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8권, 숙종 42년 1716년 8월

싸라리리 2025. 11. 30.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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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무자

임금이 내탕은(內帑銀)475)  을 내어 경기 지방의 굶는 백성을 진구(賑救)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올해의 재해는 팔로(八路)가 같으나, 경기는 근본이 되는 곳이므로 더욱이 탕장(帑藏)을 내어 진자(賑資)에 보태야 한다."
하고, 드디어 은(銀) 2천 냥을 기영(畿營)476)  에 내렸다.

 

원주 목사(原州牧使) 박휘등(朴彙登)이 폐단을 없애고 백성을 돌보았으므로 흩어졌다가 도로 모인 것이 5백여 호이었는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니, 말[馬]을 내려 권장하라고 명하였다.

 

전라도 흥양현(興陽縣)과 여도진(呂島鎭)에서 습조(習操)하러 나간 수영(水營)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패몰하여 죽은 군사가 59명이었는데, 수사(水使)가 계문(啓聞)하였다.

 

일본 대마도(對馬島)에서 강호(江戶)에서 쓸 것이라 하며 서계(書啓)를 보내어 약삼(藥蔘)을 무역하기를 요구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 삼을 무역하는 것을 허가 하였으나, 매매하는 데에는 서계로 서로 통하는 규례가 없다 하여 그 글을 물리치니, 차왜(差倭)477)  가 답서를 얻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옛 정은(丁銀)478)  을 복구하는 일로 왕복한 서계 가운데에 있는 「중(重)」 자는 관백(關白)의 조부의 휘(諱)를 범하니 고쳐 주기를 청한다.’ 하였으므로, 동래 부사(東萊府使) 한중희(韓重熙)가 계문(啓聞)하였다, 묘당에서 말하기를,
"전에는 왜인이 우리 나라에서 나는 물건을 요구할 때에 으레 사서(私書)로 훈도(訓導)·별차(別差) 등에게 통하였고 일찍이 서계를 써서 보낸 일이 없었는데, 이제 삼의 무역을 청하는 데 있어서 전에 없던 규례를 새로 만들어 내어 서계를 번거롭게 하기에 이르니, 참으로 매우 놀랍습니다. 훈도·별차에게 신칙(申飭)하여 다시 엄히 꾸짖어 빨리 들여보내게 하소서. 은화(銀貨)에 관한 서계 가운데에 있는 ‘중(重)’ 자를 고쳐 주기를 청한 것은 본디 긴요한 데에 관계되지 않으니, 허락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2일 기축

유숭(兪崇)을 승지(承旨)로, 신임(申銋)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윤봉조(尹鳳朝)·홍계적(洪啓迪)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의현(李宜顯)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조명봉(趙鳴鳳)을 헌납(獻納)으로, 이기익(李箕翊)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약방(藥房)479)                  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침을 맞고 나서 약원(藥院)은 본원(本院)에 물러가 직숙(直宿)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또 계핵(啓覈)을 거행하지 않은 지 이제 이미 4년이 되었으므로 죄가 죽어야 할 것인데 곧 죽이지 않는 것도 본디 실형(失刑)이나, 살 만한 자도 여위어 죽는 것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더욱 가엾다 하여, 9월초에 날을 가려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8월 3일 경인

수찬(修撰) 엄경수(嚴慶遂)가 상소(上疏)하여 신구(申球)를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이르기를,
"예전에 적신(賊臣) 유자광(柳子光)이 조의 제문(弔義帝文)480)  을 풀이하여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켜 노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때의 선류(善類)가 다 죽었는데, 그때의 화(禍)가 극렬하였으므로 이제까지 전하는 자는 오히려 기운이 약해지고 마음이 두려워집니다. 2백 년 뒤에 신구 등의 소(疏)가 다시 나왔는데 한결같이 유자광이 남긴 꾀를 따랐으니, 이는 뭇사람의 뜻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다행히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신 데에 힘입어 도깨비 같은 자들이 그 정상을 숨기지 못하였으나, 한 범상한 임금이 이 일을 당하였으면 어찌 무오년481)  의 어지러운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 보장하겠습니까? 신(臣)은 윤선거(尹宣擧)가 참으로 성조(聖祖)를 무함하는 말을 하였다면 윤선거를 죄주고 아울러 신구를 징계하여 뒷날의 화를 막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전하께서 이미 그것이 거짓인 줄 아셨으니, 신구와 같은 자를 그저 잠자코 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날 대각(臺閣)의 신하도 어찌 분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여러 날 동안 옆에서 듣고도 죄주기를 청하는 일이 없었으니, 신은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네 소는 대개 분하고 미워하는 데에서 나왔다. 본문(本文) 가운데에서 위아래의 문맥을 내가 상세히 보았으나, 유소(儒疏)에 근사한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근거없이 헐뜯었다는 조목으로 망측한 죄로 몰 수 있겠는가? 사습(士習)이 이에 이르렀으니, 매우 슬프다."
하고, 이어서 전에 들여온 윤선거의 본집(本集)을 정원(政院)에 내려 상소한 유생(儒生)에게 도로 주게 하였다. 이튿날 장령(掌令) 한영휘(韓永徽)·이상성(李相成)이 엄경수에게 배척받았다 하여 연명하여 인피(引避)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윤선거는 대개 강도(江都)의 일 때문에 스스로 마음에 불만하여 글을 쓰는 사이에 비유를 잘못하여 스스로 감히 말할 수 없는 데를 막아 핍박하는 줄 깨닫지 못하였으나, 어찌 성조를 근거없이 욕할 뜻이 있었겠습니까? 이것을 죄안(罪案)으로 삼는다면 말하는 자가 본디 경망하겠거니와, 받는 자도 억울할 것인데, 향유(鄕儒)들이 본정(本情)을 헤아리지 못하여 풀이한 것이 매우 깊었고 글을 주워 모아 곧바로 판단하였습니다. 유식한 선비가 누구인들 놀라고 한탄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그 말이 선조(先朝)에 관계되어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니, 경솔히 논하지 않은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하고, 지평(持平) 윤석래(尹錫來)·정언(正言) 황선(黃璿)도 이 때문에 인피하였는데, 사의(辭意)는 거의 같았다. 모두 퇴대(退待)하였는데, 처치하여 모두 출사(出仕) 시켰다.

