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7권, 숙종 42년 1716년 2월

싸라리리 2025. 11. 29.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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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계해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니, 임금이 김한운(金翰運)의 일만을 따랐다.

 

승지(承旨) 오명항(吳命恒)이 상소(上疏)하여 유소(儒疏)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유생(儒生) 유태원(柳太垣) 등이 윤증(尹拯)을 위하여 상소하여 변명하되 권상하(權尙夏)를 헐뜯고 위로는 송시열(宋時烈)에게 미치는 것이 끝이 없었으므로 정원(政院)에서 물리쳤는데, 태학(太學)053)  에서 유태원에게 유벌(儒罰)054)  을 주고, 또 유규를 벌주었다. 그래서 오명항이 상소 가운데에 모두 들추어 아뢰었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네가 상소한 사연은 본디 좋으나, 받아들이지 말라는 분부도 또한 진정(鎭定)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유태원 등의 전달되지 못한 소는 말을 쓴 것이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유규 등은 내가 그 소를 보고 선정(先正)을 위하여 신구(伸救)하고 변명한 정성을 아름답게 여겼는데, 다 유벌을 받았다 하니 매우 놀랍고 이상하다."
하였다.

 

제주 별견 어사(濟州別譴御史) 황귀하(黃龜河)가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에게 명하여 교문(敎文)을 대신 짓게 하여 하유(下諭)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아! 너희 탐라(耽羅)는 아득히 해외(海外)에 있어 땅이 멀리 떨어져 있고 풍기(風氣)가 특이하다. 무릇 우리 백성의 생업이 어려워진 지 오래 되었거니와, 불행하게도 천재(天災)의 유행(流行)이 온 섬에 치우치게 혹독하다. 계사년055)  의 흉작은 예전에 없던 바여서 굶주림과 염병으로 사람과 가축이 다 죽으니, 내가 곡식을 보내어 극진히 진구(賑救)하려 하였으나 구제하는 방도가 미진하여 죽음이 참혹하게도 거의 수천을 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몹시 마음이 몹시 상하는데, 뜻밖에도 지난 가을에 또 대흉(大凶)이어서 논밭에 수확이 없고 채소·과실은 익지 않았으므로 미처 해[歲]를 잇지 못하고 백성의 식량이 아주 떨어졌다. 살아 남은 백성이 지독한 흉년을 거듭 당하였으나 궁벽한 바다에 있는 외딴섬은 육지와 달라서 빌어먹을 곳도 없고 힘써 옮겨갈 방법도 없으므로 모두들 근심스레 떠들고 허둥지둥하며 앉아서 죽음을 기다린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어떻게 마음먹겠는가? 내가 이미 여러 번 수령(守令)에게 경계하여 반드시 구활(救活)하는 방도를 다하게 하고 묘당(廟堂)에 거듭 명하여 구제할 방책을 빨리 강구하게 하였는데, 천 리 밖은 이목(耳目)이 이미 멀거니와 구중(九重) 안에서는 근심이 매우 깊으므로 이에 근시(近侍)의 신하를 보내어 가서 진구하는 일을 살피고 덕의(德意)를 선포(宣布)하게 하노라.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에 분정(分定)한 곡식을 이제 비록 잇따라 날라가기는 하나, 인구를 셈하여 나누어 주다가 혹 모자랄까 염려되거든 다시 그 수량을 늘려 보리 수확 이전까지 대도록 하라. 또 생각하건대 봄날이 점점 화창하여 가서 봄 농사가 이미 다가왔으나, 먹을 것을 바라는 것이 바야흐로 급한데 씨뿌리는 일을 어찌 논하랴? 그러므로 씨나락을 주어 농사를 권하도록 명하니, 혜택을 입혀 안정시키기 바란다.
아! 국가가 이 섬을 믿고 중히 여기는 것이 번복(藩服)056)  과 다름이 없고, 먼 외방의 백성도 똑같이 나의 적자(赤子)이니, 내가 이들을 보는 것이 어찌 멀고 가까움에 따라 차이를 두겠는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런 매우 어려운 지경이 되게 한 것은 참으로 내 허물이니, 부끄럽고 슬픈 것을 어찌 말하겠는가? 세공(歲貢)을 줄이더라도 달래고 보호하는 은택이 될 만큼은 못되고 부지런히 곡식을 나르더라도 내 마음에 만족할 만하지 못하다. 문무(文武)를 시취(試取)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이미 구례(舊例)대로 하게 하였으니, 인재를 뽑으면 또한 막히고 답답한 것을 소통하게 될 것이다. 억울하여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내가 펴게 할 것이며, 떨어내지 못하는 폐단을 내가 없앨 것이다. 너희 사민(士民)은 내가 빈말을 한다고 여기지 말고 내 지극한 뜻을 본받아, 시름하는 기색을 조금 펴고 흩어지려는 생각을 품지 말고서 전리(田里)에 안정하고 집을 보전하여 내가 슬퍼하고 어루만지는 뜻에 따르라. 아! 저축을 다 비우더라도 마음이 어찌 차마 서서 보겠는가? 제도(諸道)가 다 굶주리나 너희 지방을 더욱 염려한다."
하였다.

 

2월 3일 갑자

부수찬(副修撰) 홍정필(洪廷弼)이 상소(上疏)하여 대신(大臣)이 간장(諫長)을 호서백(湖西伯)057)  으로 비의(備擬)하기를 청한 것은 체례(體例)를 어긴 것을 면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또 유소(儒疏)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대신이 전례를 끌어대어 차자(箚子)를 올린 것이 온당하지 못한지는 모르겠다. 아래에 아뢴 일은 이미 뜻을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정언(正言) 조상건(趙尙健)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보건대 대사헌(大司憲) 권상하(權尙夏)가 인책한 소(疏)는 시비를 분명히 가리되 말과 뜻이 엄정하여 천청(天聽)을 감동하여 깨닫게 할 만한데, 소에 대한 비답(批答)을 보게 되니 미워하여 냉대하시는 뜻이 뚜렷이 있어 ‘선정(先正)이 도덕(道德)으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느냐?’고 분부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고(故) 상신(相臣) 윤증(尹拯)이 원래 스승을 저버린 사실이 없는데도 권상하가 억지로 사실 외의 지목을 한다고 여기십니까? 윤증이 처음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저버린 것은 그 아버지의 묘문(墓文)에 관한 일 한 가지 때문인 것으로 핑계하나, 이는 크게 그렇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송시열이 당초 묘문을 지을 때에 말을 극진히 하여 찬양하여 윤증의 마음에 차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또한 일찍이 뚜렷이 헐뜯고 명백히 배척하여 그의 단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하여 저버릴 만한 단서가 되겠습니까? 선배가 남의 비지(碑誌)에 혹 억누르거나 찬양하며 저울질한 것이 전후에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마는, 그 자제가 이 때문에 문득 서로 끊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주자(朱子)로 말하면, 여조겸(呂祖謙) 형제와 그 선세(先世)를 논하며 그 흠을 가리켜 배척하여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는 것이 많았으나 여씨는 절교를 고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 때문에 조금도 후의(厚誼)를 변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랜 친구에 있어서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40년 동안 아버지처럼 섬긴 스승이겠습니까? 과연 생각건대 윤증이 이 때문에 서로 끊으려 하였다면, 어찌하여 주자가 논한 구양수(歐陽修)에 대한 범순인(范純仁)의 의리처럼058)   그때에 곧 의리에 의거하여 절교를 고하지 않고 묘문이 이루어진 뒤에도 8, 9년간이나 평소와 다름없이 문하에 출입하고 서찰로 문안하였겠습니까? 신유년059)   이후에서야 갑자기 왕도(王道)·패도(覇道)의 의(義)·이(利)이니 본원(本源)의 심술(心術)이니 하는 따위의 말로 벗 사이에 보낸 서찰에서 곧바로 헐뜯어 욕하였고, 마지막에는 또 박절한 말로 사석(師席)에 왕복할 때에 언급하였습니다. 그 마음이 오로지 묘문에만 있었을 뿐이 아닌데, 전하께서는 번번이 부사(父師)에 경중(輕重)이 있다는 말을 사륜(絲綸)060)  사이에 베풀어 마치 송시열에게 참으로 끊을 만한 사실이 있는 것처럼 하셨습니다.
아! 사도(師道)가 어찌 중대하지 않겠습니까? 삼대(三代) 이전에는 임금이 사도를 겸하였으므로 《서경(書經)》에는 ‘임금이 되게 하고 스승이 되게 하였다.’ 하였고, 《대학(大學)》의 서(序)에는 ‘하늘이 반드시 명하여 백성의 군사(君師)로 삼는다.’ 하였습니다. 임금을 말하면 으레 스승을 말하고 스승을 말하면 으레 임금을 말하였는데, 삼대 말기에는 세도(世道)가 쇠퇴하고 교계(敎戒)가 해이해져 공자(孔子)는 대성(大聖)의 자질로서 군사의 지위를 얻지 못한 채 선왕(先王)이 백성을 교화한 방법이 없어져 전하여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말로 가르쳐서 사사로이 서로 그 무리에게 전수(傳授)하니, 임금과 스승이 비로소 둘로 나뉘었습니다. 이것이 《예경(禮經)》에 ‘세 사람061)  에게 생육되어 한결같이 섬기고, 죽게 되어서도 치우쳐 폐기하여서는 안된다.’ 한 까닭입니다. 이 때문에 예전부터 성현(聖賢)이 이 세 사람에 대하여 감히 경중의 차이를 나누지 않고 모두 3년 동안 복상(服喪)하는 것으로 단정한 것이니, 그 뜻을 알 만합니다. 아버지는 천연의 친속(親屬)이며 임금과 스승은 다 의리로 만난 이인데, 이제 만약 아버지와 스승에 경중이 있다고 한다면 그 유폐(流弊)는 반드시 장차 임금과 아버지 사이에서 경중을 나누게 될 것이니, 신은 이 지경이 되면 장차 사람이 사람 노릇을 못하고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될까 염려되므로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와 스승 사이에 설혹 불행하게도 난처한 사단(事端)이 있어 그 의리를 둘 다 보전할 수 없다면, 또한 어찌 조용히 선처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윤증은 한편으로는 스승과 제자의 예(禮)를 폐기하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남에게 제 스승을 헐뜯었으니, 이는 실로 향당(鄕黨)의 자애(自愛)하는 자로서 하지 않는 짓입니다.
송시열이 윤증 부자를 만족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본디 윤휴(尹鑴)를 끊지 않는 한 가지 일에 있었는데, 기사년062)  에 이르러 송시열은 윤휴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맨먼저 뜻밖의 화를 당하였고, 윤증은 윤휴에게 편들었기 때문에 폐고(廢錮)되고 삭직(削職)된 처지에서 기신(起身)하여 문득 도헌(都憲)063)  에 제배(除拜)되었습니다. 아! 진퇴(進退)하고 소장(消長)하는 데에서 사정(邪正)이 분간되고 화복(禍福)을 쫓고 피하는 데에서 심적(心迹)을 알 수 있는데, 한편을 구호(救護)하는 말이 번번이 다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이 있다는 분부에다 핑계를 대어 스승과 제자의 윤리가 거의 다 없어졌으니, 말류(末流)의 폐해는 이번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증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가례원류》는 특별히 하나의 예서(禮書)로 모아 엮은 것일 뿐이니 누가 지었다 한들 그 사람의 학문이나 도덕에 무엇이 관계되겠습니까마는, 윤증은 그 스승이 죽을 때에 부탁한 뜻을 멋대로 잊고 세월이 이미 오래 지난 뒤에 움켜쥐고 제것으로 삼아서 그 스승을 저버리기를 조금도 돌아보고 꺼림이 없었습니다. 한몸으로 전후에 두번 그 전철을 밟았으므로 권상하가 소 가운데에 이른바 첫째도 스승을 저버리고 둘째도 스승을 저버렸다는 것은 사실에 의거한 적확한 말이라 하겠는데, 전하께서는 억제하고 치우치는 죄과로 돌리려 하시니, 전부터 예우(禮遇)하여 오신 뜻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정호(鄭澔)를 특명으로 파직하신 것으로 말하면 노여움을 다른 데로 옮기신 것이 됨을 면하지 못하거니와, 저 유규(柳奎)의 무리가 이로 인하여 성의(聖意)를 엿보아 헤아려서 신구(伸救)하여 변명한다는 핑계로 침욕(侵辱)하기를 두루 다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죄주지 않으실 뿐더러 따르고 숭장(崇奬)하셨으니, 어찌하여 유현(儒賢)을 대우하시는 것이 이렇게 몹시도 박하십니까?"
하고, 끝에 말하기를,
"유태원(柳太垣)이 감히 금령(禁令)이 이미 내려진 뒤에 상소한다는 핑계로 곧바로 궐문(闕門)을 들어오므로 문을 지키는 하례(下隷)가 규례에 따라 막았더니, 막는 것을 노여워하여 머리채를 휘어잡고 뺨을 때리고서 끝내는 궐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와 금궁(禁宮)의 지척에서 멋대로 난동을 부렸으며, 소의 대개를 써서 보낸 데에는 곧바로 ‘빨리 그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따위의 말로 유현(儒賢)을 욕함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후사(喉司)의 신하로서 방자하게 넌지시 여쭌 뜻은 반드시 봉입(捧入)하려는 데에 있었거니와, 개의하지 않고 함부로 머물러 두어 표신(標信)064)  을 번거롭게까지 하고, 한 번 아뢰는 것도 모자라서 두 번이나 아뢰기에 이르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먼저 유규가 올바른 신하를 헐뜯은 죄를 다스리고, 해당 승지도 엄중히 벌주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아비·자식과 스승·제자 중에서 누가 중(重)하고 누가 경(經)하냐는 것은 전에 분부한 것이 분명히 있어 국시(國是)가 이미 정하여졌다. 《가례원류》에 관한 일은, 움켜쥐고 제 것으로 삼았다 하나 어찌 그럴 리가 있겠으며, 네가 방자하게 상소하여 마음껏 헐뜯으니, 세도(世道)를 생각하면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정호는 어진이를 모욕한 죄가 있어도 파직으로 가볍게 벌하였는데, 오히려 또 쟁론(爭論)하며 승지와 유규를 벌주기를 청하기까지 하니, 또한 매우 놀랍다."
하였다.

