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기축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전 대사간(大司諫) 이만견(李晩堅)은 앞장서서 상소하여 조상건(趙尙健)에게 편들어서는 스승을 저버렸다는 말로 더욱 방자하게 근거 없이 헐뜯은 것만도 이미 매우 추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데, 불러서 사대(賜對)하셨을 때에는 응답하는 것이 거침없어서 열병에 걸렸다는 등의 말은 거의 잊은 듯하였으니, 더욱이 매우 무엄합니다. 그 방자한 정상이 조상건과 매한가지인데도 혼자 징토(懲討)하는 벌을 하였으니, 기왕에 있었던 일이라 하여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승지(承旨)를 전옥(典獄)에 보내어 가벼운 죄인을 소결(疏決)306) 하여 석방(釋放)하게 하였다.
기내 수군(畿內水軍)의 신포(身布)307) 한 필(匹)을 줄이고 대포(代布)를 받은 자를 수조(水操)308) 에 나아가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풍덕(豊德)의 수군으로서 상언(上言)한 자가 말하기를, ‘경기 수군은 병보(並保)가 없는데도 세 필이나 거두고, 이미 베[布]를 바치고서도 또 수조에 가는 것은 억울합니다.’ 하였으므로, 수영(水營)에 물으라고 명하였는데, 수영에서 말하기를, ‘남양(南陽) 등 세 고을은 수군의 병보를 거의 다 보충하였으나, 풍덕 등 열 네 고을은 수령(守令)이 사목(事目)을 준수하지 않아서 전혀 정하여 주지 않으니, 원군(元軍)만이 세 필의 베[布]를 바치므로 억울하다고 말하게 되고, 수조에 나아갈 때에 번갈아 가지 못하므로 또한 치우친 고통이 됩니다.’ 하였다. 병조(兵曹)에서 회계(回啓)하여 ‘베 한 필을 줄이고 수조 때에는 영진(營鎭)의 관하(管下)에서 대포를 받아먹은 자를 영속(領屬)시키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고 청하고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니, 윤허하였다.
6월 2일 경인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고, 김보택(金普澤)은 체차(遞差)하라고 명하였다.
북도(北道)에 가설(加設)한 친기위(親騎衞)에 군장(軍裝)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호남(湖南)·해서(海西)의 기(騎)·보(步) 군포(軍布)를 미수(未收)한 것과 관서(關西)의 정장포(精壯布)를 받아들여야 할 것을 획급(劃給)하여 본도(本道)로 하여금 분정(分定)하여 만들어 보내게 하였는데, 대개 도신(道臣)이 이것을 장청(狀請)하고,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므로 윤허한 것이다.
비국(備局)에서 간원(諫院)에서 각 군문(軍門)의 도제조(都提調)가 습조(習操)를 대행하는 것을 그만두기를 청한 계(啓) 때문에 복주(覆奏)하기를,
"지난 기유년309) 에 훈국(訓局)310) 의 도제조가 습진(習陣)을 대행하였고, 어영청(御營廳)은 신구군(新舊軍)의 합조(合操) 때 대장(大將)이 유고(有故)하면 도제조가 가서 대행하라고 무오년311) 에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으며, 금위영(禁衞營)은 신유년312) 이래로 도제조가 대행한 일이 허다합니다. 경인년313) 에 이르러 연석(筵席)에서 임금이 다시 ‘금위영의 습조 때에 혹 대장이 유고하게 되면 도제조가 거행하여 습조를 빠뜨리지 말게 하라.’고 분부하셨으므로 금위영은 이때부터 이어서 정식(定式)으로 삼았으나, 훈국·어영청은 도제조가 습조하는 일을 또한 많이 빠뜨렸으니, 작년에 대신(大臣)이 마찬가지로 정식하기를 청한 것은 여러 군문의 규례가 마땅히 달라서는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부터 대행하게 한 것은 대개 권의(權宜)에서 나온 제도이나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거니와, 이제 간신(諫臣)이 아뢴 것은 자세히 살피지 못한 소치에서 말미암은 듯합니다. 지금 도제조가 대행하는 것은 이미 규제(規制)가 되었으니, 이제 폐지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3일 신묘
전(前) 판서(判書) 김진규(金鎭圭)가 졸(卒)하였는데, 나이 59세였다. 김진규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일에 부지런하였다. 일체 법을 지켜서 흔들리는 것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하지 못하였고, 늘 청검(淸儉)으로 스스로 행실을 닦으니 귀하여지고 나서도 집은 매우 가난하여 입고 먹는 것이 빈한한 선비와 다를 것이 없었다. 또 시감(試鑑)314) 이 있으므로 여러 번 과시를 관장하여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으나, 성질이 자못 집요하고 남에게 이기려고 힘쓰는 병통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흠잡았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위독하여 입으로 불러서 유소(遺疏)를 썼는데, 죽고 나서 소가 올라갔다. 그 소에 이르기를,