 

8월 5일 임진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가 면직되었다. 서종태는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세심하게 삼가고 마음 평온하게 스스로 경계하였으므로 과실이 없었으나, 처지가 불안해서 황급히 성밖으로 나가 병을 핑계하여 정고(呈告)한 것이 스물 네 번에 이르니, 임금이 하유(下諭)하기를,
"여러 번 지극한 뜻을 다하되 겸손한 말이 더욱 간절하니, 한결같이 돈유(敦諭)하여 부르기 미안한 바가 있다."
하고, 드디어 체직하도록 윤허하여 규례에 따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제수(除授)하였다.

 

8월 6일 계사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7월의 도정(都政)이 이미 시작되었으나 전관(銓官)이 견책받아 파직되었으므로 중도에서 그만두었는데, 이제 비로소 거행하였다. 홍석보(洪錫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이건명(李健命)을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이병상(李秉常)을 부교리(副校理)로, 조상경(趙尙絅)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8월 7일 갑오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8월 8일 을미

진사(進士) 이홍제(李弘躋) 등 2백여 인이 상소(上疏)하여 신구(申球)의 소(疏)를 논하여 배척하였다. 그 소에 대략 이르기를,
"신(臣)들이 윤선거(尹宣擧)의 문집(文集)을 가져다가 신구(申球)의 소에 인용된 여러 조목을 상세히 살폈습니다. 그 ‘구천(句踐)은 속이고 연광(延廣)은 미쳤다.’ 한 것은 대개 고(故) 상신(相臣)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내는 것으로 견준 글인데, 본문(本文)의 주의(主意)는, 이를테면, 구천은 대개 능히 원수를 갚았으나 칠책(七策)으로 오(吳)나라를 봉양하고 거짓말로 적을 속였으므로 임기응변으로 속였음을 면할 수 없고, 연광은 대개 치욕을 씻으려고 국력을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강한 오랑캐에게 도전하였으므로 광망(狂妄)하다는 비난을 받았을 뿐이니, 하나는 제 환공(齊桓公)·진 문공(晋文公)의 의리를 말하기 부끄럽고, 하나는 반드시 성취할 방도 만을 꾀하기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래에 바로 ‘인(仁)은 문왕(文王)의 정치를 본받고, 의(義)는 《춘추(春秋)》의 방책을 강구한다.’ 하였으니, 그 뜻은 대개 구천·연광은 다 본받을 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문왕의 어진 정치를 본받아 내수(內修)에 전념하고, 《춘추》의 큰 의리를 강수하여 죄를 성명(聲明)하고 토벌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권면하는 것이 중하고 기대하는 것이 깊은 것이므로 송시열에 대하여서도 조금도 비난하려는 뜻이 없었는데, 감히 한 줄의 한 구절로 머리와 꼬리를 잘라 내고 곧바로 효종(孝宗)을 근거없이 헐뜯었다 하여, 바르지 않은 조목으로 끌어대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에 대하여 의논한 것에 견주었으니, 신구도 우리 나라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아래 세 조목의 말은 본말(本末)이 있습니다. 윤선거는 이미 벼슬하지 않고 스스로 폐고(廢錮)하여 정헌(靖獻)482)  할 의리가 있기 때문에 원수를 갚아 치욕을 씻는 큰 뜻을 우러러 도우려는 것이 또한 오랫동안 잊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퇴할 때에 걸핏하면 강도(江都)의 일을 인용하여 인책하는 단서로 삼았는데, 그때의 벗들은 모두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였으나 윤선거는 묻는 대로 밝혔습니다. 그가 적신(賊臣) 윤휴(尹鑴)에게 답하기를, ‘온 세상이 치욕을 잊으니 내가 어찌 치(恥) 자를 말하지 않겠는가?’ 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유계(兪棨)에게 답하기를, ‘여러 번 강도의 일을 언급한 까닭은 오늘날의 의리에 말을 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니, 성비(聖批)에 혹 답술(答述)하라는 뜻이 있으면 내가 극진히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으니, 이는 그가 애써 말한 미의(微意)를 천년 뒤에도 상상하여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박약기(朴躍起)·권시(權諰) 및 적신 윤휴와 문답하여 왕복한 것은 다 이 뜻에서 나왔는데, 그 말에 ‘나는 오늘날에 당하였으므로 감히 말할 수 있으나 뒷날에는 말할 수 없다.’ 하였으니, 여기에 말한 것은 대개 효종께서 강도에서 몸소 환액(患厄)을 당하여 간험(艱險)을 갖추 맛보셨으면, 곤궁하여 노여움이 더한 나머지 징계되어 격려할 기회에 풍자하여 경계하는 방도는 강도의 일보다 절실한 것이 없을 것이므로, 번번이 스스로 인책하는 말에 따라 유위(有爲)한 계책을 돕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에 ‘강도의 일을 나는 반드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 것인데, 대저 관중(管仲)이 제 환공에게 거(莒)에 있었던 일을 잊지 말라고 권면하고, 풍이(馮異)가 광무제(光武帝)에게 건거(巾車)를 잊지 않기를 바랐으니,483)   오늘날 감히 말할 수 있다고 한 것은 곧 거에 있었던 일과 건거의 일을 뜻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조금 멀어진 뒤가 되면 강도의 일은 글을 쓰기에 맞지 않을 것이니, 제 효공(齊孝公)이나 한 명제(漢明帝) 때에 거에 있었던 일이나 건거의 일로 임금 옆에서 경계를 다하려 하더라도, 어찌 말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가 환난(患難)을 같이 당한 사람이 말하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느냐고 말한 것은 사직하는 소 가운데에 이른바 신이 전패(顚沛)되었을 때에 이로(泥露) 가운데에서 청광(淸光)을 가까이할 수 있었다고 한 것과 같은 뜻인데,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이미 환난을 같이 당하였으므로 징계되고 감동하여 분발하는 마음이 절로 여느 사람과 다르니, 이 때문에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는 것을 윤선거만이 말한 것입니다.