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계해
승지(承旨) 이희조(李喜朝)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사직 상소를 올렸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2일 갑자
수찬(修撰) 권세항(權世恒)이 상소하기를,
"사람 마음이 옛날 같지 않고 세상 도의가 날로 박해져서 인재를 추천하는 공한(公翰)이 나오면 욕하여 꾸짖기를 너무 가혹하게 합니다. 오늘날 괴원(槐院)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대신(臺臣)이 이른바. ‘유주(遺珠)072) ’란 다만 자기와 취미(臭味)가 동일하다 하여 억지로 분소(分疏)하는 것이고, 남우(濫竽)073) 란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번에 결단하여 전도가 양양한 사람을 방해하는데, 그 가운데에서 권점(圈點)에 준하여 허락한 사람을 도리어 억제하여 낮추고자 해서 이론을 세우고 뜻을 둠이 당벌(黨伐) 속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러한 논의(論議)를 신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생각한 바가 있어서 진소(陳疏)한 것이라면 불가(不可)할 것이 없는데, 분관(分館)하는 즈음에 진실로 ‘유주’의 한탄이 있으면 대신(臺臣)이 어찌 말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3일 을축
이때에 양사(兩司)에서 모두 인피(引避)하였는데,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올려 처치(處置)하고, 이어 한이원(韓以原)·송성명(宋成明)이 일에 대하여 논하기를,
"시험삼아 두 사람의 상소를 가져다가 논의해 보았더니, 송성명과 한이원이 모두 죄가 있었습니다. 대체로 죄줄 수 없는 처지에 죄줄 길을 찾고자 하여 은연중에 국사(國事)를 근심한다는 데 핑계를 대고 경알(傾軋)074) 하는 계책을 부리려고 도모하였으니 송성명의 상소가 그러하였고, 오직 제 뜻을 상쾌하게 하는 데에만 힘쓰고 천리(天理)·인정(人情)을 함께 얻을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임금을 망각하고 의리를 업신여긴 죄과에 몰아넣고자 하였으니, 한이원의 상소가 그러하였습니다. 송성명은 마땅히 남을 무함한 죄가 있으니, 전례에 따라 파직시키고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한이원은 남을 구함(構陷)한 죄가 있으니, 전례에 따라 처치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 이상성(李相成)이 전일에 이사상(李師尙)을 논한 것 때문에 황이장(黃爾章)에게 탄핵을 받자, 사직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황이장은 이사상과 이웃에 살며 가까운 사람으로, 정의(情誼)과 교계(交契)가 매우 가까습니다. 늙은 나이로 대각(臺閣)에 들어와 남을 대신하여 원수를 갚되, 형상할 수 없는 말로 다른 사람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망측(罔測)한 말로 남을 능멸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허물이 없는 자여야 남을 욕할 수 있는 법인데, 황이장이 어찌 허물이 없는 자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요즘의 대신(臺臣)의 논의가 공정한 마음에서 나오고 있지 아니하니, 어찌 개의(介意)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윤양래(尹陽來)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10월 4일 병인
번개가 쳤다.
10월 5일 정묘
임금의 환후에 여러 증세가 더욱 감해졌으므로, 약방에서 이날부터 돌아가며 숙직(宿直)하였다.
10월 6일 무진
유성(流星)이 우림성(羽林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다.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고(故) 판서(判書) 이돈(李墩)의 아내가 상언(上言)하여 말하기를, ‘망부(亡夫)가 도로 궐하(闕下)에 나아갔을 때에 함께 나간 시관(試官)인 우의정이 직접 보았다.’ 하였는데, 신이 정시(庭試) 때에 시관(試官)의 의망(擬望)에 들어 있어서 문한(門限)에 급히 나아갔더니, 궐문이 막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돈이 예조(禮曹)의 직방(直房)075) 에 있으면서 사람을 시켜 잠깐 맞아들이게 하였으나, 신은 병 때문에 들어가 볼 수 없다고 대답하였는데, 그때가 미처 어두워지기 전이었으니, 밤이 깊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돈과 오도일(吳道一)이 서로 친하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바인데, 오도일의 아들 오수원(吳遂元)이 마침 그 방(榜)에 참여하였으니, 이돈이 패초(牌招)를 받고 다시 나온 것을 진실로 망령되고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두루 찾아다녔다’는 말이 이러한 즈음에 나왔기 때문에 잡아다가 추핵(推覈)하는 일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루 찾아다녔다는 한 조항은 이미 두 차례의 조사를 거쳤으나, 이돈이 과연 사정을 쓴 자취가 있다면 비록 두루 찾아다니지 않았다 하더라도 저절로 그 죄가 있는 것이며, 오수원 역시 마땅히 방목(榜目)에서 발거(拔去)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의심할 만한 자취가 없다면, 두루 찾아다녔는지의 여부는 논할 것이 못되며, 오수원의 죄과(罪科) 또한 분명하지 못한 데로 돌아가게 함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만약 그가 사정을 썼는가를 핵실해 보고자 한다면 오수원을 가려 뽑은 전말(顚末)에 대해여 한 번 모든 시관(試官)에게 함문(緘問)076) 해 보면 간교한 정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 실상을 알아내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과장(科場)에서 사정을 쓴 것이 얼마나 큰 죄이기에 의심스런 사이에 버려두고, 그 한평생의 누(累)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전도가 양양한 사람을 꺾는 것은 정치와 교화에 관계되는 바가 있으니, 변핵(辨覈)하는 도리는 그만두는 것만으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언(上言) 가운데 함문하라는 말은 사체(事體)를 알지 못하는 말일 뿐만 아니라, 또한 긴요한 데 관계되는 것도 아니다. 과거에서 사정을 쓴 것은 핵실하지 않을 수 없는데 차자 속에 오수원을 가려 뽑은 전말을 한 번 함문하자고 한 말은 사의(事宜)에게 마땅하니, 유사(攸司)에게 거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심수현(沈壽賢)을 승지(承旨)로, 조명봉(趙鳴鳳)을 장령(掌令)으로, 이홍(李宖)을 필선(弼善)으로, 홍우행(洪禹行)을 정언(正言)으로, 홍계적(洪啓迪)을 겸사서(兼司書)로 삼았다.
