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계사
송성명(宋成明)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의만(李宜晩)을 부수찬(副修撰)으로, 황귀하(黃龜河)를 교리로, 윤양래(尹陽來)를 필선(弼善)으로, 이성조(李聖肇)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9월 3일 을미
임금이 특별히 하교(下敎)하여 사관(史官)을 대사헌(大司憲) 권상하(權尙夏)에게 보내어 유지(諭旨)를 전하기를,
"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렸을 적에 배우는 것은 장성해서 행하려고 하는 것인데, 본래 세상을 과감하게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고서는 군부(君父)에게 지우(知遇)를 받고도 끝내 나오지 않은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경(卿)은 대대로 국록(國祿)를 먹어온 신하로서 기쁨과 슬픔을 나라와 함께 해야 하는 의리가 있는데다가 일찍이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받고 있었으니, 이에 내가 빈번하게 돈소(敦召)하여 좌우(左右)에 있게 하려는 것이다. 경이 만약 한 번 나와서 가슴속에 쌓은 역량을 펴고, 인하여 주연(胄筵)에 출입(出入)한다면, 국가에 도움이 되고 춘궁(春宮)을 보도(輔道)하는 것이 또한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지난해 경연(經筵)에서 형조 판서로 불러 면유(面諭)하기에 이르렀었고, 전후하여 비지(批旨)를 또한 부지런하고도 지극하게 내렸는데, 다만 나의 정성이 얕고 예우(禮遇)가 가벼워서 동강(東岡)을 굳게 지키고 기꺼이 마음을 돌리지 않으니, 나의 결연(缺然)하고도 부끄러워 탄식하는 심정은 이미 말할 수가 없으며, 질병 속에서도 생각이야 또한 어찌 조금인들 해이졌겠는가? 이때에 경이 조정에 나오기를 바라는 심정은 큰 가뭄에 구름과 무지개를 바라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니, 경은 모름지기 깊이 헤아려서 멀리 하려는 그 마음을 빨리 돌이켜 선뜻 나와서 힘써 나의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4일 병신
김상원(金相元)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제주(濟州)에서 사는 백성들이 곡식을 옮겨서 진휼(賑恤)하여 구제해 준 데 대해 나라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부로(父老) 4인을 보내 왔는데 토산물인 화복(花鰒)과 인복(引鰒)을 가지고 먼 길을 걸어서 서울에 올라와 주원(厨院)049) 에 바치기를 청하였는데, 해관(該官)에서 허락하지 않으니, 격고(擊鼓)하여 울면서 호소하였다. 추조(秋曹)050) 에서 그 사실을 계품하니, 받아들이지 말고 놓아 보내도록 명하였다.
9월 5일 정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임금의 환후(患候)에 여러 증세가 조금 나았으므로,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주언(奏言)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는 해방(該房)의 승지(承旨)로 하여금 각각 공사(公事)를 가지고 때때로 들어와서 재결(裁決)을 받도록 했었는데, 이는 참으로 훌륭한 규례입니다. 만약 환후가 조금 나았을 때에 해방으로 하여금 공사를 가지고 들어와서 재결을 받게 한다면, 거의 막힌 것을 소통시키는 데에 유익할 것입니다. 계복(啓覆)은 문서(文書)가 너무 많아서 수응(酬應)하기에 해로움이 있으니, 아직 두어 달 뒤로 물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계복을 거행하지 못한 지 거의 3년이 되었으므로, 반드시 겨울이 되기 전에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9월 6일 무술
헌부(憲府)에서 논하기를,
"요즈음 여항(閭巷)에 사치(奢侈)의 풍조가 극도에 달하여 혼례(婚禮)에 반드시 침장(寢帳)을 사용하는데, 어떤 사람은 금수(錦繡)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피(儷皮)051) 를 폐백으로 사용하던 고례(古禮)는 이제 회복할 수 없으나, 현훈(玄纁)052) 2단(段)은 나라의 풍속이 누구나 똑같습니다. 오직 저 여항의 부유한 자들은 은금(銀金)·주패(珠貝)·사릉(紗綾) 등속을 반드시 함(函)에 가득 채운 뒤에야 그만두는데, 비록 이에 밑도는 자라 할지라도 본받아 주면(紬綿)으로 많음을 자랑하니, 가난한 자들은 이것을 마련할 힘이 없어서 대륜(大倫)의 시기를 놓치게 되어 더러 죽을 때까지 장가를 들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혼례에 쓰는 침장과 보내는 폐백(幣帛)은 두 가지를 넘는 자는 금조(禁條)를 첨부해 기록하여 일체 금단(禁斷)케 하소서.