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강왕(康王)이 군전(軍前)에 있었으므로 숨기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적신 윤휴의 글이고 윤선거는 다 내 뜻과 날류(剌謬)484)  한다고 하였는데, 이제 날류라는 한 구절을 삭제하여 주객(主客)이 분명하지 않게 뭉뚱그려서 말하여 천청(天聽)을 현혹하는 계략으로 삼으려 하였으니, 아! 또한 교묘합니다. 그가 오늘날의 두거(杜擧)로 삼으면 반드시 세교(世敎)에 보탬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대개 진 평공(晋平公)이 두궤(杜簣)의 잔[爵]을 보전하여 오로지 경계를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제 예우하여 부르시는 것이 간절한데도 인책하여 성세(聖世)에 스스로 폐고(廢錮)한다면 당시의 조정에서 강도의 일을 잊지 않을 수 있을 것이므로, 죽지 않은 몸을 폐기하지 않는 잔에 견주어 저 경계를 잊지 않는 뜻을 이 강도를 잊지 않는 데에 견주었으니, 그 뜻이 생생합니다. 당(堂)에 올라 잔을 든 것과 어찌 조금이라도 비슷한 것이 있기에, 효종께서 일찍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윤선거의 벌을 받아야 하느냐고 말하기까지 합니까? 아! 마음 아픕니다. 남을 무함하기에 바쁘더라도 어찌 감히 무엄하기가 이러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윤선거는 정묘년485)   봄에 글을 올려 의리를 게양하고 노사(虜使)를 베기를 청하였으므로 정기(正氣)·굉론(宏論)이 이미 일세(一世)를 용동(聳動)하였으나, 강도의 화변(禍變)을 격은 뒤에는 지나치게 스스로 인책하여 실심(失心)하고 스스로 폐고하였습니다. 대개 그 미의(微意)는 본디 도해(蹈海)486)  의 의리에서 나왔는데, 마침 우리 효종께서 큰 뜻을 분발하여 자나깨나 어진이를 찾아 궁정(弓旌)487)  의 부름을 여러번 구원(丘園)488)  에 내리시게 되었는데, 면직을 청하는 글을 올림에 따라 치욕을 잊지 않는 의리를 여러번 아뢰었으니, 끝내 일관 한 절조에는 참으로 감동할 만한 곳이 있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윤증(尹拯)으로 말하면 일찍부터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아 국가의 원한을 매우 아파하여 동강(東綱)489)  에서 도(道)를 마음에 품고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대저 이른바 《춘추》의 큰 의리라는 것이 참으로 한 집에 모였다 하겠으니, 겉으로 명예와 의리를 핑계 삼아 헛되이 총애를 걸고 한갓 당의(黨議)를 주장하여 세도(世道)에 해독을 끼치는 자에 비하면 성위(誠僞)·명실(名實)이 아주 달라서 흑백의 구분과 같을 뿐이 아닙니다. 이것이 송시열이 속으로 언짢고 부끄러운 마음을 품어 남몰래 해치려 생각한 까닭인데, 기유년490)  의 글과 신유년491)  의 글이 모두 실병(實病)을 절실히 맞힐 수 있었으므로, 분하고 한스러운 마음이 매우 깊어져서 반드시 윤선거 부자를 더러운 곳으로 떨어뜨리려 하여 원망하는 마음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고, 아부하는 무리가 그 뜻을 이어서 문득 큰 의리를 근거없이 헐뜯는다고 억지로 말을 만들고서 감히 성조(聖祖)를 끌어들여 넌지시 송시열과 함께 거론하여 존귀한 데에 의지할 생각이었습니다. 만일 성감이 매우 밝아서 간사한 정상을 환히 깨뜨리지 않으셨다면 윤선거의 집이 가루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고, 사림(士林)이 피를 흘리는 것을 면할 수 있는 것도 바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처음 신구의 소가 나왔을 때에 이홍제 등이 소를 갖추어 와서 정원(政院)에 바쳤으나, 임금의 환후가 더하므로 보기 어렵다하여 물리쳤는데, 유생이 굳이 다투며 궐문(闕門)이 닫혀도 물러가지 않으므로 정원에서 아뢰니, 임금이 뒷날에 와서 바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오니, 임금이 본 뒤에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고 도로 내어 주었으며, 이어서 이 뒤로는 이러한 선정을 헐뜯는 소를 일체 봉입(捧入)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상차(上箚)하였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 재황(災荒)이 매우 참혹하므로 분재(分災)492)                  를 주도록 허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분재의 명목이 너무 많으면 원결(元結)을 줄게 할 뿐이고 백성은 실혜(實惠)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올해에는 곧바로 해조(該曹)에서 각도의 재실(災實)을 참작하여 재결(災結)493)                  을 정하여 주어 각도의 감사(監司)가 헤아려서 나누어 주고 각 고을에서 또 소득에 따라 뜻대로 나누어 주면, 일은 간편하고 혜택은 고를 것입니다. 대신(大臣)들이 모두 그 편리함을 말하는데, 을해년494)                  의 등록(謄錄)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경술년495)                  의 예에 따라 어공(御供)에 관계되는 것까지도 줄인 것이 많습니다. 이제는 한결같이 이 전례를 쓸 필요가 없으니, 참작하여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삼남(三南)은 곡식을 옮겨 주어야 할 형세입니다마는, 강도미(江都米)는 전수(全數)를 죄다 낼 수 없고, 진청미(賑廳米)는 기내(畿內)와 도하(都下)를 진구(賑救)할 밑천인데 그 수가 매우 많으므로, 오로지 삼남을 구제하기는 어렵습니다. 삼남에는 3만 석(石)을 나누어 주되, 경중(京中)에서 각 아문(衙問)의 돈[錢] 15만 냥을 모아 세 도에 나누어 보내어 각각 사들여서 진청미 3만 석의 수를 충당하게 하고, 본미(本米)는 우선 진청에 두었다가 그 가운데에서 2만 석은 봄이 되거든 팔아서 그 값을 거두어 각 아문에서 빌린 돈을 갚고 1만 석은 호조(戶曹)를 시켜 은전(銀錢)으로 바꾸어 경비에 쓰게 하면, 또한 감손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각 아문은 돈을 소비하지 않고 도하(都下)의 춘궁(春窮)은 조금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판부사(判府事)        서종태(徐宗泰)·공조 판서(工曹判書)        조태채(趙泰采)는 특별히 하유(下諭)하여 부르셔야 하겠습니다. 과거(科擧)에 관한 사문(査問)이 늦추어져서 국사(國事)가 도처에서 막히는데, 판의금(判義禁)        민진후(閔鎭厚)는 이원곤(李元坤)과 상피(相避)하여야 할 처지이니,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유명웅(兪命雄)은 혐의스러운 단서가 전 판서와 다를 것이 없으니, 청컨대 전에 결정한 대로 차관(次官)을 시켜 대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8월 9일 병신