10월 7일 기사
달이 입성(立星)을 침범했다.
10월 8일 경오
천둥하였다.
일전에 숙위군(宿衞軍) 안수운(安守雲)이 무단히 도주하였는데, 임금이 특명으로 포도 대장(捕盜大將)을 추고(推考)하게 하고, 기한 안에 잡아다가 효시(梟示)해서 여러 사람을 경계하라고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훈국(訓局)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안수운은 이미 잡았습니다. 수직(守直) 중에 도망한 자는 그 죄가 장(杖) 1백에 그치나 저번날에 효시하라는 전교가 계셨으니, 그 전교대로 처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사람의 생사를 결단하는 일은 대신(大臣)에게 상세히 물어서 품처(稟處)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였다. 여러 대신이 모두 말하기를,
"숙위군(宿衞軍)이 당직 날 밤에 달아난 것은 편오(偏伍)의 병졸이 일로 인하여 도주한 경우와는 같지 않으니, 상률(常律) 밖의 일죄(一罪)로 논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법 이외는 형률을 논하는 것은 신들이 감히 대답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곤장(棍杖) 1백 대의 율(律)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0월 9일 신미
밤에 번개하였다.
이선부(李善溥)를 승지로, 박성로(朴聖輅)를 지평(持平)으로, 최경식(崔慶湜)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10월 11일 계유
우박이 내렸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유(金楺)가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김유가 말하기를,
"본도(本道)에 흉년이 들었으니 진휼청(賑恤廳)에서 가져다 쓰는 상정미(詳定米)077) 를 머물게 두고서 진휼에 보태게 하소서. 그리고 황당선(荒唐船)078) 의 왕래가 잦으니, 연해(沿海)의 수령(守令)·변장(邊將)을 마땅히 가려서 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 동해(東海)의 한 부인이 원통함을 품자, 3년 간 가물었다고 한다. 진도(珍島) 한 고을에 10년 동안 흉년이 들었다 하니, 내가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혹시 바다 밖의 빈궁한 백성들이 원통함을 품고 펼 길이 없어서 위로 하늘의 온화한 기운을 범하여 이런 흉년이 든 것이 아닌가? 그 본도의 방백(方伯)으로 하여금 본군(本郡)에 자세히 탐문하여 즉시 계문(啓聞)하는 일을 특별히 유시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도빈(趙道彬)을 승지로, 이만성(李晩成)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양정호(梁廷虎)을 사서(司書)로, 신사철(申思喆)을 이조 정랑(吏曹正郞) 겸문학(兼文學)으로 삼았다.
정언(正言) 홍우행(洪禹行)이 논사소(論事疏)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前) 정언(正言) 권엽(權熀)이, 정식(鄭栻)이 자기를 논의한 데 대해 노(怒)하여 공공연하게 욕하여 꾸짖었었는데, 사친(私親)의 병을 구제하기를 비는 소장(疏章)을 올렸다는 등의 말까지 서슴없이 하면서 현저하게 비난하고 조소(嘲笑)하는 뜻이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효경(孝敬)의 마음을 가진 자가 차마 입에 올릴 말이겠습니까. 이러한 등속의 윤기(倫紀)가 없는 말은 마땅히 규찰(糾察)하여 질책(叱責)하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장령(掌令) 이상성(李相成)이 황이장(黃爾章)에게 탄핵받은 일에 이르러서는 등한하여 서로 바로잡을 일이 아닌데, 장황하게 진소(陳疏)하여 도리어 말한 자를 공격하고, 불쑥 이사상(李師尙)의 한 조목을 인용하여 마치 자기가 좋아하는 자를 위하여 보복하는 것처럼 한 점이 있습니다. 그 거조가 참으로 지극히 그릇되고 망령되었으니, 진실로 원하건대 시비(是非)를 명백하게 보이시어 권엽의 잘못을 나무라시고, 이상성을 파직(罷職)하소서, 전(前) 장령(掌令) 한이원(韓以原)이 대신을 위하여 신구(伸救)한 것은 진실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으니, 송성명(宋成明)의 뜻은 충애(忠愛)한 자를 드러나게 배척하고, 소홀(疏忽)한 자를 은밀히 신구(伸救)하려 한 것이니, 원통함을 품고 두려운 마음으로 움츠리고 있는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한층 더 편안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망령된 말에 현혹되지 마시고, 원로 대신을 예로 대우하시어 시종 변함이 없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식의 말이 사리에 그릇되고 망령되다면 권엽의 소론(疏論)이 과당(過當)함을 보지 못하겠는데, 지금 문자(文字)를 적결(摘抉)하여 효경하는 마음을 가진 자로서 차마 입에 올릴 말이겠느냐고까지 한 것을 이미 이해하지 못하겠다. 지난번 대계(臺啓)가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이상성(李相成)이 상소하여 변명한 것 또한 죄줄 만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한이원이 지난 일을 추급하여 제기한 것도 반드시 마땅하다고 할 수 없는데, 어찌 변하고 변치 않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우행(洪禹行)이 이 때문에 인피(引避)하자, 지평(持平) 조성복(趙聖復)이 출사(出仕)시키도록 처치하였다. 이 뒤에 정언 김상윤(金相尹)이 조성복이 내린 처치가 사리에 타당하지 못하다고 상소를 올려 논하고, 조성복을 체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과조(科條)를 세워 두도록 명하였다.
