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6권, 숙종 41년 1715년 7월

싸라리리 2025. 11. 29.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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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갑오

유성(流星)이 위성(胃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다.

 

북병사(北兵使) 조상주(趙相周)가 치계(馳啓)하기를,
"마침 강변으로 나오는 호인(胡人)이 있기에 불러서 묻기를 ‘오라(烏羅)·영고탑(寧固塔) 두 곳의 호인이 앞으로 후춘(後春)지역으로 옮겨 살려고 한다는데, 그런가?’ 하였더니, 답하기를, ‘그렇다. 강변 근처의 땅이 비록 비옥하다 하나, 금령(禁令)이 지극히 엄하여 이미 집을 헐어 버린 일이 있었으니, 감히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후춘의 묵혀서 황폐해진 곳과 슬해(瑟海) 가의 빈 땅을 개간(開墾)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슬해는 어디에 있는 땅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후춘의 동해(東海) 가에서 하룻길의 거리이며 땅이 또한 매우 비옥하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슬해는 경흥부(慶興府)에서 동쪽으로 4, 50리 쯤 떨어져 있는 바닷가라 하는데, 들이 넓고 땅이 비옥하여 옛날에는 번호(藩胡)가 많이 살았는데, 어떤 때는 육로(陸路)를 따라 강을 건너 침범해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배를 타고 바닷길을 경유해 와서 서수라(西水羅)·조산(造山) 등의 진보(鎭堡)를 약탈했으므로, 번번이 그 피해를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피인(彼人)들이 슬해를 차지하여 살려고 한다는 말이 과연 실상(實狀)이라면 나중의 우환이 진실로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7월 2일 을미

오명준(吳命峻)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7월 3일 병신

사헌부(司憲府)에서 논하기를,
"봉산 군수(鳳山郡守) 안정서(安廷瑞)는 전에 장련(長連)을 맡았을 때 매양 사객(使客)의 행차를 만나면 읍민(邑民)들을 교유(敎誘)하여 사객이 올 길에 지켜 섰다가 자기의 포상을 청하게 하였으며, 또 사객의 하속(下屬)에게 뇌물을 주고 여러 방법으로 좋은 평판을 널리 퍼뜨리게 하였으니, 청컨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안정서(安廷瑞)는 일찍이 수의(繡衣)014)  의 포계(褒啓)에 그 치적이 한 도(道)의 최고라는 것으로 인하여 상전(賞典)을 받기까지 하였으니, 지금 논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삭거 사판하는 청은 더욱 너무 지나친 데 관계된다."
하였다.

 

7월 7일 경자

권변(權忭)을 집의(執義)로, 황규하(黃奎河)·황선(黃璿)을 지평(持平)으로, 신사철(申思喆)을 부교리(副校理)로, 조태로(趙泰老)를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삼았다.

 

7월 12일 을사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여러번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올리니, 임금이 승지를 여러번 보내어 돈독하게 타일렀는데, 김우항이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명을 받들어 출사(出仕)하였다.

 

7월 14일 정미

전교하기를,
"계사년015)  ·갑오년016)   두 해의 계복(啓覆)017)  은 잇따라 사고(事故)로 인하여 할 수가 없었다. 만약 혹 응당 죽여야 할 자가 지레 죽더라도 실형(失刑)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용서할 만한 죄수가 감옥에 병들어 죽는 것 또한 매우 불쌍하다. 올해는 삼복(三覆)은 반드시 겨울이 되기 전에 하고자 하니, 형조(刑曹)에 분부(分付)해서 형벌의 시행은 반드시 계동(季冬)을 기다려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교리(校理) 황귀하(黃龜河)의 상소(上疏)로 인하여 사직 차자(箚子)를 올렸다. 대체로 황귀하가 어영 낭청(御營郞廳)을 겸대(兼帶)하여 본영(本營)에서 빚을 징수(徵收)하는 일로 역관(譯官)을 결박해 들어갔는데, 그 때에 김창집이 바야흐로 역원 도제조(譯院都提調)가 되어 그 일을 초기(草記)하여 황귀하를 추고(推考)할 것을 청했다. 그러자 황귀하가 사직 상소를 진달하기를,
"이것이 사체(事體)에 과연 어떠합니까?"
하니, 김창집이 이 때문에 차자를 올려 대변(對辨)했는데, 노기(怒氣)띤 말이 많았다. 임금이 황귀하에게 엄한 비답을 내리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김창집을 위유(慰諭)하였다.