임금이 특교(特敎)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경(卿)이 지극한 정성으로 시탕(侍湯)한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때의 하교(下敎)가 마땅하지 못하여 황급히 나가게 하였으니, 뒤미처 뉘우친들 어찌 미치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깊이 헤아려 사관(吏官)과 함께 들어와야 한다."
하였으나, 서종태가 여러번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는데, 임금이 매우 지극하게 돈면(敦勉)하니, 드디어 성 안으로 들어왔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무릇 진정(賑政)에 관계되는 공사(公事)는 모름지기 곧 입계(入啓)하여야 한다. 외방(外方)에서 진정에 관한 일 때문에 장청(狀請)한 것도 곧 복주(覆奏)하라."
하였다. 이때 임금의 기후가 편찮기 때문에 모든 공사를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고 들이지 못하였으므로, 임금이 진정에 관계되는 것이 지체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이러한 분부가 있었던 것이다.

 

수찬(修撰) 박사익(朴師益)이 상소(上疏)하여, 묘당(廟堂)과 진청(賑廳)에 신칙(申飭)하여 진정에 관한 일을 빨리 조치할 것과 여러 가지 민역(民役) 중에서 경비(經費)에 크게 관계되는 것 이외는 일체 감면하고, 각 고을의 군역(軍役)도 모두 장실(壯實)한 자로 충정(充定)하고 무변(武弁) 중에서 청렴하고 결백한 자를 찾아서 각별히 탁용(擢用)하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아뢴 것은 본디 급한 일입니다마는, 조정이 화평하지 않으면 또한 믿고 스스로 행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대저 동·서 두 당(黨)496)  은 그 뿌리를 심은 것이 굳고 물결이 퍼져서 이미 백년의 고질이 되었으므로 이것은 본디 어쩔 수 없습니다마는, 이제 운운하는 것으로 말하면 전하의 세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일을 논하면 원한을 다투는 작은 일에 지나지 않고, 그 세월을 말하면 겨우 120년을 지냈는데도, 그지없이 전전(輾轉)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 하늘이 어찌 남의 나라를 망치려고 이러한 변괴를 냈겠습니까?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조정에 붕당이 있으면 임금이 자책하여야 옳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표준을 세우고 중도를 지켜서 가라앉도록 인도하시더라도 뭇 신하의 당습(黨習)의 폐단은 오히려 평정되기 어려울까 염려되는데, 더구나 때때로 손수 도우시어 시비가 여러번 바뀌었으니, 격렬하여지고 또 격렬하여져서 점점 오늘날에 이른 것이 괴이할 것 없습니다. 한 번 국면이 바뀔 때마다 문득 사당(私黨)의 은수(恩讐)를 늘리고 국가의 원기(元氣)를 끊은 것은 전하께서도 이미 겪어서 그 무익함을 아실 것입니다. 자꾸 반복하여 그치지 않으니 장차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근래 성체(聖體)가 오래 편찮으시어 온갖 일을 다 절손(節損)하시니, 더욱이 어찌 기쁘고 노여운 대로 맡겨 두어 그것이 조리하는 데에 크게 꺼려야 할 것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성명(聖明)께서는 춘추가 이미 높고 사리를 살피는 것이 지극히 익숙하시니, 또한 어찌 개탄하여 그 까닭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요즈음 신하들에게 내린 비답(批答)에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는 뜻을 갖추 보이셨으니, 성상께서 빨리 고치시는 것은 신이 본디 찬송하기에 겨를이 없습니다마는, 대저 잘못이 있으므로 뉘우침이 문득 따르는 것이니 뉘우치는 것이 참으로 옳기는 하나, 어찌 뉘우치기 전에 삼가서 뉘우칠 만한 것이 없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성체가 편찮으신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므로 우리 동궁 저하(東宮邸下)의 근심이 간절하여 본디 날마다 서연(書筵)에 나아갈 겨를이 없어 중단한 지 오래 되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성후(聖候)가 조금 덜하신 날에 때때로 궁관(宮官)을 만나 서책(書冊)을 토론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또한 신이 사책(史冊)을 보건대, 분당(分黨)은 모두 타인으로서 타인을 공박하는 것이며, 우·이(牛李)497)  , 천(川)·낙(洛)·촉(蜀)498)   같은 것이 이것인데, 지금 이른바 당이라는 것으로 말하면 그 제자를 편들어 그 스승을 배척하며 서로 다투어 각각 한편을 세웠으니, 다른 것은 우선 그 사리가 거슬리는 것을 논하지 않더라도 불순(不順)한 것이 또한 매우 심합니다.
대저 세상에서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공박하는 자는 식견이 없는 자가 함부로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비평하는 것과 같아서 헤아릴 줄 모르는 것이 많이 보이는데, 그 말하는 까닭으로 말하면 대개 세 마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매사가 착하지 않다는 말을 빌어 몰래 의논하는 사의(私意)를 성취하였고, 중간에는 뚜렷이 비난하기는 하였으나 오히려 존경하는 호칭을 지켰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곧바로 짓밟고 능욕할 뿐입니다. 점차 체감(遞減)하여 세상이 변한 것을 볼 만하니, 신은 통탄합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더욱 굳게 덕을 지켜서 사문(斯文)의 큰 시비가 일정한 단안(斷案)을 얻을 수 있게 하시면 다행하겠습니다.
음양(陰陽)·선악(善惡) 사이에서 본디 착안하여 판별하여야 하고 또 모름지기 충후(忠厚)하고 관대한 뜻으로 그 사이에서 행하여야 합니다. 신이 듣건대 정식(鄭栻)은 늙은 어미가 있고 다른 형제가 없다 하는데, 정리(情理)가 가엾으니, 조금 가까운 곳으로 옮겨서 그 어미와 아들이 자주 성문(聲聞)에 접하게 하여도 매우 해롭지는 않을 듯합니다. 판부사(判府事) 서종태(徐宗泰)는 접때 약원(藥院)에 있을 때에 엄한 분부를 받았으니, 혹 한때 뜻밖의 잘못은 있더라도, 대신을 진퇴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이처럼 너무 갑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붕당의 폐습이 깊은 때에 지론(持論)이 화평하여 평소에 의뢰하던 대신이라면 더욱이 끝내 예우하여 화합을 이루지 않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사간(司諫) 신(臣) 권변(權忭)은 의리 때문에 스스로 폐고(廢錮)하여 일생 동안 조용히 물러가 있는데, 그 높은 풍도와 맑은 절조가 당세(當世)를 용동(聳動)할 만하니, 또한 청컨대 특별히 숭포(崇褒)하여 쇠퇴한 풍속을 경계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조목으로 아뢴 일을 묘당을 시켜 상의하여 처치하게 하라. 소 가운데에 있는 춘궁(春宮)이 때때로 궁관을 만나는 것과 대신을 예우하는 것과 권변을 숭포하여야 하겠다는 말들을 내가 유의하겠다. 선정의 일로 말하면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이러한 처분이 있었으니, 내가 굳게 지킬 뿐 아니라 장래에도 따르고 고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식의 정리는 가엾으나, 본디 범한 것이 가볍지 않아서 유배하였으니, 문득 양이(量移)499)  를 의논하기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임금이 백성의 근심이 바야흐로 급하다 하여 차대(次對)500)  를 오래 폐지하였는데, 특별히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을 불러서 입대(入對)하게 하였다. 김창집이 다만 전에 상차(上箚)한 뜻을 다시 아뢰고, 이어서 이광좌(李光佐)·윤지인(尹趾仁)을 서용(敍用)하여 함께 비국(備局)501)  의 당상(堂上)으로 차출하기를 청하며, 또 판의금(判義禁)·아경(亞卿)이 될 사람이 모자란다 하여 더 간택하기를 청하였다. 이어서 윤성준(尹星駿)·구만리(具萬理)는 평소에 고질이 있는데 두 고을은 다 장기(瘴氣)가 있는 고을이므로 참작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다고 말하며, 또 세 정승의 자리가 갖추어지지 않아서 온갖 공사(公事)를 상의할 수 없음을 아뢰어 매복(枚卜)하라는 명을 내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고, 이어서 윤성준은 초계 군수(草溪郡守)로 바꾸어 차출하고 구만리는 언양 현감(彦陽縣監)으로 바꾸어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윤성준은 마침내 폄소(貶所)에서 죽었다.

 

황흠(黃欽)을 불러 판의금(判義禁)에 제수(除授)하였다.

 

8월 10일 정유

궁인(宮人) 설례(雪禮)가 외인과 몰래 간통하여 대궐 안에서 아들을 낳았으므로, 임금이 형조(刑曹)에 넘기라고 명하였다. 그 간부(奸夫)인 중[僧] 학혜(學慧)와 아울러 신국(訊鞫)하여 승복(承服)을 받아서 죽였다.

 

8월 12일 기해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침을 맞고 나자, 도승지(都承旨)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왕세자(王世子)가 잇따라 시탕(侍湯)하느라 오랫동안 강학(講學)을 폐기하였으니, 의식을 갖추어 서연(書筵)을 여는 것은 본디 겨를이 없으나, 이따금 소대(召對)502)  하는 것은 안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8월 16일 계묘

사시(巳詩)에 태백성(太白星)이 미지(未地)에 보였는데, 이 뒤로도 여러번 보였다.

