(大義)를 참으로 밖으로만 내달리는 공언으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전하(殿下)께서 매양 문자를 보는 안목이 다르다고 말씀하였으나, 대신의 소에 이미 선정을 무함한 한 조항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스스로 변명한 말이 없었고, 이세경 등의 소에도 또한 방자하게 선정을 헐뜯는 것을 스스로 담당하였으니, 전하께서 비록 곡직하게 대신을 두둔하고자 하시지만 아마도 해명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전후 유소(儒疏)의 비답에 이미 내뜻을 다 말했다. 이러한 논의를 나는 반드시 억제하고자 하는데 너희는 반드시 부식하여 하니,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하였다.

 

정언(正言) 김재로(金在魯)가 소를 올려 한배두(韓配斗)에게 내린 정거(停擧)의 처분이 옳지 않음을 첫머리에 말하고, 또 예관(禮官)의 계사(啓辭)가 해괴함을 논하여 이르기를,
"당초에 전하께서 비록 재신(宰臣)의 소를 받아들이셨다고는 하나 그래도 벌을 푼 뒤에 전시(殿試)에 나아가게 하셨고, 끝내 비록 재임(齋任)에게 벌을 주었으나 그래도 벌을 풀기 전에 억지로 전시에 나아가게 하지는 않았으며, 비록 법식을 정하라는 분부는 있었으나 그래도 이미 시행된 벌에 구애받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으니, 이는 성의(聖意)도 또한 유벌(儒罰)의 중함을 생각하시고 전일에 없었던 거조를 새로 만들고자 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관(禮官)이 감히 태학(太學)에게 권유한 일이 미처 수습되기도 전에 앞질러 계사를 올려 유벌은 족히 돌아볼 것도 없다 하고, 오로지 이광보(李匡輔)가 혹시라도 전시에 나아가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설령 이광보의 벌이 이번 과거(科擧)에 미처 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년 봄의 전시(殿試)가 또한 멀지 않은데, 조가(朝家)에서 이광보를 등용하는 것과 이광보가 영명(榮名)을 취하는 것이 몇 달 사이에 무슨 급급하게 해야 할 바가 있기에 이렇게 전도되고 구차한 거조를 한단 말입니까. 이광보의 일이 한 번 나오자 이정숙(李廷熽)도 나쁜 본을 받아 벌을 받은 채 조금도 거리낌없이 전정(殿庭)에 들어갔으니, 조가(朝家) 거조의 득실(得失)과 사부(士夫) 풍절(風節)의 숭상되고 무너짐에 관계가 있음을 이에서 징험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예관(禮官)의 견책(譴責)을 청하고, 또 말과 행동에 있어서 반드시 마음을 평탄하게 갖고 사리(事理)를 밝게 살피는 데 힘써 뉘우침이 없도록 하여 보고 듣는 자들을 모두 마음으로 복종시킬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예관의 논계(論啓)는 스스로 집수(執守)하는 바가 있으니, 그릇 논계했다는 말은 옳다고 볼 수 없다."
하였다. 그 후에 헌부(憲府)에서 논하기를,
"예관의 논계는 전도되고 구차하여 사체(事體)를 무너뜨렸으니, 청컨대 체차하소서. 이광보는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으니, 청컨대 방(榜)에서 뽑아버리고 벌이 풀리기를 기다려 전시에 나아가게 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이정숙은 응방(應榜)하지 않았으니, 【이정숙은 벌을 무릅쓰고 과장(科場)에 들어갔으나 전시(殿試) 후에 응방(應榜)하지 않았다.】 이광보와 더불어 견주어 논할 수는 없으나, 또한 이미 벌을 무릅쓰고 전시에 나아갔으니 구별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모두 뽑아버리소서."
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다가 그 후에 다만 이광보·이정숙의 일만 윤허하였다.

 

11월 17일 을묘

6월의 도목정(都目政)을 물려서 거행하였다. 송상기(宋相琦)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택(李澤)을 부응교(副應敎)로, 김유(金楺)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심공(沈珙)·윤석래(尹錫來)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충청우도 어사(忠淸右道御史) 이진망(李眞望)이 복명(復命)하여 공주 목사(公州牧使) 채성윤(蔡成胤)을 폄직(貶職)하고 보령 현감(保寧縣監) 문덕린(文德麟)을 포장(褒奬)하였다.

 

하루 걸러 도목정(都目政)을 거행하였다. 이관명(李觀命)을 부제학(副提學)으로, 홍우서(洪禹瑞)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조성복(趙聖復)을 정언(正言)으로, 황선(黃璿)을 사서(司書)로, 권변(權忭)을 부응교(副應敎)로, 신정하(申靖夏)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11월 25일 계해

김흥경(金興慶)을 도승지(都承旨)로, 김취로(金取魯)를 지평(持平)으로, 박성로(朴聖輅)를 정언(正言)으로 삼고, 홍치중(洪致中)을 승진(陞進)시켜 승지(承旨)로 삼았다.

 

11월 27일 을축

간원(諫院)에서 논하기를,
"전(前)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규성(李奎成)과 전 경원 부사(慶源府使) 윤정주(尹廷舟)는 갑자기 신병(身病)을 핑계대어 시종 일관 체직을 도모하였습니다. 변방의 직임을 싫어하여 회피하는 데 대해서는 본래 해당되는 율이 있으니, 청컨대 본율(本律)에 의하여 치죄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충청좌도 어사(忠淸左道御史) 황귀하(黃龜河)가 복명(復命)하여 천안 군수 어유봉(魚有鳳)을 폄직(貶職)하고, 청주 목사(淸州牧使) 김진옥(金鎭玉)을 포장(褒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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