 

7월 15일 무신

사간원(司諫院)에서 논하기를,
"황해 병사(黃海兵使) 신익하(申翊夏)는 한낱 여색(女色)의 일로 인하여 본영(本營)의 심약(審藥)의 아들을 잡아들여 중곤(重棍)을 치자, 심약이 뜰에 서서 애소(哀訴)하니, 비가 오는 가운데 즉시 끌어내어 말을 매는 기둥에 결박하여 달아매어 놓았는데, 겨우 수일(數日)이 지나 그대로 죽었습니다. 청컨대 신익하를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고, 여러 차례 아뢰니, 비로소 윤허하였다.

 

대사간(大司諫) 홍치중(洪致中)이 상소(上疏)하기를,
"양역(良役)을 변통(變通)하는 일은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되니, 삼가 원하건대 묘당(廟堂)에 신칙하여 두루 생각하고 널리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전관(銓官)이 주의(注擬)할 즈음에 용사(用舍)가 너무 편벽되어, 여탈(與奪)하고 조종(操縱)하는 것이 한때의 호오(好惡)만을 따르고 있으므로, 전하(殿下)께서 매양 인물을 진퇴(進退)시킬 때를 당하여 부호(扶護)하고 억제하심이 형평을 잃고 있습니다. 지난날 시종(侍從)의 반열(班列)에 출입하던 사람으로 까닭없이 폐기(廢棄)된 자가 매우 많은데, 간혹 한두 사람 보충하여 의망(擬望)하는 바가 있어도 전하께서 또 물색(物色)하시며 낙점(落點)을 아끼시니, 이 또한 시끄러운 사단이 일어날까 혐의하셔서 힘써 진정(鎭定)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나, 어찌 먼저 말썽이 있을 것을 의심하여 스스로 총명(聰明)을 막으시는 것입니까? 바라건대 전조(銓曹)의 신하에게 신칙하여 피차에 구애함이 없이 오로지 재능 있는 자만 등용하게 하소서."
하고, 말단에 말하기를,
"황귀하(黃龜河)의 상소에 내린 비답의 사지(辭旨)는 중도에 벗어났으며 부호하고 억제하심이 너무 편벽되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양역(良役)을 변통하자는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하게 해서 기필코 잘 변통하도록 하겠다. 전조(銓曹)에서 인물의 용사(用舍)는 대체로 공의(公議)를 따르고 있으니, 호오(好惡)에 따른다는 말은 자못 타당하지 못하다. 오로지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해야 한다는 말은 논한 바가 참으로 좋으니, 또한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황귀하의 소장 속의 말은 지극히 미편(未便)하니, 나의 처분(處分)이 너무 편벽되다고는 보지 않는다."
하였다.

 