 

대사간(大司諫) 이세면(李世勉)이 충청 감영(忠淸監營)의 임소(任所)에 있으면서 봉소(封疏)503)  를 지어 근일의 처분이 마땅하지 못함을 아뢰면서, 이어서 유봉휘(柳鳳輝) 등은 죄가 없이 귀양갔다 말하고, 또 오명윤(吳命尹)을 배소(配所)로 보내자는 논의를 배척하였다. 또 윤성준(尹星駿) 등 여러 신하를 소환하고 신구(申球)를 빨리 귀양보낼 것과 호서(湖西)에 어사(御史)를 특별히 보내어 진구(賑救)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말이 매우 어그러진다고 꾸짖고, 진구하는 일을 감독하는 한 가지 일은 묘당(廟堂)에 내렸는데, 복주(復奏)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7일 갑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여(李畬)가 소(疏)를 두고 시골로 돌아갔다. 그 소에 이르기를,
"신(臣)은 이미 물러간 발자취로서 그 지킬 바를 어기고 서울에 무릅쓰고 있는 것이 이미 4년이나 되었으니, 이제 신은 다시 감히 옛사람의 깨끗하고 바른 절개를 스스로 지킬 수 없습니다마는, 구구한 일념은 오직 남은 해골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죽어서 길가의 주검이 되는 것을 면하는 데에 있습니다. 신 자신은 지극히 미천하나 이미 외람되게 대신의 반열에 있으므로 살고 죽는 것이 끝내 국가의 체모에 관계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데, 신은 이미 그지없는 은혜에 우러러 답할 수 없으니, 오직 제 본래의 분수로 돌아가 스스로 마칠 수 있어서 성조(聖朝)를 더럽히지 않을 수 있다면, 이것도 신이 나라에 보답하는 한 가지 일일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批答)하여 위유(慰諭)하고 사관(史官)·승지(承旨)를 잇따라 보내어 머무르도록 권하였으나, 이여는 끝내 다시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8월 19일 병오

우윤(右尹) 김연(金演)이 상소(上疏)하여 신구(申球)의 소(疏)를 논하여 배척하고 멀리 귀양보내는 벌을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벌을 주지 않는 데에도 지키는 바가 있다고 답하였다.

 

8월 20일 정미

임금이 정원(政院)에 하교(下敎)하여 긴요하지 않은 공사(公事)를 간략하게 들이게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만견(李晩堅)이 폐사(陛辭)504)  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수령(守令)의 근만(勤慢)은 감사(監司)의 명찰(明察)에 달렸으나, 새로 도임(到任)한 처음에는 낱낱이 구별하기 어려울 듯하다.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 매우 소홀한 자가 아니면 자주 갈지 말아서 맞이하고 보내는 폐단을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1일 무신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상차(上箚)하기를,
"금오(金吾)505)  에서 사문(査問)하는 일이 이제까지 늦추어졌는데, 여러 신하의 피혐(避嫌)은 줄곧 굳어서 타이르는 것이 지극하고 패초(牌招)506)  가 빈번하였으나, 한 사람도 명에 따르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대개 근래 사의(私意)가 이기고 피혐하는 길이 넓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저들 여러 사람은 이미 생각을 고칠 리가 없으니, 임금의 명만 산만한 것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장관(長官) 이외의 인혐(引嫌)하는 여러 당상(堂上)을 모두 우선 갈고 특별히 경책(警責)하되, 당품(當品) 가운데에서 무고(無故)한 사람을 갖추어 의망(擬望)하기 어려우면 특별히 승탁(陞擢)하는 것도 혹 전례가 있었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예충(睿衷)으로 간택하고 이어서 차관(次官)을 시켜 거행하여 빨리 결말을 짓게 하시면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23일 기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가고 목성(木星)이 동정성을 범하였다.

 

안중필(安重弼)을 장령(掌令)으로 삼고, 민진원(閔鎭遠)을 탁배(擢拜)하여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침을 맞고 나자,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정군(正軍) 이외의 여정(餘丁) 따위 명색(名色)은 본디 대정(代定)하는 일이 없는데, 호남(湖南)에 있는 병조(兵曹)의 여정과 장인(匠人)은 전부터 대정하여 이미 그릇된 규례가 되었습니다. 한정(閑丁)을 얻기 어려운 이때에 그 폐단이 참으로 많으니, 이 뒤로는 대정하는 규례를 폐지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8월 24일 신해

