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3월 3일 계해
장령(掌令) 경성회(慶聖會)가 상소(上疏)하여, 관동(關東)의 전정(田政)을 바로잡고 황장 금표(黃腸禁標)219) 안에 들어가 경작하는 폐단을 엄단하고 조곡(糶穀)220) 을 남겨 저축하여 불시의 수요에 대비하기를 청하고, 또 인재를 소통(疏通)하고 박만정(朴萬鼎)·강현(姜鋧)·이이만(李頤晩) 등을 거두어 서용(敍用)하기를 청하고, 강세윤(姜世胤)을 신구(伸救)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비답(批答)하고 받아들였다.
강현(姜鋧)을 판윤(判尹)으로, 구만리(具萬理)를 장령(掌令)으로, 송택상(宋宅相)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윤3월 4일 갑자
윤행교(尹行敎)를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삼고, 특별히 윤덕준(尹德駿)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제수(除授)하였다.
윤3월 5일 을축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윤3월 7일 정묘
사간(司諫) 이정재(李廷濟)가 상소(上疏)하여, 외방(外方)의 의인(醫人)을 널리 불러들이고 또 때때로 강관(講官)을 인접(引接)하기를 청하고, 이어서 신사철(申思喆)의 소(疏)를 공박하고 이집(李㙫)·유봉휘(柳鳳輝)·조태억(趙泰億) 등을 힘껏 구제하고 또 서명우(徐命遇)·송성명(宋成明) 등을 서용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부드러이 비답(批答)하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어서 송성명을 특별히 서용(徐用)하라고 명하였다.
윤3월 8일 무진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새로 아뢰기를,
"자의(諮議) 이간(李柬)은 본디 어리석고 잗단 사람으로서 일찍이 학문이 있다는 일컬음이 없었는데, 한갓 남의 장점을 추켜세우는 데에 힘쓴 덕분에 외람되게 시강(侍講)의 줄에 흠을 내게 되었으므로 물정이 놀라와 하고 비웃은 지 오래 되었는데도 그치지 않으니,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사성(司成) 한영휘(韓永徽)는 왕년에 좌죄(坐罪)된 것이 윤의(倫義)에 관계되며 처신이 비루(鄙陋)하고 패려(悖戾)하므로 세상에서 버림받았는데 외람되게 교도(敎導)하는 직임을 차지하여 매우 현관(賢關)의 수치를 끼치니,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윤3월 9일 기사
굶어 죽은 제주(濟州)의 백성에게 사제(賜祭)하였다. 어사(御史) 황귀하(黃龜河)가 장계(狀啓)하기를,
"섬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매우 많으니, 청컨대 향축(香祝)을 보내고 단(壇)을 설치하여 제사하여 굶어 죽은 혼령을 위로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내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아! 탁라(乇羅)221) 온 고장의 백성이 이런 부진(不辰)한 때에 태어나서 기근을 거듭 당한 지 이제 3년째에 이르고, 게다가 혹독한 염병을 만나 열 사람 가운데에서 한 사람도 낫지 못하며, 더구나 해외에 떨어져 있는 것이 육지와 달라서 곡식을 모으기가 어렵고 살길을 도모하기도 또한 어려우므로, 온 섬 안이 어쩔 줄 몰라 마치 병화(兵火)를 만난 듯하니, 내가 백성의 임금으로서 당연히 어떠한 생각을 하겠는가? 근심과 번민이 지극하여 내 병마저 모두 잊고 도신(道臣)에게 칙유(勑諭)하여 곡식을 배로 날라다가 먹이게 하였으나 왕래할 때에 순풍을 기다리느라 번번이 지체되게 되고, 이어서 의사(醫司)를 시켜 약물(藥物)을 넉넉히 보내게 하였으나 거의 한 움큼의 물과 같아서 두루 구완하지 못하니, 전후 4년 동안에 굶어 죽고 병들어 죽은 자가 수천을 헤아리게 되고 마을이 텅 비어 경황(景況)이 근심스럽고 가슴아프다. 가엾은 우리 백성은 죄가 없고 허물이 없건만, 하늘이 어찌하여 이처럼 혹독하게 재앙을 내리는가? 내 마음을 에이는 듯하여 차라리 내 몸이 당하고 싶으나 그렇게 할 수 없구나. 아! 내 병이 낫지 않고 오래 끄는 중이기는 하나 백성을 위하는 일념(一念)은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아서 공인(貢人)222) 이 오면 문득 질고(疾苦)를 묻고 어사(御史)가 갈 때에는 또 연교(筵敎)223) 를 내려 마음쓰는 것이 부지런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일은 마음과 어그러져서 끝내는 우리 백성을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였다. 고요히 생각하면 참으로 덕이 없기 때문이니, 어찌 부끄러워 견디겠는가? 아! 한 지어미가 원한을 품어도 오히려 재앙을 부르는데, 더구나 일만에 가까운 백성이 서로 좇아서 구덩이를 메워 죽은 것이겠는가? 아! 외로운 넋은 의탁할 데가 없어 굶주리고 하늘은 흐려 비마저 축축하니, 귀신의 울음 소리가 추추(啾啾)224) 하다. 내 생각이 이에 이르니 더욱 가엾고 측은하여 감진(監賑)하는 신하에게 명하여 터를 가려 제단을 만들고 청작 서수(淸酌庶羞)225) 로 보답하여 번거로운 원한을 위로하게 하였다. 아! 너희 뭇 귀신은 무리를 데리고 와서 음식을 흠향하고 영구히 재앙을 없애서 우리 남은 백성을 보전하라."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세최(李世最)·사간(司諫) 이정제(李廷濟)·지평(持平) 홍우행(洪禹行)·정언(正言) 김시혁(金始㷜)이 아뢰기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창집(金昌集)은 저번에 한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사당(私黨)을 감쌀 생각을 하고 선정(先正)을 헐뜯는 논의에 편들어서 마음을 쓰고 말을 쓴 것이 워낙 무엄한 것이 많았거니와, 그가 무인년226) 에 관유(館儒)의 소(疏)에 대하여서는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이 있다는 말을 신의 아비 역시도 어찌 몰랐겠습니까?’ 