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5권, 숙종 40년 1714년 12월

싸라리리 2025. 11. 29.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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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기사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12월 2일 경오

유성(流星)이 천중(天中)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다.

 

12월 3일 신미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북도(北道)의 강 건너편에 청인(淸人)이 집을 짓고 전지(田地)를 개간하는 일에 대해서는 재자관(䝴咨官)이 탐문(探問)한 후에 주청(奏請)하라고 전교(傳敎)하셨습니다. 지금 돌아온 역관의 수본(手本)164)  을 보았더니, 영고탑(寧古塔) 수장(守將)의 진청(陳請)으로 인하여 유병(留兵)을 첨가(添加)해 두고 이어 의접(依接)할 곳으로 만들라고 황지(皇旨)를 이미 얻었다고 하니, 우리 쪽에서 편안하게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을 수 없습니다. 괴원(槐院)165)  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이런 일들은 거의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낸 일이 많았고, 곧장 주청(奏請)한 예는 일찍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또한 먼저 자문을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자문을 논리적으로 잘 만들어서 반드시 사신(使臣)이 관사(館舍)에 머무르고 있을 동안에 도달하도록 급히 일을 잘 아는 역관(譯官)을 보내어 잘 주선하도록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2월 4일 임신

얇은 옷을 입은 군사에게 유의(襦衣)를 제급(題給)하라고 명하였다.

 

승지(承旨)를 보내어 전옥(典獄)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12월 10일 무인

임금의 환후가 더하므로 약방에서 입진하여 전중혈(膻中穴)에 뜸을 떴다. 약방에서는 사옹원(司饔院)으로 옮겨 입직(入直)하고 의관(醫官) 등도 차비문(差備門)에 대령(待令)하게 하였으며, 유천군(儒川君) 이정(李濎) 또한 내일부터 따로 금중(禁中)에 입직(入直)하게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논하기를,
"충청우도 어사(忠淸右道御史) 이진망(李鎭望)이 불안한 정세(情勢)가 있다 하여 즉시 예궐(詣闕)하지 않고 비계(秘啓)를 가지고 오랫동안 사차(私次)에 머물러 있으니, 사체(事體)를 크게 잃었습니다.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이진망이 서계(書啓)를 즉시 올리지 않고 먼저 스스로 진술하는 소를 올린 것은 실로 전에 없던 거조입니다. 정원(政院)에서 처음에는 이를 곤란하게 여기다가 나중에는 마침내 받아들였으니, 유윤(惟允)의 도리166)  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청컨대 해당 승지(承旨)를 추고(推考)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택(李澤)을 응교(應敎)로, 권첨(權詹)을 부교리(副校理)로, 권변(權忭)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12월 12일 경진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12월 14일 임오

