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무오
묘시(卯時)부터 미시(未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장령(掌令) 권세항(權世恒)이 상소(上疏)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지금 하늘의 재앙이 이러하고 백성의 근심이 이러한데, 봉당의 풍습은 더욱 깊어지고 조정의 논의는 더욱 어그러져서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의논도 인심이 만족하여 따를 것이 없으니, 이러하고서도 천심(天心)이 뉘우치고 재앙이 그치기를 바란들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 강박(姜樸)의 일을 말하여 보겠습니다. 오늘날 조정에서 우러러 따르며 논의를 바르게 한 군자로 지칭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의 의서(擬書)가 한 번 나오자 모든 사람이 전하여 보고서 지적하여 열거하고 생각하여 판단하는 것이 거의 여지가 없거니와, 강박이 주장하는 것은 박자(拍子)가 다르기는 하나 대의(大意)는 같습니다. 만약 이웃과 다투고 문을 닫았다 하여 꾸짖는다면 진실로 할 말이 없겠으나, 시의(時議)로 보면 거기에 무슨 노여워할 만한 것이 있기에 대간(臺諫)의 논계(論啓)에는 엿보아 일어난다 하고 승선(承宣)334) 은 기미를 막는다 합니까? 신(臣)은 무슨 엿볼 만한 기회와 막아야 할 근심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마치 크게 물어야 할 죄를 다스리듯 서로 잇따라 죄주기를 청하니, 또한 매우 우습지 않습니까?
저들이 득의(得意)한 처음에 기고(旗鼓)335) 를 크게 벌이고 주먹을 휘두르며 곧바로 나아가므로 처음에는 성세(聲勢)가 두려운 듯하였으나, 마침내 손을 댄 것은 피폐하고 잔약한 한낱 강박에 지나지 않았으니, 속담에 이른바 매질을 배워서 중[僧]이나 죽인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박만정(朴萬鼎)이 갑술년336) 에 상소한 것으로 말하면, 어찌 유독 박만정 한 사람의 말일 뿐이겠습니까? 또한 그때의 대신(大臣)들이 함께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 박만정이 내직(內職)·외직(外職)에 두루 시용(試用)되었어도 일찍이 이 때문에 막히지 않았는데, 추후에 죄주려는 논의가 7, 8년 뒤에 갑자기 나와서 대신들과 아울러 벌하였습니다. 죄명이 이미 같거니와 율명(律名)도 거의 균등하니, 국가에서 한 가지로 보는 도리로는 죄주지 않는 것이 다를 것이 없어야 마땅할 것인데, 대신은 명위(名位)가 여전하고 예우도 여전하며 세상에서 추앙(推仰)하는 것도 여전하건만 박만정에 대하여는 이토록 엄하게 다루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어찌 시비가 이러하고 거조(擧措)가 이러하고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조금도 시의(時議)에 흔들리지 말고 억울한 마음을 품은 자가 신설(伸雪)할 수 있게 하신다면, 반드시 재앙을 그치게 하는 데에 한 가지 도움이 되지 않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대의(大意)는 좋으나, 강박·박만정의 일은 오로지 붕당을 감싸려는 데에서 나왔으니, 내가 참으로 놀랍고 한탄스럽게 여긴다.’고 답하였다.
지평(持平) 박필몽(朴弼夢)이 상소(上疏)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어두운 곳에서 계략을 세우고 때를 타서 남을 무함하는 것은 본디 저편 사람의 기량(伎倆)입니다마는, 그 징계하는 것이 엄하지 않고 억압하는 것이 방도에 어그러지므로, 귀역(鬼蜮)의 수단이 점점 교활해져서 조정의 변괴가 거듭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남몰래 기관(機關)을 농락하고 은밀히 함정을 파서 남을 죽이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계책을 부린 것을 낱낱이 거론할 수 없으나, 임진년337) 의 과옥(科獄)에 이르러는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앞에서 창도(倡道)하고 뒤에서 화응(和應)하여 사정이 갑작스럽고 천 갈래 만 갈래로 포치(布置)한 것이 주무(綢繆)하여, 지위가 경재(卿宰)에 이르고 스스로 명류(名流)라 하는 자까지도 앞장서서 담당하되 태연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과방(科榜)을 더럽혀 손상하고자 하면 무뢰배의 허황한 말을 빙자하여 서로 끌어대어 문을 연 것을 억지로 증명하고, 〈거자(擧子)를〉 두루 찾아다닌 것을 꾸며 만들고자 하면 유감을 품은 사람의 터무니 없는 말을 조장하여 고집해 증거로 삼아 억지로 단안(斷案)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한때의 잘잘못에 관계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잔인하게 이런 천고(千古)의 간사한 일을 하여 죄없는 겸인(傔人)338) 들이 부당한 형신(刑訊)을 받다가 함께 죽게 하였으니, 그 승복받은 것이 과연 조금이라도 믿을 만한 문안(文案)이겠습니까? 더구나 이제 사문(査問)하는 일이 끝나 가고 단서가 다 드러났는데 버려두라는 명이 뜻밖에 문득 내려졌고, 일전의 연교(筵敎)에 ‘집안에서 이돈(李墩)을 억울하다고 말한다면 괜찮겠으나’라고도 하고 ‘안사(按査)한 신하들을 남을 무함한 죄로 볼 것이다.’라고도 하셨습니다.
아! 안사한 신하들에게 과연 남을 무함한 죄가 없다면 오늘날 대각(臺閣)에 있는 자가 어찌 남을 무함하는 잘못을 본뜨겠으며, 과연 남을 무함한 죄가 있다면 마땅한 벌을 분명히 주어 그 죄를 바루는 것이 어찌 안될 것이겠습니까? 죄주고 죄주지 않는 것은 사문을 끝낸 뒤에 일에 따라서 처분하기에 달려 있을 뿐인데도 성상께서는 그가 죄를 얻을세라 미리 염려하여 끝나 가는 사안을 거두기까지 하셨으니, 이미 대단한 실착입니다. 그날 주대(奏對)할 때에 도승지 유봉휘(柳鳳輝)는 바로잡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궐문(闕門)에 관한 일은 사문을 끝낸 뒤에도 죄를 논할 일이 없다 하여 억지로 뒷날에도 죄를 논하지 못하리라는 증거로 삼아서 고식(姑息)하고 미봉(彌縫)할 생각을 하였으니, 신은 이 때문에 분개합니다. 도리어 이 사문하는 일을 중도에 거두는 일은 마침 저들이 요행히 면하려는 희망에 맞아서 교묘하고 간사한 정태(情態)는 끝내 그 뿌리를 시원히 제거하지 못하고, 간사한 무리와 교활한 수인(囚人)에게는 그 전형(典刑)을 시원히 바룰 수 없으므로 이제부터 음사(陰邪)한 무리가 더욱 꺼릴 것이 없어서 장차 이미 시험하고 여러 번 경험한 술책을 부릴 것이니, 어떠한 무옥(誣獄)이 몇 번이나 뒤이어 일어날는지 모르겠으나, 마침내 진신(搢紳)에게 화(禍)를 씌우고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이미 형정(刑政)이 어그러지고 시상(時象)이 근심스러운 것을 전하를 위하여 말씀드렸으니, 평소에 매우 미워하여 한 번 논하고자 하던 것을 덧붙여 아뢰겠습니다. 전 판서(判書) 조태채(趙泰采)는 외람되고 교활한 성질을 지닌 사람으로 총애가 융숭한 것을 믿고서 권세 있고 중요한 자리를 오래 차지하여 출척(黜陟)을 손안에 두고, 그 세력이 성대한 것을 빙자하여 한없이 탐욕을 부립니다. 정사(政事)의 격례(格例)를 무너뜨려 용사(用捨)가 오로지 당벌(黨伐)에서 나오고, 중개인을 농락하여 전원(田園)이 거의 기호(畿湖)에 두루 찼고, 사랑하는 첩을 많이 거느려 뇌물을 받는 길을 널리 열었습니다. 무릇 큰 방면과 기름진 고을에 제수할 때에는 그 인물이 좋고 나쁜 것을 묻지 않고 오직 뇌물이 많고 적은 것을 보므로, 한 번 도정(都政)339) 을 겪으면 사람들의 말이 낭자합니다. 그 법을 업신여기고 정사를 어지럽히며 공(公)을 저버리고 자기를 이롭게 하는 일은 거의 낱낱이 거론하기 어려우나, 뭇사람이 함께 말하는 것을 말하여 보겠습니다. 접때 북사(北使)가 잇따라 와서 소요하던 때에 지위가 숭품(崇品)340) 에 올라 있고 자신이 상중(喪中)에 있는데도 가족이 병란(兵亂)을 피할 땅을 차지하려고 소교(素轎)를 타고 해호(海湖)를 두루 다녔으므로, 열읍(列邑)에서 뜻을 받드느라 백성들이 소요하였습니다.
또 지난해 성후(聖候)를 문안하느라 개양문(開陽門) 밖의 무인(武人)의 집에 유숙하면서 주인 집의 창비(娼婢)를 사간(私奸)하고 이어서 첩으로 거느리다가, 사람들의 말이 시끄러운 뒤에야 비로소 돌려보냈습니다. 제 사위를 위하여 임해군(臨海君)의 집 옛터에 크게 집을 지었는데,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크고 사치하게 하려고 힘썼습니다.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수선하던 재목을 싼값으로 팔았으며 금영(禁營)에서 대기하던 장인(匠人)에게 요포(料布)를 관급(官給)하고, 이어서 장교(將校)를 시켜 그 일을 감독하게 하여 공저(公儲)를 사장(私藏)처럼 여기고 관장(官匠)을 제 종처럼 부렸습니다. 체직(遞職)된 뒤에도 후임에게 부탁하여 그대로 계속하고 그만두지 않았는데, 최후에 직임을 교대한 신하가 어떤 일 때문에 드러내어 그 일을 맡았던 장교가 중곤(重棍)을 받게 되었습니다. 금양(衿陽)에 있는 별장은 지극히 사치스러우며 대사(臺榭)·원림(園林)이 골짜기에 찼고 기름진 땅이 논밭에 잇따랐습니다. 대저 비상한 대우를 받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힘쓸 생각을 비록 이 사람에게 바랄 만하지는 못하더라도, 사람을 알아보는 총명에 누를 끼치고 높은 재상(宰相)의 자리를 더럽힌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는데,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세도(世道)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다시 말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일편(一篇)의 정신이 오로지 진신(搢紳)을 일망 타진하려는 데에서 나왔으며, 조태채의 죄상을 열거한 것에 이르러서는 제멋대로 무함한 것이 지극하다.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러하겠는가? 참으로 놀랍고 한탄스럽다."
하였다.
7월 2일 기미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신유년의 의서(擬書)341) 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윤선거(尹宣擧)의 묘문(墓文)을 함께 써서 들이라."
하였다, 이때 임금이 조금이나마 시배(時輩)가 하는 짓을 꺼리고 사류(士流)를 다시 생각하여 그 시비를 다시 살피려 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지평(持平) 박필몽(朴弼夢)이 어제 내린 엄한 비답(批答) 때문에 인피(引避)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임진년342) 의 과시(科試) 때에 궐문이 열렸다는 말과 〈거자(擧子)를〉 두루 찾아다녔다는 말은 당초에 사람들이 보지도 못한 것인데, 오직 저 이건명(李健命) 만이 중간에서 터무니없이 떠벌려 어렵게 널리 구하고 꾀어서 뭇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권치대(權致大)가 전하였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빌어먹는 조명(趙銘)이라고 바꾸어 말하여 문이 열렸다고 말할 길을 널리 베풀어 반드시 과방(科榜)을 더럽혀 손상하려 하였습니다. 박권(朴權)이 그 지휘를 받아 뜻대로 죄를 만들어 죄없는 겸종(傔從)을 혹독하게 형신(刑訊)하여 거짓 승복할 길을 열어 보여서, 두루 찾아다녔다는 죄안(罪案)을 억지로 만들어 마침내 죄에 빠뜨릴 계책을 부린 것입니다. 전하께서 간사한 정상을 죄다 통촉하여 방지하는 뜻을 엄하게 보이지 못하셨으니, 이렇게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장차 무옥(誣獄)이 더욱 많아지고 남몰래 죄망(罪網)을 펴서 진신(搢紳)에게 화(禍)를 씌우고 나라를 망치고야 말게 될 것입니다. 신(臣)은 근원을 찾아 매우 배척하지 않으면 간사한 정상을 노려서 타파할 수 없고 화근(禍根)을 막아 단절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과연 몇 마디로 속마음을 드러내어 아뢰었으나, 성상께서는 도리어 일망 타진이라고 지목하셨습니다.
대저 일망 타진이라는 것은 간사한 무리가 남몰래 함정을 설치하여 선류(善類)를 상해한다는 말인데, 신이 논한 것은 오로지 나라를 위해 깊이 염려하여 간사한 근원을 타파하려는 데에서 나왔으니, 과연 일망 타진하는 것과 비슷하겠습니까? 조태채로 말하면 참으로 국가를 해치는 우두머리로서 총애를 믿고 꺼림없이 방종하니, 그 탐오(貪汚)한 행적과 조정을 어지럽힌 죄는 상세히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붓을 더럽히는 부끄러움이 있으므로 신이 상소하여 논한 데에 대강을 간략하게 거론하였는데, 성상께서는 도리어 무함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대저 무함이라는 것은 근거없이 꾸미고 마음을 써서 무함한다는 것인데, 신이 논핵(論劾)한 것은 대개 간사하고 외람한 것을 들추어내 악한 것을 징계하려는 데에서 나왔으니, 과연 무함하는 것에 가깝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에 박필몽을 불러 보고 친히 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돈(李墩)의 일을 다시 사문(査問)한 뒤에 젊은 대간(臺諫)들의 기색(氣色)을 보니, 반드시 당초에 안사(按査)한 신하들의 죄를 꾸미려 하므로, 송택상(宋宅相)의 소(疏)에 대한 비답(批答)과 형조(刑曹)에 판부(判付)한 데에 내 뜻을 분명히 보였고 일전의 연교(筵敎)도 매우 명백할 뿐만이 아닌데, 네 소사(疏辭)를 보면 반드시 진신을 일망 타진하려는 속마음을 보는 듯하고 조태채의 일로 말하면 참으로 아주 그럴듯하지 않다. 네가 조태채와는 무슨 원한이 있기에 반드시 권간(權奸)으로 꾸미려 하는가?"
하였다. 박필몽이 말하기를,
"하문하신 일에는 조건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문하는 일을 말하여 보겠습니다. 죄를 벗고 못 벗는 것이 한 편으로 돌아가야 옳을 것인데, 이제 문득 버려두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처분이 귀착되는 데가 없습니다. 사문하는 일이 구명된 뒤에 죄줄 만한 자는 죄주고 죄가 없는 자는 죄주지 않아야 옥사(獄事)를 안치(按治)하는 도리에 맞을 것인데, 성상께서는 미리 신하들의 죄를 꾸미는 것을 염려하여 이렇게 중도에서 거두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 때문에 슬퍼서 아뢰었는데, 일망 타진이라 분부하셨으니, 일망 타진하는 사람이 어찌 살 도리가 있겠습니까? 이미 이런 분부를 받았으니,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조태채의 일로 말하면, 무릇 간관(諫官)의 지위에 있으면서 관원의 사악을 바로잡는 자가 어찌 다 원한이 있어서 그러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론(黨論)이 도리에 어그러지고 격렬한 것이 근일과 같은 때가 없었고, 무릇 논하는 것이 오로지 협잡하는 사의(私意)에서 나오는데, 이제 네 소(疏)에서 말한 것은 반드시 안사한 신하의 죄를 꾸미려 하여 이건명·박권 등을 말하기까지 하였다. 안사한 신하가 이미 한 둘이 아니니 이는 일망 타진할 생각인데, 너는 스스로 옳다고 여겨 조금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니, 어찌 이토록 방자한가?"
하였다. 박필몽이 말하기를,
"이건명은 과장(科場)을 엄하지 않았던 처지로 돌리려고 궐문이 열렸다는 말을 만들어 냈고, 또 당초에 재신(宰臣)들이 공좌(公坐)한 가운데에서 말을 전한 것이 바로 권치대라 하였는데, 대간의 논계 때문에 함문(緘問)343) 한 뒤에는 이건명이 권치대를 숨기고 갑자기 조명이 와서 전하였다는 말을 내었습니다. 대개 권치대는 이건명이 긴요하게 혼인을 맺을 일이 있어서 숨기고 바로 고하지 않았으며, 조명은 빌어먹는 사람이기 때문에 부리기 쉬우므로 갑자기 변통한 것입니다. 박권의 일로 말하면 그때 형신(刑訊)이 참혹하였던 정상을 사람들이 다 아는데,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권은 단지 나라의 명이 있었기 때문에 형신하였을 뿐이지 매우 미운 것이 있어서 엄하게 형신한 것은 아니며, 이건명은 당초에 그가 들은 것이 있기 때문에 말하였을 뿐이다. 어찌 조명과 함께 꾀하여 나라를 속였겠는가? 이 때문에 안사한 신하들의 죄를 꾸미려 하니, 네가 일망 타진할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더라도 누가 믿겠는가?"
