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7권, 숙종 42년 1716년 1월

싸라리리 2025. 11. 2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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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임진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섣달이 다 가고 봄이 왔으니 봄갈이가 멀지 않다. 재해가 더욱 심한 곳에도 진구(賑救)를 베풀고 농사를 권해야 하겠으되, 진정(賑政)은 특별히 신칙(申飭)하지 않으면 안되니, 제주(濟州)의 진곡(賑穀)은 비국(備局)001)  으로 하여금 각별히 더 엄히 신칙하여 잇따라 들여보내어 시종(始終) 진념(軫念)하는 은택을 입게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이 설에는 번번이 이런 분부를 내리거니와, 이제 조용히 조리하는 중인데도 농사의 고되고 어려움을 염려하여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하고 도민(島民)을 진구(賑救)하는 것이 이처럼 부지런하고 극진하니, 백성을 잘 보전하는 덕(德)이 성대하다."


【태백산사고본】 65책 57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66면
【분류】구휼(救恤) / 농업-권농(勸農) / 역사-사학(史學)


[註 001] 비국(備局) : 비변사(備邊司)의 별칭.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이 설에는 번번이 이런 분부를 내리거니와, 이제 조용히 조리하는 중인데도 농사의 고되고 어려움을 염려하여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하고 도민(島民)을 진구(賑救)하는 것이 이처럼 부지런하고 극진하니, 백성을 잘 보전하는 덕(德)이 성대하다."

 

전라도 장흥(長興)·강진(康津) 등에 지진(地震)이 있었는데, 소리가 북을 치는 듯 하였다.

 

1월 2일 계사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권설(權卨)의 요악(妖惡)한 죄는 국인(國人)이 놀라고 분개합니다. 엄히 국문(鞫問)하여 승복받는 것은 법에 있어서 당연한데, 금오(金吾)002)  에서 의계(議啓)하여 위에서 재결하시기를 청해서 배소(配所)로 돌려보내라는 명이 있게 하였으므로 여정(輿情)이 다 분개하고 공론이 더욱 격렬하여지니, 청컨대 배소로 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드대로 엄히 국문하게 하여 왕법(王法)을 쾌히 바로잡으소서. 권설을 나국(拿鞫)하기를 청한 것은 참으로 공공의 논의에서 나왔으므로 그 국법을 바로잡고 요악(妖惡)을 징계하는 도리에 있어서 엄히 신문(訊問)을 더하여 기필코 실정을 불게 하여야 할 것인데, 관례에 따라 예사로 묻고는 문득 위에서 재결하시기를 청하였으니, 청컨대 금부(禁府)의 당상(堂上)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약방(藥房)003)  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가 끝나고서, 부제조(副提調)인 도승지(都承旨) 이만성(李晩成)이 ‘모든 공사(公事)를 한꺼번에 죄다 재결할 필요는 없으니 마음을 다스리고 병을 조리하며 성색(聲色)을 크게 하지 마시라’고 경계를 아뢰니, 임금이 유의하겠다고 받아들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과거가 잦은데, 연해(沿海) 지방에도 재해를 입은 고을이 많으므로 봄에 곤궁한 거자(擧子)004)  가 양식을 싸 가지고 멀리 가는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정유년005)  의 식년시(式年試)006)  는 그 해에 물려 설행(設行)하여야 하겠고 올해의 중시(重試)007)  ·별시(別試)008)  도 아울러 가을 무렵으로 물려 설행하여야 하겠습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묘당(廟堂)에 의논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뒤에 예조(禮曹)에서 묘당에 의논하여 시기(試期)를 모두 물렸다.

 

묘당(廟堂)에서 ‘영남(嶺南)의 곡식 8천 석(石)을 옮겨서 제주(濟州)를 진구(賑救)할 것’을 청하였는데, 경상 감사(慶尙監司) 홍우녕(洪禹寧)의 장계(狀啓)에 ‘민사(民事)가 바야흐로 급하므로 수량대로 맞추어 옮기기 어렵다.’고 하였다. 묘당에서 복주(覆奏)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1월 4일 을미

미시(未時)부터 유시(酉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이기익(李箕翊)을 장령(掌令)으로, 이중협(李重協)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1월 5일 병신

비국(備局)에서, 제주는 지난해의 재해가 특히 심하여 도내(島內)의 세 고을이 실로 소생할 형세가 못되므로 어사(御史) 1원(員)을 가려서 차출하여 들여보내서 먼 지방의 백성을 위유(慰諭)하고 진구(賑救)하는 일도 살피고 아울러 백성의 폐해도 묻게 하여 섬백성이 다 국가의 덕의(德意)를 알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교리(校理) 황귀하(黃龜河)를 제주 별견 어사(濟州別遣御史)로 차출하였다.