 

2월 4일 을축

정언(正言) 조상건(趙尙健)이 어제 있었던 엄한 분부로 인하여 인피(引避)하고 말하기를,
"이른바 국시라는 것은 온 국민이 함께 옳게 여기는 것인데, 지금 전하께서는 시비를 가리지 않고 단단히 단정해 버리셨습니다. 주자(朱子)는 억지로 국시라 이름짓는 것은 불행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충고하였습니다. 신은 성명(聖明)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고, 드디어 퇴대(退待)하였다. 이튿날 헌납(獻納) 조명봉(趙鳴鳳)이 조상건을 처치(處置)하기를,
"바른 도리를 붙들어 세우는 논의는 실로 공론에 따른 것인데, 미안한 비답으로 어찌하여 반드시 혐의하셔야 하겠습니까? 청컨대 출사(出仕)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선정(先正)을 헐뜯는 것이 끝이 없는데 감히 출사시키기를 청하다니 꺼리는 것이 없다 하겠구나. 정언(正言) 조상건을 먼저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아뢰어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더니, 임금이 엄한 비답을 내려 몹시 꾸짖었다. 다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으니, 조명봉이 처치가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인피하였다. 또 이튿날 정언(正言) 박사익(朴師益)이 조명봉을 처치하여 또 출사시키기를 청하자 임금이 답하기를,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한 것은 참으로 뜻밖이고, 억지로 입과(立科)에 두었으니 참으로 이상할 만하다."
하니, 박사익도 인피하였다. 장령(掌令) 권엽(權熀)이 박사익을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이 오명항(吳命恒)의 소에 대한 비답(批答)으로 인하여 인혐(引嫌)하여 권당(捲堂)065)  하니, 임금이 본관(本館)의 당상(堂上)에게 명하여 타일러서 들어가도록 권하게 하였다. 재임(齋任)066) 윤봉오(尹鳳五) 등이 생각하는 바를 바친 글에 이르기를,
"전하께서 선정(先正)이라는 이름은 가볍게 붙일 수 없으며 아부하는 무리는 숭장(崇奬)할 수 없다는 것을 유독 생각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비위를 거스르면 번번이 위협하고 꾸중하시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대개 선비에는 진짜와 가짜가 있어서 임금이 가리기 어려운 것을 늘 걱정하거니와, 혹 이름만 따르고 그 실속을 헤아리지 않아 시비(是非)가 서로 섞이고 호오(好惡)가 바르지 못하면 취사(取舍)할 적에 저절로 진짜 유현이 소외되게 됨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이번에 권당한 일은 결국 미안한 일인데, 생각하는 바를 써서 바쳐 버젓이 모욕하니, 사습(士習)이 어찌하여 이러할 수 있는가? 유생들은 성묘(聖廟)를 수직(守直)하면서 유독 대제(大祭)가 내일로 임박한 것만은 생각하지 않는가? 빨리 들어가도록 권하라."
하였으나, 윤봉오 등이 엄한 분부를 받았다 하여 감히 식당(食堂)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튿날 성균관에서 아뢰니, 임금이 또 하유(下諭)하기를,
"생각한 바 가운데에 이미 선정을 능멸하여 모욕한 말이 있으니 비답(批答)한 말이 저절로 그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유생들이 오히려 도로 들어가지 않으며, 하룻밤을 지내면 석채(釋菜)067)  인데도 향(香)을 받지 못하니, 일이 미안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차라리 친림(親臨)하고 싶으나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다시 타일러서 곧 도로 들어가게 하라."
하였다. 이때 하룻밤이 지나면 문묘(文廟)의 석채인데 유생들의 권당으로 인하여 장차 거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임금이 마지못하여 들어가도록 권하라는 명은 내렸으나 전후의 사지(辭旨)에는 조금도 용서하여 방면(放免)할 뜻이 없었는데, 유생들은 친림하고 싶다는 분부에 몰려 부지런히 재사(齋舍)에 들어갔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남병사(南兵使) 윤우진(尹遇進)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외람되고 행신(行身)이 비루하고 도리에 어그러지며 가는 곳마다 잘 다스리지 못하고 탐욕스럽다는 소문이 낭자하므로 제배(除拜)된 처음부터 물의가 시끄러웠는데, 듣고도 못들은 체 태연히 무릅써 부임할 생각을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2월 5일 병인

이기익(李箕翊)을 사간(司諫)으로, 권엽(權熀)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2월 6일 정묘

전(前) 정언(正言) 조상건(趙尙健)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문밖으로 내치라고 명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을 때에 임금이 말하기를,
"세도(世道)가 불행하여 사문(斯文)에 변이 일어났으니, 이제 말하는 자가 다만 《가례원류(家禮源流)》에 관한 일뿐만 아니라 스승을 저버렸다는 말도 제기하여 버젓이 헐뜯어 욕하였다. 묘문(墓文)에서 제 아버지를 이미 욕하였는데도 그 아들된 자가 마음 편히 받아들인다면 천리·인륜이 장차 아주 없어지게 될 것이다. 더구나 대헌(大憲)이 지은 후서(後序)는 정호(鄭澔)의 발문(跋文)보다 더욱 심하였지만 단지 평소에 예우(禮遇)하였기 때문에 참작하여 선처하였거니와, 유규(柳奎)의 소는 본디 착하지 못하여 신구(伸救)하여 변명한 말이 저절로 그렇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 때에 또한 유규가 그르다는 것을 알고도 죄주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조상건이 겉으로 유현(儒賢)을 신구하여 변명한다는 핑계로 헐뜯고 짓밟는 것이 종에게 하는 것과 같았는데, 정원(政院)에서 아뢰는 것은 마치 감히 말하는 선비인 듯이 여기니, 어찌 감히 이러할 수 있는가? 조상건은 어떠한 놈이길래 조금도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몹시도 무상(無狀)한가? 조상건은 관작을 삭탈하여 문밖으로 내치고 복역(復逆)068)  한 승지(承旨)는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 임금이 노여움으로 무섭게 떨고 임금의 목소리가 매우 높았으므로, 좌우가 두려워하였다. 제조(提調) 조태채(趙泰采)가 말하기를,
"성교(聖敎)에 ‘묘문에서 제 아버지를 욕하였는데 그 아들이 어찌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셨으나, 이는 실상(實狀)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 묘문은 오로지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행장(行狀)에 따랐고 자기 뜻으로 꾸미지 않았습니다. 10년 동안 고쳐달라고 청하여도 끝내 허락하지 않으므로 스승과 제자의 정의(情義)가 점점 더 어그러졌으나, 그 글에는 원래 그 아버지에게 욕이 미친 것이 없었는데, 윤증(尹拯)이 먼저 박세채에게 글을 보내어 그 본원(本源)의 심술(心術)을 배척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스승을 저버렸다는 까닭입니다. 대간(臺諫)의 상소가 과격하다면 꾸짖는 것이야 괜찮겠지만 특명으로 벼슬을 간 것도 모자라서 관작을 삭탈하여 문밖으로 내치셨으니, 신은 뭇 신하의 뜻이 더욱 격렬하여져서 마침내 난처하게까지 될까 염려됩니다."
하고,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은 말하기를,
"옛날에 주자(朱子)는 그 임금의 종이 대신(大臣)을 헐뜯고 대간을 욕하였기 때문에 밤새도록 자지 못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성상께서 대신(臺臣)을 엄히 꾸짖어 어떤 놈이냐고까지 말씀하시니, 성인(聖人)의 사기(辭氣)가 이러하여서는 안될 듯합니다. 승지의 파직은 더욱이 지나치니, 청컨대 다시 헤아려 도로 거두소서."
하고, 도승지(都承旨) 이야(李壄)는 말하기를,
"대간이 스승과 제자를 임금과 신하에 견준 것은 더욱 윤기(倫紀)가 없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오늘의 처분이 지나친 줄 모르겠습니다."
하고, 조태채는 말하기를,
"같은 신하로서 같이 임금을 모시고서도 이처럼 가지런하지 않으니, 성상께서도 역시 어떻게 가지런하게 하시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는 파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이명이, 상후(上候)가 혹시 일로 인하여 몹시 고뇌(苦惱)하다가 화열(火熱)이 더해지면 이따금 상심(傷心)이 더할 염려가 있다 하여 계해년069)   두환(痘患) 때의 전례에 따라 비록 삼사(三司)의 소장일지라도 다 정원(政院)에 받아두고 회복되거든 입계(入啓)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이어서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성(天性)이 본래 급박하여 모든 일을 놓아두고 넘어가지 못하니, 반드시 끝맺은 뒤에야 마음이 비로소 시원하고 끝내지 못하면 답답하여 못견딘다. 불행히도 한 가지 병이 4년 동안 지겹도록 계속되어 화(火)와 열(熱)이 뿌리박혔기 때문에 문서를 조금만 보아도 화가 오르고 기침이 나와서 하기도 어렵고 안하기도 어려우니, 참으로 매우 괴롭고 답답하여 늘 스스로 말하고 탄식한다."
하니, 듣는 시신(侍臣)이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2월 7일 무진

신정하(申靖夏)를 헌납(獻納)으로, 황일하(黃一夏)·조도빈(趙道彬)·심수현(沈壽賢)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저번에 조상건(趙尙健)이 상소하고 인피(引避)한 일 때문에 이미 체차(遞差)를 명하시더니 이어서 관작을 삭탈하여 문밖으로 내치시고, 처치(處置)한 두 간신(諫臣)은 문득 견책당하였고, 작환(繳還)070)  한 세 승선(承宣)071)  은 같이 파직되었으니, 신(臣)은 지극히 당황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조상건이 근원부터 거슬러 올라가 다 말한 것은 오로지 숨김이 없는 뜻에서 나온 것이며, 그 말은 다 선배의 완론(完論)이고 사류(士類)의 공론(公論)입니다. 세 사람에게서 생육(生育)받아 한결같이 섬긴다는 것은 경서(經書)의 훈고(訓詁)가 명확한데, 혹 경중을 나눈다면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중대합니다. 설령 불행하게도 양편을 같이 보필할 수 없는 경우를 당하더라도 어찌 의리를 헤아려 변통할 방도가 없겠습니까마는, 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초부터 묘문(墓文)에는 원래 모욕한 것이 없었는데 갑자기 헐뜯더니 끝내는 저버리고 끊기에 이르렀으니,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이 있다는 분부는 이미 이 일과는 가깝지 않고, 《가례원류(家禮源流)》로 말하면 또한 아버지와 스승 사이에서 남과 나의 쟁론이 뚜렷이 있었는데, 남긴 부탁을 아주 잊고 세상을 매우 그르쳤거니와 사림(士林)의 화(禍)가 반드시 여기에서 조짐이 보이지 않은 것도 아니니, 그 말미암은 바를 구명하면 이것이 누구의 허물입니까? 조상건은 말을 다하여 숨기지 않았으므로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겠는데 전하께서는 시비를 거꾸로 놓아 위벌(威罰)을 두렵게 내리셨으니, 이는 실로 성조(聖朝)의 비상한 과실입니다. 청컨대 정언(正言) 조상건을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과 관작을 삭탈하여 문밖으로 내치라는 명을 빨리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부교리(副校理) 어유귀(魚有龜)·수찬(修撰) 홍석보(洪錫輔) 등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들이 삼가 보건대 조상건(趙尙健)의 소(疏)는 사도(師道)가 이미 떨어진 뒤에 밝히고 정론(正論)이 장차 끊어지려는 끝에 붙잡았으니, 성명(聖明)께서 직언을 용납하시는 도리로서는 받아들여 아름답게 여기고 장려하셔야 마땅할 것인데, 꺾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시고 사지(辭旨)는 더욱 엄하시어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이 일을 만한 신하에게 드디어 미쳤으니, 신들은 서로 돌아보며 놀라와 참으로 근심되고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 일의 시비는 그 유래가 대개 오래 되었는데, 갑자년072)   연석(筵席)에서 아뢸 때에 공론이 크게 정하여졌는데, 불행하게도 세도(世道)가 날로 더럽혀지고 이의가 떠들썩해져서 세 사람에게서 생육(生育)받아 한결같이 섬긴다는 의리가 침식되고 아버지와 스승에 경중이 있다는 좋지 못한 말이 시작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그럴듯한 말에 혼란됨을 면하지 못하고 윤발(綸綍)073)   사이에 드러내기까지 하여 흑백이 어지럽게 되고 의리가 캄캄하게 막히니, 이것이 어찌 전하의 한 마디 말씀이 잘못되어 유도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유상(儒相)을 사문(師門)에서 존신(尊信)하고 경복(敬服)한 지 거의 40년이 되었는데, 뒤에 묘문으로 인하여 버젓이 헐뜯고 본원(本源)의 심술(心術)을 의심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한 사문인데 불후(不朽)를 부탁하면서는 태산(泰山)·북두(北斗)처럼 우러르다가 바라는 바에 부응하지 못하면 원수처럼 보아 앞뒤에 한 짓이 스스로 엄폐하기 어려우니, 일찍이 임하(林下)에서 글읽었다는 사람이 이러합니까? 지난번에 그 글이 한결같이 제 뜻과 같았다면 헐뜯는 말이 어찌 또한 마음에서 싹터서 입에서 나왔겠습니까? 설령 끊을 만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단지 의리를 끌어대어 스스로 처신하였어야 할 뿐인데, 어찌 스승은 아버지보다 경하다고 핑계하여 오로지 헐뜯으려고만 하며 돌아보아 거리낌이 없단 말입니까? 그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로 말하면, 무슨 관계되는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반드시 움켜가지려 한 것은 그 행사(行事)를 추적하면 한 투식에서 같이 나왔으니 사도(斯道)를 맡은 자라면 분명히 가려서 후세에 전해야 할 것인데, 사실을 적은 글이 향유(鄕儒)에게 더렵혀지고 스스로 논열(論列)한 글이 성심(聖心)을 감동시키지 못하였으니 전하를 위하여 언책(言責)을 맡은 자로서 어찌 한마디라도 말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명을 거두어 성덕(聖德)을 빛내소서."
하고, 끝에 말하기를,
"상후(上候)의 화열(火熱)이 오르내리는 것은 오로지 귀에 거슬리는 말이 많기 때문이니, 거울처럼 환히 비고 저울대처럼 평탄하여 조금도 치우치지 마시면 베푸신 거조(擧措)는 합당하고 고뇌는 절로 없어져서 마음을 다스리고 병을 다스리는 방도를 둘 다 얻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내가 고집하는 것이 이미 옳으니, 너희들이 장황하게 말을 하더라도 애써 들어줄 리가 만무하다. 오래도록 앓는 중이라서 조금 마음을 쓰면 화열이 문득 오르는 것이지 본디 몹시 고뇌하여 그러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였다.

