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6권, 숙종 41년 1715년 4월

싸라리리 2025. 11. 29.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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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무진

홍중주(洪重周)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4월 5일 경오

권엽(權熀)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대사헌(大司憲) 권상하(權尙夏)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때에 임금이 액례(掖隷)에게 명하여 식물(食物)과 향온(香醞)을 권상하에게 반사(頒賜)하도록 하였는데, 권상하가 상소 가운데 이 뜻을 언급하였으므로, 임금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4월 6일 신미

박성로(朴聖輅)를 지평(持平)으로, 권변(權忭)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유숭(兪崇)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평안도 태천(泰川) 민가(民家)의 암소가 수송아지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 눈이 넷, 입이 둘, 귀가 둘이었다.

 

4월 8일 계유

교리(校理) 홍석보(洪錫輔)가 상소(上疏)하기를,
"신이 외의(外議)를 듣건대 후궁(後宮)의 지친(至親)이 변장(邊將)에 제수되었다 하여 크게 이야기거리로 삼고 있다고 하므로 전조(銓曹)의 관리를 불러 물어 보았더니, 당포 만호(唐浦萬戶) 김성달(金聲達)이 과연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공천(公賤)으로서 금려(禁旅)에 모속(冒屬)하였다가 형신(刑訊)을 받기까지 하여 세상에서 지목(指目)받던 자입니다. 그가 변장에 의망(擬望)007)  된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바로 겸사복(兼司僕)을 오래도록 근무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아무 까닭없이 천거하여 의망한 것과는 차이가 있고 산정(散政)008)  의 도정(都政)과 다르다고 하나, 그 사람의 처지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데다가 더구나 그가 겸사복에 오래 근무했다는 것도 노고를 많이 쌓은 데에 비할 바가 아니니, 이것을 가지고 비의(備擬)한 것은 착오가 있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만약 조속히 엄격하게 방비를 더하지 않으면 아마도 뒷폐단이 점차 늘어나는 일이 없지 않을 듯하니, 빨리 그 사람의 직명(職名)을 거두어 들인 뒤에야 비로소 여러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끝에 또 논하기를,
"자의(諮議) 이간(李柬)은 나이가 젊은데가 덕망을 쌓지 못했는데, 갑자기 높이 의망하였으니, 너무 갑작스럽다는 논의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의논한 것이 마땅하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즉시 그 변장(邊將)의 직임을 체차(遞差)하게 하겠다. 그리고 상소 말미의 너무 갑작스럽다는 말도 역시 삼가고 어려워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대체로 근래에 정사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태구(趙泰耉)가 김성달(金聲達)을 변장으로 의망해 차임했기 때문에 홍석보(洪錫輔)가 이와 같이 논한 것이다. 조태구가 대변소(對辨疏)를 올리기를,
"김성달(金聲達)이 그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그의 친속(親屬)이 누구인지를 어느 경로로 알 수 있겠습니까? 전일(前日)의 대정(大政)에서 각청(各廳)에서 오래 근무한 자를 모두 천전(遷轉)시키고 남은 사람은 단지 이 한 사람뿐이었는데, 마침 변장(邊將)을 많이 뽑아야 할 때를 당했으므로, 다만 본청(本廳)에서 보고한 바에 의거하여 차례로 따라 의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이 뜻이 있어서 그를 변장으로 삼은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만약 신이 평일에 수립(樹立)한 바가 한 조정의 동료들에게 신임을 얻었더라면 사람들의 말이 어찌 이에 이르렀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애당초 비의(備擬)한 것은 원래 뜻을 두었던 것이 아닌데 서로 헤아리지 못하여 한 말을 어찌 깊이 혐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4월 11일 병자

송상기(宋相琦)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박권(朴權)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4월 14일 기묘

충청도 보은현(報恩縣)에 지진이 일었다.