하더니, 이번 차자에는 ‘옛 성현(聖賢)에 따르면 경중이 있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하여 자신의 뜻이 어그러지고 차자의 말이 크게 차이나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그 지론(持論)의 전후가 서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또 그가 명관(命官)이었을 때의 일은, 전후의 장차(章箚)에서 시험을 주관한 대신(大臣)에게 책임을 돌린 것이 한둘만이 아닌데도 끝내 한마디 말이 없다가 유신(儒臣)의 소(疏)에 핍박당하게 된 뒤에는 오로지 고교(考較)하는 일에만 뜻을 기울였으므로 옆 사람이 드나들고 오간 것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또 일이 이미 끝장났으니 뒤미처 말할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대개 그 뜻은 곧바르게 아뢰려면 시론(時論)에 방해되는 것이 있을 것이고 실상(實狀)을 변환(變幻)하려면 이미 남과 수작하였기 때문에 이런 군색하게 피하는 말을 한 것이니, 이것은 임금을 섬기는 것이 성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 당의(黨議)가 횡류(橫流)하고 인심이 막히는데 자신이 대신의 반열에 있는 자로서 은혜에 보답하려고 힘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붕당(朋黨)을 지어 아부하는 버릇만 일삼아 멋대로 선정을 무함하고 마음껏 임금을 속이므로 물정이 모두 분개하고 공론이 더욱 격렬하여지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고, 이간(李柬)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윤3월 10일 경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고, 한영휘(韓永徽)를 체차(遞差)하라고 명하였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유(金楺)가 상소(上疏)하여, 해주(海州)는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탄강(誕降)한 곳인데 세성(歲星)227) 이 두 번 돌았다 하여 과거(科擧)를 설행(設行)하여 사민(士民)의 마음을 위로하기를 청하였는데, 소가 내려지자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3월 12일 임신
양사(兩司)에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창집(金昌集)의 파직을 거듭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이 전후에 차자(箚子)를 올려 논한 것은 실로 정론을 붙잡고 시비를 밝히려는 뜻에서 나왔으나 미처 굽어살핌을 받지 못하여 좌절되어 돌아갔는데, 마침내는 참소(讒訴)당하여 견파(譴罷)되기에 이르렀으니, 사림(士林)이 애석하게 여겼다.
윤3월 13일 계유
좌참찬(左參贊) 이언강(李彦綱)이 졸(卒)하였는데, 나이 69세였다. 이언강은 사람됨이 간사하여 여러번 국시(國試)를 맡았는데 사의(私意)를 자행한 것이 낭자하고 청탁을 받아서 더럽고 잗단 일이 많았으므로 물론(物論)이 경멸하고 천하게 여겼으나, 영민하고 문재(文才)가 있고, 또 효우(孝友)의 행실이 있어서 자못 사람들에게 일컬어졌다.
윤3월 14일 갑술
개성부(開城府)에 불이 나서 민가에 번져 불탄 것이 3백여 호이고 죽고 다친 자가 많았는데, 이 일이 아뢰어지니, 임금이 2년에 한하여 부역을 감면하고 곡식 9백 석(石)을 날라다가 구휼하라고 명하였다.
윤3월 15일 을해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시정(李蓍定) 등 1백여 인이 상소(上疏)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저 윤증(尹拯)을 편드는 무리가 번번이 제 스승이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저버린 것은 오로지 묘문(墓文)의 일 한 가지 때문이라 하다가, 저번에 학유(學儒)의 소(疏)가 그 묘문에는 본디 헐뜯은 사실이 없다는 것을 밝히니, 최석문(崔錫文) 등이 어쩔 수 없이 본원(本源)의 설(說)로 바꾸어 신유년228) 의 의서(擬書)를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면 의서가 있기 10년 전에 이미 묘문에 대한 유감이 있었고, 또 그 의서는 오로지 헐뜯어 욕하는 것만 일삼아 비록 공평한 마음으로 규간(規諫)한 것이라 하려고 해도 사람들을 속일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유봉휘(柳鳳輝) 등이 또 어쩔 수 없이 묘문의 설로 도로 바꾸었습니다. 아! 이 무리가 먼저 한 설을 내었다가 그 설이 모두 실패하니 또 한 설을 내고, 그 설이 또 실패하니, 다시 전의 설을 지켰으니, 그 설을 찾아도 얻지 못하여 가리키는 바를 확실하게 하지 못하는 정상을 엄폐할 수 없습니다. 대저 윤증은 겉으로는 꾸며서 좋은 명예를 얻으려 하면서 속으로는 실로 머뭇거려 세화(世禍)를 도피하였으니, 이것은 그 집안에서 전수(傳授)한 것입니다. 적신(賊臣) 윤휴(尹鑴)가 명예를 훔칠 때에 윤증의 아비 윤선거(尹宣擧)가 성심으로 사모하여 기뻐하였고, 윤휴가 《중용(中庸)》에 개주(改註)하고 예설(禮說)을 새로 만들게 되어서는 세상이 다 그가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으로서 화심(禍心)을 감춘 것을 알았는데도, 윤선거만은 홀로 애호(愛護)하는 뜻을 가져서 끊는다고 말하고서도 실제는 끊지 않았습니다. 윤증이 한결같이 유의(遺意)를 좇아 지성으로 사모했으면서도 오히려 드러나게 송시열을 배반하고 끊지 못한 것은 혹 사류(士類)에게 죄를 얻을까 염려한 때문이었습니다.