 

2월 8일 기사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정언(正言) 조상건(趙尙健)이 상소하고 인피(引避)한 사연은 명백하고 통쾌하여 사문(斯文)의 시비(是非)를 가릴 만한데, 특별히 체직하라는 분부는 본디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큰 도량에 부족한 것이 있거니와, 또 연중(筵中)에서 관작(官爵)을 삭탈하여 문밖으로 내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셨으니, 들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놀라고 의혹합니다. 말하는 자는 본디 죄주어서는 안되는데, 하물며 네 조정(朝廷)에서 예우(禮遇)한 선정(先正)이며 일대(一代)가 존모(尊慕)한 유현(儒賢)을 장차 어떠한 처지에 놓으려 하십니까? 이번에 정호(鄭澔)를 죄준 것은 유현을 배척한 것이 되고, 간신(諫臣)을 내친 것은 선정을 핍박한 것이 됩니다. 일월(日月)과 같이 밝으신 전하로서 여기에 생각이 미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나 단지 성심(聖心)이 치우치심으로 말미암아 저절로 처분이 부당하게 됨을 면하지 못하셨으니, 이것이 후원(喉院)074)  과 삼사(三司)가 서로 이어서 쟁집(爭執)하여 그칠 줄 모르게 된 까닭입니다. 공론은 백 년을 기다리지 않고 시비는 한때를 속이기 어려운데, 이제 전하께서는 천둥 같은 위엄에 의지하여 반드시 국시(國是)를 억지로 정하려 하시니, 신은 이 뒤로 여정(輿情)이 더욱 답답하여지고 사론(士論)이 한층 격렬해져서 마침내 안정될 날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청컨대 조상건을 체차(遞差)하라는 명과 삭출(削黜)하라는 명을 빨리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2월 9일 경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삼사(三司)는 전하의 이목(耳目)인데, 이목이 막히면 국사(國事)는 시조(施措)할 희망이 없어지고 군정(群情)은 상달할 길이 끊어집니다. 지금 비록 성후(聖候)에 진퇴(進退)가 있다 하더라도 언로(言路)를 개폐(開閉)하고 사체(事體)를 간단하게 미봉(彌縫)하는 것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삼사의 소차(疏箚)075)  를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2월 11일 임신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되, 오수원(吳遂元)을 괴원(槐院)076)  에서 뽑아버리는 일은 정계(停啓)077)  하였다. 임금이 오수원에 대한 계청(啓請)을 따르지 않으므로 쟁집(爭執)한 지 오래 되었는데, 장령(掌令) 권엽(權熀)이 드디어 멈추니, 물의가 비난하였다.

 

2월 12일 계유

토성(土星)이 태미 동원(太微東垣) 안으로 들어갔다.

 

도목정(都目政)078)  을 행하였다. 홍치중(洪致中)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가 끝나고서,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태채(趙泰采)가 문참하(文參下)079)  가 적체(積滯)되는 것이 염려스럽다 하여 제도(諸道)의 우관(郵官) 자리가 나는 대로 삼관(三館)080)  의 참하를 차출하여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14일 을해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이만성(李晩成)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삼았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지난번에 평안도 암행 어사(平安道暗行御史) 여필희(呂必禧)의 서계(書啓)를 보건대, 평남 만호(平南萬戶) 이춘원(李春源)은 토졸(土卒)을 어루만지고 돌보아 그 직무를 잘 거행하므로 군민(軍民)이 심복하여 받드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온다 하였으니, 마음에 늘 아름답게 여긴다. 대개 전주(殿柱)에 이름을 쓰려는 뜻이니, 동전(東銓)081)  으로 하여금 수령(守令)으로 비의(備擬)하게 하라."
하니, 이조에서 강동 현감(江東縣監)으로 의망(擬望)하여 제수(除授)하였다.

 

장령(掌令) 안중필(安重弼)이 길에서 향축(香祝)을 만났으나 회피(回避)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인피(引避)하여 체직되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안중필은 여러 번 대간(臺諫)의 지위에 들어갔으나 논열(論列)하는 것이 없고 일을 당하면 교묘히 피하였다. 향축을 가져가는 말이 가는 길을 범하였다 하여 인피하여 체직된 것이 전후에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이때는 또 사류(士流)의 형세가 위태롭고 대각(臺閣)에 일이 많은 때를 당하였으므로, 비웃는 사람이 많았다."


【태백산사고본】 65책 57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70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안중필은 여러 번 대간(臺諫)의 지위에 들어갔으나 논열(論列)하는 것이 없고 일을 당하면 교묘히 피하였다. 향축을 가져가는 말이 가는 길을 범하였다 하여 인피하여 체직된 것이 전후에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이때는 또 사류(士流)의 형세가 위태롭고 대각(臺閣)에 일이 많은 때를 당하였으므로, 비웃는 사람이 많았다."

 

2월 15일 병자

오시(午時)·미시(未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신사철(申思喆)을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도목정은 늘 이틀 만에 끝나는데, 상후(上候)가 편찮아서 수응(酬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사흘에 나누어 행하였다.

 

2월 16일 정축

사시(巳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고, 햇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고 백홍 관일(白虹貫日)082)  하였다.

 

2월 18일 기묘

정원(政院)에서 백홍 관일(白虹貫日)한 이변 때문에 진계(陳戒)하여 더욱 더 수성(修省)083)  하고 성실을 보지(保持)하도록 힘쓰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을 내려 주었다.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가 백홍 관일(白虹貫日)한 이변 때문에 차자(箚子)를 올려 면직(免職)을 청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백홍 관일(白虹貫日)의 이변 때문에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고, 이어서 조상건(趙尙健)의 일을 논하기를,
"가만히 듣건대 연중(筵中)에서 성교(聖敎)가 매우 엄하여 어떤 놈이냐는 등의 말씀까지 하시어 그 질책하는 것이 종에 대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니, 예전에 이른바 근신(近臣)을 욕하지 않는다는 뜻에 어그러질까 염려됩니다."
하고, 끝에 말하기를,
"삼사(三司)의 소차(疏箚)를 머물러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조상건의 소(疏)는 선정(先正)을 모욕하는 데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았으니, 연교(筵敎)가 엄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어떤 놈이냐는 말은 나 역시도 잘못한 말인줄 스스로 안다. 아래 항목의 일은 헌신(憲臣)의 논의에 고집하는 바가 없지 않고, 경(卿)의 말도 이러하니, 윤허하겠다."
하였다.

 

2월 19일 경진

정언(正言) 박사익(朴師益)이 상소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가만히 생각하건대 병을 요양하는 방도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마는, 첫째로는 모름지기 심기(心氣)가 늘 화순(和順)하고 열락(悅樂)한 가운데에 있게 하여 어그러지거나 어지러워서 노여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가장 요체가 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무릇 기뻐할 만하고 노여워할 만한 일이 있으면 한결같이 사리에 맞추고 사사로운 뜻을 섞지 말며, 음식을 절제하고 기욕(嗜慾)을 막으며 기거(起居)를 알맞추고 말을 삼가서 앞으로 그 근신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하소서. 이제 전하께서 오랫동안 정섭(靜攝)하는 중에 계시므로 신이 감히 규례대로 강석(講席)을 베풀기를 청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마음을 수양하고 병을 요양하는 데에 유익한 옛글을 앞에 나아가 강설(講說)하게 하고 베개에 기대어 들으시되 예모(禮貌)를 생략하고 앉고 눕기를 뜻대로 하신다면 성궁(聖躬)084)  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반드시 묵은 뿌리나 썩은 풀보다 낫지 않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삼가 전일 대간(臺諫)에게 비답(批答)하신 것을 보건대, 특별히 무인년085)  의 하교(下敎)를 들어 국시가 이미 정하여졌다고 분부하셨으나, 신은 저윽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저 부자(父子)의 윤리가 본디 막중하고 막대하나, 스승과 제자의 의리 또한 어찌 팽개쳐 울타리가의 물건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국론(國論)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은 오직 공정하고 옳은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이니, 임금이라 하여 펴는 것이 아니며 필부(匹夫)라 하여 굽히는 것도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비(聖批) 가운데에서 ‘국시 이정(國是已定)’이란 넉 자를 거두어 사문(斯文)086)  을 다행하게 하소서."
하고, 끝에 말하기를,
"권상하(權尙夏)는 사문의 유로(遺老)로서 일세(一世)의 모범이 되는데, 한 가지 일이 뜻에 거슬리자 드디어 싫어하는 뜻을 나타내셨으니, 이것은 성덕(聖德)에 누를 끼치는 것이 작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홍문관(弘文館)에서 백홍 관일(白虹貫日)의 이변으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진계(陳戒)한 데 이르기를,
"성학(聖學)은 고명(高明)하나 존양(存養)이 지극하지 못하고 기질(氣質)은 한편으로는 좋으나 잘 다스리는 것이 순일(純一)하지 못하시니, 이 때문에 희노(喜怒)의 절도가 맞지 않아서 처분이 너무 급하고,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지 못하여 언로(言路)가 점점 막히며,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전일(專一)하지 못하여 세도(世道)가 더욱 무너집니다. 이 세 가지는 실로 근원이 하나인데, 다 전하의 근원 공부가 공정(公正)을 다하지 못하여 들쭉날쭉하고 중단되는 데서 말미암아 하자(瑕疵)가 점점 생기니, 이것이 어찌 두렵게 여겨 스스로 돌이킬 곳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비답(批答)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가 끝나고서,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일을 말한 것이 성심(聖心)에 마땅하지 않으면 크게 성색(聲色)에 나타내고 사지(辭旨)가 지나치다 하면서 유공도(柳公度)는 일찍이 원기(元氣)로 희노(喜怒)를 도운 적이 없다는 말을 인용하여 누누이 진계(陳戒)하고, 또 ‘전일 뽑은 선비를 진선(進善)이나 사업(司業) 등의 벼슬에 제수하고 경외(京外)의 쓸 만한 선비를 더 구하여 익위사(翊衞司) 등의 벼슬에 채우며, 정원(政院)에 머물러 둔 긴급하지 않은 공사(公事)는 효종(孝宗) 때 무술년087)   편찮으시던 때의 전례를 본떠 10건(件) 또는 20건씩 봉하여 차례로 입계(入啓)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2월 20일 신사

이진유(李眞儒)를 부교리로 삼았다.

 

2월 21일 임오

이병상(李秉常)을 교리(校理)로, 정찬선(鄭纘先)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이병상은 바야흐로 용강(龍崗)의 수령(守令)이고 정찬선은 바야흐로 태천(泰川)의 수령이었는데, 자주 갈면 폐단이 있다 하여 곧 잉임(仍任)하라고 명하였다.