하였다. 박필몽이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는 다시 사문하기를 청한 일 때문에 신하들이 이돈(李墩)을 위하는 처지라고 의심하시나, 설사 이돈이 지금 살아 있더라도 조정의 신하들은 반드시 이돈을 위하여 임금을 속이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그 사람은 이미 백골이 되었으니 허다한 신하들이 어찌 다 이돈을 위하여 스스로 임금을 속이는 죄에 빠지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안을 보면 이미 사증(詞證)이 갖추어진 일이 없으므로 끝내 벗어날 만한 단서가 없는데, 이돈의 죄를 벗기려고 안사한 신하들을 사의(私意)를 쓴 죄로 죄다 모니, 이후로 과시(科試)에 관한 일이 엄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아서 이 과시보다 더한 것이 있더라도 누가 다시 한 마디 말을 하겠으며, 형조(刑曹)·금부(禁府)에서 안치(按治)하는 일은 누가 담당할 자가 있겠는가? 국가에 중대한 일이 있고서야 양사(兩司)에서 함께 일어나는 것인데, 이제는 미친듯이 서둘러 오늘 조어(措語)를 고치고 내일 또 조어를 고치면서 오히려 감히 이돈을 위한 것이 아니고 또 일망 타진하려는 뜻이 없다고 말하나, 그 본의를 헤아리면 오로지 이돈을 위한 것이다. 조태채에게 대하여는 아주 그럴듯하지도 않은 말을 가지고 그의 죄를 모아 대어 무함하려는 뜻을 극진히 하였으니, 조정을 어지럽혀 국가에 근심이 되는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하였다. 박필몽이 말하기를,
"신은 벼슬하기 전부터 언제나 ‘조태채는 나라에 두터운 은혜를 입고 지위가 숭품(崇品)에 이르렀으므로 보답하려는 생각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하리라.’고 생각하였는데, 도리어 탐오하고 법을 어기므로 늘 논핵(論劾)하려 하였으니, 이는 신이 평소에 품었던 생각입니다. 다시 사문하는 일로 말하면, 당초의 성안(成案)에 다른 건의 일이 있는 것이 아닌데, 처음에는 비록 고문을 받고 억지로 승복하였으나 이제와서 평문(平問)함에 비로소 말을 바꾸어 승복하였으니, 이러하여도 믿지 않는다면 무슨 다시 사문할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승지(承旨) 이택(李澤)은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이른바 평문(平問)하였는데 말을 바꾸었으므로 믿을 만하다는 것은 신의 소견과 다릅니다. 임진년 사문할 때에 겸종(傔從)에게는 마지막에 형신하였으나 윤행수(尹彭叟)·갑술(甲戌) 등 여러 사람에게는 본디 형신할 일이 없었습니다. 무릇 죄인을 추핵(推覈)하는 도리로서는 어제는 희다고 하였다가 오늘은 검다고 한다면 반복하여 그 말을 바꾼 정상을 힐문하여야 할 것이고, 엄한 신문을 받고 종내 말을 바꾼 연후에야 혹 믿을 수 있을 것인데, 이제는 한 번 추문(推問)하여 혹 말을 바꾸면 조리가 있다 하여 묻지 않고, 전후에 한결같이 말을 바꾸지 않은 자는 문득 형신하기를 청하니, 바깥의 물정이 이 때문에 의혹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겸인(傔人)은 다시 추문하였고, 윤팽수(尹彭叟)·갑술(甲戌)에게는 다시 추문할 일이 없었으니, 승지의 말이 옳다. 무릇 사문하는 일에는 분명히 신구(伸救)할 만한 단서가 있고서야 벗겨진 사람이 시원할 수 있을 것인데, 이제는 이미 분명하게 다시 사문할 길이 없어졌으니, 버려두도록 하라."
하였다. 박필몽이 말하기를,
"권응(權譍)의 일로 말하면, 궐문이 열렸다는 말은 범연히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한 것이 아닌데, 그는 고초를 견디며 승복하지 않았는데도 이제 지레 감죄(勘罪)하였습니다. 대저 다른 사람이 거짓말하였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야 옳겠고, 권응이 거짓말하였다고 생각한다면 권응에게 물어야 옳을 것입니다. 지레 감률(勘律)한 것으로 말하면 신은 그것이 마땅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릇 죄인은 국옥(鞫獄)에 관계되더라도 한 차례 국문하고 두 차례 국문한 뒤에 참작해 처치하여 도배(徒配)하거나 원배(遠配)하는 것이 규례이다. 권응으로 말하면 본디 사죄(死罪)가 아닌데, 반드시 실정을 불 때까지 형신하려고 오늘 형신하고 내일 또 형신하여 반드시 죽이기를 바라는 것이 어찌 사리에 합당하겠는가?"
하였다. 박필몽이 그래도 강변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릇 당론이 도리에 어그러지고 격렬한 것을 내가 매우 미워하여 접때 판부(判付)와 일전의 연교(筵敎)에 내 뜻을 분명히 보였는데, 네가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는가? 어제의 소의(疏意)와 오늘의 피사(避辭)에 오로지 진신(搢紳)을 일망타진하려 한 거동이 죄다 드러났는데, 이제 임금을 가까이 대한 곳에서도 끝내 힘껏 다투니, 이처럼 방자한 사람을 조정에 두지 않아야 국가가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박필몽을 체차(遞差)하고 경성 판관(鏡城判官)을 제수하여 오늘 안에 사조(辭朝)344) 하게 하고 이어서 도신(道臣)345) 에게 명하여 임지(任地)에 도착한 날짜를 아뢰게 하라."
하였다. 승지 이택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신유년346) 의 의서(擬書)와 윤선거(尹宣擧)의 묘문(墓文)을 써서 들이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두 글은 다 지난번 사학(四學)347) 의 소(疏)와 문생(門生)의 소 가운데에 들어 있었으므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실려 있습니다만, 베껴 쓸 때 오자(誤字)가 있었을까 염려됩니다. 본가(本家)에서 가져와야 할 일입니다마는, 두 집은 다 먼 시골에 있으므로 가져올 즈음에 장차 지체될 형세입니다."
하니,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령(掌令) 권세항(權世恒)이 어제 내린 엄한 비답(批答)으로 인하여 인피(引避)하였는데, 이르기를,
"전하께서 오늘날의 조정의 의논을 보소서. 향배(向背)가 어디에 있으며, 시비가 어디에 있습니까? 대저 강박(姜樸)이 공박한 것은 곧 의서(擬書)에서 공박한 것이고, 박만정(朴萬鼎)이 말한 것은 곧 대신(大臣)이 말한 것인데, 저 의서를 조술(祖述)348) 한 자가 도리어 강박의 말을 죄책하고, 대신을 존상(尊尙)하는 자가 도리어 박만정의 말을 배척하여, 억양(抑揚)하는 사이에 향배가 갑자기 바뀌고 조종하는 사이에 시비가 거꾸로 놓이니, 이러하고도 어찌 인심이 만족하여 따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 오늘날의 논의는 말을 분명하지 않게 우물쭈물하고 이리저리하는 것이 바로 그 본색(本色)입니다. 비록 논할 만하고 배척할 만한 일이 있더라도 조금만 두려운 곳에 관계되면 반드시 견주어 보고 머뭇거리며 마침내 기량(伎倆)은 무른 땅에 나무를 꽂고 말면서 뒷날에 속죄(贖罪)할 계책으로 삼으니, 그 정상이 가엾고 또한 밉습니다."
하였는데, 이튿날 옥당(玉堂)349) 에서 처치하되 논박하여 파직(罷職)시켰다.
7월 3일 경신
승지(承旨) 오명항(吳明恒)·정식(鄭栻)이 아뢰어, 박필몽(朴弼夢)을 외방(外方)으로 내쳐 보임(補任)하라는 명을 중지하기를 두 번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교리(校理) 이정제(李廷濟)·수찬(修撰) 조석명(趙錫命)이 상차(上箚)하여 박필몽(朴弼夢)을 외방에 보임하라는 명을 중지하기를 청하였는데, 말하기를,
"다시 사문(査問)하기를 계청(啓請)한 것을 윤허받지 못하였는데 옥관(獄官)의 죄를 먼저 논열(論列)하였으니, 이것은 성심(聖心)에 닿지 않은 까닭입니다마는, 일망 타진이라는 말씀은 매우 뜻밖입니다. 중신(重臣) 【조태채(趙泰采)를 가르킨다.】 의 일로 말하면, 그 논열한 것이 다 근거가 있습니다. 대개 중신의 몸가짐에 단속이 없어서 본디 비방하는 의논이 많았으니, 이번에 아뢴 것은 대신(臺臣)이 평소에 근심하고 분개하던 것이데, 도리어 어찌하여 일찍이 사사로이 미워하던 것이 있어서 짐짓 함해(陷害)할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엄하게 비답(批答)하고 따르지 않았다.
7월 4일 신유
승지(承旨) 이택(李澤)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옥사(獄事)를 안치(按治)하고 사문(査問)하는 일이 고금에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이번에 사문하는 일처럼 마디마디 근거가 없는 것은 없었습니다. 윤필정(尹弼鼎) 【윤팽수(尹彭叟)의 아버지이다.】 이 당초에 이미 이빈흥(李賓興)에게 글을 쓰고 나서 사문을 시작하기 전에 정장(呈狀)한 것은 정상을 엄폐하기 어려운데도 버려두고 묻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성흥(李聖興)이 이서(李)에 대하여 말한 것이 명백한데도 또한 반드시 버려두어야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빈흥·이원곤(李元坤)은 다 〈거자를〉 두루 찾아다닌 일의 증인인데, 추조(秋曹)350) 에서 처음에 이원곤을 구명하는 동안 이빈흥을 그대로 가두어 두기를 청하였다가 곧 또 까닭없이 이원곤의 일이 끝나기 전에 이빈흥을 형신(刑訊)하기를 청한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윤팽수·갑술(甲戌)·이정흥(李禎興)·권치대(權致大)·조명(趙銘) 등은 마찬가지로 말을 바꾸었는데, 대간(臺諫)이 권치대와 조명만을 형신하기를 계청하고 나머지는 다 묻지 않으니, 이것은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그 아들이 격고(擊鼓)351) 한 것이 미워서 그 아비를 신문하기를 청한 것으로 말하면, 참으로 전에 듣지 못하던 것입니다. 윤리를 손상하고 의리에 어그러져서 뒷 폐단에 크게 관계되므로, 인정이 불만하고 분노하는 것이 여기에 이르러 극진합니다. 대개 이번에 다시 사문(査問)하는 일은 한 고관(考官)의 처지를 신백(伸白)할 뿐 아니라 정신을 쏟는 것이 반드시 옥사(獄事)를 안치(按治)한 신하들에게 원한을 갚으려는 것입니다. 사문하는 일을 버려두라는 명이 있고부터 모두가 황망하여 양사(兩司)가 함께 쟁론(爭論)하였으나, 오히려 다행히 성의(聖意)가 굳게 지켜져서 화(禍)를 일으키려는 마음을 부리지 못하였는데, 이에 박필몽(朴弼夢)의 소(疏)가 나오자 대개 그 정상이 절로 드러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소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한 뜻은 터무니없는 말로 속이고 반복하여 엿보는 것인데, 귀역(鬼蜮)352) 처럼 간사한 자이니 천고(千古)에 없는 소인이니 때를 타서 남을 무함한다느니 교묘하고 간사한 정태(情態)이니 하는 따위 말로 한 무리의 사류(士類)를 음사(陰邪)하고 망측한 죄로 억지로 몰고, 또 그 밖에 옥정(獄情)을 어지럽혀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자를 무함한 정상은 차마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당초에 두 겸종(傔從)이 죽게 된 것이 하나는 승복한 뒤에 있었고 하나는 석방된 뒤에 있었는데, 이제 박필몽은 반드시 죽는 것을 눈으로 보고 겁이 나서 승복하였다고 말하였고, 처음에 권치대(權致大)의 말을 듣고 여럿이 앉은 데에서 전한 자는 권상유(權尙游)인데, 이제 갑자기 조명(趙銘)으로 바꾸었다 하여 이건명(李健命)에게 죄를 돌렸습니다.
사실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직 무함을 일삼았으니, 여기에서 다른 말도 거짓말하고 마음대로 추측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신(重臣)을 무함한 것으로 말하면 그 참혹함이 극진하였는데, 그 열거한 죄목이 과연 그 말과 같다면, 어찌하여 엄하게 핵실(覈實)하여 죄를 정하기를 청하지 않고 도리어 흐릿하게 말하여 다만 더럽힐 생각만 합니까? 그 가운데에 있는 임해군(臨海君)의 옛 집터에 관한 말은, 조태채(趙泰采)의 사위는 임원군(林原君) 이표(李杓)의 아들인데, 자손이 그 조선(祖先)의 터에 집을 짓는 것이 어찌 중신에게 관계되겠으며, 공자(公子)의 집안 형편도 절로 여유가 있는데, 짓는 비용이 또한 어찌 중신에게 관계되겠습니까마는, 위급하고 두렵게 하는 말로 무함하는 데 마음을 썼으니, 이 한 가지 일에 의거하여도 나머지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무함하는 바르지 않은 논의를 어찌 대각(臺閣)에서 말이 나왔다고 핑계하여 명백히 가려서 매우 배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의 처분은 참으로 정당한데, 후사(喉司)353) ·옥당(玉堂)354) 에서 잇따라 쟁집(爭執)하여 마치 죄없이 죄받은 것처럼 하니, 신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하고, 끝에 말하기를,
"의서(擬書)와 묘문(墓文)은 다 최석문(崔錫文)의 소에 있으므로 이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베껴 적혀 있으니, 멀리 본가(本家)에서 가져올 것 없이 《승정원일기》를 베껴서 들이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받아들이고 이어서 두 글은 《승정원일기》를 베껴서 들이라고 명하였다.
7월 5일 임술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이의현(李宜顯)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홍호인(洪好人)·박봉령(朴鳳齡)을 승지(承旨)로, 이세면(李世勉)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윤동수(尹東洙)를 지평(持平)으로, 송필항(宋必恒)을 정언(正言)으로, 한재원(韓在垣)을 장령(掌令)으로, 오명항(吳命恒)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송정명(宋正明)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삼았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아! 나 소자(小子)가 덕이 없어 왕위(王位)를 욕되게 한 지 거의 4기(紀)355) 가 되어 가는데, 착하지 못한 정치가 많아서 하늘에 죄를 얻었다. 홍수와 가뭄과 바람과 서리의 재해가 없는 해가 없으므로, 농작물이 죄다 병들어 백성이 곤궁하니, 밤낮으로 근심하고 한탄하여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편안하지 않다. 지난번에 홍수(洪水)가 있은 뒤에 이어 가뭄의 재앙이 와서, 바로 만물이 성장할 때를 당하여 한 달 동안이나 계속 가물어 온갖 곡식이 시들었다. 김맨 후에 한재(旱災)가 몹시 다급하므로, 희생(犧牲)356) 을 아끼지 않고 규벽(圭璧)357) 을 다하였으나, 작은 정성이 사무치지 못하여 비가 내릴 뜻은 더욱 아득하다. 예전에 풍요하던 곳이 이제는 다 민둥민둥하여, 계절은 7월인데 가을 곡식이 성숙할 희망이 끊어졌다. 내 적자(赤子)를 생각하면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으니, 백성의 부모가 되어 내가 어떠하겠는가? 병중에도 마음이 졸여서 편안히 있을 겨를이 없으니, 차라리 스스로 몸을 불살라 하늘의 꾸중에 보답하고 싶으나 그럴 수도 없다.
아! 이번 가뭄은 오로지 착하지 못한 데에 말미암았으니, 대개 스스로 덕을 닦고 허물을 살피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겠으나, 또한 어찌 뭇 신하를 칙려(勅礪)하여 서로 경계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아! 임금이 미워하는 것은 당론(黨論)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오늘날의 당론은 이미 심복(心腹)의 고질(痼疾)이 되었다. 이 병을 제거하지 못하면 반드시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것이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절로 한심하여진다. 전후에 신칙(申飭)을 누누이 하였을 뿐만이 아닌데 번번이 헛소리가 되었으니, 이는 위에 있는 사람이 표준을 세우는 도리를 잘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내가 참으로 부끄럽고 겸연쩍다. 아! 너희 모든 신하가 나의 정사에 부지런한 근심을 몸받아 붕당(朋黨)의 버릇을 힘껏 고치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왕실(王室)을 돕는다면, 어찌 국가의 복이 되지 않겠는가? 각각 이를 힘써야 할 것으므로, 이에 유시(諭示)한다."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이는 여느 분부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하여 중외(中外)에 반시(頒示)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한재(旱災) 때문에 대신(大臣)과 금오(金吾)358) ·추조(秋曹)359) 의 당상(堂上)에게 명하여 빈청(賓廳)360) 에 모여 소결(疏決)361) 을 행하게 하였으나, 대신이 도성(都城)을 나갔기 때문에 시행하지 못하였다.
지평(持平) 양정호(梁廷虎)가 상소(上疏)하여, 박필몽(朴弼夢)을 먼 외방(外方)에 보임(補任)하라는 명을 중지하기를 청하고, 이어서 이택(李澤)의 소(疏)를 배척하기를,
"탄핵받은 탐오(貪汚)한 재상(宰相)을 힘써 신구(伸救)하고, 내친 대관(臺官)을 자기 마음대로 무함하고 배척하였으니, 곧 죄를 꾸짖어 파직(罷職)하여 그 죄를 징계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엄한 비답(批答)으로 배척하였다.