윤휴의 무리가 점점 치성(熾盛)하여 위세가 날로 확장되면서 송시열을 참소하고 죄를 꾸미는 것이 세상에 넘쳐 화변(禍變)이 장차 임박하게 되니, 윤증이 그제야 두려워서 스스로 위태롭게 여기고 제 한 몸 벗어날 방법을 꾀하여, 묘문을 청할 때에 비로소 제 아비의 기유년229) 의 의서(擬書)를 발설하였는데, 이것은 적신 윤휴를 힘껏 돕고 대의(大義)를 헐뜯어 배척한 것이니, 윤증이 이 글을 송시열에게 보일 때에 어찌 송시열이 제 아비의 마음을 의심할 것을 몰랐겠으며, 이미 제 아비가 의심받을 줄 알았다면 묘문이 뜻에 차지 못할 것을 또한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가 윤휴를 도운 글을 명(銘)을 청할 때에 보인 것은 모두가 짐짓 경영하여 스스로 사문(師門)을 끊고 화망(禍網)을 일으킬 방도를 생각한 것인데, 도리어 그 묘문에는 권도(權度)를 조금 보였고 본디 한 마디도 헐뜯어 욕한 것이 없으니, 배반하고 끊는 증거로 삼을 만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친한 벗에게 글을 보내어 또 본원(本源)의 심술(心術)이라는 설을 새로 만들어 송시열의 도학(道學)까지 공박하여 마치 그 옳지 않은 것을 보아서 이처럼 배반하고 끊는 것인 듯이 하였으니, 그 계책을 써 꾸민 것은 진실로 차마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이제 최석문 등이 그 설을 부연하여 ‘윤증이 송시열의 본원의 심술을 의심한 것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유태(李惟泰)의 예설(禮說)과 목천(木川)의 일의 언근(言根)이 그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예설의 일이라는 것은, 갑인년230) 가을에 송시열이 예(禮)를 의논한 일 때문에 경기(京畿)에서 대죄(待罪)할 때에 이유태가 예설을 지어 송시열에게 보내어 보였는데, 그 설에는 혹 말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한 것이 있고 이리도 저리도 볼 수 있는 것도 있었으나 그 대체는 해로운 것이 없으므로, 송시열이 자구(字句)를 조금 고쳐서 돌려보냈습니다. 이유태가 귀양간 뒤에 전의 소견을 갑자기 바꾸어 예설을 고쳐 지었다는 말이 세간에 성행하게 되니, 송시열이 비록 그 설을 믿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의 말이 이러한 것을 의아하게 여겨서 마침 윤증이 귀양살이하는 곳에 뵈러 왔기에 소문에 언급하였습니다. 다만 찾아 보게 한 것은 대개 그 전설(前說)의 허실(虛實)을 밝히려는 것이었을 뿐인데, 윤증이 돌아가서 이유태에게 글로 물었더니, 이유태가 온갖 말을 다하여 스스로 변명하면서 송시열을 원망하고 욕하였습니다. 윤증이 드디어 송시열에게 다시 물었더니, 송시열이 답하기를, ‘이 형(兄)의 말을 듣건대, 「모(某)231) 가 예를 논한 것이 잘못되었다면 죽어야 한다.……」 하였으나,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반드시 당초에 예를 논할 때에 있는 대로 말하여 꺼리지 않았으므로 그 형세가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라 한 것인데, 전하는 사람이 말을 옮긴 것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그 뒤에 또 듣건대 이 형이 새로운 설을 지어 전의 소견과 갑자기 달라졌다 하고, 이윽고 이하경(李廈卿)이 와서 말하기를, 「전에 초장(草丈)232) 을 송경(松京)에서 뵈었는데 그 논설이 이상스럽다.」 하므로 비록 믿지는 않았으나 또한 의심이 없을 수도 없어서 자인(子仁)233) 이 보러 왔을 때에 찾아 뵈라 하였는데, 회시(回示)를 받게 되어서는 또한 전일에 서로 믿던 것이 그르지 않다고 스스로 믿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초장이라 한 것은 이유태의 호가 초려(草廬)이기 때문이며, 하경은 이담(李橝)의 자(字)이고 자인은 윤증의 자입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그때에 전파된 말이 몹시 자자하였을 것이니 송시열이 듣고서 의심하게 되고 윤증에게 운운한 것은 본디 이상한 일이 아닌데, 마침내 오시수(吳始壽)의 무리가 과연 이유태는 처음의 소견을 바꾸고 송시열에게 글을 보내어 서로 끊었다 하여 석방을 청하여 사유(赦宥)받았으니, 오시수의 무리가 그 신설(新說)을 친히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건백(建白)234) 하여 석방하였겠습니까? 그렇다면 어찌 사우(士友)의 의심을 면할 수 있겠으며, 소견을 바꾸었다는 말이 처음에 송시열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도 또한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목천(木川)의 일이라는 것에도 그런대로 곡절이 있습니다. 사인(士人) 허황(許璜)은 곧 승지(承旨) 신(臣) 허윤(許玧)의 사촌 아우로서 양성(陽城)에서 살면서 이제까지 살아있는데, 최석문 등이 ‘경향(京鄕)에 없는 사람이어서 힘껏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하였으므로 그 아들 허괵(許漍) 등이 올라와서 상소하였는데, 후사(喉司)에서 저지당하였으나 이미 중외(中外)에 자자하게 전파되었습니다. 그 소(疏)에 대략 이르기를, ‘신의 아비 허황이 온양(溫陽)에서 살 때에 일이 있어 목천에 갔다가 사인 윤채(尹宷)의 집에 들렀더니, 이산(尼山)의 원유(院儒)가 통문(通文)한 것이 마침 당도하였는데, 곧 이산 서원(尼山書院)에 윤선거를 배향(配享)하는 일이었고, 죽 벌여 적은 각 고을 가운데에서 목천 아래에 「강도의 포로를 어떻게 함께 배향할 수 있겠는가? [江都俘虜豈合享祀]」라는 여덟 자가 있었습니다. 신유년 봄 선정(先正)이 수원(水原)에 와서 머무를 때에 신의 아비가 뵈러 가서 우연히 통문 가운데 목천 아래에 있던 여덟 자를 언급하였더니, 선정이 말하기를, 「과연 그대의 말과 같다면 목천의 풍습은 참으로 한심스럽다.」 하였고, 선정이 돌아갈 때에는 신의 아비가 덕평(德坪)까지 따라갔더니, 이상(李翔)도 전의(全義)에서 와서 선정을 맞이하였는데, 소문을 신의 아비에게 말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최석문 등이 이른바 윤증이 선정의 본원을 의심한 까닭이라는 것이 두 가지인데, 두 가지가 이처럼 허망합니다."
