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7권, 숙종 42년 1716년 4월

싸라리리 2025. 11. 30.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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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임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이 상차(上箚)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신(臣)이 가만히 보건대 오늘날 조정의 논의가 어그러지고 성상의 마음이 몹시 괴로우시어 시비의 공정함을 크게 잃었으니, 이것이 어찌 화평한 복이겠습니까? 더구나 성상께서는 바야흐로 돌이켜 생각하고 희노(喜怒)를 경계하여 하늘의 화기(和氣)를 맞아들이셔야 할 것인데, 수응(酬應)하는 번거로움이 평소보다 심하므로 순종하고 거역하는 사이에 손상이 반드시 많으실 것이니, 이것이 어찌 종사(宗社)와 백성을 위하여 스스로 가벼이하지 않는 도리이겠습니까? 대저 시비라는 것은 백세(百世)에 공정한 것이므로 하루아침에 억지로 정할 수 없고 추기(樞機)265)  라는 것은 천리(千里)에서 응하는 왕언(王言)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불행히 성세(聖世)에서 사론(士論)이 갈라진 지 이미 수십 년이 되어 물과 같고 불과 같아서 그 깊고도 더운 것을 막지 못하거니와, 전하께서 비록 중도를 잡아서 표준을 세우시더라도 오히려 말세의 풍속을 교화하기 어려울까 걱정되는데, 이제 한때에 위벌(威罰)로 치우치게 제어하려 하시니, 이것이 어찌 섶을 안고 불을 끄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신처럼 좁은 학문으로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나양좌(羅良佐) 등 몇 사람이 정묘년266)  에 무함한 일 【윤선거(尹宣擧)를 위하여 송시열(宋時烈)을 공격하여 배척한 일이다.】 도 오히려 마음에 놀라운데, 더구나 이제 뭇사람의 말이 고슴도치 털이 일어나듯 하며 꺼리는 바가 없는데도 성상께서는 도리어 그 말을 받아들여 조금도 꾸짖지 않으시니, 어찌 인심을 복종시키고 시비를 정할 수 있겠습니까? 근간에 일을 논하는 자는 비단 미천한 사람뿐만 아니라, 기구 대신(耆舊大臣)이 아니면 시종신(侍從臣)인데, 성상께서는 귀역(鬼蜮)이나 추선(鰌鱓)·호리(狐狸)로 지목하셨습니다. 《예기(禮記)》에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모욕할 수는 없다.’ 하였는데, 하물며 대신이겠으며 시종신이겠습니까? 임금의 말은 이러하지 않아야 할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지나친 견벌(譴罰)과 미안한 사지(辭旨)를 도로 거두어 인심이 불안하고 국사(國事)가 해이해지게 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이번 일은 국시(國是)가 이미 정하여졌다. 오늘날의 처분이 어찌 과연 조금이라도 치우치게 각박한 데에 가깝겠는가? 귀역이나 추선·호리라는 말은 대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4월 7일 병신

평안도 삭주부(朔州府)에 서리가 내리고, 경상도 개령현(開寧縣)에 지진(地震)이 있었고, 금산군(金山郡)에서는 천둥소리가 서북방에서 일어났다.

 

4월 8일 정유

이광좌(李光佐)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태좌(李台佐)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조태억(趙泰億)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정도복(丁道復)을 승지(承旨)로, 오명준(吳命峻)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이야(李壄)를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4월 9일 무술