오늘 소차(疏箚)를 봉입(捧入)한 승지(承旨)를 죄다 파직하고 내일부터 크고 작은 공사(公事)를 모두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며, 동소 위장(東所衞將) 이철징(李鐵徵)을 가승지(假承旨)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의관(醫官)이 입진(入診)하였을 때에 약원(藥院)362) 의 제조(提調)가 병구완을 잘하지 못한다고 누누이 하교하였는데, 사지(辭旨)가 매우 엄하였다. 대개 오늘 후사(喉司)에서 소차를 봉입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의관들이 나와서 전하니, 이에 도제조(都提調) 서종태(徐宗泰)·제조(提調) 최석항(崔錫恒) 등이 대궐 밖으로 나가 대죄(待罪)하였다.
7월 6일 계해
가뭄이 심하기 때문에 대신(大臣)을 보내어 종묘(宗廟)에서 비를 빌게 하였다.
의서(擬書)와 묘문(墓文)을 곧 베껴 들이게 하라고 하교(下敎)하여 재촉하고 드디어 주서(注書)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는데, 곧 베껴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이제 대각(臺閣)의 논의를 보건대, 진신(搢紳)에게 화(禍)를 떠넘기는 계책이 이미 이루어져서 조정이 거의 비어 모양을 이루지 못하니, 서둘러 결말을 지어 조정을 안정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임금이, 접때 이원곤(李元坤)의 원정 공사(元情公事)의 결어(結語)는 저편을 억제하고 이편을 칭양(稱揚)하였으므로 옥사(獄事)를 평의(評議)하여 아뢴 것이 공정하지 않다 하여, 금부(禁府)의 당상(堂上)인 판의금(判義禁) 윤덕준(尹德駿)·동의금(同義禁) 유봉휘(柳鳳輝) 등을 특별히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사문(査問)하는 일을 판하(判下)한 뒤에 맨먼저 도로 중지하기를 청하는 계(啓)를 낸 대사간(大司諫) 윤성준(尹星駿)을 내쳐서 곤양 군수(昆陽郡守)에 보임(補任)하고, 장령(掌令) 구만리(具萬理)는 진해 현감(鎭海縣監)에 보임하며 정언(正言) 심상정(沈尙鼎)은 사천 현감(泗川縣監)에 보임하게 하되, 모두 즉일로 보내고 도신(道臣)을 시켜 임소(任所)에 도착한 날짜를 아뢰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 사문하는 일을 도로 중지하기를 청한 것은 방자하고 무엄한데도 윤성준을 곧 전조 좌이(銓曹佐貳)363) 의 망(望)에 주의(注擬)364) 하였다 하여 이조 판서(吏曹判書) 최석항(崔錫恒)·참판(參判) 이광좌(李光佐)·좌랑(佐郞) 송성명(宋成明) 등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어제부터 바야흐로 도목정(都目政)을 시작하여 끝내지 못하였는데 전관(銓官)이 다 파직되어 드디어 중도에서 그치니, 임금이 이조의 당상(堂上)이 갖추어진 뒤에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이제까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위하여 신변(伸辨)한 유생(儒生)이 많이 정거(停擧)365) 의 벌을 받았는데, 처분이 치우치게 무거운 듯하니, 모두 정거를 풀어 주라."
하였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관명(李觀命)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특제(特除)하였다.
윤팽수(尹彭叟)·갑술(甲戌)을 각별히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그 말을 바꾼 간사한 정상을 캐어 물으라고 명하였다.
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창집(金昌集)·전 대사헌(大司憲) 권상하(權尙夏)를 모두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이번에 의서(擬書)를 상세히 보건대, 글 가운데의 말이 과연 주장하는 것이 박절하니, 이제까지 이 판부사(李判府事) 【곧 이여(李畬)이다.】 가 차자(箚子)로 논한 것이 옳다. 전연 과실이 없는 것으로 돌릴 수 없으니, 많은 선비가 신변(伸辨)한 것이 괴이할 것이 없다."
하였다.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정원(政院)에 내리고 권상하(權尙夏)의 서문(序文)을 다시 새겨서 넣으라고 명하였다. 뒷날에 또 정호(鄭澔)의 발문(跋文)도 아울러 그대로 두라고 명하였다.
멀리 귀양보낸 죄인 조상건(趙尙健)을 놓아 보내고, 또 문외(門外)로 내친 죄인 정호(鄭澔)·민진원(閔鎭遠)을 풀어 주어 그 직첩(職牒)을 도로 주며, 전 교리(校理) 홍계적(洪啓迪)을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가 의관(醫官)이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성교(聖敎)가 지극히 엄하였다 하여 차자(箚子)를 올리고 대죄(待罪)하니, 임금이 그 약원(藥院)의 직임을 갈도록 윤허하였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의현(李宜顯)을 발탁하여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삼았다. 임금이, 이의현은 접때 개성 유수(開城留守)로서 괴격(乖激)한 대간(臺諫)의 말 때문에 마침내 체직되었다 하여, 특별히 이 벼슬을 제수(除授)하도록 명하였다.
이의현(李宜顯)을 도승지(都承旨)로, 허윤(許玧)·황일하(黃一夏)를 승지(承旨)로, 송상기(宋相琦)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김우항(金宇杭)을 내의원 도제조(內醫院都提調)로, 민진후(閔鎭厚)를 제조(提調)로, 권상하(權尙夏)를 대사헌 겸 찬선좨주(大司憲兼善祭酒)로, 이기익(李箕翊)·윤봉조(尹鳳朝)를 헌납(獻納)으로, 김창흡(金昌翕)을 지평(持平)으로, 안중필(安重弼)을 장령(掌令)으로, 민진후(閔鎭厚)를 판의금(判義禁)으로, 김재로(金在魯)를 부수찬(副修撰)으로, 김창집(金昌集)을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삼았다.
7월 7일 갑자
유집일(兪集一)을 도승지(都承旨)로, 홍계적(洪啓迪)을 부교리(副校理)로, 어유귀(魚有龜)를 교리(校理)로, 윤석래(尹錫來)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특교(特敎)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여(李畬)·이이명(李頤命)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대신(大臣)이 성밖에 오래 있는 것은 이미 사체(事體)에 마땅한 것이 아니며, 내가 서운하게 생각하는 것이 병중에도 절실하니, 경(卿)은 모름지기 내 지극한 뜻을 몸 받아 빨리 들어와야 한다."
하였다.
특교(特敎)로 대사헌(大司憲) 권상하(權尙夏)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접때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인간(印刊)하여 바쳤을 때에 내가 곡절을 잘 알지 못하고 갑자기 서문(序文)을 보고서 의심하여 처분이 너무 지나치고 은례(恩禮)가 박하여진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부끄럽고 한탄스럽기 이를 데 없다. 이제 지난 잘못을 이미 깨달았고 관직도 예전과 같이 하였으니, 사림(士林)의 울분을 조금은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내 지극한 뜻을 하유하니, 경(卿)은 몸받아서 마음을 바꾸어 올라오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가 정적(情跡)이 불안하다 하여 성밖으로 나가니, 임금이 하유(下諭)하기를,
"한때의 분부는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닌데, 이번의 출성(出城)이 문득 뜻밖에 나왔으니, 마음이 매우 놀랍기 이를 데 없다. 대신의 거취(去就)는 스스로 가벼이 해서는 아니될 것이니, 모름지기 내 지극한 뜻을 몸받아 안심하고 들어오라."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예전부터 신임하던 신하가 많이 실패를 당하니, 마음이 늘 슬펐다. 이제 내가 조태채(趙泰采)에 대하여 은총이 끝내 쇠하지 않으므로 박필몽(朴弼夢) 같은 시기하는 무리가 마음대로 미워하고 싫어 하니, 그 무함한 것이 참혹함을 다하였다. 이처럼 위험한 무리는 말할 것도 못되니, 빨리 나와서 행공(行公)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7월 8일 을축
특교(特敎)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창집(金昌集)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이제까지 있었던 경(卿)의 차자(箚子)는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정성에서 나왔는데, 그때의 처분은 실착을 면하지 못하고 도리어 경이 선동하여 더욱 어지럽힌다고 의심해서 비답(批答)한 말이 매우 화평하지 못하였다. 이에 경이 불안하여 성밖으로 나가고 무함하는 말이 마침내 기회를 엿보아 일어나게 하였으니, 이제 와서 뒤미처 생각하면 어찌 부끄럽고 늬우쳐짐을 견디겠는가? 이제는 처분이 정하여지고 공론이 펴졌다. 이에 사관(史官)을 보내어 내 지극한 뜻을 하유하니, 경은 안심하고 즉일로 들어오라."
하였다.
임금이 손수 쓴 글을 승지(承旨)를 시켜 보내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여(李畬)·이이명(李頤命)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경(卿)이 도문(都門)을 나간 지 벌써 5개월이 되었는데, 자나깨나 경을 생각하여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더구나 어려움이 많은 때에 줄곧 물러나 있지 말아야 할 것이므로, 어제 사관(史官)을 보내어 특별히 하유하였으나 경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부끄러움을 더할 뿐이다. 지금 괴로움이 그치지 않아서 생각의 지극함이 반드시 내 병을 더하게 할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바삐 손수 써서 경이 뜻을 고치기를 권면한다. 아! 내가 가뭄을 답답히 여기고 비를 바라는 것이 바야흐로 절실하거니와, 경이 조정에 나오기를 바라는 것도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전후에 침척(侵斥)한 말은 마음에 둘 것도 못되니, 경은 모름지기 깊이 헤아려 즉일로 함께 들어와 내 병중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하여야 한다."
하니, 이여와 이이명이 다 명을 받들어 성안으로 들어왔다.
7월 9일 병인
약방(藥房)366) 에서 입진(入診)할 때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같이 들어갔는데, 임금의 위유(慰諭)가 매우 지극하였다.
이의현(李宜顯)을 도승지(都承旨)로, 남도규(南道揆)를 집의(執義)로, 조명봉(趙鳴鳳)을 장령(掌令)으로, 박성로(朴聖輅)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상우(趙相愚)가 상차(上箚)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선정신(先正臣) 윤증(尹拯)과 좨주(祭酒) 신(臣) 권상하(權尙夏)는 다 전하께서 예우(禮遇)하신 신하이니, 전하께서 접때 서문(序文)을 처분하신 방도는 본디 조용히 분부하여 권면(卷面)을 제거하게 하셨어야 할 것인데, 대내(大內)에서 불사르기까지 하신 것은 너무 경거(輕遽)하고 또 화평한 방도에 어그러졌습니다. 이제 와서 특별히 분부하여 도로 책 머리에 얹게 하셨으니, 이는 진실로 유신(儒臣)을 위로하는 방법이겠습니다마는, 선정(先正)에 대하여는 마침내 옳지 않다는 지목을 가하고 조금도 돌보시지 않았으니, 전하께서 평소에 높이시던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생각하건대 죄받은 네 신하가 남으로 내쳐지고 북으로 내쳐진 것은 대개 성상께서 징계하시려는 생각에서 나왔을 것이며, 어찌 반드시 죽이려 하셨겠습니까마는, 더위를 무릅쓰고 멀리 험악한 곳에 가면 모두 사생(死生) 사이에서 쓰러질 염려가 있으니, 이제 우선 조금 나은 곳으로 옮겨서 허물을 반성하게 하시면, 어찌 성상께서 인애(仁愛)로 덮어 주시는 덕에 빛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가뭄의 재앙이 불타는 듯하여 이미 대흉(大凶)을 알겠는데, 자기를 죄책하는 열 줄의 분부를 문득 이때에 내리시고 이어서 묘당(廟堂)을 시켜 소결(疎決)하게 하는 명이 있었으니, 무릇 듣는 자로서 누구인들 감탄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다만 봉행(奉行)할 사람이 없어서 오히려 폐기되었으니, 우리 성상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자신을 죄책하고 서둘러 가뭄을 구제하시려는 성대한 뜻에 매우 어그러집니다. 다시 명명(明命)을 내려 거행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옛 잘못을 이제 깨닫고 처분이 바르게 되었으니, 더 헤아려 생각할 것이 없다. 네 신하의 죄는 내쳐서 보임된 것도 가벼운데, 그 곳이 좋고 나쁜 것을 어찌 논할 만 하겠는가? 소결은 늦추지 말아야 하니,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사간(司諫) 이기익(李箕翊)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문(斯文)367) 에 변이 생긴 뒤로 일종의 아부하는 무리가 앞에서 창도(唱道)하고 뒤에서 화응(和應)하여 반드시 다투려 한 지 오래 되었는데, 지난번 유봉휘(柳鳳輝)·정식(鄭栻) 등의 당차(堂箚)368) 에 이르러서 극진하였습니다. 세 조정에서 예우(禮遇)한 선정(先正)을 제멋대로 헐뜯고 무심하며 일대(一代)에서 존앙(尊仰)한 유현(儒賢)을 방자하게 죄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일제히 분노하여 갈수록 격렬하였습니다. 이제 시비가 크게 정하여지고 사정(邪正)이 이미 가려졌으니, 그때에 차자로 논하기를 주장한 무리를 엄하게 징토(懲討)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멀리 유배(流配)된 유상기(兪相基)가 신(臣)은 죄가 없는 줄 압니다. 귀양간 신하들이 이제는 다 용서받았으니, 유상기만이 외톨로 소외된 한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또한 가엾지 않겠습니까? 올해 홍수와 가뭄의 재앙은 예전에 없던 것이니, 조금이라도 헛되이 쓰는 일이 있다면, 우선 일체 멈추어야 하겠습니다. 이번에 중시(重試)369) 에 대거(對擧)하는 별시(別試)370) 는 이미 경과(慶科)와 다르고 서북(西北)의 시취(試取)도 긴요한 것이 아니니, 일체로 물려서 거행하는 것이 참으로 사의(事宜)에 맞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여 유상기를 석방하고 과거를 물려서 거행하는 일은 묘당(廟堂)에 내려 품처(稟處)하되, 모두 이듬해로 물려서 정하라고 명하였다.
7월 10일 정묘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묘문(墓文) 가운데에는 본디 욕이 윤선거(尹宣擧)에게 미친 일이 없으니, 일종(一種)의 운운이라는 말은 절로 사실에 어그러지는 것으로 돌아가고, 이제까지 대간(臺諫)의 논계(論啓)에 인용된 《주례(周禮)》의 글도 마침내 그것이 적합한 줄 모르겠다."
하였다.
7월 11일 무진
밤 5경(五更)에 목성(木星)이 사괴성(司怪星)을 범하였다.
홍호인(洪好人)을 승지(承旨)로, 권성(權𢜫)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삼았다.
부수찬(副修撰) 김재로(金在魯)가 상차(上箚)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접때 선정(先正)을 헐뜯는 무리가 낯을 바꾸어 번갈아 나오고 때를 타서 교묘히 술책을 부리되, 논사(論思)의 한 차자(箚子)는 근거없이 욕한 것이 가장 심하였습니다. 처음에 선정을 침범할 때에는 본원(本源)이라는 말을 주워 모으고 이미 밝혀진 무함(誣陷)을 꾸며 지어서, 혹 헐뜯긴 제(齊)나라 사람에 견주기도 하고 말을 지어냈다는 나쁜 이름을 씌우기도 하여, 그 말 삼은 것이 본디 이미 아주 도리에 어그러졌거니와, 마침내 유현(儒賢)을 죄주기를 청할 때에는 마음껏 독을 부리고 입에 맞는 대로 쾌한 것을 취하여 사실을 종잡을 수 없이 바꾸고 언뜻 신속하게 고쳤으니, 아! 통탄합니다.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섬기는 바에 전념하여 그 도리를 도타이 지키면 그 의지하는 바를 빙자하여 늘 스스로 핵책(劾責)하려고 생각한다 하고, 사실에 따라 상소하여 말이 엄하고 사리가 명백하면 몰래 술책을 써서 성총(聖聰)을 속인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강박(姜樸)의 일이 나자 스스로 기사년371) 의 흉당(凶黨)이 먼저 한 짓으로 같이 돌아가게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사림(士林)이 일제히 분노하는 것이 오래 갈수록 더욱 격렬하여지니, 성심(聖心)이 크게 깨달으시어 공론이 쾌히 펴지는 때에 결코 이런 무리가 징토(懲討)를 오래 피하여 편히 쉬도록 버려둘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어진이를 무함한 죄를 빨리 바루어 중외(中外)의 희망에 보답하소서.
또 신에게는 더욱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선정이 일생 동안 담당한 것은 천지의 바른 도리이며 우주를 지탱하고 일성(日星)처럼 빛나는 대의(大義)이었으며, 그 지극한 정성으로 치욕에 대하여 통분하고 힘을 다하여 경영한 신밀(愼密)한 계책과 제치(制置)한 성산(成算)은 독대(獨對)하여 이야기한 것에서 보아도 그 만분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선왕이 승하하시어 문득 좌절되었으므로 큰 사업이 성취되지는 못하였으나, 효양(孝養)이 이 때문에 길이 수립되고 윤상(倫常)이 이에 따라 추락하지 않아서 천하와 후세에 크게 할 말이 있게 된 것이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지금 선정(先正)을 시기하는 자가 그 몸을 공박하여 배척하는 것도 부족해서 대의까지도 헐뜯었는데, 처음에는 볼만한 실속이 아주 없다고 비난하고 마침내는 허튼소리를 하여 명예를 얻으려 하였다고 배척하며 서로 전습(傳襲)하여 법문(法門)을 따로 세웠으므로, 그 세도(世道)의 해독이 되는 것이 참으로 어디에서 그칠는지 모르겠으니, 옛 성인(聖人)이 홍수(洪水)나 맹수(猛獸)에 비유한 것이 지나친 염려가 아닙니다.