장령 이상성(李相成)이 상소하여 해청(該廳)의 칭호를 정하기를 청하면서 양역(良役)을 변통(變通)하는 일을 칭탁하였다. 또 말하기를,
"어떤 자는 말하기를, ‘교생(校生)으로 모입(冒入)한 자는 첨정(簽丁)으로 정한 것을 파(罷)하는 것이 옳다.’고도 하고, 어떤 자는 말하기를, ‘서(庶)라고 칭명되는 자는 재(齋)를 지키게 하고 교생은 모두 파하는 것이 옳다.’고 하기도 하며, 어떤 자는 말하기를, ‘경사(京司)에서 점유한 어전(漁箭)과 염분(鹽盆)은 세금을 거두어 군수(軍需)에 보충하는 것이 옳으며, 각 고을의 적곡(糴穀)이 너무 많은 곳에서는 절반을 서울로 실어오게 해서 근본이 되는 지역을 후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 몇 가지는 또한 질문하여 강구할 만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수령(守令)을 가려서 차임(差任)하는 방도에 있어서 문관(文官)·남행(南行)079) ·무관(武官)을 뒤섞어 차임(差任)하되, 반드시 연한(年限)을 굳게 지키지 않은 것은 또한 폐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늙은 자라 하여 반드시 모두 혼모(昏耄)한 것은 아니니, 마땅히 옛 제도를 거듭 밝히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송성명(宋成明)이 약원(藥院)을 죄에 얽어 넣은 것은 오로지 경알(傾軋)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니, 한이원의 말이 어찌 없을 수 있었겠습니까. 옥당(玉堂)에서 모두 파직하도록 청한 것은 다만 공평(公平)하다는 이름을 얻으려는 것이었으니, 삼가 원하건대 시비를 밝히소서. 일전에 대신(大臣)의 차자로 인하여 이돈(李墩)이 사정을 썼는지의 여부를 여러 시관(試官)에게 함문(緘問)하라는 명(命)이 계셨습니다. 과장(科場)에서 사정(私情)을 쓰는 것이 얼마나 비밀스런 일입니까. 만약 이에 동정(同情)한 사람이라면 참여하여 알 수 있겠지만, 진실로 그런 자가 아니라면 결코 깨달았을 리가 없는데, 대신(大臣)이 이에 대하여 오히려 신구(伸救)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으니, 어찌 연인(連姻)이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그의 원통함을 알고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분관(分館)에 대한 일을 들어 말하기를,
"전도가 양양한 사람의 앞길을 꺾는다고 말한 것은 어찌 관후(寬厚)한 뜻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신(大臣)도 역시 그 당시 고관(考官)이었으니, 만약 직접 본 것이 있다면 어찌 분명하게 고하지 않으며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스스로 질언(質言)했어야 할 것인데, 반드시 다른 사람의 함사(緘辭)를 기다리는 것은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이어 함문(緘問)하라는 명을 그만두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윗 조목의 몇 가지 일은 묘당(廟堂)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전번에 옥당에서 올린 차자에서 논한 것이 마땅하였는데, 이제 도리어 신구(伸救)한 것으로 의심하고 극력 비난하고 꾸짖으며 조금도 자중(自重)하는 바가 없으니, 사체에 있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해괴(駭怪)하게 여길 만하다."
하였다.
10월 12일 갑술
대신 및 비국(備局)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가 말하기를,
"연해(沿海) 등지에서 입은 재해가 더욱 심하고, 제주 지방이 특히 심하니, 마땅히 진휼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품질 좋은 인삼(人蔘) 얻기를 청했는데, 이는 곧 후일의 폐단과 관계가 있으니, 제신(諸臣)들에게 물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좌의정 김창집(金昌集)·판윤(判尹) 민진후(閔鎭厚)·예조 판서(禮曹判書) 조태구(趙泰耉)·호조 판서(戶曹判書) 이건명(李健命)·병조 참판(兵曹參判) 이광좌(李光佐)가 모두 말하기를,
"후폐에 관계 있는 것은 마땅히 방색(防塞)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해진 조목 이외에 별도로 구하는 것이 반드시 후폐를 끼치게 되는 것이니, 방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한림(翰林)이 곧장 퇴출(退出)하고 행공(行公)하지 않는다 하여 의금부(義禁府)에서 추고하게 했는데도 끝내 명을 받들지 않자, 별 겸춘추(別兼春秋)를 차출하여 신천(新薦)을 보완하라고 명하고, 또 수원(水原)에서 재해를 입었다 하여 본부(本府)의 시재(試才)를 명년 1월·2월 사이로 물려서 행하라고 명했다. 서종태(徐宗泰)가 말하기를,
"호포(戶布)·구전(口錢)의 법을 민진후(閔鎭厚)에게 그 대총(大總)을 마련하게 하였으나 지금 갑자기 시행하기가 어렵고, 결포(結布)도 역시 편리하지 않은 점이 많습니다."
하자, 김창집은 말하기를,
"신법(新法)은 갑자기 시행하기가 어려우니, 반드시 변통하고자 한다면 먼저 호포법(戶布法)을 비당(備堂)080) 한두 사람을 뽑아서 그들에게 맡겨서 책성(責成)081)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민진후는 말하기를,
"신법은 모두 갑자기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군액(軍額)과 민호(民戶)가 균등하지 않은 곳에는 추이(推移)하여 변통하게 한다면 민폐를 덜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말이 참으로 옳다. 이로써 변통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급선무는 오직 인재를 얻는 데 있습니다. 경외(京外)에서 모두 마땅한 사람을 얻는다면, 백성의 병폐는 저절로 바로잡혀 고쳐질 것입니다."
하고, 이건명이 말하기를,
"호포(戶布)의 법을 한 고을에 먼저 시험해 보면 시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조 판서가 진달한 먼저 시험해 보자는 논의가 어떠한가?"
하자, 제신(諸臣)이 모두 말하기를,
"여러 고을의 사세(事勢)가 각자 동일하지 않아서 먼저 시험할 수 없는 실정들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밖에도 조금이나마 백성을 구제할 방도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다시 더 상의(商議)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임금이 권설(權卨)의 일에 대하여 제신에게 각기 소견을 진달하도록 명하니, 제신이 모두 말하기를,
"요망하고 허탄한 죄를 진실로 면할 수 없으나, 사형을 용서하고 변방으로 내치는 것 또한 형벌을 잘못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건명·이광좌와, 장령(掌令) 최경식(崔慶湜), 헌납(獻納) 윤양래(尹陽來)는 말하기를,
"죄를 용서해서는 안되니, 다시 엄하게 끝까지 구핵(究覈)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추문(推問)하라고 명하였다. 민진후(閔鎭厚)가 문묘(文廟)와 외방 향교(鄕校)의 위판(位版)을 《회전(會典)》에 따라 개정(改正)해서는 안되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또 전선(戰船)은 운용하기가 불편하고 한갓 물력(物力)만 낭비하니, 선창(船滄)이 좋은 곳은 그대로 두되, 긴요하지 않은 곳은 병선(兵船)으로 바꾸어 만드는 일을 묘당(廟堂)으로 품처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전선을 갑자기 파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서히 품처한 것이 어떠한지 살펴보고 다시 처분(處分)하겠다."