하고, 또 그 아래에 말하기를,
"윤증이 이 두 가지 일 때문에 한 번 통렬하게 말하려 하였으나 송시열이 마침 귀양살이하는 중이므로 시의(時義)에 얽매여 잠자코 발설하지 않았다 하였으나, 송시열이 귀양살이한 것은 을묘년235) 부터 경신년236) 까지입니다. 예설 운운한 것은 그 일의 허실을 논하지 않더라도 을묘년 이전의 일이며, 목천의 말이라면 곧 신유년237) 의 일이라서 최석문도 그렇다고 하였으니, 윤증이 송시열이 귀양살이할 때에 한 번 통렬하게 말하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경신년 이전에 어떻게 신유년의 미래의 일을 미리 헤아리길래 말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윤증의 신유년의 의서(擬書)로 말하면 임술년238) 에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에게 보낸 글보다 더욱 참혹하여 신들이 보고서 절로 심담(心膽)이 다 찢어질 지경이었습니다. 그 헐뜯은 것이 모두가 근거 없고 도리에 어긋나서 여러 말로 변파(辨破)할 것도 못되나, 더욱이 통탄할 만한 것은 송시열의 원수를 갚는 대의(大義)를 아울러 근거 없이 헐뜯으려고 하여 ‘효종(孝宗) 초기에 청대(請對)한 일들은 다 임금의 허락을 받아 이에 의거하여 출처(出處)239) 하는 명분으로 삼으려는 것이어서 지성(至誠)으로 거취하려는 뜻이 매우 부족하니, 결국 뛰어나게 볼 만한 사실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아! 통탄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송시열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기회를 당하고 효종께서 분발하시는 때를 즈음하여 개연(慨然)히 복수하는 의리를 자신의 부담으로 삼았으니, 그 지극한 정성이 몹시 슬프고 죽은 뒤에야 그만두려는 뜻은 금석(金石)을 꿰고 귀신에게 물을 만하였으나, 불행히도 대계(大計)를 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지사(志士)·인인(仁人)이 깊이 한탄하는 바인데, 바로 천하·국가가 함께 불행히 여기는 것을 송시열의 죄로 돌려서 결국 뛰어나게 볼 만한 사실은 없다고까지 말하니, 그렇다면 공자(孔子)가 필삭(筆削)하고 맹자(孟子)가 왕도(王道)를 말한 것도 다 헛소리의 글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 전후의 간악한 무리가 송시열을 시기하고 송시열을 배척하여 거의 못하는 짓이 없었으나, 오히려 감히 이 대의를 가지고 헐뜯지는 못하였는데, 윤증만은 무슨 심장(心腸)으로 감히 이것을 말하여 근거 없이 욕하는 것입니까? 대개 윤선거가 포로가 되어 구차하게 살아 남았기 때문에 그 부자가 대의의 설을 듣기 싫어하고 마침내 헐뜯어 반드시 배척하려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마음에는 천지간에 이 대의가 없어진 뒤에야 그 아비가 구차하게 살아남은 것이 마땅한 도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 것입니다.
아! 바야흐로 윤증이 옷자락을 걷고 말씀을 받으며 제자의 예로 수업하고 유익한 가르침을 청하던 때에는 오직 순종하고 오직 삼가서 스승을 아버지처럼 여기더니, 저버리고 끊을 마음이 싹트면서는 무함할 생각이 깊어지게 되었으니, 암벽이 깎아질러 선 듯 엄준한 기상은 사나운 것으로 여기고, 평생의 뛰어난 대의는 가리켜 가인(假仁)이라 하며, 지극하게 충고하고 선도하는 것은 도리어 혐오하고 노여워하는 단서로 삼고, 경서(經書)를 담론(談論)하고 의리를 강명(講明)하는 것은 모두 헐뜯고 욕할 거리로 돌렸습니다. 이로써 말하자면 40년 동안 교유(交遊)한 함장(凾丈)이 안목을 밝힌 것을 한낱 죄를 성토하기 알맞은 것으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이 글이 나오고부터는 비록 아부하기 좋아하는 무리일지라도 다 놀라와하지 않는 이가 없엇으며, 최석문이 경솔히 발설한 것을 허물하는 자까지 있게 되었는데, 최석문 등은 이것을 지성으로 규간(規諫)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 하면서 충성스런 신하와 간쟁(諫諍)하는 아들에 견주었으니, 이것은 풍습을 병들게 하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최석문 등은 또 박세채의 말을 거론하여, 박세채가 이 글을 참으로 좋다고 하였으나, 다만 송시열이 남의 뜻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없으므로 만류하여 보내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이렇게 속입니까? 박세채가 윤증에게 보낸 글에는 ‘전일의 장서(長書) 대여섯 조목을 가만히 보건대, 대개 그 평생을 거론한 것인데, 경계하는 것이라고는 하나 실은 배척하는 것이었다.’ 하여, 윤증의 정상을 남김없이 밝혀 깨뜨렸으니, 참으로 좋다고 하였다는 것이 과연 실제이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로 말하면, 이미 국가의 금령이 있으므로 감히 근원을 거슬러올라가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만, 한 마디 입증(立證)할 말이 있습니다. 