박봉령(朴鳳齡)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청국(淸國)에서 ‘궁각(弓角)507)  의 금령(禁令)을 범한 우리 나라 사람 엄립(嚴立)·귀선(貴先) 등은 변계(邊界)에 충군(充軍)하고 책 40판(責四十板)508)  하며, 역관(譯官) 김유기(金有基)는 혁직(革職)509)  하고 책 40판하며 상사(上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은 모두 혁직하고 감론(勘論)하라.’고 이자(移咨)510)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이대로 감처(勘處)하겠다는 뜻으로 청국에 회자(回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상차(上箚)하기를,
"요즈음 향유(鄕儒) 신구(申球)의 소(疏) 때문에 논의가 어지러워 시비가 정하여지지 않으니, 매우 불행합니다. 전하께서 명백히 처분하지 않으시면, 혼란하고 시끄러운 것을 진정시킬 수 없을 듯합니다. 윤선거(尹宣擧)의 간행된 문집은 신이 얻어 보지 못하였으나, 그 베껴 씌어 유행되는 것을 반복하여 살펴보았더니, 대개 윤선거가 처음 소명(召命)을 사양할 때에 그 스승인 선정신(先正臣) 김집(金集)의 지도에 따라 강도(江都)에서 죽지 않은 일을 인용하여 스스로 죄로 여겼으나, 늘 부끄럽고 분한 생각을 가졌으므로 적신(賊臣) 윤휴(尹鑴)가 헤아려 알고서 감히 오늘날은 기피할 바가 있다느니 강왕(康王)이 실로 군전(軍前)에 있었다느니 하는 따위 말로 윤선거를 종용하여, 마치 성조(聖祖)께서 강도에서 하신 일도 덕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할 바가 있으므로 윤선거가 스스로 폐고(廢錮)한 까닭은 성조께서 듣기 싫어하시는 것이 된다는 듯이 하였습니다. 윤휴가 역심(逆心)을 품고 대성인(大聖人)께서 의리를 지켜 최선을 다하신 데에 흠을 지적하여 그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극진히 하였으니, 윤선거의 도리로서는 오직 성조께서 지적할 만한 흠이 없으므로 오늘날 기피할 단서가 없다는 뜻으로 말을 엄하게 하여 매우 배척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오직 늘 강도의 일이 마음에 언짢기 때문에 그 말을 기꺼이 듣고 함께 수작하여 혹 환난(患難)을 같이 당한 사람이라고도 하고, 혹 오늘날에 당하였으므로 감히 말할 수 있다고도 하였으니, 그가 이른바 ‘내 뜻과 어그러진다.’ 한 것은 강도의 일을 말하여야 한다는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맞지 않는 것을 가리킨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적신 윤휴가 임금을 무함한 흉악한 말은 변명하여 배척하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얼른 그 말을 받아들여 ‘성상께서 우충(愚衷)을 살펴서 오늘날의 두거(杜擧)로 삼게 하신다면 반드시 세교(世敎)에 보탬이 없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저 두거란 두궤(杜簣)가 올린 잔이고 진평공(晋平公)이 벌을 받은 그릇인데, 무슨 그때의 일과 비슷한 것이 있기에 이말을 인용합니까? 이것은 대개 마음에는 엄폐된 것이 있고 사리에는 살피지 못한 것이 있어서 외람되게 성조를 끌어대어 자신에 견주어 글에 올리고 책상자에 감추어서 오래 전하여 보이기를 바란 것이니, 그 본심은 성조를 근거없이 헐뜯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도 그 외람하고 경망한 죄는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는 하나, 이것은 사사로이 간행한 글이고 윤선거가 죽은 지도 이미 오래 되었으니, 사우(士友) 사이에서 혹 보았더라도 그 사람만을 노려 쳐부수어야 할 뿐입니다. 이것이 어찌 국가에서 뒤미처 논할 만한 것이겠습니까마는, 신구(申球) 같은 괴귀(怪鬼)의 무리가 갑자기 성총(聖聰)에 아뢰어 윤선거가 뜻이 있어 근거없이 욕하였다 하니, 그 말이 이처럼 심각한 것은 그 말뜻이 성심(聖心)에 닿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명준(吳命峻)이 신구에 대항한 소에서는 도리어 윤선거의 이러한 글을 죄다 순전히 허물이 없는 처지로 돌렸으므로 매우 사리에 어두운 것을 알 수 있는데다가, ‘두거’ 두 자에는 따로 사실이 있어서 변명할 수 없으니, 윤선거의 소 가운데에 있는 ‘좌우에 두고 경계로 삼는 의기(欹器)’라는 말을 인용하여 뜻이 같다고 하였습니다. 소 가운데에 있는 기기라는 말은 대개 옛사람이 ‘거(莒)에 있었던 일을 잊지 말라.’는 뜻에 붙인 것이니, 두거 같은 벌을 받은 일이 어찌 이 일과 비슷한 것이 있겠습니까? 간사하게 속여서 말이 되지 않는 것을 알기에 알맞습니다.