성상께서는 평소에 존주(尊周)372) 의 정성과 전열(前烈)을 빛내는 효성으로써 이러한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매우 끊기에 겨를이 없으셔야 할 것인데, 끝내 한 번 말하여 명백히 가려서 대의를 지키려고 생각하지 않으시니, 이것이 신이 늘 개탄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춘추(春秋)》의 의리를 더욱 밝혀 더러운 유속(流俗)을 경계하소서, 지금 처분이 한결같이 새로워지고 시비가 크게 정하여졌으니, 이제까지 임금의 말씀이 어그러진 것을 감히 낱낱이 뒤좇아 제기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 가장 큰 것을 말하자면 윤행교(尹行敎)의 소(疏)에 대한 비답 가운데에 있는 ‘귀역(鬼蜮)·호리(狐狸)’라는 분부 같은 것이 없습니다. 임금이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도리로서 죄과가 있으면 엄중한 말로 준열히 꾸짖어도 안될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간사하고 더러운 것에 견주어 욕을 더하고서야 쾌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빨리 비지(批旨)를 쾌히 고쳐 내리셔서 성덕(聖德)을 빛내소서. 이어서 그윽이 생각하건대 성후(聖候)가 침체되어 회복이 아직도 더디므로 조금만 노동하면 쉽게 심해지니, 요즈음의 일을 말하여 보겠습니다. 하루에 여러 번 특교(特敎)를 내리시어 많으면 십여 번이나 되니, 대저 이는 진미(盡美)한 거조(擧措)이기는 하나, 마침내 너그러운 맛이 없어서 조절하는 데에 방해될 듯합니다. 옛사람은 ‘일을 줄이고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병을 고치는 요체’라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더욱 유의하여 늘 마음과 정신이 편안하고 화평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고, 일들이 각각 절로 마땅하게 처리되어 자신이 힘을 쓰지 않음으로써 조양(調養)하는 방도를 다하게 하소서."
하고, 끝에 말하기를,
"예전에 없던 가뭄의 재앙이 팔로(八路)가 다 같아서 대흉(大凶)이 이미 분명하니, 앞으로 진구(賑救)할 방책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미리 헤아리고 익히 강구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고, 이어서 유봉휘·정식을 모두 멀리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아뢰기를,
"전 도승지(都承旨) 유봉휘(柳鳳輝)는 간악한 성질을 지닌 자로서 화(禍)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마음을 품어 명의(名義)를 원수처럼 보고 선류(善類)를 시기하는 것이 그 평생의 기량(伎倆)이며, 전 승지 정식(鄭栻)은 본디 시세에 붙좇아 남의 입김을 바라는 무리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논사(論思)하는 직임에 외람되게 있으면서 간사한 말을 선동하여 앞장서고, 때를 타서 해독을 부리고 방자하게 투서하여 선정(先正)을 마치 사사로운 원수처럼 헐뜯어 욕했으며, 참혹한 창끝과 악독한 화살을 선정의 적전(嫡傳)인 유현(儒賢)에게 옮겨 짓밟고 무함하여 오직 하고자 하는 바만을 생각하였으니, 그 마음 쓴 것을 따져보면 기사년373) 에 어진이를 죽인 흉당(凶黨)의 논의와 같은 술책으로 돌아갑니다. 사림(士林)이 몹시 한탄하고 국인(國人)이 놀라 분개하는 것이 오래 갈수록 더욱 격렬하여지니, 청컨대 모두 멀리 귀양보내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당차(堂箚)에 이미 하유(下諭)하였다고 답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창집(金昌集)이 상차(上箚)하여 진사(陳謝)하고, 또 말하기를,
"신의 아비의 당시의 소(疏)에 ‘아버지와 스승은 본디 경중의 구별이 있으나, 임금·스승·아버지에게서 생장하므로 한결같이 섬긴다는 것이 본디 성현(聖賢)의 큰 가르침이니, 고금을 통하여 옳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 일편(一編)의 대지(大旨)를 보면, 특별히 두 가지를 대비하여 말하였으나 말뜻의 주객(主客)의 형세는 과연 경중이 없는 것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므로 접때 신의 차자(箚子)에 이른바 경중이 없다고 한 것도 그 한결같이 섬긴다는 의리에서 말한 것입니다. 무인년374) 의 소로 말하면, 당시의 유생(儒生)들이 신의 아비를 허물한 것이 오로지 아버지와 스승의 윤리를 헤아리지 못한 한 가지 일에서 나왔으므로, 신이 우선 그 말에 대하여 변명하느라 한결같이 섬긴다는 의리에 주의(主意)를 돌리지 못했으나, 전후에 말한 것은 뜻이 실로 통하니, 그 말에 완곡·경직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로써 선지(先旨)에 배치된다 하여 특별히 신을 억누르는 바탕으로 삼은 것은 또한 매우 우습지 않겠습니까?
임진년375) 합고(合考)376) 때의 일에도 곡절이 있었으나, 신이 이미 환히 보고 분명히 알지 못하였으니, 본디 반드시 사정(私情)을 썼으리라고 잘라 말하지 않았어야 하며, 또한 어찌 감히 뭇사람이 의심하는 가운데에서 증언하여 한편 사람이 바라는 바에 부당하게 좇겠습니까? 차자(箚子)로 아뢴 뒤에도 그 형세가 그러하였을 뿐입니다. 시관(試官)들이 함답(緘答)하기 전에는 혼자서 먼저 말하지 않아야 하고 함답한 뒤에는 성명(聖明)께서 문득 처분하셨으므로, 신이 뭇사람을 따라 한 마디 말하고자 하더라도 책임만 면하는 것 같고 마침내 자신에게는 보탬이 없었을 것이며, 또 명백하게 증거하여 이돈(李墩)의 억울함을 아뢸 수 없었으니, 비록 신으로 하여금 일찍 말하게 하였다 하더라도 한편 사람이 이 때문에 신이 차자를 올린 뜻을 책망하려는 것인데, 어찌 마침내 혜문(惠文)의 탄핵(彈劾)377) 을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손수 써서 답하기를,
"일전의 별유(別諭)에서 내가 이미 깊이 뉘우쳤거니와 무함은 내가 이미 환히 아는데, 이번에 상소하여 변명한 것이 더욱이 명백하므로, 경(卿)에게는 사진(仕進)하기 어려운 단서가 다시 없으니, 결코 잠시라도 성밖에 머물러서 허저(虛佇)378) 의 정성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손수 쓴 글로 거듭 훈계하노니, 경은 빨리 승지(承旨)와 함께 들어와 내가 병중에 생각하는 마음을 위로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과 판의금(判義禁) 민진후(閔鎭厚)·지의금(知義禁) 홍만조(洪萬朝)·동의금(同義禁) 김덕기(金德基) 및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빈청(賓廳)에 모여 현재 갇혀 있거나 유배(流配)된 죄인들을 소결(疏決)하였다.
7월 12일 기사
임금이 또 승지(承旨)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창집(金昌集)을 불렀다. 김창집이 드디어 대궐에 나아가 사은(謝恩)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매우 지극히 위유(慰諭)하였고 뉘우치는 뜻을 모두 보였다.
유집일(兪集一)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정호(鄭澔)를 대사헌(大司憲)으로, 권상하(權尙夏)를 좌찬성 겸 세자 이사(左贊成兼世子貳師)로, 이만성(李晩成)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이때 임금이 찬성(贊成)을 차출하라고 명하였으므로, 전조(銓曹)에서 민진후(閔鎭厚)·최규서(崔奎瑞)·조태채(趙泰采)를 주의(注擬)하여 바쳤는데, 임금이 특지(特旨)로 권상하를 제배(除拜)하고 이만성도 아경(亞卿)379) 을 거쳤으므로 특별히 형조 판서에 제배하였다.
7월 13일 경오
간원(諫院)에서 하(河)380) 의 일과 권설(權卨)의 일과 유점사(楡岾寺)의 일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황이장(黃爾章)이 시의(時議)에 아부하여 일에 앞장서고, 조익명(趙翼命)이 화(禍)의 근원을 앞장서 말하며 유현(儒賢)을 무함하고, 김계환(金啓煥)이 ‘순박(醇駁)381) ·공사(公私)’ 따위 말로 선정(先正)을 근거 없이 헐뜯고, 김시혁(金始㷜)이 감히 선정의 성자(姓字)를 빼어 버젓이 짓밟고, 홍우행(洪禹行)이 때를 타서 날뛰어 사문(斯文)의 변괴를 일으킨 것은 그 말을 한 것이 아주 도리에 어긋나고 마음 쓴 것이 참혹하며 번갈아 서로 화응(和應)하여 천총(天聰)을 엄폐하였으니, 그 정상을 논하면 그 죄가 같습니다. 청컨대 모두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여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소서."
하니, 임금이 삭탈하여 출송하는 일을 따르고 황이장은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다.
전일 김창집(金昌集)을 논핵(論劾)한 대관(臺官) 이세최(李世最)·이정제(李廷濟)·홍우행(洪禹行)·김시혁(金始㷜) 등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이제까지 대신(大臣)의 차자(箚子)는 정성스러울 뿐이고 더구나 그 아뢴 바에는 절로 곡절이 있었는데, 양사(兩司)의 신하가 마음써서 무함하여 곧바로 불충(不忠)하고 부직(不直)한 죄로 몰았으니, 지극히 놀랍고 한탄스럽다. 모두 파직(罷職)하라."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가뭄이 몹시 혹독하여 대흉(大凶)이 이미 분명하다. 이런 때를 당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전념하는 것은 불에 갇히고 물에 빠진 자를 구제하는 것만 같이 할 뿐이 아니니, 묘당(廟堂)을 시켜 마음을 다하여 강구하게 하라. 모든 낭비에 관계되는 것은 일체 줄이고 경외(京外)의 물선(物膳)과 삼명일(三名日)382) 의 방물(方物) 중에서 궁대(弓帒)·통개(筒箇) 외에는 모두 내년 가을까지 봉진(封進)을 멈추고, 주방(酒房)의 향온(香醞)은 반으로 줄여서 봉진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상차(上箚)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 혹심한 한재(旱災)를 돌아보건대, 수십 년 이래 없던 것으로 팔로(八路)가 다 그러하여 대흉(大凶)을 이미 알겠으니, 참으로 국가의 존망(存亡)이 관계되는 바입니다. 이런 처지가 되었으니 서둘러 강구하는 것을 하루도 늦출 수 없습니다. 오직 백성을 진구(賑救)하는 일에 있어서 안으로는 헛된 비용을 절약하여 조금이라도 제활(濟活)을 도모하는 데에 옮기고, 밖으로는 반드시 감사(監司)·수령(守令)을 가려 쓰고서야 구덩이를 메우게 될 목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양남(兩南)383) 의 감사는 여러 번 갈린 끝이므로 재촉하여 부임하게 하더라도 반드시 사고없이 곧 가기 어려울 것인데, 이 달이 지나면 철은 점점 늦어지고 가을 일은 이미 끝나서 새로 도임(到任)한 사람이 결코 손쓸 길이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양남의 감사가 다 치적(治績)이 있고 겨우 진정(賑政)을 지냈으며 도내의 형세를 잘 아니, 내년 보리가 익은 계절까지 잉임(仍任)384) 하여 그 공효(功效)를 책임지우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듯합니다. 이번 대정(大政)385) 에 차출할 수령을 대정이 다시 있을 때를 기다려서 비로소 하비(下批)하면 더딜는지 빠를지 알 수 없지만 등대(等待)할 즈음에도 때를 넘기게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전부터 폄체(貶遞)할 수령을 대정 전에 먼저 차출한 것은 대개 민사(民事)가 급하기 때문이니, 이런 비상한 재앙을 당하여 어찌 특별히 변통할 도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남아 있는 빈자리도 대신할 사람을 차출해 하비하여 수일 안으로 재촉하여 보내는 것도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장령(掌令) 안중필(安重弼)이 상소(上疏)하기를,
"접때 최석문(崔錫文) 등은 그 스승을 위하여 신변(伸辨)한다는 핑계로 한 소(疏)를 올려서 선정(先正)을 근거없이 욕한 것이 그지없는데, 그 논열(論列)한 것은 거짓을 꾸민 정상이 아닌 것이 없고 이미 접때 반유(泮儒)386) 의 소에 자세하였으므로 다시 번거롭게 할 것 없습니다마는, 바야흐로 살아 있는 허황(許璜)을 경향(京鄕)에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여 곧바로 선정을 거짓말을 지어낸 죄에 놓으려 하였습니다. 이진유(李眞儒)로 말하면, 몰래 화(禍)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붕당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할 계책을 부리려 하여 전후의 소장(疏章)과 등대(登待) 때에 아뢴 것이 모두 유현(儒賢)을 근거없이 욕하고 진신(搢紳)을 무함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죄범을 논하면 중률(重律)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최석문을 멀리 귀양보내고 이진유는 삭출(削黜)387) 하는 벌을 주라고 답하였다.
7월 14일 신미
권성(權𢜫)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김재로(金在魯)를 부교리(副校理)로, 황규하(黃奎河)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조태채(趙泰采)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권상유(權尙游)를 우빈객(右賓客)으로 삼았다.
김창집(金昌集)을 좌의정(左議政)으로 삼았다. 임금이 복상(卜相)388) 하라고 명하였으나,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가 성밖에 있어서 봉행할 수 없으므로, 임금이 전의 망단자(望單子)389) 를 들여오라고 명하여 김창집을 정승에 제배(除拜)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황이장(黃爾章)은 본디 한낱 염치없는 사람인데, 때를 타고 기회를 엿보아 맨 먼저 사론(邪論)을 말하여 감히 직서(直書)한 재신(宰臣)과 진언(盡言)한 간관(諫官)을 모두 정배(定配)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유현(儒賢)에 이르러서는, 그때 성상의 예우(禮遇)도 갑자기 쇠하지 않았는데 두 신하를 죄주기를 청한 계사(啓辭)에 방자하게 언급하여, 서로 창화(唱和)한다고도 하고 생각해 낸 것이 음참(陰慘)하다고도 하여 그 근거 없이 헐뜯는 바가 조금도 꺼림이 없었습니다. 결코 파직(罷職)에 그칠 수 없으니,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여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황이장의 일만을 따랐다.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가 네 번이나 정고(呈告)하였는데,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하유(下諭)하기를,
"경(卿)이 인퇴(引退)한 것은 실로 내 말 때문이었으나, 한때의 분부에는 본디 깊은 뜻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마음에 두지 않았고, 제거(提擧)에 애써 부응한 것도 마지못한 데에서 나온 것인데, 경은 줄곧 밖에 나가서 반드시 짐을 벗으려 하니, 뜻이 맞지 않는 것이 어찌하여 모두 이지경에 이르렀는가? 매우 부끄럽기 이를 데 없다. 아! 한재(旱災)가 매우 혹독하여 백성이 다 죽을 것이니, 말이 여기에 미치면 자고 먹는 것이 편안하지 않은데, 경의 나라를 깊이 생각하는 정성으로서 어찌하여 서둘러 구제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나만이 위에서 몹시 근심하게 하는가? 참으로 원보(元輔)390) 에게 바라던 바가 아니다. 이에 후설(喉舌)391) 의 신하를 보내어 속마음의 말을 펴노니, 경은 깊이 생각하고 잘 살펴 빨리 보내는 글을 중단하고 나와서 정사(政事)를 논의하라."
하였다.
부수찬(副修撰) 윤순(尹淳)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연충(淵衷)392) 이 천둥같이 진동하여 비망기(備忘記)가 비처럼 쏟아져 내려 약원(藥院)393) 을 꾸짖어 물리치고 대관(臺官)들을 외방(外方)으로 내치며, 전조(銓曹)를 파면하고 금오(金吾)394) 를 죄주며 후사(喉司)395) 를 배척하고 경악(經幄)396) 을 비우기까지 하면서, 마치 뜻밖의 위험과 화(禍)가 싹트는 일이 호흡간(呼吸間)에 닥쳐와서 조정에 잠시도 숨쉴 겨를을 둘 수 없는듯이 하셨는데, 신은 신하들에게 무슨 큰 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령 한 가지 불평(不平)한 일이 있더라도 크고 작은 모든 신하가 또한 어찌 하루에 다 죄를 얻게 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조정을 바꾸어 놓는 것을 본디 바둑을 서로 바꾸어 놓듯이 하십니다마는, 그 갑작스럽고 황급한 것은 또 오늘의 거조(擧措)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병환이 깊어서 걸핏하면 더치시는 이때에 분노를 누르지 못하고 평정이 쉽게 흔들려 목소리와 낯빛으로 꾸짖고 노하며 평온을 크게 잃으시니, 그 경색(景色)이 슬프고 답답하며 시조(施措)가 거꾸로 된 것은 우선 논할 겨를이 없으나, 철따라 조섭(調攝)하고 고요히 조리하는 도리에 어찌 크게 손상되는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봄에 한편 사람을 진용(進用)하였을 때 그들의 언론과 풍지(風旨)는 전하께서 개도(開導)하신 데에서 많이 나왔고, 소(疏)와 계(啓)가 나오는 대로 얼른 들어주셨으므로, 남을 논하는 말은 그 준열(峻烈)함을 꺼리지 않고 사세를 좇는 기회는 혹 늦어질까 염려하였으니, 오늘날 전철(前轍)을 뒤집는 것은 바로 그때에 개도하여 만든 일이고, 오늘날 뒤미처 허물하여 물리치는 것은 바로 그때에 얼른 들어주신 논의인데, 전하께서는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뭇 신하에게 죄를 돌리시므로,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지키는 것이 떳떳하지 않아서 반년 안에 풍파가 두 번 일어났습니다. 태사(台司)397) 에 대한 총욕(寵辱)이 거의 어린아이를 부르고 물리치는 것과 같고, 백료(百僚)를 출척(黜陟)하는 것이 여관을 바꾸어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으므로, 물리쳐진 자도 예사로 여기고 기용된 자도 굳은 뜻이 없어서, 한 사람도 지려(志慮)를 다하여 국사를 담당하는 자가 없으니, 전하께서 비록 작록(爵祿)의 권세로 한 번 호령하는 사이에 진퇴하게 하여 부리고 제어(制御)하는 바탕을 삼으시더라도, 한 번 뒤집는 사이에 성덕(聖德)을 이지러지게 하고 국맥(國脈)을 손상하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장황한 사설이 참으로 해괴하다고 답하였다.