 

2월 22일 계미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태채(趙泰采)가 상차(上箚)하여, 옥당(玉堂)088)  에 의망(擬望)할 만한 사람은 서울에 있는 자가 없다 하여 태인 현감(泰仁縣監) 홍계적(洪啓迪)·북평사(北評事) 홍석보(洪錫輔)를 아울러 관직(館職)에 의망하기를 청하였다. 대개 두 사람은 다 아직 부임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드디어 홍계적을 부교리(副校理)로, 홍석보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교리(校理) 이진유(李眞儒)가 상소(上疏)하기를,
"아! 대현(大賢)이 죽자 변괴가 백출(百出)합니다. 귀역(鬼蜮)의 무리가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 등의 바른 사람을 해치는 말을 본받아 기술하고 전후로 낯을 바꾸며 그지없이 헐뜯어 욕하는데, 다행히 성명(聖明)께서 큰 모함을 분명히 가리셨으니, 무릇 사림(士林)에 있는 자라면 누구인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다만 처분이 아직 미진함이 있습니다. 대저 권상하의 후서(後序)의 글은 선정(先正)을 근거 없이 헐뜯은 것이 정호보다 갑절이나 더한데, 정호의 발문(跋文)은 뽑아 버렸으나, 권상하의 글은 아직도 권수(卷首)에 실려 있으니, 또한 마땅히 판본(板本)에서 뽑아 버리고 이어 헐어 깨뜨려야 합니다. 《가례원류(家禮源流)》를 두 신하가 함께 엮은 것은 명백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데, 유상기(兪相基)는 반드시 스스로 제멋대로 도맡아서 몰래 상신(相臣)에게 부탁하여 거짓으로 천청(天聽)에 아뢰고 세리(勢利)에 분주하여 40년 동안 교육한 은혜를 저버렸으니, 이러한 사람은 그 죄를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윤지술(尹志述)·박광세(朴光世)의 윤의(倫義)에 어긋난 말은 근년의 곽경두(郭景斗)에 비할 바가 아닌데도 처분이 전과 달랐고, 윤봉오(尹鳳五) 등이 생각하는 바를 써서 바친 것은 버젓이 모욕한 것인데도 죄벌을 주지 않았으니, 신(臣)은 저윽이 개탄합니다.
아! 선정의 도덕은 일세에 표준이 되고 성상께서 예우하시는 것은 천고(千古)에 빛나는 법인데, 저 하찮은 조상건(趙尙健)만은 감히 상소하여 능욕하여 그 패악(悖惡)함이 극에 달하였으니, 전하를 위한 언책(言責)의 직임을 받은 자라면 죄주기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어야만 할 것인데, 관작(官爵)을 삭탈하여 문밖으로 내친 가벼운 벌도 오히려 거두기를 청하여 양사(兩司)가 말을 같이하니, 그 또한 무엄합니다. 전후에 바른 사람을 헐뜯은 무리를 모두 귀양보내지 않는다면 신은 아마도 사림(士林)의 화(禍)가 이르지 않는 데가 없을 듯하여 염려됩니다. 저번에 약원(藥院)089)  에서 일이 《가례원류》에 관계되는 소장(疏章)은 상후(上候)가 회복되실 동안 받아들이지 말 것을 탑전(榻前)에서 품정(稟定)한 것은, 대개 그때 선정의 문생(門生)과 사림의 변명하는 소가 궐하(闕下)에 와 쌓여 있고 권상하의 소도 이미 정원에 당도해 있으니 두 소가 함께 들어가면 피차의 시비가 성감(聖鑑)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유소(儒疏)가 상달되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며, 그 취사(取舍)한 자취를 엄폐하려고 권상하의 소도 같은 예로 우선 멈추었습니다. 그 상소하는 일이 저지당하여 실패한 뒤에 조상경(趙尙絅)의 소가 나오고 권상하의 소가 들어갔는데, 그 표리(表裏)로 배포(排布)한 정상을 전하께서는 오히려 통촉하지 못하여 전날 연중(筵中)에서 일체 막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아! 사론(士論)은 나라의 원기(元氣)이니, 원기가 떨치지 못하면 나라는 멸망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成命)을 빨리 거두소서. 그리고 통탄스러운 것은, 조태채(趙泰采)가 한 사람의 몸으로 보호하는 지위에 있어 출납하는 권세를 침범하고 전형(銓衡)하는 직임에 있어 고색(錮塞)하는 권세를 잡아, 삼사(三司)로 하여금 말할 만한 사람이 없게 하며 이장(弛張)하고 신축(伸縮)하는 것이 그 손아귀에 있으니, 조정(朝廷)을 어지럽힌다 하여도 될 것입니다. 이정익(李挺翊)이 좌죄(坐罪)된 것은 지극히 중대하므로 공론에 배척받는데 감히 권강(勸講)하는 직임에 의망(擬望)하였으니, 이것도 매우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전날 이돈(李墩)의 아내가 당직 상언(當直上言)090)  한 것은 실로 지아비를 위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므로 유사(有司)에 맡겨 조용히 처분했어야 할 것인데, 본디 신원(伸冤)할 만한 것이 없다는 등으로까지 분부하여 문득 판부(判付)를 내려셨습니다.
아! 진심으로 애소(哀訴)하는 정상이 가엾고 더구나 그 아뢴 바는 다 당연히 물어야 할 일인데, 어찌하여 일체 버려둡니까? 고관(考官)을 함문(緘問)하면 서로 차이가 없이 같아야 할 것인데, 이돈이 합고(合考)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는 자가 많긴 하나 혹 합고에 참여하였다고 증언하기도 하고 흐릿하게 말하기도 하니, 피차 가운데에 반드시 임금을 속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의 사상(事狀)을 확실히 아는 자로서는 주시(主試)한 대신(大臣)보다 나은 자가 없는데, 이미 감처(勘處)하였다는 핑계로 끝내 별도로 아뢰지 않으니, 신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약원에서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학문에 유심(留心)한 자에게는 조금이라도 진작시킬 방도가 없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뽑은 선비를 진선(進善) 등의 벼슬에 제수하기를 청하고, 향학(向學)하는 자도 위사(衞司)의 참하(參下)에 의차(擬差)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진작하는 방도는 반드시 옛날 성왕(聖王)이 몸소 행하여 깊이 체득한 것과 같이 한 뒤에야 절로 역복(棫樸)의 교화091)  에 이를 것인데, 이제 대신이 다만 등급을 나누어 제수하는 것으로 진작시키는 계제를 삼기를 바라니, 지금의 선비가 참으로 자애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누가 기꺼이 마음에 달갑게 여기며 무릅쓰고 나아가 수치를 모르려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소가 들어갔으나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고 이튿날 아침에 패초(牌招)하라고 명하였다. 약원 제조(藥院提調) 이이명·조태채가 이진유의 소로 인하여 입직(入直) 중에 흩어져 나갔다.

 

2월 23일 갑신

임금이 교리(校理) 이진유(李眞儒)를 소견(召見)하였다. 이진유에게 말하기를,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序文)이 침범하여 배척한 것은 발문(跋文)보다 심하므로 그대로 두는 것이 미안하기 때문에 대내(大內)에서 이미 뽑아내어 불살랐으니, 판(板)을 부수지는 않았으나 내 뜻은 이미 정하여진 셈이다. 유상기(兪相基)의 일은 매우 놀라우니 그 정상을 대략 아뢰도록 하라."
하니, 이진유가 말하기를,
"유상기는 선정(先正)이 40년 동안 교육한 사람이어서 의리가 부자와 같으니, 다른 사제(師弟)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양조(兩祖)가 함께 엮은 글을 개간(開刊)하려면 당연히 선정에게 여쭈어야 할 것인데, 그가 상경하였을 때에 선정을 뵈러 들렀으나 끝내 이 일을 제기하여 언급하지 않은 채 몰래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에게 부탁하여 개간을 아뢰게 하고는 돌아오는 길에 선정을 보자 비로소 말하였으며, 선정이 그 연중(筵中)에서 한 말을 물었더니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뒤 사서(私書)로 왕복할 적에 윤증(尹拯)은 함께 엮었다 하는데 유상기는 혼자 엮었다 하며 패악(悖惡)한 말로 윤증과 그 아버지인 선정신(先正臣) 윤선거(尹宣擧)를 침욕(侵辱)하는 것이 끝이 없어서 드디어 서로 끊게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권상하(權尙夏)의 소(疏) 가운데에 있는 《가례집해(家禮集解)》라는 말에도 곡절이 있습니다. 선정신 윤선거 부자와 고(故) 상신(相臣) 송시열(宋時烈)·선정신 송준길(宋浚吉)·고(故) 진선(進善) 정양(鄭瀁)이 호중(湖中)의 둔암 서원(遯巖書院)에 모여 《가례원류》의 일을 언급하였을 때에 윤선거가 원류라 이름붙이려 한다 하니 송시열이 집해(集解)라 이름붙일 만하다 하였는데, 그 뒤 정양이 베껴 낼 때에는 유계(兪棨)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제 《가례집해》는 곧 《가례원류》이고 《가례원류》는 곧 《가례집해》이니, 《가례집해》라 이름붙였다가 뒤에 《가례원류》라 고쳤다면 유상기의 집에 반드시 《가례집해》의 구본(舊本)이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정양의 집에만 있습니까? 유상기의 일은 매우 요악(妖惡)하니, 반드시 엄히 배척한 뒤에야 세도(世道)의 해독을 조금은 떨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박광세(朴光世)·윤지술(尹志述) 등의 상소는 헐뜯은 데에 끝이 없으니, 왕년의 곽경두(郭景斗)의 일처럼 귀양 보내는 율(律)을 시행하였다면 바른 사람을 해치는 말이 어찌 이처럼 잇따라서 일어났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상기의 정상은 몹시 통탄스러우니, 멀리 정배(定配)하는 것이 옳다. 조상경(趙尙絅)이 유현(儒賢)의 소는 다른 소와 다르다고 말하므로 그 소를 들이게 하여 비답을 내렸는데, 권상하가 상소한 뒤에 어지러이 잇따라 일어나 짓밟고 능멸하니, 이제는 조상경의 술수 가운데에 떨어진 것을 크게 깨달았다. 조상건(趙尙健)의 상소 또한 어찌 혼자서 하였겠는가? 반드시 사주한 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진유가 말하기를,
"권상하의 소에 인심이 어두워진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이 있다는 성교(聖敎)가 이미 있었으니,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라면 어찌 감히 인심이 어둡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館)을 비웠을 때에 유생(儒生) 윤봉오(尹鳳五)가 버젓이 모욕한 것을 놓아둘 수 없으니, 정거(停擧)092)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또 유생의 소 가운데에 있는 말을 두루 들어 묻자 이진유가 소의 뜻을 풀이하여 대답하니, 임금이 부드러운 낯빛으로 응답하고 대략 다 받아들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심하도다, 참설(讒說)이 남의 나라를 해치는 것이. 이번에 이진유가 상소하여 아뢰고 연대(筵對)한 까닭은 모두가 간사한 자에게 편들어 바른 사람을 헐뜯으려는 뜻에서 나왔으니, 현혹하고 시험하여 보는 꼴은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것이 있고, 인심이 어둡다는 구절로 말하면 넌지시 임금을 헐뜯은 죄로 돌려서 사류(士類)를 죽이려는 계책을 부리려는 것이었다. 다행히 임금의 관인(寬仁)에 힘입어 사림(士林)이 피를 흘리는 것을 면할 수 있었으나, 그 꾀한 것은 교묘하였다. 《서경(書經)》에 ‘참설을 막는다.’ 한 것을 임금으로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5책 57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71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출판-서책(書冊) / 사상-유학(儒學)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註 092] 정거(停擧) :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벌. 조상(祖上)의 허물이 있거나 본인의 부정(不正)이 있을 때 유생(儒生)에게 내리던 벌임.
사신(史臣)은 말한다. "심하도다, 참설(讒說)이 남의 나라를 해치는 것이. 이번에 이진유가 상소하여 아뢰고 연대(筵對)한 까닭은 모두가 간사한 자에게 편들어 바른 사람을 헐뜯으려는 뜻에서 나왔으니, 현혹하고 시험하여 보는 꼴은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것이 있고, 인심이 어둡다는 구절로 말하면 넌지시 임금을 헐뜯은 죄로 돌려서 사류(士類)를 죽이려는 계책을 부리려는 것이었다. 다행히 임금의 관인(寬仁)에 힘입어 사림(士林)이 피를 흘리는 것을 면할 수 있었으나, 그 꾀한 것은 교묘하였다. 《서경(書經)》에 ‘참설을 막는다.’ 한 것을 임금으로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월 24일 을유

약방 제조(藥房提調) 조태채(趙泰采)가 날마다 잇따라 소명(召命)을 어기고 금오(金吾)에서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면직(免職)을 청하니, 임금이 관례에 따라 비답(批答)을 내리고 별도로 위로하고 권면하는 뜻은 없었다.

 

2월 25일 병술

임금이 유상기(兪相基)의 정배 단자(定配單子)를 들여오도록 재촉하여 드디어 나주(羅州)로 귀양보냈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조태채(趙泰采)가 소명(召命)을 세 번 어기니, 임금이 유신(儒臣)의 말은 이미 지나친 줄 아나 한결같이 강박(强迫)하는 것도 예대(禮待)하여 일시키는 도리에 어그러진다 하여 우선 개차(改差)하도록 명하였다.

 

지평(持平) 김취로(金取魯)가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대사헌(大司憲) 권상하(權尙夏)는 당세(當世)의 유종(儒宗)으로서 성상의 예우(禮遇)를 받았습니다.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序文)은 오로지 사도(師道)를 밝히고 세교(世敎)를 붙들려는 뜻에서 나왔는데, 전하께서 본말(本末)을 구명하지 않고 미워하여 냉대하는 뜻을 보이시니, 사림(士林)이 억울해 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에 교리(校理) 이진유(李眞儒)가 성의(聖意)를 엿보아 헤아려서 불쑥 한 소(疏)를 바쳐 감히 서문을 빼어 버리고 판본(板本)을 파기하기를 청하였는데, 전석(前席)에서 아뢴 말은 더욱 패만(悖慢)하며 바른 사람을 헐뜯는 꼴과 화(禍)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마음은 차마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이진유가 유종에 대하여 평소에 선원(先怨)이 있어서 때를 타서 틈을 노려 치면서 마음껏 독을 뿜은 것입니다. 바른 것을 붙드는 공론을 배척하는 데에 있어서는 내종(內從)인 지친(至親)이라도 돌보지 않고 모두 귀양보내기를 청하고, 【그의 내종 아우인 홍석보(洪錫輔)가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차자를 올려 정론을 지켰다.】  이미 감정(勘定)한 과옥(科獄)을 논하는 데에 있어서는 동기(同氣)의 아주 가까운 사이임을 돌보지 않고 마음껏 신구(伸救)하여 해명하려 하였습니다.【이진유의 아우인 이진급(李眞伋)이   임진년093) 의 방목(榜目)에 들었다가 시한(時限)이 지나서 시권(試券)을 낸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방목에서 제거되었다.】  그 사감(私憾)을 품고 유현(儒賢)을 근거 없이 모욕한 죄만도 이미 다 벌할 수 없는데다가 친의(親誼)를 없애고 사혐(私嫌)을 무릅쓴 것은 실로 세상의 이변에 관계되고 나라의 기강에 크게 관계되니, 청컨대 이진유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문밖으로 내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이진유의 일에 답하기를,
"오로지 이기려고 힘쓰는 데에서 나왔으니, 참으로 놀랍다."
하였다. 대개 이진유의 할아버지인 고(故) 판서(判書) 이정영(李正英)이 관서백(關西伯)094)  이었을 때에 청렴하지 못하다는 꾸짖음이 자못 있었으니 돌아와 아전(亞銓)095)  에 제배(除拜)되자 물의가 놀라와하였는데, 권상하의 아버지인 고(故) 집의(執義) 권격(權格)이 탄핵하여 체직되었다. 아뢴 말 가운데에 이른바 ‘선원(先怨)’이라는 것은 이 일을 가리킨 것이다. 김취로는 이미 엄한 분부를 받고 인피(引避)하여 퇴대(退待)하였다가 뒤에 장령(掌令) 황이장(黃爾章)에게 논박받아서 체직되었다.

