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6권, 숙종 41년 1715년 1월

싸라리리 2025. 11. 2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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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무술

전교(傳敎)하기를,
"세사(歲事)가 바야흐로 새로워져서 봄일이 멀지 않은데, 이러한 때에는 권농(勸農)을 마땅히 앞세워야 할 것이다. 재해를 입어 진휼(賑恤)을 베풀어야 할 곳에도 역시 신칙(申飭)함이 마땅하니, 승정원(承政院)에서 말을 잘 만들어 하유(下諭)하도록 하라."
하니, 승정원에서 전교를 대신 지어서 팔로(八路)에 반포하여 보였다.

 

1월 6일 계묘

이만성(李晩成)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진유(李眞儒)를 수찬(修撰)으로, 조명겸(趙鳴謙)을 장령(掌令)으로, 이병상(李秉常)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1월 8일 을사

전라우도 암행 어사(全羅右道暗行御史) 김상옥(金相玉)이 복명(復命)하여 정읍 현감(井邑縣監) 윤지대(尹志大)를 폄출(貶黜)하고,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만직(李萬稷)을 포상했다.

 

1월 16일 계축

간원(諫院)001)  에서 논하기를,
"형조 판서(刑曹判書) 유명웅(兪命雄)은 순박(醇朴)하고 근신(謹愼)하는 점은 있으나, 한갓 착하기만 하고 능력이 없어서 청촉(請囑)하는 말은 그 사정(私情)을 성사시켜 주고, 외람되고 교활한 아전들이 그 간교함을 마음대로 부리고 있으니,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문학(文學) 이상성(李相成)은 행실이 야비하고 더러워서 세상에서 웃음거리로 지적되었는데, 갑자기 청선(淸選)을 더럽히니, 공의(公議)가 해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7일 갑인

김연(金演)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홍석보(洪錫輔)를 교리(校理)로, 홍중휴(洪重休)를 수찬(修撰)으로, 김상원(金相元)을 부교리(副校理)로, 황귀하(黃龜河)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1월 19일 병진

정언(正言) 조성복(趙聖復)이 전계(前啓) 가운데 유명웅(兪命雄)과 이상성(李相成)의 일에 대하여 의견이 서로 같지 않다 하여 이론(異論)을 세우고 인피(引避)하자, 정언 황이장(黃爾章)이 발론(發論)한 사람이라 하여 또한 인피하였는데, 대사간(大司諫) 홍우서(洪禹瑞)가 처치(處置)하여 말이 너무나 각박함이 많았다는 것으로써 황이장은 체직(遞職)하고 조성복은 출사(出仕)시키도록 하였다.

 

1월 22일 기미

달이 방성(房星)의 제2성(第二星)을 침범하였다.

 

1월 23일 경신

남도규(南道揆)를 집의(執義)로, 신정하(申靖夏)를 헌납(獻納)으로, 이기익(李箕翊)·조상건(趙尙健)을 정언(正言)으로, 이세근(李世瑾)을 수찬(修撰)으로, 이정제(李廷濟)를 부교리(副校理)로, 곽만적(郭萬績)을 필선(弼善)으로, 이병상(李秉常)을 겸사서(兼司書)로 삼았다.

 

1월 26일 계해

도목 정사(都目政事)002)  를 하여 이홍(李宖)을 장령(掌令)으로, 김창흡(金昌翕)을 지평(持平)으로, 김상윤(金相尹)을 사서(司書)로, 박사익(朴師益)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1월 27일 갑자

도목 정사를 하여 이병상(李秉常)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이만성(李晩成)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신사철(申思喆)을 수찬(修撰)으로, 송성명(宋成明)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재(李縡)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1월 28일 을축

유성(流星)이 문창성(文昌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다.

 

도목 정사를 하여 이택(李澤)을 겸보덕(兼輔德)으로, 이병상(李秉常)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이선행(李善行)을 설서(說書)로, 신사철(申思喆)을 겸사서(兼司書)로, 이간(李柬)을 자의(諮議)로 삼았다. 이간은 권상하(權尙夏)의 문인(門人)으로 온양(溫陽)에 살았는데, 학문과 덕행이 가장 드러나 호서(湖西) 지방에 이름이 있었다.

 

1월 29일 병인

신사철(申思喆)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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