7월 15일 임신
임금이 특교(特敎)로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일전의 분부는 경(卿)이 시탕(侍湯)하는 데에 미진한 것이 있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특교와 사직 단자(辭職單子)에 대한 비답(批答)에 이미 내 뜻을 다하였으니, 경은 마침내 반드시 깊이 생각하고 잘 살펴야 할 것인데 성 밖으로 나가기까지 한 것은 더욱 매우 지나치다. 결코 오래 머물러서는 안되니, 곧 사관(史官)과 함께 들어오라."
하고, 드디어 사관에게 명하여 함께 오게 하였으나, 서종태가 명에 따르지 않았다.
검열(檢閱) 유척기(兪拓基)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관(四館)398) 의 유벌(儒罰)은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하므로, 간찰(簡札)을 보내어 두루 물어서 모든 사람의 의논이 하나로 돌아간 뒤에야 시행할 수 있는 것은 곧 고례(古例)가 그러한 것입니다. 접때 괴원(槐院)399) 의 관원 이광보(李匡輔)·구명규(具命奎) 등이 예원(藝苑)400) 이 모두 빈 때를 엿보아 본원(本院)의 동료에게 두루 의논하지도 않고 또 운각(芸閣)401) 에 간찰로 묻지도 않고서 다만 국자(國子)402) 의 관원과 의논하여 태학(太學)403) 의 재임(齋任)404) 과 재생(齋生)405) 예닐곱 사람을 마음대로 벌주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3백 년 동안에 없던 일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이관(二館)만으로 족할 것인데, 당초에 어찌하여 사관이 서로 간찰로 묻는 규례를 두었겠습니까? 더구나 태학의 재임은 다른 유생들과 절로 다르므로 비록 사석(師席)의 높은 지위라 할지라도 반드시 먼저 그 직임을 갈고서야 벌주니, 사관에서 마음대로 벌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인조(仁祖) 때 사관의 신명희(申命羲) 등이 재임을 마음대로 정거(停擧)하였는데 대간(臺諫)이 논계(論啓)로 탄핵하여 파직(罷職)되었고, 효종(孝宗) 때에 고(故) 판서(判書) 송규렴(宋奎濂)과 고 참의(參議) 서문상(徐文尙)이 함께 재임이었을 때 뜻밖에 사관의 벌을 받았는데 그때 고 판서 김익희(金益熙)가 그 정상을 아뢰니 성조(聖朝)께서 크게 놀랍게 여겨 특별히 그 사관(四館)을 파직하고 이어서 벌을 풀어주라고 명하셨으며, 근년에 고 참의 김홍복(金洪福)이 사관을 시켜 사학(四學)의 재임을 정거하였는데 대신(大臣)이 연중(筵中)에서 아뢰고 송규렴이 또 상소하여 이 일을 아뢰더니 성상께서 처치하신 것도 성조께서 하신 것과 전후로 방법이 같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관의 의논들이 다 같더라도 재임을 벌줄 수 없는 것은 절로 분명히 알 수 있는데, 더구나 이관(二館) 몇 사람의 사사로운 뜻으로 마음대로 행하여 꺼리는 것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이런 길이 한 번 열리면 간찰을 내어 독단하여 사론(士論)을 막는 버릇이 장차 날로 더할 듯합니다. 어찌 크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광보 등이 한 짓은 매우 놀라우니, 모두 그 벼슬을 파면하고 이어서 그 벌을 풀어 주되 이제부터 사관(四館)에 신칙(申飭)하여 한결같이 구례(舊例)를 따라서 다시는 공(公)을 업신여기고 사(私)를 돕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당초에 이광보·구명규와 김홍석(金弘錫)이 전후로 상소해 윤증(尹拯)을 배척한 태학 유생(太學儒生)을 잇따라서 마음대로 벌주고 또 재임을 벌주었는데, 다 유척기가 좌죄(坐罪)되어 파직된 때를 탔으며 운각에 묻지도 않았으므로 유척기가 상소하여 그 까닭을 아뢰었으나, 정원(政院)에서 막아서 임금에게까지 아뢰어지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말한 것이다.
7월 16일 계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가 끝나고서, 도승지(都承旨) 이의현(李宜顯)이 말하기를,
"일전에 관유(館儒)406) 가 상소하였으나, 정원(政院)에서 계품(啓稟)하고 봉입(捧入)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선정(先正)을 헐뜯는 말은 본디 청청(淸聽)을 우러러 더럽히지 말아야 하겠으나, 관학(館學)407) 의 소(疏)라 칭하였으면 전부터 봉입하지 않은 일이 없으니, 한 번 예람(睿覽)을 거쳐서 시비를 엄하게 정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소를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대개 태학생(太學生) 오명윤(吳命尹) 등 1백여 인이 윤증(尹拯)을 신변(伸辨)하기 위해 상소하러 대궐에 갔는데, 승지(承旨) 홍호인(洪好人) 등이 이러한 말로 본디 청청(淸聽)을 우러러 더럽히지 말아야 하나 관학의 소라 칭하였으면 마음대로 물리칠 수 없다 하여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봉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유생들이 곧바로 정원에 들어와 함부로 욕하며 다투어 힐문(詰問)하고 궐문(闕門)이 닫혔어도 오히려 물러가지 않다가 마지막에는 궐문을 열어 두고 나가서 궐문 밖에 모여 있었다. 그러므로 이의현이 아뢴 것이다.
7월 17일 갑술
관학 유생(館學儒生) 오명윤(吳命尹) 등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세도(世道)가 불행하여 갑자년408) 부터 사림(士林)이 다투는 단서가 비로소 일어났는데, 그때 보필하는 신하가 사리를 살피지 못한 채 전하에게 위엄으로 한때를 진정하기를 권하여 드디어 흑백이 거꾸로 놓이게 하였으므로 인심이 울분하였으나, 다행히 무인년409) 의 분부에는 신충(宸衷)410) 으로 결단하여 시비를 명백히 정하였으므로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이 있다는 가르침이 일성(日星)처럼 나타났습니다. 일전에 천만 뜻밖에 의서(擬書)와 묘문(墓文)을 베껴 들이라는 명이 있고 며칠 사이에 잇따라 성지(聖旨)를 내려 ‘의서의 말은 과연 주장이 박절하니 전연 과실이 없는 것으로 돌릴 수 없다.’ 하시고 ‘묘문에는 본디 욕이 윤선거(尹宣擧)에게 미친 일이 없으니, 일종(一種) 운운한 말은 절로 사실에 어긋나는 것으로 돌아간다.’ 하셨으며, 선정(先正)을 근거 없이 헐뜯어서 현저히 죄벌을 입은 자까지도 차례로 소석(疏釋)하여 모두 장려하고 용서하였으므로, 19년 동안 굳게 정하신 성지(聖志)와 한결같이 마땅한 것을 따라 분명히 나타났던 의리가 까닭 없이 갑자기 바뀌어 하루아침에 죄다 무너졌습니다. 신(臣)들은 외람되게 현관(賢關)411) 에 있으면서 비상한 과거(過擧)412) 를 갑자기 보고, 서로 돌아보며 놀라와서 심담(心膽)이 떨어지고 찢어졌습니다.
대개 고(故) 상신(相臣) 송시열(宋時烈)의 평생의 변통은 나라 사람이 말할 뿐 아니라 사사로이 사모하고 좋아하는 자도 모두 잘 알아서 몰래 의논하니, 겉으로 꾸며서 끝내 덮어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정신(先正臣) 윤선거(尹宣擧)가 지극한 정성으로 책망하여 극진히 하지 않은 말이 없으니, 송시열이 이른바 ‘길보(吉甫)413) 는 나에 대하여 그른 것만 본다.’ 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번번이 그 잘못을 기질(氣質)의 병통으로 돌렸으므로, 선정신 윤증(尹拯)이 가정의 교훈을 따라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처신한 것은 그 뜻이 또한 아닌게 아니라 이러하였습니다. 윤선거가 죽은 뒤에 이르러 10여 년 동안에 송시열의 병패(病敗)가 더욱 많아져서 결점이 갖가지로 나타났으므로 무릇 그 심술(心術)의 기미를 볼 수 있는 것은 낱낱이 거론하지 않아도 족한데, 그 커서 보기 쉬운 것을 말하자면 고 참판(參判) 이유태(李惟泰)의 예설(禮說)에 관한 일이 바로 그 한 가지입니다. 대저 경신년414) 이후로는 송시열이 훈척(勳戚)과 결탁하여 조정의 권력을 흔들며 남용하였으므로, 언행(言行)과 일한 것이 국가를 병들게 하고 세상의 도의(道義)를 무너뜨렸습니다. 대저 스승이란 그 도리를 가르치는 것인데, 이제 그 마음에서 나와 일을 해치는 것이 저렇게 드러났으니, 전에 도를 지킨다고 하던 것은 땅바닥까지 깎은 듯이 남은 것이 없습니다. 선정이 이래도 참고 잠자코 구차하게 스승과 제자의 이름만을 지키고 말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명백히 말하고 드러나게 간(諫)하여 그 만분의 일이라도 깨닫기를 바라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의서를 지어 비간(比奸)415) 에 견주어 한 마디 말하고서 죽기로 마음먹은 까닭입니다. 천감(天鑑)이 매우 밝으시므로 어찌 이것을 살피지 못하시겠습니까마는, 이제 과연 주장이 박절한 것이 많다고 분부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성상께 바라던 것이겠습니까? 또한 송시열은 받들어 높임이 너무나 대단하여 사람들이 감히 헐뜯지 못하고 책망하는 말이 지극히 들어가기 어려우므로 간하지 않았을 뿐이니, 간한다면 말이 매우 박절하지 않을 수 없고 비유함이 힘써 자세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반드시 이렇게 하고서야 들어줄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아! 이것이 어찌 한편 사람들처럼 일체 구차하게 같이하여 뜻에 아부하고 그른 것을 따르는 자가 그 깊이를 엿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놀랍게 여겨 떼 지어 일어나서 공박하는 것이 괴이할 것 없습니다.
또한 기유년의 글416) 도 윤선거가 보내려다가 그만둔 것인데, 매우 경계한 것이 거의 뼈를 찌르는 듯하였습니다. 윤증이 장차 묘문을 받으려 할 때에 ‘선인(先人)이 지극한 정성으로 훈계하여 바로잡은 말을 한 번 보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드디어 소매에 넣고 가서 보였으니, 윤증이 진심을 다하여 세상을 도울 정성이 없고 다만 아첨하여 지나치게 칭찬해 주기를 바랐다면, 또한 어찌하여 이처럼 책상자에 깊이 감춘 것을 내어서 그가 듣기 좋아하지 않는 것을 범하여 성내고 원망함을 돋우었겠습니까? 기유년의 글을 전에 보이고 신유년417) 의 글을 뒤에 지었으니, 그것이 한 조각 성심에서 같이 나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송시열과 마지막에 서로 끊은 까닭에 있어서는 오로지 송시열이 그지없는 욕을 그 양친(兩親)에게 ‘포로가 되었다’느니, ‘잔인한 사람이라’느니, ‘윤휴(尹鑴)에게 편들었다’느니 하는 말에까지 미치고 만 데 연유되었습니다. 대개 포로라는 말은, 처음에는 목천(木川)의 통문(通文)418) 에 핑계대며 스스로 놀랍게 여겨 배척한 것이라 하였으나, 그 뒤에 송시열의 문도(門徒)가 또 버젓이 오랑캐에게 더렵혀졌다는 따위 말을 통문에 싣고 또 따라서 거짓으로 말을 만들어 소장(疏章)에 실었으니, 과연 송시열이 목천의 통문에 놀랐다면 그 문도가 갖은 말을 다하여 헐뜯은 것이 목천의 통문보다 심하여도 버려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더구나 그가 이희조(李喜朝)의 물음에 답할 때에는 또 고 판서(判書) 김익희(金益熙)의 말이라 핑계하여 말하기를, ‘그때 오랑캐가 군사로 사대부(士大夫)들과 상놈들을 에워싸고 두어 사람을 베어 죽이고서 외치기를, 「항복하지 않거나 달아나는 자는 다 이렇게 한다. 항복하려는 자는 다 꿇어앉으라.」 하니, 미촌(美村)이 뭇사람을 따라서 꿇어앉았다.’ 하였는데, 미촌은 윤선거의 호(號)입니다. 설령 그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어서 김익희가 잘 아는 것일지라도, 어찌하여 김익희가 살아 있을 때를 전후한 5, 60년 동안 다른 사람들은 들어서 아는 자가 없는데, 이제 와서 김익희가 죽은 뒤에 송시열의 입에서 문득 나왔겠습니까? 이 말이 김익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은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잔인한 사람이란 말은, 대개 선정(先正)의 어머니 이씨(李氏)는 명백히 순절(殉節)한 이인데, 윤선거가 구박하여 죽인 것으로 돌리려고 또한 김익희에게서 들어서 안다고 한 것입니다. 선정이 여러 번 송시열에게 글로 물었더니, 송시열이 처음에 답하기를, ‘김상서(金尙書)는 잔인한 사람이라고 말하였을 뿐이 아니다.’ 하였는데, 오가는 말이 궁하게 된 뒤에는 말하기를, ‘물가에서 물어 보라.’ 하였습니다. 아! 이것이 어찌 남의 아들에게 차마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김익희의 생질이 고 참판 이선(李選)이 송시열에게 글을 보내어 그 외삼촌이 처음부터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음을 밝히게 되었으니, 김익희에게서 나왔다고 한 것이 참으로 허황하며 근거없는 말을 퍼뜨려서 분을 푸는 바탕으로 삼은 것이 분명하여 엄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윤휴에게 편들었다는 일로 말하면, 송시열이 친히 상소하여 말하기를, ‘윤선거는 윤휴의 독(毒)에 걸려서 문득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였고, 문인(門人)에게 보낸 글에는 적변(賊邊) 사람으로 배척하기까지 하였으니, 남의 아들이 된 자로서 이 말을 듣고도 오히려 스승과 제자의 명분을 핑계하여 정의(情義)가 여전하다면, 이는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묘문으로 말하면, 처음에는 스승과 제자가 서로 끊을 증거에 관계되지 않았습니다. 대개 송시열이 윤선거에 대하여 평생의 교우(交友)로 자처하였으니, 영구히 전할 글을 부탁받게 되어서는 짓고 싶지 않으면 사양하여야 할 것이고 짓는다면 곧 헤아려 처리함 또한 옳은 것인데, 이제 짐짓 후배의 말에 의지하고 성신(誠信)한 뜻이 아주 없으므로, 선정이 이에 대하여 참으로 마음에 의혹되는 것이 있어서 두세 번 왕복하여 고쳐 주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처음부터 이 때문에 욕이 선친에게 미친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 어찌 이 때문에 서로 끊을 리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묘문 때문에 서로 끊는다면 갑인년419) ·을묘년420) 사이에 끊었어야 할 것인데, 또 어찌하여 10년 뒤를 기다렸겠습니까? 묘문의 일이 본원(本源)을 의심하게 된 단서가 된다고 한다면 괜찮겠으나, 서로 끊은 것이 묘문 때문이라고 한다면 전혀 실상에 어긋납니다.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로 말하면 애초부터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 없으니, 그 분명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 것이 네 가지 있습니다. 그 공편(共編)한 사실은 두 현신(賢臣)421) 의 필적이 다 있어서 책을 펴면 똑똑히 알 수 있으니, 이것이 첫 째입니다. 윤선거가 유계(兪啓)의 행장(行狀)을 지었으니, 그가 양보하여 유계에게 공을 돌리는 것은 사리가 본디 그러할 것인데, 송시열이 윤선거의 묘문을 지을 때에 명백히 이것을 쓰고 공편이라 하였으니, 어찌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둘 째입니다. 상신(相臣)이 다른 집의 글인 줄 모르겠다고 말한 것이 있으니, 이것이 세 째입니다. 처음에는 독편(獨編)이라고도 하고 부탁한 것이라고도 하였다가 두 가지 증인이 다 거짓으로 돌아가게 되어서는 마지막에 억지로 말하기를, ‘주객(主客)이 같이 종사하였다.’ 하여 세 번이나 그 말을 바꾸었으니, 근거없이 속이고 군색하게 피한 것이 닿는 곳마다 터졌습니다. 이것이 네째입니다. 분명하여 의심없는 것이 이러한데 전하께서는 또 다시 단서도 없이 고쳐서 권상하(權尙夏)와 정호(鄭澔)의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으로 다시 권단(卷端)을 더럽히셨으니, 신들은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저 도(道)의 수박(粹駁)422) 과 학문의 진가(眞假)는 형위(刑威)나 법령으로 억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나 글로 거짓 꾸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성세(聖世)를 당하여 이 사람을 낸 것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마는, 살아 있을 때에 빈사(賓師)의 지위에 두어 그 보좌하는 공(功)을 다하게 하지 못하였으니, 이미 천고의 지극한 한이 될 만한데, 이제 그 무덤의 사초(莎草)가 겨우 자리잡자 도타이 믿으시던 뜻과 예우(禮遇)하시던 정성을 끝내 지키지 못하시고 언사와 기색에 현저히 폄박(貶薄)을 보이십니다. 스승을 저버렸다는 말은 처음에 이미 두 대신(大臣)에게서 나왔는데, 논의의 근원은 다 훈척(勳戚)의 거실(巨室)에 있습니다. 대대로 국명(國命)을 잡은 집안은 모두 산을 기울이고 바다를 뒤집을 힘과 해를 돌리고 하늘을 돌이킬 세력을 가졌는데, 으르릉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불쑥 일어나 독을 부리려 한 것이 무릇 몇 해였으나, 망설이고 분명히 말하지 못하여 마침내 감히 방자하게 뚜렷이 배척하지 못한 것은 무인년423) 의 성교(聖敎)가 있었기 때문일 뿐입니다. 전하께서 처음에 이미 능히 스스로 그 시비를 정하여 스스로 그 진위를 가리셨으므로, 고명(高明)하고 통달(通達)한 것이 예전을 관통하고 장래를 넘을 만하셨는데, 이제 스스로 그 고명한 것을 내치고 스스로 그 통달한 것을 낮추시어 뛰어난 성절(盛節)이 처음은 있으나 마지막이 없게 하시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고, 특교(特敎)를 내리기를,
"예전에 분부한 것은 의서(擬書)와 묘문(墓文)을 보기 전에 있었고, 오늘날의 처분은 바로 의서와 묘문을 본 뒤에 있었던 것이다. 내 마음이 한 번 깨달아서 시비가 절로 밝아졌으니, 후세에 할말이 있다 하여도 될 것이다.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輕重)이 있다는 말은 이제 다시 제기하지 말아야 하고, 서문·발문을 도로 인간(印刊)한 것도 그에 따른 일이다. 요즈음 오명윤 등이 자신이 수선지지(首善之地)424) 에 있으면서 선정을 헐뜯는 말을 주워 모아 한 소(疏)를 바쳐서 선정을 근거없이 욕하고 하고자 하는 바만을 생각하여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는데, 병패(病敗)가 더욱 많아져서 결점이 갖가지로 나타났다느니, 훈척(勳戚)과 결탁하여 조정의 권세를 농락하였다느니, 언행과 일하는 것이 모두 국가를 병들이고 세도(世道)를 무너뜨릴 만한 것이었다는 따위 말은 더욱이 매우 도리에 어긋나서 차마 바로 볼 수 없으며, 유현(儒賢)을 헐뜯되 못하는 짓이 없어 서문을 다시 철훼하도록 청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또한 매우 무엄하다.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여야 할 것이나, 이제 우선 말감(末減)425) 하여 소두(疏頭) 오명윤을 먼저 정거(停擧)하라."