 

헌납(獻納)        신정하(申靖夏)가 상소(上疏)하기를,
"이진유(李眞儒)가 공론을 저버리고 사당(私黨)에 죽을 힘을 다하는 것은 그 본래의 기량(伎倆)이 분한(憤恨)을 품었다가 때를 타서 불쑥 드러낸 것이므로, 그 말이 윤기(倫紀)가 없음은 본디 꾸짖을 것도 못됩니다마는, 애석한 것은 전하의 거조(擧措)입니다. 《가례원류(家禮源流)》의 한 가지 일에는 주객(主客)이 가려질 만한 것이 분명히 있으니, 유상기(兪相基)가 바쳐 을람(乙覽)096)                  을 거쳐서 그 할아비가 엮고 다듬은 사실을 밝히려 한 것이 어째서 큰 죄이겠습니까마는, 이진유가 원수처럼 미워하고 원망하여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갚듯이 마음껏 갚고야 말려고 해서 그 죄를 꾸민 것이 거의 다 말이 되지 않는데, 전하께서는 그 말을 믿고 곧바로 유배(流配)하는 율(律)을 가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일찍이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이 있다고 분부하여 유상(儒相)의 처지를 편드셨는데, 이제 유상기는 그 할아비를 위하다가 죄받았으니, 어찌 매우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윤봉오(尹鳳五)는 자신이 반유(泮儒)097)                  로서, 바른 사람을 헐뜯는 버릇을 눈으로 보고 유벌(儒罰)을 준 것은 선정(先正)을 위하고 유현(儒賢)을 위한 까닭인데, 문득 엄한 분부를 받고 생각하는 바를 써서 바쳤으니, 시비를 변명하는 것은 그만두지 못할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이진유는 도리어 바른 사람을 헐뜯었다고 지목하여 죄주기를 청하기까지 하고, 전하께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문득 특별히 정거(停擧)하라고 명하셨으므로 보고 듣는 이마다 사기(士氣)가 꺾이니, 이것이 어찌 윤봉오의 불행이겠습니까? 참으로 사문(斯文)의 큰 재앙이라 하겠습니다. 유현의 글은 사체(事體)가 본디 다르거늘 이진유가 감히 깨뜨려 버리기를 청하여 사실을 없애려 한 것만도 이미 매우 방자한데, 전하께서는 또 이미 이진유의 말에 앞서 손수 불사르셨습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그 글을 보존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마땅히 곧 여러 공조(公朝)에 내어서 빼어 버려서 세상에서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를 환히 알게 하셔야 할 것인데, 대내(大內)에서 불살라 버려 애초에 외정(外庭)에서 알지 못하게 하셨으니, 어찌 광명한 도리에 어그러지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와 간원(諫院)의 소(疏)에 대한 비답(批答)에서 ‘미워하여 냉대한다는 말은 또한 지나치지 않으냐?’는 분부가 계셨는데, 이번 이진유의 소는 방자하게 헐뜯고 짓밟으며 근거 없이 욕하기에 더 여지가 없이 하였는데도 전하께서는 일찍이 한 마디 꾸중이 없으셨고, 심지어 그 말을 배척하고 그 글을 불사르시고도 거조가 전도된 줄 깨닫지 못하시니, 이러하고도 하물며 미워하여 냉대하는 데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臣)은 여기에서 전하의 말씀이 성실하지 않으며 부추기고 억누르는 것이 매우 치우치신 것을 저윽이 한탄합니다.
정호(鄭澔)·조상건(趙尙健)이 전후하여 죄받은 것에 있어서도 그 죄 때문이 아니니, 삼사(三司)에 있는 자로서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으신 것은 이미 널리 받아들이는 덕에 부족함이 있음인데, 이진유는 오히려 너그러이 용납하셨다고 전하를 허물하여 곧바로 귀양보내는 벌을 청하고 경인년098)                   같은 큰 진퇴까지 전하에게 바랐으니, 그 또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약원(藥院)에서 전후에 소장(疏章)을 받아들이지 말기를 청한 것은 본디 미처 두루 생각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지만 자신이 보호하는 지위에 있으므로 정섭(靜攝)에 방해될까 염려한 것이니, 오로지 신하의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지 어찌 협잡했다고 말할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억지로 배포(排布)하고 경영(經營)한다는 따위 말을 씌우니, 사람의 말로서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근래 경탈(傾奪)할 즈음에는 반드시 먼저 정조(政曹)099)                  를 공격하는 것이 이미 고질적인 습성이 되어서 조금이라도 자애(自愛)할 줄 아는 자는 자신이 그 일을 맡으려 하지 않는데, 이진유가 이제 앞장서서 담당하여 돌아보아 꺼리는 것이 없고 〈조정을〉 흐리고 어지럽힌다는 따위의 말로 뚜렷이 지목하여 마구 욕하며 반드시 공격하여 제거하고야 말려 하니, 또한 그 마음쓰는 것이 아름답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돈(李墩)을 위하여 신구(伸救)하여 변명한 데 이르러서는 더욱 무엄하고, 그 아우인 이진급(李眞伋)은 임진년100)                  의 방목(榜目)101)                  에서 삭제된 사람인데도 이제 이진유가 그 혐의를 돌아보지 않고 버젓하게 증언하니, 또한 매우 방자하다 하겠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엄하게 견벌(譴罰)하여 그 죄를 징계하고, 유상기를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과 유봉오를 정거하라는 명을 빨리 거두신 연후에 바야흐로 호오(好惡)를 공정하게 하고 시비를 명백하게 하여야 마침내 성덕(聖德)에 누를 끼치는 데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엄한 비답으로 매우 꾸짖었다.

 

2월 26일 정해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임진년에 주시(主試)한 일 때문에 이진유(李眞儒)에게 배척당하였으므로 차자(箚子)를 올려 인책하고 또 말하기를,
"신에게는 저윽이 슬픈 일이 있습니다. 대저 사문(斯文)에 변이 일어났던 처음에 선신(先臣)과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실로 관여된 바가 있었으나, 무인년102)  에 하교(下敎)하신 뒤에 신(臣)은 감히 이 논의에 참섭(參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고 의리가 날로 어두워지며 성상의 처분도 알맞지 못한 것을 생각하니, 신이 여기에 대하여 삼가 구구한 사의(私義)를 지켜서 성명(聖明) 아래에서 스스로 벗어난다면 신은 선인(先人)의 사당에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어떻게 백세(百世)의 공론에 사죄하겠습니까?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윤선거(尹宣擧)의 묘문(墓文)에 칭찬한 것은 있으나 욕설한 것은 한마디도 없으니, 그 글이 아직도 있으므로 가져다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묘문을 받은 뒤 10여 년 동안 함장(函丈)103)  과 문인(門人)이라고 칭하는 것이 평일과 한결같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글을 보내어 그 심술(心術)을 배척하고 이로써 저버리고 끊었으니, 이것이 사림(士林)이 깊이 의심하는 까닭입니다. 아버지와 스승과 임금을 한결같이 섬기는 것은 《예경(禮經)》에 뚜렷이 실려 있고, 옛 성현(聖賢)을 따르건대, 경중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경중의 차이가 없다면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의리는 끊을 수 없을 것이고, 혹 경중이 있어서 끊을 수 있다 하더라도 당초에 욕설한 것이 없으면 또한 핑계할 만한 말이 없을 것이며, 비록 마지못할 일이 있어서 서로 끊더라도 글로 분명히 말하여 절교를 고하면 오히려 곧바로 끊는 데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에 윤증(尹拯)은 하나도 맞지 않으니, 이렇게 하고서도 어찌 스승을 저버렸다는 지목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아! 생각하건대 우리 효종(孝宗)과 선왕께서 송시열에 대하여 존사(尊師)하신 것이 어떠하였으며, 전하께서 예우(禮遇)하신 것도 어찌 일찍이 윤증을 대우하신 것보다 못하였단 말입니까? 설령 윤증의 처의(處義)에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선정(先正)이 내팽겨쳐질 만한 사람이 될 수는 없으며, 설령 선정이 과연 묘문에 욕설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한낱 윤증에게 죄진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미 효종과 선왕과 전하에게 죄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일찍이 세 조정(朝廷)의 존사를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으로 대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이 능멸하고 짓밟도록 맡겨 두시고, 도리어 한때 예우하였다는 이유로 의리를 잃은 사람에게만 유독 후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갑자년104)  에 두 대신(大臣)이 아뢴 말을 나는 옳다고 여기지 않아서 쓰지 않은 것인데, 이제 말하는 자는 정론(定論)이라 하니, 참으로 놀랍고 의아하거니와, 경의 차사(箚辭)를 보건대, 헐뜯는 논의에 편들어 파란을 조장하면서 한 마디 한 마디가 더하여 가니, 내가 참으로 슬프다."
하였다. 김창집이 드디어 불안하여 성밖으로 나갔다.

 

대사간(大司諫) 이만견(李晩堅)이 상소(上疏)하여 이진유(李眞儒)가 성총(聖聰)을 속이고 유현(儒賢)을 헐뜯었으며 사림(士林)에게 화(禍)를 떠넘기고 선류(善類)를 무함한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니, 임금이 엄한 분부를 내려 매우 꾸짖었다. 이만견이 드디어 인피(引避)하여 퇴대(退待)한 뒤에 장령(掌令) 황이장(黃爾章)에게 논박당하여 체직되었다.

 

2월 27일 무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세 번째 차자(箚子)를 올려 면직(免職)을 청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비답(批答)하여 위유(慰諭)하고 단지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의 직임만을 갈도록 허락하였다. 이조(吏曹)에 행공(行公)하는 당상(堂上)이 없어서 갈음할 사람을 차출하지 못하므로, 임금이 전의 망단자(望單子)를 들여오라고 명하여, 서종태(徐宗泰)를 도제조(都提調)로, 최석항(崔錫恒)을 제조(提調)로 삼았다.

 

