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계사
경상도 유생(儒生) 권수창(權壽昌) 등이 진소(陳疏)하여 청하기를,
"선정신(先正臣)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事)케 하소서."
하니, 신중히 해야 한다는 뜻으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권수창 등이 잇따라 상소하여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중협(李重協)을 정언(正言)으로, 오명항(吳命恒)을 응교(應敎)로, 홍석보(洪錫輔)를 부교리(副校理)로, 이정제(李廷濟)를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좌참찬(左參贊) 이언강(李彦綱)이 사직소(辭職疏)를 올리기를,
"민진후(閔鎭厚)의 상소 내용에 ‘서제(書題)가 누구의 손에서 나왔으며 사심없이 뽑아 올렸는지의 여부는 어떠하였는지 모르겠다.’ 하고, 오수원(吳遂元)의 시권(試券)을 뽑아 올린 것이 마치 사심없이 나온 것이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는데, 신은 곧 그때에 뽑아 올린 시관(試官)입니다. 신이 고(故) 감사(監司) 윤세유(尹世綏)와 같이 고사(考査)하여 신중하게 상의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합고(合考)할 즈음에 오수원·안중필(安重弼)·홍상용(洪尙容) 세 사람이 입격(入格)한 것으로 인하여 어찌 사정(私情)이 있었다느니 없었다느니 논의할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그의 말이 갑자기 정실(情實) 밖에서 나왔는데, 이는 이돈(李墩)을 의심하던 것을 갑자기 분고(分考)한 다른 시관에게로 옮기려는 것이니, 또한 액운(厄運)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민진후가 다른 시관도 실정이 같다고 의심하는 것은 참으로 뜻밖의 일이나, 어찌 혐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궐문(闕門)에 괘서(掛書)하여 윤지인(尹趾仁)·최석항(崔錫恒)·윤덕준(尹德駿)·오명준(吳命駿)·이야(李壄)·송정명(宋正明)·이천근(李天根)·이기좌(李箕佐) 등을 흉역 모반(兇逆謀反)으로 무고(誣告)했는데, 수문(守門)하던 군졸이 서로 전하여 그것을 궐내로 들여오라는 명이 있었다. 당시에 윤지인이 바야흐로 병조 판서를 맡고 있었으므로 도성 밖에 나가 진소(陳疏)하여 대죄(待罪)하고 최석항 등 여러 사람들도 모두 진소하니, 임금이 모두 위유(慰諭)하였다. 그리고 포도청(捕盜廳)에 명하여 각별히 엿보아 괘서한 사람을 잡아들이라고 하였다. 이 뒤에 장령(掌令) 최경식(崔慶湜)이 논계하여 수문장(守門將)의 파직(罷職)을 청하고, 좌우 포장(左右捕將)은 성명(成命)102) 을 내렸는데, 아직 포착한 거조가 없어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궐문(闕門)이 얼마나 깊고 엄한 곳인데, 글을 달아매어 사람을 무함하는 변괴가 있기까지 하니, 나라의 기강과 사람의 마음에 대해 이미 말할 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흉서(凶書)를 대내(大內)로 들여보내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는 대중의 마음을 진정하여 안심시키는 도리를 자못 상실한 것이니 매우 근심하여 개탄할 만한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64책 56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58면
【분류】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
[註 102] 성명(成命) : 임금이 내린 명령.
사신은 논한다. "궐문(闕門)이 얼마나 깊고 엄한 곳인데, 글을 달아매어 사람을 무함하는 변괴가 있기까지 하니, 나라의 기강과 사람의 마음에 대해 이미 말할 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흉서(凶書)를 대내(大內)로 들여보내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는 대중의 마음을 진정하여 안심시키는 도리를 자못 상실한 것이니 매우 근심하여 개탄할 만한 일이다."
11월 5일 정유
문학(文學) 이진망(李眞望)·사서(司書) 조익명(趙翼命)이 연명(聯名)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왕세자(王世子)께서 7월에 한 번 소대(召對)한 뒤로 아직 강관(講官)을 인접(引接)한 일이 없었습니다. 3년 동안 상약(嘗藥)하시면서 밤낮으로 마음 졸이며 걱정하시느라 강연(講筵)을 오래도록 철폐하신 것은 사세가 참으로 그러하셨으나, 다만 옛날 당 태종(唐太宗)은 병이 낫지 않아서 태자(太子)가 곁을 떠나지 않으니, 저수량(褚遂良)이 열흘에 한 번씩 동궁(東宮)으로 돌려보내어 사부(師傅)와 강론(講論)하게 하기를 주청하였습니다. 지금 성상(聖上)의 환후(患候)가 비록 쾌복(快復)되지 않으셨으나, 전석(前席)에 사대(賜對)하신 것이 또한 이미 여러번 있었으니, 이는 바로 동궁을 열흘에 한 번씩 돌여보내어 학문을 강하고 글을 논하게 할 때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의 말이 진실로 마땅하니, 내가 가납(嘉納)한다."
하였다.
계사년103) 여름에 이이명(李頤命)이 우의정이 되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고(故) 부제학(副提學) 유계(兪棨)가 찬집(纂輯)한 《가례원류(家禮源流)》가 있는데, 그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지금 용담 군수(龍潭郡守)로 있으면서 이를 간행(刊行)하여 세상에 내놓으려고 하고 있으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재력(財力)을 돕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경연에서 한 말은 위에 자세히 보인다.】 대체로 유계는 젊어서부터 오로지 예학(禮學)에 정진(精進)하였는데, 병자년104) ·정축년105) 이후로 금산(錦山)에서 귀양살이하면서 《가례원류》 한 책을 편성(編成)하였다. 이때에 윤선거(尹宣擧)가 유계와 가까이 살면서 또한 참여하여 도운 일이 있었는데, 그 뒤 무술년106) 에 유계가 조정에 나오면서 그 책을 윤선거의 아들 윤증(尹拯)에게 부탁하여 수식(修飾)하고 윤색(潤色)하게 하였으니, 윤증은 바로 유계의 문인(門人)이다. 유계가 죽기에 임박하여 또 윤증에게 편지를 보내어 모두 완성하도록 면려하였는데, 그 뒤에 윤증 부자(父子)가 그대로 그 책을 머물러 두고 돌려주지 않다가, 이이명이 경연에서 아뢴 뒤에야 유상기(兪相基)가 비로소 그 책을 찾아서 간행(刊行)을 하려 하였으나, 윤증이 미루고 핑계대며 돌려주지 않았다. 처음에 대신(大臣)이 경연에서 아뢸 적에는 그 아버지가 함께 일을 한 정상을 언급하지 않은 채 까닭없이 내어 줄 수 없다고 하다가, 끝에 가서 또 말하기를,
"세상에 우리 집 책이라고 전하였는데, 한 책이 두 집에 분속(分屬)된 것이 어찌 의심스럽지 않은가?"
하였는데, 그 뜻은 대개 그 책을 찬집하여 만든 공을 오로지 윤선거에게 귀속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또 말하기를,
"유계가 사망할 무렵에 부탁한 일이 전연 생각나질 않는다."
하니, 유상기가 이 일로 인하여 크게 노하여 서로 오고간 편지 사연이 매우 아름답지 못했다. 유상기가 즉시 유계의 초본(初本)을 간행 출판하고,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을 권상하(權尙夏)와 정호(鄭澔)에게 청하였다. 권상하가 서문 뒤의 작은 발문에서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무상(無狀)한 일을 대단하게 말하였고, 【스승을 배반했다는 것은 바로 유계의 이 일과 송시열을 배반한 일을 가르킨다.】 정호도 발문을 지으면서 또한 극도로 배척하였다. 유상기(兪相基)가 간행한 뒤에, ‘이 책은 이미 계문(啓聞)하고 간행(刊行)한 것이니, 어전(御前)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인하여 짧은 소(疏)를 지어 한 권의 책을 올렸는데, 임금이 그 발문을 보고 정원(政院)에 묻기를,
"윤 판부사(尹判府事)가 바로 유계의 문인인가?"