 

정식(鄭栻)을 수원 시재 어사(水原試才御史)로 차출하였는데, 장차 무사(武士)를 시취(試取)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1월 6일 정유

오시(午時)·미시(未時)에 햇무리하였다.

 

판윤(判尹) 민진후(閔鎭厚)·공조 판서(工曹判書) 송상기(宋相琦)·예조 판서(禮曹判書) 조태구(趙泰耉)·병조 판서(兵曹判書) 윤지인(尹趾仁)을 제도 민호 군역 구관 당상(諸道民戶軍役句管堂上)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민진후가, ‘제도(諸道) 각읍(各邑) 중에서 군액(軍額)은 많은데 민호(民戶)가 적은 곳과 민호가 군액보다 많은 고을을 견주어 옮겨서 변통하여 고르게 하는 방도로 삼을 것’을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묘당(廟堂)에서 군안(軍案)을 옮기고 고칠 적에는 일이 번다(繁多)해서 짧은 시일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민진후 등에게 구관(勾管)을 맡기고 또 낭청(郞廳)009)  을 4원(員) 차출하여 고핵(考覈)하는 일을 돕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여러 신하가 혹 다른 일 때문에 인퇴(引退)하기도 하며 기꺼이 착실히 거행하려 하는 자가 없으므로, 마침내 실효(實效)가 없었다.

 

1월 7일 무술

사시(巳時)에 햇무리하였다. 오시(午時)·미시(未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010)  가 있었다. 그리고 햇무리 위에는 관(冠)011)  이 있고, 햇무리 아래에는 이(履)012)  가 있으며, 좌우에는 극(戟)013)  이 있었다. 신시(申時)·유시(酉時)에 햇무리하고 양이가 있었다. 밤 1경(一更)·2경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제도(諸道)의 전최(殿最)014)  에서 하등을 차지한 수령(守令)은 모두 대정(大政)015)   전에 먼저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1월 9일 경자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김우항(金宇杭)이 면직되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우항은 본디 인망이 모자라는데 외람되게 정승 자리를 차지하여 건명(建明)한 것이 없고 인척(姻戚)이라는 데에 끌려 이돈(李墩)을 신구(伸救)하였으므로, 시의(時議)가 떠들썩하니 크게 공박하였다. 드디어 낭패하여 멀리 나가서 마흔 여덟 번이나 정고(呈告)016)  하니, 임금이 줄곧 강박(强迫)하는 것은 대신(大臣)을 예대(禮待)하는 방도가 아니라 하여 위유(慰諭)하고 체직(遞職)하도록 허락하고는 관례에 따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제수(際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5책 57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6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註 016] 정고(呈告) : 관아에 소장(訴狀)을 올림.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우항은 본디 인망이 모자라는데 외람되게 정승 자리를 차지하여 건명(建明)한 것이 없고 인척(姻戚)이라는 데에 끌려 이돈(李墩)을 신구(伸救)하였으므로, 시의(時議)가 떠들썩하니 크게 공박하였다. 드디어 낭패하여 멀리 나가서 마흔 여덟 번이나 정고(呈告)016)  하니, 임금이 줄곧 강박(强迫)하는 것은 대신(大臣)을 예대(禮待)하는 방도가 아니라 하여 위유(慰諭)하고 체직(遞職)하도록 허락하고는 관례에 따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제수(際授)하였다."

 

1월 10일 신축

밤 1경(一更)에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명릉(明陵)017)   길을 고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당초에 명릉으로 가는 옛길은 대봉현(大蜂峴)을 거쳐서 조금 돌기 때문에 옮겨서 새 길을 열어 이혈현(裏穴峴)을 거치게 하였는데, 땅이 높고 험준하여 여러 능(陵)이 굽어보이므로, 민진후(閔鎭厚)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새 길은 도리어 예전만 못하니, 청컨대 예조의 당상(堂上)을 시켜 왕래할 때에 봉심(奉審)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 참의(禮曹參議) 이재(李縡)가 향관(享官)으로서 명릉에 나아갔다가 돌아와 새 길과 옛 길이 다 불편하므로 모두 막아야 하겠다고 말하였는데, 예조에서 그 말에 따라 ‘두 길을 모두 막아 행인이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이 뒤로는 향축(香祝)018)  의 왕래이더라도 창릉(昌陵)019)  의 큰길로 갈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11일 임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1월 12일 계묘

진시(辰時)·사시(巳時)에 햇무리하고, 밤 1경(一更)부터 4경까지 달무리가 졌다.

