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6권, 숙종 41년 1715년 3월

싸라리리 2025. 11. 29.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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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기해

남취명(南就明)을 승지(承旨)로, 이만성(李晩成)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황흠(黃欽)을 우참찬(右參贊)으로, 김진규(金鎭圭)를 예문관 제학(禮文館提學)으로, 홍만우(洪萬遇)를 수찬(修撰)으로, 이병상(李秉常)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이태좌(李台佐)를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약방에서 들어와 진찰을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궁노(弓弩)는 바로 싸움에서 이기는 기구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들도 강노(强弩)니 연노(連弩)니 하는 명칭이 있었던 것입니다. 박권(朴權)이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었을 때에 신과 서로 의논하여 훈국(訓局)에 두었던 것을 장교(將校) 오중한(吳重漢)에게 주었는데, 그사람이 또 별다른 의견(意見)을 내어 기괄(機括)을 변통하여 1백여 좌(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궁노는 편전(片箭) 4, 5시(矢)를 재어서 쏘면 2백 보(步)에 미칠 수 있고, 화살이 적으면 더욱 멀리 미칠 수 있습니다. 수노(手弩)는 한 사람이 줄을 당겨 틀에서 발사하면 한 화살이 문득 2백여 보에 미치는데, 대체로 편전은 활을 쏠 때에 사람이 손을 다칠 적이 많지만 이것은 그렇지가 않고 가장 전선(戰船)과 수성(守城)에 편의(便宜)하여 각 군문(軍門)에서 모두 좋게 여긴다고 합니다. 그러니 새로 1좌(坐)를 만들어 마땅히 궁 안으로 들여보내게 하고 성상께서 친히 보시거나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시험삼아 쏘아보게 하고, 그대로 반포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제조(提調) 조태채(趙泰采)도 역시 오중한(吳重漢)의 궁노가 군기로 사용하기에 유익하다고 일컬으면서 삼군문(三軍門)004)  에 분부하여 각각 수백 좌를 만들어 북한 산성(北漢山城)에 실어다 두도록 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아울러 그대로 따랐다.

 

3월 4일 경자

대사헌(大司憲) 권상하(權尙夏)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진소(陳疏)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선사(先師)가 무함받은 것을 절통하게 여겨 감히 사직 상소 끝에 대의(大義)가 흐려져 침식되고 사설(邪說)이 멋대로 자행되고 있음을 대략 진달하고 인하여 옛사람이 의리에 대처했던 일을 언급하였으나, 외람되게 자신의 정황(情況)이라 하며 성상의 성찰(省察)을 받지 못하였으니, 더욱 억울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또 들으니 근래에 한 상소에 이름을 감춘 채 암암리에 배척하고 있는데 그 말의 뜻이 심각했다고 하나, 염치(廉耻)가 있는 바 또한 어찌 다른 사람의 모멸(侮衊)을 따르며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사사로운 뇌사(誄辭)는 공가(公家)의 문자(文字)와 다르다. 그가 운운(云云)한 것이 조금도 선정(先正)에게 손실이 되거나 이익이 될 것이 없는데, 경(卿)은 어찌하여 이로써 진출하기를 어렵게 여기는 단서로 삼고 있는가? 모름지기 너무 겸양하지 말고 선뜻 조정에 나오도록 하라."
하였다.

 

3월 5일 신축

남편을 죽인 죄인 예상(禮相)이 죄를 자복하고 정형(正刑)005)  되었다.

 

3월 7일 계묘

정필동(鄭必東)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3월 9일 을사

홍중하(洪重夏)를 승지(承旨)로, 임방(任埅)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조관빈(趙觀彬)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3월 14일 경술

유성(流星)이 각성(角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경외(京外)의 정채(情債)006)  가 생민(生民)의 적폐(積弊)가 되고 있으니, 액정(掖庭)의 하인(下人) 및 각사(各司)의 이서(吏胥)의 무리에게 엄하게 금단을 더하도록 하라."
하니, 정원(政院)에서 상교(上敎)를 팔로(八路)와 양도(兩都)에 반포(頒布)하여 일체 금단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3월 18일 갑인

경기(京畿)의 이천(利川) 등 여섯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3월 19일 을묘

남치훈(南致薰)을 도승지(都承旨)로, 유봉휘(柳鳳輝)·홍우서(洪禹瑞)·김상직(金相稷)을 승지로, 김재로(金在魯)를 지평(持平)으로, 권익순(權益淳)을 사서(司書)로, 김시환(金始煥)을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3월 20일 병진

김흥경(金興慶)을 도승지로, 윤양래(尹陽來)를 문학으로, 신사철(申思喆)을 수찬(修撰)으로, 홍호인(洪好人)을 헌납(獻納)으로, 이관명(李觀命)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3월 22일 무오

남취명(南就明)을 승지로 삼았다.

 

3월 26일 임술

절제(節製)에서 수석를 차지한 유학(幼學) 강박(姜樸)에게 급제(及第)를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3월 28일 갑자

약방에서 들어가 진찰을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주언(奏言)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명준(李明浚)이 관직(官職)에 있다가 죽었는데, 그의 청렴하고 근신한 데 대한 절목은 어사가 이미 진달했습니다. 그리고 이명준은 계모(繼母)를 잘 섬겼다고 사우(士友) 사이에 알려져 있으니, 포상하여 가상히 여기는 방도가 있어야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종2품직을 추증(追贈)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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