"신(臣)은 은혜를 받은 것이 망극한데도 임금을 섬긴 것은 변변치 못하니, 구구한 정성이 그 기대에 어그러진 것을 스스로 드러낼 수 없을 만큼 거의 소원(疏遠)한 신하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제 한 가닥 남은 목숨이 장차 다하여 성명(聖明)을 영결(永訣)할 때를 당하게 되니, 또한 어찌 차마 말하고 싶은 것을 한 번 아뢰지 않고, 끝내 의리와 분수를 스스로 저버리겠습니까? 그러나 정신이 혼미하고 숨이 가빠서 대강만을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절선(節宣)315) 하는 방도를 더욱 삼가서 건강이 회복되는 보람을 빨리 거두고, 후손에게 편안함을 끼칠 계책을 깊이 생각하여 더욱 국운(國運)을 튼튼히 하며, 자칫 본말(本末)이 전도되는 것을 잊지 말아서 대의(大義)가 없어지지 않게 하고, 정사(正邪)가 뒤섞이는 것을 통절히 경계하여 간사한 사람이 자취를 물러나게 하소서. 성학(聖學)에 힘쓰고 소민(小民)을 화합하며 변경(邊境)을 튼튼히 하고 먼 곳까지 경영하는 등의 일에 있어서는 몸소 유(類)에 따라 미루어 유의하셔야 하겠기에 신이 감히 상세히 아뢰지 못합니다. 하늘을 우러르고 대궐을 향하여 상소하면서 눈물이 흘러 못 견디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보고 탄식하고 상심하여 하교하기를,
"유소(遺疏)를 살펴보건대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죽음에 이르러 더욱 깊으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으랴마는, 그 말은 남고 그 사람은 죽으니 슬픔이 더하다."
하였다.
6월 5일 계사
유성(流星)이 실성(室星) 위에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갔다.
권첨(權詹)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정제(李廷濟)를 수찬(修撰)으로, 윤성준(尹星駿)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최상리(崔尙履)를 지평(持平)으로, 송성명(宋成明)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탄(李坦)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홍치중(洪致中)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이세최(李世最)를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삼았다. 처음에 홍치중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미처 하직하고 부임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오명준(吳命峻)이 체직되어 영백(嶺伯)이 비니, 비국(備局)에서 영남(嶺南)은 본디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컫는다 하여 정조(政曹)로 하여금 아직 부임하지 않은 감사(監司)를 비의(備擬)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므로, 드디어 홍치중을 옮겨 제배(除拜)하였다.
임금이 형조(刑曹)에서 이빈흥(李賓興)을 형신(刑訊)하기를 청한 계목(啓目)을 보고 특교(特敎)를 내리기를,
"이번에 다시 사문(査問)하는 것은 두 가지 일인데, 하나는 과시(科試)에 관한 일이고 하나는 궐문(闕門)에 관한 일이다. 궐문에 관한 사문은 본디 이돈(李墩)에게 관계되지 않는데 돈화문(敦化門)이 종일 닫혀 있지 않았다는 것은 단연코 그럴 리가 없으니, 이것은 정시(庭試)를 엄하지 않은 과시로 반드시 돌리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권응(權譍)이 거짓 꾸며서 공초(供招)한 것도 매우 밉다. 이돈의 일로 말하면, 장옥(場屋)316) 에서 사정(私情)을 쓴 일에 관계되며 이 옥사(獄事)의 긴요한 점은 두루 찾아다녔느냐는 데에 있으니, 반드시 다시 사문하여 충분히 명백하고 조금도 의심스러운 것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고, 그런 뒤에라야 바야흐로 그 신설(伸雪)을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돈이 시관(試官)의 망(望)에 들어서 패초(牌招)를 받고 대궐에 나왔다가 낙점(落點)317) 이 내려지기 전에 까닭 없이 나간 것도 이미 매우 해괴한 데다가, 윤팽수(尹彭叟)가 이제 와서 말을 바꾸어 ‘처음에는 이빈흥(李賓興)이 교유(敎誘)하길래 거짓으로 승복하였다.’고 말하기는 하였으나, 그 사이의 정상은 헤아려 알기 어렵다. 겸종(傔從)318) 이 전에 말한 것을 모두 바꾼 것도 믿을 만하지 못하고, 이윤언(李胤彦)이 하가(下街)를 따라 돌아왔다는 말 또한 공증(公證)이 될 만하지 못하다. 이미 이러한 줄 알고도 억지로 신설(伸雪)한다면 당당한 국가의 처분이 때에 따라서 하게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진급(李眞伋)도 장차 복과(復科)319) 할 것인가? 지금 번안(翻案)할 단서가 없으니, 내버려 두라."