하였다. 민진후가 또 청하기를,
"충익위(忠翊衞)에 모록(冒錄)된 자로서 북한 산성에 소속된 자는 그가 사는 고을에 내어 주어 군액(軍額)에 충정(充定)하게 하고, 경군문(京軍門) 및 외군문(外軍門)에서 태감(汰減)된 군관(軍官)을 북한 산성에 획급(劃給)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이유(李濡)가 올린 책자(冊子)의 지부(地部)082) 에 관계되는 것은 불편함이 많이 있습니다. 묘당에서 복계(覆啓)할 때에 아울러 품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호남에서의 습진(習陣)과 조련(操鍊)은 이미 정지하였으니, 영장(營將)의 순찰[巡歷]은 마땅히 하도록 분부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군사의 조련과 습진하는 등의 일은 만일 대단한 흉년이 아니면 오래도록 폐지할 수 없는데, 인습(因襲)을 따르는 것을 전례(前例)로 삼는 것은 진실로 이에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무릇 재해를 입은 경중(輕重)에 대해서는 마땅히 사실대로 논하여 보고해야 하는데, 근래에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는 감사(監司)·수령(守令)들이 많다. 지난날 황해 감사(黃海監司)의 장계(狀啓)에 ‘9월 13일 서리가 내린 것은 너무 이르다.’고 한 것은 매우 마땅하지 못하다. 이후로 이러한 일들은 묘당에서 자세히 살펴서 회계(回啓)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정언 김상윤(金相尹)이 상소(上疏)하기를,
"봄에 양전(量田)할 때 옛날에 묵혔다가 다시 기경(起耕)하는 전지를 핵실(覈實)하라는 일을 여러 도에 관문(關文)을 발송했는데,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세면(李世勉)이 마감(磨勘)된 것이 많지 않다 하여 수령(守令)을 계파(啓罷)하기에 이르렀으니, 열읍(列邑)에서 반드시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결복(結卜)을 증가시킬 것입니다. 빨리 도신(道臣)에게 신칙하여 억지로 전결(田結)을 봉감(捧甘)083) 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사인(士人) 이지방(李之昉)과 이해(李澥)는 바로 동종(同宗)의 친척인데, 산소(山所)에 관한 일로 송사(訟事)를 일으켜 다투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사부(士夫)로서 지친(至親) 사이에 이런 변괴(變怪)가 있으니, 즉시 경조 차관(京兆次官)으로 하여금 속히 회계(回啓)하여 판결하게 한 후 만일 전과 같이 서로 버티는 폐단이 있으면 조령(朝令)을 어긴 죄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번 괴원(槐院)의 권점(圈點)을 다시 하자는 청은 진실로 공의(公議)에 따른 것입니다. 그 지명(指名)된 속에 최도문(崔道文)은 비록 무관집[將門]의 사람이나, 재망(才望)과 문필이 벗들 사이에 추중(推重)받는 사람인데, 지망(地望)이 맞지 않는다고 하여 남우(濫竽)의 배척에 싸잡아 넣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적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양주 목사(楊州牧使) 이진검(李眞儉)은 수령(守令)의 몸으로 멀리 다른 도(道)에 산놀이를 떠나 바야흐로 가을의 정무(政務)를 오랜 기간 폐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행지(行止)의 방자함은 논벌(論罰)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양전(量田)의〉 일은 지부(地部)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이지방(李之昉) 등의 일은 상소한 말이 마땅하니, 이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라. 이진검이 한 행위는 참으로 지극히 온당하지 못하니, 과연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면 도신(道臣)이 반드시 놓아두지 않았을 것인데,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10월 13일 을해
이관명(李觀命)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안중필(安重弼)을 장령(掌令)으로, 조성복(趙聖復)을 지평(持平)으로, 권변(權忭)을 교리(校理)로, 홍호인(洪好人)을 집의(執義)로, 정도복(丁道復)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개성부(開城府)에서 천둥하였다.
10월 15일 정축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차자(箚子)를 올려 이상성(李相成)의 상소에 대변(對辨)하기를,
"이돈(李墩)의 일이 있은 뒤로 용서하자는 논의를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생각하건대 이돈이 참으로 사정(私情)을 행할 마음이 있었다면, 오로지 가리어 숨기기에 겨를이 없을까 두려워하였을 것인데, 대낮에 벽제(辟除)084) 하여 호위받으며 거자(擧子)들을 두루 찾아다녔는 것은 반드시 이치에 없는 일입니다. 두루 찾아다녔다는 말은 원한을 품은 사람에게서 나왔고, 한두 어리석은 아이들에게서 증거가 이루어졌으니, 여러 종들이 이돈을 위하여 삶을 버린다는 것도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신이 직접 본 것으로 말씀드리면, 시제(試題)가 그 손에 나오지 않았고, 시권(試券)을 뽑아 올린 것도 다른 사람 손에서 나왔으며, 합고(合考)하였을 때에도 끝내 참섭하지 않았으니, 의심할 만한 자취가 없음이 분명한데, 시끄러운 말들이 마침내 옥사(獄事)를 이루었습니다. 두루 찾아다녔다고 단정하였다면, 사정을 쓴 증거는 저절로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인데, 지금에 이르도록 과거에 급제한 것으로 결정된 사람을 분명하지 못하다는 것으로 지목하여 그 진출할 길을 막고 있으니, 이렇게 하고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비록 연인(連姻)의 사이라 하더라도 이미 응당 피해야 할 혐의가 없는데, 어찌 끝내 한 마디도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정시(庭試)와 알성시(謁聖試)는 본래 시관(試官)이 상피(相避)085) 하는 법이 없으므로, 고관(考官)의 친속이 비록 선발된 속에 있더라도 만약 잡을 만한 단서가 없으면, 마땅히 의심을 두지 않아야 합니다. 설사 이돈이 두루 찾아다녔다고 하더라도 사정을 쓴 허실(虛實)을 핵실하지 않은 채 억지로 사정을 쓴 자취가 그 가운데에 있다고 말하는 것을 신은 참으로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시취(試取)한 전말(顚末)을 핵실하고자 한다면, 시관(試官)을 버려두고 어디에 물어 볼 수 있겠습니까? 저 사람이 함문(緘問)하는 것을 그르다 하면서, 급급히 그만두기를 청하고 있으니, 그가 힘써 막아 가리려는 뜻을 신은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신(大臣)이 차자를 올려 진달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는가. 이상성의 말은 오로지 고감(敲撼)하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서, 욕하고 헐뜯기에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았으니, 나는 실로 해괴하게 여긴다."
