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경신
금부(禁府)에서 전 판서(判書) 권상유(權尙游)를 나문(拿問)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처음 임진년279) 과시(科試)에서 궐문(闕門)이 열려 있었는지 닫혀 있었는지를 사문(査問)할 때 권치대(權致大)라는 자가 본디 무뢰한 사람으로서 권상유와 동종(同宗)이 되는데, 그때에 궐문이 닫혀 있지 않아서 그도 시장(試場)을 설치한 뒤에 막히지 않고 드나들었다고 스스로 말하였으므로, 권상유가 물은 즉시 상소하여 그 정상을 아뢰어서 드디어 문이 열려 있었던 증거로 삼았다. 이때에 이르러 궐문의 일이 다시 제기되자 다시 권치대를 가두고 구핵(究覈)하였는데, 권치대가 시사(時事)가 크게 바뀌어 권상유의 형세가 외로와진 것을 보고는 전에 말한 것을 모두 뒤집어서 권상유를 무함하니, 권상유가 드디어 나문받게 되었다.
5월 2일 신유
이의현(李宜顯)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박필몽(朴弼夢)을 지평(持平)으로, 송정명(宋正明)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송성명(宋成明)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김춘택(金春澤)은 흉험(凶險)하고 음특(陰慝)하여 사람의 도리로 논할 수 없습니다. 무릇 변고가 있으면 언제나 바싹 개입하여 간사한 정상과 속인 자취가 분명히 나타나서 엄폐하기 어려우므로, 전에 이미 여러 번 귀양갔었습니다. 점차 용서하여 돌아오게 한 것은 실로 탕척(蕩滌)하는 지극한 인덕(仁德)에서 나온 것인데, 뉘우칠 생각은 하지 않고 원한을 더욱 품어 밤낮으로 꾀하는 것은 모두가 조정을 무너뜨려 어지럽혀 그 화심(禍心)을 부릴 생각이니, 유생의 상소와 죄수의 공사(供辭)가 흔히 그 손에서 나오므로 국언(國言)이 왁자하고 노인(路人)이 지목합니다. 저번에는 호남(湖南)에 가서 그 심복을 시켜 감영(監營)의 돈을 받아내서 이식(利息)을 취하여 이익을 나누고, 시골 구석의 멍청한 무리를 모아 노자를 후하게 주어 선정(先正)을 헐뜯는 논의에 앞장서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서울에 둘 수 없으니, 청컨대 먼 곳에 정배(定配)하소서. 아산 현감(牙山縣監) 박필문(朴弼文)은 창관(倉官)이었을 때부터 이미 청렴하지 않다는 책망이 많았고, 도임한 뒤로 가렴 주구(苛斂誅求)한 정사는 일일이 들추어내기에도 어려우니, 송금(松禁)280) ·우금(牛禁)281) 으로 절도(節度) 없이 징속(徵贖)282) 하며 영어(囹圄)는 가득차고 이졸(吏卒)은 거리낌없이 침학(侵虐)하였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담양 부사(潭陽府使) 조태흥(趙泰興)이 능력을 뽐내고 당로를 잘 섬기는 꼴은 세상에서 침뱉고 욕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두 번 해읍(海邑)을 맡아 오로지 탐욕을 일삼다가 수의(繡衣)283) 에게 탄핵받았는데, 얼마 안되어 문득 호남의 웅부(雄府)에 제수(除授)하는 제목(題目)이 내려졌으므로 물정이 놀라와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순천(順天)은 호남의 웅부(雄府)로서 평소에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지는데, 부사(府使) 홍대유(洪大猷)는 용렬하고 잗단 무리로서 외람되게 본부(本府)에 제수되었습니다. 늙어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산란하므로 정사는 하리(下吏)에게 맡기고, 집이 이웃 고을에 있는데 재물을 잇따라 실어나르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판의금(判義禁) 윤덕준(尹德駿)이, 이빈흥(李賓興)이 초사(招辭)에 침척(侵斥)한 것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빈흥이 다시 공초(供招)할 때에 조정순(趙正純)을 증인으로 끌어대면서 또 말하기를, ‘조정순에게서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전한 자는 곧 그 지친(至親)이니, 증인으로 삼을 수 없어도 조정순에게 곧바로 물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므로, 형조(刑曹)에서 금부(禁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윤덕준은 이빈흥이 말을 전한 자를 가리켜 고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조정순을 지레 나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아뢰어서 그것을 그만두었는데, 이빈흥이 이 때문에 초사 가운데에서 윤덕준을 침척하였으므로 윤덕준이 상소하여 변명하였다.