하였다.
6월 6일 갑오
유성(流星)이 서방에서 나왔다.
장령(掌令) 구만리(具萬理)가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이번에 이돈(李墩)이 두루 찾아다닌 건을 다시 사문(査問)하는 일은 비록 해조(該曹)의 문안(文案)을 보더라도 송도성(宋道聖)을 모득(募得)320) 한 일을 시우(時遇) 등이 증명하고 윤팽수(尹彭叟)·갑술(甲戌)을 교유(敎誘)하였다는 말을 이정흥(李禎興) 무리가 자복(自服)하였으니, 그 귀착점은 오로지 이빈흥(李賓興) 한 사람에게 달려 있는데, 이빈흥은 아직 승복하지 않았으니, 신은 또한 감히 사문이 이미 다 명백해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윤팽수(尹彭叟)와 여러 겸종(傔從)이 이제 와서 말을 바꾸었으므로 정상을 헤아리기 어렵고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참으로 성교(聖敎)와 같습니다마는, 당초에 끌어대어 증거로 삼아서 이 두루 찾아다닌 것을 성립시킨 것 또한 어찌 윤팽수·갑술 등과 여러 겸종이 아니겠습니까? 전일에 증거로 삼은 것이 믿을 만하다면 오늘에 말을 바꾼 것도 믿을 만할 것이고, 오늘에 말을 바꾼 것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면 전일에 증거로 삼은 것도 믿을 만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이윤언(李胤彦)은 혼인한 집안이라고는 하나, 본디 동류(同類)가 아닌데도 처음에 이빈흥이 끌어대었으니 조금도 돌아보고 핑계댈 뜻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인데, 하가(下街)에서 만났다는 말이 반문(盤問)321) 할 때에 나왔으니, 이것이 공증(公證)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이돈이 시관(試官)의 망(望)에 주의(注擬)322) 된 사람으로서 패초(牌招)를 받고 대궐에 나왔다가 지레 스스로 돌아간 것은 참으로 망령되게 움직인 잘못이 되므로, 이것을 죄로 삼는다면 본디 할말이 없겠으나, 지레 돌아간 것 때문에 그가 두루 찾아다닌 것도 아울러 의심한다면 신은 그 죄로써 죄주는 것이 아닐 듯합니다. 또 신은 판부(判付) 가운데에 ‘때에 따라 하게 되는 것이니 어찌 이럴 수 있느냐?’ 하신 분부에 대해서는 더욱이 마음에 개연(慨然)한 바가 있습니다.
아! 국가가 불행하여 조정의 의논이 갈라져서 말마다 일마다 하나라도 당론(黨論)으로 귀결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가 마음을 깨끗이 하고 조금도 치우치는 버릇이 없게 하여 임금에게 믿음받을 만하였다면, 또한 어찌 이런 분부가 계셨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는 다시 사문하는 일을 오로지 이돈을 위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인 듯이 여기시니 이것은 참으로 뭇 신하의 죄입니다마는, 대성인(大聖人)의 처사는 또한 마땅히 그 일이 할 만한 것인지 할 만하지 않은 것인지를 보아서 처치하여야 할 뿐입니다. 혹 혐의하여 할 만하여도 하지 않는다면 신은 과연 대공 지정(大公至正)323) 한 도리에 합당한지 모르겠으며, 신이 근심하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때에 따라[隨時]’라는 두 글자에 성의(聖意)가 먼저 주의를 돌렸다면 국가의 일은 이제 할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구안(舊案)은 명백하지 않고 새로 사문하는 일은 미처 끝나지 못하였는데 처분이 지레 앞서므로 여정(輿情)이 더욱 답답해하니, 청컨대 이빈흥을 사문하는 일을 내버려두라는 명을 빨리 거두고 추조(秋曹)에 명하여 다시 더 명백히 핵실(覈實)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6월 7일 을미
평안도 이산(理山) 등에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거위알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 하였다.