《가례집해(家禮集解)》가 지금도 현존한다는 것은 이진유(李眞儒)도 말하였는데, 《가례집해》가 나온 데를 밝혀 본다면, 주편(主編)한 사람이 이미 그 이름을 정하였으며, 수개(修改)해서 정본(定本)을 만들었다 하였으니, 베껴낸 사람은 그 정해진 이름대로 쓰고 그 정본에 따라 베껴야 할 뿐입니다. 《가례원류》의 이름이 이미 임오년240) 에 이미 정하여졌고 수정(修定)한 본(本)이 이미 금산(錦山)에서 나왔으니, 정양(鄭瀁)이 베껴 쓴 것이 이 뒤에 있었던 일이라면, 무엇에 따라 《가례집해》라 썼으며, 무엇 때문에 그 미정(未定)인 본을 베꼈겠습니까? 이것으로 보건대 정양이 베껴 낸 것은 실로 《가례원류》의 초본(初本)이며, 《가례집해》가 《가례원류》의 초명(初名)이라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윤선거가 서로 베끼고 도운 것을 공편(共編)이라 하는 것도 이미 매우 구차한데 더구나 서로 베끼고 도왔다 하여 그대로 자기집 물건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어찌 상정(常情)으로 차마 할 짓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라도 오히려 차마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스승과 제자 사이이겠습니까?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범연히 편성(編成)한 글이라도 오히려 훔쳐 가질 수 없는데, 더구나 그 스승이 부탁한 것이 분명한 것이겠습니까? 또 유계(兪棨)의 유고(遺稿)를 교수(校讎)241) 하는 일을 오로지 윤증에게 맡겼으나 그 임종시에 부탁한 글을 끝내 거두어들이지 않았으므로, 유계의 집 자손이 찾아서 추간(追刊)해 달라고 청했었는데 이제 부탁한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이 글을 아주 없애려고 했음이니, 대개 그 부탁한 것이 다른 건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최석문 등은 또 유계가 결별하는 글에 송시열에게도 부탁한 말이 있었다 하여 ‘입증할 수 있다.……’ 하니, 이것은 매우 가소롭습니다. 송시열이 유계의 제문에서 이미 그 부탁한 뜻을 말하였는데, 부탁이라는 것은 같더라도 사건이 각각 다르니, 어찌 이것으로써 부탁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계사년242) 의 의서(擬書)라는 것도 어찌하여 발설하였겠습니까? 그 뜻은 ‘부탁[奉托]’이란 두 자를 미봉하려는 것이었는데, 유상기(兪相基)가 몇 차례 다그쳐 물었을 때에 어찌하여 이것으로 대답하지 않고서 다만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만 말하다가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려 물을 데가 없어진 뒤에야 불쑥 냅니까? 더욱이 알 수 없는 것은 윤가(尹家)의 의서가 어찌하여 그리 많으냐는 것입니다. 기유년의 의서이니 신유년의 의서이니 계사년의 의서이니 하여 일에 임하여 헤아려서 구계(舊契)를 밝히려 하면 반드시 나에게 의서가 있다 하여 허다한 꾀를 이 속에 싸넣으니, 이렇게 하기를 마지않다가 조리가 맞지 않고 말이 막힌 뒤에는 장차 몇 개의 의서를 더 낼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묘책이라 생각하더라도 명석한 자가 이미 그 심술을 간파한 것을 어찌합니까? 아! 윤증이 송시열을 저버려 이미 천고(千古)에 사문(斯文)의 죄인이 되었으면 거기에서 그칠 만한데, 죽음에 임박한 해에 또 아버지처럼 섬기던 유계를 저버렸으니, 이것도 그만둘 수 없었습니까? 이것도 묘문(墓文) 때문에 그런 것인지, 또는 의심스러운 본원(本源)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가례원류》라는 글을 돌아보건대, 한낱 분류하여 모은 글에 지나지 않으므로 어느 쪽에 속하더라도 실로 경중(輕重)이 없을 것인데, 단지 나라에서 예우한 사람으로서 그 마음을 정하고 일을 결단하는 것이 이처럼 도리에 어긋난다면 풍성(風聲)이 미치는 바가 세교(世敎)에 폐해가 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권상하(權尙夏)가 이것을 걱정하여 그 서문(序文)을 짓는 김에 분명히 말하여 배척하고 그 본래의 기량(伎倆)을 대략 언급하였으니, 어찌 권상하가 좋아서 한 것이겠습니까? 사문을 위하여 마지못하여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미 타락한 인심을 바로잡는 것은 백대(百代)에 변하지 않을 공론이니, 이것은 바로 없어서는 안될 글인데, 전하께서는 무엇이 미워서 차마 하루도 책머리에 얹어둘 수 없는 것인 듯이 사사로이 불사르셨습니까?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이십니까? 이것은 전하께서 권상하를 이단(異端)으로 대우하신 것입니다. 권상하와 윤증은 그 도(道)가 본디 같지 않거니와, 전하께서 윤증을 바야흐로 대현(大賢)·순유(醇儒)로 대우하신다면 권상하가 오늘의 이단이 되는 것이 본디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만, 백년 뒤에 혐의하고 노여워하던 것이 벗겨져 시비(是非)가 크게 정하여지면 음양(陰陽)·사정(邪正)이 절로 가려질 수 있을 것이니, 후세에 오늘날의 일을 논할 안목을 갖춘 자로서 전하께서 억지로 정하신 시비를 반드시 한결같이 따르지는 않을까봐 염려되는데다가 서문을 불사른 일 또한 반드시 분서(焚書)를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합니다."