하였다.
유명웅(兪命雄)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조관빈(趙觀彬)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건명(李健命)이 상소(上疏)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은 과거(科擧)에 관한 일을 다시 사문(査問)한 뒤로 움츠려 엎드려서 감죄(勘罪)를 기다린 지 이제 이미 5개월이 되었습니다. 임진년426) 의 과시(科試) 뒤에 궐문(闕門)이 열려 있었다는 말을 길에서 떠들고 사람들이 꺼릴 줄 모르므로, 처음에는 권상유(權尙游)가 모두 앉은 자리에서 말하였고, 뒤에는 과연 신이 이언강(李彦綱)과 사실(私室)에서 수작하였는데, 최근에 대간(臺諫)이 아뢰어 함문(緘問)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들은 바에 따라 조명(趙銘)을 거명(擧名)하여 대답하고, 권상유는 권치대(權致大)로 고하였는데, 이제는 ‘권치대를 조명으로 바꾼 것이 어디에 근거하여 나온 것이냐?’고 합니다. 문(門)의 이름을 바꾼 데 있어서 신이 죄주기를 청한 것으로 말하면 단봉문(丹鳳門)을 수직(守直)한 관원이고, 조명이 공초(供招)한 것은 돈화문(敦化門)입니다. 밖에서 제술(製述)하였다는 문의 이름은 신이 거론하지 않았고, 죄인이 대답한 것은 신이 알 바가 아니니, 이 때문에 신을 의심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대신(臺臣)이 아뢴 말과 박필몽(朴弼夢)이 피혐(避嫌)한 말은 오로지 모함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경(卿)이 무함당한 것은 내가 이미 환히 안다."
하였다.
7월 18일 을해
조도빈(趙道彬)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병조 판서(兵曹判書) 윤지인(尹趾仁)은 조정에 아뢰지 않고 마음대로 안산(安山) 땅에 다녀와서 밤을 지낸 뒤에 태연히 상소하였습니다. 오늘날 조정에 조금이라도 기율이 있다면, 장신(將臣)으로서 어찌 감히 조금도 꺼림없이 병부(兵符)를 띠고 멀리 나갈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윤지인의 일에 답하기를,
"군사를 거느리는 신하로서 조정에 아뢰지 않고 병부를 차고 멀리 나간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결코 추고에 그칠 수 없으니, 파직(罷職)하라."
하였다. 사간(司諫) 이기익(李箕翊)·정언(正言) 박성로(朴聖輅)가 의율(擬律)을 잘못하였다 하여 인피(引避)하니, 처치하여 체직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상차(上箚)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반유(泮儒)427) 오명윤(吳命尹) 등의 소본(疏本)에 맨 먼저 신(臣)의 아비가 갑자년428) 에 연주(筵奏)한 것을 거론하여 크게 헐뜯어 배척하였으므로, 신이 보고서 마음 아파 못 견디어 피눈물을 닦았습니다. 이 일을 서로 다툰 것은 하루이틀이 아니나, 그 전후의 문안(文案)과 피차의 득실(得失)은 근일처럼 상세히 알고 현저히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이제 피차의 장소(章疏)에 나타난 것을 잡아서 절충하면 신의 아비가 그때 한 말은 또한 지나치게 너그러이 용서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만약 의서(擬書)가 일찍 나왔다면 신의 아비가 윤증(尹拯)을 꾸짖었던 것이 어찌 저러한 데에 그치고 말았겠습니까? 대저 묘문(墓文)에 욕설이 없었다는 것은 학유(學儒)429) 가 이미 통렬히 변명하였고 성명(聖明)께서도 하교(下敎)하셨으니,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이 있다는 말은 여기에 이르러 허무하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묘문은 처음부터 서로 끊는 데에 관계되지 않았다.’ 하면서 오로지 다른 사람이 전한 잔인한 사람이라는 따위 말을 서로 끊은 단서로 삼으려 하니, 신은 의서(擬書)를 쓸 때에는 오히려 조금도 끊지 않을 의리가 있었는데, 반드시 갑자년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끊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이 말과 같다면 그 스승의 죄과를 이미 깊이 알아서 의서를 지었다는 것인지 더욱이 알 수 없습니다. 어버이를 욕하였다는 말도 날조한 것으로 돌아가는데, 여러 번 장서(長書)에 다그쳤으니, 스승과 제자의 도리는 끊어진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 스승이 뒤미쳐 묘문을 고쳐 주고 구의(舊誼)를 보전하기를 바랐더라도 윤증의 도리로서는 이미 끊은 뒤에 다시 합할 수 없는데, 윤증의 갑자년 마지막 글에는 오히려 묘문을 고쳐 주기를 청하기를, ‘유명(幽明)이 은혜를 받아 의결(疑結)이 다 풀리는 것은 문하(門下)의 한 마디 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으니, 그 사람이 저렇듯이 변변치 않다면 그 한 마디 말을 고쳐 주는 것이 어찌 유명이 은혜를 받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의결된 것이 다 본원(本源)의 심술(心術)에 달려 있다면 또한 어찌 글을 고치는 데에서 문득 풀릴 수 있겠습니까? 그 스승의 현부(賢否)가 어찌 그 아비의 묘문에 관계되겠습니까마는, 묘문이 좋지 않으면 허다한 죄과가 있어서 스승과 제자의 명분을 지킬 수 없고 잔인한 사람이라느니 포로가 되었다느니 하는 말도 끊을 만한 단서가 될 것이고, 묘문을 고친다면 그 스승이 장차 순연(純然)하여 죄과가 없는 군자가 되어 이른바 어버이를 욕하였다는 말도 장차 그 인효(仁孝)한 마음에 다시는 끼어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니, 이것이 과연 어떠합니까? 이것으로 보면 그가 유감을 품은 것은 오로지 묘문에 있다는 것이 이와 같은데도 그 문도(門徒)는 오히려 묘문이 서로 끊는 근본이 되었다고 하지 않고 남들이 스승을 저버렸다고 말하지 않기를 바라니, 또한 우습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이제 경(卿)의 차자(箚子)의 말이 남김없이 타파되었는데, ‘의서가 일찍 나왔다면 윤증을 꾸짖은 것도 어찌 저러한 데에 그치고 말았겠습니까?’라 한 것은 또한 매우 명쾌하다."
하였다.
7월 19일 병자
이건명(李健命)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이만견(李晩堅)을 승지(承旨)로, 조태구(趙泰耉)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여산군(礪山君) 이방(李枋)을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조태로(趙泰老)를 부사(副使)로, 한영휘(韓永徽)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태학 유생(太學儒生)들이, 소두(疏頭) 오명윤(吳命尹)이 벌받고 성지(聖旨)가 엄준(嚴峻)하였다 하여 인혐(引嫌)하고 권당(捲堂)하니, 임금이 대사성(大司成) 조도빈(趙道彬)에게 명하여 들어오도록 권유하게 하였다. 조도빈이 반중(泮中)에 가서 권유하였으나, 유생들이 생각하는 바를 써서 바쳤는데 송시열(宋時烈)을 헐뜯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이 많았다. 조도빈이, 선정(先正)을 근거 없이 욕하는 것이 그지없는데, 외람되게 사유(師儒)의 자리에 있으면서 개도(開導)를 잘하지 못하였다 하여 인책하고 덧붙여 아뢰려 하니, 유생들이 여러 번 삭제하기를 청하였으나 조도빈이 들어 주지 않으므로 유생들이 모두 재사(齋舍)를 비우고 나갔다. 조도빈이 상소하여 그 정상을 아뢰니, 임금이 답하기를,
"사습(士習)이 해괴하고 도리에 어긋난다. 그대에게 무슨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재임(齋任) 이보춘(李普春)과 앞장서 말하고 나간 유생 김시정(金始炡) 등을 정거(停擧)하고 상소에 참여하지 않은 유생을 불러들여 재사(齋舍)를 지키게 하라고 명하였다.
7월 20일 정축
하교(下敎)하여 도목정(都目政)을 행하기를 재촉하였다. 대개 도목정을 중도에서 그만두었는데 전관(銓官)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아직 거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사문(斯文)이 액운을 당하여 사설(邪說)이 방자하게 행하여졌으므로,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도덕과 학문이 한편 사람들에게 시기당하여 뭇 소인들에게 성냄을 받은 것도 많은데, 오히려 감히 뚜렷하게 공격을 가하여 버젓이 욕합니다. 요즈음 반유(泮儒) 오명윤(吳命尹) 등이 흉소(凶疏)를 바쳤는데, 신유년430) 에 유감을 부린 의서(擬書)에 따라 서술하고 기사년431) 에 어진이를 죽인 흉론(凶論)을 이어받아 마음대로 선정(先正)을 헐뜯은 것이 그지없고 사실을 모두 뒤집어 오로지 속이는 것을 일삼았으며, 끝에는 유현(儒賢)을 근거없이 욕하여 사나운 독을 더욱 부렸습니다. 천심(天心)이 쾌히 깨달아 시비가 크게 정하여진 뒤에 감히 서문(序文)·발문(跋文)을 다시 불살라 없애게 하기를 청하였으니, 조금이라도 엄외(嚴畏)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방자하여 꺼림없는 것이 어찌 감히 이러하겠습니까? 청컨대 변원(邊遠)으로 정배(定配)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오명윤의 일만을 따랐다.
좌윤(左尹) 민진원(閔鎭遠)이 상소하여 봄에 탄핵당한 일을 변명한 데에 이르기를,
"윤증(尹拯)을 편드는 무리가 때를 타서 떠들고 갖가지로 터무니없이 속여서 흑백을 어지럽히고 시비를 바꾸어 장차 국가를 병들이려 하여도 돌보지 못하였으니, 신(臣)처럼 쓸쓸한 자의 한 마디 말이 그들에게 중상당한 것을 또한 어찌 말할 만하겠습니까? 또한 척완(戚畹)432) 이 조정의 논의에 간여하는 것은 신하의 큰 죄가 되니, 이것은 바로 신에게 약이 되는 경계입니다. 그러나 직무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면, 신이 어찌 좋아서 일을 논하겠습니까? 만약 직무에 관계되더라도 반드시 잠자코 말하지 않아야 척완이 자처(自處)하는 의리에 맞을 수 있다고 한다면, 부희(傅喜)433) 가 직언(直言)하여 임금을 거스르고 두무(竇武)434) 가 당인(黨人)의 삼군(三君)이 된 것이 어찌하여 후세에서 칭찬받겠습니까? 또 듣건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고(故) 판서(判書) 장선징(張善澂)의 어짊을 칭찬하여 ‘일에 따라 말을 다하고 조금도 척완으로서 망설이는 태도가 없다.’고 말하였다 하니, 척신(戚臣)은 반드시 말하지 않는 것이 의리라고 생각한다면 선정의 말이 또한 어찌 하여 이러하였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비답(批答)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바야흐로 금위영 도제조(禁衞營都提調)를 겸대(兼帶)하였으므로 종제(從弟)인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건명(李健命)과 응당 피해야 할 혐의가 있다 해서 상차(上箚)하여 체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물어 윤허하였다. 대개 병조 판서는 으레 금위 대장(禁衞大將)을 겸대하기 때문이다.
집의(執義) 남도규(南道揆)와 장령(掌令) 조명봉(趙鳴鳳)·안중필(安重弼)이 곧 오명윤(吳命尹)을 죄주기를 청하지 않았다 하여 물의가 비난하자 인피(引避)하였는데, 처치하여 체직하였다.
7월 21일 무인
비변사(備邊司)에서, 올해의 재황(災荒)은 팔로(八路)가 같이 그러하므로 모든 백성을 소요하게 하는 데에 관계되는 일을 일체 멈추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제도(諸道)의 수조(水操)·육조(陸操)와 영장(營將)의 순력(巡歷) 따위 일을 우선 거행하지 말고, 교생(校生)의 고강(考講)과 경외(京外)에서 노비(奴婢)를 찾아 징채(徵債)하는 따위 일도 내년 가을까지 멈추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상차(上箚)하기를,
"평안 감사(平安監司) 조태로(趙泰老)는 부사(副使)로 차출되었으나, 서로(西路)의 진구(賑救)할 일이 매우 근심스러우니, 잉임(仍任)435) 하여야 하겠습니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권성(權𢜫)은 지금 호중(湖中)436) 에 있는데, 황정(荒政)이 급하니, 조사(朝辭)를 그만두고 부임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조정이 구간(苟簡)한 것은 정경(正卿)이 심한데, 지사(知事) 유명웅(兪命雄)이 또 관동(關東)으로 나갔으니, 또한 변통하여야 하겠습니다. 과거(科擧)에 관한 사문(査問)은 반년이 지나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판의금(判義禁) 민진후(閔鎭厚)는 이미 이성곤(李成坤)이 끌어댄 바가 되었고 또 약방(藥房)에 입직(入直)하며,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만성(李晩成)은 전에 그 옥사(獄事)에 참여하였으므로 결코 다시 담당할 수 없다 하니, 모두 차관(次官)을 시켜 안사(按査)하게 하는 것이 실로 사의(事宜)에 맞겠습니다."
하고, 끝에 말하기를,
오명윤(吳明尹)이 선정(先正)을 헐뜯어 욕한 것이 그지없으니, 이것은 참으로 사림(士林)의 큰 변고입니다. 비록 멀리 내치더라도 남은 죄가 있겠습니다마는, 이미 관학 유생(館學儒生)이라 칭하고 보면 사체(事體)가 이렇게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전부터 정거(停擧) 밖에는 위형(威刑)을 관학에 베풀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본디 국조(國朝)의 아름다운 뜻인데, 이제 어찌 오명윤의 변변치 못한 일 때문에 드디어 3백 년 동안 현관(賢關)437) 을 대우하던 도리를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차자(箚子)의 말이 마땅하니,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오명윤이 선정을 헐뜯은 죄는 귀양보내야 마땅하나 우선 정거하라고 명한 것은 대개 이미 관학 유생이라 칭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이 차자의 뜻도 여기에서 나왔으니,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는 것은, 이제 우선 도로 거두라. 권성의 일은 고향에서 조사(朝辭)를 그만두고 바로 부임하는 것은 사체가 미안하니, 재촉하여 올라오게 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송필항(宋必恒)이 오명윤(吳命尹)에 대한 논계(論啓)를 냈으나 대신(大臣)이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다 하여 인피(引避)하였는데, 이르기를,
"현관(賢關)이라 칭하는 것은 대개 현사(賢士)가 거치는 곳이기 때문인데, 이제 오명윤 등은 사당(邪黨)을 불러 모아 때를 타서 불쑥 들어와 관학(館學)의 이름을 빙자하여 감히 선정(先正)을 해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근자의 일로 말하더라도, 관학의 소두(疏頭) 이현령(李玄齡)이 두 현신(賢臣)을 출향(黜享)한 죄로 변원(邊遠)에 정배(定配)되었습니다. 오명윤의 흉악한 짓은 이현령보다 훨씬 더하니, 멀리 내치는 벌도 그 죄를 징계할 만하지 못한데, 대신의 말은 무엇 때문에 나왔습니까?"