도량형(度量衡)의 제도를 똑같이 규제하는 것은 나라에서 먼저 힘써야 할 일인데, 각사(各司)와 각 열읍(列邑)의 형평(衡枰)·두곡(斗斛)이 아직까지도 그 경중(輕重)과 대소(大小)가 균등하지 못한 바가 있는데, 만약 각별히 엄격하게 신칙(申飭)하지 아니하면, 간교한 습성을 막을 길이 없을 것이니,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엄한 과조(科條)를 세워서 먼저 공가(公家)의 형평이 균일하지 않은 것을 바로잡고, 여리(閭里)와 시장(市場)에서 쓰는 것도 낙인(烙印)하여 반포해 준 다음 낙인이 없는 도량형은 일체 방금(防禁)하게 하소서."
하였다.
9월 8일 경자
은진(恩津)에 사는 적모(嫡母)의 소생 여동생을 음간(淫奸)한 죄인 조훈상(趙勛相)을 잡아다가 삼성 추국(三省推鞫)053) 을 베풀었다.
지평(持平) 조영복(趙榮福)의 상소(上疏)하여 맨 먼저 권상하(權尙夏)를 특별한 유시로 부른 일에 대하여 성덕(聖德)을 찬양하고, 또 말하기를,
"참의(參議) 이희조(李喜朝)의 경술(經術)과 행의(行義)는 성명(聖明)께서 알고 계시는 바입니다. 그리고 세상 일에 유의(留意)하여 정무(政務)에 정통(精通)하니, 청컨대 특별히 돈독한 소명(召命)을 내려 힘써 나오게 하는 것으로 기약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몸소 실천하는 교화는 궁액(宮掖)054) 에서부터 먼저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난번 연령군(延齡君)의 출합(出閤)055) 때문에 해조(該曹)로 하여금 구궁(舊宮)을 보수(補修)하게 하였는데, 주관(主管)하는 사람이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하는 데에 힘써서 당우(堂宇)가 몹시 썩어 허물어지지도 않은 것을 모두 바꾸어 새롭게 하였으며, 그 가운데 누각(樓閣)의 주춧돌은 4개를 갑자기 바꾸어 40냥의 백금(白金)을 주고 사오게 했습니다. 옛날 한 문제(漢文帝)는 노대(露臺)056) 의 1백 금(白金)은 중인(中人) 10가구의 재산이라고 말하였는데, 어찌 꼭 바꾸지 않아도 될 주춧돌을 바꾸기 위하여 중인 4가구의 재산을 낭비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9월 11일 계묘
헌부에서 논하기를,
"여름에 생선전(生鮮廛) 사람의 공사(供辭)에 어떤 사람은 주원(厨院)의 부제조(副提調) 서평 도정(西平都正)이 감선(監膳)을 빙자하여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빈번히 두 마리의 좋은 고기를 거두었다 하고, 어떤 사람은 값을 조금 주고 수동(數同)의 청어(靑魚)를 강제로 거두었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그의 두 여복(女僕)을 생선전 안에 들여보내어 그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이 공초(供招)와 같다면 명백하게 핵실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약 혹시라도 거짓을 꾸민 부분이 있다면, 체통(體統)이 달려 있는 일인 만큼 역시 그대로 놓아 둘 수 없으니, 청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생선전 사람들을 수금(囚禁)하게 하소서. 그리고 서평 도정(西平都正) 이요(李橈)는 감선(監膳)을 빙자하여 폐단을 지은 실상(實狀)이 생선전 사람들의 공초에 낭자하게 나왔으니, 그 염우(廉隅)에 있어서 마땅히 사면(辭免)해야 할 것인데, 지금 여러 달이 지나도록 염치를 무릅쓰고 그대로 그 자리에 버티고 있으니, 버려둔 채 논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사옹원 부제조(司饔院副提調) 서평군(西平君) 이요를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바가 마땅함을 보지 못하겠다. 번거롭히지 말라."
하였다.
