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갑자
김상원(金相元)을 응교(應敎)로, 권세항(權世恒)을 교리(校理)로, 홍계적(洪啓迪)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신사철(申思喆)을 겸문학(兼文學)으로, 김흥경(金興慶)을 대사간(大司諫)으로, 남도규(南道揆)를 사간(司諫)으로, 조명봉(趙鳴鳳)을 헌납(獻納)으로, 이홍(李宖)을 보덕(輔德)으로, 김계환(金啓煥)을 사서(司書)로, 신정하(申靖夏)를 겸사서(兼司書)로 삼았다.
동지사(冬至使) 이광좌(李光佐)가 의주(義州)에 이르러 탕춘(蕩春)에 성을 쌓아서는 안된다는 이유를 상소(上疏)하여 극력 논하기를,
"첫째 지리(地利)를 믿을 수 없고, 둘째 병력(兵力)이 지킬 수 없으며, 세째 북한 산성을 지키는 데 큰 해로움이 있습니다. 금위영(禁衞營)·어영청(御營廳)의 군사와 향군(鄕軍)으로 지방에 배치되어 있는 자들을 모두 성을 수비하는 계획 속에 넣는다면 이는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경군(京軍)의 실수(實數)가 겨우 9천 명 남짓하므로, 북한 산성의 성첩(城堞)에 벌여 세우는 데에도 오히려 채우기 어려울까 걱정되데, 어떻게 그 나머지 군사로 탕춘을 아울러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평창(平倉)에 저축한 군량을 갑자기 실어 들여오기 어려운 것과 양주(楊州)와 고양(高陽)을 떼어 옮기고 권한을 빼앗아 〈북한 산성에〉 소속시키는 폐단 및 여러 사찰(寺刹)에 전포(錢布)를 획속(劃屬)하여 요리(料理)하도록 하는 등의 여러 폐단에 대하여 논열(論列)하니, 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으나, 요리하는 것을 일체 막으라는 것은 타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12월 4일 병인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차자(箚子)를 올려 먼저 훈국(訓局)의 병제(兵制)를 논하기를,
"병사(兵士)를 다스리는 방법은 무예를 단련하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으니, 사등(四等)137) 에 시행하는 중순(中旬)138) 은 참으로 아름다운 규례(規例)인데, 중년 이후로는 양순(兩巡)만 행하다가 근년에 와서는 또한 정폐(停廢)하였습니다. 보포(保布)139) 를 재변 때문에 감해 주는 경우 호조·병조로 하여금 그 대용(代用)을 채워 주게 하였는데, 다만 책임만 면하고자 하여 약간을 실어 보내고 있습니다. 갑신년140) 이후로 재변 때문에 감해 준 것이 거의 1천여 동(同)을 넘고 있는데, 양조(兩曹)에서 또한 어찌 편의에 따라 채워 줄 방법이 없겠습니까마는, 오래도록 거행하지 않고 있어서 사체(事體)가 미안하니, 마땅히 신칙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비국(備局)에서 조사하여 얻은 양정(良丁)141) 과 응군(鷹軍)에서 혁파된 자를 군향보(軍餉保)로 이정(移定)하여 군향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게 하였는데, 원컨대 양향(糧餉)은 도감(都監)에 이속(移屬)시켜 대장으로 하여금 겸하여 관장하게 하소서. 그리고 본영(本營)의 수하선(水下船) 9척 중에서 4척을 덜어낸 대신 삼남(三南)142) 통수영(統水營)의 퇴출(退出)시킨 병선(兵船)·전선(戰船)을 양서(兩西)143) 의 예(例)에 의하여 윤번을 정해서 본영(本營)에 올려보내어 무기를 고치고 궐원(闕員)을 보충하게 하소서. 지부(地部)의 흑각(黑角)144) 은 구례(舊例)에 의하여 70통(桶)을 가지고 해마다 고쳐야 할 활을 수리하여 만들게 하소서. 그리고 도망한 군졸을 숨겨 준 자는 일찍이 영갑(令甲)145) 이 없었는데, 이제 도망한 군졸을 숨겨 준 자는 각별히 논죄(論罪)하는 일을 엄중하게 과조(科條)를 세워 죄준다면, 거의 징계되어 그치게 할 방도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다음으로 양역(良役)을 변통(變通)하는 법을 논하기를,