엄경수(嚴慶遂)는 또 유자광(柳子光)을 인용하여 마치 사림(士林)의 화(禍)가 곧 일어날 것처럼 말하여 천청(天聽)을 공동(恐動)하고 뭇사람의 입을 협제(脅制)하려 하였으니, 어찌 그리 남을 무함하기에 급급하여 자신이 그 말을 답습하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까? 경악(經幄) 사이에도 이러한 수단이 있는 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이홍제(李弘躋) 등의 소는 곧 오명준과 하나로 관통하는 것인데,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함께 거론하여 조금도 꺼림없이 뜻대로 근거없이 욕하고, 도리어 《춘추(春秋)》의 큰 의리가 한 집안에 모였다 하여 윤선거 부자를 허여하였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전일 오명윤(吳命尹)이 귀양갈 때에 현관(賢關)을 핑계삼기 때문에 신이 사체(事體)를 생각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그 죄상을 논하면 마침내 너무 너그러운 잘못을 저질렀으니, 신은 공론이 엄준한 데에 대하여 스스로 해명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이 징계됨을 두려워 함이 없어서 선정을 헐뜯는 버릇을 더욱 키우니, 성상께서 호오(好惡)를 밝히고 인심을 바루는 도리로서는 매우 미워하고 매우 징계하지 않으셔서는 안되겠으나, 김연(金演)처럼 직분을 넘어서 일을 말하여 마치 절의를 세우는 듯이 하는 것은 우스워서 꾸짖을 만하지도 못합니다. 여러 신하의 소는 문득 신구를 죄주지 않는 것을 가리켜 성조(聖朝)의 과실이라 하나, 전후의 비답(批答)을 보건대,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를 우러러 알겠습니다.
일찍이 을축년511)  에 향유(鄕儒) 이진안(李震顔)이 윤증(尹拯)의 글 가운데에 율곡(栗谷)은 참으로 입산(入山)한 잘못이 있다는 따위 말이 있기 때문에 상소하여 선현(先賢) 이이(李珥)가 무함당한 것을 변명하였으나, 전하께서는 그 도리에 어긋나고 격렬한 것을 미워하여 유벌(儒罰)을 주라고 명하셨는데, 선신(先臣)이 곧 연중(筵中)에서 아뢰기를, ‘윤증의 본정(本情)이 과연 선현을 모욕하려는 데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망발은 큽니다. 이진안은 이름하여 선현을 위하여 거짓을 변명한다고 하였으므로 죄주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니, 전하께서 곧 그 벌을 도로 거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제 이 윤선거의 망발은 윤증보다 더욱 크거니와, 선현을 위하여 거짓을 변명한 자도 죄줄 수 없는데, 더구나 이름하여 성조(聖祖)를 위하여 거짓을 변명한 자를 어찌 감히 죄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방자하게 견책하기를 청한 자는 또한 무엄하거니와, 저 엄경수 등은 장차 사화(士禍)가 일어날 것이라는 따위 말로 공동하고 협제하였으므로 대각(臺閣)의 신하들이 망설이고 움츠려서 처음부터 피혐(避嫌)하는 말이 대개 다 흐릿하고 구차하여 거의 의리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신은 대단히 슬픕니다. 윤선거는 망발한 것이 있더라도 이미 백골이 된 사람이므로 이제 경솔히 논할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성교(聖敎)와 같습니다마는, 그 망령된 글을 어찌 그 판본(板本)에 그대로 두어 후세에 전하게 하여도 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그 판본을 헐어 없애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처분한 뒤에 피차가 다투어 변명하는 소는 조사(朝士)·유생(儒生)을 물론하고 일체 봉입(捧入)하지 말아서 어지러운 폐단을 끊는다면, 진정하는 도리에 맞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근래 신구의 소가 나와서 논의가 어지러우므로, 경(卿)이 혹 이 때문에 편안하지 않는 단서를 다시 일으킬까 염려하여 이처럼 차자로 아뢰었는데, 그 논열(論列)한 것이 매우 명백하다. 윤선거의 본집 가운데에 있는 글이 망령된 것이 심하나, 신구를 견책하기를 청한 글에 끝내 윤허하지 않은 것은 내 뜻이 바로 경의 차자의 말과 같기 때문이었다. 소두(疏頭) 이홍제는 정배(定配)하고 엄경수는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말며, 이어서 그 판본을 헐어 없애게 하여 시비를 밝히는 뜻을 보이고, 이제부터 이러한 다투어 변명하는 소는 일체 봉입하지 않는다면, 어지러운 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니, 정원(政元)을 시켜 이대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드디어 이홍제를 태인현(泰仁縣)에 정배하였다.