 

평안도 철산(鐵山) 등 세 고을에서 자시(子時)에 천둥이 쳤다.

 

1월 13일 갑진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1월 14일 을사

진시(辰時)·사시(巳時)에 햇무리하였다. 오시(午時)·미시(未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1월 17일 무신

조상경(趙尙絅)을 지평(持平)으로, 이야(李壄)를 도승지(都承旨)로, 이교악(李喬岳)을 좌승지(左承旨)로, 조태구(趙泰耉)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장한상(張漢相)을 경기 수군 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로, 윤우진(尹遇進)을 함경 남도 절도사(咸鏡南道節度使)로 삼았다.

 

1월 19일 경술

2경(二更)에 임금의 흉격(胸膈)이 더욱 괴롭고 답답하여 숨쉬기가 편하지 않으므로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한참 만에야 안정되었다.

 

1월 20일 신해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1월 21일 임자

밤 2경(二更)에 토성(土星)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의 상상성(上相星)을 범하였다.

 

경원(慶源)에서 개시(開市)한 청인(淸人)이 관소(館所)에 머무를 때에 청인 50여 명이 삼기(三旗)를 앞세우고 후춘(後春)에서 나와 경원 동문(東門)에 이르러 관소에 머무르는 통관(通官) 박씨(博氏)를 맞이하여 가서 술을 나누며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연(金演)이 그 정상을 장문(狀聞)하며 부사(府使) 박동상(朴東相)이 약조에 따라 꾸짖어 보내지 못하였다 하여 추고(推考)하기를 청하고, 또 변경(邊境)에서 경계를 범하여 넘는 것을 엄히 경계하는 뜻으로 저 나라에 이자(移咨)020)  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22일 계축

오시(午時)에 햇무리하였다.

 

김취로(金取魯)를 지평(持平)으로, 이기하(李基夏)를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로 삼았다.

 

제주 별견 어사(濟州別遣御史) 황귀하(黃龜河)가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제주의 굶주리는 백성의 수가 4만 7천여 구(口)나 됩니다. 목사(牧使) 변시태(邊時泰)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모름지기 2만 석(石)의 미곡(米穀)은 얻어야 나누어 진구(賑救)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국가에서 획급(劃給)한 것은 전후를 통틀어 2만 7천 석이므로 그 수량이 비록 많은 듯하기는 하나, 재해를 입은 고을에서 바친 것은 반드시 부실할 것이고, 뱃삯과 축난 것을 덜어낼 것도 많을 것입니다. 게다가 제주는 바다 밖에 있으므로 저 곳에 이른 뒤에 혹 편의한 방도가 있더라도 장문(狀聞)하여 왕복하다 보면 자칫 세월이 지나게 되니, 반드시 장차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그들이 죽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신(臣)의 생각으로는, 연해(沿海) 고을에 저축한 곡식 중에서 별도로 분정(分定)하여 정돈해서 기다리게 하였다가 이미 운반한 곡식이 쓰기에 모자라거든 본주(本州)의 배를 급히 보내어 제때에 진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3천 석을 더 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황귀하가 또 ‘나르는 배의 삯은 모곡(耗穀)으로 셈하여 덜고, 나른 곡물이 혹 거칠고 축났으면 해당 수령(守令)을 계문(啓聞)하여 논죄(論罪)하고, 제주의 새 목사 홍중주(洪重周)는 재촉하여 들여보내고, 정의 현감(旌義縣監) 김초보(金楚寶)는 임기가 만료되었을 뿐더러 어지러운 정사도 많았으니 대신할 사람을 가려서 차출하여 빨리 내려보낼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다 따르고, 이어서 말하기를,
"탐라(耽羅)021)  의 온 지역에 3년 동안 흉년이 들었는데, 깊은 바다 가운데 외딴 지역이라 육지와 달라서 거듭 굶주린 나머지 백성의 곤궁이 더욱 지극하다. 국가에서 어사(御史)를 특별히 보내는 뜻이 여기에 있으니, 내려간 뒤에는 무릇 백성을 위하는 데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반드시 착실한 마음으로 봉행하여야 할 것이다. 해마다 이어서 곡식을 날랐으므로 그 수량이 매우 많거니와 굶주린 백성이 죽는데 징수하게 하기는 반드시 어려울 것이니, 그 가운데에서 바치기 어려운 무리는 각별히 정밀하게 핵사(覈査)하여 혹 탕감(蕩減)하거나 백급(白給)022)  하고, 고을의 폐단과 백성의 고통도 조목으로 계문하여 내가 절해(絶海)의 백성에게 혜택을 입힐 수 있게 하고, 전 목사 변시태가 진정(賑政)을 잘하였는지도 탐문하여야 한다."
하였다.