 

4월 17일 임오

이조 판서 송상기가 전일에 대신(臺臣)이 한영휘(韓永徽)를 논박한 일로 인하여 사직 상소를 올리기를,
"성천(成川)은 이름난 고을입니다. 지금 한영휘(韓永徽)로 하여금 한 번쯤 청량(淸涼)하고 가려(佳麗)한 지방에 나아가 오유(遨遊)하게 하는 것 또한 잘못될 것이 없는데, 자기의 뜻에 차지 않는다 하여 분노(忿怒)하여 헐뜯어 욕하고 있습니다. 한 수령(守令)의 차견(差遣)으로 인하여 이와 같이 무한(無限)한 분박(噴薄)을 당하였는데, 다시 정사(政事)하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은 염치와 의리상 나갈 바가 아닙니다."
하니, 답하기를,
"한영휘(韓永徽)의 일은 일소(一笑)에 붙이는 것이 마땅하다. 무슨 개의(介意)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처음에 송상기(宋相琦)가 전조(銓曹)의 장(長)이 되었을 때에 한영휘가 충주 목사(忠州牧使) 자리를 요구하였으나, 송상기가 따르지 않고 성천 부사(成川府使)를 제수하였으므로, 한영휘가 분노하여 이르는 곳마다 송상기에게 욕을 하니, 시론(時論)이 해괴하여 여겼으며, 조상건(趙尙健)이 대간(臺諫)에 들어가 한영휘를 탄핵했다. 송상기가 이에 이르러 이것을 가지고 전관(銓官)의 직임을 해면해 주기를 요구한 것이다.

 

4월 18일 계미

형조 판서(刑曹判書) 권상유(權尙游)가 홍석보(洪錫輔)가 소를 올려 자의(諮議) 이간(李柬)을 너무 빨리 의망(擬望)했다고 논한 일을 가지고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이간(李柬)은 글을 읽어 뜻을 구하였고 그의 행의(行誼)도 아름다운 것을 신이 일찍이 그의 사람됨을 보고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에 헌신(憲臣)이 그를 발탁하여 등용하자고 상소하여 청하였고, 뒤에 무신(撫臣)의 천거로 인하여 여러번 왕자 사부(王子師傅)로 의망(擬望)하였으니, 그가 인망을 쌓은 것 또한 오래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올봄의 도목 정사(都目政事) 때 전석(銓席)에서 상의(商議)하고 인하여 주의(注擬)하였던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이간과 같은 사람이 주연(胄筵)009)  에 참여하게 되면 권강(勸講)하는 이익이 반드시 많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유신(儒臣)의 비난과 배척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애당초 의망(擬望)이란 ‘네가 아는 사람을 천거하라.’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무엇이 불가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처음에 조정(朝廷)에서 관상감(觀象監)의 관원(官員) 허원(許遠)에게 명하여 절사(節使)를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오관 사력(五官司曆)을 만나 보고 《역법보유방서(曆法補遺方書)》와 추산 기계(推算器械)를 사오게 했는데, 허원이 사력을 만나보고 인하여 《일식보유(日食補遺)》·《교식증보(交食證補)》·《역초병지(曆草騈枝)》 등 도합 9책과 측산 기계(測算器械) 6종(種)을 얻어 왔다. 또 서양(西洋)의 자명종(自鳴鐘)을 얻어 가지고 왔는데, 그 제작된 것이 매우 기묘(奇妙)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이를 모두 임금에게 올리고 인하여 자명종을 그 모양에 의해 만들어 본감(本監)에 두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4월 20일 을유

범월(犯越)한 사람 곽만국(郭萬國)을 법에 따라 감죄(勘罪)하는 일과 궁각(弓角)의 금령을 범한 사람을 구문(究問)하는 일로 역관(譯官) 변시화(卞時和)를 차출(差出)하여 자문(咨文)을 가지고 청(淸)나라에 들여보냈다.

 

4월 28일 계사

유집일(兪集一)을 대사간(大司諫)으로, 한중희(韓重熙)를 보덕(輔德)으로, 황규하(黃奎河)를 겸설서(兼說書)로, 홍만우(洪萬遇)를 부수찬(副修撰)으로, 박권(朴權)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4월 29일 갑오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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