하니, 승지(承旨)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이날 밤에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윤 판부사는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받아왔고, 내가 평일에 존신(尊信)함이 어떠하였던가? 그런데 부제학 정호가 감히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고 침범하여 배척하기를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으니, 진실로 이미 해괴하게 여길 만하였다. 그런데 그 지은 《가례원류(家禮源流)》 발문 가운데에, ‘이 책을 문인인 윤증에게 부탁하여 참호(參互)하여 교감(校勘)해 주기를 요구하였다.’고 서두(序頭)에 말하고, ‘불행하게도 그 적임이 아닌 사람에게 부탁하여, 도리어 사람들의 청문(聽聞)을 속여 스스로 우리 집 책이라고 하면서 전혀 실상(實狀)을 숨기고 있으니, 이는 매우 무위(無謂)107) 한 일이다.’라는 등의 말로 끝을 맺으면서, 낭자하게 마구 꾸짖었으니,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더구나 그 발문을 지은 것이 유현(儒賢)이 이미 죽은 뒤에 있는 일이니, 더욱 놀라 탄식할 만한 일이다. 정호를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 것이며, 이 발문을 쓰지 말도록 하라."
하였는데, 승지(承旨) 임방(任埅)·황일하(黃一夏)·이교악(李喬岳) 등이 복역(覆逆)108) 하여 말하기를,
"이 일은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입니다. 정호가 까닭없이 예대(禮待)했던 대신(大臣)을 침범해 배척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파직하라는 명령을 거두소서."
하자, 임금이 답하기를,
"무인년109) 이후로 정호가 유현(儒賢)을 침범해 배척하여 물어뜯기를 마지 않더니, 이제 발문 가운데에서 무함하여 꾸짖으며 이르지 않는 바가 없는데, 어찌 유상(儒相)과 같이 어진이가 사람들의 청문(聽聞)을 속이고 스스로 우리 집 책이라고 했을 리 있겠는가. 더구나 《가례원류》를 간행하여 바친 것을 정호도 알았을 터인데, 공공연하게 마구 욕하였으니 방자(放恣)함이 심하다고 할 만하다. 파직(罷職)하라는 명도 이를 그르쳐서 너무 관대한 것인데 급급하게 신구(伸救)하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인가. 한 번 논의가 나뉘어지고부터 시비가 공변되지 못하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11월 6일 무술
경상도 청하(淸河) 등의 지역과 평안도 의주(義州) 등 다섯 고을에 천둥이 울렸다.
11월 7일 기해
옥당(玉堂)에서 【교리(校理) 황귀하(黃龜河)·수찬(修撰) 신사철(申思喆)·부수찬(副修撰) 홍계적(洪啓迪)이다.】 차자(箚子)를 올려 정호를 파직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부제학(副提學) 정호를 특별히 파직하는 거조가 갑자기 뜻밖에 나왔으니, 전하께서 평소 정호에 대해 불만스럽게 생각하시던 터에 또 격뇌(激惱)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시비는 반드시 곡절(曲折)이 있는 법인데, 용광(容光)에 비치지 않고110) 견벌(譴罰)만 갑자기 더하였으니, 이미 순응(順應)하여 천천히 구명(究明)하는 도리에 어긋났습니다. 그리고 성지(聖旨) 가운데 논의가 나뉘어졌다는 말씀은 또한 개탄할 바가 있습니다. 임금이 말을 듣는 방도는 다만 그 일이 어떠한가를 볼 따름인데, 지금 만약 당습(黨習)이 한결같다 하여 무릇 말하고 의논하는 사이에 있어 한결같이 모두 공변되지 못한 것으로 여기신다면, 이는 앞으로 하나도 믿을 만한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신 등이 논하는 바는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정호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가(私家)의 문자(文字)를 조정에 미루어 올리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니나, 이 일은 그렇지가 않다. 책자를 간행해 바쳐서 친람(親覽)을 이미 거쳤는데, 발문 가운데에 유현을 무함하고 꾸짖는 바가 이처럼 낭자하니, 결단코 버려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다. 파직의 명을 도로 거두라는 계청에 대해서는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간원(諫院) 【대사간 이관명(李觀命)·헌납(獻納) 이홍(李宖)이다.】 에서 논계하여 부제학 정호를 파직시켜 서용하지 말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가례원류(家禮源流)》를 간행(刊行)하라는 명을 내리신 뒤에 두 집안 사이에 갑자기 다투는 빌미가 생겨서 사설(辭說)이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만일 본말(本末)을 명백하게 아는 자가 아니면 변론(辨論)하기 쉽지 않고, 스스로 사론(士論)의 시비에 관계되는 것을 미루어 올리는 것도 마땅하지 않은데, 갑자기 발문 쓴 사람을 죄주셨으니, 이 어찌 잘못 억측(臆測)하신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옥당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 유사하였으니, 번거롭히지 말라."
하였다.
박행의(朴行義)를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11월 8일 경자
충청도 서산(瑞山)에 천둥이 울리고, 비인(庇仁)에 우박이 내렸다.
11월 9일 신축
영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차자(箚子)를 올려 대략 이르기를,
"곧은 말[讜言]이 상문(上聞)되는 것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두 번째 차자를 바치자, 여러 의논이 떠들썩하고 장주(章奏)가 잇따라 공박하고 있습니다. 우상의 차자 내용은 직접 목격한 것에서 나온 것으로 지적한 말이 명백하고 절절하여 깊이 실정을 얻었는데, 이상성(李相成)의 상소에서 함부로 기롱을 더하면서 인친(姻親) 사이라고 말한 것은 또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날 조정의 의논이 어찌해서 모순됨이 이처럼 심합니까."
하고, 인하여 돈독히 면려하는 유지를 내려서 그로 하여금 빨리 출사(出仕)하게 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우상의 차자 내용은 생각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뜻밖의 다른 사람의 말을 혐의할 것이 못된다. 반드시 출사하도록 권면하고자 하였으니, 내 뜻이 본래 이와 같았다. 지금 경이 차자에서 아뢴 말은 진실로 나라를 위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언 이중협(李重協)이 논사소(論事疏)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대관(臺官)의 논계(論啓) 가운데 과명(科名)이 암담(黯黮)하다고 가리켜 거론하면서 권선(圈選)을 다시 하기를 청한 것은 그 대의가 참으로 좋았으나, 그 조사하는 일을 이미 결정한 뒤에 드러난 의심스러운 단서가 암담할 뿐만이 아니었는데, 그 방목(榜目)에 대해서는 내버려둔 채 진출에 대해서는 이를 막아 마침내 구차한 데로 돌아갔습니다. 고관(考官)이 거자를 두루 찾아다닌 일에 이르러서는 조사한 문안을 재차 감단(勘斷)하여 사증(詞證)이 구비(俱備)되었는데, 대신(大臣)이 차자를 올려 억지로 신구(伸救)하였습니다. 세 번째의 차자에서는 어의(語意)의 앞뒤가 모순됩니다. 지금 비록 나라 안에서 이름하기를 ‘주문 고관(主文考官)’이라 하나, 패초(牌招)받고 거자(擧子)를 두루 찾아다녔는데 그 거자가 과연 그 방(榜)에 참여하였으니, 의심스러운지 의심스럽지 않은지를 물어 본다면 반드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의심스럽다고 할 것입니다.