한달 전에 성주(星州)사람 김상현(金象鉉)이란 자가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 을유년167)  에 전하께서 국사(國事)를 동궁(東宮)에게 전(傳)하고자 하신 것은 국가(國家)를 위한 원대한 계획으로 극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중지하기에 이르렀으니, 신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무릇 요(堯)가 요(堯)임금이 되고 순(舜)이 순(舜)임금이 된 것은 어진이에게 전위(傳位)했기 때문이요, 우리 국가가 3백 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온 것도 우리 조종(祖宗)께서 능히 그 아드님에게 전위함에 힘입은 것입니다. 진실로 이때 요·순과 우리 조종(祖宗)의 전위한 일을 행한다면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이 그 법도가 같을 것입니다. 지난 을유년에는 전하께서 춘추(春秋)가 정성(鼎盛)하시고 세자가 나이 약관(弱冠)도 되지 않았으니, 처음 전위하고자 하셨던 것은 너무 경솔한 데에서 나온 듯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옥후(玉候)의 미령(靡寧)하심이 해마다 계속되고 세자의 나이 이미 장성(壯盛)하여 생각이 깊고 덕이 넓으니, 전하께서 을유년에 거행하려고 하셨던 일을 오늘날에 거행할 수는 없겠는지요. 전하의 본뜻은 요·순이 선양(禪讓)한 아름다운 일이요, 우리 조종께서 이미 거행한 규례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아름다운 일을 결행(決行)하여 그 때를 잃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김상현의 소는 반드시 지주(指嗾)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날 김정휘(金廷輝)의 흉언(凶言)과 더불어 한 꿰미에서 나왔으니, 곧 금부(禁府)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금부에서 대신과 의논할 것을 계청(啓請)하자, 대신이 이르기를,
"김상현의 소어(疏語)는 신자(臣子)로서 감히 마음에 품고 있을망정 입 밖에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 이런 말을 한 것은 더욱 너무나도 절통(絶痛)하니, 끝까지 신문(訊問)함이 마땅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당초에는 금부로 하여금 추문(推問)하게 하였는데, 김상현이 시종 일관 버티며 그 지주(指嗾)한 자를 고하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엄중히 형문(刑問)하라고 명하였다. 한차례 형추(刑推)한 후에 국청에서 아뢰기를,
"성상을 향하여 대역 부도(大逆不道)한 말을 이미 지만(遲晩)168)  했으니, 청컨대 조율(照律)하여 참형(斬刑)에 처(處)하소서."
하니, 임금이 분부하기를,
"지주한 자를 끝내 고하지 않았으니, 이것을 가지고 자복했다고 할 수 없다, 다시 형문(刑問)을 더하라."
하였다. 네 차례에 이르러 김상현이 또 공초(供招)하기를,
"전하께서 승하하신 뒤 김춘택(金春澤)이 반드시 찬탈(簒奪)할 것인데, 만약 세자에게 전위한다면 찬탈의 환난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정해년169)   간에 김노현(金老鉉)·김창현(金昌鉉)·김몽현(金夢鉉) 및 거창(居昌)에 거주하는 피장(皮匠) 김해익(金海益)에게서 들었으며, 무자년170)   간에 성주(星州)의 진사(進士) 이석경(李石經) 또한 이르기를, ‘김춘택이 동궁(東宮)을 모해(謀害)하는 것을 일삼고 있는데, 만약 이때 전위한다면 반드시 찬탈의 환난을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감히 이 소를 진달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그 사람들을 잡아올려 추문(推問)하고 면질(面質)시키니, 김노현·김창현·김몽현 등은 말하기를,
"김상현은 선산(先山)에 투장(偸葬)한 때문에 틈이 벌어져 일문(一門)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대면(對面)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망(誣罔)하여 끌어낸 것은 오로지 이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고, 이석경은 말하기를,
"무자년에 좌수(座首)로 있을 때 들으니, 김상현이 선위(禪位)에 대하여 상소하는 일로 상경하였다 하므로 관가(官家)에 고발하여 처치하고자 하였으나, 증거댈 만한 문자를 찾아내지 못하여 끝내 치죄(治罪)하지 못했는데, 이로 인하여 혐의를 꾸며 무망하고 끌어대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고, 김해익은 말하기를,
"김상현은 당초 얼굴을 접한 일도 없고, 이른바 김춘택은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하였는데, 면질할 때에 김상현은 드러나게 말이 막히고 꺾이는 빛이 있었다. 국청에서 다시 형문(刑問)을 더하기를 청하고 위차(威次)를 베풀자, 바른대로 고한다고 하며 말하기를,
"느닷없이 김춘택의 일을 고한 것은 형장(刑杖)을 모면할 계획이었는데, 도리어 앙화를 초래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모해와 찬탈을 스스로 계획하고 있다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각 사람들에게는 들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어내서 대답한 것이며, 지주(指嗾)에 이르러서는 만약 해당되는 사람이 있다면 몸에 극형(極刑)을 받으면서 어찌 감히 숨기겠습니까?"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이는 남을 대역(大逆)으로 무고(誣告)한 죄에 관련되는데, 소를 올린 의도를 끝내 승복(承服)하지 않고 지주한 사람도 또한 현고(現告)하지 않으니, 이 두 가지 조항으로 엄형을 가하여 정상(情狀)을 캐내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다섯 차례에 이르러 물고(物故)하자, 김춘택 및 끌어들인 여러 사람은 모두 석방하라 명하고, 김상현은 역률(逆律)로 처단(處斷)하였다.