유봉휘(柳鳳輝)를 도승지(都承旨)로, 홍정필(洪廷弼)을 장령(掌令)으로, 박봉령(朴鳳齡)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권세항(權世恒)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6월 9일 정유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돈화문(敦化門)의 개폐(開閉)에 관한 말은 오로지 권치대(權致大)·조명(趙銘)이 밖에서 제술(製述) 하였다는 말에서 말미암았는데, 다시 사문(査問)하는 일이 겨우 시작되자마자 전에 공초(供招)한 것을 모두 뒤집어서 문이 열렸다는 거짓이 이제는 이미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권치대가 전후에 변환(變幻)한 것은 그 단서가 한 가지가 아니어서, 대루청(待漏廳)에 관한 거짓말을 이제는 그가 말한 것이 아니라 하고, 돈화문에 관한 거짓 공초를 이제는 그가 들어간 것을 가리킨다 하며, 혹 위세(威勢)에 핍박되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교유(敎誘) 때문이라고 핑계하기도 하니, 이러한 정상이 다 의심스럽습니다. 조명으로 말하면 정상이 갑작스럽게 바뀐 것이 더욱이 밉습니다. 그가 비록 스스로 시골의 미열(迷劣)한 자라고는 하나 어찌 장옥(場屋)의 사체(事體)가 중대하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까닭 없이 밖에서 제술하였다는 말을 재상(宰相)의 집에 전하여 말한 것도 이미 거짓으로 속인 일에 관계되거니와, 여염집 대장간에 관한 말은 결코 범연히 수작한 것이 아닐진대, 이제 다시 사문하게 되어서 그가 자복(自服)한 것은 다른 곡절이 없이 곧바로 거짓말을 지어낸 것이라고 기꺼이 스스로 감당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숨긴 정상이 있는 것이 분명하여 엄폐할 수 없으니, 청컨대 다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신문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말단의 일만을 따랐다.
대사헌(大司憲) 이태좌(李台佐)가 상소(上疏)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이제 성상께서 이미 여러 공초(供招)가 전후에 서로 반대되는 것 때문에 준거(準據)하여 믿기 어려우시다면 바로 유사(有司)에 신칙(申飭)하여 반복(反覆)하여 엄히 사핵(査覈)하게 하여, 다시 임진년324) 의 앞서 공초(供招)한 것과 같으면 이돈(李墩)을 두루 찾아 다닌 죄로 처치하여야 할 것이고, 끝내 오늘날의 뒤에 공초한 것과 같으면 이돈을 두루 찾아 다니지 않은 것으로 처치하여야 할 것이니, 그 처치하는 바가 어찌 여유 있게 귀착되지 않겠습니까? 전에 공초한 것도 이미 하나의 안(案)이고 뒤에 공초한 것도 곧 하나의 안이 된다면 또한 장차 어느 것을 적절하게 따라서 처치하겠습니까? 구안(舊案)에 변경이 없기를 바란다면 또한 장차 모두 다시 추문(推問)하여 다시 각인(各人)의 공초가 이빈흥(李賓興)의 공초에 똑같이 귀착하게 하여야 옳을 것입니다. 끝내 흑백을 가리지 않고 다시 사핵하지 않은 채 버려 둔다면 신은 그것이 결코 옳지 않은 줄 압니다. 이 이후로 형옥(刑獄)이 좀 사핵하기 어려운 것은 모두 내버려두고 구명하지 않을 것입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이번에 다시 사문한 데에서는 명백히 신설(伸雪)할 만한 단서를 보지 못했으니, 내버려두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하였다.
일본(日本)의 관백(關白)이 죽고 새 관백 기이 태수(紀伊太守) 원길종(源吉宗)이 섰다.
6월 10일 무술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가 차자(箚子)를 올렸다. 대략 이르기를,
"비록 일반 백성으로서 죄에 걸린 자에 있어서도 국가에서는 반드시 명백히 가려서 억울한 마음을 품지 않게 하는데, 더구나 경재(卿宰)의 신하로서 죄명이 가볍지 않은 데 관계된 경우이겠습니까? 본디 상세히 구핵(究覈)하여 그 허실(虛實)을 밝혀서 범한 것이 있으면 죄주고 범한 것이 없으면 신설(伸雪)하여 국가의 처치가 환하고 명백하게 하고 말아야 할 것인데, 해조(該曹)에서 감정(勘定)하여 아뢰기를 기다리지 않고, 증거로 댄 말을 바꾼 것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분부하여 일체 분명하지 않은 죄로 내버려두게 하시니, 형정(刑政)이 마땅하지 않고 사례(事例)가 전도된 것이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과옥(科獄)뿐이 아니라 무릇 다시 사문(査問)하여도 논할 만한 단서가 없으면 번번이 다 내버려두는 것은 본디 상례(常例)이니, 이번의 처분은 끝내 그것이 옳지 않은 줄 모르겠다."