아! 대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잘못하는 바가 슬프고도 애석합니다. 대신이 시험 문제를 뽑아 보인 일에 이르러서는 그때 고관(考官)들의 상소에서도 안핵(按覈)할 수 있으니, 과연 시제(試題)가 이돈(李墩)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초에 공수(龔遂)111) 의 일을 뽑아 보인 자는 어떤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만일 추후에 합고(合考)에 참여한 정상 또한 그때의 고관들이 함께 본 바인데, 참여하지 않았다는 말은 또한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대신이 특히 사의(私意)에 끌려서 동요됨으로 인하여 차자를 두 번 세 번 올리는 데 이르렀으니, 이는 수비(遂非)112) 하는데 귀착(歸着)되었을 뿐만이 아닙니다. 제신(諸臣)들이 서로 잇따라 논변하고 있으므로 공의(公議)가 답답해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인데, 전하께서 한결같이 꺾고 억제하기만 하시며 시비(是非)를 명시(明示)하지 않으시니, 무엇으로써 공법(公法)을 밝히고 대중의 마음을 진정시키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종이에 가득한 장황한 말들이 대신을 침범하여 배척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사의에 끌려서 동요되었다는 등의 말로 무함하여 꾸짖기를 마치 사심을 품고 임금을 속인 것처럼 여기는 바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말뜻이 몹시 험악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참으로 해괴하고 개탄스럽다."
하였다. 이중협(李重協)이 준엄한 전교로 인하여 인피(引避)하였다. 이 뒤에 장령 권엽(權熀)이 처치하여 출사(出仕)시키도록 청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이중협의 상소는 참으로 해연(駭然)한데, 억지로 입과(立科)에 두었으니 매우 이해할 수 없다."
하자, 권엽이 또 이 때문에 인피하니, 간원에서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11월 10일 임인
전라도 유생(儒生) 유규(柳奎) 등이 상소(上疏)하여 윤증(尹拯)을 위해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을 신변(伸辨)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윤선거(尹宣擧)가 옛날 임오년113) 사이에 유계(兪棨)와 더불어 금산(錦山)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강습하고 토론했는데, 《가례(家禮)》를 연역(演繹)하여 책을 이룬 것을 ‘원(源)’이라 하고, 당(唐)·송(宋) 이하 선현(先賢)의 글과 우리 동방 유현(儒賢)의 말을 ‘유(流)’라 하고는 이름하여 《가례원류》라 하였으며, 윤선거가 또 짧은 서문을 썼습니다. 그 뒤 유계가 무안 군수(務安郡守)로 나가면서 그 초본(草本)을 가지고 가서 한 권을 베끼고 그 본책(本冊)을 돌려보냈는데, 그 본책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유계는 명명(明命)114) 을 받고 조정에 나가게 되자 한가한 시간을 얻기 못했기 때문에 이 책에 다시는 필삭(筆削)한 것이 없었으며, 윤선거가 더 넣기도 하고 빼기도 하면서 수십 년의 공부를 쌓았고, 윤증이 또한 계속해서 이 책을 닦았으니, 요컨대 모두 두 현신(賢臣)이 함께 지은 책입니다. 그러므로 윤선거가 지은 유계의 행장(行狀)에 《가례원류》를 찬성(纂成)했다는 말이 있으니, 이는 진실로 자기를 낮추고 아름다움을 남에게 돌리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윤선거의 묘문(廟文)에도 모두 《가례》를 편집한 일에 대하여 말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그것을 함께 닦고 함께 편집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유상기(兪相基)가 이 사실을 전부 숨기고 그 할아버지가 혼자 편집한 것처럼 하고는 이이명(李頤命)에게 속여 부탁하여 하전(廈氈)115) 에 진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유상기가 윤증을 찾아보고 대신이 《가례원류》를 간행하자고 청한 일을 말하고 인하여 유봉(酉峰)116) 의 집에 소장했던 원본을 빌었는데, 이미 명명(明命)이 있었다고 말하였으므로, 그 말에 의거하여 책본(冊本)을 내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경연에서 한 말을 보고는 마침내 경연에서 아뢴 대신에게 물어 보았으니, 대신은 바로 윤증의 지친(至親)이었습니다. 그 답서에 대략 이르기를, ‘조카는 처음 무오년117) 에 보았는데, 그때에 과연 다른 집 책인 줄 몰랐었습니다. 지난번 유상기가 책을 가지고 와서 보이면서 간행하려 한다고 말하므로 조카가 전의 일을 기억하여 물어 보았더니, 대답하기를, 「미촌(美村)이 과연 강론하여 정한 것이 없지 않으나, 미촌이 지은 우리 할아버지 행장(行狀)을 보면, 그것이 오로지 우리 할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연석(筵席)에서 진달하여 경솔하게 진청(陳請)하였던 것인데, 망령된 짓을 하였으니 매우 부끄럽습니다.’ 하였는데, 미촌은 바로 윤선거의 호입니다, 여기에서 유상기가 속여 부탁한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윤증이 이에 탐탁치 않다는 말로 곡진하게 고계(告戒)하니, 유상기의 말이 갈수록 더욱 패려(悖戾)하여 윤증이 임의로 변란하여 남의 아름다움을 약탈한 것처럼 하였으며, 어떤 사람에게 준 편지에 윤선거가 서문 지은 일을 마구 꾸짖어 말하기를, ‘이는 남전 여씨(藍田呂氏)118) 의 죄인이다.’ 하였으니, 아! 유상기도 사람인데, 어찌 차마 이와 같이 패려하고 망령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정호(鄭澔)의 발문(跋文)은 이미 깊은 감식(鑑識)으로 분변하여 배척하셨습니다. 그러나 대사헌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서문 뒤의 소설(小說)에 이르기를, ‘아버지와 스승의 처지에 이런 소진(蘇秦)·장의(張儀)의 수단(手段)119) 과 형칠(邢七)의 낭패(狼狽)120) 가 있었으니, 이것이 본래의 기량(技倆)이다.’ 하여 마구 꾸짖은 것이 발문에 비하여 몇 갑절 더할 뿐만이 아니었는데, 배척하여 책망하시는 하교가 정호에게만 미쳤으니, 신 등은 적이 의혹됩니다.
그리고 연전(年前)에 이세경(李世庚)의 상소 가운데 이른바 비문(碑文)이란 바로 권상하가 지은 송시열의 비문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 비문에, ‘문인(門人) 윤증이 그 아비가 일찍이 선생에게 배척을 당하였다 하여 방자한 뜻으로 틈을 만들더니, 마침내 윤휴(尹鑴)의 당이 다시 일어나 기사년121) 의 화(禍)를 초래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일이 있고부터 사림(士林)들이 매우 마음 아파하고 있으니, 앞으로 사문(斯文)의 화(禍)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정호는 파직만으로 그 죄를 징계하기에 부족한데, 후사(喉司)에서 복역(覆逆)하여 앞에서 창도(唱導)하고 대계(臺啓)와 옥당의 차자가 뒤에서 잇닿고 있습니다. 연전에 황상로(黃尙老)와 성대령(成大齡)이 유생(儒生) 무리의 사사로운 뇌문(誄文)이 송시열(宋時烈)에게 촉범(觸犯)되었다 하여 번갈아 서로 글을 올려 윤증 부자(父子)를 헐뜯었는데, 삼사(三司)122) 의 제신(諸臣)으로서 일찍이 한 마디 비의(非議)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지금 《가례원류》를 등람(登覽)하신 뒤에 이르러서는 뜻이 엄호(掩護)하는 데 있으므로, 곧 말하기를, ‘사가(私家)의 시비(是非)를 조정에 미루어 올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고 있으니, 또한 마음씀이 너무나 형혹(熒惑)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고, 이어 권상하의 서문을 일체 쓰지 말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가례원류》를 양가(兩家)에서 함께 짓고 함께 편찬한 곡절을 비로소 자세히 알았다. 유상기(兪相基)가 실상을 완전히 숨긴 것은 너무나 의의(意義)가 없는 일이며, 대사헌(大司憲)이 지은 서문은 추후에 보았는데, 이른바 서서후문(書序後文)은 짓지 않았어야 옳았다. 대저 발문(跋文)은 나도 이미 친히 보았는데, 유현을 무함하고 헐뜯는 죄를 통쾌하게 바로잡으라고 하였으니, 일종의 신구(伸救)하는 논의가 구차하게 사리에 맞지 않는 말임을 많이 볼 수가 있었다. 옥당의 차자에 내린 비지(批旨) 속에 사가의 문자를 미루어 조정에 올리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고 한 하교는 바로 황상로 등의 상소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다."