2월 28일 기축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여(李畬)가 차자(箚子)를 올렸다. 대략 이르기를,
"가만히 생각하건대 스승은 사람마다 다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경중(輕重)·심천(深淺)의 구별이 없지 않으므로 옛 성인이 오륜(五倫)으로 논하였습니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가 함께 하지 않았으나 이미 스승과 제자로 정하여지고 또 도의(道義)로써 서로 전하였다면 그 은혜와 그 의리는 나를 생육한 것과 같으니, 이것이 세 사람에게서 생육되어 한결같이 섬긴다는 가르침이 있는 까닭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말하면, 아버지·아들 사이와 스승·제자 사이에 경중의 구분이 있다는 것은 신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아버지와 아들 사이야 본디 중하거니와 스승과 제자 사이도 어찌 가볍게 끊을 수 있겠습니까? 혹 불행히 아버지·아들과 스승·제자 사이에 둘 다 보전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본디 당연히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앞세우고 스승과 제자 사이를 미루어야 하겠으나, 그 처치하는 방법에도 도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승에게 참으로 과실이 있다고 핑계하여 창을 들고 반격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데, 더구나 그 과실이 반드시 스승에게 있지도 않은 것이겠습니까? 옛 군자는 절교하면서 나쁜 말을 내지 않았으니, 벗 사이에서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스승과 제자 사이이겠습니까? 이 의리는 명백하여 본디 알기 어렵지 않은데, 이제 성상께서는 고(故) 상신(相臣) 윤증(尹拯)의 처의(處義)에는 조금도 흠이 없는 듯이 여기시니, 이것이 인심이 승복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아! 스승과 제자가 끊는 일은 예전에는 없었으며, 혹 서로 끊게 되더라도 이는 피눈물을 머금고 명백히 자처(自處)하여야 할 것이고, 이미 끊은 뒤에는 다시는 감히 나쁜 말을 서로 하지 않고 종신토록 몹시 슬퍼하는 뜻을 잃지 않는다면 군자가 오히려 용서할 만한 도리가 있겠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만 유감이 있어도 문득 혐의를 만들어 겉으로는 스승과 제자의 모양을 지키고 속으로는 원망과 시기하는 마음을 품으며 겉으로는 존경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실로 서로 해치니, 이것이 범연히 교제하는 사이에서 행하여진다 하더라도 성인(聖人)은 오히려 부끄러운 것이라 하겠거니와, 일찍이 일생 동안 아버지처럼 섬긴 처지라 하면서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선정(先正)이 윤증에게서 원망받은 까닭은 그 아비 윤선거(尹宣擧)의 갈문(碣文) 때문이었습니다. 갈문이 아직 지어지기 전에는 윤증이 선정을 섬기는 것이 70 제자가 공자(孔子)를 따르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는데, 그 갈문을 짓게 되어서는 제 뜻에 차지 않자 선정을 헐뜯기를 다시 여지가 없을 정도로 하였습니다. 만약에 선정이 윤증의 뜻대로 모두 따라서 애초에 넘치는 말을 아끼지 않았더라면 윤증이 선정을 섬기는 것이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의리가 과연 이렇게 하고 말아야 마땅하겠습니까?
학문을 논한다는 핑계로 본원(本源)의 심술(心術)을 곧바로 공격하였는데, 학문을 논한다 하는 것은 공의(公義)이고 불평하는 것은 사사로운 뜻입니다. 수십 년 동안 함장(函丈)의 자리에서 강론(講論)한 것이 무슨 일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일찍이 이 일에 언급하지 않다가 어찌하여 정의(情義)가 이미 어그러진 뒤에야 비로소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스스로 공의라 하더라도 그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윤선거도 일세(一世)의 현사(賢士)이었으므로 본디 선정이 일찍이 친하게 사귀었는데, 그 강도(江都)의 일105)  은 이미 스스로 인책하였고, 또 차한 벗으로서 서로 권면하는 말에 대하여서는 받아들여서 허물로 여기고 스스로 엄폐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윤선거의 심사(心事)를 알 수 있으니, 숨길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윤휴(尹鑴)를 대유(大儒)로 알아 너무 지나치게 받들고 도리어 선정이 엄하게 배척하는 것을 허물로 삼았으며, 윤휴의 화(禍)를 일으키려는 마음이 죄다 드러난 것을 보고서도 옛정을 끝내 끊지 않았으므로, 선정이 늘 이 때문에 슬프고 안타깝게 여겨 마지않았습니다. 윤휴를 제사하고 고하는 글이 나오게 되어서는 그 당일을 기술한 말에 더욱이 선정의 의심을 가져올 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 갈문에 찬미(贊美)한 말이 지극하지 않은 것은 아니되 오히려 죄다 윤증의 뜻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윤증이 이 때문에 불평한 마음을 품어 문호(門戶)를 분열(分裂)하고 혈전(血戰)하여 이기려 하여서는 마침내 인심이 어지러워지고 세도(世道)가 무너지게 하였습니다. 윤휴의 무리가 득지(得志)하여 그 영욕(榮辱)·화복(禍福)이 눈앞에 분명하게 되었으니, 이러하여도 윤증이 오히려 마음에 편안할 수 있었겠습니까? 선정의 문인(門人)이 그 일을 눈으로 보고 마음에서 통탄하였으니, 윤증을 보는 것이 오히려 어떠하겠습니까? 옛사람은 작은 기술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도 오히려 ‘차마 부자(夫子)의 도(道)로 부자를 해칠 수 없다.’ 하였는데, 하물며 선비이겠습니까? 이는 비록 어버이를 위하는 데에서 말미암았다 하더라도, 과연 반드시 이렇게 하고서야 효도가 되겠습니까?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여 뭇 사리를 다 통촉하시므로 이 백성의 변치 않는 마음이 달려 있는 바와 세도(世道)가 근본하는 바도 마땅히 통촉하지 못하시는 것이 없을 것인데, 이것을 국시(國是)로 정하려고 하시니, 신은 국론이 오히려 정하여지기 어렵고 스승과 제자의 윤리가 장차 이로부터 해이하여질까 염려됩니다. 이것이 어찌 한때 세도를 해치고 말 뿐이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경(卿)의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늙어갈수록 더욱 도타와져서 혹 처분이 한편에 치우칠까 염려하여 조용히 개진하였는데, 의리가 명백하여 내가 매우 감탄하니, 유의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때 임금의 뜻이 바야흐로 사류(士類)를 꺼리므로 무릇 말하는 것이 있으면 으레 물리쳤으나, 유독 이여(李畬)의 차자(箚子)에 대하여서만은 특별히 아름답게 여겨 감탄하는 뜻을 보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어찌 그 말이 완곡하고 그 사리가 정밀하여 임금이 듣기에 거슬리지 않을 만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임금이 이미 알고도 끝내 기쁘게 생각하는 실효(實效)가 없었다. 이는 실로 세도(世道)에 관계되므로 인력(人力)이 알선(斡旋)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무어라 말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5책 57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73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윤리(倫理) / 사법-탄핵(彈劾)


[註 105] 강도(江都)의 일 : 윤선거(尹宣擧)가 17세 때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청국(淸國)의 사신을 목 베자고 상소(上疏)하여 척화(斥和)의 청명(淸名)을 얻었는데, 병자 호란(丙子胡亂) 때 강화(江華)에 들어가서 김익겸(金益兼)·권순장(權順長) 등과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김익겸·권순장 2인은 죽고 그의 처 이씨는 자결(自決)하였으나 윤선거는 성을 빠져나와 목숨을 부지한 일을 말함.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때 임금의 뜻이 바야흐로 사류(士類)를 꺼리므로 무릇 말하는 것이 있으면 으레 물리쳤으나, 유독 이여(李畬)의 차자(箚子)에 대하여서만은 특별히 아름답게 여겨 감탄하는 뜻을 보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어찌 그 말이 완곡하고 그 사리가 정밀하여 임금이 듣기에 거슬리지 않을 만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임금이 이미 알고도 끝내 기쁘게 생각하는 실효(實效)가 없었다. 이는 실로 세도(世道)에 관계되므로 인력(人力)이 알선(斡旋)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무어라 말하겠는가?"

 