하였는데, 소(疏)가 들어가자, 임금이 엄히 비답(批答)하여 몹시 꾸짖었다. 유생들이 감히 재사(齋舍)243) 에 들어가지 못한 채 성묘(聖廟)에 배사(拜辭)하고 물러가니, 임금이 동지성균(同知成均) 조태구(趙泰耉)에게 명하여 들어오도록 권하게 하였다. 유생들이 생각하는 바를 써서 바쳐 전에 말한 것을 다시 아뢰었는데, 조태구가 아뢰기를,
"세도(世道)가 불행하여 사림(士林)이 반목하여 저 선정(先正)이니 이 선정이니 하여 각각 들은 바에 따라 서로 헐뜯으니, 덕이 있는 이를 숭상하는 풍습은 아주 쇠퇴하고 어진이를 무함하는 풍속을 서로 이어받습니다. 이제는 유생이 한 선정을 위하고 한 선정을 배척하여 더 여지가 없을 만큼 능멸하고 모욕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더욱 노하여 상소에 참여하지 않은 유생들을 불러들이라고 명하였다.
윤3월 16일 병자
서리가 내렸다.
성천부(成川府)의 강선루(降仙樓)에 불이 났다. 강선루는 곧 성천의 객관(客館)이다. 모두 3백 30여 간인데, 지난 겨울에 불이 나서 하룻밤에 다 탔다. 도신(道臣)이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장문(狀聞)하였다.
윤3월 18일 무인
충청 감사(忠淸監司) 윤행교(尹行敎)가 상소(上疏)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신의 할아비와 신의 아비는 선정신(先正臣) 유계(兪棨) 부자와 성이 같지 않은 형제인데, 세 세대를 내려온 정의(情義)가 하루아침에 쓸쓸하여졌습니다. 유상기(兪相基)는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더욱 방자하게 하다가 마침내 유배(流配)되기에 이르렀는데, 유계의 손자로서 신의 집과 일을 일으켜서 죄받았으니, 그 연유를 밝히면 실로 신에게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심한 것은 신의 아비가 기사년244) 의 화(禍)를 빚어냈다고 하고 신의 아비가 유계를 저버렸다고 한 것인데, 기사년의 일은 실로 우리 성상께서 아시는 바이거니와, 어찌 신의 아비가 조금이라도 간여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유계로 말하면 신의 아비가 젊었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변함없이 본받고 따른 자이니 어찌 저버렸다고 말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그가 다만 이것을 빌미로 신의 아비를 헐뜯어 욕하는 밑거리로 삼으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즉 권상하(權尙夏)의 서문(序文)에서 보면 일찍이 본원(本源)과 말류(末流)가 어떠한지는 살피지 않고 오직 신의 아비의 설(說)을 욕하는 데에만 급급하였으니, 이러한 정태(情態)는 본디 성상께서 이미 그 사실을 통촉하고 계신 바입니다. 그런데 이 밖에도 낯을 바꾸어 번갈아 나와서 거짓을 꾸며 헐뜯은 것이 그 단서가 하나만이 아니니, 유규(柳奎)·최석문(崔錫文)의 소(疏)도 다 타파(打破)하지 못한 곳이 있으며, 성상께서도 어찌 죄다 통촉하실 수 있겠습니까? 신의 아비가 평소에 번번이 사사로운 일로 조정에 누를 끼치는 것을 매우 민망하게 여기고, 조금만 남의 말이 있으면 문득 일어나 임금 앞에서 다투어 해소하는 것을 매우 외람되게 여겼으므로, 무릇 신의 할아비를 위하여 변무(辨誣)하려는 원근(遠近)의 사우(士友)도 모두 애써 말렸습니다. 갑자년245) 이후로 한편에서 신의 할아비를 헐뜯어 욕한 자가 전후에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이런데도 단지 고(故) 장령(掌令) 나양좌(羅良佐)의 정묘년246) 의 한 소가 있었을 뿐이니, 이것도 신의 아비가 힘써 말렸으나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변명하지 않고 겨루지 않는 의리는 신이 가정에서 따라 익힌 것입니다마는, 이제 신의 성신(誠信)이 성실하지 못하여, 유규·최석문 등이 변명하는 글을 올리는 것을 혹 참여하여 듣지도 못하고 말리지도 못하였으니, 아비를 닮지 못하고 변변치 못한 것을 신은 참으로 스스로 슬퍼합니다. 신의 손 안에서 만들어 유의(遺意)에 어그러지고 죽은 아비에게 치욕을 더하는 것은 실로 신의 마음이 차마 못할 바이므로, 무릇 지금 꾸며낸 말을 변명할 만한 것을 하나도 감히 우리 임금 앞에서 밝히지 못하니, 구구한 이 마음이 또한 슬픕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사문(斯文)이 불행하여 대로(大老)가 죽으매 변괴가 갖가지로 일어나니, 추선(鰌鱓)247) 이 날뛰고 호리(狐狸)248) 가 부르짖으며, 귀역(鬼蜮)의 무리가 낯을 바꾸어 번갈아 나와 선경(先卿) 부자를 근거 없이 욕하는 것이 그지없다. 내가 참으로 놀랍고 한탄스러워서 명확히 판별하여 통렬하게 배척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세도(世道)의 큰 이변이니 통탄스러워 견딜 수 있겠는가? 경(卿)의 소사(疏辭)를 보니 선경을 추념하여 상심이 배가 됨을 느낀다."