간원(諫院) 【정언(正言) 김시혁(金始㷜)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서간(書簡)을 보내어 처벌을 논하는 것은 본디 사류(士類)의 공론이고, 때를 타서 흉언(凶言)을 일으키는 것은 본디 당인(黨人)의 여투(餘套)입니다. 탄핵하는 논의가 앞장선 자에게만 미치고 죄를 같이한 자에게는 벌이 주어지지 않았으니, 그들은 마땅히 뉘우치고 감히 변명하지 않아야만 할 것인데, 괴원(槐院)의 관원 강윤(姜綸) 등 4인은 정순(呈旬)267)  을 핑계하여 더욱 방자하게 도리에 어그러지고 거만한 짓을 합니다. 아! 오늘날 사론(士論)이 함께 다투는 것은 단지 학문의 순박(醇駁)268)  과 마음의 공사(公私)에 있을 뿐이고, 본디 한쪽 사람의 죄를 얽어 화(禍)를 빚은 일에는 상관하지 않았으니, 법을 바로잡고 종묘(宗廟)에 고한다는 따위의 말을 벌목(罰目)에 끼워 넣으려 한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처음에는 어진이를 높이는 뜻에 슬쩍 붙어서 협잡할 생각을 부리려 하고, 끝에는 진실을 현혹할 계책을 교묘히 부려 사사로운 화를 풀려 하면서, 주광정(朱光庭)·가역(賈易)이 천당(川黨)269)  을 논하여 배척한 것은 끝내 서단(舒亶)·이정(李定)270)  의 무리가 화를 일으킨 일과 같은 예로 볼 수 없다는 것을 특히 몰랐으니, 아! 또한 무엄합니다. 청컨대 승문 박사(承文博士) 강윤(姜綸)·부정자(副正字) 성세욱(成世頊)·강필경(姜必慶)·이광부(李光溥) 등을 모두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승문 부정자 성도형(成道享)은 공론이 준열히 일어났을 때에 감히 훼방할 마음을 먹고 정순(呈旬)을 핑계하여 방자하게 선정(先正)을 무함하였습니다. 아! 신유년271)  의 글은 뜻이 매우 정성스러우며 말이 간절하고 바른 것이 많은데, 성도형은 감히 천고(千古)의 간흉(奸凶)의 죄목에 달하였다고도 말하고, 9년 전을 소급하여 헤아려서 이미 기사년272)  의 죄안(罪案)을 만들었다고도 말하며, 단지 변변치 못한 소인들의 말만으로 두 가지 말을 만들어 선정을 해칠 계책을 부리려 하였으니, 사람이 무엄하기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전 개성 유수(開城留守) 이의현(李宜顯)은 승탁(陞擢)된 뒤에 물의가 있게 되어 연백(筵白)273)  하여 체직되었으니 제수(除授)한 자급(資級)은 저절로 응당 거두어야 할 것인데, 전조(銓曹)에서는 계품(啓稟)하지 않고 곧바로 지신(知申)274)  에 의망(擬望)하였으므로 정례(政例)에 있어서 경솔함을 면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이의현의 가자(加資)는 도로 거두고 이조(吏曹)의 해당 당상(堂上)은 추고(推考)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강윤·성도형의 일만을 따랐다. 이의현의 자급은 해조(該曹)에 명하여 상고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뒤에 마침내 그 자급을 도로 거두었다. 김홍석(金弘錫)이 처음 벌간(罰簡)을 보낼 때에 성도형에게 저지될까 염려하여 보내어 보이려하지 않았다가, 원리(院吏)가 안된다고 고집하므로 김홍석이 억지로 따르되 맨 뒤에 전하여 보이게 하였더니, 성도형이 노하여 사장(辭狀)을 올렸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이른바 신유년의 의서(擬書)라는 것은 선정(先正) 【곧 송시열(宋時烈)이다.】 의 죄상을 나열한 것으로서 매우 참혹하게 해독을 끼쳤는데, 이것을 혹 방불하다고 한다면 선정은 변변치 못한 소인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저들 화를 일으킨 무리 【곧 종묘(宗廟)에 고하고 안율(按律)하기를 청한 뭇 간사한 자를 가리킨다.】 를 어찌 주벌(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가깝지 않다고 한다면 무함한 자 또한 변변치 못한 소인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반유(泮儒)가 엄한 말로 준열히 배척한 것이 어찌 죄이겠습니까? 이제 김홍석은 저들 【곧 강윤 등을 가리킨다.】 에 대하여 이미 흉론(凶論)이라고 배척하고서 이편 【반유(泮儒) 등을 가리킨다.】 에게는 또 선정을 헐뜯는다고 배척하여 그 말의 뜻이 절로 서로 모순되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이러하고도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대저 사림(士林)을 해치려고 【상소한 유생을 벌주려는 일을 가리킨다.】  마음쓴 것이 참혹하여 기사년에 화를 꾸민 무리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도, 오히려 그 같은 조리(條理)로 함께 관통하는 자취를 엄폐하려고 겉으로는 흉론을 배척하여 끊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실로 그 성세(聲勢)를 도와서 이루었습니다. 대저 의서 가운데에서 거짓을 꾸민 것은 모두가 극악(極惡)한 대죄(大罪)이니, 저 기사년의 죄안은 이미 9년 전으로 소급하여 헤아린 데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하였으므로, 시배(時輩)가 보고서 크게 부끄럽고 노엽게 생각하여 드디어 탄핵하여 파직하였다.