송충(松蟲)이 치열하게 일어났는데, 한성부(漢城府)에서 오부(五部)284) 의 방민(坊民)을 징발하여 주은 지 사흘 만에 그쳤다.
5월 3일 임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내일이 효종(孝宗)의 기일(忌日)이라 하여 이날부터 소식(素食)하였는데, 도제조(都提調) 서종태(徐宗泰)가 임금이 바야흐로 편찮은 중이라 하여 상선(常膳)을 쓰기를 청하고, 제신(諸臣)도 이어서 매우 힘써 청하니, 임금이 애써 따랐다.
5월 4일 계해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보였는데, 이 뒤로 여러 번 보였다.
황해도 곡산(谷山)·서흥(瑞興)·장연(長淵) 등 고을에 서리가 내렸다.
5월 5일 갑자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니, 임금이 조태흥(趙泰興)의 일만을 따랐다.
5월 6일 을축
평안도 강계(江界)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비둘기알만 하였다.
윤행교(尹行敎)·정식(鄭栻)을 승지(承旨)로, 송성명(宋成明)을 수찬(修撰)으로, 홍치중(洪致中)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니, 임금이 박필문(朴弼文)·홍대유(洪大猷)의 일만을 따랐다.
5월 10일 기사
제주 별견 어사(濟州別遣御史) 황귀하(黃龜河)가 장계(狀啓)하여 회전복(灰全鰒)을 해마다 봉진(封進)하는 어려움을 말하니, 임금이 우선 감면하라고 특별히 명하고 이어서 본도(本島)에서 진상(進上)하는 물건은 모두 3분의 2를 줄이라고 명하였다.
5월 11일 경오
이집(李㙫)을 승지(承旨)로, 권변(權忭)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논핵(論劾)하기를,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징해(李徵海)는 여러 번 주부(州府)를 맡았으나, 본디 염간(廉簡)하다는 칭찬은 없고 권문(權門)에 출입하여 세력에 붙좇는다는 비난만 많이 받았습니다. 저번에 탄핵받은 뒤에 문득 해군(海郡)에 제수되어서는 곧 체직(遞職)할 것을 도모하여 스스로 허물을 씻는 것으로 삼더니, 외람되게 본주(本州)에 제수되어서는 물의가 시끄러워도 모르는 체하고 양양하게 부임하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형조(刑曹)의 현재 갇혀 있는 죄인 이빈흥(李賓興)은 전후에 공초(供招)를 바친 것이 오직 안사(按査)하는 신하를 헐뜯어 욕하는 것으로 일삼았고, 그 증질(證質)이 이미 이루어져 신문(訊問)하려 하면 또 제 아들을 시켜 격고(擊鼓)하여 어지러이 말하는 것이 외람되고 난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스스로 형관(刑官)을 구축(驅逐)한다 하고 옥사(獄事)의 큰 기관(機關)을 방해하여 한 번 공초하고 두 번 공초할 적마다 추당(秋堂)285) 으로 하여금 번번이 다 인퇴(引退)하게 하였으니, 오늘날 기강이 무너졌다고는 하나 일개 죄수가 어찌 감히 멋대로 농락하며 조정을 업신여기는 것이 이처럼 무엄할 수 있습니까? 청컨대 먼저 엄히 형신(刑訊)하여 죄를 징계하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말단의 일만 따랐다.