하였다. 대개 윤행교는 윤증(尹拯)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윤3월 19일 기묘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마른 해골을 덮고 썩은 육신을 묻는다.’ 하였는데, 대개 산 자에 대한 사랑을 미루어 죽은 자에게까지 미치게 한다는 뜻이다. 하물며 탐라(耽羅)한 지방에서 전후에 굶어 죽은 백성이 수천에 이르니, 그 가운데 의지할 데가 없는 무리는 처음부터 착실히 주검을 거두어 주지 못하여 한데에서 비바람을 맞는 것이 많을 것이다. 내 생각이 여기에 이르러 절로 측은해지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수신(守臣)249) 에게 분부하여 감관(監官)을 정하여 각별히 매장하고 아뢰게 하라."
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이의현(李宜顯)이 대의(臺議)250) 가 있다는 말을 듣고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持平) 홍우행(洪禹行)이 인피(引避)하며 말하기를,
"이의현은 여러 번 번얼(藩臬)251) 의 직임을 맡았으나 성적(聲績)252) 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문득 초자(超資)253) 되었으므로 물정에 만족스럽지 못한데다가, 더구나 근년에 올린 한 소(疏)【이의현이 임진년254) 간장(諫長)이었던 때에 상소하여 이돈(李墩)·이헌영(李獻英)의 일을 발론한 것을 가리킨다.】 는 마음씀씀이가 옳지 않아서 신(臣)이 과연 논박하려고 하였더니, 어떤 사람이 ‘이미 논하려는 뜻을 보였으니 그가 스스로 처신할 것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신이 과연 멈추었는데, 이제 이의현이 방자하게 상소해서는 천청(天聽)에 사실을 날조하여 고해바쳤습니다. 논하여야 할 사람을 미처 논하지 못하였다가 도리어 그가 주장하는 말의 단서가 되었으니, 허약하고 어리석기가 심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퇴대(退待)하였는데, 간원(諫院)에서 처치(處置)하기를,
"탄핵하려다가 곧 멈추어 마침내 대간(臺諫)의 체례(體例)를 어겼으니, 홍우행을 체직(遞職)하소서."
하였다.
정언(正言) 김시혁(金始㷜)이 상소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수상(首相)이 시탕(侍湯)으로 아문(衙門)을 비운 지 오래 되어 온갖 사무가 모두 번잡스러우니,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으로 하여금 가장 긴요한 것을 취하여 대신(大臣)에게 나아가 의논하여 재결을 받아 아뢰고 거행하도록 하소서. 과옥(科獄)을 다시 사핵(査覈)하는 일은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는데, 윤팽수(尹彭叟)의 아비는 그 아들이 무증(誣證)한 정상을 자수했는데도 안문(按問)할 사람이 없어서 미처 즉시 사핵하여 아뢰지 못하였으니, 인퇴(引退)한 형관(刑官)은 재촉하여 출사(出仕)시키고 아직 차출하지 않은 자도 곧 대신할 자를 차출하여 옥사(獄事)가 지체되지 않게 하소서. 반유(泮儒)255) 이시정(李蓍定) 등의 소(疏)는 선정(先正)을 헐뜯고 제신(諸臣)을 욕하며 삼히 분서(焚書)를 불러일으켰다는 따위의 말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는데, 내쳐 버리는 벌을 주지 않으면 사설(邪說)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끝에 말하기를,
"성균관(成均館)의 초기(草記)256) 는 저편이니 이편이니 하여 다같이 거론하고 아울러 일컬어 굽고 곧은 것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판별되지 않았으니, 삼가 중신(重臣)을 위하여 안타깝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윗 항목에 아뢴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고, 추조(秋曹)257) 에서 과옥을 사핵하는 일은 정원(政院)에서 신칙(申飭)하라. 그 밖에 논한 것도 좋으나 처분은 알맞게 하는 것이 귀중하다. 성균관 초기의 결어(結語)는 대개 시비가 명백하지 않은 데로 돌아가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윤3월 20일 경진
홍치중(洪致中)을 승지(承旨)로, 심상윤(沈尙尹)을 장령(掌令)으로, 정도복(丁道復)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윤3월 21일 신사
최석항(崔錫恒)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삼고, 이선부(李善溥)에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특별히 제수(除授)하였다.
각청(各廳)의 권무 군관(勸武軍官)258) 의 시재(試才)를 설행(設行)하였다. 전(前) 선전관(宣傳官) 김중일(金重一)은 일찍이 내사(內射)259) 때에 농간을 부려 죄받은 자인데, 이름이 권무액(勸武額) 가운데에 있었으므로 임금이 단자(單子)를 보고 특교(特敎)를 내어 빼어버리라고 명하였으며, 정원(政院)에서 그 대장(大將)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3월 22일 임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작년에 대신(大臣)의 건청(建請)으로 인하여 대장(大將)이 유고하여 도제조(都提調)가 습진(習陣)을 대행한 일이 있었는데, 고제(古制)가 아닙니다. 때가 평안하여 일이 없는 때이므로 명을 받고 정벌을 전담하는 예와는 같지 않거늘, 도리어 재상(宰相)의 중책을 굽혀서 융행(戎行) 사이에 임하니, 어찌 체통에 큰 손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군문(軍門)의 도제조가 습조(習操)를 대행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일전에 괴원(槐院)260) 의 관원이 선정(先正)을 헐뜯은 유생(儒生)을 벌주는 일을 발론(發論)하여 간통(簡通)하였는데, 괴원이 관원 중에 왕법(王法)으로 바로잡는 것을 어진이를 죽이는 것이라 하고 종묘(宗廟)에 고하자는 정론(正論)을 흉당(凶黨)으로 지목한다고 답통(答通)에 쓴 자가 있다 합니다. 아! 저 지난번의 당인(黨人)이 어진이를 죽인 참화(慘禍)【곧 기사년261) 에 송시열(宋時烈)을 죽인 일을 가리킨다.】 와 종묘에 고하려는 흉계(凶計)는 실로 사류(士類)가 함께 분개하며 국인(國人)이 같이 미워하는 바이니, 본디 오늘날 다투는 시비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데, 이러한 무리들이 불쑥 일어나 머뭇거리면서 넌지시 그 사심(私心)을 부리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한탄스럽습니다. 청컨대 앞장서서 답통한 자를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세 번째 건의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맨 끝의 일은 매우 놀랍고 한탄스러우니 삭직(削職)하라."