하였다.
10월 17일 기묘
이조 판서 조태채(趙泰采)가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이돈(李墩)의 옥사를 소론(疏論)한 것으로 인하여 사직 상소를 올리고, 대략 말하기를,
"대신의 차자에서 이른바 어리석은 아이들에게 증거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것이 비록 호위하는 무리들을 구실(口實)로 삼았으나, 저 나이가 20세에 가까운 자들을 어리석은 아이라고 말함은 스스로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인데, 지금 대신이 혹 신구(伸救)하는 말만 익히 듣고 자세히 살피지 않은 탓이 아니겠습니까. 조정에서 핵실하라고 명한 것은 단지 두루 찾아다녔다는 한 가지 일일 뿐이니, 그 허실을 핵실하여 마침내 귀일(歸一)시킨다면, 사정을 썼는지 여부는 저절로 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만약 차례로 핵실하여 추문하라는 명이 있으면, 또한 당연히 봉행할 뿐입니다만, ‘여부(與否)’란 두 글자는 애당초 단정(斷定)한 말이 아닌데, 대신이 또한 이 말을 제기하여 마치 곧바로 단정하려고 마음을 쓴 것같이 여김이 있습니다. 대신이 과연 원통하고 민망하게 여겨 신백(伸白)할 뜻이 있어서 고관(考官)과 인가(姻家)의 혐의도 피하지 않는다면, 어찌 옥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던 때에 일찍 말하지 않고 지금 그 집에서 상언(上言)한 뒤에야 힘써 증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대신의 차자의 내용은 깊은 뜻이 있지 않은데, 경의 인혐(引嫌)하는 바가 너무 지나친 게 아닌가?"
하였다.
대사간 이관명(李觀命)이 상소하기를,
"요즘 사대부의 풍습이 날로 위축되어 이해(利害)가 의사(擬似)한 사이에 기구(崎嶇)086) 함이 마음에 걸려서 요컨대 그 귀취(歸趣)를 다만 자기의 편리한 위치만을 차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이성조(李聖肇)가 처치(處置)하는 일로 패초(牌招)받아 대궐에 나아갔는데, 결정[立落]하기가 곤란하자 정단(呈單)하고 나가서 밤새도록 구색(究索)하다가, 비로소 오우진(吳羽進)의 공사(供辭) 한 구절 말로써 양양하게 들어와서 이것을 가지고 인피(引避)하자, 듣는 자가 몹시 놀랐습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공박하여 바로잡는 논의가 없으니, 잇따라 처치를 담당한 자가 본받아 묘법(妙法)으로 삼고 있습니다. 헌납(獻納) 윤양래(尹陽來)는 또 인대(引對)하던 날에 〈자기를〉 부른 것이 아니라 하여 인혐하고 교묘하게 처치를 피하려 하였으니, 이런 풍조를 제거하지 않으면 대각(臺閣)이 모양을 이루지 못하여 국사는 날로 위망한 데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두 신하를 파직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논한 바는 다 좋으니, 다만 두 신하가 인피한 것을 가지고 반드시 교묘하게 처치를 피하려는 데에서 나왔다고 한 것은 너무 과당(過當)한 데 관계된다."
하였다.
이심(李深)을 장령(掌令)으로, 신사철(申思喆)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평안도 덕천(德川) 땅에 천둥하였다.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첫 번째 정사(呈辭)하자,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내렸다. 【두 번, 세 번 모두 같았다.】
【태백산사고본】 64책 56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5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10월 19일 신사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10월 20일 임오
호조 판서 이건명(李健命)·이조 참의 이의현(李宜顯) 등이 우상(右相)의 차자(箚子)로 인하여 사직소(辭職疏)을 올리니, 임금이 모두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사직(司直) 김진규(金鎭圭)가 또 진소(陳疏)하기를,
"임진년087) 과옥(科獄)이 있던 처음에 조정에서 형관(刑官)에게 명하여 〈거자(擧子)를〉 두루 찾아다닌 일에 대해 그 겸종(傔從)에게 구문(究問)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그 겸종 중에서 정몽선(鄭夢先)이 밥먹을 때였다고 핑계대고 두루 찾아다닌 여부를 모두 기꺼이 말하려 하지 않고, 또 교부(轎夫)088) 의 이름도 대지 않았으로 마땅히 신문(訊問)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동암(李東馣)이 의견을 달리함으로 인하여 각자 진소하였더니, 특별히 엄중하게 형신(刑訊)하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신이 봉행한 것은 두 차례에 지나지 않으나, 정몽선을 당연히 신문해야 한다는 논의는 당초에 신에게서 나왔는데, 대신이 지금 허물로 잡고 있습니다. 두루 찾아다녔다는 것을 송사하는 것은 이돈의 겸종을 신문하는 데에 달려 있으니, 신이 어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의 처음 차자에서는 사증(詞證)이 중하다 하여 두루 찾아다닌 것에 대해서는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었는데, 이제 이것을 가지고 의혹스런 단서로 삼고 있으니, 어찌하여 그 전후의 말이 서로 틀리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차자 속에 고관(考官)의 친속(親屬)이란 말을 무한하게 함축된 뜻이 있습니다. 신은 임오년089) 에 고관이 되었는데, 친속이 급제했다는 이유로 망측(罔測)한 무고를 당했으나, 다행히 성명(聖明)의 밝으신 심사(審査)를 입어 명쾌하게 씻게 되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대신이 진실로 이돈이 거자(擧子)를 두루 찾아다닌 것을 과연 모든 고관의 친속(親屬)이 우연히 친시(親試)090) 에 참여한 것과 동일하게 여긴다는 것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대신이 차자에서 한 말은 본래 깊은 뜻이 없는데, 경은 어찌 말을 허비하여 사기(辭氣)의 불평(不平)이 이에 이르는 것인가? 사체에 있어서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송성명(宋成明)의 상소 때문에 잇따라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니, 임금이 이날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기를,
"뜸을 뜨는 일이 명일에 있으니, 경 또한 한결같이 인입(引入)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니, 이이명이 비로소 명을 받들고 출사(出仕)하였다.