하였다.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이중협(李重協)의 상소 때문에 한강 밖으로 나가서 이에 명소(命召)를 반납(反納)하자, 정원에서 그 사유를 계달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우상이 차자에서 한 말은 성실하여 다른 뜻이 없었는데, 침범하여 업신여기는 말이 사면에서 닥치고 있다. 김진규(金鎭圭)·민진후(閔鎭厚)가 올린 소장의 내용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어제 이중협이 방자한 뜻으로 무함하고 꾸짖기를 다시 여지없이 하여 황급히 도성 밖으로 나가게 해서 끝내 공격하여 쫓아내려던 계획을 이루었으니, 내가 진실로 통탄스럽게 여긴다. 명소(命召)를 사관(史官)을 시켜 전해주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1일 계묘
관학 유생(館學儒生) 정관하(鄭觀河) 등이 진소(陳疏)하여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소를 세 번 했으나, 임금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남취명(南就明)·홍우서(洪禹瑞)·홍호인(洪好人)·오명항(吳命恒)을 승지(承旨)로, 김재로(金在魯)를 정언(正言)으로, 권세항(權世恒)을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최석정(崔錫鼎)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지극한 슬픔으로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었다."
하고, 이어 예장(禮葬) 등의 일을 속히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최석정은 성품이 바르지 못하고 공교하며 경솔하고 천박하였으나,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이 있어 여러 서책을 널리 섭렵했는데, 스스로 경술(經術)에 가장 깊다고 하면서 주자(朱子)가 편집한 《경서(經書)》를 취하여 변란(變亂)시켜 삭제하였으니, 이로써 더욱 사론(士論)에 죄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번 태사(台司)123) 에 올랐으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전도되고 망령된 일이 많았으며, 남구만(南九萬)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그의 언론(言論)을 조술(祖述)하여 명분(名分)과 의리(義理)를 함부로 전도시켰다. 경인년124) 에 시약(侍藥)을 삼가지 않았다 하여 엄지(嚴旨)를 받았는데, 임금의 권애(眷愛)가 갑자기 쇠미해져서 그 뒤부터는 교외(郊外)에 물러가 살다가 졸하니, 나이는 70세이다. 뒤에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임금이 궐문에 괘서(掛書)한 흉인(凶人)을 오래도록 잡지 못하였다 하여 두 포도 대장을 파직하고, 종사관(從事官)을 잡아다 심문하도록 명하니, 영의정 서종태(徐宗泰)와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두 포도 대장은 비록 죄를 줄 만하나, 그 직임을 맡은 자가 어찌 감히 게을리하고 소홀하게 해서 그러하였겠습니까? 청컨대 우선 파직의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서종태 등이 또 말하기를,
"최석항(崔錫恒) 등은 이름이 흉서(凶書)에 들어 있어서 도성(都城) 밖에 물러가 있으니, 책유(責諭)를 내리셔야 마땅하나, 직명(職名)의 체임(遞任)을 허락해야 할 이치는 절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1월 12일 갑진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이중협(李重協)의 상소로 인하여 상소하기를,
"지난해에 차자를 올려 진달한 일은 한때 요로(要路)에 있던 사람이 사변(事變)을 만난 것처럼 떠들썩하게 경요(驚擾)하여 여러 사람이 일어나 이를 공격하며 비난과 욕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알기 어려운 것이 옥사(獄事)의 실정이므로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옥사인데, 기로(耆老)와 중신(重臣)으로서 의심스러운 죄가 있을 경우 한 번 함문(緘問)하는 것이 어찌 심극(審克)125) 하는 도리에 해로울 게 있겠습니까. 설혹 이로 인하여 신원되어 죄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시종(始終) 안치(案治)했던 신하가 무슨 두려워 할 일이 있어서 분답하게 스스로 변명을 하고도 부족하여 대소(臺疏)가 계속 나오게 하는 것입니까. 품계(品階)가 높은 중신(重臣)도 이와 같은데, 나이 젊은 대관(臺官)에 있어서야 또한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신을 협박하여 말하기를, ‘인친(姻親)을 신구(伸救)한다.’고 하는데, 이돈(李墩)은 바로 신의 사위의 종조(從祖)이니, 비록 연인(連姻)이라 하나 한갓 연인(連姻) 집안의 분정(分情)을 가지고 감히 임금을 속이려는 계획을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경(卿)의 차자는 생각을 모두 진달하고 처분을 기다린 것에 불과하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있었겠는가. 또 어찌 조만(早晩)을 논할 게 있겠는가마는, 소장(疏章)을 어지럽게 올려 조금도 돌아보아 꺼리는 바가 없다. 이중협(李重協)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말뜻이 너무 험악하여 대신으로 하여금 도성문 밖으로 물러가게 하였으니, 일의 해완(駭惋)함이 어찌 이보다 심하겠는가. 더우 결연(缺然)하여 좌우의 손을 잃은 듯하다. 경의 본심은 내가 환히 아는 바이니, 다만 힘써 출사(出仕)하기를 기대한다. 물러가려는 뜻에 부응해서 윤허할 리는 만무하다."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호남 유생 유규(柳奎)의 상소로 인하여 사직소를 올리기를,
"유상기(兪相基)가 호남 지방으로 돌아갈 적에 신이 그에게 말하기를, ‘이 책의 원위(源委)가 비록 그대의 말과 같더라도 유봉(酉峰)이 소장하고 있는 본책(本冊)은 반드시 더욱 완비(完備)되었을 것이니, 찾아가서 그 책을 청하여 합해서 인각(印刻)하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대가 이미 나에게 서문과 발문을 부탁했으니, 내가 마땅히 그 일을 갖추어 논하겠다.’ 했는데, 그 뒤에 들으니 유상기가 과연 윤증을 찾아보고 신의 말을 전하자, 윤증이 즉시 그 증수(增修)한 책을 내어 주었다 합니다. 그런데 윤행교(尹行敎)가, ‘경연에서 아뢸 적에 우리 집과 함께 편집한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면서 곧 그 책을 뒤쫓아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유상기가 의심하고 노하여 윤증(尹拯) 부자(父子)와 서로 쟁변(爭辨)하였으니, 전후의 사실은 이와 같은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 두 집안의 사우(師友)와 부자(父子) 간에 출처(出處)와 존망(存亡)의 즈음에 서로 부탁하였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진실로 일찍이 관여하여 듣지 못했으므로, 간행(刊行)을 청할 때에 그 시말(始末)을 자세하게 진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일처리를 경솔하게 하여 사림(士林)으로 하여금 다시 이같은 풍랑이 있도록 만들었으니, 그 허물을 자송(自訟)126) 해 보건대 용서받을 여지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가례원류》를 간행하자고 청할 적에 그 시말을 자세하게 진달하지 못하게 된 곡절에 대해서는 나도 이미 알고 있다. 서문·발문의 글이 애당초 부탁한 곳에서 나왔다면 침범하여 꾸짖는 말이 어찌 선정(先正)에게 미쳤겠는가. 유상기가 갑자기 의심하고 노하여 그 말의 유려(謬戾)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해연(駭然)하게 여길 만하다. 그러나 경에게는 불안해 할 사단이 없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좌우 포도 대장의 전망 단자(前望單子)를 들여보내라고 명하고, 윤취상(尹就商)과 정이상(鄭履祥)을 좌우 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11월 13일 을사
이기하(李基夏)를 총융사(摠戎使)로, 권변(權忭)을 집의(執義)로, 정우주(鄭宇柱)를 필선(弼善)으로, 권세항(權世恒)을 교리(校理)로, 어유귀(魚有龜)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11월 14일 병오
달이 필성(畢星)을 침범했다.