수찬(修撰) 송성명(宋成明)이 상소(上疏)하여 말하기를,
"위패(違牌)한 자를 단지 추고(推考)하기만 하고 파직(罷職)하지 않으면 임금이 신하를 어거(馭車)하는 도리에 어그러지고 도리어 분수를 넘어 업신여기는 데로 돌아갑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의 병환이 오래 끌어 위중한 채로 여러 번 한서(寒署)를 거치시니, 신하가 근심하는 데 어찌 제 몸을 돌보겠습니까? 외정(外廷)에서 기거(起居)하는 반열(班列)을 문득 철폐하는 것은 부당하니, 성지(聖旨)를 거두어 아랫사람이 그 정성을 펼 수 있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2일 신미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고성(高城) 유점사(楡岾寺)에 어실 중당(御室中堂)이라는 한 전각(殿閣)이 있는데, 인조(仁祖)·현종(顯宗)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두고 그 앞에 두 개의 큰 상(床)을 놓고서 삭망(朔望)과 기신(忌辰)·생신(生辰)에 다 절에서 크게 향사(享祀)한다 합니다. 아! 엄숙한 청묘(淸廟)가 바로 우리 조종(祖宗)께서 오르내리시는 곳인데, 이제 사문(沙門)286) 에서 제사하여 치도(緇徒)287) 에게 공양을 받으시니, 그 외람된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후세에 좋은 교훈으로 남길 수 없는 일인데, 제도(諸道)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모두 적발하여 금단(禁斷)하게 하소서. 저번에 전 장령(掌令) 경성회(慶聖會)가 한 소(疏)를 바치고, 사당(私黨)을 모아 뜻을 다하여 영구(營救)합니다. 박만정(朴萬鼎)으로 말하면 좌죄(坐罪)된 것이 매우 중하고 명의(名義)에 관계되는데도 근거 없는 말로 구해(救解)하여 복직을 청하기까지 하니, 조정을 시험하고 당여(黨與)를 사사로이 감싸는 버릇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아뢰기를,
"경주 부윤(慶州府尹) 정필동(鄭必東)은 본디 용렬하고 잗단 사람으로서 권문(權門)에 아첨하여 몸소 천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맡고 외람되게 서읍(西邑)에 제수되어서는 탐욕한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으니, 본직(本職)의 제수는 매우 인망에 벗어납니다. 읍비(邑婢)를 현혹하여 해괴한 일을 많이 하였고, 본부(本府)에서 설치한 삼전(蔘田)은 진공(進供)의 수요를 장만하기 위한 것인데 약에 쓴다는 핑계로 절도(節度) 없이 캐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과천 현감(果川縣監) 이기좌(李箕佐)는 사람됨이 어리석어서 전혀 일을 보살피지 못하므로 아전이 농간하여도 하는 일 없이 벼슬자리에 앉아 알지 못하니, 조적(糶糴)할 때에는 백성의 비방을 많이 받고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문이 경외(京外)에 퍼졌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교리(校理) 이세근(李世瑾)이 상소(上疏)하여, 윤증(尹拯)의 시호(諡號)는 시장(諡狀)을 기다릴 것 없이 빨리 거행하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당록(堂錄)288) 이 지체되는 것은 미안합니다. 관각(館閣)의 당상(堂上) 1원(員)이 권점(圈點)에 참여하는 것이 본디 정례(定例)인데,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는 인퇴(引退)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제학(提學) 최규서(崔奎瑞)는 올라올 기약이 없으니, 또한 제때에 돈유(敦諭)하여 권면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헌납(獻納) 송택상(宋宅相)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이의현(李宜顯)은 과옥(科獄)을 맨 먼저 발론한 사람인데, 그 마음쓴 것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명백하여 엄폐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사문(査問)하는 일이 바야흐로 한창이라서 미처 결말이 나지 않았으니, 공의(公議)에 있어서는 본디 청현직(淸顯職)에 거론할 수 없을 것인데, 묘당(廟堂)의 천거와 전부(銓部)의 의망(擬望)에는 조금도 구애되는 것이 없으니, 신(臣)은 삼가 의혹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이의현의 일은 논한 것이 마땅한지 모르겠다."
하였다.
5월 13일 임신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고, 이징해(李徵海)는 체차(遞差)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헌납(獻納) 송택상(宋宅相)의 소(疏) 가운데에서 이의현(李宜顯)의 일을 논한 것은 어의(語意)가 지극히 심각하니, 매우 미안하다. 그때 이의현은 마침 간장(諫長)이었으므로 소문에 따라 논열(論列)하는 것이 그 직무인데, 무슨 마음을 썼다고 말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이번에 과옥(科獄)을 사문(査問)한 것이 충분히 명백하여 깨끗이 벗어나게 되었으니, 당초에 명을 받아 옥사(獄事)를 안문(按問)한 제신(諸臣)은 본디 논할 만한 일이 없는데, 이래도 죄준다면 뒷폐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내 뜻은 본디 이러하니, 대저 피차를 물론하고 무릇 논의가 과격한 자는 보고 싶지 않을 뿐더러 반드시 억제하는 것이 곧 내 평일의 마음이다."
하였다. 이튿날 헌납 송택상이 임금의 분부가 지엄(至嚴)하다 하여 인피(引避)하여 퇴대(退待)하였는데, 헌부(憲府)에서 처치하여 출사(出仕)하였다.