 

임금이, 옥송(獄訟)이 오래 지체되기 때문에 특별히 명하여, 금부(禁府)와 형조(刑曹)의 현재 수인(囚人)과 제도(諸道)의 계본(啓本) 가운데에서 일이 형옥(刑獄)에 관계된 자를 지난해의 예에 따라 빈청(賓廳)023)  에 모여 의계(議啓)하여 옥수(獄囚)가 많이 지체되는 폐단이 없도록 하게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근래 임금이 편찮으므로 중외(中外)의 장문(狀聞)을 일체 머물러 둔 채 후사(喉司)024)  에서 곧 입계(入啓)하지 않아서 옥송이 지체되니 식자(識者)가 이를 근심하였는데, 임금이 백성의 고통을 매우 염려하여 덕음(德音)을 내려 곧 언주(讞奏)025)  하게 하여 지연되는 것이 없도록 하였으니, 아! 지극하도다."


【태백산사고본】 65책 57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66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註 023] 빈청(賓廳) : 비변사(備邊司)의 대신(大臣)이나 당상관(堂上官)이 정기적으로 모여 회의하던 곳.[註 024] 후사(喉司) : 승정원(承政院)의 별칭.[註 025] 언주(讞奏) : 옥송을 평의하여 아룀.
사신(史臣)은 말한다. "근래 임금이 편찮으므로 중외(中外)의 장문(狀聞)을 일체 머물러 둔 채 후사(喉司)024)  에서 곧 입계(入啓)하지 않아서 옥송이 지체되니 식자(識者)가 이를 근심하였는데, 임금이 백성의 고통을 매우 염려하여 덕음(德音)을 내려 곧 언주(讞奏)025)  하게 하여 지연되는 것이 없도록 하였으니, 아! 지극하도다."

 

1월 23일 갑인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근래 각 아문(衙門)에서 혹 은화(銀貨)를 대출(貸出)하여 이자를 불려 보태어 쓰는 예가 있거니와, 정부(政府)·추부(樞府)로 말하면 체모가 높고 중한데도 그릇된 전례를 답습하니, 참으로 구차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더욱 신칙하여 대단한 공용(公用) 외에는 모두 막으소서. 동래 부사(東萊府使) 김시환(金始煥)은 천망(薦望)할 때에 대신(大臣)이 이미 망설이는 빛을 보였고, 제배(除拜)한 뒤에 또한 말하였는데도 끝내 스스로 처신하지 않았으며,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성조(李聖肇)는 탄핵을 견디고 사폐(辭陛)026)  할 때에 유신(儒臣)이 현저히 배척하였으나 인책하여 물러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청조(淸朝)027)  의 수치가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청컨대 모두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김시환이 동래 부사가 될 때에 영상(領相) 서종태(徐宗泰)가 의망(擬望)028)  에 임박하여 좌상(左相) 김창집(金昌集)에게 문의하였는데, 김창집이 자못 곤란하게 여겼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제수한 뒤에 또 다른 사람에게 그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였으나 무릅쓰고 부임하였다. 이성조는 간장(諫長)029) 이관명(李觀命)에게 탄핵받은 뒤에도 그대로 사폐하였고, 교리(校理) 홍석보(洪錫輔)가 그의 스스로 처신하는 것이 의리에 어그러진다고 말하였으나 끝내 인책하여 물러가지 않았다. 물의가 비웃으므로 마침내 대계(臺啓)030)  가 있게 되었다.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금부 당상(禁府堂上) 조태구(赴泰耉) 등과 조당(朝堂)에 모여 시수(時囚)031)  를 의언(議讞)032)  하여 경범(輕犯)을 가려 석방하였다.

 

1월 24일 을묘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니, 임금이 단지 각 아문(衙門)에서 이자를 불리는 것을 막아서 금하는 일만을 들어주었다.