10월 22일 갑신
신사철(申思喆)을 수찬(修撰)으로, 최경식(崔慶湜)을 장령(掌令)으로, 오명항(吳命恒)을 보덕(輔德)으로, 김상옥(金相玉)을 정언(正言)으로, 김재로(金在魯)·박사익(朴師益)·황규하(黃奎河)를 별 겸춘추(別兼春秋)로, 이홍(李宖)을 헌납(獻納)으로, 이진망(李眞望)을 문학(文學)으로, 정우주(鄭宇柱)를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10월 24일 병술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차자를 올려 사례하니 승지를 보내어 선유(宣諭)하였으나, 인하여 물러가기를 바라며 이르기를,
"신은 당초 핵실하기를 청한 사람과 시종 조사하여 다스린 신하에 대해 본래 비의(非議)할 마음이 없었는데, 제신(諸臣)이 억지로 인혐(引嫌)하고 침범하여 능멸하고 꾸짖어 배척하였으니, 김진규의 상소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만약 신이 제신들의 상 상소에 의하여 일일이 변파(辨破)하고자 한다면 날마다 해도 부족할 것인데 무슨 기력으로 저당(抵當)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의 차사(箚辭)는 성실하여 다른 뜻이 없으니, 뜻밖의 사람들 말을 어찌 혐의할 것인가."
하였다.
전라도 전주(全州)·장성(長城)·만경(萬頃)·순창(淳昌) 등 고을에 천둥하였다.
10월 26일 무자
김상원(金相元)을 부응교(副應敎)로, 황귀하(黃龜河)를 교리(校理)로, 홍정필(洪廷弼)·홍계적(洪啓迪)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10월 27일 기축
권세항(權世恒)을 필선(弼善)으로, 조익명(趙翼命)을 사서(司書)로 삼았다.
정언(正言) 김상옥(金相玉)이 상소하여 김우항의 차자에 대해 배척하기를,
"시비가 분명하지 않으면 군정(群情)이 더욱 어긋나게 되고, 호오(好惡)가 참되지 않으면 사람의 뜻이 정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당(唐)나라 건중(建中) 연간의 일091) 과 송(宋)나라의 조정(調停)092) 은 실로 밝은 감계(鑑戒)가 되는 일들입니다. 지난번 대신의 차자는 실로 뜻밖에 나온 것으로서 조사하는 일이 처음 발생한 날에 소장을 올려 논열(論列)하였다면 오히려 옳겠지만 이제 감처(勘處)093) 한 지 여러 해가 지난 뒤에 추론(追論)하니,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헌신(憲臣)이 상소하여 논의한 데 미쳐서는 도리어 그 절차를 증가하여, 처음에는 거자(擧子)를 일일이 두루 찾아다녔다는 일은 두 번이나 조사하여 감단(勘斷)을 거쳤으니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가, 끝에 가서는 두루 찾아다녔다는 것까지도 아울러 반드시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 옳다 하고 한 번 그르다 하는 사이에 그 관계되는 바는 지극히 중대한 것인데, 전하께서 대신과 제신(諸臣)에게 내린 비답(批答)에 어떤 때는 무엇이 옳지 않겠느냐고 유시하시고, 어떤 때는 깊은 뜻이 있는 게 아니라고 전교를 하시는 등 범연하게 답을 내리시어 끝내 변석(辨析)하지 않으시니, 아마도 성명(聖明)께서 대신(大臣)을 위안(慰安)하는 뜻을 힘써 포함하시고 사기(辭氣)에 드러내지 않으시려는 듯하나, 유독 여론(輿論)이 더욱 답답해 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이상성(李相成)의 상소가 비록 적합함이 부족한 바가 있으나, 상신(相臣)에게 전유(傳諭)하신 비답은 사지(辭旨)가 준절하여 너무 지나치게 최절(摧折)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언로를 넓히고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왕명(王命)을 대신 찬술(撰述)할 때에는 오직 간명하고 엄중하게 해야 마땅한데, 대신이 세 번 정사(呈辭)하여 내린 불윤 비답(不允批答)의 사연 속에, ‘노래를 읊고 한숨지어 탄식한다.’는 말은 너무나 외람되고 잗단 데에 관계되고 ‘무리지어 꾸짖고 떼 지어 떠들어 댄다.’는 말은 두루 조정의 진신(搢紳)들을 무함하는 것으로서 말의 뜻이 마땅하지 못하였고, 비유한 바가 질서가 없습니다. 신의 뜻은 왕명을 지어 올린 사람에게는 마땅히 견책(譴責)을 더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신(大臣)은 인주(人主)의 고굉(股肱)이니, 생각한 바가 있으면 대개 숨김없이 진달하는 것은 본래 괴이한 일이 아니니, 이것이 이른바, ‘무엇이 옳지 않을 게 있는가?’라고 한 것이다, 대저 그대들의 말은 오로지 대신을 침척(侵斥)하고, 이상성(李相成)을 신구(伸救)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인데,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때의 일을 인용한 것은 이미 이 일에 가까운 비유가 아니며, 지제교(知製敎)를 견책(譴責)하자고 청한 것도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진실로 괴이하게 여길 만하다."
하였다.