5월 14일 계유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삼가 보건대, 금오(金吾)289) 에서 언계(讞啓)290) 하여 수인(囚人) 권응(權譍)을 형신(刑訊)하기를 청하였는데, 왕부(王府)291) 는 엄중히 하라고 판하(判下)하셨으니, 이것은 옥사의 체례(體例)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권응은 당초에 망언(妄言)하여 조정에 아뢴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조언(造言)하여 남을 무함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사로이 말한 일인데, 처음에는 수문(囚問)받다가 전전(輾轉)하여 형신받게 되었습니다. 이번 일이 본디 국가의 중대한 데에 관계되지 않는 일인데, 선비가 혹 항양(桁楊)292) 의 아래에서 숨진다면 어찌 매우 불쌍하고 인성(仁聖)의 정사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권응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명하며 신문(訊問)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미우므로 한 번 신문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다마는, 단지 이번 일이 국가의 중대한 데에는 관계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은 참으로 경(卿)의 말과 같으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권응은 이름 있는 선비이다. 임진년293) 정시(庭試) 때에 거자(擧子)294) 로 시장(試場)에 들어가다가 돈화문(敦化門)이 닫히지 않아 상(床)을 인 어린아이가 그 문을 거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사사로이 친한 벗과 수작한 일이 있었는데, 드디어 나문(拿問)받게 되어서 사실대로 대답하고 풀려났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궐문(闕門)에 관한 일을 사핵(査覈)하였는데, 시배(時輩)가 권응에게 분노하는 것이 매우 깊어서 나문하기를 청하고 이어서 고문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서종태가 차자(箚子)를 올려 그것이 옳지 않음을 논하였다. 이날 금오에서 또 권응에게 형을 가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형신하지 말고 죄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정언(正言) 이진유(李眞儒)가 인피(引避)하며 말하기를,
"김춘택(金春澤)이 귀양가면 조정이 조금 편안하고, 돌아오면 사단(事端)이 번번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실로 뭇사람이 가리키는 것이고 뭇사람이 전하는 것이니, 하루도 서울에 둘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제 사유(赦宥)받아 돌아오게 된 뒤에 단속이 점점 느슨하여져서 방자하기가 더욱 심하므로 제때에 재제하지 않으면 참으로 국가를 해칠 우려가 있으니, 이것이 신(臣)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청하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대계(臺啓)가 겨우 전달되자 그 아우 김운택(金雲澤)이 이미 격고(擊鼓)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김운택의 형 김보택(金普澤)의 소(疏)가 겨우 호영(湖營)에서 왔다가 정원(政院)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도로 내려보내졌는데, 대개 그 대의(大意)는 김운택이 갇혀서 공초(供招)한 것과 같고, 또 소 끝에 ‘진실로 억울한 죄의 단서가 있으면 또한 거짓을 꾸며 남을 죄에 빠뜨리는 정상을 밝힐 것이다.’ 하였다 합니다. 넌지시 대신(臺臣)을 죄주기를 청한 뜻이 방자하고 무엄하니, 아! 또한 통탄합니다."
하고, 대사간(大司諫) 이세최(李世最)도 논계(論啓)에 참여하였다 하여 인피하여 모두 퇴대(退待)하였는데, 헌부(憲府)에서 처치하여 출사(出仕)하였다.