하였는데, 처치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7월 22일 기묘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병 때문에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체직하도록 윤허하고 의관(醫官)을 보내어 병을 돌보게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구(趙泰耉)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도정(都政)은 나라의 중대한 일이므로 이미 개시하고서 중도에 그만두는 것은 예전에 듣지 못하였는데, 도정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전관(銓官)을 모두 파면하였으며, 정원(政院)은 나라의 후설(喉舌)인데 가원(假員)이 서로 번갈아 입직(入直)하여 밤을 지내기까지 하였으니, 일의 미안한 것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가장 대신(大臣)이 존귀하여 임금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으므로 진퇴를 예(禮)로 하여야 할 것인데, 의관(醫官)에게 전교(傳敎)하셨으니 일이 구박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중용(中庸)의 대신을 공경하는 도리는 결코 이러하지 않아야 하니, 성덕(聖德)에 누를 끼친 것이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에 생각하건대 선정신(先正臣) 윤증(尹拯)은 집안에서 전하여 오는 도학(道學)에 그 연원(淵源)이 있으니, 이는 참으로 당세(當世)의 대현(大賢)이고 백대(百代)의 종유(宗儒)이나 불행히 부사(父師)의 사이에서 의리를 지키는 것이 실제로 두 가지 다 온전하게 하는 이치는 없기에 무인년438) 뒤 성교(聖敎)에서 시비가 이미 정하여졌음을 명백히 하셨는데, 한낱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로 인해 허다한 분쟁이 거듭 나와서 이미 정하여진 국시(國是)가 굳게 지켜진 끝에 바뀌게 되었습니다. 묘문(墓文)과 의서(擬書)는 이미 예람(睿覽)을 거쳐 명백히 비교(批敎)를 내리셨으니, 전하께서 일찍이 이것을 허물하지 않으신 것을 단연코 알 수 있는데, 이제 국면(局面)이 뒤바뀐 때에 비로소 써서 들이라는 명을 내려 오늘 깨달은 증거로 삼아 바꾸어 옮기는 일대 전기(轉機)로 삼으려 하셨으니, 신은 의혹됩니다. 아! 홍수와 가뭄의 재앙으로 사람이 장차 다 죽게 될 것입니다. 조정은 사방의 근본이어서 한 가지 일이나 한 가지 정사(政事)가 백성을 구제하여 살리는 데에 미치는데, 죄수(罪囚)를 소결(疏決)하라는 명이 이미 내려졌어도 귀양보내는 일이 잇달고, 당론(黨論)을 칙려(勅勵)하는 분부가 겨우 내려졌어도 다툼이 잇따르니, 이러하고도 오히려 하늘에 사무쳐 재앙을 사라지게 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무익한 당론을 버려두고 백성을 구제하는 급한 일에 전념하여 천재(天災)에 보답하고 국맥(國脈)을 늘이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이제까지의 일은 매우 한심스러웠다. 오직 이돈(李墩)을 백탈(白脫)하고 옥관(獄官)을 무함하는 것을 제일의 급무로 여기고 오로지 속여서 엄폐하는 것을 일삼아 미친듯이 서둘렀으니, 내 처분에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조정이 안정되고 선류(善類)가 안전하게 하려 하였다. 의서와 묘문으로 말하면, 한 번 상세히 보고 나서 시비가 크게 밝혀졌으니, 이것은 참으로 사문(斯文)의 다행인데, 방자히 억측하여 말이 매우 놀랍고 도리에 어긋나니, 중신(重臣)도 이러한데 다른 사람이야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인심과 세도(世道)를 다시 어찌할 수 없다."
하였다.
7월 23일 경진
헌부(憲府)에서 아뢰기를,
"선정(先正)을 해치는 무리가 전후에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그 매우 도리에 어긋나고 변변치 못한 것은 오명윤(吳命尹)의 소(疏)와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성비(聖批)가 엄절(嚴截)하고 통렬히 결단하신 데에 힘입어 유북(有北)439) 에 귀양보냈으나, 곧 대신(大臣)이 상차(上箚)함에 따라 문득 도로 거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제 관학(館學)이라 하여 용서하는 바가 있다면, 뒷날에 음사(陰邪)한 무리가 현관(賢關)을 빙자하여 흉패(凶悖)한 말을 이보다 훨씬 더하더라도, 장차 ‘관학’ 두 자 때문에 꺼리는 것이 있어서 감히 죄를 묻지 않을 것입니까? 금하는 것이 엄하지 않으면 세도(世道)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구제할 수 없으니, 청컨대 오명윤을 전대로 배소(配所)로 보내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관명(李觀命)이, 형제가 함께 양전(兩銓)440) 에 있는 것이 미안하다 하여 상소하여 체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이조에 행공(行公)하는 자가 없으므로 묘당(廟堂)에 명해 참의(參議)의 빈자리를 천거하게 하여, 조도빈(趙道彬)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만성(李晩成) 및 삼사(三司)의 신하들과 빈청(賓廳)에 모여 형조에 현재 갇혀 있는 자와 유배(流配)된 죄인을 소결(疏決)하였다.
7월 24일 신사
평안도 선천부(宣川府)에 홍수가 나서 침몰한 민가가 1백 20여 호이고 빠져 죽은 자가 13인이며, 충청도 회덕현(懷德縣)에서는 침몰한 민가가 50여 호인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당후(堂后)441) 의 직임은 참하(參下)442) 의 청선(淸選)인데, 이헌영(李獻英)처럼 과명(科名)이 흐릿하여 세상에서 버려진 자와 구명규(具命奎)처럼 이름이 전혀 없고 평소에 비방을 많이 당하는 자와 이정연(李挺淵)처럼 사람됨이 용렬하고 비루하여 아첨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모두 함부로 천거에 끼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가리키며 놀라고 우스워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청컨대 세 사람을 주서(注書)에 천거하는 가운데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임금이 끝의 일만 따랐다.
7월 25일 임오
정원(政院)에 머물러 둔 공사(公事)를 전례에 따라 열서(列書)하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임금의 환후가 오래 회복되지 않아 모든 공사를 펴 보기가 어려우므로, 정원에서 개략을 뽑아 열서하여 들였으나, 요즈음에는 모두 정원에 머물러 두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일체 머물러 두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써 들이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6책 58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606면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이만성(李晩成)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관명(李觀命)을 도승지(都承旨)로, 송상기(宋相琦)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만견(李晩堅)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유숭(兪崇)을 집의(執義)로, 권변(權忭)을 사간(司諫)으로, 이상성(李相成)·한영휘(韓永徽)를 장령(掌令)으로, 유명웅(兪命雄)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황선(黃璿)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경기·충청·전라 세 도의 유생(儒生) 신구(申球) 등 60인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위아래가 거꾸로 놓일 때를 당해 크게 유위(有爲)할 뜻을 분발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 등 제현(諸賢)을 불러들이셨는데, 그 한 당(堂)에서 신밀히 경영한 것이 모두 안으로 정사(政事)를 닦고 밖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는 계획과 토벌하여 원수를 갚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하늘이 화(禍)를 준 것을 뉘우치지 않아 중도에 승하하시어 목마(木馬)·철장(鐵杖)443) 이 천고에 한을 남기기는 하였으나, 그 지극한 정성은 하늘에 사무칠 만하고 큰 의리가 우주에 밝게 나타나서 온 동토(東土) 수천 리가 오랑캐·짐승의 고장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 누구의 공입니까?
불행히 윤선거(尹宣擧)는 절의를 잃고 죄를 진 사람으로서 《춘추(春秋)》의 의리를 듣기 싫어하였고, 《춘추》의 의리를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송시열을 시기하여 감히 또 효종께 불만하는 마음을 품었는데, 대개 일찍이 송시열에게 글을 보내어 경계한다고 핑계하여 구천(句踐)444) 이 속였다느니 연광(延廣)445) 이 미쳤다느니 하는 따위 말로 덕(德)을 같이하는 임금과 신하를 아울러 근거없이 헐뜯었습니다. 윤선거의 아들 윤증(尹拯)도 글로 큰 의리를 지키는 일을 헐뜯어 송시열에게 박절하게 한 것이 윤선거의 뜻과 한결같았고, 윤증의 무리 최석정(崔錫鼎)은 윤증의 제문(祭文)을 짓되 빈말을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느니 고상한 말을 하고 성취한 것이 없다느니 하는 따위 말로 송시열이 지킨 큰 의리를 근거없이 헐뜯었습니다. 송시열이 지킨 큰 의리가 무함받은 것은 곧 효종께서 무함받으신 것입니다. 윤선거의 구천에 관한 말을 본디 전하께서 듣지 못하셨으나, 최석정의 제문에 관한 일은 근년에 많은 선비가 논열(論列)한 바 있어도 전하께서 끝내 처분하지 않으셨습니다. 신들이 일찍이 큰 의리가 어두워져서 성조(聖祖)의 큰 공렬(功烈)이 장차 후세에서 믿어질 수 없게 될 것을 마음 아파한 것은 그 근본을 밝히면 바로 윤선거 때문입니다.
신(臣)들이 또 근래에 비로소 세상에 간행된 윤선거의 문집(文集)을 얻어 보았는데, 그 가운데에 있는 효종을 무함한 말은 구천에 관한 말뿐이 아닙니다. 또 효종께서 정축년446) 에 강도(江都)447) 에서 하신 일을 무함하여 스스로 자기의 죄를 엄폐하는 여지로 삼았는데, 신들은 큰 의리를 무함한 것도 중대하기는 하나 오히려 강도의 일을 무함한 것이 더욱 중대한 것만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대의를 무함한 것은 윤선거와 최석정이 오히려 송시열을 시기하는 뜻을 옮겨서 효종께 미친 것인 듯도 하나, 강도의 일을 무함한 것으로 말하면 오로지 효종을 가리켜 명백히 말하고 곧바로 단정하였는데, 그 근거 없이 욕한 것이 지극히 참혹합니다.
대저 이러하여도 성조의 신민이 된 자 중에 오히려 한 사람도 피를 흘리고 눈물을 머금으며 전하 앞에 우러러 고하는 자가 없으니, 임금과 신하의 윤리가 남김없이 아주 없어졌다 하겠습니다. 신들이 윤선거의 문집 가운데에서 살피건대, 정유 일기(丁酉日記)에 ‘온정(溫井)에 가서 목욕할 때에 박약기(朴躍起)가 나에게 「사직하는 상소의 뜻이 강도에서 죽지 않은 것을 말한 것이라는데 그러한가?」라고 묻기에, 답하기를, 「그렇다. 실로 약간의 사우(士友)와 같이 죽기로 약속하였는데, 사우는 다 죽고 혼자 산 것이 부끄럽다.」 하였다. 전일 권차인(權次仁)이 나에게 이 뜻을 묻기에 내가 「강도의 일을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더니, 윤희중(尹希仲)이 「오늘날에는 기피할 바가 있으니 말하여서는 안된다.」고 말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나는 오늘날에 당하여 감히 말할 수 있으나, 뒷날에는 입 밖에 내서는 안된다.」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 을미 일기(乙未日記)에는 ‘윤희중의 답서에 「북사(北師)가 도강(渡江)할 때에 강왕(康王)448) 이 실로 군전(軍前)에 있었다.」하였다. 내가 강도에서 한 혐의스러운 일은 숨기는 곳이 있어야 할 듯하나, 나는 실로 적에게 함몰된 사람이다. 다른 사람으로서 말한다면 옳지 않겠으나, 그때 환난(患難)을 같이 당한 한 사람으로서 말하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무술년449) 에 권시(權諰)에게 보낸 글에는 ‘성상께서 강도를 언급하시면 내 심정을 극진히 아뢰어 감격하시길 바라는 것이 실로 본심이다.’ 하고, 또 ‘성상께서 우충(愚忠)을 살펴서 오늘날의 두거(杜擧)450) 로 삼으신다면 반드시 세교(世敎)에 보탬이 없지 않을 것이다. 외람된 논의가 매우 경망하기는 하나, 또한 그 본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참혹합니다. 마음 아파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 이른바 희중이라는 것은 역적 윤휴(尹鑴)의 자(字)이며, 그 이른바 오늘날이라는 것은 정유년451) 에 말하였으므로 곧 효종 대왕 때입니다. 그 뜻은, 효종께서 강도에 처하신 바라 본디 숨겨야 할 것이 있었는데, 강도에서 죽지 않은 때의 일을 효종 때에 말하는 것은 기피하여야 할 것이니, 오직 당저(當宁)452) 때 였으므로 감히 말하였으나, 뒷날에는 일이 선조(先祖)에 관계되므로 입 밖에 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른바 북사가 도강한다는 것은 오랑캐의 군사가 강도에 들어온 것을 가리킨 것이며, 그 이른바 강왕(康王)이 실로 군전(軍前)에 있었다는 것은 효종을 송 고종(宋高宗)에 견준 것입니다. 윤선거가 이미 그 사실을 자수(自首)하여 적에게 함몰된 사람이라고 말하고서 또 환난을 같이 당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효종과 자신이 환난을 같이 당하였다는 뜻이고, 그 이른바 두거라는 것은 진 평공(晋平公)이 스스로 잘못이 있는 것을 알고서 두궤(杜蕢)에게 ‘술을 따라 과인(寡人)에게 마시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두궤가 손을 씻고 잔을 올리니 평공이 ‘내가 죽더라도 이잔을 없애지 말라.’고 말한 옛일을 두거라 하니, 곧 효종께서 잘못이 있어서 그에게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 마음 아픕니다. 이루 죄줄 수 있겠습니까? 저 윤선거라는 자가 어떠한 사람입니까? 스스로 항오(行伍)를 편성하여 남성(南城)을 분수(分守)하였는데 사우(士友)와 함께 죽기로 약속하였으나 사우는 다 그 일에 죽었어도 혼자 죽지 않았고, 또 제 아내를 핍박하여 죽이고도 혼자 죽지 않았으며, 이름을 바꾸어 종[奴]이 되기까지 하고도 죽지 않은 자입니다. 이것이 윤선거의 본말(本末)이고, 스스로 그 큰 절의가 이미 이지러진 것을 알고서 인책하여 자폐(自廢)한 까닭입니다. 우리 효종 대왕께서는 병자년453) ·정축년454) 의 난리를 당해 대군(大君)으로서 피난하여 강도로 들어가셨으므로, 본디 관직의 책임과 자효(自效)할 의리가 있었던 것이 아닌데, 강화(講和)한 뒤에 드디어 섬에서 나와 남한(南漢)에 가서 인조(仁祖)를 뵙고 당시에 처하였던 본말을 아뢴 것은 오로지 사리가 그러하여야 하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찌 불만하여 의논할 만한 것이 있기에, 윤선거가 감히 욕된 일을 견디고 살기를 탐낸 의리없고 불인(不仁)한 몸으로서 반드시 효종에 견주어 기피할 것이 있다느니 환난을 같이 당한 사람이니 하는 따위 말로 꺼림 없이 사사로이 수작하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아! 윤선거가 그 자신이 강도에서 죽지 않은 것을 인책하여 자수하고 큰 소리로 임금 앞에서 극진히 말하더라도 효종께 무슨 관계가 있기에, 반드시 기피할 것이 있다고 말하여야 합니까? 거(莒)에 있었던 일을 잊지 말라455) 는 뜻으로 우러러 권면하였다고 한다면, 거에 있었던 일을 잊지 말라는 것이 어찌 숨겨야 할 것이겠습니까? 그 오늘날에는 말하나 뒷날에는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다는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평공은 참으로 음악을 즐긴 잘못이 있으므로 두궤에게 벌을 받아야 하였겠으나, 효종께서는 일찍이 무슨 잘못이 있었기에 윤선거의 벌을 받으셔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에 섬 안으로 피난하여 군사가 왔을 때에는 들어갔다가 강화하고 나서 나온 사대부가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는데, 윤선거가 스스로 이러한 사람에게 견주려 하더라도 그 사람은 반드시 불끈 노하여 ‘네가 어찌 감히 나를 너에게 견주느냐?’ 할 것이고, 그 사람만이 이러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일지라도 분통할 것입니다. 윤선거가 자신의 죄를 감싸려고 무고한 사람을 헐뜯었는데, 더구나 윤선거가 자신의 죄를 감싸려고 위로 존귀한 임금을 무함한 것이겠습니까? 정자(程子)의 말에 ‘군자는 허물이 있는 가운데에서 허물이 없는 것을 찾아야 하고 허물이 없는 가운데에서 허물이 있는 것을 찾지 말아야 한다.’ 하였습니다. 허물이 없는 가운데에서 허물이 있는 것을 찾는 것은 여느 사람에 대하여도 오히려 옳지 않은데, 더구나 윤선거가 허물이 없는 임금에게서 허물이 있는 것을 찾은 것이겠습니까? 아! 마음 아픕니다. 이러한 짓도 해 내는데, 무엇인들 차마 할 수 없겠습니까?