11월 15일 정미
정우주를 장령(掌令)으로, 김상원(金相元)을 보덕(輔德)으로, 신사철(申思喆)을 부교리(副校理)로, 황귀하(黃龜河)를 수찬으로, 홍계적(洪啓迪)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1월 16일 무신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수찬 어유귀(魚有龜)가 상소하기를,
"《가례원류》는 그 싸움의 꼬투리가 한 가지가 아니고 주객(主客)이 분명이 있는데, 어찌 함께 편집을 했다 하여 문득 자기 소유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발문(跋文)에 이른바, ‘본래 증거없는 말이 아니다.’ 하였는데, 전하께서 특히 그 말이 정호(鄭澔)에게서 나왔다고 하여 지나치게 격뇌(激惱)하신 바 있어 갑자기 견벌(譴罰)을 더하시고, 후사(喉司)의 복역(覆逆)과 옥당(玉堂)에서 차자로 진계(陳啓)한 것을 한결같이 꺾고 억누르고 계시니, 이것이 어찌 성명(聖明)께 바라던 바이겠습니까. 호남 유생 유규(柳奎) 등은 조정을 업신여겨 조금도 뒤돌아보아 꺼리는 바가 없었고, 대사헌 권상하(權尙夏)가 무함을 받은 데 이르러서는 더욱 참혹하게 해독을 끼쳐 은연중에 죄주기를 청하는 뜻이 있었으며, 끝에는 또 비문(碑文)의 일을 삽입시켜 방자하게 꾸짖어 헐뜯었습니다. 전하께서 유현(儒賢)에 대한 정성과 예우가 어떠하였는데, 지금 유규 등의 한 마디 말로 인하여 권여(權輿)를 이어나가지 못하는 탄식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규 등의 상소에 내리신 비답에 ‘일종의 신구(伸救)하는 논의’라고 하신 하교로 나랏일에 대해 말하는 신하를 지적하여 배척한 데 이르러서는 실로 대성인(大聖人)의 동아줄 같은 덕음(德音)에 부족함이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좋아하고 미워하고 즈음에 힘써 사정에 편벽되심을 버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옥당의 차자에 내린 비답에서 이미 내가 정호(鄭澔)에게 죄를 주는 뜻을 다 말했으니, 결단코 도로 거둘 수 없다. 아! 선정(先正)이 무함을 받은 책자를 직접 보았으니, 유규 등이 소를 신변(伸辨)함을 어찌 그만 둘 수 있겠는가. 다만 말을 가려서 하지 못하고 유현(儒賢)을 침범해 핍박하였으니, 그것이 매우 미안하다. 참으로 상소를 올려 변명한 일이 이미 서문과 발문의 글로 말미암았으며, 말을 하는 즈음에 비록 자세한 곡절에는 부족한 바가 있으나 이것은 공공연하게 침범하여 배척하는 것과 다름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죄를 주어 배척할 이유로 삼을 필요는 없다. 권여(權輿)를 이어가지 못한다고 한 것은 대체로 이는 대단히 뜻밖이고, 일종의 신구하는 논의라고 한 하교에 이르러서는 원래 박절한 말이 아니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즈음에 힘써 사정에 치우침을 버리라고 한 것은 나도 역시 깊이 신료(臣僚)들에게 바라고 있는 바이다."
하였다.
정언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여 맨 먼저 말하기를,
"대궐 문에 글을 달아맨 자를 기찰하여 잡는 방법을 넓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잡거나 고발하는 자에게는 아무 상[某賞]으로 논한다고 반포 게시하고, 마침내 잡은 자가 본청(本廳)127) 의 소속에서 나왔더라도 또한 그 직분이라 하여 그 상을 폐지하지 않는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가례원류》의 찬집은 비록 그 주객(主客)을 말할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함께 편집한 책이라고 해서 해로운 게 없으며, 요컨대 서로 다투는 바는 두 집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한 책자 때문인데 사사로이 서로 변론한 글로 인하여 그 발문을 쓴 사람에게 죄를 주고 있으니, 어찌하여 그 뇌문(誄文) 때의 처분과 서로 같지 않은 것입니까. 재신(宰臣)이 유상(儒相)과 구차하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은 형세입니다. 더구나 그 서후문(序後文)과 발문이 일반이라면, 비록 재신만을 논하더라도 실상 유현(儒賢)도 아울러 포함된 것이니, 전하께서 어진이를 대우하는 방도에 크게 성실(誠實)이 부족한 것입니다. 유규(柳奎) 등이 상소하여 유현을 꾸짖은 것이 지극히 음흉하고 교묘하였으나, 전하께서 끝내 죄를 주어 배척함을 아끼고 계시니, 이는 신이 더욱 의혹해 하는 바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정호(鄭澔)를 파직하라신 명을 빨리 거두시고, 명백하게 유규에게 죄벌(罪罰)을 내리시어 사림(士林)의 바람에 보답하소서. 그리고 요즈음 대각(臺閣)에서 구차하게 규피(規避)하고 있으므로, 이 때문에 전하께서 특별히 전(前) 장령(掌令) 최경식(崔慶湜)을 파직하셨던 것인데, 듣건대 최경식이 갑자기 풍병(風病)을 얻어 그 증상이 매우 위중(危重)하다고 하니, 이는 의당 용서할 만한 경우인 듯합니다. 그러나 사간(司諫) 정도복(丁道復)은 어제 처치(處置)하는 일로 패초(牌招)받아 들어왔다가 정사(呈辭)하고 나갔는데, 이튿날 다시 패초받고는 진소(陳疏)하고 물러갔으며, 또 그 이튿날에는 친병(親病)으로 시골에 내려갔으니, 이는 정리(情理)가 참으로 그러한 데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피하여 책임을 면하려는 자취는 끝내 엄폐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바라건대 특별히 파직(罷職)하여 대간(臺諫)의 체통을 보존케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호(鄭澔)의 일은 이미 내 뜻을 유신(儒臣)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다 말했다. 흉인(凶人)을 잡기 위해 상품을 거는 한 조목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최경식(崔慶湜)의 풍병(風病)의 경중에 대해서는 비록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이틀 동안 거듭 소명(召命)을 어겼으니, 처치(處置)를 규피(規避)한 것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상소 끝에 논한 바는 말이 옳다. 정도복(丁道復)은 특별히 그 관직을 체차(遞差)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원(金相元)을 교리(校理)로, 황이장(黃爾章)을 필선(弼善)으로, 권엽(權熀)을 장령(掌令)으로, 신사철(申思喆)을 겸사서(兼司書)로 삼았다.
11월 17일 기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주언(奏言)하기를,
"대궐 문에 글을 달아맨 적을 잡기 전에는 명을 기다리는 제신들이 모두 행공(行公)할 뜻이 없다고 합니다. 병조 판서뿐만 아니라 재신(宰臣) 및 감사(監司)·병사(兵使)·수령(守令)도 모두 자리를 떠나 명을 기다리고 있으니, 성상께서는 마땅히 별양(別樣)의 전교를 내리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제조(提調) 조태채(趙泰采)도 뒤이어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궐 문에 글을 달아맨 것은 사가(私家)에 투서한 것에 비할 것이 아니니, 방자하여 흉악하고 참혹함이 어찌 이와 같은 바가 있겠는가. 연은문(延恩門)에 괘서(掛書)한 적을 아직 잡지 못했는데, 지금 또 이 도적을 잡지 못하다면 이와 같은 변괴가 반드시 이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조가(朝家)에서 기필코 잡으려고 하는 것은 다만 사람을 무함한 악역(惡逆)의 죄를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지 허실(虛實)을 핵문(覈問)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병판(兵判) 이하 명을 기다리는 여러 재신은 편안한 뜻으로 행공하게 하고, 감사·수령도 즉시 직임(職任)을 보살피게 하라."