지평(持平) 황규하(黃奎河)가 상소(上疏)하여 맨 먼저 양역(良役)을 경장(更張)하는 데 대한 대책을 말하고, 다음으로 북한 산성(北漢山成)은 역사(役事)가 커서 재정의 소모가 있음을 말하면서 이르기를,
"조지서(造紙署)에 창고를 설치한 것은 오로지 군량을 운반하기 위한 것이고, 수문(水門)의 익성(翼城)은 절차가 장대(張大)해서 엄연한 하나의 성(城)과 같습니다. 대저 한 도성(都城)이라도 오히려 그 규모가 넓고 큰 것을 병통으로 여기는데, 지금 세 성은 둘레가 갑절이 될 뿐만이 아니니, 설혹 위급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선 역사를 정지하게 하고 다시 묘당에 물어서 지킬 만한지를 알아본 다음에 쌓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리청(經理廳)에서 주관하여 수호(守護)하는 것은 이미 명목(名目)에서 벗어나 공급(共給)과 수응(酬應)을 모두 저 경외(京外)에서 취하고 있는데, 점포를 설치하고 뚝[堰]을 쌓으려면 소요스러움이 많을 것이니, 빨리 경리청을 없애고 양주목(楊州牧)을 산성(山城)에 옮겨야 합니다. 이것이 만약 불편하다면 유양(維楊)의 두세 지역을 분할하고 고양(高陽)의 한두 면(面)을 나누어서 고을을 설치하여 수령을 둔다면 전일하게 주관(主管)할 수 있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군량(軍糧)의 조적(糶糴)018)  은 원근(遠近)의 민인(民人)이 도로(道路)에서 쓸데없이 허비하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본래의 조곡(糶糴) 이외에도 모곡(耗穀)까지 운반해야 하므로, 받고 싶어하는 백성이 없고 원망하는 소리만 길에 가득합니다. 신은 또한 생각하건대 개색(改色)019)  만 허락하고, 그 모곡은 받지 말아서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명(聖明)께서 권상하(權尙夏)를 대우하시는 것이 지극하십니다. 발탁하여 숭반(崇班)에 두시고 돈독하게 부르시어 버려 두지 않으시고 또한 일찍이 전석(前席)에서 그 아우를 면유(面諭)하여 그로 하여금 출사(出仕)하도록 권고하게 하셨습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정성스런 예를 더욱 도타이 하셔서 기필코 나오게 하여 성학(聖學)의 고문(顧問)을 의뢰하시고, 겸하여 동궁(東宮)의 보도(輔導)를 책임지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김창흡(金昌翕)은 높은 지조가 유속(流俗)에서 뛰어난 사람인데, 풍헌(風憲)의 직책을 얼마 안가서 체직당했으니, 이 어찌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이간(李柬)은 스승의 문하(門下)에서 익히면서 몸을 검속하고 행실을 닦은 사람인데, 논하여 배척하는 말이 갑자기 논사(論思)하는 자리에서 내었으니, 신은 혼자서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양역(良役)의 한 조목은 이미 간장(諫長)020)  의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에서 유시하였다. 북한 산성의 역사를 겨우 마치고, 큰 계획을 이미 정하여 대신(大臣)이 주관(主管)하며 또 한창 구획(區劃)하고 있는데, 헐뜯는 의논이 이 지경에 이르고 있으니,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내가 찬선(贊善)을 돈독하게 부르기를 빈번하게 했을 뿐만이 아닌데, 멀리 떠나 있는 마음을 돌릴 수 없는 것은 진실로 정성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항상 부끄러워 얼굴 붉어지는 마음이 절실하였다. 너의 말이 상세한데 생각을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7월 18일 신해

경상도 개령현(開寧縣)에 큰 비가 와서 1백여 호(戶)의 인가(人家)가 물에 잠겼는데, 진휼(賑恤)의 은전(恩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 21일 갑인