"여러 가지 신법(新法)은 모두 우선 미루어 두고, 다만 감사와 병사에게 엄중하게 책망을 더하여 그 군영(軍營) 소속으로서 파정(罷定)할 수 있는 자를 우선 각 고을에 내어 주도록 하는 동시에, 또 열읍(列邑)에 신칙하여 각기 그 고을에 소속된 잡색(雜色)도 아울러 파정(罷定)하게 할 것이며, 또 사가(私家)에서 숨겨 둔 자들을 조사하여 궐액(闕額)을 보충하고, 가끔 암행 어사를 내보내어 특별히 염찰(廉察)을 더해서 인족(隣族)을 침징(侵徵)한 다소(多少)를 가지고 전최(殿最)146) 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로서 더욱 심하게 영속(營屬)을 너그럽게 비호하는 자 또한 비국(備局)에서 듣는 대로 아뢰어 파직시키고, 양정(良丁)을 숨겨 준 자는 각도(各道)로 하여금 적발(摘發)하여 무거운 죄율로 다스리게 한다면, 그 폐단을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에서 진실로 십분 절생(節省)하여 수입을 헤아려 지출한다면, 또한 어찌 모양을 이루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다만 지금 쓸데없는 비용이 수십 년 전에 비해 또한 이미 몇 갑절이 되는데, 먼저 근본을 바로 잡지않고 그 말단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이는 섶을 안고 불을 끄는 것과 같으니, 먼저 궁성(宮省)에서 특별히 비용을 줄이고 빨리 호조와 병조에 명하여 근래 새로 창설된 경비(經費)를 조목별로 아뢰게 해서 덜어낼 만한 것은 일체 헤아려 줄이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세입(稅入)이 부족해서 경비의 사용을 이어가기 어려운데, 이것의 전결(田結)의 제도가 허술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양전(量田)147) 을 시행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으니, 청컨대 각도의 감사와 수령으로 하여금 먼저 조금 충실한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양전의 정책을 시행케 하소서."
하고, 또 각도의 조적(糶糴)이 고르지 못한 폐단을 말하고 청하기를,
"각도 곡물(穀物)과 민호(民戶)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서로 빙준(憑準)하여 참작해서 추이하면, 1년만에 분급(分給)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혹 한 해가 지나 식모(殖耗)148) 의 수량이 혹 너무 많으면, 진휼청(賑恤廳)에 옮겨 보내어 편리한 대로 구처(區處)하여 수재와 한재의 비용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삼남(三南)·양서(兩西)에는 모두 월과 군기(月課軍器)149) 인 총약(銃藥)과 연환(鉛丸)이 있는데, 근래에 해청(該廳)에서 공물(貢物)로 만들어 값을 주고 장만하여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그 총철(銃鐵)을 정제(精製)하지 않아서 총을 쏠 때에 꺾어지고 파열되고, 화약(火藥)은 장치한 지 조금 오래되면 불이 켜지지 않는 것이 많다고 하니, 그것을 전쟁에 사용하기에는 합당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른바 ‘월과 공물(月課貢物)’을 빨리 혁파해서 그 값을 각 군문(軍門)에 옮겨 보내어 그 값으로 장만해서 갖추게 한다면, 기계도 정밀하고 예리해져서 사체(事體)가 올바른 데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병조의 군포(軍布)가 날로 점점 소모되어 줄어드는데, 서리(胥吏)들이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있으니, 청컨대 특별히 색랑(色郞)을 가려서 연수를 한정하여 구임(久任)150) 시켜 늙고 교활한 서리를 모두 척출(斥黜)하고, 상납(上納)하는 군포는 차원(差員)을 따로 정하여 본조(本曹)에 영납(領納)하게 하소서."