하였다.
11월 19일 신해
이집(李㙫)을 승지(承旨)로, 김상원(金相元)을 사간(司諫)으로, 권세항(權世恒)을 보덕(輔德)으로, 이기하(李基夏)를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이때 대사간(大司諫) 이관명(李觀命), 헌납(獻納) 이홍(李宖)은 향유(鄕儒) 유규(柳奎)의 상소로 인하여 인피(引避)하고, 정언(正言) 이중협(李重協)은 김우항(金宇杭)을 상소하여 논핵한 일로 엄교(嚴敎)를 받고 인피하였으며, 정언 김재로(金在魯)는 비지(批旨)에서 미안하다는 일과 이중협은 혐의가 있어 처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중협은 임진년 과거에 대한 일로 논했고, 오수원(吳遂元)과 김재로는 혐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인피하였는데, 장령 권엽(權熀)이 모두 출사(出仕)하게 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중협은 곧바로 임금을 속인 죄과(罪科)에 대신을 몰아넣었으니, 진실로 놀랄 만한 일인데 억지로 입과(立科)에 두었으니,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자, 권엽이 이 때문에 인피했는데, 그 뒤에 간원(諫院)에서 처치해서 출사(出仕)시켰다.
임금의 환후(患候)에 여러 증상이 더해지자, 약방 문안에 답하기를,
"한 가지 병이 3년을 끌어 오며 근원이 이미 깊어졌고, 여러 증세가 더했다 덜했다 하여 완전히 회복될 기약이 없다. 조용히 조섭(調攝)하는 방법도 크게 작년만 못한데, 근래에 또한 부기(浮氣)가 다시 일어날 조짐이 없지 않다."
하니, 약방에서 이것을 가지고 인죄(引罪)하고, 또 입진(入診)을 청하기를,
"신 등이 모두 의약의 이치에 어두워서 성상의 환후가 아직도 강복(康復)되지 않으셨는데, 또 안정(安靜)하고 조섭하시는 방법을 자상하게 살피지 못하여 이런 하교(下敎)가 있게 되었으니, 죽어도 남은 책임이 있습니다. 증후(證候)가 이와 같으시니, 즉시 입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卿) 등이 지성(至誠)으로 시탕(侍蕩)하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조용히 조섭하는 방법이 크게 작년만 못하다고 한 하교도 역시 약원(藥院)을 지적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내일 입진하라."
하였다.
11월 21일 계축
약방에서 입진하였는데, 임금의 환후에 모든 증상이 더함이 있었다. 도제조(道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가례원류(家禮源流)》는 사사로운 시비에 지나지 않는데, 이번에 처분을 반드시 이와 같이 하셔야 옳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현(儒賢)을 무함하여 꾸짖는 발문(跋文)을 이미 직접 보았으니, 그대로 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처분을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이이명이 또 윤지인(尹趾仁) 등이 패초(牌招)의 명을 어긴 일을 가지고 진달하기를,
"인심이 날로 점점 위험하고 패악해져 문득 흉악하고 패려(悖戾)한 말을 궁문(宮門)에 매달려 있으니, 이후로는 비록 지극히 흉악한 글이라도 사람들이 감히 전파하지 못하게 하고 또 관청에 고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것을 일체 《법전(法典)》대로 하도록 각별히 정식(定式)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22일 갑인
윤덕준(尹德駿)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홍계적(洪啓迪)을 헌납(獻納)으로, 박사익(朴師益)·조상건(趙尙健)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1월 23일 을묘
비국(備局)에서 정언 김재로(金在魯)의 상소로 인해 품처(稟處)하기를,
"궁문(宮門)에 괘서(掛書)한 죄인을 잡는 자에게는 이유정(李有湞)을 현상을 걸어 잡았을 때의 예(例)에 의하여 은(銀) 1천 냥을 주고, 가선(嘉善)의 품계(品階)를 더해 줄 것을 중외(中外)에 반포하되, 마침내 잡은 자가 본청(本廳) 소속에서 나오더라도 직분(職分)상의 일이라 하여 그 상을 폐지하지 말라고 한 것도 마땅한 듯하니, 아울러 해청(該廳)에 분부하여 기한을 정해 잡아들이게 하소서."
하고, 복계(覆啓)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24일 병진
밤에 달이 좌각성(左角星)을 범했다.
11월 25일 정사
지평(持平) 박성로(朴聖輅)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서문(序文)을 지은 유현(儒賢)을 돌아보지 않으시고 발문(跋文) 쓴 재신(宰臣)을 지레 죄주시니, 사림(士林)들의 결망(缺望)됨은 이미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 유규(柳奎) 등이 상소하여 방자한 뜻으로 어진이를 추욕(醜辱)하였으나, 왜곡되게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죄를 주어 배척하는 명을 내리지 않으시니, 오히려 권여(權輿)가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청하기를,
"정호(鄭澔)를 파직하라고 하신 명령을 도로 거두시어 유현(儒賢)의 심정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중협(李重協)의 상소는 실로 공론(公論)에서 채택하여 대신(大臣)의 차자 내용에 곧바로 과오(過誤)를 진계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너무 지나치게 꺾어 누르셨습니다. 처치(處置)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자, 또한 비척(非斥)하는 전교를 내리셨으니, 대신의 처지를 위해서는 너무 후하다고 이를 만하나,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너무 박하다고 할 만하니, 참으로 개연(慨然)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정호의 일은 제신(諸臣)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이미 내 뜻을 다 말했는데, 서로 잇따라 구해(救解)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하다. 대신이 차자를 올려 논의한 것은 단연코 다른 뜻이 없었는데, 이중협(李重協)의 상소 가운데 사의(私意)에 끌려 동요되었다는 등의 말은 마치 사정에 끌려 법을 멸시한 것처럼 한 것이 있었으니, 어찌 매우 해연(駭然)하게 여길 만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황감(黃柑)을 내려 주고 반궁(泮宮)128) 에서 시사(試士)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반궁의 유생들이 바야흐로 유현(儒賢)을 변무하는 일로 상소(上疏)하였는데, 대사성(大司成) 민진원(閔鎭遠)이 과거를 치른 뒤에 진소(陳疏)하라는 뜻으로 타이르니, 유생들이 말하기를,
"유현을 변무하는 일은 바로 사문(斯文)에 관계된 중대한 일인데, 상소하는 일은 포기하고 과장(科場)에 나아가는 것이 선비의 도리가 아닙니다."
하고, 끝내 듣지 않았다. 민진원이 이로써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물려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6일 무오
태학생(太學生) 윤지술(尹志述)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이 삼가 생각하건대 좨주(祭酒) 신 권상하(權尙夏)는 일세(一世)에서 공경하여 표본으로 삼는 종사(宗師)이고 성조(聖朝)에서 예우(禮遇)하던 유현으로서, 전하께서 매양 정성을 다해 초래(招徠)하며 장차 불러들이고 말려는 것처럼 하셨는데, 요즈음 《가례원류》의 서문과 발문으로 인해 전하께서 전혀 돌아보지 않으실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재신(宰臣)을 특별히 파직하신 일에 이르러서는 이미 배척받은 가운데에 포함되었는데, 잇따라 유규 등이 상소하여 마구 꾸짖고 방자하게 죄주기를 청하니, 전하께서는 또 우악한 비답을 내려 권장하셨습니다.