부응교(副應敎)        오명항(吳命恒)이 상소(上疏)하였는데, 그 첫머리에 이르기를,
"심기(心氣)를 평안히 가지시고 사려(思慮)를 적게 하시고 기거(起居)를 근신하시고 음식(飮食)을 절제하셔서 원기(元氣)를 다시 왕성하게 하여야 묵은 병환이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세자가 해를 넘기며 시탕(侍湯)하시느라 서연(書筵)과 소대(召對)를 정폐(停廢)한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니 때로 궁관(宮官)을 인접(引接)하여 앞에서 서사(書史)를 강설(講說)하게 하고, 전하(殿下)께서도 왕세자로 하여금 곁에 모시면서 강마(講劘)하게 하여 학문의 연구를 폐지하지 않게 하신다면 어찌 위 무공(衞武公)의 억계(抑戒)021)                  를 외는 것보다 더욱 빛나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양역(良役)의 변통(變通)에 대한 방법을 말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정사(政事) 때 주의(注擬)하는 사이에 용사(用舍)가 너무 편벽되어 어떤 때는 한결같이 배척하기만 하고 어떤 때는 까닭없이 진출을 가로막아 천조(天曹)022) 좌이(佐貳)023)                  의 전망(前望)이 막힘을 당한 자가 네 사람이나 되는 많은 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진년024)                  에 상소하여 논의한 여러 신하들이 한결같이 저지[搪塞]되었는데, 막힌 것을 소통(疏通)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하원(李夏源)의 경우 그 한 몸을 금고(禁錮)025)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그의 숙부(叔父) 이의만(李宜晩)에게까지 연급시켜 무단히 의망(擬望)을 정지시켰으며, 간장(諫長)의 상소는 참으로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데도 전하께서는 이를 과당(過當)하다고 전교하셨습니다. 서명우(徐命遇)의 한때 올린 소어(疏語)가 무슨 대죄(大罪)이기에 큰 은혜를 내리신 뒤에도 오히려 한 번의 서용(敍用)을 아끼고 계시니, 어찌 포용(包容)하시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정호(鄭澔)의 내천(內遷)026)                  에 있어서는 전망(前望)으로서 서울에 있는 무고(無故)한 자가 많았는데, 정호처럼 편협(褊狹)하고 각박(刻薄)한 사람을 반드시 끌어들이고자 하시어 외임(外任) 세 사람을 일망(一望)에 아울러 모이게 하였으니, 전관(銓官)의 일 또한 수고롭다 하겠습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대사성(大司成)        임방(任埅)은 명론(名論)이 본디 가벼운데다 늙어 정신을 흐린 것이 특히 심하여 보통 과시(課試)에도 이미 그 임무를 감당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임진년 전강(殿講) 때에 진사(進士) 전익민(全益敏)이 《역경(易經)》을 매우 정통하게 외어 대신(大臣) 이하가 모두 통첨(通籤)을 꺼냈는데, 유독 임방만은 혼몽한 채 이를 살피지 못하고 잘못 불(不)자를 꺼내어 순통(純通)한 거자(擧子)로 하여금 급제(及第)를 내려 주는 은혜를 받지 못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땅히 소장(疏章)을 올려 인죄(引罪)했어야 하는데, 혹시 성명(聖明)께서 그의 혼궤(昏憒)함을 아실까 두려워하여 숨기고 자수(自首)하지 않고 있으니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파직(罷職)하시고, 또한 정운형(鄭運亨)의 전례(前例)에 따라 그의 억울함을 펴게 하소서. 신은 유봉휘(柳鳳輝)의 일에 대하여 또한 개연(慨然)하게 여기는 바가 있으니, 아무 일은 바로 명의(名義)에 있어서 수혐(讎嫌)이 된다고 말하지 않고 강제로 오멸(汚衊)을 가하였으니, 유봉휘가 한 번 신백(伸白)하고자 하는 것도 어찌 그만 둘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난번 영백(嶺伯)의 상소는 그 억제(抑制)가 더욱 심각하였고, 성상의 비답(批答)에서도 부호(扶護)하고 억제하심이 너무 편중(偏重)함을 면치 못하셨으니, 혹 굽어살피지 못하셔서 그러하십니까?"
하니, 답하기를,
"상소(上疏) 가운데 의논하여 처치할 만한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하여 계품하도록 하였다. 논의가 둘로 나뉘어지고 정지(情志)가 막혀서 전형(銓衡)을 맡은 신하로서 문득 공척(攻斥)을 받으니, 일찍이 수일 동안 그 자리에 편안히 있었던 자가 없었으므로, 나는 진실로 그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이세덕(李世德)·조원명(趙遠命)의 상소가 비록 매우 잘못되고 사리에 어긋났다 하더라도 어찌 이것 때문에 끝내 버릴 수 있겠는가마는, 이하원(李夏源)에 이르러서는 마음씀이 바르지 못하고, 서명우(徐命遇)의 상소는 그 말이 위험하여 지극히 해완(駭惋)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람은 결코 쉽게 거두어 서용할 수가 없다. 정호(鄭澔)는 참으로 병통이 없지는 않으나, 또한 스스로 취할 만한 점이 있어서 지금 내직(內職)으로 옮겼으니, 나는 그 불가함을 보지 못하겠다. 전익민(全益敏)의 일은 비록 억울한 듯하나, 4년 뒤에 다시 의논하는 것은 온당하지가 않다. 임방의 일은 한때 착각에서 나온 것에 불과한데, 추급하여 죄벌(罪罰)을 베푸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그의 혼미함을 알까 두려워서 숨기고 자수(自首)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더욱 지나친 말이다. 훙우녕(洪禹寧)의 상소는 억제한 것이 아니었으니, 비지(批旨)가 편중(偏重)하다는 말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바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상기(宋相琦)·참의(參議) 조도빈(趙道彬)이, 홍치중(洪致中)과 오명항(吳命恒)이 정사(政事)의 주의(注擬)에 대해 상소를 올려 논박한 일로 인입(引入)한 채, 개정(開政)하라는 명을 내린 지 여러 날이 되었으나 소명(召命)을 어기고 나가지 않았다. 참판(參判) 이만성(李晩成)이 정체(呈遞)되자, 임금이 참판을 대신에게 물어서 차출하라고 명하니, 신임(申銋)을 참판으로 삼았다.