하였다. 또 장례원(掌隷院)의 당상(堂上)과 낭관(郞官)을 가려서 차임(差任)해서 위임(委任)하여 책성(責成)151) 할 것을 청하고, 끝으로 공물 연조(貢物年條)에 대하여 논하기를,
"미리 서로 사고 파는 것과 각 아문(衙門)에서 방납(防納)하여 요리(料理)하는 폐단을 일체 엄금하여 간교한 조짐을 막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 이 조목별로 진달한 내용이 모두 폐단을 구제하는 계책인데, 논열(論列)한 바가 매우 마땅하니, 경(卿)이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아니면 어찌 이에 이르겠는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해서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12월 5일 정묘
밤에 유성(流星)이 호시성(弧矢星) 위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12월 7일 기사
이관명(李觀命)을 이조 참판으로, 신사철(申思喆)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이봉익(李鳳翼)을 지평(持平)으로, 안중필(安重弼)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12월 10일 임신
헌부(憲府)에서 논하기를,
"궐문에 괘서(掛書)한 일은 실로 전고(前古)에 없던 일입니다. 해당 수문장(守門將)을 추고해서 가볍게 벌주는데 그쳐서는 안되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괴원(槐院)은 바로 참하(參下)152) 의 청선(淸選)인데, 오수원(吳遂元)·이헌영(李獻英)·이헌장(李獻章)·강세윤(姜世胤)은 과명(科名)이 암담하여 헐뜯어 비방하는 말이 떠들썩하고, 최집(崔)·윤빈(尹彬)·유원상(柳爰相)은 지망(地望)이 적합하지 못하고 드러난 명칭(名稱)도 없으면서 뒤섞어 뽑혔으므로, 공의(公議)가 펴지지 못하여 물정(物情)이 더욱 격동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이들을 괴원의 선발에서 빼어 버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번거롭히지 말라."
하였다.
지평(持平) 이봉익(李鳳翼)이 상소(上疏)하여, 도승지(都承旨) 이선부(李善溥)가 상소(上疏)하여 박광세(朴光世)를 배척한 일을 대략 논하기를,
"이선부가 상소하기를, ‘서울에 있는 자가 많은 선비들의 명칭(名稱)을 빌어 팔도(八道)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여 보고 들은 것을 과장하고, 중간에서 억제하며 방자한 뜻을 알양(訐揚)하였습니다."
하고, 인하여 이선부에 견책을 베풀어 많은 선비들의 마음을 위로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박광세 등이 팔도의 많은 선비라고 핑계대어 선정(先正)을 한없이 마구 꾸짖었으니, 이선부가 상소한 말은 본래 속여서 알양(訐揚)한 것이 아닌데, 무슨 견책을 베풀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선부가 이로 인하여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2월 11일 계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근일에 성상(聖上)의 환후(患候)에 여러 증세가 점점 다시 일어날 형세가 있으므로, 여러 대신(大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데는 안정(安靜)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만일 긴급한 일이 아니면 모든 문서(文書)는 마땅히 환후가 평복(平復)되신 뒤를 기다려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데, 불행하게도 근래에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경중(京中)의 유생(儒生)들이 정원에서 그들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여 승지(承旨)를 침욕(侵辱)하였다 합니다. 지금 이 《가례원류》의 일은 성상께서 이미 곡절(曲折)을 알고 계시니 피차(彼此) 논하지 말며, 이 일은 진소(陳疏)할 경우 일체 받아들이지 말고 성상의 환후가 평복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제조(提調) 조태채(趙泰采)가 말하기를,