돌아보건대 이 《가례원류》의 본말은 다 곡절이 있습니다. 고(故) 문충공(文忠公) 유계(兪棨)는 한평생을 예서(禮書)에 마음을 두고 편저(編著)한 바 있는데, 처음에는 《가례집해(家禮集解)》라고 이름하였다가 나중에 《가례원류》라고 고치고, 한가하게 살면서 수집하여 마침내 편질(篇帙)을 이루었던 것이며, 윤선거(尹宣擧)와 살던 곳이 아주 가까왔기 때문에 서로 강론하고 고증했으니, 역시 참여하여 도와준 공이 있습니다. 유계가 죽자 윤선거가 그의 행장(行狀)을 지었는데, 거기에 ‘공(公)은 예서에 종류가 많아서 영회(領會)129) 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 하여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가지고 강령(綱領)을 세우고 조목(條目)을 나눈 다음 옛 선현(先賢)의 예설과 우리 나라 여러 유현(儒賢)들의 문자를 아울러 취하여 분류해서 축조(逐條)한 아래에 붙이고, 이름하기를 《가례원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실지를 그대로 기록한 말이다.’ 하였습니다. 처음에 유계가 이미 중고(中稿)를 이루었으나 오히려 수정(修正)을 다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얼마 안되어 유계가 폐기되었던 가운데 기용되어 부름에 나가게 되자, 그 초본(初本)을 윤선거의 아들 윤증에게 부탁했으니, 그것을 대체로 윤증이 유계의 문인(門人)이었으므로 그에게 부탁하여 수식(修飾) 윤색(潤色)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 뒤 수년을 지나 유계가 병들어 서울에서 죽었는데, 죽음에 임박하여 윤선거 형제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이르기를, ‘인경(仁卿) 제종(諸從) 앞. 기력이 쇠진하여 두루 미치지 못하나, 부탁한 것에 대해서는 비록 죽은 뒤에라도 반드시 듣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하였으니, 인경은 바로 윤증(尹拯)의 자(字)입니다. 유계가 죽자 그 초본은 그대로 윤선거의 집에 보관되어 있게 되었습니다. 윤선거가 일찍이 고(故) 참판(參判) 이정기(李廷夔)에게 보낸 편지에, ‘일찍이 올린 《원류(源流)》는 다만 영안(令案)에만 드린 것인데 화숙(和叔)의 편지를 받아 보고 이미 돌려 보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면서 그 초권(初卷)을 돌려달라고 청하자, 이로부터 유윤보(兪胤甫)의 뜻과 크게 어긋나게 되었으니, 화숙은 바로 박세채(朴世采)의 자이고 윤보는 바로 유계의 아들 고(故) 교리(校理) 유명윤(兪命胤)의 자입니다. 대체로 이 책은 미처 교감(校勘)을 거치지 않았다 하여 유명윤이 전파하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윤선거의 말이 이러하였던 것이니, 이것으로 본다면 이 책의 편집을 과연 누가 주장한 것이겠습니까. 윤선거가 지은 행장은 위와 같이 갖추어 기술(記述)했는데, 윤증은 제문(祭文)과 묘지(墓誌)에서 모두 그 사실을 빼 버리고 쓰지 않았으니, 이는 홀로 무슨 뜻입니까? 조가(朝家)에서 간판(刊板)하라는 명(命)이 있게 되자, 유계(兪棨)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윤증(尹拯)의 집에 가서 원본을 찾으니, 윤증이 편지로 말하기를, ‘초본(初本)은 함께 편집한 것이고 후본(後本)은 단독으로 편집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그 아들 윤행교(尹行敎)에게 보낸 편지에는 ‘세상에서 우리 집 책이라고 전하다.’ 하면서 이미 내주었던 책을 곧바로 도로 찾아 가니, 유상기가 의심하여 노한 것은 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대체로 《가례원류》가 책으로 된 것은 병자년·정축년을 지난 지 겨우 몇 해가 되었고, 윤선거가 학문(學問)에 뜻을 둔 지 오래 되지 않았었으므로, 그 책의 강령(綱領)을 세우고 조목(條目)을 나누어 놓은 일은 모두 유계에게서 나온 것인데, 지금 윤선거가 참여하여 도와준 일만으로 유계가 주간하여 편집한 실상(實狀)을 엄폐하고 오로지 윤선거에게로 공(功)을 돌리려 하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어떠합니까. 이미 조명(朝命)으로 간판(刊板)하게 되었으니 세도(世道)의 책임을 맡은 자가 어찌 사실에 의거하여 곧바로 써서 그 당시의 찬집(纂輯)한 성대한 업적을 나타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윤증의 집안 모든 사람의 의도는 본래 이 책을 편집한 공을 오로지 윤선거에게 돌리려고 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유상기가 윤증에게 간행(刊行)하기를 청한 것이 이미 10년 전인데, 윤증이 시일을 끌며 추위(推諉)하고 끝내 기꺼이 허락하지 않다가, 성명(成命)이 있기에 이르자, 곧 드디어 우리 집 책이라고 말했으니, 이른바 함께 편집한 것이라고 한 것도 역시 맨 나중에 할 수 없이 한 말이있고, 그 본래의 의도는 독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아! 윤증은 유계에게 어릴 때부터 수업(受業)하였으니, 평일의 은혜과 의리가 예사로운 사제(師弟)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후일에 와서 책을 차지하려는 농간이 갑자기 상정(常情) 밖에 나왔으니, 서문(序文)에 이른바 소진(蘇秦)·장의(張儀)의 수단이라고 한 것은 이를 깊이 배척한 것이며, 〈형칠(邢七)의〉 낭패(狼狽)라고 비유한 데 이르러서는 원래 권상하(權尙夏)에게서 처음 나온 것이 아니었으니, 이 또한 온 세상에서 함께 말하는 바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규(柳奎)의 상소에서 또 권상하가 지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의 묘문(廟文)을 가지고 하나의 큰 죄안(罪案)으로 삼고 있으니, 아! 기사년130) 의 일을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간당(奸黨)의 선동으로 화변(禍變)이 혹독했으므로, 당시 송시열은 적소(謫所)에 나아가며 글을 지어 자기의 선사(先師)의 묘(墓)에 영결(永訣)을 고하고 화를 불러 일으킨 연유를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지금 권상하는 송시열의 정통을 이은 문인(門人)으로서 선사(先師)의 참혹한 화에 깊이 상심한 나머지 그 원위(源委)를 대략 묘문에 언급한 것은 참으로 지극한 아픔이 가슴속에 있는 데서 나온 것인데, 지금 유규 등이 갑자기 이 일을 장주(章奏)에 올려 권상하의 죄를 얽으려 하고 있습니다.
아! 세도(世道)가 수없이 변하고 세상이 여러번 바뀌었으나, 권상하는 산림(山林)의 숙덕(宿德)131) 으로서, 우뚝하게 홀로 남아 전하의 성대한 은총과 예우를 받음이 천고(千古)에 탁월하였는데, 갑자기 유규(柳奎) 등 괴귀(怪鬼)한 무리들의 말로 인하여 전하께서 대우하시던 자 때문에 권여(權輿)을 이어가지 못한다는 탄식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앞날의 일이 어느 지경에 이르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신 등이 이에 대해 어찌 정성을 다하여 피를 뿌리며 무욕(誣辱)받은 유현(儒賢)을 신구(伸救)하여 한 세상의 정론(正論)을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청하기를,
"미안하다는 하교를 도로 거두시고, 빨리 유규 등이 어진이에게 욕한 죄를 바로 잡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가례원류(家禮源流)》 한 책은 두 집안이 함께 수정(修正)하고 같이 편집(編輯)한 것이 명백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너희들이 유현(儒賢)을 위해 상소하여 변명하는 것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다. 내가 살펴보건대 서후문(序後文)은 짓지 않는 것이 해(害)가 없었을 듯하다. 유규 등의 상소는 본래 선정(先正)을 변무(辨誣)하기 위해 올렸던 것이었는데, 말하는 즈음에 비록 가려서 말하는 데 부족함이 있었으나, 고집하는 바는 올바르다. 깊이 배척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버려둔 것이지 내가 권여를 이어가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팔도의 유생 박광세(朴光世) 등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사헌(大司憲) 권상하(權尙夏)는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정통을 이어받은 사람으로서,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이 사림(士林)의 종장(宗匠)이 되어 성상의 도탑고도 지극한 예우(禮遇)와 사류(士流)들의 존경하고 흠모함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갑자기 일종의 괴귀한 무리들에게 비방을 받고 있습니다. 대체로 유규(柳奎) 등이 권상하를 침범하여 헐뜯는 까닭이 두 가지가 있으니, 그 하나는 바로 《가례원류》의 서문(序文)을 가리킨 것이고, 하나는 바로 송시열의 묘문(廟文) 가운데 있는 일단의 말을 가리킨 것입니다.