전하께서 일찍이 사가(私家)의 글은 조정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신하가 배척받는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성조(聖祖)께서 이런 망극한 무함을 받으셨는데, 어찌 사가의 글이라 하여 버려두고 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어떤 사람이 감히 사가에서 조종(祖宗)을 근거없이 욕하는 말을 하였는데, 그 말이 이미 조정에 알려졌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버려두시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효성이 천지에 통달하고 명철하기가 일월(日月)에 짝하시어 전에 간흉(奸凶)이 감히 선조(先祖)를 근거없이 욕하는 일이 있으면 조금도 임금의 주벌(誅罰)을 피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으니, 이제 윤선거가 어찌 한때의 헛된 명예를 훔쳐 외람되게 선조의 예우(禮遇)를 받았다 하여 그 성조를 근거없이 욕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자이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윤선거의 문집을 들여오게 하여 다시 예람(睿覽)하소서. 그러면 성감(聖鑑)이 지극히 밝으신데 어찌 통촉하지 못하실 것이 있겠습니까? 성조를 위하여 거짓을 밝히는 것은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독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또한 그 문집을 신의 이 소(疏)와 아울러 조정에 내려 신하들에게 물어서 그 처치할 방도를 의논하시기 바랍니다. 아! 윤선거는 한갓 절의를 잃었기 때문에 《춘추(春秋)》의 의리를 듣기 싫어하고, 《춘추》의 의리를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반드시 송시열의 평생을 무함하려 하며, 반드시 송시열을 무함하려 하므로 또 감히 효종께서 강도에 계실 때의 일을 헐뜯어 넌지시 사람들이 감히 자기를 의논하지 못하게 할 뜻을 갖고 후세를 속일 계책을 삼으려 한 것이 이미 교묘하고 치밀한데다가, 그 아들 윤증이 또 방자하게 그 글을 간행(刊行)하여 다시 꺼리는 것이 없으니, 또한 어찌 매우 무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사(三司)456) 의 신하는 전하의 이목(耳目)·논사(論思)의 책임을 받았는데, 서로 돌아보고 망설여 감히 이 일을 논급(論及)하지 못하니, 신은 참으로 개연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윤선거가 성조를 무함한 것이 과연 소사(疏辭)와 같다면, 그 놀랍고 마음 아픈 것이 무엇인들 이보다 크겠는가? 내가 문집을 들여와 본 뒤에 처분하겠다."
하고, 이어서 본집(本集)을 찾아서 들여오라고 명하니, 정원(政院)에서 상소한 유생(儒生)이 가져온 것을 받아서 바쳤다.
7월 26일 계미
지평(持平) 윤석래(尹錫來)·정언(正言) 송필항(宋必恒)이, 신구(申球)가 상소하여 삼사(三司)를 배척하였다 하여 인피(引避)하며 말하기를,
"유생(儒生)의 상소(上疏)에 말한 바는 소문이 있기는 하나, 본집(本集)의 전문(全文)을 얻어 보지 못하였고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므로, 가벼이 논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처치하여 출사(出仕)시켰다. 옥당(玉堂)의 신하들도 모두 상소하여 인혐(引嫌)하였는데, 여러 번 불러서야 출사하였다.
7월 27일 갑신
경기 감사(京畿監司) 유집일(兪集一)이, 풍덕 부사(豊德府使) 이만선(李萬選)이 제관(祭官)이 되는 것을 피하려고 뚜렷이 짐짓 범할 계책을 하였다는 것으로써 장계(狀啓)하여 파직할 것을 청하고, 이어서 도내의 수령(守令)은 진정(賑政)을 끝낼 때까지 옮기는 것을 허가하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이만선이 뚜렷이 짐짓 범할 생각을 하였다면 결코 파면에 그쳐서 그 바라는 대로 맞혀 줄 수 없으니, 나문(拿問)하여 처치하라. 진정을 끝내기 전에 경기 고을의 수령을 옮기는 것을 일체 막으라. 짐짓 범하여 체직되기를 꾀하는 자는 곧 계문(啓聞)하고 중률(重律)로 다스리라."
하였다.
장령(掌令) 이상성(李相成)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이 근일의 처분을 보건대, 경중(輕重)을 맞추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김시혁(金始㷜)이 선정(先正)의 성자(姓字)를 제거하고 그 이름을 배척하여 말한 것은 죄가 관작(官爵)을 삭탈하여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는 데에 그쳤고, 김홍석(金弘錫)이 선정을 근거없이 욕한 것은 강박(姜樸)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강박은 귀양가고 김홍석은 집에서 누워 쉬니, 형벌을 쓰는 것의 혼잡함이 어찌하여 매우 현격합니까? 성도형(成道亨)이 바른 것을 지키고 간사한 것을 배척한 것은 참으로 세운 것이 높일 만한 것이 있는데 혼자 죄받아 파직된 가운데에 있으니, 신은 의혹됩니다. 송성명(宋成明)이 약원(藥院)457) 의 죄를 꾸민 것은 실로 무함하여 내쫓으려는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글로 아뢰는 것이 적당한데 무슨 미워할 것이 있기에 방자하게 말하고 헐뜯고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습니까? 이어서 들어간 신하들이 한결같이 약속에 따라 후원(喉院)458) 을 신칙(申飭)한 것은 전후에 다를 것이 없는데, 송성명은 끝내 한 마디 말이 없었으니, 송성명이 마음 쓴 것이 과연 경쟁하려는 데에서 나와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죄주어 간사한 것을 징계하여야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조정(朝廷)의 대체(大體)로서는 잇따라 죄주고 뒤미처 죄주지 않아야 하다."
하고, 이어서 성도형을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7월 28일 을유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상차(上箚)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정(大政)을 이미 시작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는 것은 전에 없던 일입니다. 양전(兩銓)의 장(長)은 곧 나와서 끝내야 할 것인데,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건명(李健命)은 한낱 조명(趙銘)의 일 때문에 잇따라 소명(召命)을 어깁니다. 듣건대 조명도 형신(刑訊)을 그만두고 의논하여 처치하라는 명이 있었다 하는데, 그렇다면 병조 판서에게는 다시 인혐(引嫌)할 것이 없으니, 특별히 경책(警責)하여 곧 출사(出仕)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만성(李晩成)은 출사하기 어려운 단서가 따로 없으니, 또한 마찬가지로 패초(牌招)하여 도정(都政)을 다시 거행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연분(年分)459) 에 관한 사목(事目)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고 재실(災實)460) 의 답험(踏驗)은 하루가 급한데, 탁지(度支)461) 의 장(長)은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이 엄준하였다 하여 성밖에 나가서 견책을 기다리니, 흉년을 당하여 지부(地部)462) 의 일이 어찌 염려스럽지 않겠습니까? 모두 속히 지휘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르고, 호조 판서(戶曹判書)는 곧 그 대신할 사람을 내라고 명하였다.
경기·충청·평안·전라·경상 등의 도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거의 2백 인인데, 도신(道臣)이 잇따라 장문(狀聞)하니, 임금이 각별히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권상유(權尙游)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삼았다. 임금이 지부(地部)는 일이 매우 많고 또 흉년을 당하였다 하여 하유(下諭)하여 빨리 올라오게 하고, 또 연분 사목(年分事目)은 차당(次堂)463) 이 묘당(廟堂)에 의논하여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 29일 병술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464) 으로 들어갔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오명준(吳命峻)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고(故) 문경공(文敬公) 윤선거(尹宣擧)는 불행히 병자년465) ·정축년466) 을 당하여 천지가 무너지고 갈라지는 변을 눈으로 보고 인경(麟經)467) 의 원수를 갚아 치욕을 씻는 뜻을 늘 품었으나, 자폐(自廢)하고 자획(自畫)하여 이미 세상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으니, 충성스런 마음이 바라는 것은 오직 성군(聖君)·현보(賢輔)가 대업(大業)을 회복하여 《춘추》의 의리를 펴는 것이었는데, 마침 우리 효종(孝宗)께서 한두 암혈 지신(巖穴之臣)468) 과 밤낮으로 경영하여 천하에 큰 의리를 펴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윤선거가 마음에 기꺼이 묵계(嘿契)되어 위업(威業)을 남몰래 도울 것을 생각하였으니, 성군에게 경계를 아뢰려면 반드시 강도(江都)의 일을 인용하여 거(莒)에 있던 일을 잊지 않는 뜻을 격발(激發)하여야 할 것이고, 동지(同志)를 책려(策勵)하려면 반드시 《춘추》의 의리를 거론하여 주(周)나라를 일으키는 공렬(功烈)을 권면하여야 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향유(鄕儒)가 들추어내는 밑거리와 주워 모으는 근본이 되었을 뿐입니다. 신이 조목별로 열거하여 변명하겠습니다. 그 소(疏)에 【신구(申球)의 소이다.】 ‘윤선거가 일찍이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에게 글을 보내어 경계한다는 핑계로 구천(句踐)이 속였다느니 연광(延廣)이 미쳤다느니 하는 따위 말로 덕을 같이하는 임금과 신하를 아울러 헐뜯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신이 그 전문(全文)을 살펴보았더니, 그 글에는 ‘이제 천하가 좌임(左袵)469) 하나 우리 동방만이 체발(剃髮)470) 하지 않는데 이것은 척화(斥和)한 여러 사람의 공이고, 큰 의리가 어두워졌으나 우리 동방만이 한결같이 명맥을 지키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사림(士林)의 공이니, 어찌 사람이 꾀하는 것이 반드시 하늘의 뜻이겠는가? 문왕(文王)이 곤이(昆夷)를 섬긴 것과 뜻이 같지 않기는 하나, 그 세상의 일을 논한다면 서로 비슷하다. 인자(仁者)의 교화가 가까운 데로부터 멀리 미쳐서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그 둘을 가질 수 있었으니, 해동(海東)의 나라가 비록 작으나 유독 백리(百里)471) 에서 일어설 수 없겠는가? 창업(創業)하여 통하(統緖)를 드러운 것은 이미 선왕(先王)에게서 비롯되었고, 뜻을 이어 일을 베푸는 것은 실로 성상에게 달려 있다. 구천은 속였고 연광은 미쳤다. 인(仁)은 문왕의 정치를 본받고 의(義)는 《춘추》의 방책을 강구하니, 이로 말미암아 동방에서 주나라의 도리를 일으킬 수 있다.’ 하였습니다. 대개 그 뜻은, 이미 창업하여 통서를 드리운 것으로 선왕을 찬미하고 또 뜻을 이어 일을 베푸는 것을 당저(當宁)에게 바라며, 구천이 속인 것과 연광이 미친 것은 본받을 만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권면하는 것은 인은 문왕을 본받고 의는 《춘추》를 강구하는 것이라 한 것이니, 이것은 바로 공문(孔門)에서 오패(五霸)를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맹자(孟子)》의 요순(堯舜)의 도리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는 의리입니다.
이 글이 일찍이 몹시 헐뜯는 것에 가깝지도 않다는 것을 그들도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머리와 꼬리를 자르고 한 줄[單行]의 여덟 자를 억지로 끌어내어 임금과 정승에게 나누어 붙였으니, 그 계략이 교묘하고도 참혹합니다. 그 소에 또 ‘「강도(江都)의 일은 내가 반드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윤휴(尹鑴)가 오늘날은 기피할 것이 있으므로 말하여서는 안된다 하기에, 내가 나는 오늘날에 당하였으므로 감히 말할 수 있으나 뒷날에는 입 밖에 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대저 윤선거가 사직하는 소에 번번이 강도의 일을 말한 것은 그 뜻이 효종께서 강도에 계셨던 일이 제 환공(齊桓公)이 거(莒)에 있었고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하북(河北)에 있었던 일과 같다고 생각하여, 반드시 이 말을 제기하여 성지(聖志)에 감격되게 하려 한 것이니, 이것이 반드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당시의 급한 일은 치욕을 씻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윤선거가 염려하는 것도 바로 치욕을 잊는 것에 있었으므로, 그의 소에 ‘옛사람은 「신은 건거(巾車)를 잊을 수 없습니다.」고 말하였거니와, 신도 감히 강도를 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고, 그때 송시열이 윤선거에게 글을 보내어 ‘「강도를 잊지 말라[無望江都]」는 넉 자는 우리가 10년 동안 아뢰어 인도한 것보다 낫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윤선거의 본의는 여기에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오늘날에는 말할 수 있으나 뒷날에는 말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은 바로 미정(微情)을 다 아뢰어 상청(上聽)에 감격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일이 외람된 것에 관계되는데, 대개 이는 강도를 잊지 않는 의리를 당저(當宁) 때에는 말할 수 있으나 뒷날에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니, 이것이 어찌 효종을 근거없이 헐뜯는 것에 비슷이나 하겠습니까?
그 소에 또 말하기를, ‘윤휴의 답서(答書)에, 「북사(北師)가 도강(渡江)할 때에 강왕(康王)이 실로 군전(軍前)에 있었다.」고 하였다. 내가 강도에서 한 혐의스러운 일은 숨길 곳이 있어야 할 듯하나, 나는 실로 적에게 함몰된 사람이다. 다른 사람으로서 말한다면 옳지 않겠으나, 그때 환난(患難)을 같이 당한 사람이 말하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윤휴의 답서는 윤선거가 강도에서 한 혐의스러운 일은 숨길 바가 있다고 말한 것이나, 그 비유가 잘못되었고 말도 의리가 없으므로, 윤선거는 ‘다 내 뜻과 어그러진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그 말이 윤휴와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향유(鄕儒)들이 들추어내어 써서 바쳤으나, 윤선거가 이른바 ‘다 내 뜻과 어그러진다.’는 말은 모두 뽑아 버렸으니, 그 적당히 주워 모아 현혹하는 꼴은 차마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이른바 적에게 함몰되었다는 것은 대개 인책하는 뜻에서 나왔으므로 본디 논할 만한 것이 없으나, 환난을 같이 당하였다는 말은 실로 윤선거가 사직하는 소 가운데에 이로(泥露) 가운데에서 청광(淸光)을 가까이할 수 있다고 한 것과 같은 뜻이고, 당시의 환난도 이미 겪었으므로 매우 정신 차리고 매우 징계된 것이 절로 훨씬 더하여 의리는 슬픔을 같이하는 데에 있고 정성은 더욱이 격렬한 것이니, 간절한 정성을 저 하늘에 물을 만합니다. 그 소에 ‘무술년472) 에 권시(權諰)에게 보낸 글에 「성상께서 강도의 일을 언급하시면 미정을 극진히 아뢰어 감격하시기를 바라는 것이 실로 본정(本情)이다.」 하고, 또 「성상께서 우충(愚忠)을 살펴서 오늘날의 두거(杜擧)로 삼게 하신다면 반드시 세교(世敎)에 보탬이 없지도 않을 것이다. 외람된 말이 매우 경망하기는 하나 또한 그 본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인용한 것으로 논하면, 번번이 효종께 강도의 일을 말하여 감격되시기를 바랐다는 것은 다 윤선기의 한 조각 충성스러운 마음 가운데에서 나왔고, 두거라 한 것으로 말하면 스스로 임금을 경계하는 그릇에 견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윤선거가 일찍이 사직하는 소 가운데에도 ‘하나의 자리에 두고 경계하는 의기(欹器)473) 가 되어 성조(聖朝)에서 환난을 잊지 않는 의리를 갖춘다면 신의 쓸모 없는 몸이 비로소 세상에 보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것은 두거로 삼게 하시면 반드시 보탬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뜻이 같습니다. 아! 두거는 잔이고 기기는 그릇입니다. 모두 임금이 스스로 경계하기 위한 물건인데, 윤선거가 전후에 스스로 견준 까닭이 다만 그 경계를 붙이는 뜻을 취하였을 뿐이라면, 소 가운데에 인용한 기기도 받아야 할 벌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시경(詩經)》에 ‘무늬를 섞어 짜서 이 패금(貝錦)을 만들었다.’ 하였거니와, 이제 향유들이 황(簧)474) 처럼 혀를 교묘히 놀려 헐뜯어 어지럽혀서 곧바로 악역(惡逆)의 죄로 몰려 합니다. 아! ‘효종을 폄박한다.[貶薄孝廟]’는 넉 자는 송시열의 지극히 억울한 일이나, 이제 윤선거를 무함한 것은 송시열에 견줄 것이 아니니, 세도(世道)와 인심에 어찌 더욱 해롭지 않겠습니까?"
하고, 끝에 말하기를,
"오늘날의 조정은 거조(擧措)가 전도되어 광경이 슬픕니다. 잠시 동안에 멀리 귀양간 자가 3인이고 관작(官爵)을 삭탈하여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한 자가 6인이며 외직(外職)에 보임한 자가 4인이고 죄에 걸려 파직된 자가 30여 인이니, 전하의 조정이 비었습니다. 정식(鄭栻) 같은 자는 그 여든 살 된 노모가 외아들을 참고 보내며 옷자락을 당기고 울부짖는 정상은 길가는 사람도 웁니다. 윤성준(尹星駿)이 쇠약하고 병들어서 떨고 구만리(具萬理)가 중풍(中風)에 걸려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다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수토(水土)에 손상되어 마침내 귀양간 곳에서 죽는 사람이 된다면, 어찌 성덕(聖德)에 누를 끼치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윤선거의 본집(本集)을 내가 들여다가 보았더니 유생의 상소에 말한 것과 같지 않으므로, 내가 이미 가벼이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밖에 아뢴 것은 처분이 크게 정하여졌으니, 단연코 고칠 수 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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