 

지평(持平) 조상경(趙尙絅)이 상소(上疏)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대사헌(大司憲) 권상하(權尙夏)가, 정호(鄭澔)가 죄를 입었기 때문에 스스로 밝히는 소(疏)가 온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후사(喉司)에서 곧 상달하지 않았다 합니다. 지금 성후(聖候)가 위중하신데 뭇 신하가 누구인들 수응(酬應)에 번거로우실 것을 염려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국가에서 유현(儒賢)을 대우하는 것은 대신(大臣)과 마찬가지이니, 꾸중을 청하는 글도 같은 예(例)로 막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빨리 가져다 보고 비답(批答)을 내리소서. 정호의 《충청방직(忠淸方直)》은 대대로 전해 오는 것인데, 이제 사사로운 기술(記述) 때문에 특별히 파직(罷職)까지 당하였으나,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와 간원(諫院)의 논계(論啓)에서 공론을 알 수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명을 환수(還收)하시어 성덕(聖德)을 빛내소서. 또 듣건대 군기(軍器)를 특별히 장만하여 상받은 것을 도로 환수한 일을 비국(備局)에서 회계(回啓)하였는데, 아울러 다른 일로 상받은 것은 그대로 있다 합니다. 모두 환수한다면 오히려 혹 괜찮겠으나, 나누어 둘로 하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가라는 영(令)이 있더라도 허술한 단서가 많은 법인데, 더구나 이미 베푼 상을 환수하여 격려하고 권장하는 길을 막는다면 조정의 명령이 전도될 뿐만이 아니니, 어찌 융정(戎政)033)  이 능히 충실하여 지기를 바라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일이 다른 소와 차이가 있으므로 오래 머물러 두어서는 안되니, 입계(入啓)하는 것이 옳다. 특별히 파직한 것을 환수하기를 청한 것에 있어서는, 틀림없이 그것이 온당하지 못한 것인 줄 안다. 소 끝에 논한 것은 참으로 의견이 있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치하게 하라."
하였다.

 