김상윤(金相尹)을 정언(正言)으로, 박봉령(朴鳳齡)을 대사간(大司諫)으로, 홍석보(洪錫輔)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장차 연경(燕京)에 가므로 떠나기 전에 영릉(寧陵)057) 에 전배(展拜)하려 한다고 하니, 말을 주어야 좋겠다."
하니,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 등이 모두 말하기를,
"인신(人臣)이 사사로이 능침(陵寢)을 배알(拜謁)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미안하니, 말을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깨닫고 말을 주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 뒤로 교리 송성명(宋成明)이 논사소(論事疏)를 올리면서 그 상소 끝에 말하기를,
"능침을 사사로이 배알하는 일은 방금(邦禁)이 지극히 엄합니다. 그리고 상소를 올려 품달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군상(君上)으로 하여금 이를 알고 계시게 하였으니, 근신한다고 일컬어지는 동평군에게 어찌하여 갑자기 이런 일이 있는 것입니까? 궁금(宮禁)이 엄하지 못함을 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고, 이어 청하기를,
"방지하는 한계를 더욱 엄하게 하여 궁궐 안의 말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시고, 바깥의 말이 궁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대의(大意)가 좋다."
하였다. 대개 정재륜이 효종(孝宗) 때 영풍군(靈豐君) 이식(李湜)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소장(疏章)을 올려 은총을 바란 것인데, 소초(疏草)를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보내어 보이자, 오태주 집안의 구우(舊友)로서 내사(內司)에 소속되어 있는 자가 마침 그 말을 듣고는 곧바로 전했던 것이다. 임금의 하교(下敎)는 대체로 말미암은 것인데 오태주가 상소하여 자수(自首)하자, 임금이 비답을 내려 대죄(待罪)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정재륜(鄭載崙)도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9월 13일 을사
헌부에서 논하기를,
"괴원(槐院)058) 의 권선(圈選)은 사체가 엄중하여 상박사(上博士)는 원래 권점(圈點)하는 예(例)가 없는데, 이번에 분관(分館)059) 할 때 행수관(行首官) 김유(金濰)가 손수 권점(圈點)을 창시(創始)하여 혼동해 계수(計數)하고, 과명(科名)이 암담(黯黮)하다 하여 지망(地望)이 맞지 않는 자도 모두 권선에 참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갑오년060) 의 방목(榜目)에 이르러서는 회권(會圈)하여 뜯어보려 할 즈음에 갑자기 찍은 권점을 살펴보지 못했다고 칭탁하여 사사로이 참고해 보고는 마침내 불에 태우고, 서둘러 권점을 다시 하여 인망과 문벌이 적합한 자로 하여금 무단히 누락되게 하였으니, 공선(公選)을 엄정하게 하고 후폐(後弊)를 막는 도리에 있어서 결코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승문원의 행수관(行首官)과 장무관(掌務官)을 아울러 종중 추고(宗重推考)하도록 명하시고, 이번의 분관은 즉시 권점을 다시 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가, 재차 아뢰니, 답하기를,
"권점을 다시 하는 일은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에 이돈(李墩)의 손자 이시형(李蓍亨)이 할아버지 이돈을 위해 격고(擊鼓)하여 억울함을 송사하자, 이를 형조 당상(刑曹堂上)이 잇따라 유고(有故)하여 복계(覆啓)하지 못한 지 이미 3년이 되었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반복하여 다시 조사해 보니, 별로 신원(伸寃)해 줄 만한 단서가 없다고 복주(覆奏)하였다.