 

4월 10일 기해

종묘(宗廟)의 제물(祭物)이 《오례의(五禮儀)》에 어그러지는 것을 바로잡으라고 명하였는데,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오례의》와 《종묘의궤(宗廟儀軌)》의 도식(圖式)을 상고하니, 각실(各室)의 준상(尊床)에는 서쪽에 명수(明水)·현주(玄酒)를 진설(陳設)하는데 지금은 단지 공준(空尊)만을 진설합니다. 대갱(大羹)275)  은 와등(瓦㽅)에 담아 첫 줄에 올리는데, 《오례의》의 주(註)에는, ‘대갱은 태고(太古)의 국으로 간을 하지 않은 고깃국인데, 후세의 임금이 고례(古禮)를 지키기 때문에 그것을 진설한다.’고 하였는데도 지금은 냉수에 쇠기름 조금을 썰어 넣어서 쓰므로 예제(禮制)에 크게 어그러지니, 고례(古禮)대로 고기를 삶아서 국을 만들어 올려야 하겠습니다. 돈박(豚拍)276)  은 《오례의》의 도식에 ‘잘게 썰어 제(韲)277)  를 만든다.’ 하였는데, 지금은 전육(全肉)을 두(豆)에 담습니다. 이미 익힌 돼지 고기를 두에 담아서 진설하는데 또 익힌 돼지고기 한 덩어리를 두에 담아 진설하여 한 물건을 두 가지로 쓰는 것은 반드시 중간에 잘못된 일일 것이니, 또한 마땅히 예제대로 썰어서 써야 하겠습니다. 그 밖에 병이(餠餌)가 도식에 어그러진 것도 많이 있다 하니, 청컨대 이 뒤로는 한결같이 《오례의》의 도식대로 베껴서 등록(謄錄)을 만들어 봉상시(奉常寺)와 종묘서(宗廟署)에 나누어 주고, 전사관(典祀官)과 본서(本署)의 관원으로 하여금 그 도식과 등록을 살펴서 검찰(檢察)하고 진설을 감독하게 하는데, 사직(社稷)·각전(各殿)과 여러 산천(山川)의 크고 작은 향사(享祀)에도 마찬가지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11일 경자

경기 광주(廣州) 등 다섯 고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말박만 하여 다친 사람과 가축이 많고, 까막까치가 깔려 죽고, 나무가 꺾이고 뽑히고, 전답이 피폐하고 파손되었다. 양주(楊州) 와공리(瓦孔里)의 민가에서는 열 세 살 먹은 아이가 우박에 맞아 곧 숨졌다. 경상도 안동(安東)·예천(醴泉)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거위알만 하여 까막까치가 많이 죽었다.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4월 16일 을사

박희진(朴熙晉)을 사간(司諫)으로, 이진유(李眞儒)를 정언(正言)으로, 유봉휘(柳鳳輝)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4월 23일 임자

안시상(安時相)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4월 28일 정사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가 끝나고서, 도제조(都提調) 서종태(徐宗泰)가 다시 정원(政院)에 신칙(申飭)하여 긴급하지 않은 문서는 일체 봉입(捧入)하지 말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평안도 의주(義州)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거위알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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