대사성(大司成) 민진원(閔鎭遠)이 상소(上疏)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본관(本館)에 내려진 거행할 조건을 삼가 보건대, 유생(儒生) 윤봉오(尹鳳五)가 생각하는 바를 써서 바쳤을 때에 ‘선비에는 본디 진짜와 가짜가 있다’느니 ‘선정(先正)이라는 칭호는 가볍게 붙이지 말아야 한다’느니 하는 따위 말이 있어서 특별히 정거(停擧)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신은 절로 놀라와 생각을 잃었습니다. 성명(聖明)의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전하께서 윤증(尹拯)을 선정이라 이르시는 것은 대개 평소에 예우(禮愚)하셨기 때문인데, 윤증이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전하께서 송시열을 죄주시던 때에 윤증을 다시 임용하라고 명하시고 그대로 고치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정승에 제배(除拜)되게 되었으니, 그 예우의 본말은 이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 윤증이 참으로 능히 도(道)가 있고 덕(德)이 있는 것을 전하께서 확실히 알 수 있어서 그러하셨겠습니까?
아! 사람을 논하는 도리는 오직 그 큰 곳을 살펴볼 것이니, 사람으로서의 큰 윤리는 아버지와 스승에 대한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데 윤증의 스승에 대한 것은, 송시열을 40년 동안 섬기다가 묘문(墓文)의 한 가지 일에 유감을 품고서는 여러 해 동안 속으로 참으면서 겉으로는 스승과 제자의 예(禮)를 행하되 사사로이 남에게 글을 보내어 헐뜯었으며, 유계(兪棨)를 20년 동안 섬겼으면서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엮은 공을 오로지 제 아비에게 돌리고 싶어서 임종시에 부탁한 말을 모른다고 핑계하였습니다. 제 아비에 대하여서는, 넘치게 칭찬하는 글을 얻으려다 끝내는 어진 스승을 저버리기까지 하여 도리어 제 아비의 평소의 흠이 여지없이 드러나게 하였고, 또 제 아비의 강도(江都)의 일을 죽어야 할 만한 의리는 없다 하여 종신토록 재혼하지 않고 벼슬하지 않으며 스스로 원망하고 스스로 징계한 아름다운 뜻이 이 때문에 다 허투(虛套)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옛사람의 어버이를 속이는 일에 대한 가르침으로 단속한다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대륜(大倫)이 이러하니 나머지야 볼 것도 없습니다.
신은 윤증이 어떤 글을 써서 예전의 성인(聖人)이 미처 나타내지 못한 것을 주워 모았는지, 어떤 말을 내세워 일세(一世)의 명교(名敎)를 부조(扶助)했는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함부로 ‘선정(先正)’이란 칭호를 가하시면서 그렇게 된 까닭은 말씀하시지 않으십니까? 유생들이 이른바 ‘선정’이란 마땅히 가볍게 가해서는 안되고 선비란 저절로 진짜와 가짜가 있다는 등을 말한 것은 단지 지극히 올바르고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이유가 정당하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니, 신은 감히 이것이 무슨 죄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큰 뜻을 떨쳐 일으켜 뭇 어진 사람들을 불러 들이셨는데 송시열이 물고기와 물처럼 가장 친밀한 대우를 받았으며, 당시 청의(淸議)가 매우 왕성하여 그릇된 세속의 일파는 흔히 사론(士論)에 배척당했으므로 원한을 품고 옆에서 엿본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나 특히 효종·현종(顯宗) 두 조정에서 대우가 매우 도타왔으므로 두려워서 감히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뭇 간사한 자들이 득지(得志)하여 송시열을 섬에 잡아 가두었는데, 경신년106)  의 개기(改紀)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송시열을 예우(禮遇)하셨으나, 그 존신(尊信)하고 의중(倚重)하시는 것이 참으로 선조(先朝)에서 하신 것과 같은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윤증이 사감(私憾)을 품고 맨 먼저 헐뜯자 전에 옆에서 엿보되 감히 일어나지 못하던 자들이 떼 지어 일어나 합세하여 한 편을 이루어서 무리가 번성하고 기세를 떨치니, 시세가 여러 번 바뀌고 변괴가 갖가지로 일어나서 의리가 어둡고 시비가 어지러운 것이 오늘날과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대저 윤증이 송시열을 헐뜯을 때에 의(義)와 이(利)를 병행하고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병용하였다는 따위의 말로 곧바로 그 심술을 배척하였으니, 송시열이 참으로 심술에 흠이 있어 윤증의 말이 옳다면 송시열은 유현(儒賢)이 아닐 것이고, 그렇지 않고 윤증의 말이 유감을 부려 헐뜯는 데에서 나왔다면 윤증은 유현을 무함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쪽이 바르면 저쪽이 그릇되고 저쪽이 바르면 이쪽이 그릇된 것이니, 향내 나는 풀과 누린내 나는 풀이나 얼음과 숯을 한 그릇에 담을 수 없는 것과 같은데, 전하께서 이토록 윤증을 존상(尊尙)하고 윤증을 예우하시는 것은 곧 송시열을 배척하시기 때문입니다. 송시열이 기해년107)  에 독대(獨對)108)  한 이야기는 이미 예람(睿覽)하셨거니와, 그 밀물(密勿)109)  한 대모(大謀)가 꼭 들어맞고 분명하니, 실로 이는 제갈양(諸葛亮) 이후의 단 한 사람입니다, 효종께서는 명철하신데 어찌 의와 이를 병행하는 사람과 함께 대업(大業)을 꾀하여 이렇게까지 긴밀히 부탁하셨겠습니까?
우러러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천자(天資)가 영예(英睿)하고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시므로 이처럼 가리기 쉬운 시비를 어찌 마음에서 분명히 아시지 못하시겠습니까마는, 특히 전하께서 평소에 원만한 것을 좋아하고 모난 것을 싫어하시며 무사(無事)한 것을 좋아하고 번거롭고 소란한 것을 싫어하셨는데, 송시열의 평생의 지론(持論)이 엄준(嚴峻)하고 그의 전후(前後)의 장소(章疏)가 바른 말을 하는 데 꺼리는 게 없으므로 전하께서 본디 이미 마음에 좋게 여기지 않으시다가, 윤증의 일이 있고부터는 송시열의 문인과 중외(中外)의 유생(儒生)이 상소하여 변명하는 것이 관가에 잇따르므로 전하께서 또 그 번거롭고 소란한 것을 싫어하신 것입니다. 송시열이 죽은 뒤로 사습(士習)이 날로 더욱 쇠퇴하여 곧바로 결단하는 기풍(氣風)은 이미 쇠하여지고 눈치 보는 기풍(氣風)만 점점 성하여졌는데, 무인년110)  에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이 있다는 분부를 내리고 경인년111)  에는 크게 내치고 쓰지 아니하는 벌을 행하시자 사람들이 다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송시열을 위하여 말을 다하고 논(論)을 다하여 신구(伸救)하여 밝히는 자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에 무사(無事)한 것을 기뻐하면서 이제는 시끄러운 것을 진압하는 묘책을 얻었다고 생각하셨겠으나, 이때부터 세도(世道)는 차차 쇠퇴하고 사설(邪說)이 멋대로 행하여져 드디어 윤상(倫常)을 마치 한번 쓰고 버릴 물건처럼 여기고 대의(大義)를 가리켜 헛된 말이라 하기에 이르니, 그 말류(末流)의 해독이 거의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여졌습니다. 진신(搢紳)과 장보(章甫)가 감히 말하지 못하고 남몰래 근심하여 온 지 여러 해인데, 이제 윤봉오(尹鳳五) 등이 사기(士氣)가 꺾인 때에 홀로 정론(正論)을 지키고 기휘(忌諱)를 범하면서 생각하는 바를 써서 바쳤으나 전하께서는 문득 또 꺾으셨으니, 정황이 매우 슬프고 듣기에 놀랍고 미혹(迷惑)됩니다. 이는 쌓인 음기(陰氣) 가운데에 작은 양기(陽氣)마저 회복될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정거(停擧)하라는 명은 본디 지나칠 것이 없으니, 도로 거두기를 청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사학(四學)의 유생(儒生) 윤득화(尹得和) 등 1백 15인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멀리는 고정(考亭)112)                  의 통서(統緖)를 잇고 가까이는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적전(嫡傳)을 이어받아 성덕 대업(盛德大業)이 백세(百世)의 유종(儒宗)이 되니, 무릇 상도(常道)를 지키는 사람이라면 누가 존신(尊信)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고(故) 상신(相臣) 윤증(尹拯)은 40년 동안 스승으로 섬긴 사람으로서 하루아침에 배반하여 헐뜯고 배척하는 것이 원수같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초에 성상께서 이미 몹시 미워하여 죄주고 삭직(削職)하셨을 때에는 시비가 아닌게 아니라 크게 밝혀졌으나, 불행히도 세도(世道)가 여러 번 변하여 어진이를 해치는 무리들이 모두 송시열에게 마음대로 못하지 않게 되어서는 윤증에 대하여 반드시 굽혀 절하고 높여 꾸몄고, 전하께서도 능히 마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다시 대부(大夫)를 부르는 예(禮)를 베푸셨습니다.
대저 이 일은 다투는 곡절이 매우 상세하나, 사가(私家)의 문적(文籍)은 반드시 보시지 못하였을 것이니 혹 상세한 데까지 두루 아시지는 못하였을 것인데도, 대개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이 있다[父師輕重]’는 넉 자로 재단하셨기 때문에 십수 년 동안 국시(國是)가 밝지 않고 인심은 더욱 떨어져 급속히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저번에 좨주(祭酒) 신(臣) 권상하(權尙夏)가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序文)을 지은 일로 인하여 윤증의 낭패스러운 사실을 분명히 말하여 장차 사정(邪正)의 분별을 엄하게 하려 한 것은 대개 또한 마지못하여 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살피지 않으시고 미안한 뜻을 나타내 보이시고, 그 뒤로 대간(臺諫)에 대한 비답(批答)과 연중(筵中)의 분부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점점 격렬하여져서 유현(儒賢)에게는 비난하여 꾸짖어 마지않고 윤증에 대하여는 반드시 지극히 마땅한 것으로 돌리시니, 흑백이 뒤바뀌고 청탁(淸濁)이 뒤섞였습니다. 사문(斯文)·세도(世道)도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송시열이 윤증에게 노여움을 산 것은 그 아비의 묘문을 지은 일 때문에 틈이 생긴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이것이 과연 무슨 큰 사고이고 큰 원수길래 저버리고 끊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까? 삼가 듣건대 저번에 연중에서 ‘제 부모가 욕을 당하는데 그 아들된 자로서 편안히 받아들인다면 천리(天理)와 민이(民彝)가 장차 아주 없어지게 될 것이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성상께서 그 묘문의 실상을 통촉하지 못하여 이런 분부가 계셨던 것일 뿐이고, 전하께서 그 묘문을 한 번 보신다면 욕이 있는지 없는지를 당장 가리실 수 있을 것이니, 신(臣)들이 전하를 위하여 한 번 그 전문(全文)을 아뢰겠습니다. 그 글에 ‘숭정(崇禎)기유년113)                   4월 18일에 미촌 선생(美村先生) 파평 윤공(坡平尹公) 휘(諱) 선거(宣擧) 자(字) 길보(吉甫)가 이산(尼山)에 있는 집에서 졸서(卒逝)하니, 원근(遠近)의 장보(章甫)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弔問)하지 않는 자가 없고, 와서 곡하고 부조(賻助)하는 자가 길에 끊이지 않으며, 그 행실을 숭앙하는 진신(搢紳)도 탄식하고 아까와하였다. 아! 성상께서 연신(筵臣)의 말을 바로 받아들여 벼슬을 추증하고 상수(喪需)를 주었으며, 장례 때에는 송장(送葬)하는 자가 거의 수백 인이었고, 장사지내고 나서는 그가 살던 고장과 들렀던 곳에 다 장차 사당을 세워 제향하려 하니, 군자들이 말하기를, 「성덕(盛德)이 인심을 감복시키는 것이 이러하다.」하였다.
대저 공(公)은 팔송공(八松公) 휘(諱) 황(煌)의 계자(季子)이며, 비(妣) 성씨(成氏)는 우계 선생(牛溪先生) 문간공(文簡公) 휘(諱) 혼(渾)의 딸이니, 공은 전광(前光)을 배태(胚胎)하고 만력(萬曆)경술년114)                   5월 28일(임신)에 태어났다. 숭정(崇禎)계유년115)                  에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양시(兩試)에 합격하여 반궁(泮宮)116)                  에 출입하였는데, 의논이 늘 동배(同輩)에서 뛰어났고, 일찍이 유생들을 이끌고 상소하여 추숭(追崇)하는 것이 예(禮)에 어그러짐을 논하였다. 병자년117)                  에 금로(金虜)가 참호(僭號)하며 두 사자(使者)를 보내어 오니, 공이 또 앞장서서 논하고 두 번 상소하여 노사(虜使)를 베어 대의(大義)를 밝히기를 청하였다. 겨울에 오랑캐[虜]가 크게 침입하니 공은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들어가고 팔송공은 남한(南漢)에서 싸움에 종사하였다. 공은 동지와 함께 강을 건너려고 하며 사잇길로 남한에 가고자 꾀하였고, 또 일을 맡은 사람들이 눈앞의 안일만 도모하는 잘못을 논하였으며, 이미 가지 못하게 되어서는 자청하여 성의 수비에 분속되었다.
이듬해 정축년 정월에 성이 함락되고 난(難)이 그치자 팔송공은 영동현(永同縣)에 정배(定配)되었는데, 일찍이 척화(斥和)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에, 사유(赦宥)받아 한산(韓山)으로 이거(移居)하였는데, 공이 줄곧 따라 모셨으며, 이때부터 과거(科擧) 공부를 포기하고 성리(性理)의 글에 전념하였다. 팔송공이 서거하니, 공이 형제와 함께 이산(尼山)에서 상(喪)을 지켜 그 정문(情文)118)                  을 다하였다. 복을 벗고서는 다시 금산(錦山)으로 돌아가 시남(市南) 유공(兪公) 계(棨)와 함께 집을 지어 산천(山泉)이라 편액(扁額)을 걸고 상대하여 토론하기에 밤낮을 다하여 게을리하지 않았고, 또 신재(愼齋)119) 김선생(金先生)의 문하에 출입하여 강습하고 질의하다가 드디어는 스승과 제자의 의리를 정하였다. 무자년120)                  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효종 대왕(孝宗大王)신묘년121)                  에 전설 별검(典設別檢)·왕자 사부(王子師傅)에 잇따라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정신(廷臣)들이 서로 잇따라 논천(論薦)하매 드디어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로 불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이때 공은 이미 이산으로 돌아갔는데, 공문(公門)의 고족(高族)이 크게 규약(規約)을 만들므로 스스로 이끌었고, 또 향리(鄕里) 사람들과 음사(飮射)122)                  ·향약(鄕約)123)                  ·사창(社倉)124)                   등의 고법(古法)을 행하니, 노소(老少)가 믿고 따랐다. 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높였다가 다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불렀으나, 공이 스스로 죽을 죄를 지은 신하라 하고 기보(畿輔)에 가서 강도(江都)의 일을 힘껏 아뢰어 사직하므로 체직되었다. 곧 장령(掌令)·진선(進善)으로 높였는데 또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批答)에 「네가 뜻을 지켜 변하지 않는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 사직하지 말고 올라오라.」 하였으나, 다시 상소하여 힘껏 사직하였다. 이때부터 끊임없이 소명(召命)을 받았으므로 드디어 대궐에 나아가 진정(陳情)하였는데, 임금이 곧 입대(入對)하라고 명하였으나, 다시 감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사직하니, 우악(優渥)하게 비답하고 재촉하여 불렀다. 권공(權公) 시(諰)와 송공(宋公) 준길(浚吉)은 먼저 이미 입조(入朝)하였는데, 권공이 상소하여 사복(士服)으로 들어와 뵙게 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으나, 다시 면직(免職)을 청하므로, 송공이 공에게 말하기를, 「명을 받들지 않으려면 빨리 떠나서 성의(聖意)만 근고(勤苦)하시게 하지 말라.」 하였다. 드디어 소장(疏章)을 남겨두고 지레 돌아갔는데, 잇따라 장령·진선으로 불렀으나 다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기해년125)                   5월에 효종 대왕께서 승하하시니, 금상(今上)께서 별유(別諭)하여 불러서 곧 들어 오는 길에 집의(執義)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제수하고 음식을 내리고 입대하게 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므로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보살피게 하니, 대궐에 나아가 진사(陳謝)하고는 근교에 나가 살았는데, 사업(司業)·상의 정(尙衣正)을 제수하고 또 입대하라고 명하였으나 이때 인산(因山)이 겨우 끝나자 소명을 사양하고 남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여러 번 집의의 임명이 있었고, 또 원자(元子)의 강학관(講學官)으로 불렀으며,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찾아가 가난을 진휼하는 일을 묻게 하고, 또 재이(災異) 때문에 불러 재변(災變)을 그치게 할 계책을 순문(詢問)하려고 했다. 대개 양조(兩朝)의 은택(恩澤)과 예우(禮遇)가 더욱 많이 보내지고 더욱 후해졌는데, 공은 단지 음식·서책을 내린 것만 받을 뿐이었고, 졸서(卒逝)하고 나니 임금이 끝내 보지 못한 것을 탄식하며 애석하게 여기셨다.
대개 공의 학문의 연원(淵源)과 거취의 시종(始終)은 사람들이 다 보아서 아나 그 조예(造詣)의 심천(深淺)과 의리의 정조(精粗)로 말하면 본디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더구나 나는 공에 비하면 황곡(黃鵠)126)                  과 땅벌레의 차이일 뿐만이 아니니, 공을 오래 따르고 공에게 깊이 심복하였다 하더라도 그 깊은 뜻을 엿볼 만하지 못하고, 또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그 덕을 형용할 글은 더욱 더 아득하여 말을 만들 방법을 모르겠다. 가만히 보건대 제현(諸賢)이 기술한 글은 많고 성대하되 오직 현석(玄石) 박화숙(朴和叔)127)                  의 글이 널리 관통하고 두루 포함하였으니, 이에 의거하여 말하면 참람하고 경솔한 허물을 거의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말하기를, 「당초에 우계 선생(牛溪先生)은 정암(靜庵)128) 조 문정공(趙文正公)의 학문을 그 아버지 청송공(聽松公)129)                  에게서 얻고 이어서 율곡(栗谷)130) 이 문성공(李文成公)과 서로 도와 학문과 덕을 닦는 것이 더욱 지극하였으니, 대개 그 문로(門路)가 바르고 행실이 독실한 것은 우리 동방의 선비 중에서 조금도 앞설 사람이 없을 것이다.
팔송공은 일찍부터 그 문하에 다녔고 뒤에는 능히 대의(大義)에 강직하였으므로 선생이 본디 그 대강을 들어서 알았거니와 또 신재 선생(愼齋先生)은 사계(沙溪)131) 문원공(文元公)의 가전(家傳)을 얻고 율곡의 세적(世嫡)132)                  이 되었으므로, 선생이 이에 아버지와 스승이 있는 것을 기쁘게 여기며 제론(諸論)을 살피고 모아서 전일(專一)하게 힘써 노력하여 바로잡고 쌓았으니, 그 학문을 넓히고 몸가짐을 단속한 과정은 대저 파산(坡山)133)                  의 법문(法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차례로 올라가면 뿌리가 고정(考亭)134)                  까지 닿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선생은 덕성(德性)이 인서(仁恕)하고 우량(宇量)이 굉심(宏深)하며 규모는 근엄(謹嚴)하고 용모는 단정하고 의연(毅然)하여 조금도 태만한 빛이 없으므로, 바라보면 문득 그 험준한 고산(高山) 같은 기상을 알게 된다. 의리가 끝이 없고 곡절이 만 가지로 다르더라도 한결같이 성현의 유훈(遺訓)을 실마리로 삼아 풀어서 밝히고, 알아 내지 못하면 분발하여 잠도 잊었다. 평소에는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는 정좌(正坐)하여 글을 읽으면서 조금도 옆으로 기대지 않았으며, 그 본심을 존양(存養)하는 것은 충신(忠信)을 근본으로 삼고 경외(敬畏)를 요체로 삼으니, 엄연(儼然)하여 항상 임(臨)한 것이 있는 듯하고 척연(惕然)하여 항상 두려운 것이 있는 듯하였다. 그 지행(知行)에 있어서는 서로 반드시 안팎이 일치하여 그 마음을 쓰지 않는 데가 없었으며, 어버이를 섬기고 조상을 받드는 예(禮)는 반드시 그 정성을 다하였으니, 형제는 그 행실을 믿고 친척은 그 덕을 생각하며 벗은 그 의리를 따르고 향당(鄕黨)은 그 인(仁)에 교화되었고, 그 풍도(風度)에 심복(心服)되어 떨쳐 일어나는 사방의 선비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 병자년·정축년의 화(禍)를 당하고서 드디어 세도(世道)에서 뜻을 끊었는데, 효종의 은택(恩澤)과 예우를 받게 되었으나 불러도 오지 않고 만류하여도 머무르지 않았다. 위로는 당저(當宁)135)                  로부터 아래로는 조정의 신하들과 평소에 공을 안다는 친한 벗들까지 누구나 다 그가 잠시 머무르기를 바랐으나, 선생은 확연히 한 번 정하여 변함이 없었다.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상경(常經)을 지키고 대의(大義)를 맡되 종신토록 원망이나 후회를 갖지 않은 까닭은 본디 이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은 감히 조금도 게을리할 수 없으므로, 혹 강구하는 것이 대체(大體)에 관계되는 것이면 문득 제공(諸公)을 위하여 반복하여 버려두지 않았고, 나라의 형세가 튼튼하지 못하거나 그른 사람이 나라의 일을 맡았다는 말을 들으면 늘 슬피 한숨쉬며 항상 말하기를, 『오늘날 급히 힘쓸 일은 반드시 사사로운 뜻을 가진 자를 내쳐서 무너진 기강을 떨치고 겉치레를 없애서 실공(實功)을 이루고 사치한 버릇을 막아서 피폐한 백성을 살리고 구장(舊章)을 밝혀서 병폐를 고쳐야 하는 것인데, 큰 요체는 다 임금에게 달려 있다.』하였다. 그 탁월한 자질과 독실한 공과 훌륭한 말을 하여 가르침을 끼친 것은 근세에서 찾아도 짝할 이가 드물다.」 하였다.
아! 이것은 화숙(和叔)이 마음으로 기뻐하고 참으로 감복한 말이니, 사람들이 그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종형(從兄) 용서(龍西) 윤백분(尹伯奮)136)                  이 서술한 묘표(墓表)로 말하면 글은 비록 간략하나 뜻은 더욱 융숭하여 공이 시종한 깊은 뜻에 대하여 지극하고 극진하였으니, 다시 군말이 필요 없다. 공이 역경(易經)을 읽고 스스로 후천설(後天說)에 부합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여 《첩천도(疊天圖)》를 지었고, 또 시남(市南)137)                  과 함께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지었고, 또 문집(文集) 15권(卷)이 집에 간직되어 있다.
부인 이씨(李氏)는 먼저 죽어 경기 교하현(交河縣)에 묘소를 썼는데, 내가 일찍이 그 행적을 기록하였다. 맏아들 윤증(尹拯)은 행실이 공정하고 의로우므로 조야(朝野)에서 징사(徵士)138)                  로 대우하였고, 작은 아들 윤추(尹推)는 전에 교관(敎官)을 지냈고, 딸은 사인(士人) 박세후(朴世垕)의 아내이며, 서출(庶出)인 아들로 윤벌(尹撥)·윤졸(尹拙)·윤읍(尹挹)이 있다.
명(銘)하노니, 세속으로부터 은둔하여 후회하지 않는 이는 대개 많이 있으나, 성인이 말하기를, 「성인이라야 능히 할 수 있다.」 하였으니, 성인이 말한 것은 중용(中庸)에 따르는 것이기에 여느 백성으로서는 능히 할 수 있는 자가 드문 지 오래인데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지(智)·인(仁)·용(勇)을 삼덕(三德)이라 하거니와 진실로 이것에 말미암지 않으면 어찌 들어갈 수 있겠는가? 배우고 생각하여 가려내는 것을 지(智)라 하고, 독실하게 실천하여 그만두지 않는 것이 인(仁)·용(勇)이다. 여기에 종사하되 지나치지 않고 치우치지 않아야 하는데, 공은 여기에 뜻을 두었으나 하늘이 그 수명을 끝나게 하였으니, 사문(斯文)의 사기가 꺾이고 사림(士林)이 눈물을 흘렸다. 예전에 이문순(李文純)139)                  이 청송(聽松)140)                  의 송(頌)을 적을 때에 기(夔)·설(卨)141)                  과 장저(長沮)·걸익(桀溺)142)                  의 이동(異同)을 평정(評定)하였는데, 공은 그 가전(家傳)에 충실하였으니 어찌 흠모하고 숭앙하지 않겠는가? 금세(今世)의 어느 사람이 포창(褒彰)하겠는가? 성실한 현석(玄石)143)                  이 극히 칭찬하였으니, 나는 그대로 전하고 짓지는 아니하여 이 명문(銘文)에 싣는다.’ 하였습니다. 아! 이것이 실로 최초의 본(本)인데, 이 글에서 욕한 것이 어느 말이고 헐뜯은 것이 어느 꼬트리이기에 아들이 과연 편안히 받아들일 수 없으며 스승의 의리가 과연 편안하게 보전될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그 서술한 차례가 상세히 갖추어지고 칭찬도 본디 융숭하나, 총론(總論)한 곳에서는 선정신 문순공 박세채가 기술한 행장(行狀)을 들어서 말하였을 뿐이고 자기 뜻을 넣지 않았으므로, 윤증은 스스로 입론(立論)하지 않고 남의 글을 빌린 데에는 미묘한 뜻이 있다고 생각하여 유감을 품었을 것입니다.
아! 아들이 어버이를 높이는 데에는 끝이 없는 정이 있기는 하나, 이제 그 묘문에는 본디 한 마디의 욕이 없고 다만 칭찬이 제 뜻에 차지 않았을 뿐이니, 어찌 이 때문에 드디어 그 스승을 원수로 여기기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박세채가 사우(師友)의 비상한 변을 눈으로 보고 또 윤증의 낭패를 아까와하여 왕복하여 책망하였으나 끝내 돌이켜 깨닫지 못하니, 박세채가 사도(師道)가 멸절(滅絶)할 것을 크게 염려하여 《사우고증(師友考證)》 한 편(篇)을 지어서 당세(當世)에 알렸고, 또 배우는 자에게 글을 남겨 그 본말을 극진히 논하기를, ‘명우(明友)          【명우란 윤증의 자호(自號)가 명재(明齋)이므로 말한 것이다.】        는 우장(尤丈)           【배우는 자가 송시열을 우재(尤齋)라 칭한다.】        에게서 글을 배우고 학문을 강습하여 수십 년 동안 섬기면서, 신원(伸冤)할 일을 당하면 소장(疏章)을 기초로 하여 앞장서서 논의하고, 환난(患難)을 당하면 글을 올려 스스로 표명하고, 출처(出處)할 일을 당하면 그 설(說)을 준용(遵用)하였으니, 사람들이 다 송문(宋門)의 고제(高弟)인 줄 안다. 그러나 세상에서 논하는 자는 반드시 「스승은 도(道)가 달려 있는 바이니 도가 그르면 끊어야 한다.」 하여 한 번 쓰고 버릴 물건과 다름없이 여기니, 이것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와 스승의 구분으로 말하면 예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으므로 견주기 어렵고, 복수하는 의리는 조금 그럴듯하나 또한 결국에는 말이 되지 않는다.’ 하고, 또 ‘내 생각으로는 복수하는 의리가 아니면 끊을 수 없을 듯하다.’ 하였습니다.
아! 박세채가 공심(公心)·혈성(血誠)으로 시비를 공평히 하였으므로 그 사리가 지극히 밝고, 그 말이 믿을 만하니, 신(臣)들의 여러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환히 알 수 있습니다. 아! 윤증은 큰 윤리를 이미 잃었으므로 나머지는 논할 것도 없으나, 부자가 전술(傳述)한 것이 본디 윤휴(尹鑴)를 조종으로 삼는 법문(法門)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마음에 두고 행실을 가다듬는 것도 오로지 이해(利害)·화복(禍福)에 달려 있었습니다. 송시열이 목숨을 버리고 윤휴를 배척하다가 간사한 자들에게 크게 미움받은 것을 이미 보았고, 뒷날에 세도(世道)가 여러 번 변하면 송시열이 마지막 승부를 걸게 될 것은 틀림없겠거니와, 주문(朱門)의 당금(黨禁)은 서산(西山)144)                  에게 먼저 미쳤고 본조(本朝)의 사화(士禍)는 문도(門徒)에게 뒤섞여 미쳤으니, 윤증의 환난을 염려하는 마음으로서는 어찌 송시열의 문하에서 머리 숙여서 수사 연좌(收司連坐)145)                  의 율(律)을 달게 받으려 하였겠습니까? 그가 스스로 사문(師門)을 끊고 분당(分黨)하여 따로 선 까닭은 반드시 오로지 묘문(墓文)에 관한 일에 달려 있지는 않습니다. 그의 말하고 침묵하는 것과 따르고 피하는 것이 윤휴의 무리와 마찬가지로 돌아가고, 문득 기사년146)                  에 이르러 날뛴 것을 보면 더욱 증험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당초에 ‘윤증을 죄주신 것은 본디 지극하였거니와, 백광호(白光瑚)를 배척하신 분부에 윤증이 스승을 저버리고 바른 사람을 헐뜯는 것은 실로 세도의 변고이고 사문(斯文)의 죄인이니, 무릇 시비를 가리는 천성이 있는 자라도 누가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하셨으니, 윤증을 과연 어떠한 사람으로 여기신 것입니까? 오늘의 윤증은 바로 그때의 윤증입니다. 세월이 오래 지나더라도 경형(黥刑)147)                  ·월형(刖刑)148)                  은 보상할 수 없는데, 도리어 완전한 덕을 갖춘 군자로 추대하여 조금만 배척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어진이를 무함한 죄로 돌리시니, 어찌하여 대성인(大聖人)의 전후의 시비가 일체 상반(相反)됨이 이토록 극에 달하게까지 되었습니까?
신들이 소장을 써서 올리려 할 즈음에 삼가 이진유(李眞儒)의 소본(疏本)을 보니 유현(儒賢)을 무함하여 방자하게 능욕하였고, 전석(前席)에 입대(入對)하여서는 그 말한 것이 흉포(凶怖)하였고, 또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송시열의 묘표(墓表)에 있는 한 마디 말을 근거가 없는 것으로 돌리며, 끝에는 ‘반드시 처분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하여 그 마음 쓰는 것이 참혹하게 해독을 끼치니 사람들을 놀라고 두렵게 합니다. 아! 통분합니다. 기사년의 화(禍)를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조짐을 쌓아서 빚어낸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대개 윤증 부자가 처음부터 윤휴에게 편들어 치우치게 그 해독을 맞았으므로 윤휴가 주자(朱子)를 헐뜯는 것을 보고도 오히려 차마 끊지 못하였는데, 송시열이 당여(黨與)를 먼저 다스린다는 뜻으로 매우 힘써 배척하였으므로 윤씨 집안에서 원한을 품고 유감을 쌓은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시세가 일변하여 윤휴의 무리가 다시 일어나게 되자 윤휴의 원한을 신설(伸雪)하고 윤증의 벼슬을 현탁(顯擢)하며, 송시열은 죄명이 낭자하여 마침내 참화(慘禍)를 입었으니, 윤휴를 배척하여 도둑이라 하고 윤증을 배척하여 윤휴의 무리라 하는 것은 실로 송시열을 죄준 장본인(張本人)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박세채도 기사년 봄에 윤증에게 글을 보내어 ‘오늘날 우장(尤丈)을 다시 죄수(罪首)로 삼는데 시의(時議)는 아마도 반드시 뜻을 달리하는 자를 찾아서 도움으로 삼을 것이니, 고명(高明)149)                  을 위하여 매우 염려하는 사람이 많다.’ 하고, 또 ‘여원(驪冤)을 푸는 데에 반드시 또 형의 집을 끌어대어 명증(明證)으로 삼을 것이다.’ 하였는데, 여(驪)라는 것은 윤휴가 여주에 살았기 때문에 말한 것입니다. 윤증이 그 명성(名聲)과 위세(威勢)를 도와 함께 놀라운 책략을 선동한 것은 이미 엄폐하기 어려운데다가, 더구나 그 비밀한 음모를 잘 아는 것은 그 무리만한 자가 없을 것인데, 그때 윤증을 논계(論啓)한 데에 ‘작년 경화(更化)한 일은 윤증이 그 사이에서 올렸다 내렸다 한 것이 있다.’ 하였습니다.
아! 참혹합니다. 이것이 어찌 일조 일석(一朝一夕)의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문(師門)의 그때의 말에 따르고 일세(一世)의 공론의 말을 따서 여러 묘석(墓石)에 써서 후래(後來)에게 깨우친 것은 도리어 권상하의 책임이 아니니, 권상하도 어찌 화를 두려워하고 위세를 두려워하여 진실을 모아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주객(主客)의 구분은 제신(諸臣)의 소(疏)·계(啓)에 다 있으므로 성명(聖明)이 반드시 굽어살피셨을 것인데 이제 금령(禁令)이 또 엄하니 신들이 감히 다시 구구한 말을 할 수 없으나, 《가례집해(家禮集解)》와 《가례원류》는 상략(詳略)이 크게 다른데도 지금 한 자(字)도 가감한 것이 없다고 말하며 천위(天威)가 지척인 곳에서 방자하게 면대하여 속였으니, 그도 심장(心腸)이 있는데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일이 진실로 가려야 할 만한 것이라면 다만 도리에 맞게 말하여야 할 따름인데, 선정(先正)을 헐뜯은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매우 놀랍다."
하였다. 윤득화 등이 다시 상소하였으나, 정원(政院)에서 계품(啓稟)하여 물리쳤다.