9월 14일 병오
부교리(副校理) 송성명(宋成明)이 상소하기를,
"성상(聖上)의 환후(患候)가 여증(餘證)이 더했다 덜했다 하여 때로 평안을 잃으실 적이 있으므로, 한만(閑漫)한 공사(公事)와 긴급하지 않은 소장(疏章)은 정원(政院)에서 스스로 짐작해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약원(藥院)에서 너무 까다롭게 방금(防禁)하여 크고 작은 장소(章疏)를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으레 도승지에게 묻기 때문에, 제조(提調)와 도제조(都提調)가 그대로 따라 재단(裁斷)하고 있으니, 출납(出納)의 권한이 오로지 약원에 돌아가고, 후설(喉舌)의 직임을 맡은 관청은 문득 용관(冗官)061) 이 되어 버렸습니다. 혹 받아들인 장소(章疏)가 조금이라도 성상의 뜻에 어긋나면 다른 날 들어가 아뢰되, 번번이 아뢰기를, ‘공사를 받아들인 것이 너무 많아서 이런 번뇌(煩惱)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추고하고 신칙하라는 청을 거듭 되풀이하여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언사소(言事疏)가 가장 민망하다는 말을 전석(前席)에서 하기에 이르렀으니, 앞으로 거의 많은 사람들의 입을 막고 사방의 청문(廳聞)을 가로막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전(廈氈)이 오래도록 비어 있어서 여러 신하의 심정이 서로 답답하게 여기던 나머지에 갑자기 편전(便殿)에서 차대(次對)하시겠다는 명(命)을 내리셨으니, 위의(威儀)를 간략히 하여 조용히 물으신다면, 신기(神氣)를 손상시킴이 없고 치도(治道)에도 보탬이 있을 것인데, 삼성 추국(三省推鞫)을 한 이튿날 무슨 구애받을 일이 있기에 갑자기 조금 지체하자고 청하는 것입니까? 옛날 한 고조(漢高祖)가 병이 있어 홀로 한 환관(宦官)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데, 번무양(樊舞陽)062) 이 대궐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가니 대신(大臣)이 뒤따랐습니다, 아! 당당한 성조(聖朝)의 보상(輔相)의 지위에 있는 신하가 한(漢)나라 조정의 한낱 무부(武夫)만도 못한단 말입니까? 일전에 한 간관(諫官)이 피혐(避嫌)하는 소초(疏草)를 소매에 넣고 대각(臺閣)에 나아가니, 정원에서 말하기를, ‘해가 저물어서 우선 물리친다……’ 하므로, 간관이 할 수 없이 물러나왔는데, 이것 또한 전에는 듣지 못하던 일입니다. 대간의 전계(傳啓)는 비록 깊은 밤이라 하더라도 정원에서 어떻게 감히 제마음대로 물리칠 수 있으며, 불러서 들어가고 불러서 도로 나왔다 하니, 어찌 우습지 않습니까?"
하고, 끝으로 동평위(東平尉)의 일을 논하니, 답하기를,
"한 가지 질병이 해를 넘기도록 완전히 소생할 기약이 없으니, 수응(酬應)이 혹 지나치면 기운이 화평하지 못하다. 약방의 신하들은 증후(證候)를 자세히 알고 있기 때문에, 전후하여 진달한 것이므로 모두 근심하고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니, 노하거나 미워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매우 힘써 공척(攻斥)하여 조금이라도 성상의 뜻에 어긋나기만 하면 이라거나, 여러 사람의 입을 막는다거나, 사방의 청문(聽聞)을 가로 막는다는 등의 말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더욱 지극히 예사롭지 못하다. 나는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9월 15일 정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송성명(宋成明)의 상소로 인하여 사직 차자를 올리기를,
"성상의 환후(患候)가 오래도록 낫지 않고 있으므로, 감히 물러가지 못하고 3년 동안 금직(禁直)하면서 자주 청연(淸燕)에 배시(陪侍)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오늘날 간우(艱虞)가 비록 눈길 닿는 곳마다 가득하나, 하고 많은 일 가운데 성상의 옥체를 보호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다고 여겼으므로, 무릇 조금이라도 조섭(調攝)하시는 데에 해로울 만한 것은 일체 정지하시기를 주청하였는데, 이미 지난 봄부터 점점 헐뜯는 말이 들렸으며, 권세를 잡았다고 했지만 오히려 감히 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삼가 요즈음 보건대 혹 장독(章牘)이 겹처 들어오게 되면, 그날 밤에 반드시 번열(煩熱)이 있고 잠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항상 지신(知申)063) 을 대하면 날마다 계고(戒告)를 새롭게 하였고, 때로는 전석(前席)에서 경책(警責)을 더하도록 청하기도 하였는데, 지금 유신(儒臣)들이 말하기를, ‘출납(出納)의 권한이 오로지 약원(藥院)으로 돌아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출납(出納)에 대해서는 진실로 일찍이 물어본 적도 없으니, 비록 재단(裁斷)하고자 하더라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차대(次對)를 늦춘 것은 대신(大臣)이 이미 국문에 참여하여 입대(入對)하는 것이 미안하다 하였고, 또 그날 성상께서 침수(寢睡)가 편안하지 못하시므로, 감히 수일 동안 조금 늦출 것을 주청한 것이고, 원래 정지하기를 청한 것은 아닌데, 무슨 국사(國事)에 손상될 것이 있었겠습니까? 