1월 25일 병진

대사헌 권상하(權尙夏)가 시골에서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跋文)에 관한 일로 성교(聖敎)가 지극히 엄하시어 부제학(副提學) 정호(鄭澔)의 벼슬을 특별히 파면하셨다는데, 이른바 후서(後序)라는 것은 바로 신이 지은 것입니다. 죄가 같으므로 요행히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인데, 여러 날 동안 귀를 기울였으나 견벌(譴罰)을 내리지 않으시니, 신은 참으로 황공하여 스스로 논열(論列)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개 신은 처음부터 문충공(文忠公) 유계(兪棨)의 문하에 출입하여 《가례원류》를 익히 들었는데, 이것은 그가 임천(林川)에서 귀양살 때에 엮은 것입니다.
요즈음에 또 듣건대 고(故) 진선(進善) 정양(鄭瀁)의 집에 유계가 엮은 《가례집해(家禮集解)》 다섯 책이 있다 하기에 가져다 보니, 이는 실로 《가례원류》의 초본(初本)이었습니다. 정양의 인장이 완연하니 틀림없이 당시에 베껴 낸 것이겠으며, 《가례원류》라 이름을 고친 것이 어느 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유계는 풀려난 뒤에 금산(錦山)으로 옮겨 살았는데, 증(贈) 참판(參判) 윤선거(尹宣擧)와는 문을 마주하여 살았습니다. 중본(中本)이 베껴진 것은 실로 이때입니다. 지금은 살아 있는 구인(舊人)이 없으니 윤선거가 함께 도운 것이 얼마나 되는지야 후생(後生)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 뒤에 유계가 은혜를 입어 조정에 들어가게 되어 공무에 바빠서 다듬을 겨를이 없자 문인(門人) 윤증(尹拯)에게 부탁하여 일을 끝내게 하였는데, 전후의 글이 다 유계의 문집에 실려 있으므로 상고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른바 중본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윤증에게 있었으며, 윤선거가 다시 이 일을 도운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윤선거가 고 참판(參判) 이정기(李廷夔)에게 보낸 두 글을 보면 다 유씨(兪氏)가 주장하였다 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가 유계의 행장(行狀)을 지을 때에 유계가 본디 처음에 편집한 실상을 기술하고 찬탄(贊嘆)하여 마지 않았는데, 오늘날에 믿을 만한 것이 어느 것인들 이보다 더하길래 그 자손인 자가 빼앗아서 제 것으로 만들려고 하여 어찌 선인의 뜻과 서로 어그러진단 말입니까?
가장 의아스러운 것은 윤증이 유상기(兪相基)에게 답한 글에 ‘이른바 부탁받았다는 말은 끝내 기억할 수 없다.’ 한 것인데, 비록 그가 늙어서 정신이 흐리더라도 이것이 어찌 잊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옛말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도 산 자가 부끄럽지 않다.’고 하였는데, 유계가 다시 살아난다면 윤증의 마음이 부끄럽겠습니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주자(朱子)가 《강목(綱目)》034)  과 《소학(小學)》을 찬잡할 때에 문인을 시켜 편집한 것이 매우 많고, 《근사록(近思錄)》으로 말하면 여조겸(呂祖謙)이 실로 그 일을 도왔으나 이제까지도 주자의 글이라 칭하고 나머지 사람은 끼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을 윤증이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그 말이 저러하니, 이것이 참으로 무슨 마음입니까? 윤증이 지은 유계의 제문(祭文)에 ‘선생은 윤증을 자질(子姪)처럼 여기고 윤증은 선생을 부모로 섬겼다.’ 하였으니, 은의(恩義)가 도타왔던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는데, 생전에 그 부탁을 받고서 사후에는 이토록 저버렸습니다. 신이 이른바 소진(蘇秦)·장의(張儀)의 수단035)  이라 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윤증이 40년 동안 아버지처럼 섬긴 스승에 대하여 거짓말로 헐뜯고 배척하여 끊어서 원수진 사람처럼 여기더니 이제 유계에 대하여 또 다시 이렇게 하니, 이것이 천리(天理)로나 인정(人情)으로나 차마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신이 이른바 형칠(邢七)의 낭패(狼狽)036)  라 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아! 군신(君臣)·사생(師生)은 의리로 만난 자입니다. 그래서 예경(禮經)에는 살아 있을 때에 섬기고 죽었을 때에 장사하는 예(禮)를 논하면서 천연의 친속(親屬)인 부자와 동등하게 병칭(並稱)하였으니, 대개 이것은 산 사람의 큰 윤리이어서 조금이라도 치우치게 폐기하면 사람으로서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윤증이 한 짓은 첫째도 스승을 저버렸고 둘째도 스승을 저버렸는데도 인심이 어두워서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므로 한결같이 섬기는 의리가 거의 없어지니, 신이 이것을 두렵게 여겨 감히 후서(後序) 한 글에 대략 논하여 변명한 것이 있습니다. 이제 정호가 유현을 침모(侵侮)하였다 하여 맨 먼저 죄벌(罪罰)을 입었는데, 신이 변명하여 배척한 말은 침모하였을 뿐만이 아니니 그 죄범(罪犯)을 논하면 실로 정호보다 더할 것입니다.
신이 또 듣건대, 유규(柳奎)라는 자가 한 소(疏)를 올려 신의 스승의 묘문(墓文)에 관한 일도 아울러 언급하였으니, 신은 놀랍고 두려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대개 신의 스승이 화(禍)를 당한 것은 윤휴(尹鑴)의 무리가 다시 일어났기 때문이고 윤증이 날뛴 것도 이때에 있었던 일이니, 신의 스승이 죽기 전에 여러번 이것을 글에 나타냈습니다. 이제 묘문을 지을 때에 도리어 어찌 이것에 의거하여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는 하나 성상(聖上)께서 이미 유규가 선정(先正)을 위하여 신구(伸救)하여 변명하였다 하여 그 말을 가납(嘉納)하셨으니, 신의 죄는 또 한 귀절을 더한 셈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경(卿)이 정호의 일 때문에 상소하여 꾸증을 기다리기까지 하는 것을 나는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다만 경의 소에 ‘첫째도 스승을 저버렸고, 둘째도 스승을 저버렸다.’ 하였는데, 대저 선정의 도덕으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경은 평온한 마음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하였다. 당초에 임금이 정호가 지은 《가례원류》의 발문 가운데에 윤증을 배척한 말이 있다 하여 특지(特旨)로 정호를 파직하였기 때문에 권상하가 곧 상소하여 같이 죄받기를 청하였는데, 사의(辭意)가 명백하고 남김없이 변명하여 꺾었으나 임금의 비답(批答)이 또 이러하였으므로 사림(士林)이 매우 근심하였다.