하였다. 이때에 승문 정자(承文正字) 김홍석(金弘錫)이 전후에 상소한 유생을 벌주려고 서간(書簡)을 보내어 의논을 통하였는데, 정자(正字) 강박(姜樸)과 성세욱(成世頊)·이광부(李光溥) 등이 답하기를, ‘모름지기 왕법으로 바로잡은 것을 어진이를 죽인 것이라 하고 종묘에 고하자는 정론을 흉당으로 지목한다고 말하고, 또 반유(泮儒)의 소(疏) 가운데에 감히 욕하지 않아야 할 선현(先賢) 【윤휴(尹鑴) 무리를 가리킨다.】 을 욕하였으니, 이것을 죄목으로 더하여야 따를 수 있다.’ 하였다. 이에 윤증(尹拯)의 일이 기사년의 뭇 간사한 자와 연관된 것이 남김없이 드러났으므로, 시배(時輩)가 크게 부끄럽게 여기니, 정언(正言) 송진명(宋眞明)이 마지못하여 이 논계(論啓)를 내어 조금 스스로 남다른 생각을 하였는데, 시배는 오히려 계사(啓辭) 가운데에 어진이를 죽인 참화를 국인(國人)이 같이 미워한다는 따위의 말이 있다 하여 송진명을 허물하였다. 홍문록(弘文錄)262) 이 초선(抄選) 때에 송진명이 이 일에 걸려 본관록(本館錄)에 들어가는 것이 막혔으니, 그 겉으로 배척하는 체하면서 남몰래 영합하는 정상을 엄폐할 수 없었다.
남원현(南原縣)에 사당을 세워 임진년263) 에 전사한 천장(天將)264) 이신방(李新芳)·모영선(毛永先)·장표(蔣表) 등 세 사람을 제사하고, 또 오흥업(吳興業)을 칠충신(七忠臣) 정기원(鄭期遠) 등의 사우(祠宇)에 추향(追享)하라고 명하였다. 오흥업은 곧 그때의 군향 유사(軍餉有司)이었는데 전사한 자이다. 이에 앞서 호남 암행 어사(湖南暗行御史) 이진유(李眞儒)가 아뢰니 본도(本道)에 명하여 상세히 살펴 연유를 갖추어 아뢰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윤허하였다.
윤3월 23일 계미
서명균(徐命均)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강박(姜樸)을 안주(安州)로 귀양보냈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을 때에 도승지(都承旨) 오명준(吳命峻)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괴원(槐院)의 관원은 참으로 매우 한심한데 대간(臺諫)이 논계(論啓)하여 의율(擬律)한 것은 너무 가볍습니다.’ 하고, 도제조(都提調) 서종태(徐宗泰)도 이어서 말하니, 임금이 강박은 조의(造意)가 음참(陰慘)하므로 삭직(削職)도 가볍다 하여 원배(遠配)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정언(正言) 송진명(宋眞明)이 의율이 부당(不當)하다 하여 인피(引避)하니, 처치(處置)하여 체직하였다.
윤3월 24일 갑신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왕언(王言)을 대찬(代撰)하는 일은 조심하고 삼가야 할 것인데, 강원 감사(江原監司) 홍중하(洪重夏)에게 내리는 교서(敎書) 가운데에 호서(湖西)에 새 사당이 비로소 세워졌다는 【홍중하는 전에 충청도 관찰사이었는데 백성이 생사(生祠)를 세운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 구절의 말은 매우 미안하게 되었으니, 지제교(知製敎) 권세항(權世恒)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고쳐서 들이게 하라."
하였다.
윤3월 26일 병술
김계환(金啓煥)을 정언(正言)으로, 이세덕(李世德)을 지평(持平)으로, 송성명(宋成明)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윤3월 27일 정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상차(上箚)하기를,
"삼가 보건대 간원(諫院)에서 군문(軍門)의 일을 진계(陳啓)하여 논한 것은 반드시 신(臣)이 처음으로 청한 것으로 의심하여 비난하는 것으로 논평한 것입니다. 군문의 제조(提調)가 대장(大將)의 자리를 대행한 일은 이미 선조(先朝) 이전부터 그러한 전례가 있은 지 오래 되었고, 신이 목격한 바입니다. 고(故) 상신(相臣) 김수흥(金壽興)·김석주(金錫胄)는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대행에 힘썼으나 그때 비난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는데, 이제 대간(臺諫)의 논계(論啓)에는 신이 청한 데서부터 처음으로 있게 된 듯이 말하였습니다. 오랜 전례가 있는 일일지라도 단지 신에게 관계되었으면 마침내 죄과가 되니, 이것은 신이 수립(樹立)하여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비답(批答)하여 위유(慰諭)하였다.
윤3월 29일 기축
이조 판서(吏曹判書) 윤덕준(尹德駿)이 면직되었다. 윤덕준은 연전에 이 벼슬에 제배(除拜)되었다가 대신(臺臣)이 상소하여 논박하였기 때문에 사직하고 체직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제배되었으나, 또 전의 일을 인책하여 힘껏 사양하였다. 임금의 재촉이 매우 지극하고 전후에 특별히 분부하여 나오도록 권한 것이 여러 번이었으나, 끝내 굽히지 않아서 반드시 체직되고야 말았다. 사람들이 그 처의(處義)가 마땅한 것을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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