이른바 사람의 입을 막고 사방의 청문(聽聞)을 가로막는다는 등의 말은 인신(人臣)으로서의 극한적인 죄인데, 신이 대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이런 악명(惡名)을 받고 장차 무슨 낯으로 다시 금문(禁門)에 들어가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경(卿)이 진달한 것은 진실로 근심하고 사랑하는 데서 나온 것이니, 뜻밖에 나온 사람들의 말을 어찌 반드시 혐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제조(提調) 조태채(趙泰采)도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일을 조목별로 기록한 책자(冊子)를 차자(箚子)에 덧붙여 올렸는데, 이르기를,
"이것은 산성을 경영(經營)하는 방도에 모두 간절하게 관계된 것입니다. 그 중에 외방(外方)의 곡물(穀物)을 거두어 저축하는 것과 호조(戶曹)의 삼수량(三手粮)064) 을 훈국(訓局)에 귀속시키는 것과 북한 산성을 동서(東西)로 획정하여 변산(邊山)의 전답(田畓)을 소속시키도록 허락하는 등의 일입니다."
하니, 이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9월 16일 무신
영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송성명(宋成明)의 상소로 인하여 사직 차자를 올리기를,
"지난번에 성상께서 특교(特敎)를 내리시어 10일에 빈청(賓廳)에 와 모이도록 하셨는데, 신이 삼성 추국(三省推鞫)을 베풀어 안치(按治)하는 일이 1일 전에 있었으므로 이미 형벌을 베푸는 자리에 나아가 더러운 일을 범하였으니, 오늘은 근신함이 마땅히 평소보다 달리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고, 또 빈청의 회의에는 신 한 사람이 없더라도 무방(無妨)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로써 약원(藥院)과 왕복했더니, 마침 그날 성상께서 밤에 침수(寢睡)가 편안하지 못하시므로, 약원에서 좀 늦출 것을 진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은 번번이 긴요하지 않은 소장(疏章)을 빈번하게 주달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약원에 출입할 때에 자주 말을 하였으니, 도리상 편안히 있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범월(犯越)한 죄인 곽만국(郭萬國)을 정형(正刑)하였다.
9월 17일 기유
김상원(金相元)을 사간(司諫)으로, 한이원(韓以原)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9월 18일 경술
이돈(李墩)이 손자 이시형(李蓍亨)이 격고(擊鼓)하여 이돈의 억울함을 소송했었는데, 형조(刑曹)에서 신원할 만한 단서가 없다고 복계(覆啓)했다. 그러자 이돈의 아내 안씨(安氏)가 금오 당직(金吾當直)에 나와 다시 상언(上言)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니, 임금이 특교(特敎)를 내려 말하기를,
"이돈의 옥사(獄事)는 사증(詞證)이 구비되어 있는데, 끝내 기망(欺罔)하기에 이르렀으니, 지금까지 몹시 밉다. 이돈은 본래 신원(伸寃)할 만한 단서가 없는데, 이시형이 전에 이미 무망(誣罔)하여 격고(擊鼓)하였고, 그 아내가 이제 또 상언하여 형조 판서와 여러 신하들에 대해 한없이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반드시 죄안(罪案)을 뒤집어 놓으려 하고 있다. 전후하여 옥사(獄事)를 처리한 신하들이 죄를 얽어 죽였다는 등의 말은 더욱 지극히 무상(無狀)하다. 오늘날 국가에 조금이라도 기강이 있다면 어찌 감히 그대로 둘 수 있겠는가? 진실로 해괴하고 개탄스럽다. 이 상언(上言)을 도로 내주도록 하라. 이 상언이 무슨 중요하고 긴요한 사단이 있다고 이런 때에 급급하게 받아들였는가? 또한 매우 미편(未便)하다. 해당 승지(承旨)를 체직하고 추고하라."
하니, 승지 한세랑(韓世良)이 이 때문에 체직되고 추고받았다.
절제(節製)에 수위(首位)를 차지한 사람 남수언(南壽彦)에게 명하여 직부 전시(直赴殿試)065) 하게 했다.