 

1월 26일 정사

임금이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여(李畬)·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을 소견(召見)하였다. 이때 임금이 병 때문에 오랫동안 접견을 중지하고 군국(軍國)의 일은 문서로 아뢰는 것에 의지할 뿐이었는데, 마침 세 대신이 문안하는 반열(班列)에 같이 나아갔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사대(賜對)하여 묘당(廟堂)의 여러 가지 사무를 묻고, 이어서 세미(稅米)·세태(稅太) 2천 석(石)을 제주(濟州)에 백급(白給)하여 진자(賑資)에 보태라고 명하고, 또 어사(御史)가 진정(賑政)을 끝낸 뒤에 문무(文武)의 시재(試才)를 설행(設行)하게 하고, 문형(文衡)을 맡은 신하로 하여금 별유(別諭)를 대신 지어서 각별히 염려하는 뜻을 보이게 하였다. 서종태 등이 흉년이기 때문에 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 두 군문(軍門)의 춘조(春操)037)  를 멈추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포도 대장(捕盜大將) 이기하(李基夏)와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세면(李世勉)은 병세가 위중하니, 갈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양전(量田)038)  한 지 이미 오래 되어 경계가 바르지 않다. 맹자(孟子)가 ‘왕정(王政)은 반드시 경계에서 비롯하여야 한다.’ 하였거니와, 전정(田政)은 본디 중대한 일이니, 구습대로 버려둘 수 없다. 이제 팔도가 풍년 들기를 기다려서 한꺼번에 하자면 아득하여 기약이 없을 것인데, 지난해에 좌상(左相)이 상차(上箚)한 사연이 간편하여 내 뜻에 바로 맞고 본디 거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니, 결의(決意)하여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신하들이 물러가서 상의하여 점차로 거행하겠다고 청하였다.

 

이홍술(李弘述)을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삼았다.

 

1월 27일 무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상차(上箚)하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를 지금 차출하여야 당연하겠는데, 본도(本道)는 방면(方面)의 중대하기가 양남(兩南)039)  과 대등하므로 여느 때라도 본디 신중히 간택하여야 마땅하겠지만, 지금은 재해를 입은 고을에서 바야흐로 진구(賑救)하는 일을 베푸는 중이라 앞으로 거행할 일이 있으므로 더욱 잘 선택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격례(格例)를 깨고 간장(諫長)040)  으로 의망(擬望)에 대비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28일 기미

이재(李縡)를 승지(承旨)로, 김흥경(金興慶)을 충청 관찰사(忠淸觀察使)로 삼았다.

 

1월 29일 경신

이만견(李晩堅)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형조(刑曹)의 당상(堂上)인 윤덕준(尹德駿) 등과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하여 형조 소관인 경외(京外)의 시수(時囚)를 소결(疏決)041)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승문 정자(承文正字) 김한운(金翰運)은 외람되게 청로(淸路)를 더럽혔으므로 물의가 떠들썩하게 퍼지는데도 태연히 행공(行公)042)  하기를 염치없이 무릅썼으며, 그 밖에 행실이 비굴하고 처사가 도리에 어그러진 것을 이루 거론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를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전날 대신들을 인접(引接)하였을 때에 이유는 병 때문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날 사대(賜對)하였다. 이유가 말하기를,
"제주(濟州)의 목마(牧馬)가 굶주린 백성에게 잡아먹힌 것이 많으니, 마의(馬醫)를 보내어 1천 관(貫)을 가지고 호남(湖南)에 가서 이익을 불려 준마(駿馬)를 사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강도(江都)043) 주문도(奏文島)에 진(鎭)을 설치한 뒤에 목마를 매음도(煤音島)에 옮기는 것이 당연하였는데, 당시의 유수(留守) 김진규(金鎭圭)가 매음도 역시 방비를 설치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여 드디어 중지했습니다. 이제 마땅히 먼저 1백여 필(匹)을 옮기고서 다시 의논하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유가 또 말하기를,
"신(臣)이 지난 겨울에 북한(北漢)의 일을 아뢰었는데, 이광좌(李光佐)가 그것이 옳지 않다고 극력하게 말하였고 민진후(閔鎭厚)도 그것이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민진후를 보고 물었더니, 그의 생각은 국력이 미치지 못할 것을 염려한 것이지 본디 전혀 막으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요판(料辦)한다는 항목은, 나라에 큰일이 있는데 축적한 것을 쓰지 않고 또 요판도 하지 않으면 장차 어떻게 손을 쓰겠습니까? 지금 말하는 요판이란 돈으로 관곡(官穀)을 사거나 혹은 곡식을 돈과 바꾸어 조금 남는 것을 취할 뿐입니다. 예전에 인조(仁祖) 때에야 비로소 남한 산성(南漢山城)을 쌓은 것은 이서(李曙)가 실로 주장한 것이었는데, 근거 없는 의논이 여러 가지로 일어나고 여러 번 탄핵당하였으니, 인조의 성지(聖志)가 굳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그 일을 끝내어 병자년044)  에 힘을 얻었겠습니까? 지금 의논하는 자는 다 남한과 강도가 만전(萬全)한 곳이라 하나, 만약 병자년처럼 사기(事機)가 위급하면 남한이나 강도로 어떻게 건너갈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도·남한은 다 육지에 잇닿은 곳이 아니니, 변보(邊報)가 갑자기 급박하면 어떻게 건널 수 있겠는가? 더구나 서울의 숱한 백성이 반드시 어육(魚肉)처럼 참살당할 것이고 부고(府庫)·창름(倉廩)이 다 적의 소유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단연코 계책을 정하였다. 백성과 함께 지키는 것인데, 어찌 근거 없는 의논 때문에 고칠 수 있겠는가? 당초에 북한 산성을 쌓은 것은 소열제(昭烈帝)045)  가 형주(荊州)의 백성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뜻과 같다."
하였다.