하였다.
태학(太學)의 유생(儒生) 홍현보(洪鉉輔) 등을 정거(停擧)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사관(四館)325) 의 이광보(李匡輔) 등이 윤증(尹拯)을 침욕(侵辱)한 유생들을 벌주었는데, 태학의 재임(齋任) 정관하(鄭觀河)가 벌방(罰榜)을 철거(輟祛)하고 기꺼이 시행하려 하지 않자, 이광보 등이 또 정관하도 아울러 벌주고 홍현보가 대신하여 재임이 되었다. 그런데 정관하는 벌주지 않아야 할 것인데 벌 받았으므로 그 대신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 하여 드디어 식당(食堂)에 들어가지 않으니, 윤증을 편드는 유생 노두망(盧斗望) 등이 홍현보를 내쫓으려고 윤증이 무함당한 것을 변명하는 논의를 일으켜서 홍현보가 응하지 않으므로 식당에 같이 들어갈 수 없다 하였다. 임금이 권하여 들여보내도록 여러 번 명하였으나 다들 명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 드디어 재임을 정거하라고 명하였다.
6월 11일 기해
조태억(趙泰億)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심상정(沈尙鼎)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금부(禁府)의 시수(時囚)에는 모여서 의논할 만한 자가 별로 없으나, 형조(刑曹)의 시수와 제도(諸道)에서 장문(狀聞)한 것 가운데에서 일이 인명을 살상한 형옥(刑獄)에 관계된 자는 근례(近例)에 따라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하여 아뢰어 옥사(獄事)가 지체되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6월 12일 경자
충청도에 큰물이 져서 예산(禮山)·정산(定山)·공주(公州) 등의 고을에서 떠내려가고 묻힌 인가가 3백여 호이었는데, 임금이 휼전(恤典)을 행하라고 명하였다.
6월 14일 임인
대사간(大司諫) 윤성준(尹星駿)·정언(正言) 심상정(沈尙鼎)이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임진년326) 과시(科試)에 관한 사문(査問)은 말이 원한에서 나오고 증언이 아린아이에게서 이루어져서, 조정의 옥사(獄事)에 대한 평의(評議)가 마땅하지 않았고 여론이 다 분개하였으니, 다시 핵실(覈實)하라는 명은 대개 여기에서 말미암았을 것입니다. 전에 남몰래 꾀고 을러서 증언한 자가 엄한 핵실이 있기 전에 실토하였고, 혹독한 형신(刑訊)과 핍박을 받아서 승복한 자가 한 번 평문(平問)받고 승복하였으니, 그 사이의 실정을 이미 추측할 만한데 윤팽수(尹彭叟)·갑술(甲戌)이 변환(變幻)한 것 때문에 믿을 만하지 못하다 하고 겸종(傔從)이 반복(反覆)한 것은 의심스럽다 한다면, 이빈흥(李賓興)의 지친(至親)이 공초(供招)한 것만은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으며 이윤언(李胤彦)의 하가(下街)에 관한 말도 공증(公證)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옥정(獄情)을 문득 시론(時論)으로 돌려서 내버려두고 구명하지 않는다면 뒷날에 이보다 큰 무옥(誣獄)이 있더라도 반드시 구투(舊套)를 따라 같은 예로 덮어둘 것이니, 이것은 나라에 형정(刑政) 없는 것입니다. 청컨대 이빈흥을 사문하는 일을 내버려 두라는 명을 빨리 거두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명백히 핵실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6월 15일 계묘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임진년에 과방(科榜)이 나온 뒤로 일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무리가 남몰래 강퍅하고 시기하는 마음을 품고 과거(科擧)를 저해하려고 몹시 바랐으나 트집잡을 말이 없더니, 궐문(闕門)이 열려 있었다는 말을 근거 없이 만들어 내서는 장옥(場屋)이 엄하지 않은 과시(科試)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제 다시 사문(査問)한 뒤에는 조명(趙銘)·권치대(權致大)가 거의 다 자복(自服)하였으니, 궐문이 열려 있지 않았다는 것은 더 의심할 것이 없는데, 권응(權譍)이 감히 혼자 속일 마음을 품고 변환(變幻)하여 슬쩍 농간을 부리되, 그 스스로 밝힌 것은 병조(兵曹)의 절목(節目)과 정원(政院)의 초기(草記)를 주워 모아 말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또 강필문(姜弼文)이 전후에 공초한 것을 억지로 허망한 말로 돌려서 끝내 굳게 숨기고 기꺼이 실토하려 하지 않으니, 지레 형신(刑訊)을 멈추고 서둘러 죄를 감정(勘定)하는 것은 법례(法例)에 크게 어긋나므로 권응을 다시 엄하게 가두고 각별히 신문하여 반드시 실정을 알아내기를 청하였으나, 권응을 형신하지 말고 죄를 정하라는 명이 뜻밖에 나왔습니다. 