9월 22일 갑인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의 환후(患候)에 여러 증상이 더해지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고, 이날로부터 삼제조(三提調)가 함께 수직(守直)하기로 했다.
9월 24일 병진
밤에 화성(火星)이 남두 제5성(南斗第五星)을 범했다.
장령(掌令) 한이원(韓以原)이 상소(上疏)하여 송성명(宋成明)의 상소에 대해 논하기를,
"성상의 환후에 요즘 여러 증세가 간간히 일어나서 근심이 더욱 크니 보호하는 도리를 마땅히 극진히 해야 할 것인데, 오직 저들의 수응(酬應)이 조섭(調攝)하는 데 해가 되는 것 또한 신료(臣僚)들이 명백히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송성명은 도리어 이것을 죄로 삼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만약 송성명의 말을 그대로 시행되게 한다면, 상약(嘗藥)066) 하는 자리에 있는 이가 그 근심하는 마음을 본받는 바가 없게 되고, 성상의 옥체를 보호하는 것이 도리어 죄안(罪案)이 되어 군부(君父)의 질병을 을 모른척 돌아보지 않는 자가 드물지 않게 될 것이니, 그 뜻은 대체로 오늘날 자세히 살피고 신중히 대처하는 일을 논척하여 저번에 범홀(泛忽)하다고 배척당한 것을 은밀히 펴보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그 말한 것이 크게 임금과 신하의 의분(義分)과 윤리(倫理)를 손상시키는 바가 있으니, 이는 그 관계됨이 지극히 중대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홍치중(洪致中)이 시비(是非)를 분변하지 않고 온 조정을 들어 올바르지 않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온 조정을 무너뜨려 혼란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때의 처치가 물정(物情) 밖에 나왔고, 그 후에 정식(鄭栻)의 상소는 여론(餘論)을 주워 모은 것이었는데, 당나라 이종민(李宗閔)을 끌어대어 비유한 것은 더 패악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송성명이 잇따라 일어나서 소를 올렸는데, 그 말이 의리를 해치고 인륜을 손상시킨 것은 또 두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지나치게 포용(包容)하셔서 책려(策勵)를 더하지 않으시니, 그의 방종한 풍습을 징계할 길이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 이 진소(陳疏)는 마땅하다고 할 만하다. 다만 내가 이미 시비(是非)를 밝게 살펴서 미안(未安)하다는 뜻을 분명하게 보였으니, 어찌 죄줄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희조(李喜朝)를 승지(承旨)로, 김상원(金相元)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윤문(李允文)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9월 25일 정사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릇 도망한 중수(重囚)를 한 사람도 잡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은가? 김창규(金昌奎)와 연은문(延恩門)에 괘서(掛書)한 죄인(罪人) 및 숭릉(崇陵)067) 에 변괴를 일으킨 죄인을 끝끝내 잡아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입직(入直)한 군사(軍士) 안수운(安守雲)이 갑자기 달아났으나, 포도청(捕盜廳)에서 추적해 잡지 못했으니, 좌우 포도 대장(左右捕盜大將)을 아울러 추고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이조 판서 조태채(趙泰采)에게 유시하기를,
"나는 강현(姜鋧)을 끝내 검거(檢擧)068) 하지 않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된다."