 

지난해 겨울에 민진후(閔鎭厚)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제도(諸道)의 전선(戰船)은 점점 그 제도를 잃어서 운용하기 어렵고, 선창(船倉)은 좋은 곳이 전혀 없으므로 썰물 때를 당하면 이동할 수가 없습니다. 선창이 긴요하지 않은 곳은 전선을 병선(兵船) 두 척으로 바꾸어 만들면, 변란을 당하였을 때에 더욱 힘을 얻을 수 있고 배의 재목이 아주 모자라는 이때에 재력(財力)과 민폐(民弊)도 줄이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는데, 그 뒤에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전선을 쓴 지 이제 이미 수백 년이 되었으므로 배의 재목이 다 못쓰게 된 뒤에는 다시 만들어 구처(區處)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이제 선창이 좋지 않다 하여 고친다면 선창이 좋은 곳은 열 가운데에 하나도 못되므로 옛 제도는 죄다 폐기하게 될 것이니, 결코 고치기 어렵겠습니다."
하니, 또 묘당에 내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복주(覆奏)하기를,
"두 가지 말의 득실을 제도(諸道)의 각 곤수(閫帥)512)  와 통수(統帥)513)  에게 널리 물었더니, 제도의 회첩(回牒)이 이제 동시에 이르렀는데 소견이 각각 다르고 또 방패선(防牌船)으로 고쳐 만들기를 청한 자도 있습니다. 총합하여 논하면 제도의 전선이 남아 있는 것은 1백 21척이고 또 귀선(龜船) 5척이 있는데, 전선을 방패선으로 고쳐 만들어야 할 것은 다만 호남(湖南)의 2척과 호서(湖西)의 4척과 경기(京畿)·해서(海西)의 각 3척뿐이므로 도합하여 12척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옛 제도를 고치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 폐단을 줄이는 데에는 오히려 조금 보탬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27일 갑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올해는 흉년이기 때문에 군병이 상번(上番) 때에 군향(軍餉)을 대기 어렵다 하여 어영청(御營聽)·금위영(禁衞營) 두 군문(軍門)의 군병을 모두 정번(停番)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인동 부사(仁同府使) 이회원(李會元)은 문벌이 낮고 사람됨이 거친데다가 이 고을에 제수되어서는 오로지 백성의 재물을 거두어들여 제 것으로 하는 일만을 힘쓰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8월 28일 을묘

이홍제(李弘躋)가 소두(疏頭)로 상소할 때에 소하(疏下)이었던 유생(儒生)인 임상극(林象極) 등이 상소하여, 이홍제와 벌을 같이 받기를 청하면서 흉신(凶臣) 김창집(金昌集)이 적신(賊臣) 신구(申球)를 붙들어 세우고 선정(先正)을 잔인하게 해쳐 사화(士禍)를 빚어 만든다고까지 말하며 그 아버지를 저버리고 임금을 그르친 죄를 바루어 만세에 빌기를 청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그 정상을 아뢰니, 임금이 봉입(捧入)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8월 29일 병진

유성(流星)이 실성(室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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