신 등은 먼저 《가례원류》에 대하여 그 주객(主客)의 분별을 변석(辨析)하기를 청합니다. 유계(兪棨)가 정력(精力)을 쏟아 이 책을 만들어 내고, 죽을 무렵에 저와 같이 정녕하게 문인(門人)에게 부탁하였으나, 그 책을 간행(刊行)하라는 명이 내려진 뒤에 미쳐서 갑자기 대대로 전해 오던 자기 집의 책이라고 말하였으니, 그의 스승과 제자의 의리를 저버리고 남의 아름다움을 훔쳐 자기에게 돌리는 정상을 사람이라면 누가 해괴하고 통탄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윤증(尹拯)이 만약 말하기를, ‘우리 선인(先人)이 함께 편집한 것이다.’라고 한다면 오히려 옳겠지만, 더구나 함께 편집했다는 것도 실상(實狀)이 아니잖습니까. 권상하가 서문에 그 실상에 근거하여 곧바로 썼는데, 거기에 소진(蘇秦)·장의(張儀)의 수단이라 한 것은 참으로 적적하게 썼다고 할 만하고, 형칠(邢七)의 낭패라고 한 것 역시 지난 내력이 있는 바, 한 몸으로서 두 스승을 배신했으니 어떻게 이런 등속의 명목(名目)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유규 등의 상소 가운데 비문(碑文)에 대한 한 조목도 역시 곡절이 있으니, 적(賊) 윤휴(尹鑴)가 명예를 도둑질하여 세상을 기만할 적에 송시열이 《중용(中庸)》의 주(註)를 고친 까닭에 가장 먼저 절교하셨습니다.
그리고 기해년132) 에 예(禮)를 논의한 뒤로 윤휴(尹鑴)가 임금을 낮추고 종통을 갈라 놓았다는 말을 창도(倡導)하자, 전에 윤휴와 절교하지 않았던 자로서 절교하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유독 윤선거(尹宣擧)만은 끝끝내 힘써 비호하였으며, 윤선거가 죽자 윤휴가 제문(祭文)을 지어 제를 지내 주었으니 그들이 서로 사랑한 뜻이 이에서 더욱 드러났습니다. 그 뒤에 윤증이 윤휴의 당(黨)과 송시열을 무함하고 헐뜯어 마침내 기사년133) 의 화변(禍變)에 송시열이 몸소 큰 화(禍)를 당하고 말았으니, 《춘추(春秋)》의 법으로 논한다면 윤증이 어떻게 송시열을 죽인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권상하의 처지로 송시열의 비문(碑文)을 지으면서 그 말이 어찌 돌아다보고 꺼리는 바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유규 등이 감히 입을 놀려 말을 꾸며서 유현을 무함하고 헐뜯었으나 전하께서는 또 따라서 칭찬하고 계시니, 신 등은 눈물을 흘리다 못해 통곡(痛哭)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이어 청하기를,
"유규(柳奎) 등의 죄를 무겁게 다스리고, 더욱 유현(儒賢)에게 성례(誠禮)를 더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광세(朴光世) 등의 소장 첫머리에 팔도의 유생이라 일컬은 것은 임금에게 고하는 말이 이미 성실하지 못하다. 유현을 변무(辨誣)하다고 핑계대고는 선정(先正)을 추욕(醜辱)하는 바가 끝이 없으니, 한 몸으로 두 스승을 배신했다는 말은 패려(悖戾)함이 더욱 극도에 달했다. 아! 부자(父子)와 사생(師生)간이 어느 편이 무겁고 어느 편이 가벼우냐는 등의 말은 지난해에 내린 전교가 명백할 뿐만이 아닌데, 정호(鄭澔)가 시종 스승을 배신했다는 것으로 어진이를 무함하다가, 이제 발문(跋文) 가운데에 또 ‘배사(背師)’의 죄목을 첨가한 것은 그 마음씀이 어진이를 추욕한 것이니, 진실로 이미 해괴하게 여길 만하였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시골 유생 무리들이 어찌 감히 방자한 뜻으로 어진이을 무함하고 욕함이 이 지경에 이르는 것인가. 지극히 마음 아픈 일로서 마땅히 쾌히 견벌(譴罰)을 베풀어야 하겠지만 이미 유현을 위해 상소하여 변명한다고 했기 때문에, 우선 버려두고 이 상소를 도로 내어 준다."
하였다. 박광세 등이 처음 이 상소를 올리자, 정원(政院)에서 물리치고 받지 않았는데, 박광세 등이 소장 끝에 후원(喉院)을 배척하여 진달하기를, ‘기꺼이 당(黨)을 위해 죽겠다는 마음으로 한결같이 성총(聖聰)을 막아 가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선부(李善溥)가 이것으로 인하여 사직소를 올리자, 임금이 상례(常例)적인 비답을 내렸다.
11월 27일 기미
하교(下敎)하기를,
"근래에 선비들이 유현을 위해 상소하여 변명할 때 원래 사정(邪正)을 논할 만한 것이 없는데, 어제 박광세 등이 올린 상소 가운데 사설(邪說) 등의 말이 있었으니, 만일 상소의 내용과 같다면 선정(先正)을 위해 진소하는 자들은 모두 간사한 사람이라는 것인가. 이 한 조목은 변파(辨破)하지 않을 수 없다. 비망기(備忘記) 가운데 누락되었으므로 말할 뿐이다."
하였다.
11월 28일 경신
이날에 감제(柑製)134) 를 물려서 시행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진규(金鎭奎)에게 고관(考官)으로 참여하도록 명하자, 김진규가 대궐에 나와 진소(陳疏)하기를,
"크고 작은 과시(科試)에 무릇 고관이 된 자가 으레 모두 동시에 패초(牌招)를 받아 함께 시소(試所)에 나가는 것은 나라에서 베푸는 시험을 엄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독 감제(柑製)에서는 사신(詞臣)135) 으로서 시험을 주장(主掌)하는 자는 일찍 패초에 따라 대궐에 나가서 승지(承旨)와 함께 반궁(泮宮)으로 가고, 집에 있는 자는 날이 저물어 패소(牌召)하면 뒤따라 빈청(賓廳)에 나아가서 고교(考校)에 동참하게 하는데, 체례(體例)가 여러 과시(科試)와 다르니, 참으로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유생들이 시권(試券)을 바치고 시장(試場)을 나가는 것이 날이 저물기에 이르지 않는다면, 집에 있는 자로서 혹 그들과 더불어 서로 만나거나 서로 소식을 듣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법을 지키고 공무를 봉행하는 자도 또한 마땅히 스스로 삼가겠지만, 사람들의 지목(指目)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른바 함께 고시(考試)한다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사람들의 의혹을 초래하고 간교한 폐단을 열어 놓기에 알맞은 것이니, 삼가 원하건대 묘당(廟堂)에 하순(下詢)하시어 해조(該曹)에다 뒤늦게 불러 고교(考校)에 참여하게 하는 일을 혁파하게 해서 나라의 과시를 엄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양관(兩館)136) 의 제학(提學)을 뒤늦게 불러 고시에 동참하게 하는 것은 옛부터 그러하였다. 다만 경의 말이 나라의 과시를 엄하게 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1월 29일 신유
감제에서 수위(首位)를 차지한 진사(進士) 성덕장(成德章)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11월 30일 임술
윤혜교(尹惠敎)를 검열(檢閱)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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