 

7월 22일 을묘

전교하기를,
"수령(守令)을 자주 체임(遞任)하는 것은 매우 책성(責成)027)  하는 뜻이 아니다. 완읍(完邑)이 탕진되어 퇴패(頹敗)해져도 수습(收拾)할 수가 없으니 이러한 폐단을 염려하여 항상 더욱 신칙(申飭)하였는데도, 매양 허투(虛套)로 돌아가고있으니, 진실로 매우 미안하다. 명백하게 정탈(定奪)028)  하는 거조가 없을 수 없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는데, 이 뒤에 비국(備局)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양사(兩司)029)  에 출입한 사람은 외임(外任) 2년 안에 다른 데로 옮길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을해년030)  의 수교(受敎)가 있으니, 비록 옥당(玉堂)031)  관원으로서 외직에 오랫동안 있다가 내직으로 의망된 자라고 할지라도 또한 오직 처분(處分)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 밖의 치적(治績)이 본래 현저(顯著)하지 않거나 특별히 차서를 뛰어넘어 승진된 자를 제외하고는 성상(聖上)의 전교에 따라 일체 체직하여 옮기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문흥(李文興)을 사간(司諫)으로, 이홍(李宖)을 헌납(獻納)으로, 박사익(朴師益)을 정언(正言)으로, 홍중주(洪重周)를 장령(掌令)으로, 김취로(金取魯)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좌의정 김창집(金昌集)·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청대(請對)하고 입시(入侍)하였다. 삼공(三公)이 모두 병(病)이 조금 나았을 때 경계해야 한다고 진달하니,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서종태가 여러 지방의 농사 형편이 들었는데, 그 중에도 북로(北路)032)  가 더욱 심하여 민사(民事)가 걱정스럽다는 뜻을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일은 경장(更張)에 관계되는 것인데, 조정의 의논이 나뉘어져 있으니, 반드시 소요의 단서가 많을 것입니다. 대간(臺諫)의 상소에는 비록 아직까지 구획하지 못한 것을 허물로 삼고 있으나, 신 등의 역량으로는 끝내 용이하게 변개(變改)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김창집은 말하기를,
"호포(戶布)·구전(口錢)·결포(結布) 중에서 편의한 대로 의논하여 결정할 수 있는 것을 다시 상확(商確)해서 후일에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다.