"《가례원류》는 한낱 사가(私家)의 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객(主客)을 막론하고 함께 지었는지의 여부가 어찌 국가(國家)의 안위(安危)와 사문(斯文)의 득실(得失)에 관계되겠습니까. 그런데 피차가 다투어 시비를 변명할 뿐만 아니라 서로 침범하여 꾸짖으며 사단(事端)이 잇따라 겹쳐 생기고 있으니, 이 어찌 염려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원에서 성상의 환후가 미령(未寧)하다 하여 소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유생들이 성총(聖聰)을 가린다고 지목하였습니다. 만약 정탈(定奪)이 없다면, 어찌 한결같이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피차가 다만 그 일만을 붙들고 시비를 논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침범하여 꾸짖기를 그치지 않게 될 것이니, 이것이 민망스럽다. 평복될 동안 우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2월 13일 을해
이때에 유생(儒生) 유태원(柳太垣) 【바로 유봉서(柳鳳瑞)의 아들이다.】 등이 윤증(尹拯)을 신변(伸辨)한다고 일컬으며 진소(陳疏)하려고 정원에 이르렀는데, 정원에서 이러한 상소를 받아들이지 말도록 이미 정탈이 있었다 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유태원 등이 여러 날 동안 와서 바치면서 정원을 침범하여 배척하였다. 승지 오명항(吳命恒)이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유태원 등이 오히려 물러가지 않고 밤이 깊도록 궐문(闕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비로소 나갔다. 오명항이 또 이런 뜻을 계품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미 평복될 동안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으면, 제생(諸生)들도 신자(臣子)로서 어찌 분의(分義)를 돌아보지 않고 이같이 해괴한 거조를 일으킨단 말인가? 지극히 온당하지 않으니, 받아들이지 말라."
하니, 유태원 등이 비로소 흩어져 갔다. 유태원 등이 올린 상소의 줄거리는 약원(藥院)에서 진달(陳達)하여 성총(聖聰)을 가린 죄에 대해 극언(極言)한 것이었다. 그래서 약원 제조(藥院提調) 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가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모두에게 우악한 내용의 답을 내렸다.
12월 14일 병자
이만성(李晩成)을 도승지(都承旨)로, 신정하(申靖夏)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12월 16일 무인
임금의 환후에 가슴속이 시원하지 않고 호흡이 고르지 못하여 약방에서 입진하고, 임금이 뜸을 떴다.
12월 21일 계미
약방에서 입진하였는데, 임금의 환후가 한결같았다. 제조 조태채가 아뢰기를,
"종부시 도제조(宗簿寺都提調) 두 자리 가운데 한 자리는 첫째 왕자가 이미 겸대(兼帶)하고 있고, 한 자리는 둘째 왕자가 출합(出閤)한 뒤에 마땅히 겸대해야 하는 데, 높은 종반(宗班)으로서 비의(備擬)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단망(單望)으로 계하(啓下)하는 것은 해조(該曹)에서도 제멋대로 결정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단망으로 계하하라."
하였다.
12월 22일 갑신
약방에서 입진하였는데, 임금의 환후가 한결같았다. 일전에 도제조 이이명이 주원(廚院)에 옮겨 입직(入直)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우선 며칠 더 살펴보도록 하였었는데, 이날 이이명이 또 진청(陳請)하니 임금이 비로소 옮겨서 입직하라고 명하고, 유천군(儒川君) 이정(李濎)도 따로 입직하도록 명하였다.
12월 23일 을유
사시(巳時)에서 미시(未時)까지 햇무리가 졌는데, 양이(兩珥)가 있고, 위에 관(冠)이 있었다.