이것이 도로 거두기를 계청(啓請)한 까닭입니다. 대각(臺閣)에서 논집(論執)하는 뜻은 극진히 말하고 힘껏 다투어 반드시 실정을 불게 하여야 하는 것인데, 저번에 동료인 대관(臺官)이 경솔하게 정계(停啓)하였으므로 공론이 불만스러워 답답해하고 물정은 더욱 격렬하여지니, 청컨대 정계한 대관 구만리(具萬理)를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다시 사문하는 일은 줄곧 쟁집(爭執)하지 말아야 한다. 권응의 일은 이미 그만둔 논의를 다시 일으키니 더욱이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6월 16일 갑진
도당록(都堂錄)을 만들었는데, 김재로(金在魯)·이진망(李眞望)·이명언(李明彦)·김동필(金東弼)·이세덕(李世德)·윤성시(尹聖時)·엄경수(嚴慶遂)·조석명(趙錫命)·조원명(趙遠命)·김유경(金有慶)·서명균(徐命均)·박필몽(朴弼夢)·권익관(權益寬)·심공(沈珙)·박사익(朴師益)·최상리(崔尙履)·황규하(黃奎河)·이덕수(李德壽)·윤순(尹淳)·이인복(李仁復)·송진명(宋眞明)·조관빈(趙觀彬) 등 22인을 뽑았다.
6월 17일 을사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홍치중(洪致中)은 호얼(湖臬)327) 에 제배(除拜)되었다가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문득 본직(本職)으로 옮겼습니다.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홍치중은 겨우 지망(地望)을 갖추었는데, 호서(湖西)에는 마땅하지 않고 영남(嶺南)에만 편벽되게 마땅하며 조신(朝臣) 가운데에는 의망(擬望)할 만한 다른 사람이 없어서 그러하였습니까? 정사(政事)의 격례(格例)로 논하자면 참으로 구차하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말단의 일에 답하기를,
"영백(嶺伯)으로 마땅한 사람을 얻었는데 다만 정사의 격례에 구차하다 하여 문득 체직하기를 청하는 것은 실로 모르겠다."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근일 헌부(憲府)에서 사문(査問)하는 일을 내버려두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한 것도 이미 뜻밖인데, 간원(諫院)도 따라서 말을 많이 하여 힘껏 구제하니, 이것이 어찌 양사(兩司)가 함께 발론할 일이겠는가? 매우 미안하다."
하였다.
6월 18일 병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유봉휘(柳鳳輝)가 말하기를,
"보건대 삼가 엊저녁의 하교에는 양사가 함께 발론한 것을 매우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마는, 다만 대신(臺臣)은 오로지 이돈(李墩)을 위하여 발론한 것이 아니라, 실로 국가의 형정(刑政)에 관계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저 과거(科擧)에 관하여 사문(査問)하는 두 가지 일을 다시 사문한 뒤에 여러 수인(囚人)이 승복하였는데, 궐문(闕門)에 관한 일은 권응(權譍)만이 두루 찾아 다닌 것에 관한 일은 이빈흥(李賓興)만이 항거하고 승복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지난해 겨울에 판부사(判府事) 김우항(金宇杭)이 전후하여 차자(箚子)를 올린 말을 보더라도 그 뜻이 오로지 이돈을 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말을 많이 하여 힘껏 구제한다고 분부하셨으니, 뭇 신하의 본정(本情)을 미처 죄다 통촉하시지 못한 것이 있는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에 다시 사문하기를 대간(臺諫)이 계청(啓請)한 것을 윤허할 때 내가 혼자 말하기를, ‘과거에 관한 사문에는 궐문에 관한 일과 두루 찾아 다닌 것에 관한 일 두 가지가 있는데, 두루 찾아 다닌 것에 관한 일로 말하면 반드시 아주 명백히 사문하여 낸 뒤에야 그 신설(伸雪)할 사람과 국가의 처분이 다 시원하고 타당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처분이 때에 따라 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을 면하지 못하여 혹 마음에 불만스럽지 않을까?’ 