 

7월 25일 무오

일전에 공조 판서(工曹判書) 조태채(趙泰采)가, 황규하(黃奎河)가 상소하여 논한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일을 가지고 상소하여 논변(論辨)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었는데, 이에 이르러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또 상소하여 논변하기를,
"수문(水門)을 수축하는 것은 후일의 외적(外賊)을 대비하기 위한 일뿐만 아니라, 양향(糧餉)을 쌓아 두려는 곳인데, 어찌 그 동구(洞口)를 막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후의 역사에 혹의 외방(外方)의 남아도는 저축을 취(取)하거나 혹은 편의에 따라 요리(料理)하였으니, 재정(財政)을 소모했다는 말을 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군향의 조곡(糶穀)에 있어서 모곡(耗穀)을 내게 하는 규정도 역시 남한 산성(南漢山城)이나 강도(江都)033)  와 다름이 있을 수 없었으니, 한 점포(店鋪)를 설치하고 한 둑[堰]을 쌓는 것과 같은 일들이 백성을 소요하게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울러 들추어내어 마치 작희(作戱)하는 자의 하는 짓과 같은 점이 있으니, 어찌 믿지 못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지금의 북한 산성은 옛날의 진양(晉陽)034)  과 같다. 후일에 돌아가 의지할 대계(大計)를 이미 결정했는데, 나이 젊은 대신(臺臣)의 말은 전혀 자세히 헤아려 보지 않은 것으로서, 지극히 망령되고 경솔하였다. 그러므로 소장에 대한 비답 가운데 이미 온당치 않다는 뜻을 보였다. 경(卿)의 차자(箚子)는 명백하다고 이를 만하며, 또 경이 주관(主管)한 이래로 마음을 다하여 구획(區劃)하고 있으므로, 나는 믿는 바가 있어서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헐뜯고 배척하는 것을 어찌 혐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7월 26일 기미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상소하기를,
"홍치중(洪致中)이 상소하기를, ‘논의가 궤열(潰裂)되어 호오(好惡)가 각각 다르다.’ 하였는데, 지금 홍치중이 말한 요체(要諦)는 한낱 편벽된 논의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신이 매양 삼사(三司)035)  의 의망(擬望)이 있을 때를 당하여 만일 연고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섞어서 아울러 의망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의심과 노여움이 먼저 앞서고 취모 멱자(吹毛覔疵)036)  하는 일이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비록 홍치중과 같이 스스로 화평(和平)하다고 이르는 사람으로도 이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야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고, 또 오명항(吳命恒)의 상소에 대하여 변명하기를,
"임진년037)  에 상소(上疏)하여 논한 사람들은 그 속에서 소통(疏通)된 사람이 없지 않았으니, 영원히 폐기(廢棄)되었다는 말은 이미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의만(李宜晩)에 대해서는 신이 연전에 잇따라 옥당(玉堂)과 춘방(春坊)의 망(望)에 주의(注擬)했었는데, 이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과연 근사한 말입니까? 외임(外任)을 일망(一望)에 아울러 주의하는 것도 지금 처음 있는 일이 아닌데, 유독 부제학(副提學)의 망에 대해서만 이와 같이 심각하게 논란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이르기를,
"전후의 취모 멱자하는 비방이 번번이 전지(銓地)에 미치고 있으니, 전지에 처하고 있는 자도 역시 어렵게 되었으나, 경은 지나치게 스스로 인혐(引嫌)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7월 27일 경신

유성(流星)이 시루성(市樓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우림성(羽林星) 위에서도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7월 30일 계해

홍우서(洪禹瑞)를 승지(承旨)로, 민진후(閔鎭厚)를 판윤(判尹)으로, 김상원(金相元)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어유귀(魚有龜)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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