 

2월 29일 경인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성밖에 있으면서 녹사(錄事)150)  를 시켜 명소(命召)를 환납(還納)하니, 임금이 하유(下諭)하기를,
"일전에 차자(箚子)에 대하여 비답(批答)한 것은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닌데, 성을 나간 것이 이미 뜻밖이거니와 명소를 이제 또 환납하니, 마음에 매우 놀라와 유시(諭示)할 길이 없다. 다시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하여 주게 하니, 경(卿)은 받고서 안심하고 들어와 내 희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대개 김창집이 성을 나가고부터 명소를 환납한 것이 두 번이나 되는데, 임금이 단지 도로 주라고만 명하고 별다른 유시(諭示)가 없었으므로, 어제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을 때에 도제조(都提調) 서종태(徐宗泰)가 임금에게 ‘김창집의 처지로서는 차자의 사연이 자연히 그러한 것이 괴이할 것이 없이 자연스러운데 어찌하여 성색(聲色)을 보이시기까지 하고서 부르는 명이 없으십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여 부르려는데, 마침 이날 또 명소를 환납하였으므로, 이런 분부를 내렸다.

 

2월 30일 신묘

유봉휘(柳鳳輝)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이때 전관(銓官)이 인퇴(引退)하여 오랫동안 개정(開政)151)  하지 못하였으므로,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참의의 빈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차출하라고 명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유봉휘를 의망(擬望)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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