판윤(判尹) 민진후(閔鎭厚)가 사직소를 올려 김우항의 차자에 대해 변명하기를,
"대신이 말하고 있는 바는 거자를 두루 찾아다녔다는 것과 사정(私情)을 썼다는 두 조항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두루 찾아다녔다는 데 대해서는, ‘원망을 품은 사람에게서 나왔고, 한두 어리석은 아이들에게서 증거가 이루어졌으니, 여러 겸종(傔從)들이 이돈을 위해 생명을 버린다는 것도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였으며, 사정을 썼다는 데 대해서는, ‘과제(科題)가 그 손에서 나오지 않았고, 뽑아 올린 것도 다른 사람에게서 나왔으며, 합고(合考)하였을 때에도 끝내 참섭(參涉)하지 않았습니다.’ 했습니다, 대저 이전에 품었던 원한의 얕고 깊음과 여러 겸종들이 생명을 버림에 있어 쉽고 어려운 데 대해서 신은 진실로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예강(禮講)094) 한 가지 일에서 이미 속인 단서가 드러나 있으니, 증거로 이루어진 것이 가령 참으로 어리석은 아이의 말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 말에 대해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목을 쓴 것이 누구의 손에서 나왔고 뽑아 올릴 적에 사심을 쓰지 않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신도 어떻게 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만, 자신이 제학(提學)인데다 또 주문(主文)할 사람이 없었으니, 비고(批考)하여 버리고 뽑는 것을 모두 그가 맡아 관장(管掌)하였는데, 합고(合考)할 때에 끝내 기꺼이 참섭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의 의혹이 어찌 이에 이르러 더욱 심하지 않겠습니까. 대낮에 거자(擧子)를 두루 찾아다녔다는 것은 반드시 그럴 이치가 없을 것이라고 대신(大臣)은 억측(臆測)하고 있으나, 분명히 두루 찾아다녔는데 오히려 사정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유독 없을 이치가 아닙니까. 한갓 자기의 억측만 믿고 도리어 다른 사람이 의심스럽게 여기는 것은 배척하고 있으니, 요컨대 이것을 가지고 신구(伸救)하여 벗어나는 계제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신은 대신이 반드시 사의(私意)에 끌려서 왜곡되게 구해(救解)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만, 또한 관대하게 용서하려는 데 지나쳐서 힘써 포용하고자 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관(試官)으로서 패초(牌招)받은 뒤에 임의로 집에 돌아가고도 돌아보아 기탄하는 바가 없었다면, 거자(擧子)를 두루 찾아다녔다는 일도 진실로 반드시 그러했을 이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증(詞證)이 모두 갖추어져서 분명하고 적실할 뿐만이 아닌데, 다만 이돈만이 자복(自服)하지 않을 뿐입니다. 오수원(吳遂元)에게 추문(推問)해 보았으나, 오수원도 실토(實吐)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돈은 그 지위가 총재(冢宰)095) 에 이르렀고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니 그 사체와 법례(法例)에 있어서 거급 달리 구핵할 길이 없으나, 두루 거자를 찾아다닌 고관(考官)을 다스리지 않고 다만 뽑힌 거자(擧子)만 죄주는 것도 옥사를 처결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이미 드러난 자에게 차등을 주어 참작하여 처리하는 것도 성조(聖朝)의 관대한 은전(恩典)이겠지만, 신이 당일에 진달한 것은 대체로 죄가 의심스런 것은 가볍게 다스린다는 뜻에서 나왔는데, 도리어 어떻게 일찍이 사정을 쓴 것을 추문(推問)하지 않은 채 스스로 그 가운데 있다고 단정하여 곧바로 막대(莫大)한 죄명(罪名)을 더하는 것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대신의 차자의 내용에 다른 뜻이 있지 아니한데, 드러내 놓고 기롱과 배척을 더하면서 조금도 자중(自重)함이 없으니, 그 사체(事體)에 있어서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28일 경인
정언(正言) 김상옥(金相玉)이 비지(批旨)가 미안하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대략 말하기를,
"대신의 말이 비록 숨김이 없는 데서 나왔다 하나, 전후에 올린 차자의 내용을 살펴보면 거자를 두루 찾아다녔다는 데 대해서는 두 번이나 조사와 감단(勘斷)을 거쳤으니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고, 헌신(憲臣)이 함문(緘問)을 정지하기를 청한 데에 미쳐서는 다시 두루 찾아다녔는다는 것은 그럴 이치가 없다 하였으며, 그 뒤 옥사(獄事)를 안치(按治)했던 제신들이 옥사를 다스린 전말(顚末)을 진소(陳疏)하니, 또 당초에 논의한 바는 옥안(獄案) 밖의 억측이며 제신들을 비난해 논의할 뜻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통촉하지 못하신 것이 아닌데, 한결같이 포용하신 채 끝내 변석(辨釋)을 아끼고 계시니, 그 시비가 밝혀지지 않는 데 대해 여정(輿情)이 더욱 답답하게 여기고 있는 바가 어떠하겠습니까? 이상성(李相成)의 상소가 비록 위곡(委曲)096) 함이 부족하나, 본시 가부(可否)를 단정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어찌 그 말이 대신을 핍박하였다 하여 가볍게 최절(摧折)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조석명(趙錫命)이 대찬(代撰)한 교서(敎書)의 내용은 사사롭게 서로 주고받은 말을 가지고 방자하게 사륜(絲綸) 가운데에 끼워 넣은 것도 이미 지극히 잗달고 참람하데, 여러 사람이 꾸짖고 무리지어 떠들어댄다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왕언(王言)을 빙자하여 조정의 관원을 무함하고 욕하였으니, 견책(譴責)하기를 청한 것은 진실로 공의(公議)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개납(開納)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드러나게 미안(未安)한 뜻을 보이셨으니, 신은 그윽이 개연(慨然)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이튿날 간원(諫院)에서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시켰다.