헌부(獻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삼가 보건대 금부(禁府)의 계목(啓目)에 대한 판하(判下)에 죄인 권응(權譍)은 형신(刑訊)하지 말고 죄를 정하라는 명이 있으니, 신(臣)은 저으기 의혹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대저 대정(大庭)에서 선비를 시취(試取)하던 날에 궐문(闕門)이 열려 있고 닫혀 있는 것이 얼마나 중대하겠습니까마는, 상(床)을 인 아이라는 말을 스스로 하며 이미 닫힌 문을 멋대로 연 자가 바로 권응입니다. 권응이 임진년295) 초사(招辭) 가운데에서 조명(趙銘)·권치대(權致大)가 밖에서 제술(製述)한 것을 문이 열린 증거로 삼았으나, 이제 다시 사문(査問)하게 되어서는 조명·권치대가 다 거짓이라고 자복(自服)하였는데, 권응은 다시 기조(騎曹)296) 의 절목(節目) 밖의 포장(布帳)이라는 따위의 말을 끌어대면서 갖가지로 농락하고 줄곧 변명하여 불복(不服)하는 것이 승선(承宣)297) 의 함답(緘答)이나 위장(衞將)의 공초와 마디마디 서로 틀리니, 한 번 신문하고 두 번 신문하여 반드시 실정을 불게 하는 것은 단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형신하지 말고 정배(定配)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다시 엄히 형신하여 반드시 실정을 불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5월 16일 을해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서종태(徐宗泰)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문서를 보시느라 절로 피로하여 번번이 증후(證候)가 더하시게 되니, 청컨대 다시 정원(政院)에 신칙(申飭)하여 더욱 세심하게 헤아려 절략(節略)하여 봉입(捧入)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김춘택(金春澤)은 특히 흉악(凶惡)하고 잔꾀가 많으며 화 잘 내고 간특한 인물로서 이제 원배(遠配)하기를 청한 것도 참작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그 자제되는 자가 사정(私情)에 가리워서 신원(伸冤)할 만한 단서가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또한 국가의 처분을 조금 기다려야 할 것인데, 전 지평(持平) 김운택(金雲澤)은 감히 조의(朝衣) 차림으로 갈도(喝道)298) 를 거느리고 거드럭거리며 대궐에 들어와 드디어 등문고(登聞鼓)299) 를 쳐서 천청(天廳)을 현혹하려 하였으니 본디 이미 놀랍습니다. 게다가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보택(金普澤)에 이르러서는 이미 외번(外藩)에 있으므로 사체(事體)가 더욱이 다르고 또 그 말의 단서가 자신에게 관계되는데도 자정(自靖)할 뜻은 생각하지 않고 더욱 방자하게 욕하는 말을 하고는 끝에서 말맺기를, ‘진실로 거짓으로 꾸민 단서가 있다면 또한 그 거짓을 꾸며 남을 모함한 정상을 밝힐 것이다.’ 하여 넌지시 대간(臺諫)의 말을 죄책하는 뜻이 있었으니, 조정을 경시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전 지평 김운택·전라 감사 김보택을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단지 정필동(鄭必東)·이기좌(李箕佐)의 일만을 따랐다.
5월 18일 정축
이진유(李眞儒)를 헌납(獻納)으로, 윤순(尹淳)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권응(權譍)의 일에 답하기를,
"권응(權譍)이 줄곧 저항하고 끝내 실토하지 않는 것은 매우 밉다마는, 본디 죽을 죄가 아니라면 실정을 볼 때까지 엄히 형신(刑訊)한다는 것은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형신(刑訊)을 멈추고 감처(勘處)300) 하는 것이 옳지 않은지 나는 모르겠다."
하였다.
5월 20일 기묘
이광좌(李光佐)를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삼았다.
5월 21일 경진
형조 참판(刑曹參判) 송징은(宋徵殷)·참의(參議) 심수현(沈壽賢)이 연명하여 상소하여 금부(禁府)로 하여금 민계수(閔啓洙)·조정순(趙正純)을 핵문(覈問)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처음에 이빈흥(李賓興)이 번번이 조정순을 끌어대어 증거로 삼되 또 말하기를, ‘조정순에게서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듣고 전한 자가 또 있었는데, 그 사람은 지친(至親)인 골육(骨肉)이므로 지적해 고할 수 없다.’ 하였는데, 형조에서 조정순은 조사(朝士)이므로 추조(秋曹)에서 안문(按問)할 수 없다 하여 금오(金吾)로 하여금 안문하게 할 것을 누차 청하였으나, 금부에서는 중간의 계제(階梯)가 분명하지 않다 하여 거절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빈흥의 아들 이양수(李養粹)가 스스로 말하기를, ‘언근(言根)은 실로 민진강(閔鎭綱)에게서 나왔는데 아버지에게 전하였다.’ 하였는데, 민진강은 또 민계수에게서 들었다고 말하고, 민계수는 조정순에게서 들었다고 말하였다. 이에 형조에서 언근의 계제가 이미 밝혀 졌다 하여 다시 금부로 하여금 구핵(究覈)하기를 청하니, 민계수·조정순이 드디어 나문(拿問)받게 되었다.