하였다. 송택상(宋宅相)의 소(疏)가 들어온 뒤에 정원(政院)에 내린 판부(判付)에 이르기를, ‘가령 과거에 관한 사문이 충분히 명백하여 깨끗이 벗어나게 되더라도 당초에 안사(按査)한 제신(諸臣)은 죄줄 만한 일이 없다.’ 한 것은 대개 송택상의 소어(疏語)와 젊은 대각(臺閣)이 당초에 옥사(獄事)를 안사한 신하들을 마음써서 남을 모함한 죄로 죄다 몰아붙이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두루 찾아다닌 것에 관한 증명은 이빈흥(李賓興)과 여러 겸종(傔從)과 이윤언(李胤彦)의 하가(下街)에 관한 말 세 가지 일인데 다 명백히 신설할 만한 단서가 없으니, 내버려 두어도 옳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다. 이제 의논하는 자가 집에서 사사로이 말하기를, ‘이돈은 이번에도 신리(伸理)328) 하지 못하였다.’ 한다면 괜찮겠지만, 이것이 어찌 양사가 함께 발론할 일이겠는가? 다시 사문하러 출장(出場)한 뒤에 안사한 신하를 뒤미처 탄핵한다면 이 뒤에 참으로 엄하지 않은 과시(科試)가 있더라도 애초에 권수(權𢢝)처럼 발론하는 자가 없을 것이고, 또 모두 오늘의 일을 경계삼아 반드시 안사를 담당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나라의 일이 장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내가 이미 이러할 줄 알았는데, 때에 따라 의논하여 처치한다면, 임금의 처분으로서 어찌 이러할 수 있겠는가? 양사에서 도로 거두기를 청하는 계(啓)를 함께 내고 미친 듯이 서둘러서 오늘 조어(措語)를 고치고 내일 또 조어를 고쳐 마치 대단한 사단(事端)이 있는 듯이 하니, 보기에도 가소롭다."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서종태(徐宗泰)가 말하기를,
"성려(聖慮)는 참으로 깊고 먼데, 젊은 대각은 혹 과격한 논의가 없지 않으니, 비록 이만견(李晩堅)·이의현(李宜顯)의 의망(擬望)을 논하여 배척한 일을 보더라도 지나침을 면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의현의 개성 유수(開城留守) 벼슬을 체직하도록 윤허할 때에 경(卿)은 당초에 안사한 신하는 뒤미처 죄줄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내가 대신(大臣)의 뜻이 내 뜻에 바로 맞는다고 하였다. 지금 과거에 관한 일이 한창 벌어졌는데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은 거의 다 인퇴(引退)하였고 나는 이미 분명한 단서가 없는 줄 아는데도 억지로 신리한다면, 사문하러 출장(出場)한 뒤에 젊고 과격한 사람이 반드시 당초에 옥사를 안사한 신하를 다 죄주려 하여 장차 온전한 사람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난처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유봉휘가 말하기를,
"궐문에 관한 사문이 이미 명백하게 결말이 났으나, 아직 추론(追論)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을 보면 그럴 염려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6월 19일 정미
영의정 서종태(徐宗泰)와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선부(李善溥) 등이 빈청(賓廳)에 모여 형조(刑曹)와 외방(外方)의 현재 갇혀 있는 죄인을 평의(評議)하였다.
지평(持平) 박필몽(朴弼夢)이 전일의 특교(特敎)와 어제의 연교(筵敎)로 인하여 인피(引避)하며 말하기를,
"위아래가 막혀서 정지(情志)329) 가 성실하지 않으니, 일마다 의심하지 않는 것이 없고 사람마다 의심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오직 이러하므로 분명하여 보기 쉬운 사리와 명백하게 드러난 단서라도 오히려 한 꺼풀 막히고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면하지 못하여 옳은 것이 옳은 것이 되지 않고 그른 것이 그른 것이 되지 않으니, 둥글둥글 모호하여 도무지 귀착되는 것이 없습니다."