10월 30일 임진
대사헌(大司憲) 권상하(權尙夏)가 사관(史官)의 전유(傳諭)로 인하여 부주(付奏)한 서계(書啓)에 이르기를,
"신은 언행을 삼가지 못하여 세상에서 모멸(侮蔑)받았는데, 적이 듣건대 근래에 이를 가는 자가 서로 잇닿고 화살을 겨누고 있는 자가 숲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명(聖明)께서는 도리어 신에게 중망(重望)이 있지 않은가 의혹하시어 부지(扶持)하는 직임(職任)을 책성(責成)하시니, 이것이 어찌 모기에게 태산(泰山)을 짊어지게 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하였는데, 대체로 이때에 권상하가 《가례원류(家禮源流)》에 발문(跋文)한 일로써 크게 한편의 사람들에게 원망과 시기를 받고 있었으므로, 서계에 언급한 것이다. 【《가례원류(家禮源流)》에 관한 일은 그 평론이 아래에 상세하게 보인다.】
【태백산사고본】 64책 56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5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고, 제주 지방이 해를 거듭하여 흉년이 들었으니 호남과 영남의 곡식을 1만 석을 한정하여 옮겨 배에 싣고 가서 먹이되, 양도(兩道)097) 의 도사(都事)로 하여금 운반을 감독하여 들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서장관(書狀官) 윤양래(尹陽來)가 어제 방물(方物)을 봉과(封裹)098) 할 때 처음 패초(牌招)에 나오지 않았다 하여 전교하기를,
"서장관(書狀官)은 이미 이 해사(該司)의 관원인데, 재차 부른 뒤에야 비로소 나와서 숙배(肅拜)한 것은 사체(事體)가 미안한 일이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주언(奏言)을 올리기를,
"탕춘대(蕩春臺)099) 는 북한 산성에 대해 진실로 순치지세(脣齒之勢)100) 이니, 도성 백성들의 축적(蓄積)을 일체 이곳에 실어 들이는 것이 바로 만전(萬全)의 계책입니다. 만약 탕춘을 지키지 못하면, 북한의 형세도 홀로 지킬 수가 없습니다. 신이 전일에 올린 책자(冊子) 속에 탕춘에 토성(土城)을 쌓도록 청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는데,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나뉘어져서 쉽사리 귀일(歸一)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속히 결단을 내리신다면 신이 마땅히 힘을 다하여 봉행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받은 소임을 결코 헛되이 띠고 있지는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제신(諸臣)들에게 물어보았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가 말하기를,
"북한 산성에서 도성으로 가는 중간에 또 이 토성이 있게 되면, 둘레가 6, 70리나 되는데, 무슨 병력으로 세 성을 방수(防守)하겠습니까."
하자, 이유가 말하기를,
"당초에 성상께서 도성이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다고 여기시고 북한 산성으로 계획을 정하였는데, 언제 도성도 함께 지키라는 전교가 있었습니까. 임진 왜란과 병자 호란 때에도 모두 지키지 못하여 도성 백성들의 축적(蓄積)을 모두 도적에게 내주고 말았었습니다. 이제 만약 북한 산성의 험고(險固)에 의거하여 지키고 백성의 축적을 탕춘에다 거두어 들인다면, 비록 도성을 비워두고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창황하게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으로 옮기어 피난하는 것에 비교하여 그 이해(利害)가 현격(懸隔)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북한 산성을 쌓았는데, 또 아울러 도성(都城)까지 지키고자 한다면 형편상 할 수가 없으니, 내 뜻은 본래 이러하다."
하였다. 좌의정 김창집(金昌集), 호조 판서 이건명(李健命)은 모두 의혹을 갖는 말을 하였고, 겸 이조 판서(兼吏曹判書) 조태채(趙泰采)는 이유의 말을 옳게 여겼으며,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광좌(李光佐)는 가장 옳지 않다고 여겨 누누이 수백 마디의 말을 힘을 다해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별안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물러가 묘당(廟堂)과 깊이 강구(講究)하여 다시 품달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날 임금이 대신(大臣)의 말로 인하여 대간(臺諫)이 아뢰었던 하(河)101) 에 대해 일을 윤허했다.
고평 부정(高平副正) 이철(李澈)이 상소하여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한 초기에 여러 훈신(勳臣)들에게 내려 주었던 수서(手書)를 바쳤는데, 글속의 말뜻이 하늘의 노여움에 대해 공경하고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되, 신린(臣隣)에게 협조를 구하고 공도(公道)를 칙려(飭勵)한 것이었다. 정원(政院)에서 이것은 보통과 다른 어필(御筆)인 까닭에 받아들이지 말라는 금령에 구애받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여 계품(啓稟)하고 받아들이니, 임금이 철에게 비답을 내리고, 깊이 감동하여 사모하고 공경하여 찬탄하는 뜻을 말하고, 특별히 철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그 어찰(御札)에 이르기를,
"김(金)·이(李) 이하 종사관(從事官) 등이 뜯어서 훈경(勳卿) 등과 함께 보도록 하라. 나는 경 등이 만 번 죽을 계책을 낸 데 힘입어 함께 종사(宗社)를 부지(扶持)하고 이륜(彛倫)을 다시 바로잡게 되었다. 오늘날 경 등의 융성한 공로와 큰 업적을 보게 된 것을 어찌 잠시 일각인들 마음속에 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원하는 것은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치우침이 없이 함께 태평(太平)을 이루는 것이다. 근래 부덕한 내가 임금의 자리를 더럽힘으로 인하여 천변(天變)과 한재(旱災)가 아울러 이처럼 극도에 이르고 있으니,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 하늘의 노여움이 이 지경에 이르고 있으니, 백성들의 원망도 알 만하다. 경 등은 의리상 기쁨과 슬픔을 더불어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인데, 무슨 까닭으로 서로 돕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수수 방관(袖手傍觀)하고 있는 것인가. 국군(國君)이 만약 후회(後悔)함이 있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원하건대 한 마디 말을 아끼지 말라. 경 등의 공훈은 비록 천고(千古)에 견주어도 오늘날처럼 높고도 지극히 올바른 경우가 있지 않았는데, 이와 같은 공훈으로도 만약 시종(始終)이 한결같지 않아서 도리어 후세에 비웃음을 받게 된다면 어찌 크게 애석하지 않겠는가. 오늘날의 급무(急務)는 사심(私心)을 버리고 공심(公心)을 갖는 것만 함이 없으니, 경 등은 이를 깊이 생각하여 오직 나의 과실과 여리(閭里) 사이의 물정(物情)을 숨김없이 죄다 말해 주면 매우 다행하겠다. 뜻을 죄다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여 부끄러워 얼굴을 붉혀 마지 않는다. 송창(松窓)."
이라 하였다. 【철(澈)의 상소에 사신(史臣)에게 내주어 채택하여 실록에 보충하게 하라는 청이 있었다. 송창(松窓)은 인조 대왕의 별호(別號)이다.】
【태백산사고본】 64책 56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57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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