 

임금이 이어서 승지(承旨) 이재(李縡)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가례원류(家禮源流)》는 사가(私家)의 글이므로 국가에서 간여하여 알아야 할 바가 아닌데, 이 때문에 서로 다투어 어지러움이 점점 심하여 가니, 이 뒤로는 이 일에 관계되는 유소(儒疏)는 일체 받아들이지 말라."
하니, 이재가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분란을 그치게 하시려는 뜻에서 나온 줄 본디 압니다마는, 이제 금령(禁令)을 둔다면 물정이 또 격렬하여질까 염려되니, 출납의 책임은 후사(喉司)에 맡기셔야 할 것이고 전하께서는 오직 공평하게 듣고 모두 보아 옳고 그른 것을 가리셔야 할 것입니다. 시비가 분명하면 시끄러운 사단(事端)이 절로 그칠 것이니, 일체 막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관학(館學)의 소(疏)로 말하면, 비록 국기일(國忌日)이더라도 받아들여 보시는 것을 허가하여 대신(大臣)을 대우하는 예(禮)와 마찬가지로 해야 할 것인데, 어찌 지레 금령을 두어 줄곧 억제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재가 또 말하기를,
"전날 권상하(權尙夏)의 소에 대한 비답(批答)에 ‘경(卿)이 정호(鄭澔)의 일로 인하여 상소하여 견책(譴責)을 기다리는 것을 나는 지나치다고 생각한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이 일은 이미 하나로 꿰어진 일인데, 정호가 이미 죄받았으니 권상하가 어찌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이 분부는 성실하지 못하다 하겠고, 비답의 사연에도 자못 미워하여 냉대하는 뜻을 보이셨으니, 중외(中外)의 선비의 기대에 매우 못미칩니다."
하니, 임금이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응답하기를,
"도헌(都憲)046)  의 소에 대한 비답은 미워하여 냉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아뢰어 유소(儒疏)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여 이르기를,
"설령 장보(章甫)047)  의 말이라도 저촉되지 않는다면 그 말의 시비를 보아서 취사(取舍)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경솔히 막아서 사기(士氣)가 억제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대장(臺章)048)  은 막지 않고 유소에는 금령을 둔다면 조종조(祖宗朝) 3백 년 이래로 사기를 장려하고 사론(士論)을 중시하여 온 도리에 더욱이 어그러집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1월 30일 신유

상신(相臣) 김우항(金宇杭)의 차자(箚子)로 인하여 오수원(吳遂元)을 가려 뽑을 때에 이돈(李墩)이 합고(合考)에 참여한 전말을 임진년049) 정시(庭試)050)  의 고관(考官)들에게 함문(緘問)051)  하였더니, 경기 감사(京畿監司) 최석항(崔錫恒) 등은 이돈이 합고할 때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고 판결사(判決事) 박봉령(朴鳳齡) 등은 다 이돈이 실로 같이 참여하였다 하므로 추조(秋曹)052)  에서 연유를 갖추어 아뢰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이 신하들이 함답(緘答)한 사연을 보건대 합고할 때에 이돈이 참여하지 않았다고도 말하고 같이 참여하였다고도 말하였으니, 어느 말이 옳은지 모르겠다. 이 함답한 사연으로는 사정(私情)을 썼는지 여부를 알아 낼 수 없으니, 내버려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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