 

12월 16일 갑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제조(提調) 조태구(趙泰耉)가 본직(本職)인 병조 판서(兵曹判書)의 해임(解任)을 청하였다. 대개 대정(大政)이 다가왔으나 조태구는 바야흐로 약원(藥院)에 입직(入直)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취재(取才)와 포폄(褒貶) 등의 일을 거행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우선 내국(內局)171)  의 직임을 체차(遞差)하게 하였다.

 

구전 정사(口傳政事)172)  로 조태채(趙泰采)를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로, 조태구(趙泰耉)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2월 17일 을유

간원(諫院)에서 논하기를,
"영릉 참봉(英陵參奉) 허극(許極)과 공릉 참봉(恭陵參奉) 권후(權厚)는 그 이름이 흉소(凶疏)에 들어 사림(士林)에 죄를 지었고, 처신이 비루하고 패려(悖戾)하여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아 욕하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재차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63책 55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46면
【분류】사법-탄핵(彈劾)

 

12월 21일 기축

황이장(黃爾章)을 정언(正言)으로, 조도빈(趙道彬)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이세근(李世瑾)을 수찬(修撰)으로, 홍석보(洪錫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12월 23일 신묘

일전에 비국(備局)에서 경원(慶源)·훈융(訓戎) 두 곳의 건너편에 청인(淸人)이 집을 짓고 전지(田地)를 개간하는 일에 대해 금지를 청하는 일로 자문(咨文)을 지어 청국(淸國)으로 역관(譯官)을 들여보냈는데, 평안 감사(平安監司) 민진원(閔鎭遠)이 치계(馳啓)하기를,
"자문(咨文)은 끝맺는 말이 너무 솔직한 데 관계되니, 다만 사세(事勢)를 참작하여 잘 지휘해 달라는 뜻으로 끝맺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그 말을 따라 그 끝맺는 말을 개정하여 밤낮없이 내려보낼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25일 계사

이때 고모(姑母)를 죽인 죄인 옥유화(玉榴花)를 국문(鞫問)하는 일로 삼성 추국(三省推鞫)을 베풀었는데, 여덟 차례를 연달아 신문(訊問)했으나 끝내 실정을 털어놓지 않았다. 문사 낭청(問事郞廳) 조상경(趙尙絅)이 소를 올려 말하기를,
"옥정(獄情)의 소루(疏漏)함이 의심스러우니, 청컨대 해부(該部)로 하여금 의심스러운 사단을 반복하여 자세히 살피고 밝게 사핵(査覈)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국청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국청에서 청하기를,
"옥유화를 우선 형조(刑曹)로 옮기고 다시 본도(本道)로 하여금 밝게 조사하여 계문(啓聞)한 후에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27일 을미

전라좌도 암행 어사 이진유(李眞儒)가 복명(復命)하여 장수 현감(長水縣監) 김진망(金鎭望)과 능주 목사(綾州牧使) 정일녕(鄭一寧)을 폄직(貶職)하고, 전(前) 남원 부사(南原府使) 이성한(李聖漢)의 탐오(貪汚)하고 법을 어긴 정상을 아울러 논핵하였다.

 

12월 28일 병신

함경북도 암행 어사 김유경(金有慶)이 복명(復命)하여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휘(李暉)를 폄직하고 무산 부사(茂山府使) 민제장(閔濟章)을 포장(褒奬)하였으며, 그 별단(別單)에 또 말하기를,
"북관(北關)의 부로(父老)들이 성상의 환후가 미령(靡寧)하심을 듣고 명산(名山)에 정성을 다하여 기도(祈禱)했으니, 이는 지성(至誠)으로 사랑하고 받드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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