하니, 조태채가 말하기를,
"강현이 역서(易書)069) 하라고 분부한 일은 참으로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이미 방면(放免)되었으니, 한결같이 진출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판윤(判尹) 등의 관직을 또한 거의(擧擬)하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결같이 버려둘 수는 없으니, 검거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승문원(承文院)에서 헌부(憲府)에서 다시 권점(圈點)하자고 계청한 일을 가지고 복주(覆奏)하기를,
"이번 이 분관(分館)에서 만약 공의(公議)가 억울하다고 일컫는 자가 있으면 따로 조용(調用)하여 괴원(槐院)과 똑같이 보도록 하는 것이 이미 전례(前例)가 있습니다. 그런데 네 번의 방목(榜目)을 이미 권점(圈點)한 뒤에 바로 다시 재차 권점한 것은 후폐(後弊)에 관계가 있으나, 기타 권점을 처음하는 일은 전부터도 있었던 것입니다. 권점한 것을 불태운 것은 권점을 잘했는지 그 여부(與否)에는 관계가 없으니, 이것 때문에 변개(變改)하기를 의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대계(臺啓)에서는 반드시 성명(姓名)이 지적을 명백하게 거론해야만 그밖의 사람들이 스스로 편안할 수 있는 것인데, 지금 뒤섞어 권점하였다고 말을 하고 있으니, 자못 매우 마땅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전에 권점한 것을 그대로 두고 빨리 간택(揀擇)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지평(持平) 황선(黃璿)이 이 일로 인하여 인피(引避)하고, 여러 사람의 성명(姓名)을 지적해 내면서 말하기를,
"권점(圈點)을 창출한 한 조목은 두루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았으나, 끝내 상박사(上博士)가 스스로 권점을 한 전례(前例)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두 번 권점(圈點)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런 일은 전에 없던 일입니다. 그리고 이미 권점한 것을 곧 불태운 것은 일이 소루(疏漏)한 데 관계되므로, 신이 반드시 권점을 고치자고 청한 것은 진실로 권선(圈選)을 중히 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수원(吳遂元)·이헌영(李獻英)·이헌장(李獻章)·강세윤(姜世胤) 같은 이는 그 과명(科名)이 암담하고, 최도문(崔道文)·최집(崔)·윤빈(尹彬)·유원상(柳爰相) 같은 이는 지망(地望)이 맞지 않으며, 심주관(沈周觀) 같은 이는 공의(公議)에 버림을 받은 자인데도 모두 권선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진상(金鎭商)·이운용(李雲龍) 같은 이는 지체와 재망(才望)이 있는데도 까닭없이 누락되자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하므로, 바야흐로 다시 권점하기를 청했던 것이니, 도태(淘汰)시키기를 청한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우선 앞질러 점출(拈出)하지 않았던 것은 대체로 생각한 바가 있어서인데, 대신(大臣)은 그 본의를 끝까지 헤아려 보지 않은 채 신을 흐리멍덩하여 변별(辨別)하지 못하는 죄과(罪科)에 몰아붙이고 있으니, 무슨 얼굴로 무릅쓰고 대간(臺諫)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뒤에 옥당(玉堂)에서 출사(出仕)시키도록 처치(處置)하였다.
9월 26일 무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임홍망(任弘望)이 졸(卒)하였는데, 나이는 81세이다. 임홍망은 그 사람됨이 순박(淳朴)하고 신실(信實)함이 부족하였으며, 여러번 번임(藩任)을 지내면서 성적(聲績)070) 이 없었으나 나이 80이라 하여 품질(品秩)을 올려서 정2품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였다.
9월 27일 기미
교리(校理) 홍석보(洪錫輔)가 상소하기를,
"영남의 무인(武人) 박무성(朴武成)이 1천 석이 넘는 곡물(穀物)을 배로 실어다가 사사로이 사진(四鎭)의 피폐한 백성을 구제하였습니다. 신이 상을 베풀어 격려하고 권장해야 한다는 뜻으로 포상(褒賞)하기를 논했는데, 회계(回啓)하기 전에 술취한 주수(主帥) 이석관(李碩寬)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박무성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다만 자기를 의논한 사람에게 포상을 받은 것을 노엽게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상직(賞職)을 추가(追加)해야 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진휼청(賑恤廳)에 신칙하여 박무성이 내놓은 진휼곡(賑恤穀)을 조사해서 그 처노(妻孥)에게 도로 주게 해야 합니다."