12월 24일 병술
국청 죄인(鞫廳罪人) 이세경(李世卿)·이기징(李起徵)이 자복하지 않고 죽었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궐문에 괘서(掛書)한 자를 끝내 잡지 못하자 포도청의 두 대장을 파직하도록 명하고, 다시 포도청에 기일을 한정하여 조사해 잡도록 명하였었다. 그런데 과천(果川)에 사는 이세경이라는 자가 평소 흉패(凶悖)하여 남의 화액을 즐겁게 여겼으므로,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세경의 소행으로 의심하여 지목(指目)하자, 이세경이 마침내 다른 사람보다 먼저 계책을 내어 형조(刑曹)에 정소(呈訴)하기를,
"아무아무 등이 나를 괘서한 사람으로 무함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형조에서 그 까닭을 힐책하고, 그 정상이 의심스러워 마침내 포도청(捕盜廳)에 압송하였는데, 포도청에서는 의금부에 옮겨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신문하기를 계청(啓請)하였다. 괘서는 과연 그가 스스로 한 짓이었고, 같이 그 일에 참여한 자는 이기징이었으며, 그들과 접촉하여 알고 있던 자는 이중명(李重明)과 이희등(李希登)이었다. 증좌(證左)153) 가 모두 갖추어지고 문안(文案)이 매우 분명하였으나, 이세경과 이기징은 성품이 모질고도 사나와서 형장(刑杖)을 참고 여러 차례 자복하지 않다가 마침내 형장 아래에서 죽기에 이른 것이다. 국청(鞫廳)에서 이희등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관아에 고하지 않았다 하여 장(杖) 1백에 유(流) 3천 리를 청하였으며, 이중명은 이세경을 용접(容接)해 두어 괘서한 실상을 알아내고서도 처음에는 아주 숨기고 말하지 않다가 재차 추문(推問)한 뒤에야 비로소 지적하여 고하였으므로 정상이 매우 가증스럽다 하여 변원 정배(邊遠定配)하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초사에 연루된 여러 사람들은 모두 방송(放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26일 무자
유척기(兪拓基)를 검열(檢閱)로 삼았다.
12월 27일 기축
권설(權卨)을 북청부(北靑府)에 환배(還配)하라고 명했다. 처음에 의금부에서 권설의 옥사(獄事)는 중대하므로 본부에서 마음대로 처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는데, 대신들이 모두 다시 형신(刑訊)을 더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임금이 입시(入侍)한 제신(諸臣)들에게 묻고는 그 회문(回文)의 요탄(妖誕)하고 김부차(金夫差)가 간 곳을 지적하여 고하지 않았다 하여 다시 추고하라고 특명을 내리니, 금부에서 또 아뢰기를,
"회문을 가지고 다시 힐문(詰問)해 보았더니, 자행(字行)의 배치(排置)도 스스로 차서가 있고, 어맥(語脈)의 선후도 모두 찾아볼 수 있었으니, 대체로 낙서(落書)154) 의 법을 사용해서 누설(漏泄)될 걱정을 면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이의 사설(辭說)은 적정(敵情)을 탐지하여 보고한 데 지나지 않았고, 별다른 부도(不道)한 말이 없었으니, 반드시 죽이고야 만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듯합니다. 그리고 그때 도신(道臣)의 함사(緘辭)를 보건대 전후에 권설의 말로 인하여 적당(賊黨)들을 잡은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김부차에 대해서는 참으로 그런 사람이 있는지 비록 알 수는 없으나, 요컨대 반드시 그 사이에 처하여 살펴보고 고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이는 전연 허황된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타나기 어렵다는 것은 전에도 대략 진달했거니와, 두세 가지의 어긋난 단서와 같은 것들은 모두 요긴한 단서로 삼기에는 부족합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재차 잡아다가 다시 추문(推問)해 보았으나, 별로 긴밀한 단서가 나온 것이 없어서 끝내 의옥(疑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심극(審克)155) 하는 도리에 있어 다시 형신(刑訊)을 더하는 것은 부당하니, 도로 배소(配所)로 보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숙종실록57권, 숙종 42년 1716년 2월 (1) | 2025.11.29 |
|---|---|
| 숙종실록57권, 숙종 42년 1716년 1월 (0) | 2025.11.29 |
| 숙종실록56권, 숙종 41년 1715년 11월 (0) | 2025.11.29 |
| 숙종실록56권, 숙종 41년 1715년 10월 (0) | 2025.11.29 |
| 숙종실록56권, 숙종 41년 1715년 9월 (0) | 2025.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