하고, 끝에 또 홍치중(洪致中)을 논계(論啓)한 데에 대한 비답(批答)이 미안하다고 말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윤성준(尹星駿)·지평 최상리(崔尙履)·정언(正言) 심상정(沈尙鼎) 등도 연교 때문에 잇따라서 인피하여 모두 퇴대(退待)하였다. 이튿날 수찬(修撰) 이정제(李廷濟)가 처치하여 박필몽 등을 모두 출사(出仕)시키기를 청하고, 이어서 차자(箚子) 끝에 덧붙여 생각하는 바를 아뢰기를,
"저번에는 때에 따라 한다는 판부(判付)를 내리고 어제는 제신(諸臣)을 남을 무함한 죄로 죄다 몰아붙인다는 연교(筵敎)가 있었으니, 실로 크신 왕언(王言)에 불만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때에 따라[隨時]’라는 두 자가 어찌 임금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대간(臺諫)은 전하의 이목(耳目)이 되는 직임을 맡았는데, 이제 아직 그렇게 되지 않은 일을 가지고 남을 죄로 몰아붙인다는 죄목을 미리 붙이셨으니, 오늘 대각(臺閣)에 있는 자로서 어찌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홍치중이 번임(藩任)330) 에 적합함을 헌신(憲臣) 또한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묘당(廟堂)에서 옮겨 제수(除授)하기를 계청(啓請)한 것은 오로지 벼슬을 위하여 사람을 가린다는 뜻에서 나왔으나 정사(政事)의 격례(格例)로 헤아리면 상례(常例)와 특별히 다릅니다. 대간의 의논이 이미 일어났으므로 끝내 부임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어찌 매우 아깝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덧붙여 아뢴 것 가운데에서 위의 항목은 일전의 연교 가운데에 내 뜻을 다 갖추었다. 아래 항목의 일은 묘당의 계사(啓辭)가 대개 벼슬을 위하여 사람을 가리는 데에서 나왔으며, 네 뜻도 좋다."
하였다.
6월 22일 경술
유성(流星)이 섭제성(攝提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331) 으로 들어갔다.
김시경(金始慶)·이택(李澤)을 승지(承旨)로, 권첨(權詹)을 부응교(副應敎)로, 이정제(李廷濟)를 교리(校理)로, 권세항(權世恒)을 장령(掌令)으로, 양정호(梁廷虎)를 지평(持平)으로, 이진망(李眞望)을 부교리(副校理)로, 윤순(尹淳)·윤성시(尹聖時)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조석명(趙錫命)·엄경수(嚴慶遂)를 수찬(修撰)으로, 조원명(趙遠命)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오랜 가뭄 때문에 예조(禮曹)에서 계품(啓稟)하여 이날부터 기우제(祈雨祭)를 설행(設行)하였다.
6월 23일 신해
제주 별견 어사(濟州別遣御史) 황귀하(黃龜河)가 진구(賑救)에 쓰고 남은 곡식 1천 4백 40여 석(石)을 섬 안 세 고을에 나누어 주어 보리가 떨어진 뒤에 이어서 진구하기를 장청(狀請)하고, 보리의 새 환상(還上)도 줄여서 받아들이기를 청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니 윤허하고, 환상도 절반을 거두게 하였다.
6월 24일 임자
달이 필성(畢星)으로 들어갔다.
부응교(副應敎) 권첨(權詹)이 상소(上疏)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올해 농사는 불행하게도 재앙이 지극히 골고루 있어 홍수의 참혹함이 워낙 마음에 놀라왔는데, 근자에는 한기(旱氣)가 매우 심하여 물에 가라앉는 것을 면한 화곡(禾穀)도 다 바람에 상하고 가뭄에 말랐으니, 전후에 진구(賑救)하는 방책과 재실(災實)332) 의 분수(分數)는 더욱이 유의하여 구획해서 미리 강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수령(守令) 가운데에 빈자리가 있거나 아직 부임하지 않은 자는 혹 빨리 차출하거나 재촉하여 보내고, 삼남(三南)333) 의 방백(方伯)도 다 대체할 때가 되어 교체가 잇따르는데 즉시 부임하지 않으니 또한 묘당(廟堂)에서 혹 변통하거나 혹은 독촉하여야 하며, 줄곧 시일을 지연하지는 않아야 하겠습니다. 또 서북(西北)의 별과(別科)는 본디 회유(懷柔)하고 어루만져 구휼(救恤)하기 위한 것인데, 다만 생각하건대 홍수와 가뭄 끝에 흉년이 들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알 수 있으므로, 지금은 과시(科試)를 설행(設行)할 때가 아닌 듯하니, 북로(北路)는 비록 번번이 물려서 설행할 수 없다 하더라도 서로(西路)는 내년까지 물려서 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수령의 일은 해조(該曹)에 신칙(申飭)하라. 홍치중(洪致中)은 부임하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제 우선 개차(改差)하도록 하라. 전라 감사(全羅監司) 박봉령(朴鳳齡)은 연거푸 소명(召命)을 어겼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서로의 별과를 물리는 것은 차별없이 보는 뜻에 어그러짐이 있으니, 결코 옳지 않은 줄 안다."
하였다.
6월 28일 병진
경상도 각 고을에 큰물이 져서 떠내려가고 무너진 인가가 6백 40여 호이고 죽은 자가 60여 인이었다.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는데, 임금이 각별히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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