하고, 또 한이원(韓以原)의 상소에 대해 논하기를,
"송성명(宋成明)이 논의한 약원(藥院)의 일은 그 지의(旨意)가 예사롭지 않고 말이 지극히 위태하였다면 이를 조사해서 변별(辨別)하여 배척한들 무엇이 불가(不可)하겠습니까? 그런데 곧바로 의리를 해치고 인륜을 손상시켰다고 말하고, 인신(人臣)으로서 차마 듣지 못할 말을 첨가하였으니, 어찌하여 이토록 그 말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고 홍치중(洪致中)은 요즈음 정사(政事)에서 주의(注擬)가 편벽된 폐단을 대충 논의하였을 뿐이고, 일찍이 오늘날의 전조(銓曹)를 전적으로 공격한 것이 아니며, 또 여러 사람의 연좌된 바 경중(輕重)을 분별하지 않고 일체 뒤섞어 수용했다고 말한 것이 아닌데, 대신(臺臣)이 조금도 깊이 헤아려 보지 않은 채 ‘괴란(壞亂)’이란 두 글자가 어떠한 죄악이기에 갑자기 함부로 이를 더하며 조금도 자중(自重)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청조(淸朝)에서 서로 공경하는 풍습이겠습니까? 신이 근일에 정식(鄭栻)의 상소를 살펴보았더니, 가장 사리에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권엽(權熀)이 말한 것은 지극히 거칠고 패악(悖惡)하였는데, 불쑥 이종민(李宗閔)의 일을 인용하여 도리어 사람을 속이고자 하였으니, 오늘날 언지(言地)에 있는 자도 통척(痛斥)해야 가장 마땅한데, 유독 홍치중에게만 공공연하게 멋대로 헐뜯고 있으니, 아! 또한 괴이한 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박무성(朴武成)의 일은 해청(該廳)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라. 이석관(李碩寬)은 자기를 논의한 사람에게 포상하는 데 대해 노하여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인 듯함이 있으니,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한이원(韓以原)의 상소는 오로지 송성명이 논한 약원(藥院)의 일을 개탄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대의(大意)는 진실로 좋으나 말을 하는 즈음에 적절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도 이미 알고 있다. 홍치중을 침공(侵攻)한 것은 너무 지나칠 뿐만 아니라,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시키도록 청한 것도 타당하지 못함을 보지 못하겠는데 한결같이 배척하고 있으니, 나도 옳게 여기지 않는다."
하였다. 한이원이 홍석보(洪錫輔)의 상소로 하여 인피(引避)하고 물러나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9월 29일 신유
정언(正言) 이중협(李重協)이 상소하여 맨 먼저 마음을 다스리라는 말로 진달하기를,
"병을 치료하는 법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고,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는 또한 항상 마음을 바르게 하여 품행(品行)을 닦는 데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조섭(調攝)하시는 중에 자주 유신(儒臣)을 와내(臥內)에 불러들여 조용히 강설(講說)하게 하여 일에 따라 잠규(箴規)071) 를 얻으신다면, 마음을 간직하고 병을 치료하는 방도에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식(鄭栻)의 상소는 사리에 어긋난 것을 이끌어 비유해서 한 세상을 속이고자 하였으나, 분명한 책벌(責罰)을 보여 주지 못하셨습니다. 송성명의 상소과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말뜻이 예사롭지 않아서 참으로 두려워할 만합니다. 약원(藥院)에서는 보호(保護)해야 할 책임을 맡고 있으므로 본시 조용히 조섭하시는 데 방해로움이 있을까 걱정해야 마땅하고, 유신은 논사(論思)하는 직무를 맡고 있으니, 또한 정사(政事)가 혹은 막힐까 염려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가부(可否)를 서로 의논하여 구제하는 것이 해로울 게 없는데, 헌신(憲臣)이 군부(君父)를 무심하게 본다고 논박하고 의(義)를 해치고 인륜을 손상시켰다고 나무라고 있으니, 아마도 지난날 어찌 노하고 미워할 만하겠느냐는 전교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엿보고 의심하는 마음을 야기(惹起)한 것이 있어 사리에 어긋나고 과격한 논의가 나오게 된 듯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말씀하시는 사이에 반드시 신중(愼重)을 더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과거를 베풀어 선비를 뽑는 것은 장차 인재를 가려서 쓰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과거의 명칭이 분명하지 못하고 올바르지 않은 것이 있었다면 진실로 명백하게 핵실하여 발거(拔去)했어야 할 것입니다. 김진상(金鎭商)·이운룡(李雲龍) 같은 사람은 그 지체와 재망(才望)이 괴원(槐院)의 선임(選任)에 참으로 합당한데, 까닭없이 누락되었으니, 진실로 애석합니다. 만약 권점(圈點)을 고칠 수 없다면 마땅히 전부(銓部)로 하여금 괴원(槐院)의 예(例)와 같이 조용(調用)해서 천전(遷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마음을 다스리라는 말은 참으로 절실하고, 그 나머지 진달한 것 역시 좋다. 다만 정식의 상소한 말이 좋지 않은 데 대해서는 나도 이미 환히 알고 있지만, 어찌 책벌(責罰)할 것까지 있겠는가? 김진상과 이운룡의 일은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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