5월 22일 신사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저번에 이만견(李晩堅)이 상소하여 인피(引避)하면서 선정(先正)을 헐뜯어 욕한 것은 실로 조상건(趙尙健)의 무리보다 더한데, 그때의 처치는 관례에 따라 체차(遞差)를 청하였을 뿐이라서 공론이 불만스럽게 여기는 것이 이제까지 그치지 않습니다. 은대(銀臺)301) ·기성(騎省)302) 에 잇따라 비의(備擬)303) 하여 무고(無故)한 자인 듯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으니, 청컨대 이조(吏曹)의 해당 당상(堂上)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 뒤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을 때, 임금이 제신(諸臣)에게 ‘대계(臺啓)는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이에 발계(發啓)한 장령(掌令) 안시상(安時相)·지평(持平) 구만리(具萬理)가 다 인피(引避)하여 퇴대(退待)하였는데, 처치하여 출사(出仕)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윤덕준(尹德駿)·지의금(知義禁) 윤지인(尹趾仁)·동의금(同義禁) 유봉휘(柳鳳輝)가 연명하여 차자(箚子)를 올렸다. 대략 이르기를,
"궐문(闕門)의 일은 이제 거의 결말이 났습니다마는, 다만 권상유(權尙游)·권엽(權熀) 등의 일에 있어서는 삼가 어리석고 얄팍하나마 소견이 있습니다. 권치대(權致大)는 패가(敗家)한 탕자(蕩子)로서 세상에서 버림받았고 법을 범해 죄받은 것은 전후에 한두 번이 아니니, 그 인물의 허망함을 알 만합니다. 더구나 그가 말한 것이 사리에 그럴듯하지 않다면 꾸짖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이고 들어도 채택하지 말아야 옳을 것이며, 혹 그 말을 깊이 믿어서 과장(科場)이 엄하지 않은 것을 놀랍게 여긴다면 또한 마땅히 아뢰어서 조정에서 명백히 사핵(査覈)하여 처치하여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대루청(待漏廳)304) 에서 그 과시(科試) 때에 사인(士人)이 모여 있을 곳을 이미 만들었는데도 대루청 밖에서 제술(製述)한 권치대가 또 조명(趙銘)을 따라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제술한 사람으로 변작(變作)하였다면 권치대가 정상을 변환(變幻)한 것을 사람들이 떠들 것인데, 권상유는 마음으로는 알면서도 말하지 않아서 사핵하는 일이 거짓으로 이루어지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당초에 듣고서 놀랐다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글을 보내어 알려주는 것은 벗들 사이에서나 하는 일인데 이제 권치대에게 하였으니, 이미 대관(大官)이 자중(自重)하는 체모가 아닙니다. 또 권치대에게 밖에서 제술한 죄가 있다면 절로 해당하는 율문(律文)이 있을 것인데, 또한 어찌 죄받을 만하고 어찌 중대한 말이 되기에 글 가운데에서 위로하여 권치대가 교유(敎誘)한 것으로 여기고 고집하여 말을 맞추려 하게 합니까? 권엽으로 말하면 시종(侍從)에 출입한 신하로서 재신(宰臣)의 편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고 본가(本家)에서는 귀찮아하면서 이웃집에서는 치우친 짓을 하였으며, 그 수작한 것은 글을 전하기만 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으니, 오늘날 권치대에게 시달리는 것도 반드시 자모(自侮)305) 에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권치대는 당연히 해조(該曹)에 이송(移送)하여 율문을 상고하여 죄를 정하여야 할 것이나, 권상유·권엽 등은 일이 상규(常規)와 달라서 적용하여 시행할 법이 없으므로 관례에 따라 계품(啓稟)할 수 없으니, 청컨대 참작하여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경(卿)들의 차어(箚語)는 명백하고 또한 매우 마땅하다. 권치대는 아뢴 대로 시행하고 권상유·권엽은 모두 삭직(削職)하여 놓아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5월 24일 계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침을 맞았다.
5월 27일 병술
전 승지(承旨) 임방(任埅)과 그 아들 임건원(任健元)·사위 이원곤(李元坤) 등을 나수(拿囚)하였다. 이에 앞서 이원곤이 두루 찾아 다니던 길에서 이돈(李墩)을 만난 것을 그 처부(妻父) 임방에게 말하였는데, 임방이 드디어 여러 재상 집에 전파하였다. 일이 드디어 크게 퍼지자, 이돈을 위하는 처지인 자는 다 이원곤을 허물하니, 이원곤이 드디어 그 말을 숨기고 ‘임방의 아들 임건원이 지어낸 것이다.’ 하였다. 이에 함께 대질하게 되었는데,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숨은 일을 들추어 헐뜯고 욕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다 세변(世變)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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